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소처럼 일한답니다 




 

쉿, 촌놈으로서 한 가지 사실을 알려드릴게요. 


소는 소가 된 게으름뱅이처럼 일하지 않습니다.

소는 일도 잘 하지만 꾀도 잘 부린단 말입니다.

소의 게으름에는 일리가 적어도 둘 이상 있고 

소는 소로서 진리를 알기에 부림 당하지 않지요. 


눈은 맑고 큼직해, 속눈썹은 촘촘히 길어,  

엉덩이 두 짝은 태평양 대서양처럼 넓어,  

긴 꼬리를 휘둘러 등짝의 쇠파리도 때려 잡는 영물인걸요. 


끔벅끔벅, 철썩철썩, 우물우물, 음매음매, 

영차영차, 느릿느릿, 어기적어기적, 오늘도

심드렁하니 풀밭에 앉아 게워낸 풀을 또

씹어 삼키는 이 루틴, 참으로 영험하지 않습니까!  

이 되새김질은 너무나 권태로워 궁극에는 시가 되었답니다.  


지나간 날들을 가난이라 여기며 

오늘도 저는 소처럼 일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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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이 좋음(3) 






도서관은 자유다.

아무도 말 걸지 않는다. 

어떤 걸 찾느냐고 묻는 판매원도, 하나님 믿으라고 조르는 신자도, 

견진 성사 받았느냐고 떠보는 수녀도, 젖 달라고 보채는 아기도 없다.  


도서관에는 책과 책의 에피고넨이 많지만

온수 냉수, 책상 의자, 장판 깔아둔 쉼터까지 있다.

어쩌다 붙어버린 눈꺼풀이 용 꿈을 시전한다. 

아니다, 알래스카에서 일각 고래를 잡는다. 

도서관 쉼터는 자연 공부와 망상 실현을 허한다.


도서관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읽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은 시원하고 봄은 봄, 가을은 가을, 고로

그저 있으면 되는 곳이 도서관이다. 


도서관은 평등이다.

아무나 들어가도 된다.

립, 구립, 시립, 국립 도서관은 무료. 

유료 도서관은 도서관의 탈을 쓴 북 카페다.  

내 고향 거창군에도 도서관이 있다. 

도서관은 차이는 있을지언정 차별은 없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그대, 이리로 오시오.

이곳이 그대를 쉬게 할 것이오, 라고 말하는 도서관.

오늘도 소처럼 일한 나는 그 안으로 들어선다.

끔벅끔벅, 느릿느릿, 우물우물 그저 있음을 되새긴다.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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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잎의 서사 





1. 


울 엄마는 왜 안 죽지?

언제 죽을까, 울 엄마는?

과연 죽기는 하는 걸까? 



2. 


6월처럼 더운 5월의 어느 날

만발한 아카시 찔레꽃 향내는 예년 같지 않아도 

짙은 초록빛에 까칠한 솜털을 입은 호박잎만은 너무 탐스러워

몇 장은 찌고 나머지는 햇감자와 함께 된장국을 끓였다. 


보리밥 한 숟가락과 우렁이 쌈장 품은 호박잎,

살가운 까칠함과, 입안에서 제각기 따로 놀면서도 

혓바닥에 착착 감기며 목구멍으로 꿀꺽 넘어가는,

이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맛. 

구수하고 심심한 울 엄마 된장국 한 숟가락과

은은한 햇감자의 맛, 내 어릴 적 먹던 그 맛.

우리는 이 맛에 산다. 호박잎과 햇감자도

이 빛과 흙과 물, 제철 맛에 산다.



3. 


기어코 백 살을 찍은 울 엄마, 

요양병원과 집을 걸어서, 때론 자전거로 오가고 

동네 장난꾸러기들에게 훈수 두는 재미로 산다.  

의사마저 존경하지, 이토록 기적 같은 생명 현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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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월, 댑싸리, 개팔자






세상의 모든 나무 순을 뜯어먹었더니 

두릅나무, 엄나무, 참죽나무, 눈개승마, 

인생의 맛이 점점 써져, 퉤퉤, 어느덧 뽕잎순의 계절

초록 권태에 대해 진심이었던 이상의 수필을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풀은 꽃을 피워 애기똥풀도 샛노랗고

세상의 모든 나무 순은 신록을 지나 녹음에 이를 참에

오뉴월 물 가득 대 놓은 논에 야생 청동 오리 두 마리

심드렁하게 놀고 있는 모양새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롤세.


그러고 보니 내 인생은 마른논에 물 대기로구나!

구슬픈 탄식에 저 멀리서 원조 함안댁의 찰진 욕이 들려온다.

오뉴월에 쇠불알 터지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망할 년.

덕유산 맨틀까지 뚫었을 조연이 여사의 말씀은 항상 옳았지. 

세상의 모든 나무 열매와 모든 풀뿌리를, 가을을 맛보기도 전에
마른논에 물 잦듯 내 숨이 잦아드는 것 같지만 따끈한 햇감자와
갓 나온 초당 옥수수 단맛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

오뉴월 댑싸리 밑의 개팔자가 따로 없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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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 그림자를 쓸어 담는 마부 그림자 






1.


오늘은 은행에 갔소.

적금 타고 낙타 사러 

통장 들고 도장 들고 

이럴 때만 쓰는 운전면허증까지 챙겼다오.


목돈은 새 적금 통장에, 

이자는 예금 통장에 넣어 주시오.

아, 이 모든 건 비대면으로 하시면 되는데

하지만 이렇게 직접 오셨으니, 선심 쓰듯

내 눈앞에서 내 스마트폰 들고

손가락 끝으로 콕콕, 끝났습니다.

도장도 통장도 필요 없단 말이오?

예, 고객님, 요즘은 어르신들 빼고는 다 이렇게 하십니다.

어허, 그럼 내가 바로 그 어르신, 즉 노인이구려!



2. 


버스를 탔소. 제법 북적이더이다.

곧 내릴 거라 기둥을 잡고 섰소.

기사 빼고 모두 스마트폰 삼매경, 

여 하나 썰고, 살살, 톱으로, 제기랄, 

손가락 놀리기도 귀찮다는 나른한 표정이었소.


단 한 사람, 

앙상한 두 손은 허벅지에 떨구어 두고 

희부윰한 시선은 창밖에 걸쳐 두신 어르신.

그리고 흐리멍덩한 눈깔로 사람들을 구경하는 나는 

역시 노인이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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