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주말을 핑계 삼아 늦잠을 자고 싶어도 어김없이 5시가 좀 넘어 잠이 깼다. 주중에도 6시 45분 자명종을 맞추는 보람 없이 늘 이 시간에 일어났고, 평소와 똑같은 아침이려니 했다. 주말에 일찍 일어나면 참 괴롭다. 평일에는 1시간 정도만 멍 때리고 있으면 남편 역시 출근 준비하느라 일어나는데, 주말에는 남편 역시 곤한 늦잠을 자는 지라 숨 죽이고 서너 시간을 누워서 버티기 쉽지 않다.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챙기고 따뜻한 침대를 나와 식탁에 앉았다. 오늘따라 머리가 아프고 무거워 손가락으로 꾹꾹 지압을 하는데, 어라 뭔가 머리에 잔뜩 달린 기분이다. 침대 머리맡에 둔 소소한 장식품 중 하나가 머리카락에 엉켰나 보다 생각하며 마루 화장실에 가 거울을 봤다.

흐음...

머리 위에는 손바닥만한 식물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머리카락을 헤쳐보니 꼭 내 머리 속에서 자라난 것처럼 보인다. 잎사귀를 하나 뜯어 잎맥따라 갈기갈기 찢어보니 심지어 살아있는 식물이다. 뭐지? 뭐지? 뭐지?

가설 1. 어젯밤 내가 잠들기 전까지 강남에서 술 먹고 있었던 딸이 누군가에게 식물 한 포기를 선물받았고, 이것을 잠든 내 머리맡에 두었는데 잠결에 하필 내 머리에 박혔다? 빼볼까? 슬쩍 잡아당겨 보려니 풀이라기 보다는 어린 나무마냥 제법 딱딱한 줄기를 가진 그것은 빠질 기색도 없고, 통증만 유발햇다. 몹시 깊이 박힌 걸까? 그런데도 내가 세상 모르고 잠만 잤다고??? 화장실에 들어온 김에 볼 일을 보고 나와 부엌으로 가 도로 의자에 앉았다.

가설 2. 잠이 덜 깼다. 혹은 어제 자기 전에 먹은 알레르기약 때문에 잠시 환각을 겪는 거다. 정신을 차리자. 잔 하나 가득 물을 따르고 일주일 약통 중 토요일 칸을 열어 혈압약과 루테인, 코엔자임, 밀크씨슬만 골랐다. 알레르기약이 원인일 수 있으니 오늘 아침은 건너뛰는 게 좋겠지. 물 한 모금에 4알을 꿀꺽 삼키고, 나머지 물을 한 모금 잠시 머물고 있다 넘기고 잠시 혀로 입 안을 자극하고, 또 한 모금을 그렇게, 또 한 모금도. 어려서 외할머니가 시키던 아침 물 한잔의 건강법을 오십이 넘었다고 나도 따라하고 있다. 한참만에 물 한 잔을 다 마신 뒤 잠시 눈을 감고 상하좌우 눈알굴리기 운동도 한참 한 뒤, 마침내 마음을 다잡고 다시 화장실에 갔다. 어라? 그새 줄기가 더 높이 솟아 보인다. 손으로 대중해보니 한 뼘이 넘는다. 확실히 아까보다 더 자랐다. 

가설 3. 인정을 해야 하나. 내 머리에 살아있는 식물이 '살고' 있다. 사진을 찍어 구글 이미지 검색을 해보니 애플망고나무인 거 같다. 코로나 전 마지막 여행이었던 베트남에서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게 내 머리에서 자란다고? 혹시 씨를 삼켰다고 해도, 해외토픽처럼 위나 창자나 간처럼 소화기에서 싹이 틀 수도 있겠지만, 머리라고? 이 가설은 폐기다.

가설 4. 어제 퇴근길 어딘가에서 애플망고씨가 날라와 하필 내 머리에서 발아했다. 애플망고 씨앗 키우기로 검색해보니 세상에. 망고나 애플망고를 사 먹은 뒤 과육의 씨앗을 가지고 화분으로 키우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집에 단 한 개의 화분도 없고, 기껏 선물 받아도 일년 내에 확실히 죽여버리는 나로서는 경이로운 황금손들이다. 어쨌든 덕분에 애플망고 씨앗 크기를 확인해보니 크기가 엄지 손가락 만하고 발아하여 화분에 뿌리를 내리기까지 못 해도 10일 이상의 시간이 소요한다. 매일 머리를 감는데 그걸 열흘이 넘게 눈치 못 챘다는 게 말이 안 된다. 그럼 애플망고가 아닌 걸까? 다시 사진을 찍어 이미지 검색을 해보려는데 그새 더 자랐다. 재봉틀 책상에서 줄자를 가져와 재보니 30cm도 넘는다. 아까 검색해봤을 때는 긴가 민가 했는데, 이제는 애플망고라는 게 확연히 구별되는 상황이다.

가설 5. 이제 진짜 인정해야 하나. 난 지금 환시를 보고 있고, 심지어 그걸 만지고 느낄 수가 있다. 치매인 걸까. 미친 걸까. 약물에 중독된 걸까. 어느 쪽이든 병원에 가봐야 진단이 나올 수 있겠지. 남편을 깨웠다. 눈도 못 뜨고 '몇 신데? 왜?"를 중얼거리는 남편을 억지로 흔들어 내 머리를 보게 하니 경악을 한다. 남편 눈에도 보이고 남편 손에도 만져진다. 남편의 성화에 일어난 애들도 이걸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다. 가족들이 모두 어쩔 줄 모르고 난리다. 남편은 울기 시작했고, 딸이랑 아들은 폭풍검색을 하며 서로 싸운다.

가설 6. 우리 가족이 모두 집단환각에 시달린다면 가스 누출? 인덕션렌지를 쓰니 기각. 집단 약물중독? 어제는 나도, 남편도 야근을 햇고, 딸은 약속이 있었고, 아들은 학원에서 저녁을 먹었다. 집에서 아침을 먹는 건 나뿐이고, 점심은 당연히 다 따로 밖에서 먹었다. 식구들이 같이 먹는 건 대추와 느릎나무와 둥글레와 결명자를 넣어 끓인 물. 이 물이 오염되어 있었던 걸까?

가설 7. 일단 다 같이 병원에 가는 것으로 가족들을 설득하고 119에 전화했다. 그냥 머리가 너무 아픈데 거동이 불가능하다고만 했다. 그새 1m에 육박할 만큼 자란 식물의 잎사귀가 천장을 스치는 지경이라 택시나 버스를 타는 게 불가능했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안 믿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식물의 밑동을 잘라내볼까 싶었지만, 단단한 몸체엔 칼이 잘 들지도 않았다. 이제 온 가족이 환각에 시달리고 있는 게 아니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한다. 식물을 온전히 보존해 가는 것이 의학적 조치든, 과학적 연구에 도움이 될 거 같다. 난 식물의 중력을 감당하기 어려워 마룻바닥에 누워 119를 기다리는 중이다. 이건 실제 상황인 거다. 내 머리에는 애플망고나무가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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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23-01-09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아들래미 친구 엄마들과 만나 수다를 떨다가 한 엄마가 MBTI와 같은 성격검사를 받은 이야기를 했다. 가장 기억나는 질문이 ‘어느날 갑자기 내 머리에 애플망고나무가 자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으로 시작하는 한 문장을 대야 하는 질문이었다.
A: 나는 이상하고 신기하고 재밌다.
B: 나는 애플망고 나무를 열심히 키워봐야겠다.
C: 나는 자급자족이 가능하게 되어 신나고 행복하다.
D: 나는 병원에 가야겠다.
난 D였다.

조선인 2023-01-09 1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집에 와서 가족들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졌다.
남편: 나는 시체가 되었구나... 죽었구나...
딸: 나는 참 맛있겠다.
아들: 나는 애플망고 유튜버가 되어 떼돈을 벌겠다. 유명해지겠지?

꼬마요정 2023-01-09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가족분들 대답 너무 재밌습니다.
저는 이런 답이 떠오르네요?
머리에 나무가 자라다니, 울집 냥이들 장난감이 생겼네? 신나하겠군 ㅋㅋㅋ

예전에 전래동화에서 봤어요. 머리에 나무가 자라서 나무를 뽑았더니 머리가 움푹 패여서 비 오는 날 빗물이 고였는데, 비를 타고 내려온 미꾸라지가 거기 살았다는... 일본 전래동화였던 것 같은데 갑자기 그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재밌는 질문이에요^^

감은빛 2023-01-09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정말 재미있네요.
자급자족이 가능한 삶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아, 매일 애플망고만 드실 수는 없으니, 주위에 다른 과일이 머리에서 자라는 지인 분을 두시고 서로 나눠드시면 좋을 것 같아요.
 

달 너머로 달린다는 데 하늘에 뜨는 달인가 아니면 세월 속에 흐르는 달인가 알지 못하겠다.
달리는 말 또한 야백과 토하처럼 발로 달리는 말인지, 입과 입으로 전해지는 말인지 알 수 없다.
그저 내가 느낀 건, 작가를 둘러싼 온갖 허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난 김훈의 문체와 문장과 글을 좋아한다는 게 참으로 망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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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1-06 2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말이요. 아 진짜 저는 김훈작가의 그 꼰대성 너무 싫어서 안좋아하고싶은데 문장이..... 에휴..... 근데 이 책은 다른 책들에 비해 맘이 인가더라고요. ㅎㅎ

조선인 2023-01-09 09:01   좋아요 0 | URL
이 책이 와 좋다는 아니지만... 와 이렇게도 기깔나게 쓸 수 있구나 한 단어, 한 문장, 한 대목마다 감탄했어요. 정말 애증의 작가입니다.
 

이광수 주연의 <살인자의 쇼핑목록> 드라마가 재밌었다. 연출이 누구고 각본이 누군가 슬쩍 검색할 정도로. 한지완 작가는 <원티드>와 <오늘의 탐정>이라는 전작을 가졌고 특히 오늘의 탐정이 좋았던 나는 역시... 이러며 지나쳤다. 뒤늦게 원작이 있다는 걸 알고 책을 보니 달랑 25쪽짜리 단편이 8부작 드라마가 된 것이니 한지완 작가 정말 대단하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왕 빌린 김에 나머지 단편도 슥슥 읽어보니 강지영 작가 글빨도 장난 아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용서]는 따스한 끝이 좋았고, [러닝패밀리]와 [어느날 개들이]와 [각시]는 섬찟한 끝이 좋았다. [덤덤한 식사]는 제목 만큼이나 덤덤한 끝이 좋았다. 한 마디로? 짧은 단편에 기승전 클라이막스 결말까지 바이킹 태울 줄 아는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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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삼촌 중 한 분이 브라운대학교에서 석박사와 교수를 하시다 한국에 돌아오셨다. 삼촌이 말해주는 캠퍼스라이프는 아름다웠고 치열했고 반짝거렸다. 그렇기에 스미소니언 박물관이 있는 워싱턴 dc 다음으로 꼭 가보고 싶었던 도시가 프로비던스였고, 워싱턴 dc는 가봤으니 다음에 미국에 갈 기회가 있으면 프로비던스를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책 속의 프로비던스는 미국 동북부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이자 미국 최고의 빈곤 집약 도시이다.
한때 잘나가던 도시들의 어두운 그늘은 프로비던스뿐이 아니다. 설정된 모든 도시는 같은 흐름으로 기술되어 있다.
1. 잘 나가는 도시였음
2. 그런데 00 이후로 문제가 있음.
3. 그러나 희망도 좀 있음.
이 궤에 어긋나지 않는 도시는 밀워키와 휴스톤 정도뿐이다. 결론적으로 지금 당장 미국으로 떠나고 싶게 만드는 매력적 도시는 찾기 힘들다. 게다가 미국내의 이야기만 다루고 있어 세계사 속 미국의 어두운 그늘은 교묘하게 다 누락하는 효과가 있어 ‘미국사‘라고 하기에는 반푼 넘게 모자르다.
그래도 자잘자잘한 상식의 나열 중 잠깐의 대화소재로 활용할 거는 꽤 있다. 내가 교양엔터 작가라면 이 책에서 재미난 퀴즈문제를 제법 뽑아내지 않았을까.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각 도시마다 그를 대표하는 문학작품들을 언급했다면 독서가들에게는 더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뱀꼬리)
30개 도시로 읽는 한국사라는 책이 있다면 이 책보다 더 엄청난 반복성을 가질 거 같다.
1. 옛날옛적에 잘 나갔음
2. 지금은 인구 급감이 심각함.
3. 대한민국에 살아남는 도시는 수도권 외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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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일으킨 국가가 자신의 피해를 내세우면 얄미워지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 대상이 북한이다? 복잡 미묘한 심정으로 책을 골랐다. 그러나 다 읽은 지금 느끼는 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북한에서 발생한 학살과 전시 성폭력에 대해 공분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6장과 7장에 이어지는 고발은 너무 적나라하게 잔인하고 고통스러워 읽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여과없는 사진이 역사의 기록이라지만 보기 힘들어 손으로 가려가며, 건너뛰어가며 봐야 했다.
다만 전반적으로 중언부언 겹치는 글귀들이 눈에 걸린다. 필자가 쓰고 쓰고 또 써서 강조하고 싶은 내용이라 했더라도 편집자가 덜어내라고 충고했어야 하지 않았나 싶었다. 덕분에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읽을 사람에겐 편할 지도 모르겠다.
국제여맹 : 2,3,8장
북한 전쟁피해: 4장-7장
국제여맹의 UN 제명과 조사위원회에 참여했던 여성들의 사회적 고립은 여러 모로 씁쓸하다. 인류 박애와 진실 규명을 위해 냉전에 맞섰던 여성들은 모두 마녀사냥을 당해 버렸고, 오랜 시간 역사에서 지워지다시피한 존재였다. 이제는 그 흔적을 찾기도 힘든 인물들이라니 김태우 교수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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