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편지
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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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에 지옥이 있었다. 책을 읽는 동안 내내 여기보다 더한 지옥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직 제대로 꽃피워보지도 못한 10대 소녀들이 매일 15명 이상의 군인을 받는 성노리개로 살아가는 세상은 도대체 어떤 세상이란 말인가. 이런 일이 실제로 있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평소 자꾸 망각하며 살아가고 있음이 죄스럽다. 이런 일이 고작 몇 십 년 전에 일어났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멀쩡한 사람이 순식간에 개나 돼지보다 못한 가축으로 전락하는 그 현장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는 이 소설은 읽기가 고통스럽다. 읽고 있으면 내 몸이 같이 아파온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하리라. 이 땅의 수많은 여성들이 일제 치하 전쟁 중에 어떤 일을 당해왔는지를.. 

《흐르는 편지》는 낙원 위안소에 소속된 나(금자)의 눈에 보이는 현실을 1인칭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간 몇몇 영화를 통해 위안부의 삶을 그려낸 모습을 겉에서 지켜본 적은 있지만, 소설을 통해 그 자신이 '내'가 되어보는 과정은 좀 더 고통스러웠다. 
우리는 '조센삐'라 불린다. 천황폐하가 일본 군인들을 위해 친히 하사하신 하사품이다. 우리는 군인들의 욕망을 풀어주기 위한 도구로만 존재한다. 거기에 인격이나 인권 따위는 없다. 최소한의 밥만 먹으며 남는 시간은 모조리 군인들의 욕망을 받아주는데 쓰인다. 군인 한 명을 받을 때마다 군표 하나씩이 쌓인다. 우리는 그것을 모아 부지런히 오지상에게 갖다 바친다. 하지만 우리의 빚은 하염없이 늘어날 뿐이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절대로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이 여자라는 몸뚱어리 안에 갇혀 죽을 때까지 군인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하루에 적게는 15명에서 많게는 40명까지 군인을 받다 보면 몸에서 피고름이 흐르고 제대로 걸을 수도 없을 지경이 된다. 우리는 대부분 13세에서 20세 전후지만 우리의 몸과 마음과 얼굴은 나의 어머니보다도 늙었다. 더럽혀진 내 몸이 불결하고 부끄러워 벗어나고 싶지만 또한 하루 종일 허기에 시달려 하늘에 떠가는 구름도 맛있는 떡으로 보인다. 그 엄청난 허기는 동료들 사이에서도 조금이라도 더 먹기 위한 경쟁을 만들고 마지막 남은 인간성마저 사치스럽게 만들어버린다. 

이제 15살인 나는, 아기를 가졌다. 그동안 내 몸에 다녀간 군인 중에 한 명이 아빠일 것이다. 아기는 점점 내 몸 안에서 심장이 생기고 얼굴이 생길 것이다. 그 생명체가 신기하지만 나는 아기가 죽기를 바라며 어머니에게 편지를 쓴다. 조센삐인 내 몸에서 태어난 아기는 똑같이 나처럼 짐승보다 못한 존재가 될 것이므로.  
「어머니, 나는 아기가 죽어버리기를 빌어요. 
눈동자가 생기기 전에....
심장이 생기기 전에.... 」
< 흐르는 편지 p.7>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을까. 식민지의 여자이므로 마음대로 사고팔고, 범하며,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해도 된다는 그 마음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동물에게도 웬만해선 하지 않을 짓을 사람에게 했다. 그리고 그 피해 생존자들이 아직도 버젓이 존재한다. 이야기로 지켜보는 것만 해도 숨이 막히고 지옥 같은데 그 일을 직접 겪은 분들은 대체 어떻게 그 시간들을 견뎠을까. 

소설 속 '나'는 어머니에게 묻고 또 묻는다. 
「어머니, 그런데 나는 무슨 죄를 지은 걸까요. 
무슨 죄를 지어서 이 먼 데까지 끌려와 조센삐가 되었을까요.」
< 흐르는 편지 p.291> 


당신들은 죄가 없습니다.......
..............

소설 속 '내'가 되어 오롯이 느껴보기를. 
뼛속까지 절망감 가득한 그때 그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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