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행위가 마치 수행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마음의 때를 벗기는 일이 구도의 첫걸음이라고 한다면 생활 속에서 종종 빠져드는 일삼매 역시 수행의 한 방편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 적 있지 않은가. 육체적으로는 힘든 일임에도 불구하고 온몸 기울여 매달리다보면 마음 깨끗해지는 일. 어쩌면 손빨래도 그 가운데 하나이지 싶다. 세탁기가 다 빨아주는 요즘이야 제대로 못 느낄 수도 있겠지만 날씨 좋은 날, 큰 대야에 묵은 옷가지들을 넣고 주물러 빨다보면 옷의 때를 없애는 것만이 아니라 머릿속, 마음 속 때마저 지우는 느낌이 들곤 한다.

함민복 시인은 1995년 여름 한 철을 고창 선운사 암자에 머문 적이 있다. 이 시는 그 무렵 썼지 싶다. 시 「東雲庵·1」(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창비, 1996)은 철저하게 관자(觀者)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시인은 이만큼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지만 그 대상이 곧 시인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혹은 독자 자신의 행위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바위 그릇에 물 받아 놓고
스님 옷을 공양주 보살이 빤다

 

마음에 묻은 때야
염불과 經으로 씻지만
옷에 묻은 때는
물[水]보살의 힘을 비는 수밖에 없나보다
     <함민복 詩 「東雲庵·1」, 1·2연>

 

그릇처럼 움푹 패인 바위에 물을 받아놓고 빨래하는 공양주 보살을 시인은 무던히 바라보고 있다. 이 단순한 행위에서 수행의 본질, 삶의 근원, 인간 보편성을 직관적으로 읽어내는 것이 시인의 눈이고 보면 놀랍다.
빨래하는 장면을 보면서 시인은 마음에 묻은 때는 염불과 경(經)을 통해 씻어내야 하지만, 옷에 묻은 때는 자연의 힘을 빌어야 한다는 단순 명쾌한 사실을 느낀다.
세상 만물에는 모두 불성(佛性)이 깃들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생활 속에서 자연스레 일어나는 일들 하나하나가 불성의 자비 베풂이 아니겠는가.

 

       

 

목탁 소리
빨랫방망이 소리

 

저렇게 때려대서야
겁나,
도망가지 않을 때가 어디 있겠나
    <같은 詩, 3·4연>

 

목탁소리는 마음의 때를 씻는 소리, 빨랫방망이 소리는 옷의 때를 씻어내는 소리로 구분지을 수도 있지만, 이제 구태여 구분지을 필요는 없다. 둘 다 때를 씻어내는 마음속에서 ‘염불’이 되고 ‘경’이 된다. 내가 너가 되고, 너가 내가 되는 피아(彼我)의 구분이 없는, 마침내 시인의 심중으로 분리되었던 ‘소리’들이 하나로 들어선다.
4연은 위트감각이 돋보인다. 함민복은 뛰어난 직관력뿐만 아니라 이를 반짝이는 표현으로 바꿔놓는 탁월한 언어감각도 지닌 시인이다. 위트 있는 표현은 시적 재미를 부여하는데, 시인의 시들에서 금알갱이처럼 반짝이는 그러한 시구들을 종종 만난다.
4연의 너스레는 얼핏 가벼워 보이지만 앞에서 이루어진 통찰의 결과를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목에 힘주지 않고 일부러 유머러스하게 표현해낸 점이 시인의 높은 공력이다. 마지막 연에서는 더욱 빛을 발한다.

 

       

 

뒷산 푸른 나무, 붉은 흙탕물 나도록 몸 씻는
장마철
낙뢰 소리 서늘하다
    <같은 詩, 5연>

 

이제 시간이 바뀌었다. 장마철 햇빛 반짝 나던 어느 하루, 공양주 보살이 빨래하던 장면에서 출발하여 장마철 일상으로 이동하였다. 시인의 시적 감수성은 “뒷산 푸른 나무”마저 몸 씻는다는 것에 가닿는다. 푸른 나무는 “붉은 흙탕물 나도록” 몸의 때를 씻고 씻는다.

장마철 붉은 흙탕물이야 계곡의 흙이 빗물에 씻겨 내리면서 생겨난 현상일 테지만, 시인은 뒷산에 가득 찬 푸른 나무들이 몸을 씻기 때문으로 읽은 것이다. 푸름과 붉음의 극적 대비, 그런 장마철 하늘에서 떨어지는 낙뢰 소리가 깨달음처럼 시인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시를 읽고 난 후의 내 가슴도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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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현대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찰 가운데 하나로 운주사를 꼽을 수 있겠다. 감동적인 창건설화와 깊은 불교사상을 지니고 있지 않은 사찰이 어디 있을까마는 운주사 산과 계곡의 천불천탑 조성설화는 어느 것보다도 드라마틱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민중적 백그라운드는 새 세상에 대한 간절한 염원과 결부되면서 어느 시대에나 연결되는 묘한 상징성을 지닌다.

역사 이래로 억압과 소외와 수탈로부터 자유로운 민중이 었었던가. 그 민중은 시인 누구에게나 가슴 저 밑바닥에 자리한 오랜 연인이자 잊지 못할 첫사랑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대흠 시인의 시「천년 동안의 사랑」(시집 『귀가 서럽다』, 창비, 2010년)을 그런 도식적 해석과 상징성 부여로만 이끌어 가고 싶지는 않다. 이 시는 그런저런 생각 다 버리고 그냥 소리 내어 읽어 보면 가슴 저린 사랑의 연시, 이런 것이 아름다운 한 편의 서정시라는 사실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긴 시편을 끌고가는 잔잔한 어투에서 사랑하는 이의 마음이 다칠까봐 어루만져 주는 품새, 힘들게 산을 오르는 하이힐 연인의 손을 잡아 주기도 하고, 자신의 보폭을 일부러 줄이는 마음도 엿볼 수 있다.  그런 시인의 마음이 왜 내 마음 같아지는가. 나만 그러할까. 마음 절절한 사랑 한 번 가져보지 못한 이 누가 있겠는가. 사랑해본 사람치고 그 사랑이 ‘천년 동안의 사랑’이 아니었던 이 누가 있겠는가.

이대흠의 「천년 동안의 사랑」은 1연 43행으로 이루어진 시이다. 비교적 긴 시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함 없이, 오히려 오래고 오랜 얘기에 깊이 빠져들었다가 문득 깨어나듯 가슴 아래께에 찡한 통증이 오는 시이다.

    

처음으로 와보네, 라는 그녀와
운주사에 갔네 빨리 온 찬바람에 말라 쪼그라진 나뭇잎들
잎들은 저마다 곱게 물들길 원했을 것이나
계절은 참혹한 운명을 선사하였네
그래도 끝끝내 제 상처를 다스려 가을을 물들인
감잎을 보며 그 감잎처럼 저물어가는 그녀에게
사랑을 말하진 못했네 노을 같은 측은함으로 나
그녀의 손을 잡았을 뿐 언제 지은 절인지
누가 지은 절인지 알 수가 없어
더 믿음이 가는 돌부처들 지나 와불 뵈러 가는 길
하필 머슴부처가 뭐냐고 부처도 주인 있고 머슴 있냐고
우리는 동시에 이맛살을 찌푸렸네
       <이대흠 詩 「천년 동안의 사랑」, 1~12행>

“처음으로 와보네, 라는 그녀와” 시인은 운주사엘 간다. 32행의 ‘하이힐’로 유추해 보건데 아마도 시인이 먼저 운주사에 가보자고 제안했을 것이다. 또한 운주사행이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것도 분명해 보인다.

왜 그곳엘 가자고 했을까? 직접적인 이유를 일러주기보다는 주변 상황으로 조금씩 조금씩 드러내준다. 그녀의 현재는 “빨리 온 찬바람”의 계절, 운주사 나무 모습으로 대신 설명된다. 그녀와 시인의 사랑은 “곱게 물들길” 원한 나뭇잎과 같았으나 “참혹한 운명을 선사하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제 상처를 다스려 가을을 물들인/ 감잎”처럼 참혹한 운명의 상처를 다스려 자신을 물들인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시인은 차마 “사랑을 말하진” 못한다. 대신 “노을 같은 측은함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을 뿐” 무엇도 알려줄 수 없어 다만 “와불 뵈러” 가자 한다.

왜 “노을 같은 측은함”일까? 무슨 사연으로 인해 헤어지게 된 두 사람의 이별이 마지막 스러지는 빛의 잔상, 잔영인 노을만큼 마음 슬픈 색깔이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는 40행에서 비로소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가는 길에서 “머슴부처”를 만나고, “하필 머슴부처가 뭐냐고 부처도 주인 있고 머슴 있냐고” 동시에 말하며 “이맛살을 찌푸”린다. 둘의 마음이 일치한다. 와불 뵈러 가는 길, 누구도 먼저 속의 말을 하지 못하고 이러저런 다른 얘기들을 했을 테고, 마침 “머슴부처”를 만나자 그런 말을 동시에 했을 것이다. “머슴부처”는 ‘머슴인 부처’가 아니라 이 땅 ‘머슴들의 모습을 한 부처’이리라. 가장 헐벗고 가장 낮고 괴로운 머슴들을 구재하기 위해 오신 부처가 아니실까. 그걸 모를 리 없는 두 사람이지만 어색한 분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의도로 표면상의 이름이 주는 못마땅함을, 그것도 동시에 거론하였던 것이다. 아무튼 두 사람은 그렇게 와불에 이른다.

   

나뭇잎 몇 덮고 누운 와불은 말이 없고
천년을 합궁하고 있는 와불을 보여주려
그녀의 손을 잡고 높은 곳으로 끌어올릴 때
나는 잠시 와불이 되어 그녀를 이불 속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네
아주 잠깐의 천년 그녀는
부론 폐사지에서 보았다는 느티나무 이야기를 하였네
처음엔 너럭바위였다고 그러나 손톱으로 두드려보니
텅 터엉 목어가 되어 울더라고
천년 세월이란 나무가 돌이 되는 시간이라고 하였네
오래된 나무의 뿌리는 누군가의 속울음으로 다 받아들여
그렇게 검어진 것이라고 쓴 적이 있네
그 뿌리 천년의 세월을 다 받아들이면
돌이 되겠지 저렇게 캄캄히 누워 일어나지 못하는
잎 내지 못하는 돌이 되겠지
나는 천년 전의 기억을 떠올려보았네
나무의 가지들처럼 엉킨 기억의 끝 어디쯤에
천년 전 기억이 맺혀 있을 것인데
가슴이 조금 뛰었을 뿐 그녀 얼굴이 아른했을 뿐
선명히 떠오르지 않았네
       <같은 詩, 13~31행>

와불은 “빨리 온 찬바람에” 떨어진 “나뭇잎 몇 덮고” 말없이 누워있다. 시인은 “천년을 합궁하고 있는 와불을 보여주려/ 그녀의 손을 잡고 높은 곳으로 끌어” 올렸고, 이 행위는 그녀에게 와불을 보여주려는 행위인 동시에 잠시 와불이 된 시인의 이불 속으로 그녀를 끌어들였던 것이기도 하다.
14~15행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된다. 13행으로 미뤄보건데 두 사람은 이미 “나뭇잎 몇 덮고 누운” 와불을 친견하였다. 그런 후 시인은 누운 와불 모습이 전체적으로 다 보이는 “높은 곳으로” “천년을 합궁하고 있는 와불을 보여주려” “그녀의 손을 잡고” 끌어올리는 것이다. 반면 14~15행은 13행에서 친견한 와불을 왜 보여주려 했는지를 언급하고 바로 그 와불이 누워있는 “높은 곳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끌어올린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시의 전개 순서상 앞의 것이 더 가까워 보이지만 말의 뉘앙스와 시적 느낌은 뒤의 것이 더 잘 어울린다. 물론 둘 모두로 이해해도 무방하리라.
그 순간은 “아주 잠깐의 천년”이다. 천년은 너무도 오랜 시간이어서 역설적으로 표현한 “아주 잠깐의 천년”이라는 말에 목이 멘다. 그런 마음을 알았던 듯 “그녀는/ 부론 폐사지에서 보았다는 느티나무 이야기를” 한다. 처음에는 너럭바위인 줄 알았는데, “손톱으로 두드려보니/ 텅 터엉 목어가 되어” 우는 나무였다는. 그리곤 “천년 세월이란 나무가 돌이 되는 시간이라고” 더하여 말한다. 둘 사이의 사랑하고 헤어진 세월이 그러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무가 돌이 되는 시간”은 “누군가의 속울음을 다 받아들여/ 그렇게 검어진” “오래된 나무의 뿌리”와 상통한다. 그녀는 “나무가 돌이 되는” 천년 세월을 얘기했고, 시인은 그러한 “누군가의 속울음을 다 받아들여/ 그렇게 검어”지고 “천년의 세월 다 받아”들여 돌이 된 시인 자신의 천년 세월을 얘기한다.
그러나 그 “천년 세월”은 결코 희망적이지는 않다. “저렇게 캄캄히 누워 일어나지 못하는/ 잎 나지 못하는 돌이” 될 것이다. 심지어 “천 년 전의 기억을 떠올려” 보지만 “가슴이 조금 뛰었을 뿐 그녀 얼굴이 아른했을 뿐/ 선명히 떠오르지” 않았다고 말한다. 잔인하리만치 곧이곧대로 얘기한다. 천년만년이 지나도 잊혀질 것 같지 않던 당시 기억이 잠시 “아른했을 뿐/ 선명히 떠오르지” 않는 것이 세월의 냉정한 힘이다.

    

가파른 길을 걸으며 하이힐을 벗어버릴까 나를 보던 그녀
나는 그녀가 맨발로 돌아가는 게 두려워 그녀를 부축하였네
나 그녀와 맨발의 세월로 돌아가게 되었다면
어쩌면 운주, 그 배에서 내리지 못했을 것이네
나는 절인 배추처럼 젖은 목소리로 나이 듦과 건강과
가족의 안부 묻는 말 따위나 하였네
처음이 아닌 것 같네, 라는 그녀와 운주사를 빠져나왔네
천 년 전 우리가 나란히 누워 사람들의 시름에 캄캄해지면서
노을 같은 분홍울음을 쏟아냈던 기억
천 년 동안 합궁하며 세상의 쓸쓸함을 다 어루만지는
바람을 자식으로 두었다는 그 사실도 잊고
운주에서 천천히 빠져나왔네
       <같은 詩, 32~43행>

그녀는 “가파른 길을 걸으며 하이힐을 벗어버릴까” 하고 시인에게 눈빛으로 동의를 구한다. 하이힐은 단지 가파른 길을 걷는데 불편한 존재만이 아니라 세상의 길, 그녀가 가고 있는 길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길의 힘들고 어려운 그녀의 운명을 벗어버리고 싶은 것이다. “맨발의 세월”이란 천년 동안의 일이고, 천년 동안의 세월이다. 그리로 돌아가는 건 원래대로의 회귀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녀가 맨발로 돌아가는 게 두려워”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그녀를 부축”해줄 뿐이다. 힘들고 어려운 길에서의 부축은 잠시의 위로와 힘을 더해주기는 하지만 궁극적인 해결이나 벗어남은 아니다. 시인은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그녀와 맨발의 세월로 돌아가게 되었다면/ 어쩌면 운주, 그 배에서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걸 알기 때문에 시인은 시시하고 상투적인 “나이 듦과 건강과/ 가족의 안부를 묻는  따위”로 화제를 돌린다.

   

천 년 전으로의 원대복귀 문턱에서 시인은 현재의 길로 내려선다. 그래, “천 년 전 우리가 나란히 누워 사람들의 시름에 캄캄해지면서/ 노을 같은 분홍울음을 쏟아냈던 기억/ 천년 동안 합궁하며 세상의 쓸쓸함을 다 어루만지는/ 바람을 자식으로 두었다는 그 사실”조차도 잊는다.
그러나 그런다고 천년의 사랑이 다 잊혀질까. 천년의 사랑이 파묻혀버릴까. 설사 “맨발의 세월로 돌아가게 되었”더라도 천 년 전의 사랑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천 년 전 “그녀 얼굴이 아른했”을지라도, “노을 같은 분홍울음을 쏟아냈던 기억” “바람을 자식으로 두었다는 그 사실”조차 까마득히 다 잊어버려도 천 년 전의 사랑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운주를 빠져나온다. “처음이 아닌 것 같네”라는 그녀의 마지막 말에는 천년 세월이 다 들어 있다. 그게 단지 기시감일 뿐일까. 슬프고 아린 천년 사랑이다. “분홍울음을 쏟아냈던 기억”마저 아른해지고 잊혀지는 현실이어서 더욱 저린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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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아침 저녁 서늘한 느낌이 좋다. 공기도 투명해졌다. 담장 너머 감나무의 감이 색을 더해간다. 회사 마당의 모과 열매도 노랗게 익을 준비를 한다. 고영민 시인의 「모과불(佛)」 읽기를 올린다.

하나의 열매에는 그 열매가 맺히기까지 지나온 과거가 다 들어 있다.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산다는 것이 과거를 추억하며 현재를 불태워가는 과정이라고 하지 않은가. 추억은 과거와 현재의 나를 들락거리며 몸의 말단까지 향기로 채워놓는다지 않은가. 그리하여 현재는 추억으로 방부 처리된다. 그런데 말이지, 몸 안팎을 들락거린 시간과 공간이 온전히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가 함께 불태워져야 하는 게 아닌지.

고영민의 시 「모과불(佛)」(시집 『공손한 손』, 창비, 2009년)에는 정교한 관찰과 경험의 배후에 만상의 원리를 독특한 시선으로 끌어잡아 앉힌 감동이 있다. 삼라만상에 서로 들고남이 없는 것이 없다 했는데, 모과만큼 독특하게 이를 완성시켜 내는 열매도 없지 싶다. 한 번쯤 설풋 익은 모과를 책상머리나 승용차 안에 모셔 둬본 사람은 안다. 향기 덜한 모과가 스스로 빛깔을 들이고 향을 만들어내는 것을. 그리고 마침내 한쪽부터 검게 썩어가며 몸 전체가 고스란히 말라 가는 것을. 모과는 숱한 과일들과는 달리 썩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 썩으면서 짓물러 몸 허물지도 않는다.

        

내가 일하는 회사 마당에 오래된 모과나무 한 주가 서 있다. 모과 열매가 온전히 몸 태워 숯이 되는 과정을 열 해째 되풀이하는 것을 보면서 모과를 사랑하게 되었다. 열매처럼 둥근 육질의 줄기가 탈피하는 모양이며, 여름마다 매미 울음소리를 열매마냥 나무 전체에 매달고 있던 모과나무. 우수수 가을잎 다 털어내고 크고 노란 모과만 남겨진 가지를 보는 재미는 쉽게 대할 수 없는 장면이다.

3연 18행의 시 「모과불」에는 이러한 모과의 한 해와 여러 해의 과정이 고스란히 열매 하나로 ‘등신불’이 된다. 그 모과의 열반과정에는 시인 자신이 들고나던 시간과 공간 역시 중첩된다.

설풋한 모과 하나를 주워다가
책상에 올려놓았다
저 흉중에도 들고나는 것이 있어
색이 돋고 향기가 난다
둥근 테두리에 들어 있는
한 켠 공중(空中)
가끔 코를 대고
흠, 들이마시다보면
어릴 적 맡은 어머니 겨드랑이 냄새가 났다
       <고영민 詩 「모과불(佛)」, 1연>

덜 익은 모과 열매 “하나를 주워다가/ 책상에 올려놓”고 바라본 경험과 관찰과 시인 자신의 과거가 절묘하게 배합되어 있다. 설풋한 모과가 저 스스로 “색이 돋고 향기가” 나는 과정을 읽어내는 눈은 천상 시인이다. 모과 한 알의 “저 흉중에도 들고나는 것이” 있다 했으니, 사람 역시 스스로 “색이 돋고 향기”를 만들기 위해서 그러해야 함이 분명하다. 아, 그것은 “둥근 테두리에 들어 있는/ 한 켠 공중”이었으니, 사람 역시 한 켠 공중을 둥근 몸 안에 넣고 살아가는 것을. 문득 코를 대고 그걸 확인해 보니 “어릴 적 맡은 어머니 겨드랑이 냄새가 났다.” 경험이 없고 사실을 모르면 절대로 쓸 수 없는 시구이다. 시인의 둥근 몸 테두리 안에 넣은 “한 켠 공중”이 이 한 줄에 고스란히 함축되어진다. 추억과 향수의 응집. 모과의 울퉁불퉁 둥근 몸 가득 냄새와 색을 채워 넣고 있었던 셈이다.

모과의 얼굴 한쪽이 조금씩 썩기 시작했다
모과 속에 들어 있던 긴 시간
한 여름의
그늘 냄새, 매미 소리
       <같은 詩, 2연>

흉중에 들고나는 것들로 스스로 색과 향을 만들던 모과가 이제 숙성의 시기를 지나 썩음의 단계로 접어든다. 그 썩음의 과정은 “모과 속에 들어 있던 긴 시간” 곧 “한 여름의/ 그늘 냄새, 매미 소리”를 추억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를 현재에 되살려 놓는 것이다. 세상 모든 열매가 그러하다.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벼 이삭에도 태양과 폭우와 땀 냄새가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도저한 과정의 응축된 시적 표현이다. 사람이라고 다르겠는가.

     

이 연에서 내가 주목했던 부분은 “모과의 얼굴 한쪽”의 ‘얼굴’이었다. ‘얼굴’을 생략하고 그냥 “모과의 한쪽이 조금씩 썩기 시작했다”라고 해도 무난하다. 그럼에도 ‘얼굴’이 쓰인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머리부터 시작하여 한 몸을 태운 등신불을 염두에 둔 것이다.
등신불은 다비와 달리 화기(火氣)가 직접 닿지 않고 기름 부음으로 완성된다. 몸 사름은 머리부터 시작한다.

내 방 허공중에
매일 하루치의 제 것을 조금씩 꺼내 피워두던
모과 하나가
말끔히 한 몸을 태워
검은 등신불로 앉아 있다
       <같은 詩, 3연>

“얼굴 한쪽이 조금씩 썩기 시작”하던 모과가 이제 온몸 말끔히 태워버렸다. “매일 하루치의 제 것을 조금씩 꺼내” 시인의 “방 허공중에” 피워두던 모과. “한 여름의/ 그늘 냄새, 매미소리”와 같은 “모과 속에 들어 있던 긴 시간”뿐만 아니라 그 시간만으로 모자라 흉중에 들고나는 것들로 “색이 돋고 향기”를 만들던 모과가 제 몸 안의 것들을 조금씩 꺼내놓았다.

번 것을 내어놓는 자선 행위로 자신의 완성 시기를 준비한다. 채웠던 것을 비워내는 자연의 섭리. 그렇게 매일을 조금씩 꺼내 피워두고, 또 한편으로는 조금씩 썩기 시작하며 “말끔히 한 몸을 태워”간다. 그리고 마침내 처음 그 자리에 “검은 등신불로 앉아 있다”.

인생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시편이다. 마음 한 켠을 따스하게 데우는 손이다. 채우고 비우는 일. 마침내 다 비우고 더 이상 비울 것 없는 상태로 남는 일. 시인은 모과를 대신 보여줌으로써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등신불은 자신의 몸을 부처님께 바치는 소신공양이되 몸을 태워 형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그대로 보존하는 ‘육신불’이라는 사실도. 다 비운 몸을 보여준다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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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외경(外景)을 통한 내정(內情)의 표출’이라고 말해왔다. 외경이 개입되거나 반영된 의식과 정서의 언어적 표현의 완성도가 중요하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故 오규원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이러한 인식에 반(反)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정이나 의식의 반영 혹은 개입이 없이도 얼마든지 외경만으로 풍요로운 시의 향연을 누리게 해준다. 그의 향연에 참석하다 보면 시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된다. 의식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하고 외경만을 언급함으로써 오히려 더 깊은 심회와 내정을 배후에 펼쳐 놓는다. 관찰시라고도 할 수 있는데, 사물의 현상이나 대상을 묘사로만 전개한다. 이러한 시적 방법론을 뛰어나게 구사한 시인들도 여럿 있다.

       

시집 『두두』(문학과지성사, 2008년)에 수록된 시편들은 오규원 시인의 독특한 시세계를 형성한다. 시가 짧아지고, 짧아진 만큼 투명성과 여백을 확보하였다. 먹을 아껴 쓰고, 단 몇 개의 필획만으로 완성한 초솔한 문인화 진수를 보는 느낌이다. 심원한 문인화 세계를 형성한 작가들을 보면 만년으로 갈수록 획을 절제하고 여백을 최대한 운용한다. 화려한 채색 대신 먹을 주조로 하고, 담묵이나 농묵보다 갈필을 선호한다. 고졸한 표현은 서화(書畵)의 진수가 졸박(拙樸)함에 있다는 동양서화론의 실천적 결과물이기도 하다.

오규원 시인 1주기를 맞아 출간된 유고시집 『두두』에 수록된 시편들은 그의 엄격한 시창작 태도가 그대로 살아 있다. 다만 칼날 같은 언어 구사보다는 한결 투명성을 지닌 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나이가 들면서, 혹은 죽음을 예감하면서, 마치 생의 뒤편이 어떻게 장식되어야 하는가를 알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한 시편들이 주는 감동은 생각보다 오랜 여운으로 자리하였다.

       

시 「부처」는 1연 12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교적 짧은 시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집에 수록된 다른 시편들에 비해서는 긴 편에 속한다. 경주 남산에서 만난 수수한 부처상을 이만큼 서서 담담하게 묘사한다. 해학적인 여유까지 엿보인다. 거리가 주는 심적 여유로움일 수도 있겠다. 시인 자신의 내면 정감의 개입을 차단하고 단지 사물 현상을 옮겨 전할 뿐이다.

물론 아무리 내정의 개입을 막고 작가의식의 반영을 차단한다고 해서 시인의 성향과 사유와 시선과 시적 교감이 모두 막아지겠는가. 어차피 시인의 눈에 의해 걸러져 선택된 대상이고, 시인은 그 대상에서 시적 요소를 발견한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규원 시인은 어설픈, 과잉된 감정의 개입을 막고 최대한 형상의 묘사만으로 승부하려 한다.

   남산의 한 중턱에 부처가 서있다
   나무들은 모두 부처와 거리를 두고 서있고
   햇빛은 거리 없이 부처의 몸에 붙어 있다
   코는 누가 떼어갔어도 코 대신 빛을 담고
   빛이 담기지 않는 자리에는 빛 대신 그늘을 담고
   언제나 웃고 있다
                        <오규원 詩 「부처」 1~6행>

제목이 「부처」이기도 하지만 “남산의 한 중턱에” 서있는 불상을 시인은 그냥 “부처”라고 부른다. 불상이 곧 부처의 형상이지만 시인은 이러한 전환 장치 대신에 곧장 부처로 진입한다. ‘불상’의 외형이 아니라 부처의 진면목을 얘기하겠다는 의도이다. 미술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뛰어난 예술성을 지닌 불상들의 엄정한 범주보다는 허물어지고 허술한 구석을 맘껏 지닌 부처의 불성에 단박 다가선 것이다. 지극히 단순한 명사 하나로 지은 제목은 “보라, 나는 부처에 대해 직접 시를 쓰고자 한다.”는 선언과도 같다. ‘부처’, 단 두 자의 명사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크고 넓은 세계를 내포한 단어는 드물다.

       

“남산의 한 중턱에” 서있는 부처는 외따로 떨어져 있다. “나무들은 모두 부처와 거리를 두고 서있”다. 아마도 불상 주변을 정리하여 공터가 생겼지 싶다. 그런데 시인은 단지 그렇게 여기고 넘어갈 법한 것에서 탁월한 시적 감각을 포착해낸다. 이 “거리를 두고 서있”는 나무들은 현장의 사실 묘사이기도 하지만 이제 ‘거리’에 대한 시인의 치밀한 의중을 전개하기 위한 포석으로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앞에서 언급하였던 시인 자신의 의식 개입의 차단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싶기도 하다. 나무들은 부처와 거리를 두고 서있는 반면 “햇빛은 거리 없이 부처의 몸에 딱 붙어 있다”. 그 밀착도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부처 몸의 부재를 메워주기도 하고, 때로 조금의 여유로서 그늘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그런데 “부처의 몸에 붙어 있”도록 부처가 햇빛에게 허락했다고 보았다. 그래서 부처는 누가 떼어간 “코 대신 빛을 담고/ 빛이 담기지 않는 자리에는 빛 대신 그늘을 담고/ 언제나 웃고”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있던 것이 사라지면 다른 것으로 메우고, 그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자리는 또 다른 것으로 자리하게 하는 열림과 무소유의 경지를 읽어낸 것이다. 사물과의, 만상과의 이 도저한 밀착도라니! 시를 읽는 이 마음속에 딱 붙어 선다.

   곁에는 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고
   지나가던 새 한 마리 부처의 머리에 와 앉는다
   깃을 다듬으며 쉬다가 돌아앉아
   부처의 한쪽 눈에 똥을 눠놓고 간다
   새는 사라지고 부처는
   웃는 눈에 붙은 똥을 말리고 있다
                        <같은 시, 7~12행>

부처 곁에는 마치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라도 하는 양 “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다. 결코 많지 않아 “드문드문”한 그들은 진정으로 부처님을 따르고 경외하는 이들이 아닐까. 한없이 고요하고 안정되어 보이는 이러한 구도에 느닷없이 “지나가던 새 한 마리 부처의 머리에 와 앉는다”. 예기치 않은 장면이지만 지금까지의 상태를 흩뜨려 놓을 정도는 아니다. 그렇게 하길 허락한다. 그래도 감히! 앉는 것을 넘어서 심지어 “깃을 다듬으며 쉬”기까지 한다. 그것도 모자라 햐! 이놈 봐라, 불경스럽게 아예 “돌아앉아/ 부처의 한쪽 눈에 똥을 눠놓고 간다”. 그것까지도 허락하는 부처시다. 대자대비의 부처는 결코 멀리 있지 않다. 빛으로 없는 몸을 메우고, 찾아오는 이의 날개를 쉬게 하는 우리 곁에 딱 붙어 서있는 부처시다. “한쪽 눈에” 눠놓고 간 똥까지도 말리고 있는 부처시다. “웃는 눈”으로.

해학과 유머와 여유가 이토록 감동적으로 그려진 시가 얼마나 많이 있을까. 오규원 시인은 어쩌면 미리 알고 있었을, 얼마 남지 않은 생의 마지막 내면을 이렇게 보여준 건 아닐까. 언어에 대해서 엄정할 대로 엄정하여 절대로 넘치는 수사로 치장하길 경계해 왔던 오규원 시인의 시어조탁 자세는 구도자의 모습을 닮아 보였다. 그러한 자세를 허물지 않으면서도 내적으로 오히려 더 크게 열린 것을 볼 수 있다. 맑고 시원한 웃음 한 자락이 마음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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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대회의 『선비답게 산다는 것』(푸른역사)은 이 출판사에서 출간한 정민 著 『미쳐야 미친다』와 같은 선상에 놓인 기획서라고 할 수 있다.

유려한 문체를 구사하는 학자들의 문장을 읽는 일은 고전과 현대를 넘나드는 시간의 소통을 얼마나 매끄럽게 연결시켜 놓는지 마음을 달뜨게 할 정도이다. 청소년들이, 일반인들이 고전을 많이 읽게 하기 위해서는 고전을 다양하게 끌어들이고 유려하면서도 재미있게 펼쳐놓는 저작자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그러한 역할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로 안대회, 이종묵, 정민, 김풍기, 심경호 등이 퍼뜩 떠오른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면서 드는 아쉬움은 필요한 핵심만을 취하다 보니 다양성을 확보하는 대신 깊이와 두터움을 챙기기 어려웠다는 점이다.『선비답게 산다는 것』은 큰 테마를 따라가는 소재와 주제의 꼭지글들로 엮여져 있다. 그러나 이 책에는 하나의 꼭지를 가지고 한 권을 쓸 수 있는 소재와 주제들이 넘쳐난다. 단순한 뻥튀기 방식으로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주제를 파고들면 들수록 넓고 깊은 바다가 펼쳐져 질과 양에서 모두 풍성함을 획득할 것으로 여겨지는 소재거리가 많다. 저자가 나열하는 인물들과 저서 목록들을 보면 그것들을 다 언급하지 않은 채 꼭지글이 마쳐지는 것에 아쉬움이 일 정도이다.

저자가 쓰거나 옮긴 책들 가운데 『고전 산문 산책』(휴머니스트), 『조선의 프로페셔날(개정판: 벽광나치오)』(휴머니스트),  『궁핍한 날의 벗』(태학사), 『조선후기 소품문의 실체』(태학사), 『원야』(예경)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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