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린이한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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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어나가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몇번씩이나 끊고 또 끊어서 읽어나가다 복락원의 장까지 다 읽었다. 문장문장에 담겨있는 표현은 상투적이지 않고 촌철살인같은 의미를 전해주고 있어서 또 다른 감탄을 자아낸다. 이런 표현들이 책의 내용에 담겨있는 것과 상반적으로 다가와 문학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책은 다 읽었고 마음속에 맴도는 말들은 많지만 뭔가 하나의 문장이라도 꺼내기는 쉽지 않다. 책을 읽을 때 제목에 대해서는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인데도 자꾸만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이라는 제목이 신경쓰인다. 그녀에게 첫사랑은 낙원이긴 하였을까? 한동안 뭔가 생각의 정리도 되지 않고 작가는 자전적 소설이라 알려진 이 글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에 대해 심각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며칠 전 티비를 보다가, 지인의 열살짜리 딸을 성폭행했는데 폭행이 아니라 그 아이가 자신에게 동조했다는 주장을 했다고 해서 내가 지금 저 이슈를 잘못이해하고 있나? 하며 다시 봤다. 10살짜리 아이가 그 이후 일상생활을 하고 심지어 자신에게 게임친구톡까지 보냈다고 하는데 티비에 출연한 패널들이 마구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런 의미없는 행위 하나로 아이가 어른의 성폭행 이후 별다른 변화가 없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거나 큰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아이가 좋아서 자신과 함께 한거라고 하니 내 입에서 저런 미친놈 소리가 나오는데 패널들이 마구 화를 내 줘서 참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멋모르고 성폭행을 당한 아이가 겪어야 하는 육체적인 상처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상처에 대해서 아무리 말을 해도 완벽한 치유가 되기는 힘들다. 그 아이는 지금 어찌 지내고 있을까...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은 그렇게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성폭력의 경험이 있는 작가 자신의 마음을 투영해 쓰여진 글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답답함이 지속되었는데, 실락원과 복락원의 의미가 더 크게 느껴져 책을 읽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이런 것으로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책 속의 문장을 다시 읽어보며 작가의 안타까운 죽음에 애도를 표할뿐이다.

 

"뭐 이런 세상이 다 있어요? 어째서 피해자가 입 다무는 걸 교양이라고 해요? 어째서 남을 때린 사람이 광고에 나오죠? 정말 실망스러워요. 언니에게 실망한 건 아니예요. 이 세상이든 인생이든 운명이든 아니면 신이라고 부르든 뭐라고 부르든 정말 형편없어요. 요즘은 소설을 읽다가 인과응보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울음이 나와요. 세상에 아물 수 없는 고통이 있다는 걸 사람들이 인정했으면 좋겠어요. 아픈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이 제일 싫어요. 이 세상에 한 사람을 완전히 파멸시키는 고통이 있다는 걸 사람들이 인정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모두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같은 서정적인 결말이 싫어요. 왕자와 공주가 결국에는 결혼하는 해피엔딩이 혐오스러워요. 그런 긍정적인 사고가 얼마나 세상에 영합하는 비열한 결말인지! 그런데 내가 그것보다 더 원망하는 게 뭔지 알아요? 차라리 내가 세속에 영합하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차라리 내가 세상의 이면을 본 적도 없는 무지한 사람이면 좋겠어요"(267)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일말의 상상력도 없었다. 돈과 권력을 가진 남자와 젊고 예쁜 불륜녀, 눈물을 흘리는 조강지처의 조합은 자세히 들여다볼 것도 없이 황금시간대 막장드라마 속 스토리로 치부되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죽음보다 더 끜찍한 고통이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걸 부정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작디작은 평화가 너무 이기적으로 보인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도 나도 앞다투어 자신을 '루저'라고 칭하는 시대에 진정한 루저인 여자들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아무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이런 고통과 행복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사람들은 작은 행복을 누리며 입으로는 작은 고통을 외치고 있다. 누군가의 적나라한 고통이 눈앞에 다가오면 그들의 안락함은 비루해지고 고통은 가볍게 보인다.(282)

 

넌 아직 열여덟 살이야. 선택할 수 있어. 이 세상에 소녀를 강간하며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모르는 척 살 수 있어. 강간당한 소녀가 있다는 걸 모르는 척 살 수 있어. 쓰치라는 아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모르는 척 살 수 있어. 다른 누군가와 공갈젖꼭지와 피아노를 공유한 적 없고, 다른 누군가와 똑같은 취향과 생각을 가진 적이 없는 척 살 수 있어. 부르주아의 평화롭고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어. 정신에 걸리는 암이 있다는 것도, 쇠 울타리 안에 정신암 말기 환자들을 모다둔 곳이 있다는 것도 모르는 척 살 수 있어. 이 세상에 마카롱과 핸드드립 커피 수입산 문구만 있는 척 살 수 있어. 하지만 넌 쓰치가 경험했던 모든 고통을 겪고, 쓰치가 그 고통에 저항하기 위해 쥐어짜낸 모든 노력을 따라할 수도 있어.  ......  (319)

 

누구에게든 이유가 있어. 남을 강간한 사람에게조차 심리학적, 사회학적인 이유가있어. 이 세상에서 아무런 이유도 필요하지 않은 건 오직 강간당하는 것뿐이야. 넌 선택할 수 있어. 사람들이 쉽게 내뱉는 동사들처럼 내려놓을 수도 있고, 뛰어넘을 수 있고, 벗어날 수도 있어. 하지만 넌 그걸 기억할 수도 있어. 네가 그걸 기억한다면, 그건 너그럽지 못해서가 아니야. 이 세상 누구도 그런 일을 당해서는 안되기 때문이지.(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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