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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로맨스 판타지를 읽기 시작했다
안지나 지음 / 이음 / 2021년 5월
평점 :
로맨스 판타지 장르를 즐기는 건 많은 여성 독자의 '길티플레저'이다. 백마 탄 왕자님의 등장, 서구 귀족 사회의 살롱문화, 환생과 빙의 등 다양한 설정을 통해 판타지적인 로맨스를 극대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맨스 판타지 작품들의 매력이 정말로, 단지 그뿐인 걸까? <어느 날 로맨스 판타지를 읽기 시작했다>는 우리가 로맨스 판타지에 대해 생각하는 익숙한 편견을 거부하고, 새로운 '읽기'의 방식을 제안한다.
"두 작품 모두 여자 주인공이 멋진 남자 주인공과 맺어지지만, 서사의 초점은 그들과의 사랑이 아니다. 샤르티아나와 아리아에게 낭만적인 연애는 안전, 사회적 위치, 명예, 부유함, 권력, 가족의 연장선상에 있다. 중요한 것은 샤르티아나와 아리아가 낭만적인 연애까지 포함하여 원하는 바를 모두 얻는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책에 따르면, 로맨스 판타지의 로맨스는 사랑 이상을 넘어선 의미를 가진다. 귀족 신분 사회에서 사랑을 이뤄내는 것이 가부장제의 종속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낭만적 연애를 떠나 현실적인 성취로도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다 로맨스 판타지 작품이라해서, 꼭 로맨스만을 다루는 것도 아니다. 작가는 오히려 낭만적 연애를 다룬 서사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연애보다는 원하는 것을 앞세우고 그것을 이뤄내는 여성의 모습이 두드러진다고 분석하고 있다.
"내가 여성 독자를 대상으로 한 웹소설이 그 자체로 페미니즘적인 경향을 가진다고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여성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 나아가 아무런 조건 없이 이를 응원하는 것. 로맨스 판타지의 생명력은 바로 그 여성의 생생한 욕망과 함께 호흡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어느 날 로맨스 판타지를 읽기 시작했다>는 사랑을 키워드로 작품을 분석하고, 나아가 작품을 읽는 독자의 욕망까지 유추한다. 로맨스 판타지와 페미니즘의 관계라니, 역설적이라 여겨질 수도 있지만 오히려 이 둘의 관계는 밀접하고 끈끈하다. 작가는 능동적인 여성상으로 재현되는 캐릭터들의 특성과 한계를 명확히 짚고, 나아가 그 안에서 '로맨스'가 가지는 서사적 역할에 대해 섬세하게 살핀다. 또한 로맨스 판타지 안에 흔히 나타나는 몇 가지 클리셰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여성의 어떤 행동이 '이기적'인가? 어떤 것이 낭만적인 행위이고 어떤 것이 폭력인가? (...) 왜 탈코르셋이 필요한가? 이 시대의 이상적인 사랑이란 대체 무엇인가?"
나 역시 로맨스 판타지 작품은 '숨어 보는 작품'이었다. 똑같이 '길티 플레저'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로맨스 판타지 독자들의 죄책감은 어디에서 비롯되며 쾌락은 언제 찾아오는지 분석한다. 로맨스 판타지 작품에 푹 빠진 적이 있는 독자라면, 이 책의 해석에도 분명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