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외경(外景)을 통한 내정(內情)의 표출’이라고 말해왔다. 외경이 개입되거나 반영된 의식과 정서의 언어적 표현의 완성도가 중요하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故 오규원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이러한 인식에 반(反)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정이나 의식의 반영 혹은 개입이 없이도 얼마든지 외경만으로 풍요로운 시의 향연을 누리게 해준다. 그의 향연에 참석하다 보면 시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된다. 의식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하고 외경만을 언급함으로써 오히려 더 깊은 심회와 내정을 배후에 펼쳐 놓는다. 관찰시라고도 할 수 있는데, 사물의 현상이나 대상을 묘사로만 전개한다. 이러한 시적 방법론을 뛰어나게 구사한 시인들도 여럿 있다.
시집 『두두』(문학과지성사, 2008년)에 수록된 시편들은 오규원 시인의 독특한 시세계를 형성한다. 시가 짧아지고, 짧아진 만큼 투명성과 여백을 확보하였다. 먹을 아껴 쓰고, 단 몇 개의 필획만으로 완성한 초솔한 문인화 진수를 보는 느낌이다. 심원한 문인화 세계를 형성한 작가들을 보면 만년으로 갈수록 획을 절제하고 여백을 최대한 운용한다. 화려한 채색 대신 먹을 주조로 하고, 담묵이나 농묵보다 갈필을 선호한다. 고졸한 표현은 서화(書畵)의 진수가 졸박(拙樸)함에 있다는 동양서화론의 실천적 결과물이기도 하다.
오규원 시인 1주기를 맞아 출간된 유고시집 『두두』에 수록된 시편들은 그의 엄격한 시창작 태도가 그대로 살아 있다. 다만 칼날 같은 언어 구사보다는 한결 투명성을 지닌 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나이가 들면서, 혹은 죽음을 예감하면서, 마치 생의 뒤편이 어떻게 장식되어야 하는가를 알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한 시편들이 주는 감동은 생각보다 오랜 여운으로 자리하였다.
시 「부처」는 1연 12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교적 짧은 시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집에 수록된 다른 시편들에 비해서는 긴 편에 속한다. 경주 남산에서 만난 수수한 부처상을 이만큼 서서 담담하게 묘사한다. 해학적인 여유까지 엿보인다. 거리가 주는 심적 여유로움일 수도 있겠다. 시인 자신의 내면 정감의 개입을 차단하고 단지 사물 현상을 옮겨 전할 뿐이다.
물론 아무리 내정의 개입을 막고 작가의식의 반영을 차단한다고 해서 시인의 성향과 사유와 시선과 시적 교감이 모두 막아지겠는가. 어차피 시인의 눈에 의해 걸러져 선택된 대상이고, 시인은 그 대상에서 시적 요소를 발견한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규원 시인은 어설픈, 과잉된 감정의 개입을 막고 최대한 형상의 묘사만으로 승부하려 한다.
남산의 한 중턱에 부처가 서있다
나무들은 모두 부처와 거리를 두고 서있고
햇빛은 거리 없이 부처의 몸에 붙어 있다
코는 누가 떼어갔어도 코 대신 빛을 담고
빛이 담기지 않는 자리에는 빛 대신 그늘을 담고
언제나 웃고 있다
<오규원 詩 「부처」 1~6행>
제목이 「부처」이기도 하지만 “남산의 한 중턱에” 서있는 불상을 시인은 그냥 “부처”라고 부른다. 불상이 곧 부처의 형상이지만 시인은 이러한 전환 장치 대신에 곧장 부처로 진입한다. ‘불상’의 외형이 아니라 부처의 진면목을 얘기하겠다는 의도이다. 미술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뛰어난 예술성을 지닌 불상들의 엄정한 범주보다는 허물어지고 허술한 구석을 맘껏 지닌 부처의 불성에 단박 다가선 것이다. 지극히 단순한 명사 하나로 지은 제목은 “보라, 나는 부처에 대해 직접 시를 쓰고자 한다.”는 선언과도 같다. ‘부처’, 단 두 자의 명사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크고 넓은 세계를 내포한 단어는 드물다.
“남산의 한 중턱에” 서있는 부처는 외따로 떨어져 있다. “나무들은 모두 부처와 거리를 두고 서있”다. 아마도 불상 주변을 정리하여 공터가 생겼지 싶다. 그런데 시인은 단지 그렇게 여기고 넘어갈 법한 것에서 탁월한 시적 감각을 포착해낸다. 이 “거리를 두고 서있”는 나무들은 현장의 사실 묘사이기도 하지만 이제 ‘거리’에 대한 시인의 치밀한 의중을 전개하기 위한 포석으로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앞에서 언급하였던 시인 자신의 의식 개입의 차단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싶기도 하다. 나무들은 부처와 거리를 두고 서있는 반면 “햇빛은 거리 없이 부처의 몸에 딱 붙어 있다”. 그 밀착도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부처 몸의 부재를 메워주기도 하고, 때로 조금의 여유로서 그늘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그런데 “부처의 몸에 붙어 있”도록 부처가 햇빛에게 허락했다고 보았다. 그래서 부처는 누가 떼어간 “코 대신 빛을 담고/ 빛이 담기지 않는 자리에는 빛 대신 그늘을 담고/ 언제나 웃고”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있던 것이 사라지면 다른 것으로 메우고, 그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자리는 또 다른 것으로 자리하게 하는 열림과 무소유의 경지를 읽어낸 것이다. 사물과의, 만상과의 이 도저한 밀착도라니! 시를 읽는 이 마음속에 딱 붙어 선다.
곁에는 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고
지나가던 새 한 마리 부처의 머리에 와 앉는다
깃을 다듬으며 쉬다가 돌아앉아
부처의 한쪽 눈에 똥을 눠놓고 간다
새는 사라지고 부처는
웃는 눈에 붙은 똥을 말리고 있다
<같은 시, 7~12행>
부처 곁에는 마치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라도 하는 양 “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다. 결코 많지 않아 “드문드문”한 그들은 진정으로 부처님을 따르고 경외하는 이들이 아닐까. 한없이 고요하고 안정되어 보이는 이러한 구도에 느닷없이 “지나가던 새 한 마리 부처의 머리에 와 앉는다”. 예기치 않은 장면이지만 지금까지의 상태를 흩뜨려 놓을 정도는 아니다. 그렇게 하길 허락한다. 그래도 감히! 앉는 것을 넘어서 심지어 “깃을 다듬으며 쉬”기까지 한다. 그것도 모자라 햐! 이놈 봐라, 불경스럽게 아예 “돌아앉아/ 부처의 한쪽 눈에 똥을 눠놓고 간다”. 그것까지도 허락하는 부처시다. 대자대비의 부처는 결코 멀리 있지 않다. 빛으로 없는 몸을 메우고, 찾아오는 이의 날개를 쉬게 하는 우리 곁에 딱 붙어 서있는 부처시다. “한쪽 눈에” 눠놓고 간 똥까지도 말리고 있는 부처시다. “웃는 눈”으로.
해학과 유머와 여유가 이토록 감동적으로 그려진 시가 얼마나 많이 있을까. 오규원 시인은 어쩌면 미리 알고 있었을, 얼마 남지 않은 생의 마지막 내면을 이렇게 보여준 건 아닐까. 언어에 대해서 엄정할 대로 엄정하여 절대로 넘치는 수사로 치장하길 경계해 왔던 오규원 시인의 시어조탁 자세는 구도자의 모습을 닮아 보였다. 그러한 자세를 허물지 않으면서도 내적으로 오히려 더 크게 열린 것을 볼 수 있다. 맑고 시원한 웃음 한 자락이 마음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