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의 블로그에서 철학자 김진영의 <아침의 피아노> 소개 글을 읽었다. 저자의 첫 산문집이자 유고집인, 저자가 번역한 롤랑 바르트의 책 제목 <애도 일기>를 따서 부제로 단 이 책은 죽음을 앞두고 쓴 철학적 기록이다. 구입하여 읽을 생각으로 알라딘 장바구니에 담아 두었다. 인용구 몇 개도 스크랩하여 옮겨 두었다. 


그러면서 한기호 소장의 '죽음'에 관한 글 한 편을 더 읽었는데, 최성일과 구본준에 관한 것이다. 출판평론가 최성일은 45세의 일기로 생을 마칠 때까지 오직 책 읽기와 글쓰기로 평생을 살았다. 그이의 처절한 글쓰기는 가슴을 먹먹하게 하였다. 나는 그의 글을 좋아하여 그의 책은 물론 그의 아내의 책 <남편의 서가>도 읽었다. 그에 대한 나의 '애도'였다.


최성일의 부고 기사를 쓴 한겨레신문의 구본준 기자는 건축전문기자였다. 그의 책은 물론, 블로그에서 건축 관련 글을 읽는 재미가 상당하였다. 그런데 그도 예기치 않게 이탈리아 현지 취재 도중 생을 마쳤다.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블로그는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한겨레신문이 불로그 서비스를 종결하면서 그의 블로그 글도 사라졌다. 그가 남겨놓은 글을 모아 책으로 출간되기를 바랄 뿐이다.


죽음은 가까이 있다. 다만 실감하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죽음은 멀리 있는 것처럼, 당분간 오지 않을 것처럼 여기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죽음이 서린' 책을 읽으면 겸손해진다.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삶은 방종할 수 있다. 죽음은 소중함과 감사를 일깨워준다. 


수원 봉녕사에 다녀왔다. 25년 전 아우가 사십구재를 마치고 이승을 떠난 곳. 그때 나는 독경 소리를 뒤로 들으며 대웅전을 나왔었다. 마당에 가득하던 초여름 햇살 저편 수돗가에서 젊은 팔을 걷고 흰 무를 씻는 비구니들의 웃음소리가 햇살처럼 청명했었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아우를 보냈던가 붙들었던가. 모르겠다. 다만 세상과 삶의 부조리만이 깊이 가슴에 각인되었을 뿐. 그때 아우는 떠나는 자였고 나는 보내는 자였다. 그사이 세월이 제자리로 돌아온 걸까. 지금은 내가 떠나야 하는 자리에 선 걸까. 오늘 나는 여기에 왜 다시 왔을까. 그를 만나기 위해서일까, 나를 만나기 위해서일까. 오후에 날이 흐리더니 돌아가는 길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침의 피아노> 158번 글이다. '떠나는 자'와 '보내는 자', 그리고 이제 '떠나야 할 자'가 된 '보내던 자'의 모습이 한 편 시처럼 그려졌다. 그 시가 너무 슬퍼서 눈물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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