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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도서출판 개마고원 블로그(http://blog.naver.com/kaema1989/2206237289372016년 2월 11일)에서 원본 복원 후 재등재한 것임.

 

 

나는 <영남민국 잔혹사>에서 페렝기라는 캐릭터를 소재 중 하나로 삼았다. 1966년 미국 NBC에서 첫 방송을 시작하여 이제는 기념비적 작품이 된 <스타 트렉(Star Trek)>에 나오는 페렝기(Ferengi)라는 외계종족이다나름 유명한 캐릭터다. 다음은 책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그들 페렝기족은 싸워도 될 일을 가지고 말로만 다투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클링온Klingon족이나 머릿속이 인간적으로 복잡한 지구탐험대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누군가와 끊임없이 좌충우돌하는 장면에서 가장 짜증이 난다. (...) 페렝기족에겐 이익, 더 정확히 말하면 상업적 이익이 없는 행동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자신들이 이익과 관련된 모종의 정보를 몰라 속고 있는 것이거나 아니면 그들이 미친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이익이 있는 곳에 반드시 페렝기가 있으며, 이익이 없는 곳에 절대로 페렝기는 없다!"(21.)

 

나는 인간이 아무리 이해관계에 민감하다고 해도 '모든' 인간이 이익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손해가 되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하거나 해야 할 때가 있다. 그게 인간이다.

 

한데 문제는 인간의 행동동기가 모호할 경우다 판단을 하는 건 생각보다 중요하다. 인간의 행동동기를 파악할 수 있어야 거기에 걸맞는 대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의명분을 중시한 행동에 대해 이익추구의 관점에서 비난한다면 예의가 아니고, 이익추구의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무슨 큰 대의명분이나 있는 것처럼 착각해 대우한다면 그 또한 낭패가 아닐 수 없다. 단순한 낭패가 아니라 인간사회의 공정한 질서를 어지럽히는 계기를 추가하는 것이다.

 

광주학살을 자행한 전두환 쿠데타권력의 국보위에 참여한 전력을 가지고 더불어민주당의 비대위원장이 된 김종인은 20161 22"지금까지 국보위 뿐 아니라 어떤 결정을 해 참여한 일에 대해 스스로 후회한 적 없다"(<연합뉴스>, 2016122)고 말했다하지만 이후, 5일이 지난 127"광주 분들께 굉장히 죄송하다"(<연합뉴스>, 2016127)며 공개사과했다.

 

흥미로운 일이다. 한 인간의 마음이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규정짓는 결정적 사안에 대해 단 5일만에 "스스로 후회한 적 없다""굉장히 죄송하다" 사이를 이렇게 쉽게 배회할 수 있을까? 페렝기라면 이 어려운 수수께끼에 대해 1초의 고민도 없이 간단히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신념표현은 이해관계의 사용설명서일 뿐이다!' 울대 교수 조국도 이렇게 거든다.

 

"안철수 주장처럼, 노무현은 현재의 더민주 상황에서 국보위 참여 전력을 이유로 김종인을 데려오지 않았을까? 노무현은 후보 시절 위기 상황에서 전격적으로 재벌 오너이지만 이회창의 경쟁자였던 정몽준과의 단일화 승부수를 던졌다노무현은 강고한 원칙주의자였지만 동시에 영리한 전략가였다김대중 역시 그러했다. 이들은 '사자'이자 '여우'였다정치인은 유연해야 하고 그것은 미덕으로 칭찬받아야 한다."(인터넷 <국민일보>, 2016120.)

 

<뉴스1> "오전엔 광주, 오후엔 봉하마을로 광폭 행보를 벌인 김 위원장에 대해 광주에선 격분과 반발을, 봉하마을에선 환대를 나타냈다"(<뉴스1>, 2016131)고 보도했다. 광주와 봉하 사람들의 다른 행동도 모두 각각의 이해관계에서 나온 각각의 페렝기적 행동일 뿐일까?

 

인간이 아무리 페렝기를 닮았다 하더라도 인간은 인간이다. 모든 가치판단을 그저 이해관계의 맹목적 포장이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페렝기 철학에만 아주 가까이 근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인 나는 김종인에 대한 광주의 반발을 그저 가치맹목적인 이해관계의 표출이라고 보지 않는다.

 

다행히 김종인을 극구 옹호했던 조국은 국민의당 창당준비위원장 한상진의 '이승만 국부' 발언에 대해서는 인간적 태도로 가치판단을 명확히 했다. 이런 식이다.

 

"사실 어떤 이가 대한민국의 '국부'라 불리기 위해서는 그의 사상와 철학이 현재에도 계승해서 마땅한 사람이어야 하지 않겠는가."(인터넷 <국민일보>, 2016114.)

 

난 위 조국의 인간적 가치판단에 이의가 없다. 마찬가지로 국보위 전력이 있는 김종인이 당당하게 더불어민주당을 이끄는 것을 "미덕으로 칭찬"할 수가 없다. 내가 보기엔 김종인의 행적이나 한상진의 발언이나 둘 다 문제다. 굳이 더 심각한 문제를 꼽으라면 자신의 잘못된 개인적 역사관을 '표현'한 한상진의 발언보다 쿠데타 핵심과정인 국보위에 직접 '참여' 김종인의 행적을 선택하겠다. 그런데 가치판단을 하는 조국의 눈엔 한상진의 발언'' 문제인 것이다.

 

, 그러고 싶다니까 조국이 권하는 것처럼 김종인의 발탁'' '마키아벨리즘'이라고 일단 이해해보자. 그런데 여기서 사정이 바뀐다면 그의 마키아벨리즘은 어떻게 될까? 즉 만약 국민의당에서 김종인을 당대표로 앉히고. 더불어민주당의 비대위원장이 된 한상진이 '이승만 국부' 발언을 했다고 하자. 이 상황에 대해 조국은 뭐라고 했을까? 국민의당의 김종인을 '마키아벨리즘'으로 이해하고, 더불어민주당의 한상진에 대해서만 이해할 수 없다고 했을까? 그의 지금까지의 당파적 태도로 미뤄보건대 상상이 가질 않는다.

 

물론  가정은 실험실의 상황이 아니므로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난 조국의 가치판단을 맹목적 당파성에서 떼내 따로 생각할 수가 없다.

 

사실 페렝기는 인간으로부터 천박하다는 조롱을 받을지언정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철학을 일치시키는 것을 결코 부끄러워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쓸데 없는 위선이다. 속으로는 뭔가 모를 세속적 이익(물론 당파적 이익도 포함된다)을 추구하면서 겉으로는 대의명분으로 포장하며 사태를 어지럽게 만드는 인간의 정신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페렝기는 자신들의 이익 없이도 남을 위해 싸울 수 있다고 주장하는 종족들을 가장 위선적이고 추하다고 생각한다."(20.) 정확히 말하면 모두가 페렝기를 잘 알고 있으므로 그들 페렝기들은 그런 위선으로 더 많은 이익추구를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인간사회만이 혼돈에 싸여 있다. 세속적 이익과 대의명분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다. 모든 인간은 그 모순 속에서 살아가므로, 심지어 스스로도 자신의 행동을 쉽게 분리 설명하지 못한다. 하물며 다른 사람이 누군가의 행동을 정확히 단정짓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서 난 이렇게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우리 모두는 페렝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단 페렝기의 철학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예외적인 행동요소의 경우만 인간의 독특한 철학의 발현이다.' 사실은 나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내 주장과 행동에 대해서도 인간의 독특한 철학만을 시현하는 것으로 믿는 순진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또 당연히 나도 그런 과분한 '인간적' 평가를 기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김종인에 관대한 조국이나 봉하마을 사람들도 기본적으로 모두 페렝기다. 다만 나는 그들이 자신들의 대부분 행동이 페렝기 철학에서 나온다는 것을 부정하고온갖 개혁적 언변으로 스스로를 포장하여 오직 자신들'' '인간적'이라고 선전하고 싶어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고도로 진화한 '위선적 페렝기' 탄생일 것이다. 설령 그렇다한들 '위선적 페렝기' 페렝기일 뿐이란 걸 모두가 알기만 한다면 그들의 위선을 두려워할 게 뭐가 있겠는가?!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8217892(원문), 2016년 2월 7일(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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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도서출판 개마고원 블로그(http://blog.naver.com/kaema1989/220610268918, 2016년 1월 27일)에서 원본 복원 후 재등재한 것임.

 

 

나는 이 책은 아마도 '독자 없는 기록'으로만 남을 것이라고 해도 좋았다누군가 이 책은 '기록'으로조차 남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어도, 난 희망을 버리지 않았을 것이고아마 썼을 것이다. 작가이자 칼럼니스트인 고종석은 이 책을 '정치평론서' 아닌 '사회과학서'로 읽힌다고 평했다. 이것을 '과분한' 평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단순한 혹은 속보이는 정치평론 이상의 것을 말하고 싶었다.

 

이 책을 출판한 개마고원 대표 장의덕은 "영남패권주의 비판을 곧 '영남인=패권주의자'라는 비판으로 무조건 직결시키"는 반응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들의 반응인즉슨 "졸지에 영남패권주의자씩이나 되고 보니 화가 안 날 수 없다"는 반응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알 만한 사람들조차 왜 개인 비판과 사회구조 비판을 혼동하는가"라고 회의했다.

 

장의덕은 출판인다운 심성으로 "개인 비판과 사회구조 비판"을 엄격하게 구분하려 했다. 하지만 난 현실적으로 그 구분이 그렇게 엄격하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드물겠지만 자신의 처지 혹은 과거 행동과 전혀 상관없이 "개인 비판과 사회구조 비판"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오히려 그 구분이 잘 안 되는 것이 통상적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아무리 지적이고, 훌륭한 영남인도 영남패권주의 비판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더 자연스런 반응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일본제국주의를 사회구조적으로 비판할 때 평범한 일본 시민들은 어떤 감정을 느낄까? 내 일도 아니고, 심지어 다 지난 역사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며 평온한 마음으로 그 비판을 듣게 될까? 아니, 좀 더 실감나게 베트남 사람들이 과거 베트남전쟁 때 일에 대해 사회구조적으로 한국을 비판하면 그걸 듣고 있는 우리 감정은 어떨까그렇게 엄격하게 과거 나치에 대한 사회적 교육이 잘 돼 있다는 독일의 경우는 어떨까? 평범한 독일인은 유대인 학살에 대한 사회구조적 비판 앞에서 불편한 감정이 전혀 없을까? 난 그렇지 않다는 여러 징후를 듣고 있다. 남성인 내겐 좀 더 쉬운 예일 수 있는데 페미니즘 앞에 선 남성도 뭔가 모를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인지상정이라고 본다.

 

문제는 그 불편한 느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오히려 그 불편한 느낌을 없어야 한다고 부정하거나불편한 느낌을 줘서는 절대 안 된다고 주장하거나, 처음부터 그 불편함을 불편해 하며 아예 사태의 본질을 회피하려는 데 문제가 있다. 우리는 문제가 불편함 그 자체가 주는 고통인지 아니면 불편함의 극복인지를 물어야 한다.

 

문제를 이렇게 한번 바꿔보자. 영남패권주의라는 언어 앞에 불편함을 느끼는 영남인들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아주 간단하다. 우리나라 지역문제는 영남패권주의가 아니고, 지역문제에 관한 한  영남과 호남 모두가 잘못했다고 말해주면 된다. 이것이 노무현의 '양비론' 이데올로기가 등장하는 기원이자 배경이다. '양비론'의 현실적 득세는 2003년 열린우리당 사태였다. 당시 유시민은 이렇게 말했다.

 

"쉽게 말해서 선거 때마다 민주당 후보를 지지한 유권자들을 그대로 안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저는 또 반문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죽어라고 한나라당만 찍어온 대중은 어떻게 하시렵니까정권재창출을 이룬 대중은 소중하고 거기 협조하지 않은 대중은 그냥 버려 두어도 좋다는 말입니까만약 개혁신당 말고 영호남 유권자를 통합하는 다른 길을 제시하신다면 저도 개혁신당론을 접고 그 길을 따르겠습니다."(유시민, <오마이뉴스>, 2003516.)

 

나도 쉽게 말하자면, 유시민은 호남인들이 온갖 모욕을 감수하며 몰표로 지지한 민주당의 정통성 정당성을 부정하고, "지금까지 죽어라고 한나라당만 찍어온 대중"(영남인들)을 위해 '양비론'에 입각한 '신당'을 그것도 '개혁!'의 이름으로 '창당'하자는 것이었다. 호남몰표로 당선된 노무현과 유시민에겐 그것이 '개혁적 통합'이었다.

 

다음에 드는 예는 조금 지나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영남출신 군부가 주도한 광주학살까지 고려하면 터무니없는 비유는 아니라고 본다. 만약 누군가 강간범과 피해여성을 '양비론'의 이름으로 '결혼'시키고 그것을 '개혁적 통합'이라고 내세우면 보통은 넋빠진 짓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적어도 지역문제에 관한 한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한 '양비론'이 이른바 개혁주의자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는다. 그 열렬한 환호의 귀착지는 어디일까? 노무현은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나라]당의 역사성과 정통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대타협의 결단으로 극복하자는 것입니다."(노무현, <프레시안>, 2005728.)

 

노무현은 호남인들이 목숨 걸고 호남몰표로 지지했던 민주당의 역사성과 정통성에 대해서는 그토록 모질게 모욕하고 조롱하며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그랬던 그의 입에서 영남인들의 패권주의 본당 한나라당을 두고 이런 말이 터져나왔을 때 난 다시 한번 좌절했다. 이후 멀지 않아 노무현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양대산맥' 주장으로 최종 귀의했고난 최종 좌절했다. 이후 노무현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열린우리당 창당에 한 점 부끄러움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시비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노무현의 '개혁적 추종자들'에게 내 주장은 전혀 들리지 않는 낯설디 낯선 반개혁적 호남 지역주의자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그들에겐 노무현의 죽음만이 너무나 이해하기 쉽고 원통한 비극일 뿐이다.

 

존 레논은 마술도, 히틀러도, 예수도, 케네디도, 부처도, 왕도, 짐머만(밥 딜런), 심지어 비틀스도 믿지 않으며, 꿈은 끝났다고 노래했다. 나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나 역시 신도, 인간도, 노무현도, 대한민국의 개혁세력도, 애초부터 그들의 두말할 것 없는 속임수였던 '양비론' 믿지 않는다. 심지어 나는 알라딘도, 대한민국의 교양수준도 믿지 않는다. 꿈은 끝났다. 내가 믿는 건 오직 내 주장에 불편함을 느끼는 그들의  현실적 삶뿐이다.

 

그렇더라도, 물론 난 당연히 모든 영남인들이 영남패권주의에 함몰됐다고 보지는 않는다. 어쩌면 나보다 더 영남패권주의에 반대하는 영남인도 있을 것이다이런 사실과 무관하게 어쨌든 난 영남인들의 불편한 감정을 감정적으로 자극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건 <아주 낯선 상식>을 쓴 목적도 아니었고, 이 글을 쓰는 목적도 전혀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들' 불편함을 달래주기 위해 그들에게 감정적으로 아부할 생각 역시 추호도 없다. 그것은 결국 영호남을 포함한 대한민국 전체가 극복해 가야 할 아물지 않은 아픈 상처다.

 

그러므로, 한때 제국이었던 나라 국민은 식민지였던 나라 국민의, 자본가는 노동자의, 백인은 흑인의, 남성은 페미니즘의, 영남인은 호남인의 사회구조적 비판에서 느껴지는 개인적 불편함을 각자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극복해야만 한다.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회로는 없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불편함을 주는 것은 영남패권주의라는 언어가 아니라 영남패권주의 그 자체다. 그것은 영호남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모두를 불편하게 한다나는 그것으로부터 불편함을 느끼는 대한민국이 그 불편함을 없애려고 현실을 속이는 대한민국보다 훨씬 건강하다고 믿는다. 나는 영남패권주의라는 언어에서 새삼스럽게 불편함을 느끼는 대한민국을 본다. 하지만 그건 병든 과거로부터 빠져나와 건강한 대한민국을 향해 첫걸음을 뗀 치유의 징후다. 고통스럽지만 어쩔 수 없다치유를 원한다면 병자의 그것처럼 극복해야 한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8185738(원문), 2016년 1월 26일(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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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보이는 A와 B의 가상 대화다. A는 자신이 민주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고, B는 A가 민주주의자가 아니라고 의심하고 있다. 그런데 A의 발언은 어디선가 들어봤음직할 수도 있다. 아니, 틀림없이 들어봤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지루하게 듣게 될 것이다. 심지어 A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 그 발언의 주인공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 주인공은 수나라 병사만큼이나 아주 많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세상의 정의가 숫자로 결판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A: 호남은 더불어민주당의 친노 문재인을 지지해야 해.

B: 왜?

A: 그러지 않으면 고립되잖아!

B: 누가 고립시키는데?

A: 그거야…, 새누리당 아니겠어?

B: 새누리당? 그니까 영남이 새누리당을 지지하고, 그 새누리당은 호남을 고립시키고?

A: 상식 아냐?

B: 근데, 왜 새누리당이 호남을 고립시키지?

A: 아놔, 스스로 고립을 선택하니까 고립시키는 거지.

B: 그럼 정의당을 선택한 고양과 창원은 새누리당이 더 고립시키는 건가?

A: 그건 아니쥐.

B: 왜?

A: 거긴 호남이 아니잖아.

B: 그럼 영남이 지지하는 새누리당은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는 지역(인)이 호남일 때만 고립시킨다는 거지?

A: 말하자면 그런 셈이지.

B: 그건 영남파시즘, 최소한 영남패권주의잖아?

A: 그렇게 불편한 이름을 붙이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꼭 그렇게 불러야겠냐?

B: 근데 노무현(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영남패권주의는 없는 거잖아? 지역주의는 영호남 둘 다, 아니 영호남 정치인들이 둘 다 실체도 없는 걸 그저 표 얻으려고 떠들어대는 바람에 생긴 병패라며? 그 이름조차 역겨운 '지역주의 양비론'이 네 자랑스런 신조 아니었어? 그래서 영남패권주의라는 말은 듣기조차 싫어하잖아?

A: 그거야 그렇지….

B: 근데 왜 영남이 고립시키고, 호남은 고립당한다고 말하는 거지? 그렇게 영남이 가해자고 호남은 피해자인 영남패권주의 역사는 없었다며?

A: 그거슨…. 좋아, 원한다면 영남패권주의 역사가 있다 치자.

B: 치자고? 그럼 니들도 호남과 더불어 민주주의를 위해 반영남패권주의 투쟁을 해야겠네?

A: 그건 정말 아니쥐.

B: 응? 아니라고? 영남패권주의 역사가 있다며? 니들 더불어민주주의자 아니었어?

A: 그렇게 하면 영남에서 표가 나오겠냐?

B: 아, 그래서 위선적으로 선거를 치르자? 호남을 향해서는 '선거 전엔 호남몰표를 겁박하고, 선거 후엔 지역주의를 비난하고'? 영남을 향해서는 '선거 전엔 영남패권주의 없다하고, 선거 후엔 물량공세로 유혹하고'?

A: 아, 구태스럽게 지역 좀 따지지 마라니까! 그러니까 니가 나처럼 멋있다는 얘길 못 듣는 거야. 소수지역 호남 정치인은 대선에 나와서도 안 되고, 찍어서도 안 된다니까.

B: 그니까, 소수지역 호남은 지역 따지지 말고 영남후보만 지지하라고? 그런 반민주주의가 멋있다고?

A: 계속 그렇게 지역 따질래?

B: 그게 아니라 능력 따지고 싶은데, 영남후보만 지지하라고 하니까 그렇지.

A: 아, 문재인을 자꾸 영남후보, 영남후보, 거리지 마라니까.

B: 저런, 호남 등등의 정치인은 지역 정치인이지만, 영남 정치인만은 영남 정치인이 아니라 그냥 대한민국 정치인이라는 얘기 아냐? 맞지?

A: 아놔, 진짜 말이 안 통하네.

B: 그게 아니라, 말이 너무 잘 통하는 거 아냐?

A: 아 됐고, 그래서 살아있는 부처 같은 친노 문재인이 감히 싫다고?!

B: 니가 호남사람이면, 아니 호남사람이 아니라도 그런 식이면, 니 우상이 산 부처든, 죽은 부처든 감히 좋겠냐!?

 

 ⓒ 이철수 www.mokpan.com

 

ⓒ 이철수 www.mokpan.com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6.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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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파일 링크 추가 재등재>

https://www.youtube.com/watch?v=oKXTWrgJS-4

 

호남은 대선 들러리인가?

 

. 무엇이 문제인가

 

   대한민국의 모든 지역과 계층은 자신들의 정치적 자유의지에 따라 대선에 임한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하지만 호남은 언제부턴가 그저 대선 들러리로 전락했다. 호남은 자신들이 마치 주체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가졌다는 착시현상 속에서 살고 있지만, 내가 볼 때, 호남은 대선과정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자유의지를 거의 상실한 집단으로 전락했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가? 나는 그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과연 이런 사태가 사실인지부터 먼저 설명해야만 한다. 호남인 대부분은 이런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호남은 대선과정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자유의지를 거의 상실한 집단으로 전락했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호남이 대선후보를 선택하는 방식 때문이다. 노무현 이후 호남은 이른바 전략적 선택을 전가의 보도처럼 생각해왔다. 전략적 선택이란 소수집단인 호남은 호남몰표만으로는 반영남패권주의적 집권이 불가능하므로 영남에서 상당한 득표력이 있는 영남후보를 내세워 호남몰표로 뒷받침함으로써 최악의 집권을 모면하려는 궁색한 정치공학을 말한다. 호남은 전략적 선택으로 노무현을 대통령에 당선시킴으로써 그것이 신의 한 수였음을 실감했다.

 

  하지만 그런 만족감 혹은 희망적 기대는 사실상 한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노무현은 대통령임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남 사람들이 나를 위해서 찍었나요. 이회창이 보기 싫어 이회창 안 찍으려고 나를 찍은 거지(인터넷 경향신문, 2003924)라는 문제의 발언을 했다. 이는 호남의 전략적 선택은 존중받아야 할 정치적 자유의지가 아니라 지양되어야 할 정치공학의 표출이라는 폄하의 의미였다. 그리고 이는 자신이 호남에 큰 빚이 있거나 꼭두각시 역할을 할 이유는 없다는 일종의 정치적 부채의식의 청산발언이기도 했다. 이후 실제로 노무현은 새천년민주당 부정 후 열린우리당창당, 한나라당 승인 후 대연정 제안등의 과정을 통해 수십 년을 투쟁해온 호남의 반영남패권주의적 민주주의 정신을 배신하는 행위를 계속해나갔다.

 

  궁극적으로 호남이 생각했던 전략적 선택에 의한 대리집권은 성공할 수 없는 허상이었다. 호남은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하긴 했지만, 결국 투항적 영남패권주의에 의한 지역문제 해결책인 노무현의 열린우리당을 극복했다. 처음엔 호남 소수가 새천년민주당을 지지하며 저항했고, 2006년 지방선거를 통해 열린우리당을 사실상 무너뜨렸다. 그러다 노무현 사후, 더불어민주당 친노세력은 일당독재체제로 호남을 다시 지배하게 됐다. 지난 4월 총선 때 호남이 국민의당을 내세워 친노세력을 응징하려 하자 그제야 비로소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 김종인이 호남불가론의 실체를 인정하고 호남에 사과했다. 하지만 호남은 가차 없이 정치적 자유의지를 표출시키며 마침내 복수정당제를 쟁취했다.

 

  우리가 지금 당장 극복해야 할 문제는 호남의 전략적 선택이 친노의 호남불가론으로 변형돼 이데올로기화한 양상이다. 친노 이데올로기는 바로 이 호남몰표=전략적 선택=영남후보론=호남불가론에 토대하고 있다. 문재인의 더불어민주당을 지배하는 이 이데올로기의 반민주적 실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한 호남은 앞으로도 이런 영남패권주의의 하위 이데올로기를 벗어날 방법이 없다. 노무현 집권 이후 13년이 넘도록 이런 위선적 이데올로기에 끌려 다닌다면 호남은 스스로 민주주의를 퇴행시키는 주역이 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호남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사활이 걸린 문제다.

 

. ‘전략적 선택=호남불가론은 호남의 숙명인가

 

   ‘호남도(!) 이제 다른 지역계층의 유권자처럼 지지하고 싶은 대선후보가 설령 호남출신이라도 자유롭게 지지한다고 말하라!’ 이것이 지금 나의 주장이다. , 그런데 나의 이런 주장을 듣고 호남인인 여러분들은 어떤 느낌이 드는가? 두려운가? 아니면 백면서생의 무책임한 소신으로만 들리는가? 무슨 느낌이 들든, 뭔가 마음 한 구석에 걸리는 게 있다면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해진다. 호남은 대선에 임해 자신들의 정치적 자유의지를 거리낌 없이 표출하기 힘들어 한다는 사실이다. 호남유권자가 그러하므로 당연히 호남정치인들도 대선출마를 꿈꾸는 것조차 두려워하거나 심지어 금기시할 수밖에 없다.

 

  호남은 대선후보 지지를 다음과 같은 내밀한 방식으로 표명한다. 우선 호남은 호남출신 정치인들을 배제한다. 그들은 다른 지역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호남이 우선 눈치 보며 살피는 건 다른 지역의 야권세력이 지지하는 정치인이 누군가 하는 것이다.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이 지지할 대선후보를 찾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호남몰표를 더해주면 대선 승리가능성이 있는 야권인물을 찾는 것이 호남이 대선후보를 지지하는 방식이다. 그리고는 그 인물이 영남패권주의 본당 새누리당의 집권을 막아줄 것을 희망 속에 기대한다.

 

  그래서 호남은 언제나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당이 호남당으로 인식되는 걸 가장 두려워한다. 그리고 당연히(!) 다른 지역 야권세력은 그 두려움을 호남을 향한 가장 강력한 겁박무기로 활용한다. 그들의 겁박구호는 호남 당신들은 우리가 없으면 고립된다. 그러니 우리에게 고마운 줄 알라!’이다. 그런 겁박은 호남인의 입에서 나오기도 한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이 된 양향자가 호남당이 집권을 할 것이라고 호남에서는 전혀 생각을 하고 있지 않(노컷뉴스, 2016829)다고 한 발언이 좋은 사례다. 출세한 호남출신인 그녀는 친노 문재인에 의해 지도되는 투항적 영남패권주의 정당에서 친노가 가장 듣기 좋아하는 호남겁박 발언으로 최고위원 당선에 공손히 사례한 셈이다.

 

  그런데 이런 겁박발언이 통하려면 실제로 겁을 먹는 호남인들이 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다소간에 그런 호남인들이 분명히 있다고 본다. 그들의 한결같은 반문은 이런 것이다. ‘소수지역 호남이 다른 지역, 다른 계층의 눈치를 보지 않을 대안이 있는가? 호남 국회의원 선거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대선에선 영남패권주의 본당 새누리당의 집권을 막아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정말 호남은 모두 겁먹은 치킨이 돼야 하는 것일까? 호남은 숙명적으로 타자의 선택을 자신의 선택이라고 스스로를 속이고 몰표를 헌납하면서, 이것이 민주주의라고 자위하는 방법 외엔 없는 것일까?

 

  나는 두려움 없이, 책임 있는 언어로, 호남도 이제 지지하고 싶은 대선후보가 설령 호남출신이라도 자유롭게 지지하라고,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타자의 겁박이든 스스로의 자기희생이든, ‘호남불가론은 민주주의 정신이 아니다. ‘호남불가론은 애초 호남이 민주적 선의로 행한 전략적 선택을 친노세력이 악용해 역습한 영남패권주의 이데올로기다. 호남은 이 예속적 소외를 극복할 실천적 용기가 필요하다. 호남은 두려움 없이 오직 민주주의 원칙만을 생각할 때 가장 강력한 힘을 낼 수 있다. 의례적인 정치구호가 아니다. 민주주의 원칙하에서 준엄하게 그 말뜻을 검증해도 좋다.

 

. ‘호남 참정권 포기는 민주주의를 어떻게 왜곡하는가

 

   나는 호남인 모두에게 묻고 싶다. ‘호남출신 정치인은 대선에 출마하면 안 되고(호남불가론), 호남은 호남출신 대선후보를 지지하면 안 된다(전략적 선택)는 이데올로기에 동의하는가? 과연 이런 사태가 민주적이라고 생각하는가?’ 만약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호남은 대선 참정권을 곱게 반납해야 한다. 영원히 쓸모없고, 반민주적인 호남의 참정권을 장식 삼아 소유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민주주의 정신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면 이제라도 나서 호남의 참정권을 실질적으로 쟁취해야 한다. 나는 지난 총선을 앞두고 헌법이 보장하는 호남의 복수정당제 쟁취를 호소했다. 이제 나는 다음 대선을 앞두고 헌법이 보장하는 호남의 참정권 쟁취를 호소한다.

 

  ‘호남 대선후보는 안 된다는 호남불가론은 단지 호남인이 누려야 하는 기본권(참정권)의 박탈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이는 인종주의적 비하의 소재로까지 활용된다. 악의적인 선동가들은 호남이 호남불가론 이데올로기에 예속되는 사실을 악용해 호남 대선후보가 안 나오는 것은 호남 정치인들의 자질이 부족하기 때문이다는 인종주의적 선동까지 행하고 있다. 생각해보라. 김대중이 영남패권주의 독재정권하에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3번의 낙선 끝에 기적적으로 대통령이 당선된 것이 정치인의 자질문제 때문이었는가? 갈 길 바쁜 호남은 이런 인종주의적 선동과도 싸워야 한다.

 

  물론 호남이든 어디든 좋은 정치인은 많이 필요하다. 그런 차원이라면 DJ’를 길러내야 한다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 호남정치인들이 대선출마를 꿈꾸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이유는 DJ’ 문제와는 아무 상관없는 친노 이데올로기=호남불가론때문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대선후보로 주목받지 못하는 호남출신 정치인들과 유력 대선후보로 조명 받는 다른 지역출신 정치인들의 능력을 굳이 주관적으로 비교하며 거론하지는 않겠다. 개혁성의 문제든 능력의 문제든, 나는 호남출신 정치인들이 단지 능력의 문제로 대선 후보경쟁에서 호명되지 않는다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다.

 

  ‘호남불가론의 이데올로기적 퇴행은 계속된다. 이 호남불가론은 결국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왜곡시킨다. 민주주의는 어떤 경우에도, 그것이 지역의 의지든 계급의 의지든 남녀의 의지든, 유권자의 정파적 의지를 확인하고 반영하는 것을 전제한다. 이 전제가 무너지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투표를 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현 대선 레이스에서 호남의 정치적 자유의지는 호남불가론으로 인해 정확히 측정확인할 수가 없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호남이 전략적 선택으로 지지하는 영남 혹은 친노세력의 거품 같은 대선 지지율뿐이다. 그리고 그 지지율은 온전히 영남 혹은 친노세력의 정치적 실력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호남은 호남몰표=전략적 선택=영남후보론=호남불가론을 통한 대리집권만을 상상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공학적으로 말하더라도 이런 전략은 점점 강화되는 상호간의 비토세력으로 인해 성공가능성이 희박해지고 있다. 나는 각각의 비토세력의 이탈을 감수하고 야권단일화를 하는 것이 각각의 신념에 따른 3자 이상 세력 간 대결보다 현 야권에 더 큰 가능성을 부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험이 입증하듯이) 호남의 정치적 의지는 그 일련의 과정 속에서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호남의 내적 자유의지가 무엇이든 다른 정치적 선택의 여지를 알지 못하는데, ‘표 찍는 인질로서의 호남이 존중받을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저 호남은 민주화의 성지이므로 지역 따지지 말고 영원히 영남후보를 위해 전략적 선택을 하라는 자기당착의 립서비스가 전부일 것이다. 세계 역사상 이런 반민주적 위선이 있었는가?

 

. 무엇을 위한 대선인가

 

   국회의원선거에서 각 지역은 자신들을 대표할 지역대표를 뽑는다. 그리고 그들이 지역유권자의 뜻을 국회에 전한다. 한데 대통령선거에서 각 지역별 유권자의 뜻은 의미가 없는가? 아니다. 모든 지역유권자가 대선에서도 자유롭게 자신들의 뜻을 표출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정부 구성의 기본전제다. 한데 지금 호남유권자는 스스로 소수자 지위를 예단하고 자신의 뜻을 다른 지역 유권자의 뜻에 예속시키고 있다. 이런 사태는 사실상 호남대표가 존재하지 않는 국회와 같다. 만약 대선에서 호남이 스스로 정치적 자유의지의 표출을 포기한다면 정치적인 의미에서 호남은 과장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좋게 말해도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최근 국민의당 비대위원장 박지원은 호남이 독자적으로 집권할 수 있으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안철수 전 대표에게도 호남의 가치와 몫을 요구해야 한다. 과거 노무현(대통령)90%이상 표를 주면서도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아서 우리가 어떻게 됐나(인터넷 광주일보, 2016719)라는 주장을 폈다. 여기서 호남의 가치와 몫을 표방한 호남출신 대선후보가 독자적인 집권을 하면 호남의 가치와 몫에 대한 요구가 어려울 것 없다. 한데 아예 호남출신 대선후보조차 없는 상황에서 국민의당 안철수나 다른 당의 대선후보에게 누가 호남의 가치와 몫을 이해시키고 요구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런 대표가 없다면 호남유권자의 정치적 의지는 반민주적 겁박 혹은 파트너십 없는 묵살의 대상이 될 뿐이다. “호남의 가치와 몫을 대변할 대선후보가 없다면 호남도 없다.

 

  소수지역 호남은 앞으로 어떤 식으로든 연대(이하 모두 연정 포함)를 반드시 고민해봐야 한다. 한데 어떤 나라의 어떤 연대도 유권자 개개인이 미리 유력 정치인에게 표를 던져주고 나서, ‘사실은 내가 진짜 투표하고 싶은 후보는 따로 있었지만, 전략적으로 당신에게 투표했으니 나처럼 투표한 유권자들의 가치와 몫을 계산해 달라고 요구해서 실현된 연대는 없다. 연대란 유권자 개개인이 미리 예속적으로 투표해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각 세력의 지지를 모은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득표()를 가지고 각 세력끼리 공개적으로 협상해 합리적인 지분과 협력을 도출하는 것이다. 그런데 겁박에 질린 호남유권자가 아예 처음부터 전략적 선택=호남불가론이데올로기에 순응해 여론조사나 투표행위를 한다면 호남의 뜻이 어떻게 측정확인될 수 있겠는가?

 

  연대와 관련해서 한마디 반드시 추가해야 할 말이 있다. 국내의 정상적 상황에서 펼쳐지는 연대는 최소한 서로 간에 상대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가능하다. 지금 상황에서 국민의당이 새누리당과 연대를 하는 것은 호남이 아직 새누리당에 대한 정당승인을 하지 않은 상태이므로 원천적으로 여전히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더불어민주당과의 연대는 어떤가? 호남에서 더불어민주당이 패퇴한 것은 호남이 더불어민주당을 정당으로 승인하지 않기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친노 이데올로기인 영남패권주의에 투항한 지역주의 양비론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호남의 이 정치적 의지 또한 존중돼야 한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영남패권주의 역사를 인정치 않고, 호남이라는 지역단위의 가치와 몫을 부정하는 친노는 연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민주주의 정신을 지키기 위한 투쟁만이 있을 뿐이다.

 

  국민의당과 더불어민주당이 연대를 해도 좋을 논리적 가능성은 한 가지 있다. 그건 더불어민주당의 대선후보가 친노와 결별하고 지역주의 양비론호남불가론을 부정하면서 반영남패권주의를 표방할 경우다. 대선연대는 논리적으로 총선과는 또 다른 사정이 있다. 현행 헌법을 전제로 박지원식의 연대를 모색하더라도 호남의 가치와 몫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부정하는 친노세력은 결코 호남과 연대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

 

. 결론: ‘민주주의 없는 대선승리는 승리가 아니다

 

   호남인이라고 모두 개혁진보적이진 않다. 당연히 보수도 있고 진보도 있다. 한데 언제까지 지역을 기준으로 정치를 논해야 하는가? 대답은 아주 쉽다. 영남패권주의가 이 땅에서 사라지는 그날까지다. 문제는 민주화 이후의 영남패권주의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문재인은 "내년 대선에서는 결국 PK 유권자들의 선택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호남에서는 예전처럼 90% 전후의 압도적인 지지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안정적인 득표가 가능하다(인터넷 국제신문, 2016822)고 주장했다. 호남에서의 더불어민주당의 패퇴에도 불구하고 어디서 이런 자신감이 나오는 걸까? 지난 4월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호남에서 패퇴했지만 그는 아직 호남몰표=전략적 선택이 호남에서 견고하다고 보는 것이다. 즉 문재인은 자신이 국민의당 안철수보다 높은 지지율만 유지하면 겁먹은 호남이 후보단일화를 추동할 것이며, 자신이 호남을 지배하는 단일후보가 될 자신이 있다는 말을 한 것이다. 물론 “PK 유권자들의 선택이 중요하다는 그의 발언은 영남을 위한 영남후보론=호남불가론을 기본으로 깔고 있는 것이다.

 

  호남은 문재인의 이 반민주적 겁박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민주적 게임의 법칙을 세워 싸워 나갈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새로운 민주적 게임의 법칙이란 호남도 지지하고 싶은 대선후보가 설령 호남출신이라도 자유롭게 지지한다고 말하라!’는 것이다. 반영남패권주의를 표방해 호남의 지지를 받는 정치인이 호남출신이라면 그가 (호남출신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이 그도) 박지원의 호남의 가치와 몫을 주장할 것이다. 박지원의 말대로 지지율이 높으면 대권에 도전할 것이고, 지지율이 한계에 부딪히면 그가 연대의 대표로서 실체가 확인된 호남의 가치와 몫을 주장할 것이다. 호남의 희생은 민주주의의 조건이 아니다. 수십 년을 투쟁해온 “(반영남패권주의라는) 호남의 가치와 (지역평등이라는 정당한) 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주된 조건이다. 그러므로 호남은 국민의당 천정배가 주장하듯 스스로도 구하고, 나라의 위태로운 민주주의도 구(自救救國)해야 한다.

 

  나는 호남출신 대통령만을, 또 호남의 몫만을 원하며 이 강연을 한 건 아니다. 나는 이 강연에서, 다른 모든 지역이나 계층출신 정치인의 대선출마는 좋지만 호남출신 정치인만은 대선출마를 해서는 안 되며, 다른 모든 지역이나 계층의 세속적인 자기 몫 주장은 좋지만 호남만은 세속적인 자기 몫 주장을 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반민주적 이데올로기를 문제 삼았다. 호남이 고작 이런 반민주적 이데올로기의 굴레를 다시 쓰고자 역사 속에서 그렇게 힘겹게 민주주의를 추동해온 것은 아니지 않는가? 나는 상당수 호남인들마저 스스로 이런 반민주적 친노 이데올로기에 예속된 상황이 유감일 뿐이다.

 

  나는 이 모든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독일식 비례대표 내각제 도입을 원한다. 하지만 개헌이 어려워 현행 헌법으로 다음 대선을 치를 수밖에 없다면 호남은 지나온 역사를 다시 성찰해봐야 한다. ‘영남패권주의에 투항한 지역주의 양비론자노무현을 추종하는 친노세력은 호남을 겁박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여지없이 선거 전엔 호남몰표 겁박, 선거 후엔 지역주의 비난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다음 대선에 임하고 있다. 호남은 역사 속에서 그래왔듯,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는 민주주의라는 길만을 생각하면 된다. ‘민주주의 없는 대선승리는 승리가 아니다. 민주주의에 맞는 얘기면 추동하고, 민주주의에 맞지 않는 얘기면 투쟁해야 한다. 이런 신념하에서 나는 호남에 묻는다. 친노 이데올로기의 핵심인 영남패권주의에 투항한 지역주의 양비론전략적 선택을 위한 호남불가론이 민주적인가?!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6.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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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호남은 대선 들러리인가?」, 인터넷 『무등일보』, 2016년 9월 6일.

 

http://www.honam.co.kr/read.php3?aid=1473087600502158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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