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의 수수한 삶





1.


고슴도치 한 마리가 가시에 사과를 싣고 달린다.  



2.


올봄에는 음식과 옷을 너무 많이 샀거든?

이놈의 적자 인생, 잘되는 집은 다 엇비슷하고,

음식물 쓰레기와 의류 폐기물이 걱정되는 와중에 

망하는 집은 제각기 망하는 중, 오늘부터는 

수수하게 살아야지, 염치를 알아야지.


수수밭이 붉은 건

해님 달님 엄마를 잡아 먹은 호랑이 피 때문이라며? 

적자색 수수 곡알을 씹으며 큼직한 액운은 쫓아내고 

가는 손가락의 어설픈 힘에도 톡! 부러지는 수수깡처럼 

그저 잔잔한 아픔만 있는 수수한 삶을 살자고 다짐하는 오늘, 

수수밭처럼 붉은 하루, 엄마 피 섞인 호랑이 피 같은 하루에 

심심한 감사가 아니라 수수한 감사를 보낸다. 

 

3. 


고슴도치는 오늘도 가시에 오이를 업고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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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적 유전자 







100층 직각 꼬부랑 할머니, 오늘도

지팡이 짚고 엉덩이도 씰룩씰룩 잘만 걸으시고 


채소 과일 산책 좋아하시던 90층 할아버지

췌장암 걸려 후다닥 가 버리시고 


하루 종일 소주병 끼고 사시던 80층 할아버지도

가시긴 가셨지, 요양병원으로

 

항상 셔츠 단추 두 개씩 풀고 근육 자랑 하시던 70층 젊은 아저씨

야밤에 감자 핫도그 먹다가 심정지로 응급실 가시더니 끝.


60층 할머니 어느 날 갑자기 걸음이 갈짓자, 발음이 헐렁헐렁

걸핏하면 눈물까지 쏟으시더니 보이시질 않고


옆 동네 깡통까지 주워 오시던 50층 할머니, 빈 수레 끌며 

갈 곳 몰라 하시더니 매일매일 데이케어 다니시고   


언젠가 ㅅ초등 급식 도우미 하시던 40층 할머니, 2년 뒤인 올해는

ㅊ 초등 교통 안전 도우미, 즐거워라 노년의 도우미 인생.


30층 할머니, 손자 손녀 키우며 알콩달콩 사시더니

코로나 때문인지 백신 때문인지 하루 만에 소천하시고


20층 마흔 살 부부 사모예드 두 마리 보낸 다음 시베리안 허스키

알래스카 맬러뮤트 두 마리씩 입양해 개판 카페를 차리시고


10층 빼빼로 할아버지 건들건들 트럭 몰고 오늘도 일 나가시더니 

돌아올 때는 불콰한 얼굴, 단, 술은 일이 끝난 다음 딱 한잔만.  


이걸 하루라고 부르죠, 

아니, 오늘은 여기까지! 

Let's call it a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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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의 법칙 





1. 



쥐라면 족제비도 잘 잡는다, 그러나 

족제비는 닭 오리도 잡고 냄새도 난다, 그래서

쥐잡이 가축으로 간택된 것은 고양이였고, 엇비슷하게  

참나무를 길들이지 못한 데는 다람쥐의 경쟁력이

너무 큰 탓도 있었다죠? 


가축화된 동물은 다 엇비슷하고 

가축화되지 못한 동물은 제각기 이유가 있다.

작물화된 식물은 다 엇비슷하고

작물화되지 못한 식물은 제각기 이유가 있다. 


역시 톨스토이를 읽을 수밖에. 


행복한 가정은 다 엇비슷하고, 여러분,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불행, 그러니까 그럴 만한 이유가 있거든요. 




2. 


허리, 다리, 머리, 눈, 손가락에 이어

'중년 무릎' 탁탁 치니 절로 뜨는 것이

관절, 하지만 나의 고민은 

철저히 미학적인 것, 주름이올시다!

동그랗고 매끈하던 내 무릎에 

어느덧 물결 무늬 파도가 일렁여 더는 

짧은 치마를 입을 수가 없구나, 아니, 

푸른괭이야, 쉰이면 청춘이지, 그러나,

아, 꽃샘 추위에 무릎이 시리구려! 


역시 중년의 미학은 실학이 될 수밖에.  


멀쩡한 기관은 다 엇비슷하고 

망가진 기관은 제각기 이유가 있다

건강한 사람은 다 엇비슷하고

아픈 사람은 제각기 이유가 있다. 



3. 


총에서 균, 균에서 쇠까지 와 보니

인생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 

자연은, 그리하여 역사는  

이편이 아니라 저편의 손을 들어준 것이 아니던가. 


역시 저 사랑하는 니체의 운명애로 도피할 수밖에. 




*



가축화할 수 있는 동물은 모두 엇비슷하고 가축화할 수 없는 동물은 가축화할 수 없는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 <안.카.> 첫 문장 인용) 이러한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은 인류사에서 지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동물의 가축화에 대해 설명해 준다.(234-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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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내용 요약 





1. 발단 


아버지는 버스 타고 아우라지 가시고 

어머니는 건너 마을 친구 장례식장에 

냉이 쑥 먹고 냠냠, 머위 두릅 먹고 씁씁 



2. 전개 


아버지의 후일담인즉, 

메밀묵도 한 그릇 얻어 먹고 

강원도 구경도 하고, 그런데 세상에,

어찌 그리 골짜기던지! 

아, 사랑하는 아버지, 그놈의 메밀묵을 

귓구멍으로 드셨는지, 도무지 대화가 안 되는군요! 

이 미련한 자라야, 보거라, 세상에는 간을 70퍼센트나 

잘라내고도 잘 사는 동물도 있단다.


어머니의 후일담인즉,

"딸아, 나는 꽃 속에 있다가 자는 잠에 곱게 죽을란다."

"그게 뜻대로 되는 일이더냐, 네 어미를 보거라," 

"울 엄마? 저리 반듯이 누워서 줄줄 싸기만 하니, 참나, 얼마나 예쁘노."

"세상에 그건 또 무슨 궤변이실까?"

"돌아다니면서 그릇이나 깨고 동구 밖에서 나자빠지고 하는 것보다야 낫지." 

"어휴, 그 말씀이 진리구려."

"이제 봐라, 네 엄마는 꽃 속에 있다가 자는 잠에 곱게 갈란다." 



3. 절정 (없음/아님)


오늘의 가장 큰 고민은 아이에게 흑미를 먹이는 일, 

백미에 현미 한 줌, 흑미는 딱 일곱 알만 넣는 거다.   


분수 나눗셈에 진심, 끙끙 풀고 

일기 다섯 줄 마지못해 쓰고 

요일과 월 영단어 세 번씩 베끼고

소나기 간추리고 사회 학습지 채우고

풀어라, 지워라, 요약해라, 감상 써라


아이야, 이제는 저녁을 먹자구나 

앗, 엄마, 흑미는 싫다니까! 

이건 그냥 검은 쌀알이란다.

그게 흑미잖아? 내가 모를 줄 알고! 


위기가 없기에 절정도 없는

날, 이런 날 너무 좋아! 



4. 결말 


도다리 없어 가자미 쑥국을 끓이고

냉이와 취나물과 머위순의 3월 지나

4월, 어느덧 지려는 목련 꽃 그늘 아래서

세상 나무의 순은 죄다 뜯어 먹고 싶어져

오 수재너와 매기의 추억을 곱씹어 먹고

개두릅 참두릅 데쳐도 먹고 전도 부쳐 먹고


그래도 허기가 져 

늙은 것이 참 잔망스럽기도 하지

시도 쓴다, 역시

내 인생 최고의 날은

바로,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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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이 좋음(2) 





1. 


이것은 세태 소설,

도서관이 좋아서 쓴 세태 소설이다. 


2. 


시립 도서관을 사랑한 중학생은 

도서관 연애를 꿈꾸었다. 그러나

연애는 대학 도서관 밖에서 하루 종일

책 한 자 안 보는 남자와 했다.


인생은 배반의 연속, 예측을 불허하기에  

나 지금 너무 신나. 어찌나 신이 나는지

어둠 속에서 장편 소설 하나 붙들고 세 시간을

뒤척이며, 살려 주세요, 딱 10밀리그램만! 


마약 관문 이론은 옳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프로포폴은 프로포폴일 뿐, 코카인, 헤로인, 필로폰을 부르지는 않습니다.


3. 


훌륭한 장서야말로 최고의 불쏘시개임을 '장미의 도서관'은 확증한다.  

그럼에도 도서관의 무한을 믿는 건 우리의 유한이 서럽기 때문. 

이 모든 기망 행위에 맞서 도서관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책들을 한 권씩 죽여줘, 한 장씩 찢어 줘 

그리하여 나를 텅 비게 해 줘  

내 서고를 텍사스 전기톱으로 썰어 줘 

내 사지를, 손가락을, 발가락을 전지 가위로 잘라 줘

플라타너스가 된 내 머리통도 댕강 베어 줘.


이봐요, 다 좋은데, 도서관 선생님, 

근육 강직이 심해서 기도 삽관도 안되는군요, 

작작 좀 쳐 드시지! 펜타닐은 진통제란 말입니다.


도서관에는 없는 게 없어

마약 책도 있더라, 심지어 마약도 있더라

바로 너, 책이야말로 마약이더라

종교와 과학과 정치처럼. 



4. 


이 세태 소설의 주인공은 

도서관의 망상에 틀어박힌 마약 중독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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