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 "
반만년 역사에 빛나는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말이다.
뒤웅박이 어떤 주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쌀을 담을 수도 있고, 여물을 담을 수도 있고,
여물도 못 담아서 허구한 날 휑하고 비어있을 수도 있는 것처럼
여자도 어떤 남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돈 펑펑 쓰며 "김기사, 골프장으로!"를 외치며 살 수도 있고,
입고 갈 옷이 없어서 동창회도 못 나가고 콩나물 값을 깍으며 살 수도 있고,
남자의 바람기에 한 평생 속을 태우며 지지리도 복 없이 살 수도 있다....
뭐 이런 말이다.
여자들의 경제활동이 궤도에 오른 지금이야
이런 말을 자주 듣지 않지만,
40~50년대에 태어난 엄마들 세대에겐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는 말은 "진실"이었다.
어려서부터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는 말을 신앙처럼 믿고 자라난,
어떤 남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역전되는 드라마를
평~생, 질리도록 보고 몸소 겪으며 살아온 여자들 중 일부는,
딸을 키울 때 "세뇌교육"을 시켰다.
"여자는 남자를 잘 만나야 한다!"
"시집 잘 가는 게 최고다!"
"여자 잘나봤자 소용 없다. 팔자만 세진다." 등등....
고등학교 때, 이런 세뇌교육을 어렸을 때부터 받고 자라난 애가 있었다.
Y는 정말 애 늙은이 같았다.
고등학교 1학년이 매일 "결혼"을 생각했다.
여자에게 있어서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결혼이라고 했다.
고 3때, 대학 원서를 쓸 때,
Y에게는 가고 싶은 과가 없었다.
아무 과나 상관 없고,그냥 E여대만 가면 된다고 했다.
이유는? E여대를 가야 S국립대와 결혼을 하기가 좋다나?
어쨌든 Y는 E여대의 커트라인 과에 입학했다.
같은 신촌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Y를 종종 만났다.
Y는 미팅,소개팅을 무진장 많이 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에도 "선택과 집중" 전략을 알았는지
의대 애들하고만 만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원이 되면서 무진장 바빠졌다.
별로 친하지 않았던 Y하고는 스멀스멀 연락이 끊어졌다.
대학 졸업하고 몇 년이 지났을 때,
지금은 한물간 "I love school"이 유행 급살을 타면서
시내의 온갖 호프집은 동창회로 들썩 거렸다.
동창회에서 잊고 있던 Y의 소식을 들었다.
선 보고 몇 달만에 의사와 결혼을 했다고 했다.
남자네 집도 디따 부자란다.
그 얘기를 듣고 생각했다.
역시....꿈은 이루어진다.
그런데...몇달 후 동창회에서 Y의 이혼 소식을 들었다.
글쎄 남자가 너무 심한 마마보이였단다.
남자의 엄마는 영화 <올가미>의 윤여정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Y를 학대 수준으로 괴롭혔다고 한다.
저런.....뒤웅박이 깨졌다.
그 얘기를 듣고 무척 씁쓸했었다.
그 후로는 Y의 얘기를 듣지 못했다.
우리 집은 딸만 셋이다.
부모님께 한 번도 "여자 팔자는...." 이런 말 들어본 적 없다.
제사 지낼 때도 여자, 남자 똑 같이 한다.
우리 아빠가 딸만 있어서 페미니스트가 된 건지,
만약 아들만 있는데도 지금처럼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가 되었을 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부모님은 한번도 "여자 팔자는...." 이런 말 하신 적 없고,
어렸을 때부터 여자도 확실한 자기 직업이 있어야 한다고,
누구나 자기 밥벌이는 자기가 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내가 어디 가든 기 죽지 않고 매사에 당당할 수 있었던 건,
만만하지 않은 회사 생활을 어쨌거나 버티어 낼 수 있었던 건,
힘들다고 회사 그만두고 쪼르르 대학원에 가거나 확신 없는 결혼을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온전하게 엄마, 아빠 덕분이다.
만약 나도 Y처럼 어렸을 때부터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는 말을
하루에도 몇번씩 귀가 따갑게 듣고 자랐다면,
나도 돈 많은 남자에게 올인하고,
그런 남자에게 선택 받기 위해서 에너지를 몽땅 쏟았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 술자리에서 남자 후배 하나가 고민을 말했다.
여친을 만난지 1년 정도 됐는데, 양쪽 집안에서 결혼 얘기를 하고 있단다.
여친은 하루라도 빨리 결혼을 하고 싶어하는데,
그 이유는 회사를 그만 두고 싶어서라고 한다.
후배의 여친은 회사 다니기를 너무너무 힘들어 하는데
대안 없이 백조될 용기가 없어서 회사를 다녔고,
남친이 생기자 결혼하면 당장 회사를 때려 친다고 벼르고 있단다.
이제 막 직장생활 4년차인 후배는 두렵다고 했다.
자기도 힘든데 평생 누군가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그래서 결혼하기가 망설여 진다고 했다.
후배는 두려워 하고 있었다.
후배의 말을 들으면서 새록새록 느꼈다.
"자기 밥벌이는 자기가 해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엄청난 부자랑 결혼을 하건,
싸우디 왕자랑 결혼을 하건,
일부 연예인들처럼 늙다리 재벌 아저씨랑 결혼을 하건,
자기 밥벌이 정도는 힘들더라도 자기가 해야 한다고....
지금쯤 Y는 뭘하고 있을까?
행복했으면 좋겠다. 스스로의 힘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