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패권주의란?

 

나는 현대적 의미의 영남패권주의를 영남인들이 폭압적인 정치권력을 통해 호남인들을 차별·배제하는 전략으로 전국적 규모의 경제적 지배관계를 확대재생산하고 이러한 지역적 지배관계에 대해 사회·문화적인 차원에서 은밀하게 이데올로기적 동의를 얻어내는 극우 헤게모니라고 이해한다. 33쪽.

 

위 정의(定義)는 다소의 보완설명이 필요하다.

 

1987년 6월 항쟁을 분수령으로 '폭압적인 정치권력=영남파시즘' 체제는 '이데올로기적 동의=민주화 이후의 영남패권주의' 체제로 이행해왔다. 이 이행에서 특히 주목할 사실은 노무현의 집권이다. 나는 노무현 이데올로기를 '은폐된 투항적 영남패권주의'로 규정했는데, 이 노무현 시대 이후 이른바 개혁·진보 진영까지 '이데올로기적 동의'를 바탕으로 영남패권주의 체제를 자발적으로 승인한다. 이제 그들은 새누리당의 존재를 겉(이념적)으로는 반민주의 상징으로 설정하지만, 속(현실적)으로는 그저 호남(인)에서의 득표를 위한 겁박수단으로 이용할 뿐이다.

 

그 미래를 현실적인 차원에서 다시 예단하면 이렇다. 친노가 주축이 된 개혁·진보 세력은 이제 골백번을 집권해도 노무현이 집권 전 약속했던 '새누리당(한나라당) 해체'를 실현할 수 없다. 노무현 이데올로기를 추종하는 그들은 대연정 제안을 계기로 '새누리당 승인'을 했던 노무현 이데올로기에 따라 투항적 영남패권주의 이데올로기를 실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그 경우 그들은 노무현(이데올로기와 실천적 행위)을 역사적으로 탄핵해야 하는데, 나는 노무현을 종교적으로 추종하는 그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제 플랜B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단기적인 새누리당의 해체가 아니라 장기적인 새누리당의 고사다. 비박이 새누리당 바깥으로 나오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분권형 대통령제나 내각제 개헌이 정치공학적 매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치공학이 앞서는 것으로 보이는 이 개헌의 경우라도 독일식 비례대표제의 관철만 할 수 있다면 민주주의는 결정적으로 전진할 것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이는 새누리당 박근혜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친박 이정현의 정국구상과는 성질이 완전히 다르다. 호남출신인 그가 전두환의 정당 새누리당에 대한 호남의 역사적 승인을 강요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하긴 뭐, 노무현의 '새누리당 승인' 제안까지 경험한 이제 와서 더 못 볼꼴이 뭐가 있겠는가? 오히려 새삼 슬픈 일은 노무현의 대연정 제안은 시치미 뚝 떼고 이정현의 영호남 연정모색만 무슨 반동처럼 생각하는 친노의 음습한 습성이다.

 

플랜B가 불가능하다면 이제 플랜C(사실 이는 플랜이랄 것도 없다)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호남도 새누리당을 승인하고, 그저 모든 정당의 정책만을 평가하며 마치 역사 속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 사는 것이다.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계층·계급적 정책투표를 해야 한다며 횡설수설하는 이른바 지식교양인들이 원하는 바로 그 모습이다. 그들이 호남에서 완벽하게 지역주의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모습은 호남이 완벽하게 전국 평균 지지율로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모습이다. 위선이 아닌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그렇다는 의미다.

 

친노의 우상 노무현은 '선한 의도를 가진 악한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어쩌면 악한 결과를 합리화하며), 그런 역사적 퇴행을 꿈꿨다. 민주당을 부정하고 열린우리당을 만들면 영남도 자신의 '선한 의도'를 이해할 거라고. 그래서 허깨비처럼 실체 없는 '영호남지역주의'가 눈 녹듯 사라질 거라고. 하지만 노무현은 영남에 그런 식으로 어처구니없이 정의를 구걸하다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참담한 실패를 역사의 유산으로 남겼다.

 

이제 호남은 노무현의 그 퇴행적 영남패권주의 역사관을 떠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최악인 것은 노무현의 그런 퇴행적 영남패권주의 역사관을 치켜들고 실패를 부정하며 끈질기게 발호하는 친노다. 그들은 역사의 가시밭길에서 흔히 마주하는, 피할 수 없는, 그래서 너무나 익숙한, 아닌 척하며 가시덤불을 위장해주는 가시덤불의 위선적 도우미들이다. 달리 어찌할 것인가? 호남은 가시밭길을 장식하는 이 역사의 덤터기를 숙명적으로 극복해야만 한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6.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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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천외한 촌극을 한번 상상해보자. 가령, 꼴통으로 알려진 어떤 '남성'단체가 이례적으로 여성회원을 수장으로 뽑고, 그녀가 이런 발언을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여성들이야말로 남성들의 네트워크 때문에 가장 피해를 봤다. 이제 나도 인사 청탁 못 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다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부정청탁을 금지하는 이 법(김영란법)이 앞으로 인사에 있어서 불이익을 많이 받아 왔던 여성들에게 무지하게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자 한 '여성'단체 대변인이 당황하며 즉각 이런 기묘한 반발을 한다.

 

"그렇다면 남성 고위공직자들은 그동안 부정청탁으로 승진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같은 발언은 여성을 우롱하는 발언이며 청렴하게 일하는 대한민국 고위공직자들을 부정청탁자로 몰아 명예를 훼손한 발언이다. 남성단체 대표는 즉각 이 발언을 취소하고 공직자들에게 사과할 것을 촉구한다."

 

이에 질세라 옆 동네 '여성'단체 한 남성회원도 기다렸다는 듯 이렇게 돌격한다.

 

"여성 인사소외가 부정청탁 때문이라는 남성단체 대표의 발언은 남녀주의를 넘어서자는 활동가가 할 소리가 아니다. 여성과 성실한 대다수 공무원에 대한 모독이다."

 

짐작하다시피, 이는 새누리당 대표 이정현과 국민의당 원내대변인 이용호, 그리고 더불어민주당 의원 김부겸의 발언에서 '호남'을 '여성'으로 바꿔 거의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사람들이 호남을 여성으로 바꾸면 그나마 이해력이 다소 증진되는 경우가 많아 그런 것이다. 위 가상발언에서 뭔가 좀 이상을 느꼈다면 내 의도는 달성한 것이다. 번잡스럽지만 다시 원문 기사를 아래에 인용하니 한번 찬찬히 살펴보기 바란다.

 

별도로 원래 김영란 법이 나쁜 법이 아니다. ‘부정청탁해도 좋은가. 부정청탁 이게 얼마나 나라를 좀 먹고, 사회를 좀먹는지 아시는가. 호남사람들이 가장 많이 와서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인사 청탁이다. 내가 고등고시 합격해서 이렇게 성적도 좋고, 능력도 좋고 발휘했는데, ‘나 호남 놈이라고 진급이 안 된다. 너무 억울하다. 진급 좀 시켜 달라.’ 이것이 왜 호남사람들이 이런 일을 당할 수밖에 없는지, 어떻게 보면 호남사람들이 부정청탁 때문에 가장 피해를 본 지역이 호남이다. 이제 이정현도 인사 청탁 못한다. 정운천도 인사 청탁 못 한다. 그러다가 하나만 인터넷에 퍼진다던지, 바로 부정청탁으로 걸린다. 이쪽도 저쪽도 다 마찬가지이다. 말하자면, 부정청탁을 금지하는 이 법이 앞으로 우리 호남 출신들,억울하고 인사에 있어서 불이익을 많이 받아 왔었던 많은 사람들한테 확실히 고리를 끊어 주는 우리에게 무지하게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김영란법이 우리 사회에 주는 순기능도 피해를 최소화 하는 길과 함께 생각해보자. 이정현, <전북 축산업 종사자 간담회 주요내용[보도자료] (새누리당 공보실)>, 2016년 10월 8일.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전북을 방문 "호남인사 소외는 부정청탁이 원인" 이라며 "김영란법 시행으로 호남인사 소외의 고리를 끊어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말했다 한다. 그렇다면 비호남 고위공직자들은 그동안 부정청탁으로 승진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대표의 이 같은 발언은 호남을 우롱하는 발언이며 청렴하게 일하는 대한민국 고위공직자들을 부정청탁자로 몰아 명예를 훼손한 발언이다. 이 대표는 즉각 이 발언을 취소하고 공직자들에게 사과할 것을 촉구한다. 이용호, <국민의당 원내대변인 논평>, 2016년 10월 8일.

 

호남 소외가 부정청탁 때문이라는 이정현 대표 발언은 지역주의를 넘어서자는 정치인이 할 소리가 아닙니다. 호남과 성실한 대다수 공무원에 대한 모독입니다. 김부겸(트위터), <중앙일보>, 2016년 10월 9일.

 

대한민국엔 하나의 큰 병이 있다. '초월'이라는 병이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초월을말할수록 이성적이고 휼륭하다고 생각하는 소아적 사고가 만들어내는 병이다. 계급을 초월해, 남녀를 초월해, 영호남을 초월해, 존재하는 모순을 아예 생각하지 않으면 그 모순이 사라진다고 믿는 유사종교적 병이기도 하다. 당연히 이 '순결무구한' 상상은 반민주적 계급지배, 남성패권, 영남패권 등을 지속시키는 것을 방조한다. 어쩌면 그런 복무를 기꺼이 의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https://twitter.com/diiib/status/696736165022474240  

 

대구가 지역구인 더불어민주당 김부겸의 영남패권 부정발언이야 워낙 익숙한 위선 사례니 그렇다 치자. 한 가지 더, 일일이 지적하는 게 번잡스럽지만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정현은 "가장 피해를 본 [호남]"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말을 호남지역구 의원이 대다수인 국민의당 대변인 이용호(남원임실순창)는 "비호남공직자들" 전체의 명예를 훼손한 것으로 받는다. 거의 언어적 사기에 가까운 대변이다.

 

 

 

나는 국민의당이 호남의 심정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최소한 이런 식으로 반박해줄 것을 기대했다. "호남사람들이 부정청탁 때문에 가장 피해를 봤다는 이정현 대표의 발언을 영남패권주의 역사에 대한 성찰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영남패권주의 체제를 구조적으로 바꾸지 못 한다면 김영란법도 허사다. 영남패권주의 체제하에서 그런 패권적 인사문제 정도는 아무리 요란하게 1원짜리 부정청탁을 막더라도 얼마든지 암암리에 지속가능하다. 우리 당이 앞장서 이 근원적 악을 끝장낼 수 있게 힘을 모아달라."

 

나는 영남패권주의 본당인 새누리당 이정현의 립서비스를 믿지 않는다. 진심이라면 행동으로 보여주면 된다. 판단은 그 다음에 할 것이다. 하지만 불신에 가득찬 지금이라도 '법치주의적 평등'을 홍보하는 이정현의 발언 그 자체를 부정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새누리당 대표 이정현의 (5·18 발언에 대한 반응도 그랬지만) 과거사 성찰을 반대하며, 존재한 적 없는 이상세계를 명분으로 돈키호테처럼 돌격하는 두 야당의 모습은 기괴하기만 하다.

 

지금 새누리당은 영남패권주의를 성찰하는 척하며 호남표를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두 야당은 오히려 영남패권주의 역사를 옹호하며 호남표를 지키려 들고 있다. 여야를 불문하고 대한민국의 모든 당이 원하는 건 호남표지 호남이 아니라는 자명하고 허탈한 진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영남패권주의 이데올로기의 '위엄'을 보여주는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지금 호남은 영남패권주의에 대해 백치상태거나 위선적인 안철수·문재인에 목을 매고, 그들이 자신들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구원할 것이라 믿으며 대책없이 기도만 하고 있다. 나는 내년 대선 전까지 이런 기괴한 일이 실감나게 지속된다면 이정현이 공언한대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호남(인)에서 20%이상을 득표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부디 나를 놀라게 하는 어떤 다른 큰일이 벌어지기를 고대한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6.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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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도서출판 개마고원 블로그(http://blog.naver.com/kaema1989/220824796690, 2016년 9월 30일)에서 원본 복원 후 재등재한 것임.

 

며칠 전 발견했는데, 예컨대 이런 글(http://allfail.tistory.com/1)이라면 차분히 존중하며 댓글을 달 만하다. 글쓴이는 정의당원인 성수동 라인하르트로 돼 있다. 그의 글은 내가 접한 정의당원(혹은 지지자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이런저런 생각을 해볼 능력이 있는 이성적인 인물처럼 보인다. 다음 글은 윗글에 대한 나의 댓글이다.
 
1. 그는 '광주학살이 아니라 부마학살이었으면 역사가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상상을 한다. 그런 상상을 왜 하는 것일까? 정의당의 이데올로기적 틀에 맞지 않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무의식적 안타까움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적 틀과 역사적 사실이 맞지 않는다면, 바꿔 말해 역사적 사실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있는 이데올로기적 틀이 따로 있다면 필요한 것은 상상된 역사가 아니라 잘못된 이데올로기적 틀의 폐기다. 대부분이 그렇듯이 그의 상상력도 거기까지 미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2. 과문한 나는 지난 총선에서 정의당이 택한 3 목표(전략)'노동', '청년', '호남'이었다는 걸 그의 글을 통해 처음 알았다. 내 두 눈을 의심했다. 그래서 검색까지 해봤더니 <아시아투데이> 2016년 3월 2일자에서 그런 보도가 분명히 있었다.

 

 

 

'영남패권주의에 투항한 지역주의 양비론' 유시민과 '호남비하 관점에서 일베와 공통된 속성'을 보여주는 진중권을 이데올로그로 떠받드는 정의당(지지자)3대 전략이 '호남!!! ???' 고종석식으로 표현하면 '커널 샌더스를 지지하는 치킨표 획득'이 정의당의 전략이었다니! 하긴 정의당이라고 왜 사양하겠는가?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을 비롯해 지금도 여기저기서 그런 야망을 갖고 있다고 자랑스레 떠벌리는 정치인들이 넘쳐나는데. 그렇지만 정의당의 '호남' 타령은 '주입식 계급환원론'보다 더한 가관이다.
 
성찰적으로 쓰인 글의 느낌에 비추어볼 때정의당원인 성수동 라인하르트는 애초(총선 전)에 이 황당한 전략을 접하고도 나만큼 '논리적'으로 놀라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우리나라 정치일반을 지배하는 바로 그런 사태가 더 놀랍고 절망스럽다. 그저 표만 얻을 수 있다면, 집권만 할 수 있다면, 반민주와, 위선과, 비논리와, 겁박과, 거짓 영웅을 만드는 선전선동 따위가 문제조차 안 되고, 심지어 찬양받는다. 그리고 지식인들조차, 아니 지식인들이야말로 적극·소극적으로 그 사회적 병리현상에 정신없이 합세하는 것이다.
 
3. 다음은 성수동 라인하르트의 이성에 기대하는 결론적 질문이다. 영남파시즘과 영남패권주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고, 호남이라는 지역단위의 저항적 다수표를 얻으려는 생각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고 보는가? , 노무현과 그 추종세력은 한때 그 위선적 능력으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러니 질문을 바꾸자그것이 정의로운 일이라고 보는가?
 
사족이겠지만, '뜬금없이 비논리적이고 파편적인 생각으로' 영남파시즘과 영남패권주의 역사'' 얼마든지 인정할 수 있다고 대답할 경우를 대비해 한 가지 질문을 더해 놓는다. 그 경우 대한민국 국민들의 이데올로기와 정치현실 그리고 역사책이 어떻게 바뀌어야 그 '인정' 완성된다고 보는가? 그 완성을 위한 지난한 투쟁에 정의당이 기꺼이 (앞장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동참할 준비가 돼 있다고 보는가? 제발, 일본을 롤모델로 삼아 대답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8798452(원문), 2016년 9월 29일(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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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도서출판 개마고원 블로그(http://blog.naver.com/kaema1989/220824787085, 2016년 9월 30일)에서 원본 복원 후 재등재한 것임.
 

프로바둑 기사들의 해설에 '돌의 체면'이라는 말이 가끔 등장한다. 착점을 잘못했다는 판단이 설 경우에도 자신의 그 착점이 잘못됐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어 그 잘못된 착점의 의미를 살리는 방향으로 다음 수를 계속 두는 경우를 설명할 때 등장하는 용어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늪에 한 발을 잘못 내딛은 사람이 그 한 걸음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다음 한 걸음을, 나아가 계속 다음 발걸음을 내딛는 결과를 상상하면 충분할 것이다.
 
프로바둑 기사라는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 왜 이런 오류에 빠지는 걸까? 그들 프로바둑 기사들은 착점 하나 하나에 인생을 걸기 때문이다. 오류가 된 '인생의 낭비'를 쉽게 인정하기 힘든 것이다. 그래서 헛꿈을 꾼다. 인생의 실수가 된 그 악수를 오히려 묘수로 바꾸고 싶은 욕망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이제와 새출발을 한다 해도 승리는 기대하기 힘드니, 짐짓 모른 척하며 상대의 더 심한 악수를 기대하는 게 합리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해서일 것이다.
 
프로바둑 기사도 아닌 장삼이사들의 인생엔 '돌의 체면'을 살리려는 부질없는 욕망이 없을까? 예컨대 유신헌법에 찬성표를 던지고, 전두환의 정당을 지지하며 살았는데 그것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역사의 시간이 왔을 때 우리는 순순히 과거에 착수했던 '돌의 체면' 포기할 수 있을까? 혹 어떻게라도 악수를 묘수로 돌변시키고 싶은 인생의 욕망은 작동하지 않을까? 왜 그러지 않겠는가? 나는 이렇게 썼다.

 

 

 

"영화 <26>에서 그 사람’[전두환] 경호에 목숨을 거는 마상렬의 대사가 노골적이다. “넌 죽으면 안 되지. 넌 끝까지 뻔뻔하게 잘 살아서 내 삶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돼!”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 인생을 스스로 단죄하는 상실감을 감당할 수 없다. 차라리 거꾸로 역사와 악착같이 싸우며 그 사람’[전두환]을 잘 먹이고 잘 살림으로써 상상된 보상을 받고 싶은 것이다."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 48.)

 

나는 노년세대의 정치관에는 다분히 그런 요소가 스며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래서 나는 (나를 포함해자신의 인생을 변명하고픈 인간적 욕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관찰하며, 있는 그대로 비판한다.
 
나는 노년세대가 '돌의 체면' 살리려는 부질없는 욕망을 거두지 못하는 것처럼 친노세대가 그런 욕망의 추태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을 무자비하게 관찰하고 있다. 내 눈에 비친 그것은 더욱 위선적이고 파렴치한 방식의 답습이다하지만 역사가 골백번이 뒤바뀌어도, 박정희의 영남패권주의가, 전두환의 영남파시즘이노무현의 '영남패권주의에 투항한 지역주의 양비론'이 민주주의 역사 속에서 찬양받는 묘수로 뒤바뀔 가능성은 없다!
 
나는 친노세력을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돌의 체면' 살리려고 반민주주의의 늪으로 맹렬하게 돌진하는 무리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나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는데겸허하게도 '돌의 체면'을 포기한 한 '느슨한 노빠' 독자를 발견했다. 예외적인 독자가 그뿐만은 아니겠지만 그런 독자를 발견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그의 다음 글을 추천한다. 그의 겸허한 성찰적 자세를 우리는 배워야 한다. 어쨌든 나는 이런 독자를 위해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http://blog.yes24.com/document/8469106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8787053(원문), 2016년 9월 24일(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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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도서출판 개마고원 블로그(http://blog.naver.com/kaema1989/220741050251, 2016년 6월 20일)에서 원본 복원 후 재등재한 것임.

 

 

 

201663, 광주(5·18민주화운동 기록관)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 호남정치와 한국의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한국사회학회/전남대학교 5·18연구소 주최 학술 심포지엄이 열렸다. 나는 '4·13총선과 호남정치의 변화'라는 주제로 발제했다내가 발제한 글은 총선 전인 지난 해 출간한 <아주 낯선 상식>과 이 심포지엄 전날 출간된 <아주 낯선 선택>의 요지를 요약·보완한 것이었다.

 

학회모임에서 이런 유의 글(영남패권주의에 대한 분석·주장)이 발표되는 건 거의 유례 없는 일이다. 호남이라는 지역적 특성과 4·13총선의 아주 낯선 결과가 내 발표를 허락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나는 그간 내 하던 얘기를 했고, 청중들은 그간 못 듣던 얘기를 들었다. 발제 요지와 토론자로 나선 고려대 정한울의 토론 요지는 녹취할 수 없으므로 <경향신문> 기사로 대신한다.

 

지난해 <아주 낯선 상식>(개마고원)을 출간해 큰 관심을 모았던 김 교수는 “5·18 정신이 현실과 단절됨으로써 신성화되는 것을 반대한다“5·18 정신이 세속광주의 세속욕망을 담아낼 세속이념이기를 바라며, 그렇게 될 때에 진정한 호남정치가 시작될 수 있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오늘의 한국 사회를 영남패권주의체제로 규정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호남 복수정당 체제와 독일식 비례대표 내각제 개헌을 제시했다. 복수정당 구도를 지켜야 호남이 자신의 지분을 지킬 수 있으며, 특정 계층이나 계급·지역이 정당한 정치적 지분을 넘어서 반민주적 패권을 행사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 정당지지율과 의석점유율을 일치시키는 독일식 비례대표 내각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김 교수를 상대로 토론자로 나선 정한울 고려대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는 지역주의 비판 담론의 불공정성에 대한 지적이나 지역 내 복수정당의 필요성에 대한 지적에는 공감한다면서도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나 광주를 신성광주세속광주로 구분하는 데에는 모호함이 있다고 지적했다. 영호남을 이야기할 때 지역 엘리트를 가리키는 것인지, 일반 대중을 가리키는 것인지 불명확하며, 수도권으로 모든 자원이 집중되고 있는 상황에서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적 규모의 경제적 지배관계를 확대재생산하려 한다는 지적이 타당한가라는 의문이다.

 

정 교수는 영호남 엘리트 간 경쟁에서야 영남패권주의가 공세적 담론으로 역할은 할 수 있겠지만, 호남정치를 포함한 한국 민주주의 전반의 발전과 향후 과제를 논의 대상으로 생각한다면 초점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지적했다.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사회학회 순회 심포지엄 - 광주, 인터넷 경향신문, 201665.)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를 엘리트 간의 이해관계로 치부하려는 것은 (선의로 해석한다 해도) 계급환원주의의 상투적 관점에 불과할 뿐이다. 이런 관점에 의하면, 예컨대 여성의 남성패권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도 남여 엘리트 간의 이해관계로 얼마든지 환원시킬 수 있다. 재벌 남성의 아내와 노동자 남성의 아내는 여성으로서 이해관계가 일치할 수 없으며, 언제나 문제는 계급으로'' 환원될 뿐이다. 이런 식의 관점에 의하면 반영남패권주의 투쟁은 페미니즘과 마찬가지로 주된 투쟁인 계급투쟁의 초점을 혼탁케 할 뿐이다.

 

하지만 '남성/여성' 투쟁에 의한 여성의 권리향상은 여성이 각 계급적 지위에 속한 처지에 따라 각각 제 나름의 권리향상을 가져올 것이다이 세상의 모순은 결코 단일하지 않다. 단일하지 않을 뿐더러 '제국/식민지'의 모순처럼 지역모순이 계급모순을 능가하는 지배적 모순의 형태로 존재할 수도 있다. 지역모순이 패권적으로 존재하며 계급모순의 발현을 질식시킨다는 주장을 마치 계급모순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곡해해서는 안 된다. 나아가 엘리트 간의 문제로만 치부하는 건 사실관계에 눈을 감는 무능 혹은 왜곡이다.

 

사실 나는 정한울의 상투적인 질문보다는 종합토론에서 플로어 질문자로 나선 고려대 조대엽의 공격적인 질문이 훨씬 덜 지루했다. 그와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과 대답을 주고 받았다. 기억에 의존해 발언 취지를 조금 매끄럽게 옮겨 적는다.

 

조대엽: "발제에 의하면 호남은 민주, 법치 등등 세속이념을 지향해야 한다는 주장인데, 언제, 누가, 호남에 그런 세속이념이 아닌 신성이념을 강요했는가?"

 

김욱: "전 세계 어느 민주국가에서, 특정 지역 유권자에게 특정 정당에 몰표를 주지 않으면 '역사의 죄'를 짓는다며 겁박하는 경우가 있는가? 복수정당제를 부정하는 이 이념이 세속이념인가이것이 바로 신성이념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최정운의 '광주정신=절대공동체' 이념에 도달한다. 그 경험은 자랑스럽지만,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 스치듯 경험한 그런 '유령적 계기(데리다)=신성이념(김욱)' 일상적 삶 속에서 선택적으로 강요할 수는 없다는 의미다."

 

나는 <아주 낯선 상식>에서 하지 못한 나머지 절반의 이야기를 <아주 낯선 선택>에서 했다. 그 대상이 호남에서 영남으로 바뀌었는데, 사실 같은 이야기의 다른 측면일 뿐이다. 하지만 <아주 낯선 상식>보다 어쩌면 더 낯설게 들릴지도 모른다. 보지 않으려고 하면 눈앞의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새삼 실감케 될 것이다.

 

 

나는 <아주 낯선 선택> 많이 읽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싫은 일 중의 하나는 어떤 주장이 자기 자신의 기득관념을 뒤흔드는 것이다. 꽤 유명해진 카프카(70)'도끼' 발언은 현실적 독서가 어떠한가를 기술한 것이 아니라 당위적 독서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피력한 것일 뿐이다. 어떤 주장이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느낌을 준다면 그런 주장에 기꺼이 귀 기울일 사람이 현실 속 어디에, 얼마나 있겠는가?

 

나는 내 책이 누군가의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어떤 생각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숲 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느낌을 받는 것은 나 혼자라 해도 좋다. 그러니 어디에선가 주입된 자신의 소중한 기득관념이 혹여라도 상처입을까봐 불안불안한 '정신적 19세 미만자, 정신적 노약자'에게 나는 <아주 낯선 선택>을 권하지 않는다. 그건 그들에게나 나에게나 명백한 시간낭비일 뿐이다.

 

카프카의 말을 귀담아 듣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누구나 아는 천기를 새삼스레 누설하겠다. 누구에게라도 어디에선가 주입된 자신의 기득관념만을 강화시켜주는 책이야말로 가장 매혹적인 책이 아니겠는가? 독서를 통해 좋은 기분을 망치지 않으려면 바로 그런 책을 읽어야 한다. 다행히 그런 정치관련 책은 주위에 널려 있다. 그러니 거의 아무 책이나 골라 잡아 읽으면 된다. (붓 가는 대로 글을 쓰다 갑작스런 우려가 밀려오는데이 블로그 글 전체 혹은 부분이 갑자기 삭제된다면 그건 순전히 출판사 대표의 검열 때문임을 미리 밝힌다.)

 

 

예정에 없던 '셀프 디스'로 급 우울해진 까닭인지상처입은 내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지젝의 냉정한 분석을 동원하고 싶은 강렬한 유혹을 느낀다. 기왕에 내 책소개를 잘해보려는 소심한 스텝이 뭔가 꼬였으니 얄팍한 상술을 포기하고 계속 붓 가는 대로 과감하게 써보자얼핏 자기확신의 화신처럼 보이는 이슬람 테러리스트에 대해 지젝은 이렇게 도발한다.

 

테러리스트가 보여준 열정은 오히려 그에게 진짜 확신이 없음을 증거한다. 그가 가진 믿음이 얼마나 연약했기에 풍자 주간지에 실린 한심한 만화를 보고 위협을 느꼈겠는가! () 이슬람 근본주의자를 괴롭히는 문제는 무엇일까? 우리가 그들을 열등하게 여기기 때문에 괴로워하는가? 아니다. 그들이 스스로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보다 우월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확신하지만, 그 태도가 거꾸로 그들을 더 화나게 하고 복수심을 품게 한다. () 역설적으로, 자신이 우월하다는 진짜 '인종주의'다운 확신이 이슬람 근본주의자에게는 부족한 것이다.(19.)

 

굳이 설명이 필요한 말인가? 한데 설명을 위해 난데없이 사족 같은 기억이 떠오른다고등학교때 일이다. 갓 전근온 국어교사에게 한 친구가 (국문법에 관한) 질문을 몇 차례 계속했다. 불행하게도 그 친구는 갑자기 이성을 잃은 그 교사에게 그 일로 흠씬 얻어터지고 말았다. 그 교사가 쏟아낸 분노의 목소리에서 겨우 알아낸 구타의 이유는 '건방지게 자신의 실력을 시험했다'는 것이다. 설령 그 친구가 그랬다 해도그 교사는 자신의 실력을 자랑할 기회를 놓쳤거나 아니면 자랑할 만한 실력이 없었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아마 후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유사한 영감을 주는 발언을 하나만 더 추가한다. 브루스 커밍스는 일본인이 조선을 지배하며 느꼈던 가장 큰 어려움을 이렇게 전한 바 있다.

 

식민치하의 주종적 상호관계에 관한 어느 일본인의 발언을 들어 보자. "참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한인들은 우리를 마치 외국인같이 대한단 말입니다."

 

주인이 종속자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분리가 이루어지는 것이 긴요하다. 종속자는 다르고, 저열하고, 폭력에 순종해야 되[], 자립적으로 사물을 처리하지 못하는 존재여야 한다그렇지 않고서야 식민지적 관계에 어떻게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단 말인가? 타인을 지배하는 자들 대부분에게 있어서 이러한 비안간적 망상은 필요한 것이다. 어떠한 합리화든지 보다 고상한 동기를 내세우지 않고는 타인을 지배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지배자들을 그들의 인간성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는 수단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지배자들이 마음속으로 이것을 인식하고 이러한 사실의 인식을 떨쳐 버리지 못하게 된다. (108.)

 

지배하기 위해 우월'해야' 하는 자들이, 지배하면서도 우월'하지 못함' 스스로 느낄 때 얼마나 정신적으로 불안·피폐해지겠는가?! 그런 그들에겐 '정신적 언어' 대신 '정신적 폭력', '소통하는 논리' 대신 '주입된 이데올로기'가 유일한 탈출구가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아주 낯선 선택> 자기 확신이 부족한 나머지 정신적 테러(혹은 인터넷에 범람하는 테러수준의 공격적 댓글)에 중독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슬람 테러리스트 같은 사람들에게 권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이 책은 그런 '그들과 그 친구들' 설득하기 위한 무모한 시도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능한 일도 결코 아니다.

 

내 언어와 논리는 각자가 갖고 있는 기득신념의 정당성을 검증해보고 싶은 최소한의 자신감과 호기심, 심지어 이데올로기적 우월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혹은 세상을 직관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예컨대 <아시아경제> 기자 최대열 같은 사람이다그에게 <아주 낯선 선택> 이런 책이었던 같다.

 

학교 다닐 때 여권신장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던 지인과 술자리에서 논쟁한 적이 있다. 시간이 흘러 다소간 왜곡된 기억은 있겠지만 요지는 단순했다. 나는 성별간 갈등을 부각시켜 문제해결을 강조하는 게 정작 중요한 계급 혹은 계층 갈등 자체를 흐릿하게 할 가능성이 높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그는 현실에서 나타나는 차별과 억압폭력을 거론하며 나의 주장이 가진 한계를 짚었다
 
현실정치에 관심이 더 생겨나 지역갈등을 바라볼 때도 나의 사태인식에 대한 구도는 비슷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면 지역문제를 맨 앞에 둬서는 안 된다고 봤다. 김욱 서남대 교수가 최근 출간한 '아주 낯선 선택'을 읽고 나서는 머릿속이 좀 복잡해졌다.

그는 책 머리말에 "어떤 경로로든 머릿속에 주입된 이상적(?) 분석틀인 계층계급만이 세상을 진짜로 설명하는 유일한 기준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다고 꼬집었다. 뜨끔했다. 현실의 지역정치를 다룬 책으로 치부하고 스쳐 지나려다 페이지를 넘기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간의 피상적인 접근에 대한 반성과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하나'라는 질문을 되뇌이게 됐다.

[최대열의 體讀]오른쪽은 쳐다보지 않는 민주화의 함정, 아시아경제, 2016613.

 

나는 내 책에서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나"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했다. 추측컨대 실현 가능성이야 어떻든 내년 대선 전까지 개헌논의도 폭풍처럼 한 차례 정국을 휩쓸 가능성도 있다. 어떤 경우라도 일단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는 그 다음 문제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토대하지 않는 이데올로기적 낭만은 사회과학을 도덕적 훈계 혹은 맹목적 기도로 대체할 뿐이다.

 

 

 

<아주 낯선 선택>의 머리말엔 돈키호테와 산초가 누군가 머리 위에 뒤집어 쓰고 있는 번쩍거리는 저 물건이 무엇인가를 두고 언쟁하는 장면이 인용돼 있다. 돈키호테는 맘브리노의 투구라고 우기고, 산초는 감히 눈에 보이는 대로 세숫대야라고 응수한다.(291~294.) 누구라도 소설 속 그들의 언쟁을 읽을 땐 맘브리노의 투구와 세숫대야를 구별하는 건 누워서 식은 죽 먹기처럼 보인다. 바보들이 아닌 다음에야 그런 걸 구별 못해 진지한 언쟁을 벌이다니, 아 놔.

 

하지만 장담컨대, 현실 속에서 맘브리노의 투구와 세숫대야를 구별하는 건 암병아리와 숫병아리를 구별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마음의 준비가 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앞에서의 '셀프 디스' 때문에 이 글의 삭제를 요구할지도 모를 출판사 대표를 의식해 나름 반전의 결론을 남긴다.) 결코 많은 이들은 아니겠지만, 이 책이 관념의 모험을 떠나 맘브리노의 투구와 세숫대야를 구별하려고 시도하는 '담대하고 자각적인' 독자들에게 유용한 길잡이가 되기를 바란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8571905(원문), 2016년 6월 19일(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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