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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6』 3-1 밤의 밑바닥에 나의 눈꺼풀이



-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1)



탁.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일어났다. 나른한 몸을 가볍게 흔들어 주고, 식은 커피를 두 번에 나누어 마셔버렸다. 책상 위에는 『설국』이 나뒹굴고 있었다. 9시, 사람들이 몰려 올 시간이 다가오자 불순한 물질이 고개를 내밀고 내 가슴을 헤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콕콕, 찔러대고. 톡톡, 두드리고. 살짝, 갸웃, 뻐근하게.


의식하지 않아도 문 쪽으로 향하는 고개가 아팠다. 양 끝으로 나 있는 두 개의 문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문소리가 나는 것 같으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곤 했다. 반복되었다. 보려하지 않아도 보게 되는 짓과 돌리려 하지 않아도 돌리게 되는 짓이 수없이 반복되었다. 출근시간의 이곳은 한산하다. 찾아오는 사람도, 걸려오는 전화도 드문 시간이기에 한낮의 열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이 싸늘했다.

- 어? 오늘도 일찍 왔네? 도대체 집에서 몇 시에 나오는 거야?

제일 먼저 출근하는 김이 오른 손을 흔들며 들어왔다. 안녕, 오늘도 여전히 졸린 것 같은 얼굴로 대충 인사를 건네받았다. 아침마다 인사하는 건 너무 귀찮아. 책상 위에 올라 와 있는 『설국』을 쓰다듬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김이 들어 온 이후로 사무실은 조금 분주해졌다. 점벙점벙, 그는 사무실 이곳저곳을 걸어 다녔다. 김에게서는 걸을 때마다 소리가 났다. 물길을 걷는 것 마냥 점벙대는 소리는 그의 큰 팔다리에서부터 흘러나왔다. 오른팔과 왼다리에서 점벙, 왼팔과 오른쪽다리에서 또다시 점벙. 흡사 씩씩함 같은, 김의 점벙점벙은 자신의 열정을 알리는 씩씩함이었다. 여전히 점벙거리며 분주한 김이 어색하게 서있는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 커피한잔 할까?

그의 말에 나는 웃으며 따라나섰다.

- 집에서 몇 시에 나온 거야?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으며 김이 말했다.

- 음, 아홉시까지 출근하는 날은 보통 첫차타고 나와요.

그가 커피를 내밀었다. 따뜻한 기운이 손바닥에 느껴지자 기분 좋은 숨이 살짝 나왔다. 

- 대단해. 나 같으면 그렇게 못하는데. 어제는 몇 시에 들어갔어? 우리 마지막에 헤어진 게 열두시 넘은 시간 아니었나?

- 맞아요. 서울역에서 막차타고 갔어요. 집에 가니까 두시쯤 된 것 같았어요.

어제는 새벽까지 술을 마신 뒤 들어갔다. 정신없는 상태로 집에 도착하니 두시였다. 몸에서 나는 술 냄새와 담배 냄새에 피곤한 상태에서도 샤워를 했었다.

- 그래서인지 너무 졸려요. 자고 싶어요. 회의 빨리 끝내고 자면 안될까?

김과 나는 창가에 앉아 커피를 홀짝대고 있었다. 금요일 오전에 하는 회의는 10시에 시작한다. 물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시간에 시작된 적은 없었다. 늘 한두 시간 씩 미뤄지는 것은 기본이고, 심지어는 하루가 통째로 미뤄져 토요일 오후에 한 적도 많았었다. 10시가 다 되어 가는데도 사람들이 나타나질 않는 것을 보면 오늘도 미뤄질 터. 심지어는 괜히 일찍 나왔다는 생각마저 들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 모야, 아직도 다 안왔네. 어찌 된 겨?

강당 문을 열고 들어오는 최의 손에는 담배가 들려 있었다. 담배를 쥔 손이 분주해 보였다. 어쩌면 그는 오늘도 하루 종일 분주하게 지낼지도 모른다. 담배를 쥐었다가 핸드폰을 쥐었다가 연필을 쥐었다가 키보드를 끼고 반나절을 끙끙거리다 가방을 휙 집어 들고 훌쩍 나갈 것이다. 그렇게 훌쩍 나가버릴 최의 손에는 분주함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최가 나가버린 자리엔 쥐다 만 분주함이 스무 개 정도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최가 왔다. 여전히 분주하게.

- 안녕.

최와 김은 서로 반갑게 담배를 나눠가졌다. 양쪽에서 불어오는 담배 연기가 싫지만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저들의 담배는 늘 기분 좋게 만들었다. 살짝 베인 담배 냄새가 내 코까지 타고 들어오는 그 알싸함이, 내가 가질 수 없는 것들을 갖고 있는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것 같기만 했다.


나른했다. 그들과 함께 한 오전은 몽롱한 담배 연기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불순한 물질은 여전히 톡톡, 나불거렸다. 불순한 물질이 박힌 것처럼 예기치 않게 요동치던 마음이 또 어느 순간 툭, 터져버릴 것 같았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불가해한 방법으로 툭툭. 삶이 나를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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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6』- 그날, 나에게 일어난 일




그 날, 나에게 일어난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시작은 여느 날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오전 8시. 나는 아직 졸음이 떨어지지 않은 눈을 부비면서 사무실 문 쪽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문이 휙 열리면서 낯익은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 어? 일찍 왔네요.

키가 큰 그가 똑바로 선 자세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척 말을 걸었다.

- 뭐야, 새벽별 보기 운동하는 거야? 왜 이리 일찍 와.

- 안녕하세요.

나는 대충 인사를 건네받았다. 책상 바로 옆 거울 위 시계가 막 8시 10분을 지나려던 참이었다.

거기까지는 어제도 그제도 똑같았다. 늘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자리에 앉아 있으면, 똑같은 그들이 동시에 나타났다. 그렇지만 8시경, 그들이 가방을 들고 문 앞에 섰을 때, 나는 어제와도 다르고 당연히 그제와도 다른 감정을 맞이해야만 했다. 내일을 미리 볼 수 있다면 내일과도 물론 다를 어떤 것. 나는 먹다 만 커피를 한꺼번에 쏟아 부은 뒤, 생각했다.

뭔가 이상한 것이 내 안에서 생겨날 것만 같아.

그 뿐이었다. 밑도 끝도 보태고 빼고도 없는 그 뿐. 36의 그들이 오전 8시 경 나타나자 내 마음이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그들을 바라보는 내 눈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뭐라 말하든 어찌 되었든 8시경에 만난 그들이 자기 자리로 가 앉았고. 다시 우르르 일어나 담배 한대 피러 빠져나갔고. 바로 그 뿐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술렁거리고 요동치는 내 상태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여느 날과 다름없이 그들을 따라 강당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예전의 감정을 기억해 냈다. 너무너무 닮고 싶었던 그들의 모습과 나의 감정을 기억해냈다. 쿵쿵쿵 튀어 올랐던 가슴과 콩콩거렸던 내 발걸음을 기억해 냈다. 순간, 아찔했다.

나는 강당으로 가려던 발길을 다시 돌렸다. 저 문만 지나면 그들이 내뿜는 담배연기와 웃음과 허탈함과 열정과 그 모든 것들과 함께 할 수 있을 테지만 거기까지 갈 수가 없었다. 술렁이는 눈과 마음이 나를 다시 자리에 가 앉게 했다. 예기치 못한 감정이었다. 요동친다는 것이 이런 것이라고 다짐이라도 받듯. 크고도 단호한 그 감정은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낯설고 돌연한 어떤 이물질이 내 몸에 박힌 것이다. 불순한 물질이 박힌 내 마음은 어색했고, 뭔가 봐서는 안 될 것을 목격한 것처럼 스스로 죄스런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문득, 내가 왜 이러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그 마음을 멈추기가 힘들었다. 아침 바람은 서늘했고, 빛은 적당히 밝은 기운으로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흠, 따뜻해. 오늘은 별로 안 춥네.

옆자리로 다가오며 그들이 말을 건넸다.

-오늘 추운데요? 난 얼어 죽는 줄 알았어요.

창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따뜻하기는 무슨, 나는 이렇게나 서늘한데. 그러고 보니 벌써 겨울이 시작되려 한다. 봄에 이곳에 와서 여름과 가을을 버티는 동안 36을 달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다가 26의 겨울까지 다다랐다. 애 쓴 보람도 없이 날은 서늘했다. 날이 차가워지자 창  밖의 나무들이 따뜻한 기운을 뿌리 끝부터 끌어올리려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손바닥보다 더 큰 잎사귀들은 누렇게 탈색되어 가고 있었다. 잎을 털어낼 수록 나무들은 제 안의 열기를 뽑아 올려 겨울을 날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발끝에서부터 열기를 끌어올려 겨울을 나야 하는 걸까. 나는 왼손으로 만지작거렸던 핸드폰을 책상위에 살며시 올려놓고 바쁜 척 파일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일 없이 뒤적이는 손길이 영 어색했다. 이 공간은 온통 자판 소리로 넘쳐 났고, 몇몇 사람들은 빠르게 담배를 피기 위해 들락날락 했으며, 16개 책상 위에 올라와 있는 전화기들은 쉼 없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나는 팔목에 감긴 시계를 내려다 봤다. 9시. 시계에서 눈을 거둬 뒤를 돌아보았다.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세 명의 사람이 똑같은 포즈로 꼿꼿하게 앉아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분명 양 손은 날카롭게 자판을 쥐고 있을 터,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들의 앞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세 개의 크고 작은 등이 동시에 숨을 쉬고 있었다.

-뭐해?

뒤 돌아 멍하니 있던 몸을 돌리는데, 턱, 하고 누군가가 내 어깨를 건드렸다.

-에? 

나는 옆을 쳐다보았다. 장난기 가득한 모습의 그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고.

나는 그들의 흔들리는 손을 보며 온 몸의 감각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왜 이러지? 술렁이는 눈과 떨리는 손가락과 요동치는 마음을 또다시 느낀 순간, 눈앞에 섬광이 번쩍였다. 짧은 폭발이 내부에서 일어난 것 같았다. 이야말로 내가 알지 못하는 것.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내부에서 일어난 작은 폭발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또, 또! 무슨 일 있어? 얼굴이 안 좋아.

걱정스런 그들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비교적 온순하고 평탄하게, 소심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내가, 내부에 숨은 작은 불꽃을 그렇게 강하게 터뜨리게 될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는가. 나는 갸웃거렸다. 그런데 왜 하필 이 곳, 이 시간일까. 문득 아직도 손바닥에 미열로 남은 아까의 뜨거운 열기가 두려워졌다. 여전히 아침 햇살은 기분 좋게 비쳐들고 있었고, 책상 옆 시계는 10시를 향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10시, 책상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핸드폰이 드르륵거렸다. 나는 양손을 가지런히 비비며 핸드폰에 오른손을 갖다 댔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온 몸을 감싸고 있던 공기가 싸늘해지는 것 같았다. 조용히 슬라이드를 밀어 올리고, 문자 버튼을 꾹 눌렀다.

『......그렇다고 대답할거야. 넌 어때?』

이것이다! 나는 요동치는 마음을 또다시 느끼며 문자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메뉴버튼을 눌러 영원히 지워지지 않도록 했다. 설령 핸드폰을 버리게 되더라도 이것만은 지워지지 않도록.


......

자, 정리를 해보자. 불순한 물질이 박힌 가슴을 따로 떼어 내 구석구석 살펴봐야 할 일이다. 그 날, 내게 박힌 불순한 물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리 요동치고 있었는지 세밀하게 조사해 봐야 한다.


그 날, 오전 7시 40분이었던가. 횡단보도 옆에서 살짝 몸을 틀면 사방에서 불어오는 파란 물줄기가 가로로 긴 대형 빌딩 꼭대기 위 더 높은, 회색 빛 하늘로 스카이 스크린처럼 떠올랐다. 허공을 질주하듯 거리에서도 하늘거렸던 나의 마음은 무거운 발을 이끌고 더 높은 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차오르는 숨을 내 쉬고 사면체 커다란 상자 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깨끗하게 닦여진 도로 위에는 각양각색의 차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온 거리는 차가운 푸른빛으로 바뀌고 있었다. 어찌 보면 흡사 날카로운 칼 같은 빛이 두 눈을 강하게 찌르고 있었다. 천천히 두 발을 건물 안으로 들이밀었다. 두 눈을 쳐대던 시퍼런 빛이 발끝을 휘감고 따라들어 오려는 묵직함이 느껴졌다. 나는 정문 앞에 서서 퍼런 빛줄기를 탁탁 털어 냈다. 발끝을 감고 있던 빛줄기를 걷어 내고 문안으로 들어갔다.

지워지지 않는 문자로만 채워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심호흡을 했다. 혹시라도 또 올지 모르는 그것을 위해 핸드폰을 가지런히 주머니에 넣었다. 하나, 둘, 셋. 천천히 숨을 내쉬고 들이쉬며, 한 발 한 발 내딛었다. 살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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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6』- 공간이 내게 주는 짧은 단상


- 윤진영


시작. 


- 너 지금 뭐하고 싶어?

그녀가 물었다. 새초롬한 표정으로 하얀 손가락을 살며시 들어 귀 뒤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두 눈을 반짝였다. 콩. 콩. 콩. 반짝이는 그녀의 두 눈이 새빨간 광채를 내며 툭, 튕겨 올랐다.

- 지금?

나는 쌜쭉한 표정으로 뭉툭한 손가락을 살며시 들어 인중을 긁어 내렸다. 시커먼 먼지가 딸려 나오고, 먼지 속에 숨어있었던 찌든 냄새가 코끝을 재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쿵. 쿵. 쿵. 찌든내가 지나간 자리마다 손가락이 저려왔다.

- 나......서른여섯 살이 될래.

엄지와 검지를 세게 비비자 돌돌 말려진 먼지가 뭉치 채 딸려 나왔다.

- 서른여섯? 왜?

툭, 튕겨 오른 새빨간 광채가 시커먼 손가락에 쿵, 박혔다.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이마에 갖다 댔다.

- 응. 서른여섯 살. 내가 아는 멋진 사람들은 다 서른여섯 즈음이야. 나도 서른여섯 즈음엔 뽀대나게 살고 있을 걸?

서른여섯. 내가 꿈꾸는 세상이다. 시커먼 먼지가 딸려 나오지 않는 서른여섯 살, 찌든 내가 지나가도 저리지 않는 서른여섯 살의 손가락, 새빨간 광채 따윈 박히지 않는 서른여섯 살. 그 즈음엔 나도 내가 아는 누군가들처럼 서른여섯개의 세상에서 왁자지껄 떠들고 있을 것이다. 서른여섯의 세상을 꿈꾸니 찌든내 따윈 아무것도 아니다. 뭐, 그 땐 내 세상일걸? 그렇지 않아?


- 서른여섯......?......지랄한다.

탁. 나는 보고 있던 거울을 엎어버렸다. 새빨간 그녀의 눈동자가 탁, 엎어졌다.



요즘 나는 이상하다. 이상하다는 말을 하루에도 수십 번 내뱉을 정도로 이상하다. 왜 그럴까, 생각해 봐도 잘 모르겠다. 스물여섯이 된 후 처음으로 울어도 보고, 잘해주는 누군가에게 자꾸 어리광도 부리게 된다. 이렇게 이상해진 내가 요즘 들어 자꾸 서른여섯을 꿈꾼다. 열여덟에 스물을 꿈꾸고, 스무 살에 서른을 꿈꾼 것처럼. 스물여섯에 서른여섯의 세상을 꿈꾸게 된다. 아직 서른이 되어 보지 못한 내가 서른하고도 여섯을 더 꿈꾼다.

서른? 서른여섯? 서른이라는 경계가 무섭다. 서른이 뭐 별거라고, 생각해 봐도 아직 스물하고도 여섯밖에 안됐으니까. 서른이라는 줄 건너편 그 곳에는 뭐가 있을지 도통 알 수 없으니까. 아직 어리다고도 다 컸다고도 말하지 못하겠다. 아는 것도 무서운 것도 많은 것을 보니,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스물여섯은.

어제 오랜만에 최영미의 시를 읽었다. 최영미의 시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녀의 대표작은 자주 읽게 된다. 오래 전에 서른을 넘겨버린 최영미의 시를 서른이 되려면 4년이나 더 살아야 하는 내가 읽었다. 10대에는 스무 살이 되고 싶었고, 20대에는 서른 살이 되고 싶은 내가 시를 읽고 어른을 생각했다. 아직 어른이 되기에는 삶의 찌든 경험은 해보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아이로 남기에는 삶의 어두운 이면을 조금이라도 맛보았기에 아주 살짝 어른을 생각했다. “어른”이라는 것은 동시에 “서른을 넘긴다”라는 뜻 같다. 참 삶이 무섭다. 서른을 넘기자, 그간의 잔치는 쫑나버렸고, 옆에서 같이 울고 같이 웃던 사람들은 삶에 치여 고개 숙인 채 하나 둘 떠나버리고, 남은 것은 서른을 넘겨버린 나이뿐이다. 30이라는 숫자가 삶의 경계라도 되듯이 말이다.

내가 있는 공간에는 서른여섯 즈음의 사람들이 많다. 범접할 수 없는 위화감을 갖고 있는 이들이다. 그래서일까. 그들이 내게 보여 준 서른에서 서른여섯 즈음의 나이가 너무나 낯설다.

낯설고 낯설어서 갖고 싶을 만큼.


어쨌든 지금의 내게는 서른이라는 나이가 범접할 수 없는 그 무언가의 나이인 것 같다. 서른여섯이 되면 지금의 내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만 같다. 물론 서른여섯의 그들은 이런 내가 우습겠지만. 여전히 나는 10대 시절에 20대를 꿈꾸었던 것처럼 지금 서른여섯을 꿈꾼다. 대학을 떠나 사회로 나와 서른은 더 치열하고, 더 회색빛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고 이제 그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서른여섯 즈음의 사람들과 함께 살 부대끼며 살고 있는 이 공간의 하루하루를 낯 설은 문체에 담아 스물여섯의 내게 보내려 한다. 사랑하며 사랑하는 삶의 공간에 조그마한 관심을 표하며.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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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칠동삼





ꡒ춘칠동삼!ꡓ

오늘도 마트에서 가장 먼저 진열대 앞을 오가며 물건 나르기 바쁜 나는, 바로 옆 사내를 힐끗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춘칠동삼. 이 말은 엄마가 궁할 때마다 끌어다 붙이는 말이다. 나는 엄마가 이 말을 처음 입에 붙이고 다닐 때는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저게 무슨 말이야, 하며 궁금해하다가도 그저 시덥지 않은 인생 한탄사려니, 하며 모른 척 돌아서곤 했었다. 엄마는 무슨 말만 나오면 ꡒ그래서 인생은 춘칠동삼인거야!ꡓ혹은 ꡒ에고, 인생은 동칠춘삼이라잖어.ꡓ라며 자신이 지어낸 말을 남이 꾸며낸 말인 냥 떠들어대곤 했다. 엄마가 춘칠동삼! 외칠 때마다 저 말이 저렇게 뿌듯한가 비웃음 치던 자신이 오늘에 와 이 말을 스스로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저절로 나오는 그 말에 그저 웃기만 할 뿐이다. 엄마의 한탄사가 어느새 나한테로 옮겨져 왔는지 땀흘린 이마를 연신 닦아내면서도 춘칠동삼 중얼거리게 된다. 서늘한 가을인데도 움직이는 몸 덕분에 땀이 난다. 남들보다 더 많이 움직이고, 더 빠르게 손을 놀려야 하는 위치에 있는데다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달라는 과장의 말 때문에 쉴 틈이 없다.

ꡒ하이고마, 요롱소리 들린다! 만대 그카나?ꡓ

나는 영천여자의 말을 듣고도 모른 척 했다. 오늘은 그냥 말이 하기 싫다. 말 없이 일하다 보면 퇴근시간이 다가온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 누구에게도 쉴 틈을 보여 주고 싶지가 않다.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많은 사람들의 말소리가 내 귀를 막아 놓은 것 같다. 목장갑 낀 손으로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 냈다. 먼지 뭍은 옥시크린을 닦아내느라 시커메진 장갑에 진한 파우더 자국이 뭍은 채 나왔다.ꡐ이래서 화장하는 거 싫었는데. 땀나고 더워. 짜증나.ꡑ나는 힘껏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놀렸다. 겉으로는 낼 수 없는 불평을 뱃속에 가득 차도록 해댔다. 

박스에 가득 담긴 옥시크린 세 개를 양손에 쥐고 허리를 들어올렸다. 뻣뻣해진 허리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요사스러움으로 걸리적거렸다. 고작해야 6개월 일하다 보니 아픈 곳도 많아지고 삐그덕 거리는 곳도 많아졌다. 이제 이 짓도 끝이다. 실물 나게 닦아댔던 옥시크린도 화장하는 일도 아침마다 지겨운 연설을 듣는 일도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춘칠동삼이라더니. 내 인생의 칠 할이 봄처럼 화사할 거라는 엄마 말이 맞아 들어가는 것일까.

나는 삼일 전의 일을 기억해 냈다. 수습기간 6개월이 얼마 남지 않는 날이었다. 고작해야 삼 일 남은 날, 당연히 재 계약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나에게 과장은 계약해지란 말을 건넸다. 나는 과장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었다. 과장의 허연 얼굴은 여자들의 시선을 받을 만큼 괜찮은 모습이었다. 늘 깔끔하고 단정하고 예의 바른 듯한 얼굴은 정직을 자신의 신념으로 삼고 사는 사람 마냥 흐트러짐이 없어 보였다. 그 날도 과장의 얼굴은 단정했다. 사회생활에 회사 생활에 쪄들다 보면 어느덧 얼굴빛은 거무스름하게 변하기 마련인데, 유난히 뽀얗게 보이는 과장의 얼굴은 세월의 흐름을 비켜 나간 듯 보였다. 그에 반해 나의 낯빛은 거무스름했다. 이제 막 20대 중반으로 들어선 나의 얼굴에는 온갖 것들이 다 거쳐간 듯한 세월의 흔적이 겹겹이 쌓여 있는 것 같았다.

ꡒ이번에는 어찌 해볼 수가 없네요. 회사에서 대대적으로 신규채용을 하기로 해서, 뭐, 우리 회사뿐만이 아니라...에...뉴스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유통계 전체가 이번에 신규채용을 한다고 합니다. 우리 영업팀에는 큰 이변이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고객들 반응이 별로 안 좋아요. 더러 항의 전화도 오는 것 같고. 음..어찌 되었든 이번에는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선은 이번 달까지 일해주시고 다음에 다시 연락 드릴게요. 아, 이거, 여러분들이랑 정들었는데 이렇게 되니 아쉽습니다. 그려.ꡓ

과장의 요점은 이러했다. 신규채용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나가야 한다, 고객의 평가가 좋지 않으므로 어쩔 수 없다, 란 것이었다. 하기야 친절과 미소를 앞세워 이웃 같은 언니가 되어 물건을 팔아야 하는 우리들인데 친절하지 않다니, 그건 과장 말처럼 어쩔 수 없는 일이 맞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해도 마음은 편하지가 않았다.

ꡒ아, 진짜 웃기다아~야. 우리만큼 잘 웃고 친절한 여자들이 어디 있다고! 안 그러냐?ꡓ

나와 같이 계약해지 된 뚱뚱한 여자가 껌을 질겅 씹으며 입술을 비틀거렸다.

ꡒ언니! 혜자언니! 우리 짤렸어. 이번에는 꽤 많어. 과장이 신규채용 어쩌고 하더니 그냥 가라네. 아. 짜증나.ꡓ

ꡒ점드록 일했는데 우짜고. 가들 참말로 엄청시리 불앙타! 가뜨가나 생똥 싸게 했는데 그카나?ꡓ

영천여자는 일을 하다 말고 과장을 만나고 나온 우리들을 쳐다보았다. 영천여자의 얼굴에는 정 많은 여자의 성격만큼 안쓰러움이 가득 차 보였다.

ꡒ언니! 무슨 말이야. 내가 못 알아듣는 다고 사투리 쓰지 말랬잖아! 여기 온지 5년이 다 되어가면서 아직도 사투리냐. 짜증나. 1년 넘게 일했는데...뭐야, 정말!ꡓ

뚱뚱한 여자는 1년 넘게 이곳에서만 일했다. 사업에 실패한 남편 덕에 어린애 둘을 떼어놓고 매일 아침 출근하는 거 못해먹겠다 노래를 불렀지만 이곳을 나가고 나면 가장 아쉬운 사람은 뚱뚱한 여자였다. 이제야 조금씩 자리 잡아 가기 시작했다고 일주일 전 회식자리에서 가장 크게 웃던 여자였다. 나는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자의 얼굴에 비춰진 세월의 흔적은 까맣게 내려앉은 기미로 촘촘히 짜여져 여자의 살집을 터지게 만드는 것 같았다. 나 역시 그만두게 되었다. 뚱뚱한 여자만큼은 아니더라도 돈을 벌어야 하는 위치에 있는지라 짜증이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고작해야 삼일 전이었지만 그땐 그래도 당장 막막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옆에 있던 여자들과 장난도 치고 웃기도 하고 꾀도 부리고 했었지만 막상 마지막날이 되니 눈앞이 아득해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ꡒ니, 괘안나? ꡓ

나는 영천여자의 얼굴을 돌아보며 미소지었다. 꼭 엄마처럼 자상한 말투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가만 보니 오늘 아침만 해도 엄마는 여전히 춘칠동삼이란 말을 외치고 또 외쳤다. 자신이나 아이들이 기술과 능력을 키워서 그 덕을 백 퍼센트 봐야 평등하다고 하면서도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들어간다며 집이 무너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재능만으로는 해결 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자식들 인생을 꽉 막히게 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니 엄마에게 가장 좋은 말과 나쁜 말은 춘칠동삼이 되어버릴밖에. 인생의 칠 할은 춘(春)이요, 나머지 삼 할이 동(冬)이란 말로 이것이 가장 잘 지켜지면 좋으련만 어디 인생이 말처럼 되나, 라는 것이 엄마 한탄사의 줄거리였다. 그러니 인생은 춘칠동삼이 되었다가 동칠춘삼이 된다라는 것인데 지금 나의 인생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것일까.

시간을 보니 11시 40분이다. 마트에서 물건을 고르는 사람들 대부분이 빠져나간 한산한 시간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할 일은 내일 팔아야 할 수만큼을 체크해 놓고 창고에서 물건만 가져다 놓으면 되는 것이다. 손님들이 빠져나간 마트 안에는 오랜 시간 쌓인 먼지로 매캐한 냄새가 차 있다. 나는 휑하니 바람을 몰고 가 비상구의 창문을 열어 놓았다. 그리고 파우더를 꺼내 얼굴에 덕지덕지 발랐다. 여기서 일하는 여자라 해도 24살 아가씨였으니 집에 가기 전에 다시 화장을 고치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비록 파우더만 한 엉성하기 그지없는 화장이긴 해도 말이다. 그래도 당분간은 이 짓을 안 해도 되겠지, 란 생각에 속이 시원했다. 물론 다시 이력서를 쓰려면 열심히 발라야 하지만.


처음 이 곳에 취직되었을 때 끗발 날리게 죽여주던 기분이 떠올랐다. 일확천금을 노리고 고스톱 판에 끼어 든 것 마냥 내 양손엔 흑싸리껍질이 놓여 있었다. 한들한들 봄이 다가와 코끝에서 살랑살랑 짙은 향기를 뿜어내며 엉덩이를 흔들더니 기어이 시들시들 가버리고 말았나. 하늘 높이 치켜 든 흑사리껍질은 이제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매화와 바꿔들고 6개월을 지냈더니 어느새 싸늘한 추위가 찾아왔다.


ꡒ엄마, 내 인생 정말로 춘칠동삼인 거 맞아?ꡓ 내 인생의 봄날은 어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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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을 위한 30분





오전 9시 30분, 단정하게 조끼를 갖춰 입은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자기 자리 앞으로 갔다. 머리를 매만지고 조끼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며 일제히 웃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ꡐ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세요.ꡑ속으로 수 십 번 되 뇌이며 입술을 양쪽으로 둥글게 말아 올렸다. 흡사 두꺼비 주둥이 같은 두툼한 것들이 마흔 살 먹은 여자의 얼굴에도 스무 살 먹은 여자의 얼굴에도 투박하게 붙어 있었다. 더러 하품하는 사람들도 보였지만 검은 정장을 입고 직원들의 용모단정을 체크하며 돌아다니는 팀장 덕분에 이내 사라지고 만다. 사람들은 모두 이 시간을 지겨워했다. 손님들을 맞이하기까지 남은 30분 동안 ꡒ믿음직하고 든든한 이웃 같은 마트ꡓ를 위해 오늘 하루도 열심히 뛰어야만 한다는 것을 수 십 번 들어야하기 때문이었다.

ꡒ하이고 마, 디게 지업다.ꡓ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영천여자가 귀를 후비며 한 마디 했다. 팀 내의 인기스타답게 툭툭 내뱉는 사투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속속들이 알아서 해주고 있었다. 역시나 오늘도 영천여자는 틈을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일제히 큭큭거렸다.

ꡒ마할라꼬 웃노! 마안노무자식들..ꡓ

사람들은 영천여자의 말을 시작으로 팀장의 눈치를 보면서도 각자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지겨웠던 참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ꡒ졸리다, 그치?ꡓ

ꡒ메친년, 밤에 뭐하고 이제사 졸립다냐~간밤에 근질거렸던 일이 있었구만, 큭큭ꡓ

입에서 나오는 말의 반 이상이 욕으로 되어있다는 서른 살 여자가 내 허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ꡒ언니도, 참. 간밤에 뭔 일이 있다고! 있었으면 좋겠다. 허구한 날 12시에 끝나는데 근질거릴 일이 뭐가 생겨..하아흠ꡓ

나는 간밤에 있었을 것만 같았던 일을 상상하며 길게 하품을 했다. 정말이지 마음 같아선 아무데서나 드러누워 자고 싶었다. 12시에 끝나 택시 타고 집에 오면 돌아오기가 무섭게 자버리고 마는 요즘 생활이었다.

ꡒ삐가리같은 아들이 꼬대긴다. 쯧, 가아 눈깔 돌아가는기 봐라. 하이고 마, 불앙타!ꡓ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듣기 싫었던지 팀장은 한쪽 손에 들고 있던 서류철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족쇄가 머리 위로 올라왔다. 사람들 두 눈에 깎인 월급명세서가 왔다 갔다 했다. 저 서류철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족쇄였다. 저것에는 팀 전체 인원의 신상명세와 팀장의 눈으로 바라본 사람들의 평가가 적혀있었다. 서류철의 행방을 우리 같은 아랫것들이 알 길은 없지만 틀림없이 사원관리팀으로 넘어갈 것이다. 우리는 저 서류철을 두려워했다. 팀장의 찢어진 두 눈보다 검은 정장보다 무서운 것이 서류철임을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은 10시를 향해 가고 있다. 30분 동안 지겹도록 듣는 ꡒ믿음직하고 든든한 이웃 같은 마트ꡓ에 대한 연설은 끝날 줄을 모르고 계속 되고 있었다. 나는 머리가 울퉁불퉁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개점 시작 30분 전, 폐점 후의 30분은 우리에게 지옥 같은 시간임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왔다 갔다 하는 팀장의 눈과 손은 먹이를 낚아채는 독수리의 날카로운 발톱 같았다. 그는 단 한치의 오점도 남기지 않기 위해 사람들의 겉모양을 훑고 또 훑었다. 때로는 치마 입고 온 여자들의 다리를 훑는가 하면, 화장하는 것을 빼먹고 온 여자의 얼굴을 한심하게 쳐다보곤 했다. 오늘 그는 한심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화장 없이 맨 얼굴로 나타난 저 여자가 우습다는 표정이었다. 나를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던 그가 서류철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아마도 용모가 단정하지 않음, 정도가 적혀 있을 것이다. 날카로운 그의 손은 진흙길을 달려가는 트럭처럼 출렁거렸다. 저 서류철 속에 얼마나 많은 내가 엑스표가 되어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팀장은 다시 연설을 시작했다.

ꡒ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을 가진 여자들이 화장을 하는 것은 기본 아닌가, 저런 맨 얼굴로 사람 상대하면 불쾌해 한다는 것도 모릅니까?ꡓ

나는 그때까지 들고 있던 고개를 푹 숙였다. 깨끗하게 닦여 있는 하얀 바닥은 비가 오는 하늘처럼 부옇다. 에어컨 바람을 타고 젖은 고무 타이어 나는 냄새가 내 눈가에 달라붙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뚝뚝 떨어지는 하얀 비를 보았다. 가을비가 두 눈에 달라붙어 떨어 질 줄을 몰랐다. 아마도 스팀으로 물기를 말려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옆에 서있던 영천 여자가 손을 뻗어 내 허리를 쓰다듬었다. 검붉은 손금이 그려 있는 여자의 손은 꺾인 나뭇잎처럼 생명이 느껴지지 않는다. 남자의 손이 날카로운 면도칼처럼 사각사각 거린다면 영천여자의 손은 푹신한 솜덩이 같은 살결이 느껴졌다. 친절하고 따스한 여자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듯 꺾인 나뭇잎 같은 영천여자의 손에는 거짓이 없는 것 같았다.

ꡒ괘안타, 니도 깐지게 구루라. 뿔땅굴 나두 참아야지. 우야던둥 전디야지, 아암. 전디야 살지. 그라도 니 노박 애뭇는거 보믄 차마타.ꡓ

영천여자의 말은 섬유질처럼 푸석거리는 내 마음 속에 흡수되었다.

오전 10시, 건물 전체에 경쾌한 음악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양손을 가지런히 포개서 아랫배에 갖다 댔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사방으로 둘러 쌓여 있는 커다란 문이 일제히 열리기 시작했다. 어서오십시오. 믿음직하고 든든한 이웃 같은 ○○마트입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고운 목소리가 건물 전체를 가득 매었다. 우산을 든 손님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ꡒ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세요.ꡓ90도까지 숙여진 허리 위로 묵직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또각또각, 제각기 다른 소리를 내며 수 십 개의 신발들이 지나갔다. 오늘 하루, 우리가 봐야만 할 신발들이 얼마나 많을지 속으로 가늠해보자 헛웃음만 나왔다. 이런 거 따져 봤자 피곤하기만 하지, 뭐. 우리들은 무거운 허리만큼 체념이 빨라서 금방 일어나곤 했다.

ꡒ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세요.ꡓ



오전 8시 40분이었던가. 횡단보도 옆에서 살짝 몸을 틀면 사방에서 불어오는 검은 물줄기가 가로로 긴 대형 빌딩 꼭대기 위 더 높은, 회색 빛 하늘로 스카이 스크린처럼 떠올랐다. 허공을 질주하듯 거리에서도 자유롭게 끗발 날리던 나의 마음은 무거운 발을 이끌고 더 높은 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차 오르는 숨을 내 쉬고 사면체 커다란 상자 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깨끗하게 닦여진 도로 위에는 각양각색의 차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온 거리는 회색 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찌 보면 흡사 검은 색 같은 빗줄기가 무섭게 내려치고 있었다. 두 발을 건물 안으로 들이밀었다. 머리를 쳐대던 빗줄기가 발끝을 휘감고 따라들어 오려는 묵직함이 느껴졌다. 나는 정문 앞에 서서 머리에 묻은 빗줄기를 탁탁 털어 냈다. 화장기 없는 맨 얼굴이 걱정돼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선크림을 살짝 찍어 발랐다. 거추장스런 얼굴은 오늘도 여전히 텁텁했다. 발끝을 감고 있던 빗줄기를 걷어 내고 문안으로 들어갔다. 믿음직하고 든든한 이웃이 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왔다갔다하고 있다. 이제 막 이웃을 위한 30분이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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