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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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왜 이제야 읽었을까. 유쾌하고 웃픈 에피소드들이 많았지만 나는 오베라는 남자가 사랑하는 방식에 집중하며 읽었다. 밑줄 긋고 싶은 문장이 너무 많았다. 그가 자신의 아내 소냐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사랑했는지. 겉으로 보기엔 한없이 까칠한 고집불통 노인 같지만 속은 더없는 로맨티시스트였던 오베. 그의 사랑은 무뚝뚝했지만 진짜 같았다. 

「그는 철도 회사에서 5년 동안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기차를 탔다가 처음으로 그녀를 보았다. 아버지가 죽고 난 이후 처음 웃은 게 바로 그날이었다. 
인생이 다시는 전과 같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은 오베가 세상을 흑백으로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색깔이었다. 그녀는 오베가 볼 수 있는 색깔의 전부였다. 」

오베는 원칙을 중시하는 노인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그의 사랑하는 아내 소냐가 죽었다. 오베는 소냐의 뒤를 따라가기 위해 죽음을 준비 중이다. 그녀가 없는 삶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기에.. 

그녀를 그리며 상상하는 것 중에서 가장 간절한 건, 정말로 다시 하고 싶은 건 그녀의 손을 잡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 집게손가락을 접어 그의 손바닥 안쪽에 숨기는 버릇이 있었다. 그녀가 그럴 때면 세상 어떤 것도 불가능한 게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워할 수 있는 모든 것들 중에서, 그것이 가장 그리웠다. 」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이 없다고 상상했을 때, 정말 가장 그리운 것은 그 사람의 따뜻한 손을 잡는 것일 것 같다. 가장 쉬운 일이면서도, 다시는 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 간절함을 왠지 알 것 만 같다. 

「그녀는 그냥 웃고는 자기는 세상 무엇보다 책을 사랑한다고 말하더니 자기 무릎에 있는 책들이 무슨 내용인지 하나하나 열심히 말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베는 자기가 남은 일생 동안 그녀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그녀의 입으로 듣길 원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에 열렬히 떠드는 것에 대해 듣는 것은 즐겁다. 그의 조금은 흥분되고 미소 띤 얼굴을 보는 것이 좋으니까. 

 「그녀는 더 나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소냐에게 그는 첫 저녁 식사 테이블에 올라 있던 살짝 부스스한 분홍색 꽃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입던 갈색 정장이 살짝 꽉 끼는 널찍하고 슬픈 어깨였다. 그는 정의와 페어플레이와, 근면한 노동과, 옳은 것이 옳은 것이 되어야 하는 세계를 확고하게 믿는 남자였다. 훈장이나 학위나 칭찬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래야 마땅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종류의 남자들은 이제 더 이상 그리 많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소냐는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이 남자를 꼭 잡았다. 
아마 그는 그녀에게 시도 써주지 않을 테고 사랑의 세레나데도 부르지 않을 것이며 비싼 선물을 들고 집에 찾아오지도 않을 테다. 하지만 다른 어떤 소년도 그녀가 말하는 동안 옆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좋다는 이유로 매일 몇 시간 동안 다른 방향으로 가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자기 넓적다리만큼이나 두꺼운 그의 팔을 잡고 그 부루퉁한 소년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필 때까지 간질이면, 그건 마치 보석을 둘러싸고 있던 회반죽이 갈라지는 것 같은 일이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면 마치 소냐의 내면에서 무언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그 무언가는 온전히 소냐의 것이었다. 」

내가 짝꿍씨를 간지럽힐 때 그의 못 참겠다는 웃음이 좋다. 그 웃음은 그의 가족들도 모르는 나만 아는 모습이다. 꺄르르 꺄르르, 그건 온전히 나의 것이다 :)

오베는 얼른 소냐의 곁으로 가고 싶어 여러 번 자살을 시도하지만, 그때마다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그의 바보 같은 이웃들 때문에, 털이 다 빠져버린 못생긴 고양이 때문에.

「묘석과 고양이 모두 그의 옆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오베가 잠시 자기 신발을 바라보았다. 신음소리를 냈다. 눈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묘석에서 눈을 더 털어냈다. 조심스레 그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보고 싶어." 그가 속삭였다. 
오베의 눈가가 살짝 반짝였다. 그는 뭔가 뭉클한 게 팔을 누르는 걸 느꼈다. 잠시 뒤 그는 고양이가 자기 머리를 그의 손바닥에 부드럽게 얹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고양이와 오베의 귀여운 케미가 너무 즐거웠다. 강아지처럼 어디든 오베와 함께 다니는 고양이라니, 환상적이잖아.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집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요." 소냐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처음에는 새 물건들 전부 와 사랑에 빠져요. 매일 아침마다 이 모든 게 자기 거라는 사실에 경탄하지요. 마치 누가 갑자기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와서 끔찍한 실수가 벌어졌다고, 사실 당신은 이런 훌륭한 곳에 살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말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러다 세월이 지나면서 벽은 빛바래고 나무는 여기저기 쪼개져요. 그러면 집이 완벽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불완전해서 사랑하기 시작해요. 온갖 구석진 곳과 갈라진 틈에 통달하게 되는 거죠. 바깥이 추울 때 열쇠가 자물쇠에 꽉 끼어버리는 상황을 피하는 법을 알아요. 발을 디딜 때 어느 바닥 널이 살짝 휘는지 알고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옷장 문을 여는 법도 정확히 알죠. 집을 자기 집처럼 만드는 건 이런 작은 비밀들이에요."」

누군가를, 그리고 무언가를 진정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완벽하기 때문이 아니라 '완벽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다. 그의 부족한 부분을 나만 알고 있어서, 내가 그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기에 그 사랑은 더 소중하고 아름답다. 

「죽음이란 이상한 것이다. 사람들은 마치 죽음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양 인생을 살아가지만, 죽음은 종종 삶을 유지하는 가장 커다란 동기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 중 어떤 이들은 죽음을 무척이나 의식함으로써 더 열심히, 더 완고하게, 더 분노하며 산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죽음의 반대항을 의식하기 위해서라도 죽음의 존재를 끊임없이 필요로 했다. 또 다른 이들은 죽음에 너무나 사로잡힌 나머지 죽음이 자기의 도착을 알리기 훨씬 전부터 대기실로 들어가기도 한다. 우리는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만, 대부분은 죽음이 우리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데려갈지 모른다는 사실을 더 두려워한다. 죽음에 대해 갖는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이 언제나 자신을 비껴가리라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우리를 홀로 남겨놓으리라는 사실이다. 」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내가 언젠가 죽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언젠가는 죽을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들을 보내고 홀로 남을 내 상태가 너무 무섭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살아있는 동안 더 열심히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 

사실 오베라는 남자는 엄청 유쾌하고 유머러스한 분위기의 소설인데, 기저에 깔려있는 이야기는 아련하고 마음 아프다.   
단순히 성격 까칠한 할아버지에 대한 얘기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사랑과 죽음, 사람과 인생에 관한 이야기였다. 
아, 이런 이야기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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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의 공부 - 책에 살고 책에 죽다
이인호 지음 / 유유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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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라는 단어가 주는 설렘을 좋아한다. 어디서든 책만 펼치면 딴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 누군가를 직접 만나지 않고도 다양한 이야기와 지식을 한꺼번에 얻을 수 있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아무리 디지털이 발달해도 책 산업이 망하지 않는 비법이 아닐까. 현란한 영상과 화려한 그림이 없어도 사람들은 글자들 속에서 더 큰 세계를 만들어내고 상상한다. 그래서 난 개인적으로 영화로 본 영상보다는 책을 읽으며 머릿속으로 상상한 장면을 더 오래 기억하는 편이다. 누군가가 만들어낸 완성된 화면은 사람을 멍하게 하는데 반해 책은 적극적으로 나만의 세계를 완성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책을 많이 읽은 사람들을 보면 그 머릿속에 어떤 세계가 형성되어 있을지 항상 궁금하고, 감탄스럽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책을 읽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는지도.  

<책벌레의 공부>는 중국의 실존했던 인물들, 일명 책벌레들이 실제 행했던 공부법과 책 읽는 법을 담고 있다. 단순히 이렇게, 저렇게 읽어야 한다고 하며 잔소리를 늘어놓는 게 아니라 실제 있었던 사례 중심으로 나와있어 흥미롭기도, 신기하기도 하다. 다만 책이 귀했던 옛날 시대를 배경으로 서술된 이야기라 다소 현실감이 떨어지긴 한다. 한자 위주로 적힌 <논어>나 <주역>같은 책들을 여러 번 읽고 외우며 학문 위주로 공부했던 이들에 대한 얘기라 지금의 일반적인 독서 환경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하지만 분명 책을 좋아하는 이들 사이의 공감대가 될만한 내용도 분명히 있기에 이들의 치열하고 피땀어린 공부법을 읽어보는 것도 꽤나 즐거운 일이리라. 

책의 초반 부분부터 머리를 꽝 때리는 부분을 만났다. 요즘 나의 독서 패턴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문장이다. 


「책은 빌리지 않으면 읽지 않게 된다. (.. 중략) 비단 책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 물건이 다 그렇다. 남의 물건을 힘들게 빌려와야 언제 달라고 할지 몰라 조마조마한 마음에 애착이 가는 것이다. 오늘은 나한테 있지만 내일은 돌려줘서 다시 볼 수 없어야 소중히 여기게 된다. 내 것이면 언제든지 볼 수 있으니 오히려 모셔놓고 정작 읽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게 되지 않던가. 」 <p.23>

요즘 내가 집에 사둔 책을 잔뜩 쌓아두고도 도서관에서 빌려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책들만 주야장천 열심히 읽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기에, 그런 책들은 열심히 북마크 해두고 좋은 문장은 옮겨두기까지 한다. 하지만 내 손에 들어온 내 책은 한마디로 잡아놓은 물고기이기에 독서가 한정 없이 미뤄지는 경우가 많다. 요즘 리디북스가 무료로 열심히 재밌는 책을 빌려주는 이유가 다 여기 있는 것이다. 싸게 파는 것보다 차라리 무료로 빌려주는 것이 앞으로의 판매에 있어 플러스가 있겠지. 빌려줘야 사람들이 읽으니까. 그래야 읽은 사람들이 재밌다고 소문을 내고 그 입소문으로 책이 더 잘 팔리니까. 나 또한 무료로 빌린 책들은 기를 쓰고 읽으려고 노력한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모든 책을 빌려서 읽어야 하나. 갑자기 집안 곳곳에 쌓인 책들을 보니 죄책감과 함께 한숨이 밀려온다ㅠ 

「옛사람은 책을 읽을 때 숙달되게 읽었지 많이 읽으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박학다식을 멀리한 게 아니다. 매일 조금씩 쌓여서 결국 많아지는데, 그렇게 많아지면 잡다해지지 않고 잊어버리지도 않는다. 날이 갈수록 더 불어남을 사람들이 감지하지 못할 따름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꾸준히'가 요령이다. 하다 말다 하는 것은 오히려 아니 함만도 못하다. 」 <p. 112>


책을 읽다 보면 점점 마음이 조급해지는 나를 발견한다. 사람들이 다 읽은 책을 나만 안 읽은 것 같고, 거기다 새로운 책들은 매일 쏟아지고, 읽고 싶은 책 리스트는 한정 없이 늘어난다. 그 속도를 쫓아가다 보면 내가 책을 읽는 건지, 책이 나를 읽는 건지 모르겠는 순간이 온다. 엄청나게 읽은 듯한데도 허망한 기분이 느껴지고, 독서로 무엇을 얻었는가에 대해 확신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슬슬 독서도 별거 없구나 하면서 손을 놓게 될 수 있다. 이런 독서법이 어쩌면 가장 위험한 독서법일지 모른다. 조금씩 꾸준히 매일 읽는다는 것, 많이 읽지 않더라도 하나라도 제대로 알아가는 것, 그것이 길게 놓고 보면 더 많은 것을 얻어 가는 독서 방법일 수 있다. 

매달 독서 달력을 정리하면서 남보다 적은 책을 읽은 달은 괜히 분하고 부끄러웠다. 많이 읽은 거랑 많이 배운 거랑은 정비례 관계가 아닐지 모르는데 말이다. 꾸준히 내 속도로 꼭꼭 씹어서 삼키는 독서가 중요하다. 매일 꾸준히 지치지 않고 즐겁게 하는 독서가 결국엔 이긴다. 

매일 읽으면서 배움의 기쁨에 웃음이 배시시 나는 독서를 하고 싶다. 
나의 세계를 넓혀주고, 생각지 못했던 사고를 가능하게 해주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나고 싶다. 
쫓기듯 급하게가 아니라, 매일 밥을 먹듯 편하고 일상적으로. 
그것이 내가 책을 좋아하게 된 진짜 이유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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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4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04 2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손그림 엽서북 : 핑크 에디션 - 마음 가는 대로 상상해 그려보는 손그림 엽서북
공혜진 지음 / 인디고(글담)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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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이 뻗치는만큼 삐뚤삐뚤 마음대로 그려본다. 우연히 주워든 나뭇잎의 모양이, 우연히 생긴 물건의 그림자가 왠지 익숙해 보인다면 고민할 것 없이 한번 떠오르는 대로 그려보는 거다. 손그림 엽서북은 그렇게 탄생했다.  우연히 발견한 사소하고 작은 물건들에서 익숙하고 재미난 것들을 발견해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게 참 좋습니다. 
날씨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느껴보는 것, 무심히 지나쳤던 사물과 자연물에게 말 걸어보는 것은 일상을 색다르게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요.」




신기한 모양의 나뭇잎을 주워다 가만히 보다 보니 아름답게 자라난 사슴뿔이 생각난다던가, 보송보송 동그란 눈송이를 만들고 보니 귀여운 보노보노 얼굴이 생각난다던가 하는. 그럴 땐 그냥 그려보는 거다. 펜 하나 들고 생각나는 대로 쓱쓱. 

손그림 엽서북은 저자가 발견한 사물의 숨은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와 함께 똑같은 밑바탕 그림 위에 스스로 상상해서 그려보는 재미가 함께 있는 드로잉 엽서북이다.


빨간 코가 달린 동그란 눈송이를 보고 누군가는 보노보노를, 누군가는 겨울 왕국의 올라프를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난 자신감 부족한 똥손이므로 작가를 똑같이 따라 그려본다. 볼펜으로 스윽스윽 선 몇 개만 그렸을 뿐인데 뚝딱 보노보노의 귀여운 얼굴이 완성되었다. 눈송이가 다했네, 다했어! ㅋ 



이번엔 접시 위에 놓인 미니 양배추다. 이상하게 어떤 사물에든 눈코입 비슷한 게 보이면 왠지 생명이 깃든 거 같고, 사람 얼굴을 그려주고 싶어진다. 단지 양배추일 뿐인데 눈코입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얼른 그려 넣어줘야지! 



이번엔 좀 더 용기를 내서 눈 감고 명상하고 있는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고, 머리카락도 쓰윽 쓰윽 그려 넣어준다. 아니, 그림 그리는 게 이렇게 쉬울 줄이야! 눈 크기도 다르고, 코도 삐뚤, 입도 삐뚤이지만 누가 뭐래도 눈뜨고 웃고 있는 사람이잖아! 거기다 왠지 잘 생긴 느낌까지 든다. 역시 사람은 자기가 그린 그림에 가장 애정이 가는 법인 가보다.  




그래, 그렇다면 오늘은 너로 정했다. 내가 손수 그린 손그림엽서니 한 장 한 장 의미가 남다르다. 엽서북이니만큼 한 장 한 장 접어서 떼어내 실제 엽서로 활용할 수 있다. 계속 보면 얼굴이 좀 무섭긴 하지만 내가 그린 애정이 깃든 손그림이니까 조심스레 떼어내서 예쁜 글과 함께 오빠에게 선물로 주기로 한다. 



무슨 글을 써볼까.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시간은 내 시간을 오롯이 떼어서 그에게 주는 것이다. 그래서 편지는 다른 선물보다 소중하게 느껴진다. 거기다 직접 그린 손그림엽서는 의미가 더 남다르지 않을까. 



무슨 글을 쓸까 하다가 책꽂이에 꽂혀있던 박준의 시집을 꺼내 예쁜 시를 하나 골라 적었다. 그리고 무심한 듯 속으론 뿌듯하게 오빠한테  "선물이야!" 하며 건네주었다. 내가 직접 그린 그림이라는 말과 함께. 반응은 의외로 폭발적이다. 
"이게 프린트된 게 아니라 진짜 니가 그린 거라고? 원래 그려진 그림 같다!"
느낌 있는 배경 덕에 삐뚤삐뚤 이상한 그림으로도 요런 으쓱으쓱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왠지 매일 한 장씩 그려서 선물 주고 싶은 뿌듯한 기분이다.  멋지잖아. 매일같이 누군가에게 #손그림엽서 를 건넨다는 건.

완벽하지 않아서, 화려한 재료가 아닌 자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들이 밑그림이라서, 그리고 거기에 그려 넣은 내 그림이 삐뚤삐뚤해서 오히려 진짜 내 것같이 아름답다. 

하루 한번 삐뚤삐뚤 손그림으로 귀여운 엽서를 만들어 누군가에게 선물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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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사람이면 어때서
유정아 지음 / 북폴리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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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보니 미친 듯이 앞만 보고 달렸던 나의 20대가 생각났다. 그땐 뭐가 그리 욕심이 났는지 남들이 우러러볼 수 있는 성공의 위치에 가겠다며 매일 코피를 흘리며 열심히 일하고, 공부했다. 그래서 성공했냐고? 아니, 그냥 수많은 실패의 경험을 안고 사는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 성공한 경험보다는 실패한 경험이 더 많고,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것이 더 많은 시시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난 지금의 내 모습에 만족한다. 차라리 어릴 때 많이 실패해봐서 다행이라고도 생각한다. 세상이 그리 만만치 않다는 걸 알게 됐고, 다른 사람들의 실패의 아픔에 심히 공감할 수 있으며,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꼭 성공하지 않더라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시시한 사람이면 어때서>에는 저자의 '실패로 끝났기에 이야기는커녕 추억으로도 남기지 못했던 내 삶의 가장 찌질하고 구질구질한 순간들'이 담겨있다. 성공해야만, 특별한 재능이나 콘텐츠가 있어야만 책을 내는 게 아니라는 작은 충격과 함께 책 곳곳에서 보이는 공감 100%의 현실감 있는 글들이 마음을 울린다. '그래, 우린 다 똑같은 사람이야' 같은 동질감 같은 것. 
어쩌면 우리에겐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어요." 하는 다그침의 글보다는 "시시하면 어때요, 저는 이렇게 살고 있어요." 하는 공감의 글이 더 필요했는지 모른다. 바로 내 친구의 얘기 같은, 어쩌면 내 얘기 같은 글들이 가만가만 우리를 위로한다. 

「 그다음부터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어차피 해피엔딩이야.'라는 말을 주문처럼 속으로 외운다. 어쨌든 나는 결국 행복해질 것이고, 지금의 고통은 만화 속의 한 에피소드 정도일 거라고 스스로를 달래면서. 놀랍게도 이 생각은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 꽤 도움이 된다. 
인생이 끝날 즈음의 내가 행복할지 아닐지는 모른다. 하지만 미래의 행복을 믿는 게 현재의 고통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된다면 굳이 그것을 회의할 이유는 없다. 반대로 그렇게 견뎌 낸 일상들이 행복한 결말을 만들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 
그래서 나는, 내 삶이 해피엔딩일 것을 믿는다. 」 
<시시한 사람이면 어때서 p. 25>

나도 한때 많이 써먹었던 방법이다. 어릴 때 난 주변 어른들에게 이런 말을 많이 들었다. 
"넌 오복(五福)을 타고났데. 세상 모든 복을 다 타고났으니 넌 무조건 잘 살 거야. "
그렇게 복을 많이 타고났다는데, 내 삶은 그리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때마다 어차피 잘 되기 위해 이 정도 실패 겪는 건 필요하지, 삶에도 클라이맥스는 필요하니까 하는 생각을 하며 버텼더랬다. 삶의 끝이 어디일지, 어른들의 그 말은 사실일지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내 삶에 대한 긍정적인 믿음이 하나라도 있다는 건 힘든 삶 속에서 꽤 큰 자산인 것 같다. 내가 지닌 복 덕분인지, 믿음 덕분인지 우선 착하고 좋은 남자를 만났고, 그는 나의 행복을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해주는 사람이다. 이것만으로도 해피엔딩에 부쩍 다가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정말 힘들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즈음 목표 세우기를 그만뒀다. 그만뒀다기 보다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정으로 놓아 버린 것에 가까웠는데, 결과는 예상 의외였다. 이제껏 돌아볼 틈 없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장소, 시간, 물건이며 음식과 분위기 같은. 매일매일을 분 단위로 쪼개지 않아도, 그런 것들을 즐기는 것만으로 충분히 삶을 채울 수 있었다. 
지금은 딱 하나의 목표만 남겨 두었다.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사실 그 좋은 사람의 기준도 주관적인 것이므로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것'이라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내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나태해 보일 수 있겠지만 그것까지는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적어도 내 인생에서만큼은, 내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까. 」
< 시시한 사람이면 어때서 p. 180>

한때 뭐라도 안 하고 있으면 불안하고, 뒤처지는 것 같은 기분을 매일 느끼며 살았다. 내 몸이 망가지는 지도 모르고 일에만 매달리고, 누굴 위한 것인지 모를 노력을 매일 했다. 그러다 한순간 방전 상태를 경험하고 나서 나도 저자처럼 목표 세우기를 그만뒀다. 안달복달하며 사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싶어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기 시작했고, 쓸데없는 인간관계는 정리했다. 그런데 의외로 그 이후 삶이 훨씬 행복해진 것을 느낀다.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내 맘대로 산다는 것, 좋아하는 것들만 즐기면서 자유롭게 산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사회적 성공보다 훨씬 중요한 거였다. 

시시하고 시시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나와 상관없는 남의 눈으로 나를 보는 기준이다. 
세상에 시시한 사람은 없다. 
남들에게 시시하게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시시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을 뿐.

남들 보기에 좀 시시하면 어때서, 나를 진정으로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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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6 2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9 1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위안의 서 - 제3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박영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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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다독다독 위안받을 것 같은 따뜻한 느낌의 제목과 표지를 가진 책이었기에 달콤한 내용을 기대했으나 막상 책의 내용은 읽는 내내 죽음이 바로 옆에 와있는 듯, 눈앞에 죽은 이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 무거운 내용이었다. 


자신이 유전병으로 인해 남들과는 다르게 빠른 속도로 삶을 불태우고 일찍 생을 마감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 남자 주인공 '정안', 그는 조금이라도 자신의 생을 연장하고 싶어 항상 햇빛을 피해다니고, 위험한 것이 있을지 모르는 낯선곳엔 절대 가지 않으며 도시의 매연조차 피하면서 자신의 안전지대에서만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항상 자신의 옆에 죽음의 그림자들이 떠다니는 직업을 가진 여자 주인공. 

그녀는 자살위험이 있는 자들을 상담해주거나, 자살로 가까운 사람이 떠난 사람들을 위안하고, 재해나 사고나 났을 시 시신 확인을 해주는 등의 일을 하는 공무원이다. 


겉으로 봤을 때는 다들 웃고 떠들고 나쁜 일이라고는 없어보이는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서는 숨어서 죽음을 고민하고 새벽에 자살 상담전화를 걸어 마지막 손을 내밀어보는 이 세계. 


시시각각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어 두려워하는 남자와, 매일 죽음을 마주하는 직업을 지속하면서 물들어버린 건지, 언제 자신도 모르게 삶을 놓아버릴지 몰라 조금은 두려운 여자, 소설은 이 두사람의 짧은 만남과 희망을 담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시한부다" 라는 말처럼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 

그 죽음이 60년뒤가 될지, 10년 뒤가 될지, 아님 바로 내일이 될지, 우리는 아무도 모른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어찌보면 아슬아슬한 이 삶을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웃으며 울며 지탱해나갈 수 있는 것은 아마도 혼자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낯선 도시 속에서 지독한 외로움에 떨며 죽음을 고민하다가도 어쩌면 누군가의 따뜻한 공감 한번과 눈맞춤 한번 만으로도 삶은 다시 따뜻해질 수 있는 것이다. 


손에 잡힐듯 죽음을 가까이 표현한 소설이라 나또한 소설을 읽으면서 마치 죽음이 옆에 와있는 듯 무거운 마음이 들기도 했으나, 실은 죽음이 있기에 살아있는 우리 삶이 더 아름다운 것 아니겠는가. 


당장 내일 죽더라도 오늘만큼은 사랑하는 사람과 눈을 맞추며 아름답게 살자. 

그것이 살아있는 자만의 특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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