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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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면 향기 나는 커피 한잔과 비스킷, 그날의 과일 몇 조각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품격 있는 남자가 있다. 키 190cm의 장대한 골격에 성 안드레이 훈장 수훈자이면서, 경마 클럽 회원이고, 사냥의 명인인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이다. 귀족인데 아침이 너무 단출한 거 아니냐고?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으로 인해 과거의 빛나던 시절은 끝이 났다. 신분제도는 사라졌고, 백작이라는 신분은 우리로 치면 옛날 조선시대의 양반 계급처럼 구닥다리 개념이 되어버린 것이다. 심지어 혁명이 일어난 시절 그는 프랑스에 있었지만, 혁명이 끝난 후 제 발로 러시아로 들어왔다. 구시대의 유물은 모두 감옥에 가두거나 죽이던 시절이라 당국이 보기엔 그가 혁명을 제압하기 위해 들어온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그가 지은 시 한편 때문에 혁명 반동분자가 아닌듯하니 봐주겠다는 판결을 내렸고, 대신 백작은 평생을 메트로폴 호텔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 

「구석의 작은 찬장에서 조그만 크림 주전자와 영국제 비스킷 두 조각, 그리고 과일 하나(오늘은 사과였다)를 꺼냈다. 백작은 커피를 따른 다음 아침의 감각이 온전히 살아나는 것을 즐기기 시작했다. 
아삭아삭한 사과의 새콤함....
뜨거운 커피의 쌉쌀함...
약간 맛이 간 듯한 버터의 풍미를 내는 향긋한 비스킷의 달콤함....
그것은 너무나 완벽한 조합이어서 백작은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다시 커피 그라인더의 손잡이를 돌리고, 사과를 네 조각으로 자르고, 비스킷을 덜어 식사를 처음부터 다시 새롭게 하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
< 모스크바의 신사 p. 276>

판결을 받기 전 화려한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지내던 백작은 판결과 함께 호텔의 꼭대기, 좁은 다락방에서 지내게 된다. 평생을 대저택에서 수많은 시종들의 수발을 받으며 살아왔던 귀족으로서는 처음 맛보는 굴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굴욕에 굴복하지 않는다. 옛날 선비들이 곧 죽어도 밖에서 일은 못한다고 책만 읽겠다고 버텼던 것과는 다르게, 그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바뀌었음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적응해나가는 삶을 살아간다. 

「이프 성에 갇힌 에드몽 당테스의 경우, 그의 정신을 말짱하게 유지해준 것은 복수에 대한 생각이었다. 부당하게 갇혀 사는 동안 그는 자신에게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체계적으로 복수할 계획을 설계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지켜나갔다. 세르반테스는 해적들에게 잡혀 알제리에서 노예가 되었지만, 그에게 삶의 버팀목이자 자극제가 된 것은 아직 쓰이지 않은 작품에 대한 기대감이었다. (중략..) 백작에게는 복수의 기질이 없었다. 장대한 작품을 구상할 상상력도 없었다. 제국을 복원하겠다는 꿈을 꿀 정도의 공상적인 자아도 없는 게 확실했다. 그는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는 사람으로서 백작이 본보기로 삼아야 할 인물은 전혀 다른 종류의 억류자일 터였다. 그것은 바로 해안으로 떠밀려 온 영국 국교도였다. 배가 난파되어 '절망의 섬'에서 살게 된 로빈슨 크루소처럼 백작은 실질적인 일에 헌신함으로써 자신의 결의를 유지해나가야 하리라. 」
<모스크바의 신사 p.53>

침대 하나와 책상, 옷장 등 생활에 꼭 필요한 가구 외에는 그 어느 것도 들일 수 없는 작은 다락방에서 그는 스스로 또 하나의 비밀공간을 개척해낸다. 옷장과 붙은 벽을 뚫어 옆방의 짐이 가득 들어있던 방을 자신만의 비밀 서재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는 어떤 환경이 닥쳐와도 그 안에서 자신만의 즐거움을 찾아내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는 의자를 뒤로 기울여 두 다리만으로 의지한 채 까딱까딱하며 책을 읽는다. 분명 호텔 안에 감금당한 자의 답답한 심정이 드러나야 하는데, 읽으면서 '근데 왜 부럽지?' 하는 생각이 든다. 로스토프 백작은 귀족 특유의 거만함보다는 잘 다듬어진 매너와 친절함, 특유의 쾌활함을 지녔다. 그는 호텔 직원들과도 격없는 사이를 유지하면서, 호텔에서 우연히 만난 9살 꼬마 니나와도 친구가 되어 호텔 곳곳을 탐험하는 모험 기질도 있다. 

소설 <모스크바의 신사>는 로스토프 백작이 호텔에서 지내는 32년의 세월을 연대기처럼 차례차례 설명하는 책이다. 우리네 대부분의 인생처럼 소설은 특별한 극적인 사건 없이 잔잔하게 백작의 삶을 보여준다. 근데 이상하게도 전혀 지루하지 않고, 페이지가 휙휙 넘어간다. 러시아 역사를 전혀 몰라도, 두꺼운 책에 거부감을 일으키는 사람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특히 나는, 그의 소탈하고 솔직한 일상이 좋았다. 

「나이 든 잡역부가 커피를 따르는 것을 지켜보면서 백작은 지금 노인은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 것일까 아니면 끝내는 것일까, 궁금했다. 어느 쪽이든 한 잔의 커피가 딱 좋은 시점일 거라고 백작은 생각했다. 커피 한 잔보다 더 많은 쓰임새가 있는 게 어디 있겠는가? 우아한 리모주 도자기 컵에 마시든 집에서 양철 컵으로 마시든 간에 커피는 새벽녘에 부지런한 사람의 기운을 복 돋우고, 정오에는 생각에 잠긴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밤중에는 괴로운 사람의 정신을 일으켜 세울 수 있다. 
"커피 맛, 정말 좋네요!" 백작이 말했다. 
노인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비결은 원두를 가는 데 있습니다." 그가 L자형 금속 손잡이가 달린 조그만 목제 기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끓이기 직전에 가는 거죠"」
< 모스크바의 신사 p.204>

백작은 호텔에서 일하는 나이 든 잡역부와도 허물없이 친구가 되어 커피를 얻어마실 줄 아는 사람이다. 유일하게 바깥공기를 마실 수 있는 호텔의 옥상에서 판자에 걸터앉아 바람을 느끼며 노인과 함께 맛있는 커피를 마신다. 커피를 좋아해서 그런지 이런 무심한 듯 일상적인 묘사가 너무 좋았다.  

이 소설의 주인공 로스토프 백작이 이토록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진 것은 어쩌면 작가도 그런 사람이기 때문일까? 역자 후기를 읽다가 이런 부분을 봤다. 

「번역에 참고하거나 유념해야 할 사항들을 10여 쪽 분량으로 정리하여 번역자에게 보내준 작가는 내 경우에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메일의 끝부분에는 혹시 뉴욕에 올 일이 있으면 기꺼이 자기에게 알려달라는 말도 덧붙여 놓았으니.... 흠, 이런 로스토프적 인간이라니. 성공한 비즈니스맨 출신 작가의 교양과 세련된 태도가 얼마간 이 작품의 주인공 로스토프 백작의 몸에 밴 귀족적 품격과 겹쳐 보였던 기억이 떠오른다.」
< 역자 후기 중에서 p. 720>

작가마저도 참 젠틀맨이다. 신사의 품격, 귀족의 품격이 어디 별건가.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과 교양을 가져야만 진정한 귀족이요, 신사 아닐까. 우리나라의 소위 귀족층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더러운 갑질 행태나 보다가 이런 품격 있는 귀족 이야기를 읽었더니 처음엔 어색하다가 나중엔 부럽고, 결국엔 좀 슬퍼진다.

신사의 품격은 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몸에 밴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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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0 09: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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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0 2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1984년 열린책들 세계문학 17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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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읽으면서 수없이 답답함을 느끼고, 덮었다 열었다를 반복했다. 윈스턴이 당에 잡혀가 고문당하는 장면을 읽다가 잠든 날엔 밤새도록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집단이 한 인간을 이토록 통제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모든 생활상의 움직임을 비롯해 말과 생각, 심지어 혼자 쓰는 일기까지 철저하게 통제하는 세상, 그것이 조지 오웰이 봤던 전체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주의의 모습이었다. 1984년, 사실 이 숫자는 내게 특별한 숫자다. 바로 내가 태어난 연도니까. 유명한 소설의 제목으로도 쓰이고, 기안84처럼 예명으로 쓰이기도 하는 숫자라 괜히 뭔가 특별한 해인 것 같아 뿌듯했다. 하지만 소설 속 1984년은 아마 조지 오웰이 본 미래의 어느 해 중 그나마 제정신을 가진 마지막 한 사람이 사라진 해를 뜻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다, 이 소설은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미명 아래 전혀 평등하지 않은 삶을 살고, 빅브라더가 모든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오로지 당은 권력을 이어가기 위해 아무 의미 없는 전쟁을 계속하고,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는 미래이다. 

「오웰은 일찍이 버마에서 제국주의적 참상을 목격했고, 영국 북부 지방의 탄광촌에서 광부 노릇을 하며 광부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체험했으며, 스페인에서 그토록 바라 마지않았던 노동 계급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건설이 실패로 돌아가고 파시즘이 다시 성장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스탈린 등장 이후 노동자들의 초기 혁명 정신이 사라지고 전체주의적 정치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줄곧 주시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확고한 혁명적 사회주의자에서 실망한 사회주의자의 모습으로 돌아선다. 이후 나온 <동물농장> 과 <1984년>에 당대의 정치 현실을 바라보는 작가의 비극적 정신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역사 해설 중>

책을 읽으며 조지 오웰이 왜 이런 글을 썼을까 궁금했다. 자본주의를 옹호하기 때문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평등을 기초로 한 사회주의가 여러 나라에서 결국엔 전체주의적으로 변질되는 것을 직접 목격하면서 사회주의의 어두운 면을 세밀하게 조명하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권력을 잡은 인간의 욕심은 결코 사그라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소설 속에 드러나는 영국 사회주의의 모습은 상상임에도 불구하고 진짜 같아 소름 끼치고, 가슴을 갑갑하게 조여오고 실제로 읽는 내내 불안하다. 

「부가 일반화된다면 차별이란 있을 수 없다. 개인적인 소유와 사치라는 측면에서 <부>가 공평하게 분배되고 <권력>이 소수의 특권 계급에 의해 통제되는 사회를 상상해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사회는 실제로 오랫동안 안정된 상태를 유지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여가와 안녕을 똑같이 향유하게 된다면, 빈곤에 의해 무감해진 많은 대중들은 교양이 생기게 되고, 따라서 혼자 사색이 가능하게 되며, 이 단계를 지나면 조만간 소수의 특권층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특권층을 몰아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결국 계층 사회는 빈곤과 무지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문득, 얼마 전 뉴스에서 봤던 어떤 교육부 고위장관의 발언이 생각난다.
 "민중은 개 돼지!"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교육을 책임지는 높으신 분의 생각이 이렇다는 것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음과 동시에 내가 알고 있는 이 세계의 숨겨진 면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됐었다. 어쩌면 소름 끼치는 진실이 자신도 모르는 새에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리가 받는 학교 교육이 사회에서 거의 쓸모없는 이유가 혹시 그런 것인지 하는... 

소설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당원으로서 진리부에서 일하고 있다. '진리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그는 당이 최근에 발표한 내용과 다른 과거의 기록을 조작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최근 당이 유라시아와의 전쟁에 대해 발표를 하면 어제까지만 해도 이스트 아시아와 계속해서 전쟁을 벌여왔던 것이 없던 일이 되고, 당은 계속해서 유라시아와만 전쟁을 벌여왔던 것으로 기록을 바꾼다. 당의 완전무결성을 지키기 위함이다. 당원들은 집에서 혼자 일기를 쓰는 것만으로도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쥐도 새도 모르게 증발될 수 있다. 후대에 기록으로 남겨질 수 있는 글을 개인이 남기는 것은 엄청난 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날마다 그리고 거의 매 순간마다 과거는 현재가 되어비린다. 이런 식으로 당이 발표한 모든 예언은 문서상으로 옳다고 증명되고, 그때 필요하지 않은 뉴스 항목이나 의견 표출은 기록상으로 절대 남겨지지 않는다. 모든 역사는 필요할 때마다 깨끗이 지웠다가 다시 쓰는 양피지와 같은 것이다. 일단 이런 작업이 행해지고 나면 거기에 허위가 개입되어 있다고 증명할 길은 전혀 없는 것이다. 

당은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한다. 사고의 폭을 제한하는 신어를 만들어 언어의 쓰임을 제한하고 그로 인해 민중들이 언어로 다양한 생각을 펼치는 것 자체를 막고, <이중사고>라는 생각법을 교육해 어떤 사실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이상의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모순적인 두 개의 생각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결국 모든 민중을 바보로 만들어 조종하는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신어는 주로 바람직하지 못한 어휘를 삭제하고, 비정통적 의미를 담고 있는 어휘를 제거하고, 가능한 한 어휘의 2차적 의미를 없애 버림으로써 이루어졌다. 하나의 예를 들면, <자유로운 free>이라는 어휘는 신어에 존재하고 있지만, <이 개에는 이가 없다 This dog is free from lice>, 혹은 <이 밭에는 잡초가 없다 This field is free from weeds>라는 문장에서만 사용될 뿐이다. 이 어휘는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politically free>, 혹은 <지적으로 자유로운 intellectually free>이라는 옛날의 의미로는 사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정치적으로 지적인 자유는 이제 더 이상 하나의 개념으로 존재하지 않으므로 존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

소설 속 당의 지배 방법을 보면 언어로 인한 지배가 많다. 과거 기록을 조작하고, 신어를 만들어 생각의 범위를 제한하고, 개인의 글쓰기를 제한하고, 사상범을 고문하는 방법도 대부분 언어를 통해 자기 자신을 놓아버리게 만드는 방법을 쓴다. 그만큼 언어와 글이 인간의 생각을 크게 지배하기 때문이리라. 책 한 권이 사람의 생각을 확 바꿔놓기도 하는 것처럼. 

사실 <1984년>은 한편의 리뷰로 대신하기엔 할말이 너무 많기에 책을 읽으면서 했던 생각을 일일이 나열하자면 아마 끝도 없을 것 같다. 전체적인 내용의 촘촘함이 남다르고, 충격적이면서도 계속 곱씹어 보게 만드는 내용들이 많아서 시간을 두고 여러 번 읽어봐야 하는 책이 아닐까 싶다. 고전이 고전인 이유는 분명히 있다. 
거기다 이야기의 흐름도 마치 스릴러처럼 아슬아슬함을 가진 채 흘러가기에 단지 재미를 위해 읽는다손 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열린책들의 번역 또한 깔끔한 편이라 읽기에 나쁘지 않다. 

특히나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꼭 읽어봤으면 한다. 
내가 모르는 세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를 지배하는 세상에 대해 한 발짝 물러서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진 뒤에 사회에 나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는 천지 차가 있을 테니까. 

나도 좀 더 빨리 읽을 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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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소여의 모험 (양장) 새움 세계문학전집
마크 트웨인 지음, 여지희 옮김 / 새움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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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아동용 도서라니, 어릴 적 읽었던 동화책에도 이런 내용이 나왔었나? 원작으로 읽은 톰 소여의 모험은 아동용 치고는 꽤나 수위가 높은 편이다. 살인사건이 등장하기도 하고, 아이들끼리 가출하여 해적을 꿈꾸고 몰래 담배를 피우는 등 딱 그맘때 초등학생 정도 되는 아이들이 겪었던 일들 치고는 아주 버라이어티하고 위험해 보이는 일들 천지다. 그만큼 이야기는 무척 흥미롭고 처음부터 끝까지 지루한 부분 없이 흘러간다.  재미있게 읽고 책을 덮으면서 불현듯 '근데, 이게 왜 #미국문학 의 고전이 된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 속에는 아이들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흑인이나 인디언을 차별하는 말들이 나오고, 그렇다고 이야기에 교훈이 될만한 내용이 담겨있다거나 한 것도 아니다. 

문득 작년에 읽었던 《피터와 앨리스와 푸의 여행》이라는 책에서 읽었던 마크 트웨인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나서 그 책을 꺼내서 다시 읽었다. (고전 명작 고서적을 수집하는 저자가 고서적과 그 저자들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낸 책인데 너무 재밌어서 내가 무척 아끼는 책이다.) 마크 트웨인은 애초에 작가보다는 스탠딩 코미디에 가까운 재밌는 강연으로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톰 소여의 모험에 나오는 사건들도 사실은 작가 자신의 어린 시절 회고록에 가까운 것으로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여 많이 팔기 위해 쓴 상업적인 통속소설이었다고 한다.  《톰 소여의 모험》과 그 뒤에 나온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순전히 웃기고 재밌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책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비속어, 욕설, 살인, 범죄, 인종차별 등의 이야기가 버젓이 적힌 이야기가 사랑받고 있는 것에 분노를 터뜨린 한 지역의 도서관에서 이 도서를 금서로 지정하기에 이른다. 거기다 《작은 아씨들》을 쓴 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도 격렬히 그 결정에 찬성하며 공개적으로 마크 트웨인의 작품을 비난한다. 그러자 도덕률을 가지고 문학적 창의성을 억압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평소 마크 트웨인을 옹호하지도 않던 사람들까지 나서서 그의 작품을 치켜세우고 옹호하기 시작한다. 결국 마크 트웨인의 책들은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더 알려지고 작품의 찬반 토론이 오가는 가운데 각종 찬사가 쌓여 현재 미국의 대표적인 고전문학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라고 한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싶다. 

저자의 본명은 새뮤얼 랭혼 클래먼스인데 필명인 마크 트웨인은 원래 수로 안내원이 직업이었던 저자가 직업상 썼던 말이다. 깊이 12피트를 의미하는 단어 '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물이 깊어 안전한 수위라는 말이라 일할 때 가장 반가운 용어였다고 한다. 그는 그 필명대로 물 들어올 때  제대로 노를 저어 그 이후로 더 열심히 강연을 다니고, 돈을 더 벌려고 자기가 직접 출판사를 차리기도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전 세계로 강연 여행을 다니면서 본의 아니게 세계적으로 작품과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는 신기한 이야기. 마크 트웨인은 사실 엄청 돈 욕심 많은 심술쟁이였단다. 

그렇게 우리는 어릴 때부터 《톰 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으면서 자라나고 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정말로 책은 재밌다. 고전 명작동화 특유의 교훈 같은 것도 없고, 딱히 아름다운 이야기도 아니지만 진짜 딱 저 나이 때 나도 저랬지 싶어 슬쩍 웃음이 난다. 죽음의 공포를 무릅쓰고 보물을 찾아 나서는 아이들, 근처의 섬으로 도망가서 죽은 척했다가 며칠 뒤 다시 살아돌아와 마을의 영웅이 되는 아이들, 관심받고 싶고 어른인 척하고 싶어 하는 어린 개구쟁이들의 심리가 그대로 들어있어 아슬아슬하면서도 귀엽기 그지없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는 더 많은 욕설과 범죄가 등장한다는데 뗏목을 타고 여행을 떠나는 개구쟁이들의 이야기가 궁금해 조만간 찾아읽을 것 같다. 

이야기도, 작가도 특별해서 더 기억에 남는 책.
다만 아이들이 어릴 때는 원작을 읽지 못하도록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런 거 따라 하면 꽤나 골치 아플 듯...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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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고양이 1~2 세트- 전2권 고양이 시리즈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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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주제를 정해 깊이 있게 파고 들어가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글을 좋아한다. 신에 대해, 사람의 뇌에 대해, 죽음에 대해, 인간에 대해 테마별로 깊이 있게 파고드는 그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이 사람은 진짜 다른 세계에 대해 뭔가 아는 것 아닐까 하는 상상까지 하게 된다. 정말 그럴듯한 상상력, 방대한 지식에서 나오는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좋았는데 최근에 나온 작품 몇몇에서는 그런 빛나는 통찰력과 상상력이 좀 떨어지는 것 같아서 아쉬웠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손꼽히면서도 은근 내 주변을 보면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작가인 듯도 하다. 


베르베르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이번 신간 《고양이에 꽤 많은 기대를 했다. 우선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매력적인 동물 고양이가 주인공이라는 점, 베르나르 베르베르 소설의 특징 상 중심 주제인 고양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가 생각지 못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상상했던 까닭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내가 원하던 스타일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고양이 자체의 특징을 파고들어가기보다는 페스트와 전쟁이라는 스케일이 너무 큰 배경 속에서 고양이가 아닌 고양이의 탈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행동하는 고양이 주인공들이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양이들이 조금만 더 현실적이었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훨씬 몰입해서 봤을 텐데 말이다. 

소설의 주인공 '바스테트'는 젖소 무늬가 새겨진 얼룩 고양이다. 나탈리라는 집사와 사는 암고양이이고,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는 말 그대로 도도 냥이다. 어느 날 이웃집에 사는 수컷 샴고양이 '피타고라스'를 발견한 바스테트는 우연히 그와 대화를 나누다가 그가 인간세계에 대한 방대한 지식은 물론 고양이와 인간의 역사에 대해서도 빠삭하게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다. 바스테트네 집에 최근 새로 들어온 순종 앙고라 수컷 고양이 펠릭스와는 차원이 다른 지성을 뽐내는 피타고라스에게 바스테트는 점점 빠져드는데.. 그러는 사이 인간 세계가 심상치 않다. 하루가 멀다 하고 테러가 일어나더니 전쟁으로 번진다. 그러나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이 나타났는데, 바로 쥐를 매개로 퍼지는 페스트! 14세기에 전 유럽의 인구 절반을 죽였던 페스트가 현재에 다시 덮쳐온 것이다. 어마 무시한 쥐들의 번식으로 온 인류가 멸망 위기에 처했다. 명색의 쥐들의 천적인 고양이 대표 피타고라스와 바스테트는 이 위기를 어떤 식으로 돌파해나갈 수 있을까. 

「개의 생각 : 인간은 나를 먹여주고 지켜주고 사랑해준다. 인간은 신이 분명하다.
고양이의 생각 : 인간은 나를 먹여주고 지켜주고 사랑해준다. 인간에게 나는 신이 분명하다. 」

고양이는 개와 비슷하게 사람에게 길러지는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개와 전혀 다른 습성을 지닌 미스터리한 동물이다. 세상에서 가장 제멋대로 살면서도 한없이 귀여움 받고 인간을 집사로 부리며 살 수 있는 동물은 고양이가 유일하지 않을까. 소설에서는 피타고라스의 입을 통해 고양이가 인간의 역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해왔는지 꽤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흡사 소설의 형식을 빌려 고양이의 역사를 공부하는 느낌이랄까. 고대 이집트에서는 신으로 추앙받다가 중세에는 페스트를 일으킨 악마로 오해받아 족족 죽임을 당하기도 하는 등 고양이는 인간 역사에서 찬물 더운물을 참 많이도 왔다 갔다 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이 소설을 통해 고양이의 높은 정신적 가치를 새롭게 조망하고 싶었던 걸까. 소설 속 고양이들은 인간보다 높은 정신에 가닿아있다.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르지. 고양이들이 우리 인간과 집사들을 보면서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하지만 조금 더 있을법한 이야기였으면 어땠을까 싶다. 인간의 역사와 철학을 줄줄 외는 고양이보다는 좀 더 다른 차원의 지능을 가진 고양이를 바랐단 말이다. 기대와 좀 다른 방향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페이지 터너 소설이라 잡자마자 이틀 만에 1, 2권 다 읽어버렸다. 

신비하고 미스터리해서 몇 년 간 같이 살아도 아직 속을 모르겠는 요물 같은 고양이에 대한 소설이 앞으로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파도 파도 매력이 또 나오는 고양이 같은 동물이 어디 흔한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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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러 가자고요
김종광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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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무방비로 자연스럽게 녹아들 듯 읽게 되는 소설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갈등 요소나 결말 따위 중요하지 않은 채 그냥 이야기 자체에 흠뻑 젖어들어 읽게 되는 소설, 그는 진정 소설가보다는 만담꾼이 아닌가 싶다. 소설을 읽는 느낌이 아니라 시골에 놀러 가서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주변 어른들이 하시는 재미난 이야기를 엿듣는 느낌이랄까. 농촌 특유의 순수한 듯 투박한 생활과 우악스러운 욕설과 사투리가 난무하지만 불쾌하지 않고 오히려 욕쟁이 할머니의 맛깔난 욕을 구경하는 것처럼 신기하다. 내가 읽은 현대 소설 중에 이런 느낌의 소설이 있었던가, 읽다 보면 소설 <토지>나 염상섭의 <삼대>같은 전근대 소설이 떠오른다. 하지만 무심하게 툭툭 튀어나오는 세월호, 천안함, 스마트폰, 자가용 같은 낱말에 역시나 배경이 현대지, 하며 다시 무릎을 치며 읽게 된다. 

그렇다. 이 소설은 단편 『장기 호랑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농촌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집이라고 하여 완전히 다른 이야기들이 엮인 단편집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처럼 각각 발표한 단편소설들이 모여 #연작소설 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범골이라는 같은 배경 아래 살아가는 다양한 이들의 이야기를 보여주는데 그 중심에는 노인회장 김사또와 오지랖 댁, 그의 아들 소판돈 이 있는 듯하다. 첫 단편 『장기 호랑이』에 등장하는 아빠와 아들은 아마도 소판돈과 그의 아들이 아닐까 싶다. 그 소판돈은 아마도 작가 자신을 오마주한 인물인 것 같고 말이다. 그렇다면 김사또와 오지랖 댁의 모습이 아마도 작가 부모님의 모습을 본뜬 캐릭터인 걸까. 작가의 말에서 그는 시골에서 아직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시는 아버지, 어머니의 이야기를 집착적으로 남기고 싶었단다. 시골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사건들의 역사들을, 이제는 도시인의 고독에 묻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농촌 노인들의 고독과 삶의 이야기를 자기라도 꼭 남겨야겠다는 책임감이 아니었을까. 

표제작 『놀러 가자고요』는 마을 사람들의 단체 여행을 앞두고 참석 여부를 묻기 위해 노인회장인 남편 김사또를 대신해 오지랖댁이 마을 사람들에게 2~300통의 전화를 대신 돌리는 이야기가 전부다. 여행에 참석할 것인지 묻는 질문과 짧은 대답이 전부인 대화지만 각기 다른 성격과 사연, 반응을 보는 것만으로도 페이지가 획획 넘어간다. 그러다가도 한 번씩 현재를 쿡 찌르는 대답이 나와 움찔하게 만들기도 한다. 

「- 아줌마, 4월 16일이 무슨 날이지 모르죠?
노인회 놀러 가는 날이라니까요. 어라, 잠깐만요, 달력에 뭐라고 적혀있네. '국민 안전의 날'? 이런 날도 다 있었나. 
- 세월호가 가라앉았던 날이라고요, 4월 16일이. 그 슬픈 날에 놀러 가는 건 아니죠. 국민 안전의 날, 그것도 세월호 같은 일이 다시 생기면 안 되겠다 해서 만들어진 날이라고요.
- 그럼, ..... 그날은 뭐 하고 있어야 해요?
- 뭐......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암튼 놀러 가는 것은.... 그러니까 뭘 해야 하냐면......
그러니까 못 가신다는 얘기죠?
-잘들 다녀오세요.」
< 놀러 가자고요 p. 126>

단편 『산후조리』에서는 새끼를 낳는 소 '얼간년'과 소를 돌보는 오지랖댁의 눈물겨운 사투를 자못 유쾌하게 그려내고 있다. 소는 농촌 사람들의 큰 자산임이 분명하긴 하지만 팔아서 돈이 되는 재산이기 이전에 소중한 생명인 것이다. 다리가 아파 잘 걷지도 못하는 오지랖댁은 아픈 엄마 소 '얼간년'과 새끼소가 둘 다 밥도 안 먹고 시름시름 앓자 투덜투덜하면서도 그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새끼에게는 젖병에 우유를 담아 물리고, 엄마소를 위해 힘들게 여물죽을 끓여 먹이는 등 지극정성이다. 얼간년과 새끼소는 오지랖댁의 정성에 과연 건강해질 수 있을는지. 
소설 이야기 곳곳에선 구제역에 관한 이야기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소 키우는 시골에선 구제역이 제일 무서운 존재이긴 한가보다. 가까운 동네에 구제역이 발생하면 그 동네 모든 소들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도 살처분을 면치 못한다. 그래서 전국에 구제역이 돌기 시작하면 시골 사람들은 바깥출입을 자제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식들도 명절에 못 오게 한단다. 

점점 현대 소설에서 순수한 농촌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사건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닌, 캐릭터 한 명 한 명이 중심이 되어 농촌 생활 전반을 자연스럽게 녹여 끌고 가는 이야기는 정말 드문 방식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농촌을 마냥 미화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순수한 건 순수하게, 우악스러운 건 우악스럽게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거기다 글이 유쾌하고 흥겨운 느낌이라 축축 처지는 느낌 없이 술술 읽힌다. 사실은 처음에 나온 단편 2개 정도를 읽다가 '대체 이게 뭐야' 하는 생각을 했었더랬다.(소곤) 작가 또한 자신의 책이 중쇄된건 작가정신에서 나온 책  1권 밖에 없다며, 자신의 책을 읽어주는 소수 정예 독자들 덕에 나무에게 미안하지 않다는 소리를 해대고 있어 별 기대 없이 읽었다. 하지만 뒷부분으로 갈수록 마냥 무방비로 훅 빠져든다. 

맛있는지 모르겠는데 자꾸 먹게 되는 과자처럼, 자극적이지 않은데 마냥 넋 놓고 읽게 되는 이야기랄까. 
이 소설은 뻥튀기를 닮았다.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자꾸만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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