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12월 16일

나는 일기 쓰는 것을 더 이상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여기에서 나를 확인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만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109쪽)


1912년 2월 25일

오늘부터 일기를 꼭 쓸 것! 규칙적으로 쓸 것! 포기하지 말 것! 설령 아무 구원도 오지 않더라도, 나는 언제라도 구원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고 싶다. (307쪽)

카프카도 이런 다짐을 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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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엔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전후로 하여 ‘욕망과 폭력의 제도화’가 이루어졌다. 이미 민족적 한은 개인과 집단의 욕망과 투쟁의 소용돌이가 집어삼켰다. 국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냉혹한 현실에 대한 기억은 훗날까지 이 시기에 대한 비판을 ‘대한민국을 부정하는가?’라는 추궁을 낳게 했다. 그런 점에서 아직 우리는 1940년대의 연장선상에서, 그것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채로 살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1948년에 확실하게 그 진면목을 보여줄 ‘반공의 종교화’는 향후 수십년간 대한민국을 사실상 지배하는 유일 신앙으로 군림하게 된다. 다른 정통 종교들도 그 유일 신앙에 합류하거나 그걸 받아들임으로써, 대한민국은 사회적 갈등의 비용을 원천적으로 제거하면서 국가주의적 경제 번영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지금도 여전한 이러한 현실을 목격하면서 우리 사회의 지적, 정신적 발달의 지체 현장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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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로서 내가 한 일은 원래 거기 있었던 사람들의 요구를 공간으로 번역한 것이다. 


- 정기용 지음, 《김응의 건축》, 현실문화, 2011


건축은 건축가와 건축주와 건축물이 일체를 이루어야 한다. 어느 것이 우위에 있고, 어느 한 가지만이 살아남아서는 안 된다. 

건축은 삶을 위한 것이다. 인간은 정착하면서 주거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동굴이든 움막이든 주위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살 곳은 안전과 편리함이 요구되었다. 


삶의 문제가 건축의 방향을 결정한다. 

과연 그럴까? 

건축이 삶의 방향을 결정하기도 한다. 

양자의 상호 영향과 수용은 어떠할까? 


건축가 정기용이 행한 무주프로젝트는 삶과 공간의 상호 작용이다.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꽤 긴 기간에 걸쳐 진행한 이 작업은 건물 몇 개 짓고, 공간 조성하는 차원이 아니다. 

특히 공공건축이거나 농촌의 문제라면 어떨까? 그리고 그 건축이 땅의 풍경과 필연적으로 만나야 한다면 어떻게 형상화시켜야 할 것인가. 


개인 건축이라면 또 어떨까. 누구나 자신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를 바란다. 진정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 가운데 하나도 자신이 살 곳이다. 개인의 문제이지만 또한 공동체의 문제가 되기도 하는 것이 여기에서 생겨난다. 그래서 생긴 말이 "따로 또 같이"이다. 


모든 문제의 답은 멀리 있지 않다. 자신들이 몸담고 살고 있는 곳에 있다. 거기에서 문제를 던지고 답을 구해야 한다. 정답이든 오답이든 모든 답은 현재에 있다. 현재의 모습이 형편없을지라도 거기에서 새로운 답을 찾아야 한다. 

어쩌면 그것이 건축가의 숙명이기도 한 '공간으로의 번역'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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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었다 녹았다 눈보라 친다

흔들리는 명태들이 덕장에서 부풀어 오르기를 거듭하며

마른 빨래처럼 부드러워진다


- 박남준, <황태와 나>(1~3행), 시집 《중독자》, 펄북스, 2015


청춘이었을 때는 몸이 마음보다 빨랐다.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보면 이미 한참 행동하고 있었다. 내 발은 길과 닮은 점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살펴보면 길 위에 있곤 했다. 어쩌면 그걸 즐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주 길 위에 있었고, 길 위에서는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자유로운 것은 몸이 놓인 위치가 아니다. 아무리 몸을 자유롭게 부려도 몸 스스로 자유를 누리지 못할 때도 많다. 근래 몇 년 동안 자주 '쉬고 싶다'고 반복적으로 되뇌었지만 정작 시간이 주어졌을 때 몸은 제대로 쉴 줄 몰랐다. 


한 달쯤 시골에 있었다. 어느 날, 담장 아래 앉아 봄 햇볕을 쬐었다. 존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았다. 그저 볕이 하도 좋아 나를 말리고 싶었다. 젖은 내부를 꺼내 가만히 널어놓으면 뽀송뽀송하게 마를 것만 같았다. 그러면 그동안 나를 무겁게 하였던 습기들이 다 걷어질 것 같았다. 


나를 무겁게 하는 것들이 무엇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별 것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참 무겁고 답답하고 눅눅했던 게 분명하다. 그걸 잊자고 한 건 아니었다. 잠시나마 홀가분할 것 같아서 그랬다. 


산다는 게 궂은 날과 맑은 날의 반복이다. 가급적 맑은 날이 많으면 좋은 게 당연지사. 그러나 사람일이라는 게 그리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궂은 날, 맑은 날이 교대로 와 주면 그나마 낫다. 아예 작심하고 궂은 날만 주야장천 이어질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숨 쉴 틈은 있기 마련.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부풀어 오르며 숨구멍이 열린다. 부드러워진다. 삶의 이치다. 


지금도 햇볕 좋은 담장 아래 앉아 나를 말리고 싶다. 나도 "마른 빨래처럼 부드러워"진 몸과 마음을 갖고 싶다. "햇볕이 어디 꼭 바깥에만 있겠는가" 그리 말한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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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감자와 가지를 먹는 까닭은 녹말로 배를 채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녹말 분자의 화학결합 속에 감추어진 태양 에너지를 이용해서 생존하기 위해서다. 결국 우리는 햇빛을 먹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이정모,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바틀비, 2018, 27p


아들에게 읽어준 <프레드릭>(레오 리오니, 최순희 옮김, 시공주니어, 2013)이라는 책이 있다. 헛간과 곳간이 가까운 돌담에 사는 다섯 마리 들쥐들의 얘기이다. 그 중에 프레드릭은 겨울을 나기 위해 옥수수와 나무 열매와 밀과 짚을 모으는 대신 햇살과 색깔과 이야기를 모은다. 한겨울이 되어 곡식도 떨어지고 추위에 떨 때 프레드릭이 햇살과 색깔과 이야기로 다른 들쥐들을 환하고 따뜻하게 해준다. 


우리는 먹거리를 통해 햇빛을 먹기도 하지만 상상과 책과 놀이와 노래와 그림과 여행으로도 햇빛을 모으고 먹을 수 있다. 이때 햇빛은 태양 에너지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내면을 비추는 빛일 것이다.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의 저자인 서울시립과학관 이정모 관장은 "해가 없으면 식물도 없고 그러면 우리도 없다. 아! 고마운 햇빛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도다!"라며 햇빛의 고마움과 소중함에 찬사를 보낸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햇빛이 너무 세면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뜨거운 여름에는 식물도 쉬어야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기에 농부 또한 쉬어야 한다. 

"하지만 직장인들은 쉬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유급휴가 일수가 너무 적다. (...) 어쩔 수 없다는 핑계는 대지 말고 적극적으로 쉴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야 한다. 창의성은 심심할 때 나온다."(28p) 

나는 이런 결론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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