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도착한 <창비> 봄호를 뒤늦게 뒤적거리다가 이상국 시인의 시 2편을 읽다. <강변역>과 <Jangajji Road>이다. 정신이 번쩍 든다. 나는 시에 너무 힘을 주었다. 시는 세상을 읽는 것이다. 힘준다고 잘 읽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딱 자신 만큼의 눈으로 바라보고, 보는 그 만큼 자신에게 다가온다. 반성한다.

 

이상국 시인의 시는 편하다. ‘편하다’는 말은 시창작의 고뇌와 깊은 사유 없이 손쉽게 시를 전개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상국 시인은 생활 속에서 시적인 것을 바라보는 관점을 늘 견지하는 것은 물론, 시의 구조를 세우고, 시어를 다스리는 데도 심혈을 기울인다. 그의 시를 쉽고 편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치열한 조탁 과정을 거쳐 나온 시이기 때문이다.

 

         

 

강변역
        - 이상국 詩
 
강변역 물품보관소 옆 벽에는
 
밤눈*이라는 시가 걸려 있다
 
추운 노천역에서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의 바깥이 되어주고 싶다는 시다
 
나는 그 시 때문에 볼일이 없는데도 더러 거기로 갔다
 
바깥이란 말 때문이었다
 
내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그 시의 바깥에 오래 서 있고는 했다
 
* 김광규의 시
                         - <창비> 2013년 봄호

 

8연 8행의 <강변역>은 울림이 크다.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으면서 ‘바깥’이라는 단어가 지닌 사유의 진폭이 얼마나 큰가를 새삼 느낀다. 이 시는 ‘바깥’이라는 단어로 집결된다. ‘바깥’이란 단지 외부, 겉, 변방 등의 표면적 의미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시인의 생애를 상징할 수도 있고, “강변역 물품보관소 옆 벽에” 걸려 있는 김광규 시인의 시 <밤눈>처럼  “추운 노천역에서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를 춥지 않게 감싸주려는 존재일 수도 있다.
시인이 “그 시 때문에 볼 일이 없는데도 더러 거기로 갔다”는 것은 “바깥이라는 말 때문”이기도 하다. 어쩌면 시 <봄밤>을 감싸주는 ‘바깥의 바깥’이 되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다. 보다 근원적으로는 시 <봄밤>을 읽으며 자신의 바깥에 대하여, 자신이 바깥이 되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바깥인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텍스트 밖에서 의미를 찾아보자면 자녀를 방문하여 그들의 바깥이었고, 앞으로도 여전히 그들의 바깥이라는 생각을 가졌을 수도 있다. “볼 일이 없는데도 더러 거기로 갔다”는 것은 자식에게 갈 볼일이 없는데도 더러 간 것이다. 속초에 거주하는 시인은 서울 사는 자식 집에 가기 위해서 버스를 탄다. 그 버스가 도착하는 동서울터미날 근처에 ‘강변역’이 위치해 있다. 결국 “그 시 때문에 볼일이 없는데도 더러 거기로 갔다”는 것은 꼭 그 만큼 서울행을 한 것이고, 자녀에게 볼일이 있어서, 또 “볼일이 없는데도 더러 찾은” 횟수와 등가가 아닐까.
이러한 추측은 <창비> 봄호에 함께 수록된 이상국 시인의 또 다른 시 <Jangajji Road>와  시집 《뿔을 적시며》에 수록된 <혜화역 4번 출구>와 같은 다른 시편들을 읽고 함께 연관지어 본 데서 생겨난 것이다.

텍스트를 벗어나지 않고 시 <강변역> 안에서만 찾아보면 ‘바깥’이란 시인의 마음이다. 대상의 바깥이 되어주고 싶은 것, 사랑하고 연약한 것을 안쪽으로 보호해주는 바깥이고 싶은 것이다.

 

이상국 시인의 시가 지닌 강점은 스토리가 있고 재미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군더더기가 적고, 울림이 크다. 그의 시를 읽다보면 곳곳에서 나의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나의 내면을 보게 된다. 깊이 공감하고 그의 시에 매혹된 것이다. 내가 그의 시를 통하여 나 자신을 보는 것처럼 그는 세상 풍경을 통하여 자신을 본다. 현대의 물상과 표정을 통하여 과거를 추억하기도 한다. 그에게 현대는 어쩌면 과거를 돌아보는 거울일 수도 있다. 어쩌면 시가 지닌 궁극적 지향점에 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Jangajji Road
        - 이상국 詩
 
강변역을 떠나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낙타를 갈아탄다
이 길은 천리 밖 동해를 떠난 내가
月谷에 깻잎장아찌를 전해주는 길
실크로드의 어딘가에 敦煌이 있었던 것처럼
낡은 벽화로 가득한 이 동굴에서
나는 대개 경전을 읽거나
눈을 감고 면벽한다
月谷에는 자식들이 있다
그들은 나의 故國이다
스쳐가는 역마다 지푸라기 같은 사내들과
아이를 못 낳는 계집들과
핸드폰을 든 행자들이
티끌처럼 아우성을 친다
험준한 산악을 넘어 여기까지 오는 데만
예순해가 더 걸렸다
月谷은 西에 있고
동쪽에서 살던 일을 다 잊지는 않았으나
月谷에 이르면 나는 다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곳은 발굴될 것이다
나는 고단한 낙타에게 물을 먹이고
해 지는 풍경을 보고 싶었으나
주린 낙타는 고개를 높이 쳐들고 막무가내
사막의 풍진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경전을 덮고 月谷을 향하여
지금 미아역을 지난다고 문자를 날리는데
스크린 도어가 닫히고
언뜻언뜻 맞은편 동굴 벽에
그림자 같은 내 모습이 지나간다
                        

                         - <창비> 2013년 봄호

 

지하철을 낙타로 비유하고, 지하철이 지나는 터널에서 돈황석굴을 연상한다. ‘Jangajji Road’는 궁극적으로 삶의 길이자 문명의 길이다. 개인사로 비춰보면 “험준한 산악을 넘어 여기까지 오는 데만/ 예순해가 더 걸”린 길이다. 그 개개인의 ‘장아찌 로드’가 더해져 문명과 교역과 역사를 형성하였다. 그는 동쪽으로 돌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고국은 월곡, 자식이 살고 있는, 장아찌가 도달해야 할 지점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장아찌로 상징되는 이 땅의 모든 아비와 어미의 길은 자식에게 가닿아 있다. 그것은 어떤 문명로드보다 험준한 고난의 길이고 종착이 없는 길이다. 그 길에는 수많은 역경이 놓여 있다. 그러나 끝내 도달해야 할 가장 숭고한 길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눈여겨봐야 하는 대목은  모르는 척, 중요하지 않은 척 슬그머니 언급하고 지나치는 “그리고 언젠가 이곳은 발굴될 것이다”라는 시구이다. “월곡은 서(西)에 있고/ 동쪽에서 살던 일을 다 잊지는 않았으나” 결국 천리 밖 동쪽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한 자신의 생과 사유와 저작과 흔적이 나중에 발굴되고, 주목을 받고, 돈황학처럼 연구될 것리라는 믿음을 갖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식이 살고 있는 월곡이 고국이요, 동으로 돌아가지 못하여도 후회되지 않는 이유이다.
‘장아찌 로드’는 단지 천리밖 동쪽에서 출발하여 강변역을 거치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낙타를 갈아타고 월곡에 이르는 외적인 길이 아니다. 자신의 고국이 된 자식에게 향하는 길이요, 자식에게 먹이를 물어나르는 어미, 아비의 길이다. 앉으나 서나 걱정인, 자식의 건강과 번성이 세상 무엇보다 기쁜 부와 모의 마음이다. 그래서 나는 ‘장아찌로드’를 ‘부정고도(父情古道)’라고 부를 수도 있지 싶다. ‘장아찌로드’는 부정(父情)의 전파, 부정이 향하는 경로이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꽃은 대체로 일 년을 주기로 피고 진다. 그러나 한 뿌리, 한 가지에서 피어났을지라도 지난 해 꽃과 올해 꽃이 같지는 않다. 꽃은 대기의 기운과 자연 조건을 품어 안고서 태어나고, 짧은 기간 동안 생을 온통 밝히다가 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한 번 나고 한 번 죽는다.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피는 꽃을 노래하고, 지는 꽃을 슬퍼한 것은 일기일회(一期一會), 핀 꽃을 다시 대할 수 없는 단 한 번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문인수 시인의 시 」(시집 !, 문학동네, 2006년 초판1)을 읽고선 죽음 속에서 피어난 새로운 탄생의 찬란함에 소름이 끼쳤다. 꽃은 세상 어떤 곳, 어떤 순간에도 피어나는 힘을 지닌 존재라는 상징과 의미를 지녔기에 예찬의 대상이 된 것이다. 물론 꽃이라는 이유로 다 그러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모름지기 시인의 몸속에 들어온 꽃이란 일생일대 한 번 피고, 한 번 죽는 절대성을 지녀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시를 짓게 하는 이유가 되었을 때는 말이다.

수많은 꽃 가운데 이런 꽃을 보신 적 있는가. 꽃을 다룬 수많은 시 가운데 이런 시를 읽은 적 있는가.

 

4연으로 이루어진 은 죽음으로써 환하게/ 뼈 부러지게기쁜 꽃으로 피어나고 싶은 시인의 절대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진 시이다. 그리고 그 환하게/ 뼈 부러지게피어나는 기쁨은 반드시 죽음을 담보로 할 때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죽음을 전제한 태어남이란 태어나는 순간부터 얼마나 절절하겠는가. 반드시 온 힘 기울여 태어났을 것이고, 최선을 다해 생을 꽃피울 것이다. 사람 역시 일생일사(一生一死)의 생명체이다. 그런데도 꽃보다 풀보다 조금 더 오래 생명을 지속한다고 간절함과 소중함을 망각하고 대충대충 흘려보내고 있는 건 아닌가.

 

         

 

말이 되지 않는다. 손아귀에 꽉 꽉 꽉 구겨쥔 에이포 용지를 냅다 방구석으로 던졌다. , 처박힌 종이 뭉치에서 웬 관절 펴는 소리가 난다. 뿌드드드 드드 부풀어오르다, 부풀어오르다, 이내 잠잠해진다.

- <문인수 , 1>

 

글 쓰는 이는 백지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라고 했다. ‘수많은 불면의 날을 견디고와 같은 흔해빠진 레토릭(수사)이 실은 진정한 사실이라는 점을 글을 쓰는 이들은 대체로 공감하고 인정한다. 서화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백지 앞에서의 공포와 안 써지는 글의 화풀이 대상으로 백지를 구겨 던져버리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지금이야 초고는 물론 창작 전반이 컴퓨터에서 직접 이뤄지기도 하지만, 썼다가 지우고 또 쓰는 과정이 단지 종이에서 모니터로, 펜에서 자판기로 옮겨갔을 뿐, 글 쓰는 행위와 글을 쓰는 작가의 심사는 변하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원고지나 백지에 직접 펜으로 글을 쓰던 문인들의 집필실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구겨던진 수많은 종이 뭉치들로 어지럽혀지곤 했다. 창작의 고통의 증거인 동시에 그 결과로 나온 글들이 왜 빛날 수밖에 없는가를 확인시켜주는 물증이기도 하다.

 

손아귀에 꽉 꽉 꽉 구겨쥔 에이포 용지를 냅다 방구석으로 던졌다.” 이 얼마나 생생한 날것의 현장 표현이가. 시인의 당시 심사와 그에 대한 반응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그 치솟았던 심사가 순간, 잠시, , 멈추었다간 문득 한 장면에 집중한다. 이 순간을 ,” 한 자로 잡아챘다.

시를 쓰면서 가장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가 장면과 상황의 전환이다. 자칫 상투적이게 될 수 있고, 지나치게 상세하게 하다보면 느슨해져 긴장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아슬한 경계 지점과 긴장을 탈 줄 알아야 한다. 순간적 방심을 푹 찌르고 들어가는 예리한 칼날은 언어 자체보다 시인의 감각에 있다. “,” 이 한마디는 검객의 칼날처럼 한 치 빈틈을 헤집는다.

시인이 말이 되지 않는다.”고 구겨 던진 종이 뭉치가 웬 관절 펴는 소리가나듯이 뿌드드드 드드 부풀어오르다, 부풀어오르다, 이내 잠잠해진다.” 구겨 던진 종이가 부풀어오르다 그치는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시인의 심사가 에이포 용지를손아귀로 꽉 꽉 꽉 구겨” “냅다 방구석으로 던진 것으로 표현되었다면, 그 으깸이 뿌드드드 드드하고 관절 펴는 소리로 부풀어오르는 것이다. 구겨짐이 폄으로, 압축이 부풂으로의 이행이다. 그리고는 이내 잠잠해진다.” 긴장감이 잔뜩 내포된 잠잠함이다. 무슨 일이 벌어질 듯한 징조이다.

 

            

 

종이도 죽는구나.

- <같은 , 2>

 

구겨 던져진 종이가 부풀어오르다, 다 부풀어오른 순간을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이 죽음은 모든 상황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종이가 생성해낸 기쁨의 절정이 담겨진 죽음이다. 죽어서 오히려 살고, 죽음으로써 생명을 탄생시킨 역설이 고스란히 자리해 있다. 캄캄한 밤하늘을 번쩍 하고 가르는 섬광과도 같다. 무겁고 튼튼한 뚜껑이 활짝 열리는 순간이다. 넘을 수 없을 것 같던 장벽을 타넘는 비월이다. 여기까지만 읽는다면 2연이 왜 이토록 번뜩이고 중요한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어지는 내용을 담아내기 위한 사전 장치와 배경과 전후 연결과 비약의 디딤돌 역할을 이 한 행으로 모두 처리해준다.

 

그러나 입 콱 틀어막힌 그 마음의 밑바닥에 얼마나 오래 눌어붙어 붙어먹었으면, 그리고 그 무거운 절망, 기나긴 암흑의 産道를 얼마나 힘껏 빠져나왔으면 그토록 환하게

뼈 부러지게 기뻤을까.

- <같은 , 3>

 

시인은 손아귀에 꽉 꽉 꽉 구겨서 던져진 에이포 용지뿌드드드 드드” “관절 펴는 소리를 내면서 부풀어오르다, 부풀어오르다, 이내 잠잠해지는 것을 종이의 죽음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 죽음은 환하게/ 뼈 부러지게기쁜 죽음이다. 도대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시인 자신에게 되물을 정도이다. 시인은 충분히 알고 있다. “입 틀어막힌 그 마음의 밑바닥에 얼마나 오래 눌어붙어 붙어먹었는지를. “그 무거운 절망, 기나긴 암흑의 산도를 얼마나 힘껏 빠져 나왔는지를. “말이 되기까지 마음 밑바닥에, “입 콱 틀어막힌 그 마음의 밑바닥에눌어붙어 견디고 기다려야 했던 시간, 시 한 편으로 태어나기 위해 말이 빠져나온 무거운 절망, 기나긴 암흑의 산도를 시인은 너무도 훤히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토록 환하게/ 뼈 부러지게기뻤던 것이다. 시만이 아니라 무릇 세상 태어나는 모든 것이 그러하지 않은가. 땅 위에서의 일곱 날을 위하여 칠년을 땅 속에서 기다려온 매미의 찬란한 울음이 그렇고, 세한을 견디고 피어난 매화가 그렇다.

 

이 시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이 바로 부풀어 오르다 잠잠해진 종이에서 죽음을, 산도를 힘껏 빠져나온 생명을 읽은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관절 펴는 소리를 내며 뿌드드드 드드 부풀어오르는 종이를 그토록 환하게/ 뼈 부러지게기쁜 순간으로 그렸다는 점이다. 그것이 을 완성시켜주는 대목이다. 꽃으로 피어난다는 것은 입 틀어막힌 그 마음의 밑바닥에서눌어붙어 견디다가 마침내 기나긴 암흑의 산도를힘껏 빠져나온, 그토록 환하고 뼈 부러지게 기쁜 일이다. 견딤과 절망과 암흑의 과정을 거치고 나와야 비로소 맛볼 수 있는 기쁨인 것이다.

대부분의 꽃이 그러하다. 어느 꽃이 더 아름답고, 덜 아름답고를 논하기 전에 꽃으로 피어나는 것 자체가 이미 뼈 부러지게기쁜 일이다. 꽃 피는 일을 한 분야에서의 성공이나 빛나는 창작의 결과물로 비유할 수도 있지만 찬찬히 둘러보면 마음 속에, 일상 속에 피는 꽃이 얼마나 많은가.

 

         

 

누가, 날 구겨 한번 멀리 던져다오.

- <같은 , 4>

 

그러면 관절 펴는 소리를 내며 뿌드드드 드드 부풀어오르다, 부풀어오르다죽음에 이를 테니. 그리하여 입 콱 틀어막힌 그 마음의 밑바닥” “그 무거운 절망, 기나긴 암흑의 산도를 힘껏 빠져나와 그토록 환하게/ 뼈 부러지게기쁜 그런 꽃으로 피어날 테니. 그렇게 하고 싶나니, 부디.

문인수 시인은 그런 마음을 단지 마지막 한 행으로 드러냈지만, 필자가 보건데 이미 시인은 구겨 던져진 종이 뭉치를 주목하는 순간, 벼락같은 깨침으로 자신이 구겨 던진 에이포 종이 뭉치에 자신을 함께 구겨 던진 것이다. 동시에 관절 펴는 소리를 내며 뿌드드 부풀어오르는 종이 뭉치가 시인 자신을 일으켜 세워 입 콱 틀어막힌마음 밑바닥의 무거운 절망과 기나긴 암흑을 빠져나오게 한 것이다.

 

은 그야말로 섬광과도 같은 깨침이 번쩍하고 눈앞을 환하게 밝히는 시이다. 이러한 통렬함을 문인수 시인의 시 여러 곳에서 발견한다. 도식적 상황에 빠지지 않는 시적 번뜩임을 확보한 시들이다.

에서의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라든지, 마지막 행 !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와 같은 구절은 시적 울림을 저 깊숙하고 고요한 곳에서부터 천천히 끌어올려 마침내 펑 터뜨려준다. 해방이다. 카타르시스다.

시어의 미묘한 운용은 시적 울림을 가속화시킨다. 1연의 뿌드드드 드드의성어를 한 번 띄어씀으로써 시각적 효과를 살려낸 것, 이어지는 부풀어오르다, 부풀어오르다, 이내 잠잠해진다.”의 반복도 그러한 효과를 고조시킨다. 3연의 오래 눌어붙어 붙어먹었으면에서는 일부러 어휘를 중복하여 사용함으로써 의미효과를 더욱 살려냈다. 또한 입 콱 틀어막힌1연의 말이 되지 않는다. 손아귀에 꽉 꽉 꽉 구겨쥔과 연결되면서 기나긴 암흑의 산도를 빠져나온 말(, , )의 발산(發散)으로 나아가게 한다. 한 편의 시, 한 편의 서화 작품이 완성되는 과정이 꽃이 피는 과정과 닮았다면, 이 시는 그야말로 무거운 절망, 기나긴 암흑의 산도를 힘껏 빠져나온 뼈 부러지게기쁜 절창의 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간절하게 기다리는 봄은 때로 너무도 더디게 오고, 혹은 예기치 않게 와서 내면을 흔들어 놓는다. 꽃이 피는 때를 기다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긴 겨울 끝에 오는 새로운 희망 때문인가, 아니면 혹독한 시련의 종지부, 어둡고 추운 내면을 밝히고 덥히는 정화의식 때문인가.
이유가 어떠하든 봄은 만인의 기다림 위에 꽃으로 피어난다. 이원규 시인의 시 「거울 속의 부처」에서 내면이 깨어나고 열리는 과정과 순간은 너무도 간절하다.

 

        

 

내내 긴 겨울잠을 자다
매화 꽃망울 터지는 소리에
깨어보니

 

삼매는 오간 적도 없고
삼발 머리에 손톱 발톱만 자랐다

 

봄은 봄이로세
부시시 일어나
토방에 군불을 지피고
꽃피는 법당 하나 차렸다

 

촛불 두 개를 켜고
헌화 헌다 헌향
목불 하나 없는 법당에서
커다란 거울을 보며
백팔 배를 하였다

   - 이원규 詩 「거울 속의 부처」 1~4연

 

「거울 속의 부처」는 쉬운 시어(詩語)로 깊은 사유와 시적 감성을 담아낸 작품이다. 시인은 “매화 꽃망울 터지는 소리에” 봄이 왔음을 깨닫는다. 첫 행에 “내내 긴 겨울잠을” 자다가 깨어났다고 했는데, 어쩌면 그것은 내면의 어둡고 긴 고뇌에 침잠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리하여 긴 시간 동안 “삼매는 오간 적도 없고/ 삼발 머리에 손톱 발톱만 자랐다.”


봄이 왔다는 외부의 신호에 문득 정신을 차려 시인의 내면도 봄을 맞을 준비를 한다. 그 준비는 거창할 것도 없이 “토방에 군불을 지피고” 목불은 없지만 “꽃피는 법당 하나” 차린 것이다. 그리고 “촛불 두 개를 켜고/ 헌화 헌다 헌향” 하고는 없는 목불 대신 “커다란 거울을 보며/ 백팔 배를” 한다.

 

‘거울’은 잠과 깨어남, 외부와 내면, 나와 부처, 고뇌와 씻김 사이에 놓인 관문이자 의식 전환의 기점이다. 그 관문을 통과하여 새로운 세계에 새로운 관점과 의식의 발을 내디디게 된다. 인식의 전환점에 서게 되는 것이다. 부처는 멀리 있지 않고, 목불, 석불, 금불에도 있겠지만, 삼라만상 모두에도 깃들어 있지 않은가. 물론 거울을 보며 백팔 배를 하는 시점에 이르기까지 꽃망울 터지는 소리에 긴 겨울잠에서 깨어 토방에 군불을 지피고 촛불을 켜고 헌화, 헌다, 헌향하는 전환의 조짐을 이미 다 갖추었다. 이제 완전한 전환만을 남겨둔 셈이다.

 

     

 

한 번 절하고
너는 누구냐
또 한 번 절하고
너는 또 누구냐
묻고 묻다가

 

거울 속의
남루한 부처와
두 눈이 딱 마주쳤다
그도 분명 울고 있었다

   - 같은 詩, 5~6연

 

이제 시는 5연에서 다시 한 번 상승한다. 거울 속의 백팔 배를 하고 있는 나를 향하여 일배(一拜) 할 때마다 묻는다. “너는 누구냐”고. “또 한 번 절하고” 거듭 묻는다. “너는 또 누구냐”고. 그렇게 백팔 배를 하면서 백여덟 번을 묻는다. 그게 어디 숫자상의 108번뿐이겠는가. 천번 만번 묻는 것이며, 깊고 깊게 묻는 것이다. 그렇게 “묻고 묻다가” 마침내 “거울 속의/ 남루한 부처와/ 두 눈이 딱 마주쳤다.” 내가 나에서 타자화되는 순간이자, 나의 승화이며, 나의 깨달음이다. 동시에 나를 바라보는 부처를 발견하는 순간이며, 나와 부처 간의 교감이 오가는 순간이다. 그리하여 “그도 분명 울고 있었다”는 마지막 행에 이르러서는 나의 내면이 위무받기에 이른다.


물론 시인은 그 ‘거울’조차 떠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거울 속의 남루한 나를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내면을 읽어주는 마지막 행 “그도 분명 울고 있었다”는 것으로 대신할 뿐이다. ‘우는 그’는 시인 자신인 동시에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부처이다. 아, 봄날은 이리 눈물겹고, 이리 눈부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 시대가 지나기도 전에 전설이 되어버린 곳이나 사람이 있다. 나는 가급적 유명한 장소나 사람을 피해왔는데, 선운사만은 그 전설에 한쪽 발을 담근 채 오래 귀 기울여 듣고 싶었다. 선운사는 이래저래 문학 작품에 직접 묘사되거나 인용되면서 여전히 살아있다. 현존하는 사찰이니 향 피우고 꽃 올리며 불법을 전하는 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선운사는 실존하는 장소라는 사실보다는 마음속에 전설처럼 자리하고 있다. 가수 송창식의 노랫말처럼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에요.” 그런 선운사에 가신 적 있으신지?
한 번 받은 감동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고 내면에서 에코처럼 계속 떠돌면서 확대 재생산을 한다. 살아오면서 경험으로 배운 것이다. 나 역시도 그 유명한 동백꽃을 보러 선운사에 갔다. 그러나 “동백꽃은 일러 피지 않고” 부도밭과 마애불 근처를 서성거리다가 도솔산 정상에 올라 이마에 손 올리고 먼먼 곳을 바라보다가 돌아왔다. 그 후 내 맘 속에 자리한 선운사는 대웅전 앞 배롱나무가 꽃을 피우고, 추사의 해서필치가 생동하는 백파선사 석비가 서 있는 부도밭에 수선화 무리 지어 번지는 그런 곳이 되어버렸다. 절 뒤편 붉은 동백꽃이 눈물처럼 후두둑 져 내리는 전설이 여전히 맘속을 떠도는 것이었다. 이런 게 사랑이지 싶다.

 

안상학 시인의 시에는 그리움과 눈물과 사랑이 출렁인다. 무슨 기교나 치장 따위는 걷어낸 맨얼굴의 시를 대할 때면 한 두레박 퍼 올린 새벽 첫 우물물을 마시는 느낌이다. 몸 전체를 깨어나게 한다. 그의 삶, 바로 그것이 만든 것이지 싶다. 진정성의 힘이다. 시 「선운사」(시집 『안동소주』, 실천문학사, 2002년 초판3쇄)에는 그렇게 붉은 감동이 있다.
너무도 많은 시인들이 써서 식상해질 법도 한 ‘선운사’. 시인은 이런저런 치장 없이 그냥 그리워해버리고 만다. 세상에 솔직함보다 더 큰 사랑 고백이 어디 있겠는가. 5연 11행으로 구성된 시 「선운사」에는 붉은 그리움이 번진다.

 

       

 

세상 살면서 한 곳쯤은 그리워하면서 살아야지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나 이미 사랑을 품은
그런 한 곳쯤은 그리워하면서 사는 것도 괜찮지

꽃이라고 해서 다 피기만 하는 것은 아니잖아
       <안상학 詩 「선운사」, 1~2연>

 

사람 누구나 “세상 살면서 한 곳쯤은 그리워하면서” 살지 않을까. 물론 살아가면서 장소가 바뀌기도 하고, 한두 곳이 더 추가되기도 하겠지만, 그리운 곳을 품고 사는 것만은 다 닮아 보인다. 특히 마음 속 그리워하는 그곳은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내 이미 사랑을 품은” 그런 곳이다. 그래도 괜찮지 않은가. “꽃이라고 해서 다 피기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름답게 핀 꽃을 사랑한다. 꽃은 당연히 피어 있어야 하는 존재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는 듯싶다. 그러나 “다 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피었으니 지기도 하는 법. 가본 곳만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만나본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했지만, 만나지 못했지만 이미 맘속에 자리해버린 이 사랑을 어쩌랴. “꽃이라고 해서 다 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니. 이 기막힌 구절 안에 시인의 사유 전체가 담겨 있다. 그리 말해도 과언이 아니지 싶다. 시인의 시가 자리한 그리움과 외로움의 근원은 바로 “피기만 하는 것은” 아닌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두 비극적이거나 소외와 외면, 억압과 슬픔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빛보다 그늘, 각광을 받기보다는 묵묵한 존재 자체에 더 많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 세상 살면서 한 사람쯤은 그리워해야지
내 아직 한 번이라도 만나 꽃물 들이지 않았지만
그 한 사람쯤은 그리워하면서 사는 것도 괜찮지
       <같은 詩, 3연>

 

1연의 “세상 살면서” 그리워하면서 살 “한 곳쯤”이 2연을 거치면서 3연에서 “세상 살면서” 그리워할 “한 사람쯤”으로 바뀐다. 1연의 ‘한 곳’에서 ‘한 사람’이 연상되었을 수도 있고, 처음부터 “그리워할” 한 곳과 한 사람을 동일시하고 시작했을 수도 있다.
1연의 ‘한 곳’은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이미 품은 사랑이고, 3연의 ‘한 사람’도 “아직 한 번도 만나 꽃물 들이지 않”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런 한 곳쯤은”, “그 한 사람쯤은” “그리워하면서 사는 것도 괜찮지”라고 말한다. 아무렴 괜찮고말고. 나도 그러고 싶은 걸. 그게 가능한 이유는 “꽃이라고 해서 다 피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2연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피기만 하고 지는 꽃이 없었다면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 “한 번이라도 만나 꽃물 들이지 않았”던 사람을 절절이 그리워할 수는 없다. 물론 가보거나 만나보거나 하고서도 얼마든지 그리워할 수 있지 왜 없겠는가. 그러나 4연을 읽는다면 왜 2연이 깊게 다가오는지, 왜 그렇게 써야 하는지를 이해할 것이다.

 

       

 

그렇다지, 그곳 그 땅은 지는 꽃만 품안에 안는다지
지는 꽃이 흙이 되어 땅빛이 붉다지
그 땅에서 피는 꽃 또한 붉다지

 

날이 갈수록 붉어지는 가슴이여
       <같은 詩, 4~5연>

 

4연은 전해들은 바이면서 동시에 시인의 확신도 내포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다지”라는 종결 어미는 직접 눈으로 확인한 바가 아니지만 동조와 동의, 수긍과 수용, 나아가 나도 그렇게 믿는다는 다짐과 묻는 뜻이 담겨져 있다.
이제 왜 “그곳 그 땅”이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그리워하면서 살” 곳인지, 왜 “한 번이라도 만나 꽃물 들이지 않았지만” 그리워하면서 살 한 사람이 있을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지는 꽃만 품안에” 안기 때문이며, “지는 꽃이 흙이 되어 땅빛이” 붉기 때문이다.
2연의 “꽃이라고 해서 다 피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데서 “지는 꽃만 품안에 안는” 상황으로 나아간다. “품안에 안는” 것이 피는 꽃이 아니라 지는 꽃이다. 그래서 그리워하는 마음, 곧 품안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한번이라도 만나 꽃물 들이지 않은” ”지는 꽃“을 안는다. 그리하여 그 땅 흙이, 지는 꽃을 안은 품이 붉어진다.

 

시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만일 그랬다면 감동의 유지는 물론, 확대 재생산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곳 그 땅”은 “지는 꽃만 품에 안는” 곳이고, “지는 꽃이 흙이 되어 땅이 붉”은 곳이다. 더 나아가 품에 안고, 품에 안긴 지는 꽃으로 땅이 붉어지는 데 그치지 않고, 다시 “그 땅에서 피는 꽃 또한” 붉은 곳이다.
수용과 변화와 생성의 과정에서 진정한 그리움을 완성시킨다. 그래서 그러한 곳, 그러한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살아”가는 시인은 “날이 갈수록 붉어지는 가슴”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음미하다보면 안상학 시인의 시 여러 편에서 보이는 상징과 승화의 요소가 이 시에서도 보인다. 단순히 실존하는 선운사에 대한 그리움에 국한시킬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넘어선 상징, 곧 지는 꽃, 붉어지는 가슴, 그리움, 사랑, 품안, 땅빛 등이 다양한 상징적 요소를 지닌다. 님이나 자유, 혹은 구도, 구원과 같은 상징적 요소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는 사물의 본질을 획득하는 통찰력과 관물(官物)을 통한 내정(內情)의 시적 표현력 가운데 어디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할까? 우문일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거창한 질문으로 시작하는 것은 좋은 시는 두 측면을 두루 겸비해야 한다는 너무도 자명한 해답을 뛰어나게 획득해온 정일근 시인의 시를 애기하기 위해서이다.

그의 시는 쉽되 힘이 있고, 힘이 있되 리듬감이 있어 울림이 크다. 그만큼 강한 인상을 심어준다. 때로는 남성적 웅혼한 톤을 구사하다가도 어느 순간 섬세한 내면을 건드리는 대목에 이르면 왜 그의 시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생각을 비로소 하게 된다.

 

       

 

적요한 겨울 산길 따라 오체투지로 기어왔지만

산문(山門)이 그 길 뚝, 멈추게 한 뒤

내 신발 밑에 숨어 따라온 저잣거리의 노랫소리

소매 끝에 슬쩍 묻어온 달콤한 음식 냄새

휙휙, 단칼에 끊어버린다

 

바람도 신발을 벗어 들고 조심조심 지나는 그곳에

사람의 길도 말씀의 길도 다 끝난 그 마지막에

겨울산을 마주 보고 단단하게 앉은 절 집 한 채

달마의 짙은 눈썹처럼 꿈틀꿈틀 선정(禪定)에 들어 있다

 

        - 정일근 시, 내 마음의 동안거(冬安居)1, 2

 

내 마음의 동안거(冬安居)는 그의 평소 열망이 어디에 놓여있는가가 잘 드러난다. ‘통도사 도심(道尋)에게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시는 통도사 선방에 들고 싶어 하면서도 결국 들지 못하고 애달파하는 시인의 내면이 절실하게 와 닿는 시이다.

사실 한 번 닫힌 마음문은 단 1mm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석 자가 못되는 돌계단이지만 그 단호한 거부 앞에 시인은 몇 년째 전전긍긍하고 있다. 왜일까? 자신이 그 돌계단을 오를 수 있는 자격이 여전히 없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겨울 공부 하러 왔습니다, 인사하고 선방(禪房) 계단 오르는데

네 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돌계단이 금강(金剛)의 손바닥을 펴고

내 두 뺨을 철썩철썩 사정없이 두들겨 팬다

 

산토끼도 폴짝 뛰어오를 수 있는 불과 석 자 높이 계단 아래

속진(俗塵)은 입도 열지 못해 산짐승처럼 엎드려 크렁크렁 울고

그 위로 열락(悅樂)은 구름처럼 둥실둥실 떠간다

저 단순한 경계의 높이 밟고 오르지 못해

나는 벌써 여러 해 겨울을 전전긍긍하고 있다

 

         - 정일근 시, 내 마음의 동안거(冬安居)3, 4

 

시인은 적요한 겨울, 산길을 오체투지로 기어 산문에 이르렀다. 속진을 끊어버리고 그곳, 바람도 신을 벗고 조심조심 지나고, 사람의 길, 말씀의 길 다 끝난 그곳, 시인은 비로소 겨울 공부 하러 왔습니다하고 방문 목적을 드러낸다. 그러나 선방 계단을 오르지도 못하고 그만 거부당한다. 불과 석 자 높이, 산토끼도 뛰어오를 수 있는 높이를 시인은 오르지 못해 산짐승처럼 엎드려 크렁크렁 운다.

사실 그 계단을 오르기 위해 시인은 여러 해 겨울을 전전긍긍하며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수많은 고뇌와 열망으로 코피가 터지고, 살과 뼈가 사위어 이제 가벼워진 몸으로 다시 왔지만, 여전히 그 경계를 건너기가 어렵다. 도대체 어찌해야 선방에 드는 일이 가능할까? “기름진 오장육부 들어내고 살 오른 시()마저 던져버려야가능할까?

5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대라고 하는 도심(道尋)’이 등장한다. 그 계단을 오르면 도심의 옆자리에 앉을 수 있다. ‘도심(道尋)’은 시인과 연이 있는 동안거 든 스님인 듯이 여겨지며, 그러면서도 도를 찾는구도(求道)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에게 여전히 그 길은 멀어 보이고, 쉽게 올라 가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계단을 오르지도 못한 채 나는 검붉은 코피 펑펑 터지고

사위어가는 살과 뼈로 가벼워져 여기까지 기어왔지만

저 엄숙한 경계의 깊이 건너뛰기에

내 몸 여전히 무겁다, 너무 무겁다 한다

 

기름진 오장육부 들어내고 살 오른 시()마저 던져버려야

그대 곁에 나란히 앉을 수 있는 것인지

 

꽝꽝 소리 내며 물 얼고 눈 내리는데, 한뎃솥 걸고 한뎃잠 자며

나는 비루먹은 망아지처럼 겨울 들판에 서 있다

 

                - 정일근 시, 내 마음의 동안거(冬安居)5, 6, 7

 

이 시는 공간상으로는 산문(山門) 안과 밖, 선방 안과 밖, 계단 위와 아래(벌판), 시간상으로는 현재와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과거 여러 해가 복합적으로 엮여 있다. 시인이 기어이 도달하고 싶어 하는 계단 위 선방 안은 끝내 시 속에 비쳐지지 않는다. 다만 그곳이 어떠한 곳인가는 몇몇 시구를 통하여 알 수는 있다. “네 놈이 여기가 어디라고!”라며 단호하게 거부하는 그곳은 속진(俗塵)을 용납하지 않는 곳, “열락은 구름처럼 둥실둥실 떠가는 곳, 그리고 무겁고 기름진 몸으로는 건널 수 없는 엄숙한 경계이다.

사실 계단 위 선방만이 그러하지 않고, “달마의 짙은 눈썹처럼 꿈틀꿈틀 선정(禪定)”에 들어 있는 한 채 절집 전부가 그러하지 않을까. 오체투지로 왔어도 저잣거리의 노랫소리/ 소매 끝에 슬쩍 묻어온 달콤한 음식냄새도 단칼에 끊어버리는 산문 역시 선방 계단을 오르는 것만큼의 엄숙한 경계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엄숙한 경계는 결코 산문 안쪽 선정에 든 절집 한 채의 선방 돌계단이 아니라 그것을 오를 자격이 있는가를 척도하는 내면에 있었다. 시인의 내면이 스스로 금강의 손바닥을 이루어 자신의 정신을 때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스스로의 자격 심사를 몇 해째 통과하지 못한 열망만이 고뇌에 차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자세히 보라. 선방에 드는 것만이 선정에 들 수 있는 절대 방법이 아님을 마지막 연은 보여준다. 시인은 결국 한뎃솥 걸고 한뎃잠 자며겨울 들판에서 선정에 든다. 그 선정은 선방에 들기 위한 각고의 노력, 기름진 오장육부를 들어내고 살 오른 시마저 던져버리려는 용맹정진이기도 하다. 그게 바로 시인의 동안거가 아니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