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전 아직 납득가지 않네요. 임산부의 상서로운 길몽속에 이 정도의 독이 깃들 수 있다는 게요. 저분은 어떻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걸 알 수 있었나요?"
꿈에서 퇴장하기 전에 예니가 그 말에 대꾸했다.
"가족이 생긴다는 건 한 인간에게 새로운 지옥이 생기는 일이라는 걸 아니까요." -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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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솔 박미희의 김치 이야기 : 제주 김치
박미희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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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김치,를 보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동지 김치'이다. 어릴적에 늘 먹었던 동지 김치를 성인이 되면서 먹어보지 못했다. 유채로 나물을 해 먹곤 했었는데 관상용이 되면서 유채는 나물이 아니라 꽃이 되어버린 이후 시장에서 유채나물을 구하기가 쉽지 않게 된 것처럼 마트에서 김치를 사 먹게 되면서 동지 김치는 가끔 식당에서 별미로 만나곤 했다. 집에서 만들었다면 푹 익혀서 먹어도 묵은지 이상으로 맛있게 먹을 수 있는데 텃밭에 배추를 심지 않은 이상 동지를 구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동지'는 배추에서 올라온 꽃대를 일컫는데 꽃대가 올라올때까지 배추를 밭에 두고 있을 수 있는 집이 흔치않게 되어 그렇다.


이 책 제주김치는 도미솔식품의 박미희 대표가 쓴 책인데 제주에서 자라며 만들어 먹은 제주지역 김치의 옛 레시피를 살려 정리했다. 김치 양념을 잘 붙게 하고 숙성시키기 위해 풀을 넣는다고 알고 있는데 밀가루나 찹쌀을 주로 쓰고 밥으로 해도 괜찮다는 것은 알았지만 제주 전통은 메밀풀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메밀 생산량 1위가 제주라고 들었는데 역시 그래서인지 김치에도 메밀풀을 쓰는 것 같다. 


각종 김치를 만드는데 필요한 기본 재료의 설명과 제주산 재료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데 날씨가 따뜻해 메밀이나 감자도 그렇지만 무도 두번 수확을 하고 특히 겨울무는 단단하고 수분이 많고 달아 무엇을 해 먹어도 맛이 있다. 제주 돌게, 갈치, 멜 뿐만 아니라 귤로도 김치를 만들어 먹는데 해산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해조와 패각류 김치는 처음 들어보기도 하고 먹어본적도 없어서 어떤 맛일까 좀 궁금해지기도 하다. 날씨가 따뜻해 겨울 김장을 많이 해 놓고 먹지는 않아서 제철에 나오는 식재료로 김치를 만들어먹기도 하고 굳이 저장을 오래하지 않으니 김치에 젓갈을 많이 쓰지도 않는다. 


각종 김치의 레시피 책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간결하게 설명을 하고 있어서 재료 준비를 하고 소량으로 김치를 만들어 먹을 수 있게 하는데 더 알아보기를 통해 제주산 재료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알려주기도 하고, '김치 생각'을 통해 저자가 어린시절에 체험했던 이야기나 어머니 이야기, 욕심이 많아 큰 달래밭을 발견하면 친구가 볼까봐 옷으로 덮어두기도 했다는 등 제주이야기에 대해 아주 짧은 에세이를 읽는 것 같은 재미도 있어서 김치만들기와는 별개도 한번 쓰윽 읽어보게 된다. 

아아, 그리고 시장에 가게 되면 할머니들이 동지를 팔지는 않는지 살펴봐야겠다는 결심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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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인문학은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다. 우리 시대는 기술 혁신에, 저 모퉁이만 돌면 가장 시급한 문제의 획기적인 해결책이 있다는약속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러나 우리는 정체성 충돌, 이해관계 충돌,
상반된 신념을 둘러싼 케케묵은 문제들에서 비롯되어 오늘날 가장 해결하기 힘든 갈등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 갈등을해결하려면 이것이 과거 문화에 깊이 뿌리내린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인문학이 제공하는 도구를 이용해야만 한다.
과거의 문화는 새로운 문화가 자라나는 터전이다. ‘문화culture‘라는말이 농업agriculture에서 비롯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과 먼 조상을 연결하고 우리 서로를 연결함으로써 문화를 가꾸어야 한다. 그래야만 의미를 만드는 작업이 계속 이어질 수 있다. 우리는 미래 도서관이 대비하는 기후 변화뿐만 아니라 이주나 전쟁으로 인한 대규모 파괴 등 불확실한 미래와 직면할 순간을 위해 찾을수 있는 모든 문화자원을 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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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하지 않은 날
이나 소라호 지음, 권남희 옮김 / 열림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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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하지 않은 날, 아무것도 아닌 날... 이런 날의 의미가 뭘까, 라는 생각을 십여년 전에 했다면 무의미하게 흐르는 일상의 하루 그 이상은 없었을 것 같다. 그런데 나이를 좀 더 먹고,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갈 때마다 조금씩 신체기능이 떨어지고 혈액검사만으로도 알 수 있는 건강이상 수치들을 들으며 마음의 준비를 해야할 것 처럼 이야기하는 의사선생님을 만나는 날들이 많아지면서 '특별하지 않은 날'이 품고있는 일상의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5주에 한번 혈액검사를 하고 수치에 맞는 와파린 약을 받아오는 날이 이어지는 평화로움이 깨지는 순간 불안의 나날을 보내야 한다. 그런 우리에게 특별하지 않은 날은 행복한 날들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그런 결에서 우리의 삶 속에서 누구나 현실감 있게 느껴지는 일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것이 묘하게 따뜻한 미소를 짓게 된다. 젊은 시절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지만 나이들어 류대폰 사용을 어떻게 하는지 몰라 관심을 갖지 않다가 휴대폰으로도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항상 자신의 옆에 있는 아내의 사진을 찍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짧은 에피소드가 노부부의 가정에서, 초콜릿 가게에서 일하는 점원들의 이야기,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역할만 하다가 자신도 엄마에게는 사랑스러운 딸이라는 걸 보여주는 장면 등은 잔잔한 에피소드를 읽어내려가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마음을 툭 울리는 감동과 깨달음을 준다. 긴 말이 필요없는 감동의 한 장면,이 있어서 그런지 소설책이 아니라 만화 그림 컷으로 단순하게 표현하는 그 한장면이 더 마음에 확 와 닿는 것 같기도 해 만화를 읽는 느낌이 너무 좋다. 


공감이 되는 이야기들인데 그중에서도 특히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툭 내뱉은 말 한마디가 상대방에게는 상처가 될수도 있고 오해가 생겨 화를 내게 되기도 한다는 이야기가 완전 내 얘기같아서 일기장을 보듯 읽은 에피소드다. 누구에게나 다 친절할 필요도 없고 이유없이 화를 내는 상대방에게 호의를 가질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무작정 화풀이 대상이 되었을 때 내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어쩌면 그 사람에게도 화가 나는 어떤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라는 생각을 하다보면 많은 상황에서 너그러워진다. 특히 무엇보다 내 잘못이 아니야,라는 것이 가장 크다. 


"나이를 먹을수록 다양한 경험을 해서인지 지금 눈앞에 있는 것들이 무엇보다 사랑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붙인 '특별하지 않은 날'이라는 제목이 정말 마음에 듭니다. 이 책을 읽은 뒤에 소중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신다면 무척 기쁠 겁니다."(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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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에 발 담그면 나도 나무가 될까 - 식물세밀화가 정경하의 사계절 식물일기
정경하 지음 / 여름의서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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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에 발 담그면 나도 나무가 될까, 라는 문장을 발견한 순간 마음이 확 쏠렸다.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 서정적인 책 제목은 왠지 맨발로 흙길을 걸어보는 느낌, 애니메이션 토토로에 나온 메이와 사츠키가 두 손을 모아 힘껏 하늘로 손을 뻗을때마다 새싹이 쑤우욱 올라오는 느낌과 같은 그런 싱그러움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 책은 세밀화가 정경화의 에세이집으로 고향의 숲 속과 마당의 화단에서 만나게 된 사계절이 식물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는 건강을 잃게 되었을 때 고향마을의 숲 속을 운동삼아 산책하면서 무심히 지나치던 식물에 관심을 갖게 되고 계절마다 다른 꽃이 피는 것을 보며 세밀화를 그리게 되었다고 하는데, 세밀화를 그리면서 더 자세히 살펴보게 되니 또 이전에는 무심코 지나치며 보지 못했던 식물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늘 푸르고 변함없는 소나무라 인식하지만 소나무는 2년이 지난 잎을 떨구고 새로운 잎을 내고 있는데 그 시간차의 변화를 세세히 보지 못하고 있어서 늘푸른 소나무처럼 보인다고 한다. 소나무는 또한 열매도 2년에 걸쳐 키워낸다고 하는데 그러한 사실 이상으로 놀라운 것은 그 열매를 추위에 노출시켜 추운 겨울을 지내고 나야 더 건강한 열매가 되는 것을 관찰하고 그 모습에서 사유를 끌어내고 있는 저자의 글이 더 마음에 남는다. "어떤 나무에겐 잎을 떨구고 겨울잠을 자는 것이 최선이나 침엽수들에겐 잎을 달고 겨울을 살아내는 것이 최선의 삶인 것이다."(35)

반면에 또 어떤 나무들은 애써 지켜낸 잎도 놓아야 또 다른 성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나무처럼 우리도 각자에게 맞는 최선의 삶이 있음을, 때로는 미련없이 버려야하는 삶의 자세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짐작도 할 수 없는 혹독한 야생의 삶을 나무들은 고비마다 지혜로운 방법으로 묵묵히 견디고 살아낸다"*134)


자연속에서 삶의 철학을 배우고 계절마다 피어나는 이쁜 꽃들의 세밀화를 담아내고 있는 저자의 글과 그림은 천천히 읽고 보고 느끼며 되새기게 된다. "여전히 오늘이 처음인 내게 또 하나의 빛깔을 만들어낼 하루가 시작되었다. 주어진 하루하루 작은 조각들을 모아 아름다운 단풍처럼 물들어가고 싶다"(169)는 시의 언어로 표현된 문장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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