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전>. 이 영화는 좀 특별하다. 리메이크 판인 이 영화가 오리지널 판 <마약전쟁>의 그저 그런 스토리를 빌려 철학적으로 완전히 다른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더 놀라운 것은 수준 높은 철학적 메시지를 관객들에게 들이대지 않고 단순한 범죄 스릴러 영화 같은 일종의 착시효과를 통해 관객동원까지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품의 완성도를 갖춘 영화가 대중적 성공까지 거두는 것은 모든 영화인의 소망일 것이다.

 

<독전>이 선생이 누구냐는 데 재미의 초점을 맞추라고 제안한다. 뭐 그렇게 어려운 수수께끼는 아니다. 하지만 그 수수께끼를 모두가 맞힌 순간 정작 다른 문제가 제기된다는 점이 핵심이다. 그 문제는 이렇다. ‘모두가 이 선생이라고 생각하는 이 선생이 진짜 이 선생이 맞는가?’ 드러난 이 선생, 즉 락이 이 선생인 건 맞다. 하지만 그 락이 원호가 인생을 걸고 추적한 이 선생일까? 원호가 추적한 이 선생은 락의 실상이 아닌 허상이었다. 원호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실재한다고 믿었던 락의 허상,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 문제의 핵심을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왜 이 선생의 실상이 아닌 허상이 세상을 지배하는가?’ 조금 다른 식으로 변주하면, ‘왜 이 선생도 이 선생의 허상을 필요로 하는가?’ 이 화두의 철학적 문제의식은 생각보다 깊고, 넓고, 심지어 불온하기까지 하다. 아마도 많은 이들은 이 철학적 문제의식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고 불쾌해 하거나, 피하거나, 공격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모두가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이 선생의 허상을 필요로 하는 우리 삶에 대한 각자의 (거부) 반응을 다음 명제를 통해 직접 확인해보기 바란다.

 

나는 명품의 치장을 통해 나의 허상이 존재하는 걸 원한다.’ ‘회사 대표인 나는 내 실제 능력보다 훨씬 더 큰 능력과 권력 네트워크를 가진 것처럼 보이고 싶고, 그런 허상을 활용하고 있다.’ ‘나는 예수나 부처의 실상에는 별 관심 없고, 인간이 믿는(만든) 그 신적 허상에만 관심이 있다.’ ‘나는 노무현의 실상엔 별 관심 없고, 그 허상(이미지)에만 열광한다.’ ‘연예인인 나는 대중이 나를 바라보는 허상을 즐기기도 하고, 그 때문에 고통스럽기도 하다.’ ‘나는 전쟁이나 스포츠에서는 상대를 속이거나 겁먹게 할 허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독전>의 감독 이해영은 누구보다 이런 모순을 더 절감하며 살았는지 모른다. 그는 성소수자임을 고백한 사람이다. 성소수자는 자신의 겉모습, 즉 바깥으로 드러난, 그리고 모두가 실상이라고 간주하는 허상이 내면의 실상과 모순을 빚는다. 남의 삶을 대신 산 락이 그 남의 어릴 적 사진을 보며 원호에게 말한다. “저 아니에요. 근데 저 맞아요.” 원호가 창밖을 내다보며 눈물을 그렁거리다 락에게 너는 살면서 행복했던 적 있냐?”고 묻는 엔딩 대사는 락의 진실에 대한 뒤늦은 반응이자, 허상을 쫒아온 자신의 공허한 삶에 대한 회한이다.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면 허상과 실상의 모순에 대한 그런 개인적 질문이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현상을 놓고 보면 다른 관점의 질문이 훨씬 더 심각해진다. 우리는 과연 사회적 실상에 관심이 있긴 한가? 세상은 오히려 허상의 메커니즘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닐까? 허상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쉽고 편리하게 허상이 지배할 수 있도록 순응해야 하는 건 아닌가? 그건 우리가 실상보다는 허상을 통해 우리를 위로하고, 조작하고, 지배하고, 이익을 얻고, 만족하려는 속내가 본능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은 아닌가?

 

<마약전쟁>빌리는 허수아비로 밝혀지는 실재 인물이었다. 이런 맥거핀적 발상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한데 <독전>의 이해영은 이 평범한 기법을 실재하는 이 선생부재하는 이 선생’, 즉 실상과 허상의 모순이라는 모티브로 비범하게 변경했다. 그리고 이 모티브를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로 담아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마약전쟁>과는 아예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작품으로 재탄생시켰다. 거의 찾기 힘든 특별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독전>의 영어 제목은 친절하게도 <Believer>. 그러므로 우리는 그 제목이 함축하고 있는 진지한 질문에 잠시라도 정색하며 대답하는 게 예의다. 우리가 믿는 것은 실상인가, 허상인가? 아니, 우리가 믿고 싶어 하는 것은 실상인가, 허상인가? 실상이 아닌 허상으로 살아가는 자, 혹은 그 허상을 실상으로 믿고 (싶어 하며) 살아가는 자,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도 행복할 수 있는가? 어차피 그것이 삶이고, 세상인가? 엔딩에서 외롭고 차갑게 울리는 한 방의 총소리가 우리의 맹목적 삶을 소스라치게 각성시킨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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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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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일간지 기자가 <책혐시대의 책읽기> 저자 인터뷰를 하자면서 대뜸 그랬다. “책읽기 책을 왜 썼냐? 당신이 쓴 책이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거다.” 하긴 그러는 것이 당연했는지도 모르겠다. 책읽기 책은 아주 많다. 내가 여기에 한 권을 더 추가하려고 했던 이유가 뭘까? 책에 그 이유를 적었지만 더 그럴 듯한 해명이 필요한 듯싶다.

 

흔하기 짝이 없는 책읽기 책을 쓴 죄(?)로 나는 기자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얘기 중에 이런 말을 했다. “스님들은 왜 각자 자신의 화두를 붙잡고 깨우치려 하는가?” 선어록은 누구라도 쉽게 구할 수 있다. 해설서도 있다. 선대 고승들이 이미 깨달은 내용을 학습해 그런가 보다고 그대로 따르면 될 텐데 뭣 때문에 스스로 화두를 붙잡고 시간을 낭비하며 씨름을 할까? 더 심란한 의문은 그렇게 고생해서 깨달아 봐야 고승들의 깨우침과 다른 혹은 더 뛰어난 특별한 내용이 있을까 하는 점이다. 내가 책을 쓴 이유는 이 대답과 관계가 있다.

 

그에 대한 구체적 대답은 조금 뒤로 미루고 먼저 할 말이 있다. 나는 이 책을 독자 모두가 각자(!) 자신의 문제의식(화두)으로, 자신의 머리로, 자신의 노력으로, 역사 속의 '아름답고 잔인한 생각의 진화과정을 따라잡아보라고 권유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런데 우리가 천재들의 생각을 따라잡는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가능하다!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긴 하지만 충분히 가능하다. 모두가 천재가 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천재를 이해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그 이유는 책에 좀 더 자세히 설명했다.

 

, 그럼 그렇게 천재를 이해했다 치자. 이 이해는 이제 내 것인가?! 아직은 아니다. 섣부르게 이 이해를 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앞에 얘기한 고승들의 해탈 경험을 모아 놓은 선어록을 해설서를 통해 이해한 다음, '이제 그들의 해탈이 내 것이 됐다'고 우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흥미로운 건 심지어 불교계에도 그런 식의 주입식 화두문답에 의한 유사 해탈 모습이 있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말한다면, ‘뭔가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 때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내 스스로 다시 알게됐을 때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다시 알게 될지도 모른다. 무협지의 젊은 주인공이 얼떨결에 무림 절대고수로부터 주입받은 내공을 실전을 통해 끊임없이 제 것으로 만들어가며 눈앞의 새 세상을 극복해가는 이치와도 유사하다. <돈키호테>와 <파우스트>는 그런 앎의 고행과 관계가 있는 가장 유명한 책일 것이다.

 

우리는 주입식 교육에 너무 익숙하다. 그래서 심지어 책읽기에도 그런 습관이 마치 우리들의 본성인양 아주 강하게 나타난다. 역사 속 위인들, 우리 시대의 뛰어난 학자들, 유명 저자들의 책을 그저 주입식으로 이해했을 뿐이면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는 풍조가 넘쳐난다.

 

이쯤에서 강한 의문이 있을 것이다. 결국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게 중요하지 자기 것인지 아닌지가 뭐 그렇게 중요하며, 설령 자기 것이 아니라도 모두 똑똑한 사람들의 훌륭한 생각과 결국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인데 그게 나쁜가?

 

나쁘다! 그런 식의 자기 것처럼 보이는 훌륭한 남의 생각을 아무리 소중하게 간직해봐야 책읽기의 목적이랄 수 있는 새로운 문제 해결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지식을 책읽기를 통해 자신의 논리와 생각으로 재구축한 것만이 내일을 위한 내 지혜고, 내 힘이다!

 

강조하건대, 자신이 훌륭한 사람들의 생각과 결론적으로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문제라는 게 아니다. (아마 실제로 대부분, 그리고 대부분의 사안에서 그럴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 결론적 생각을 내 나름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그렇게 터득한 것이 아니라면 바로 그게 문제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읽기에서까지 주입식 정보와 결론만을 탐하는 습관을 강화한다면 책읽기는 약이 아니라 오히려 독이다. 이런 식의 책읽기는 사람을 똑똑한 바보로 만드는 지름길이다. 이럴 거라면 왜 전 국민이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들여 구태여 책읽기를 해야 하는가?

 

극단적으로 말해, 그게 정말 우리의 민주주의에 아무 문제도 없다면 대한민국의 아주 소수만 열심히 책읽기를 하고, 그들이 우리를 뭐라고 생각하든(심지어 개돼지로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들 생각(결론)을 이해했다면서 당신 생각이 바로 내 생각이라고 영혼은 없지만 너무나 편리한 맞장구만 쳐주면 될 일 아닌가?

 

하지만 그러고 싶은가? 나는 절대 그러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악착같이 앞으로도 내 스스로의 머리로 책읽기를 하려 한다.

 

나는 <책혐시대의 책읽기>를 통해 파편적이 아니라 체계적인 책읽기를 아주 강조했다. 그건 다시 말해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가다듬기 위한 최선의 방책이어서 그런 것이다. 처음엔 다소 막연하게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입체적인 사고로 스스로의 생각을 강하게 만들고, 재미를 얻게 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으로 책읽기를 안내하는 맘에 드는 책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흔한 책읽기 책을 정색하며 다시 쓴 것이다. 이것으로 변명이 됐기를 바란다. 끝으로 이 책을 눈여겨 봐준 미디어의 다음 필자들에게 감사한다.

 

http://www.hankookilbo.com/v/080a6e99d30a44a3bab2cc90c9f10ae2

http://view.asiae.co.kr/news/view.htm?idxno=2018051807312926968

http://www.fnnews.com/news/201805161709362294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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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가 박해영에 대하여

 

그녀가 재능 있는 작가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경지에 오른 작가란 건 미처 몰랐다. 무협지엔 이해 불가능한 내공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생을 마감하는 절정 고수로부터 불공평하게 내공을 전수받은 행운아다. 나는 박해영도 분명히 그런 은밀한 사연을 갖고 있는 무림 고수라고 의심한다.

 

2. 연출 김원석에 대하여

  

김원석 역시 이름 있는 연출자이긴 하다. 하지만 적어도 난 그의 전작에서 보여준 영상에 별 관심이 없었다. 즉 그의 작품 완성도엔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번엔 달랐다.

 

  

 

 

나는 그가 연출한 후계동 밤의 '정희네' 앞길에서 고흐의 <아를 포룸광장의 카페 테라스> 밤 분위기를 느꼈다. 우리가 보는 고흐의 이 그림 속 공간 색감은 일반적으로 묘사되는 객관적 감각이 아니다삭막한 세상에서 고흐의 그림을 보는 우리는 비현실적인 푸른 하늘에서 터지듯 반짝이는 아름다운 별과 빛나는 노란색 테라스가 감싸주는 아늑한 따뜻함 속으로 꿈을 꾸듯 빨려 들어간다. 김원석은 악조건 속 한국 드라마에서도 악착같이 그런 영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이 작품 속 출연자들의 연기가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마치 생활 속 다큐를 보는 듯 자연스러웠다면 김원석의 공이 컸을 것이다. 특별히 이지안 역을 맡은 이지은은 대체불가능한 연기를 보여줬다.

 

3. 작품에 대하여

 

이 작품은 넓은 의미에서 ‘일종의 유토피아 장르에 속한다. 사실 이 포맷을 승화시킨 건 캐릭터의 대사가 그 주제를 짜임새 있게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구도를 잘못 다루면 권선징악이라는 전근대적인 진부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졸작이 될 수도 있었다. 한데 이 드라마가 훌륭한 건 그런 전근대적 진부함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 드라마 속 캐릭터 모두!’는 이 세상에 대해 할 말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현실 속 악당 도준영도 분명히 할 말이 있으며, 바람피운 아내 강윤희도 태산처럼 할 말이 있다. 심지어 사채업자 이광일의 눈빛에도 나름의 사연이 있다.

 

할 말 있음이 바로 단순하고 전근대적인 권선징악적 선악구도를 해체한다. 우리는 모두 할 말을 가지고 있는 그 중 누군가일 뿐이다. 그러니 드라마 속 누군가를 간단하게 선/악으로 재단하고 섣부른 비난 혹은 상찬을 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우리가 드라마 속 삼안E&C라는 현실세계와 후계동이라는 가상세계(유토피아)의 모순을 한없이 상념하고 느꼈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후계동의 가족주의가 미국식 가족주의와는 상당히 다르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미국식 가족주의는 소가족주의지만 후계동의 가족주의는 대가족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 한국식 대가족주의 유토피아에서 고통스럽게 좌절한 인물이 강윤희다. 그녀는 삼안E&C라는 현실과 후계동이라는 유토피아 사이에서 그 모순을 실감하게 해주는 인물이다. 그녀 덕에 우리는 후계동 유토피아의 중심 인물 박동훈이 왜 불쌍하게느껴지는지, 즉 유토피아 그 자체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돌이켜 묻게 만든다. 마지막 회, 홀로 있는 집 안에서 서럽게 우는 박동훈은 왜 우는 것일까? 유토피아가 결국 누군가의 묵묵한 희생을 필요로 한다면 그 유토피아의 본질은 무엇인가?

 

후계동 유토피아에서 현실 삶 속으로 출근하는 박동훈과 현실 삶 속에서 후계동 유토피아를 방문한 이지안은 서로를 연민한다. 이지안은 성실한 무기징역수처럼 살아가는 박동훈을 이해했고, 박동훈은 상처받아 너무 일찍 커버린위악적인 그녀를 이해했다. 유토피아를 이해하는 자만이 지옥 같은 현실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지옥 같은 현실을 이해하는 자만이 유토피아를 진정으로 꿈꿀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를 연민한다. 두 세상은, 박동훈과 이지안은, 아니 내 마음 속에서 공존하는 나와 너는, 그렇게 서로를 연민한다.

 

4. O.S.T.

 

맑고 애절한 목소리에 담아 들려주는 <어른>(Sondia)의 가사는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현실 속에서 '나는 내가 될 수 없다.' 오직 꿈 속에서만 '나는 내가 된다.' 철학자는 이런 사태를 '소외'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나의 작은 세상'이 현실 속에서도 그녀와 이 땅의 청춘들을 향해 웃어주기를 <나의 아저씨>는 소망했다. 아울러 <아득히 먼 곳>과 <백만 송이 장미>의 가사가 그렇게 절묘하게 인용된 것에 대해서도 감탄한다.

 

5. 덧붙이기 싫은 사족

 

이 드라마를 둘러싼 부질없는 논란은 우리나라 문화비평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예술적 은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눈앞의 이야기를 주입식 도덕관념에 맞춰 파편적으로 재단하는 능력 밖에 없다. 예컨대 주인공이 담배 피웠다’, ‘미성년자가 술 마셨다’, ‘불법 U턴했다’, ‘폭행했다’, ‘바람피웠다’, ‘의상이 불량했다’, ‘쓰레기 무단투기했다’, ‘길거리에서 똥 쌌다등등. 그런 것들이 그들 이슈의 거의 전부다! 이 드라마도 예외가 아니다. 이번엔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나이 차가 많다’, ‘남자가 여자를 심하게 때렸다는 비난이 주제를 삼키는 화두로 등장했다. 우리 역사상 가장 소란스런 대중들의 예술에 대한 도덕적 자기 검열시대가 아닌가 한다.

 

 

우선, 남자 이광일의 여자 이지안에 대한 폭력? 그 불편한 폭력 없이 이지안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가능한가? 이 현실의 비정함에 쫓기듯 살아가는 가진 것 없는 인생, 여성, 청춘에 대한 은유적 배경 설명이 불필요한가? 그런 장면을 문제 삼는 건 마치 노동자가 착취당하는 모습을 담은 화면에 맹목적으로 분노하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폭력적 영상을 통해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도 있고, 아름다운 영상을 통해 모순을 위선적으로 감출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의도다!

 

다음, 나이 많은 남자 박동훈과 어린 여자 이지안의 관계? 권컨대 나이 많은 남자와 어린 여자의 허구 속 정신적 불륜조차 못마땅한 사람들(놀랍지도 않지만 이런 비난을 선동한 미디어 기사도 많다)은 이 드라마에 대한 같잖은 도덕적 비난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소설(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더 리더를 읽으며 분을 풀기 바란다. 은유는 모르겠고, 파편적 이야기 자체만 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아주 잘 보일 것이다. 나이 많은 여자(36)와 어린 남자(15)육체적 불륜관계가 거리낌 없이 그려진다.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두 사람의 나이 차이를 언급하는 것은 오직 미국에서만 있는 현상이라며, 독일이나 프랑스 등 유럽의 독자들에게서는 한 번도 그와 같은 질문을 들은 적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원하는 게 딱히 나이 많은 여자와 어린 남자의 육체적 불륜 이야기도 아니라면 다른 방법이 없다. ‘부도덕한 허구를 배경 삼는 불편한 소설영화보다는 아예 올바른 이데올로기로만 가득 찬 도덕책을 보며 마음 편히 즐기기 바란다. 대중 예술 생산자들은 대중적 소비에 편승하기 위해 하찮은 비난조차 힘들어하며 이야기의 전개를 왜곡시킴으로써 그 완성도를 추락시킬 수 있다. 그나마 종종 훌륭한 비평이 있어서 안도하기도 하지만, 나는 우리나라의 치졸한 문화 비평수준이 매우 위험하고 슬프게 느껴질 때가 많다. 대중 예술은 곧 대중의 수준이다. 대중인 내 수준을 한껏 높여준 <나의 아저씨>에 감사한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5. 19(수정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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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전문

 

민주주의의 위기와 호남의 선택

 

김욱

 

. 현 상황, 민주주의 위기의 두 측면

 

역사 속에서 민주주의의 진보란 일회성 이벤트로 얻어지는 단일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피를 흘려 쟁취하는 역사적 사건일 뿐만 아니라 일상을 통해 끊임없이 확인하고 지켜나가야 하는 지속적인 혁명이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그 지속적인 혁명을 추동하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스스럼없이 퇴행을 거듭할 것이며, 우리에게 역사적 대가를 요구하며 그 존재 의의와 필요성을 교훈적으로 깨우쳐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오늘의 현실을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 우리의 민주주의는 지금 이대로 좋은가?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지금 이대로 충분히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결코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어디에서 무엇이 잘못 됐는가? 두 측면에서 민주주의의 위기 국면이 발생하고 있다. 하나는 (아마 전 세계적으로도) 유사 이래 처음 겪는 새로운 사태이며, 다른 하나는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오랜 기간 겪어온 진부한 구태다. 짐작하듯이 전자는 인터넷 댓글 여론조작 문제이며, 후자는 (호남을 중심으로 말하자면) 호남에서의 일당지배체제로의 회귀 유혹이다. 이 두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다시 심각한 퇴행을 시작할 것이다.

 

. 인터넷 시대의 민주주의 위기: 댓글 여론조작의 일상화

 

우리의 과거 경험을 돌이켜보면 드루킹 사태는 사실 벌어질 일이 벌어진 것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과거의 경험이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제도환경을 합법적불법적 수단을 총동원해서 극단적으로 이()용하는 온갖 종류의 개인적집단적 이익 추구 현상을 말한다. 이런 현상은 한편으로는 그 대응을 위한 법적 진화를 촉진시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성숙한 사회문화와 결합해 사회적 진보를 지체시키기도 한다. 어쨌거나 우리 사회가 이런 식으로 제도환경을 극단적으로 이()용하는 성향이 강하다고 생각한다면 이에 대한 법적정치적 대책을 철저히 강구할 수밖에 없다.

 

내가 드루킹 사태가 벌어질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말한 이유는 우리 인터넷 환경과 관련돼 있다. 우리나라의 독점적 포털 사이트는 현재 절대 다수 국민이 뉴스를 접하는 창구가 돼 있다. 과거 어떤 개별 언론사나 심지어 국가권력도 장악해보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언론 독점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독점력에도 불구하고 뉴스의 정파성 혹은 편향성 위험은 오히려 뒤로 밀려나 있다. 과거에는 이 문제가 언론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문제였지만 포털 뉴스는 그나마 여러 매체의 뉴스가 각 개별 언론사에서 선정돼 올라오기 때문에 편향성보다는 상업성이 더 문제일 수 있다. 오히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장 큰 문제는 독점적 뉴스 창구를 악용하는 댓글조작, 즉 여론조작의 함정이다. 심지어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 댓글 사건처럼) 국가권력을 동원한 여론조작까지 등장했다면 이것이 왜 오늘날 민주정치를 위한 핵심과제일 수밖에 없는지를 알려준다.

 

과거 우리가 언론자유를 민주주의의 근본 조건이라고 생각하며 중시했던 이유는 여론 형성을 위한 공정한 게임의 규칙 때문이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이 여론형성의 자유시장기능이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위기에 처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뉴스가 인터넷 포털에서 독점적으로 제공되고, 절대 다수 국민이 이 포털 뉴스를 집단적으로 접하는 대한민국 특유의 인터넷 환경 자체가 이미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위험을 자초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전체주의 국가처럼 독점적 창구에서 제공되는 한정된 뉴스에 특정 정파와 유착한 조직에서 불법적조직적으로 매크로 댓글을 달고, 공감추천수 우선으로 그 댓글을 노출시켜 그것이 지배적 여론인 양 모두가 읽게 만든다면 그것에 영향 받지 않을 국민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생각해보면 애초에 이런 식의 포털 뉴스 제공방식을 방치한 채 누구도 악용하지 않기를 기대했던 것 자체가 사회적인 위험 불감증이었다. 비유하자면 어떤 견제도 없는 절대권력이 민주적으로 잘 작동하기를 기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순진무구함이었다.

 

혹자는, 특히 (생뚱맞게 자신들도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더불어민주당 측에서는 이 여론조작 문제를 하찮은 일처럼 호도하는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예컨대 국정원을 동원한 국가범죄는 아주 중한 범죄지만 사인이 주도한 정치범죄는 사소한 탈선이 아니냐는 태도가 그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범죄의 주체가 국가인지 사인인지가 아니라 이 여론조작 사태가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다. 단언컨대 이 사태를 정상화시키지 않는 한 우리나라에 민주주의는 없다. 그리고 이런 비민주적 상황에서 누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나아가 선출직 공무원이 되든지 그 정당성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다. 이는 군사 쿠데타 정권에 대한 정당성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는 이치와 논리적으로 완전히 동일하다.

 

더불어 이 여론조작 사건의 수혜세력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댓글조작의 영향력이 미미하므로 별일 아니라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정말 그런가? 정말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그런 일들이 횡행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실제로 지난 대선과정에서 유력 후보로 거론됐던 몇몇 주자들의 급작스런 지지율 등락과정을 보면 댓글 여론조작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자행됐는지 확인하고도 남는다. 이미 이런 사실만으로도 지난 대선의 정당성정통성 시비가 일어날 소지가 충분하다. 내 보기에 불법의 형식면에서는 국정원 댓글 사건이 더 충격적이지만, 지지율 등락이라는 내용(효과)면에서는 드루킹 사건이 훨씬 더 파괴적이었다고 본다. 어떤 정파든 이런 일을 겪고도 단지 사건을 적당히 무마하고 넘어가려는 태도만을 보인다면 그건 앞으로도 이런 일을 정치적 양념으로 활용하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정말 그런 생각이라면 나는 그들이 누구든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세력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이에 덧붙여 반드시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사람들은 정말 인터넷 댓글에 크게 영향을 받는가? 학자들은 생물처럼 변하는 여론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오랫동안 관심을 기울여 왔다. 지면 관계상 자세히 논할 순 없지만 우리에게 시사점을 주는 실험 한 가지만을 소개한다. 1950년대 초의 사회심리학자 솔로몬 애시(Solomon E. Asch)의 실험이다.

 

이 실험은 (누가 봐도 거의 분명한) 기준선과 같은 길이의 비교선 막대를 고르는 아주 단순한 실험이었다. 이 실험엔 영문을 모르는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7~9명의 실험협조자들이 전원일치로 정답을 교란시켰다. 이런 실험을 반복적으로 실시했는데, 그런 일을 당한 단 한 사람은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10명중 2명은 자기 판단을 고수했고, 2명은 한 두 차례 집단의 의견에 동조했으며, 나머지 6명은 집단의 잘못된 의견에 동조한 횟수가 그보다 훨씬 많았다.(엘리자베스 노엘레 노이만, 침묵의 나선, 사이, 2016, 80~83쪽 참조.)

 

이런 실험 외에도 집단으로부터 고립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특성에 대한 연구는 많다. 뻔히 보이는 막대 길이에 대한 자신의 판단조차 고립을 두려워하며 확신하지 못 하는 인간의 유약한 심리를 정치에 악용하면 민주주의가 어떤 지경에 빠지겠는가?

 

민주주의는 모든 참여자들의 합리적 의견을 존중하는 바탕위에서 성립해야만 한다. 만약 이런 게임의 규칙이 무너지면 민주주의를 통해 확보하려는 정당성정통성도 당연히 함께 무너진다. 언제든 그리고 누구든, 조직적인 인터넷 여론조작으로 권력을 잡고 유지한다면 이 권력의 정당성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다. 이는 폭압적 무력으로, 막걸리와 고무신으로, 언론통제로 잡고 유지한 권력에 대해 정당성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는 것과 논리적으로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지금 중차대한 기로에 서 있다. 정치인이든 국민이든,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가 붕괴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의 민주주의에는 희망이 없다.

  

. 호남에서의 민주주의 위기: 일당지배체제로의 회귀 유혹

 

현 문재인 정권에 대한 호남의 지지율이 높은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이런 여론조사 역시 일정부분 여론 형성과정의 왜곡이 반영된 것일 수 있지만 차치하고 논한다. 호남의 입장에서 현 문재인 정부는 꽤 만족스러운 정권으로 보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그간의 영남패권주의 정권과 현 정권의 차이가 뭘까? 현 문재인 정권은 왜 호남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일까? 아주 간단하다. 민주평화당의 존재 때문이다. 말을 바꾸면 지난 총선을 통해 실현된 호남에서의 복수정당제 때문이다.

 

과거 민정당 계열의 영남패권주의 정권은 호남을 그저 영남의 결속을 강화시켜주는 외적 계기이자 관리대상으로 간주할 뿐이었다. 다른 한편 열린우리당을 창당한 노무현 정권에게 호남은 그저 자신들에게 표를 찍어주는 인질이자 영남에 뿌리를 내리기 위한 폄훼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노무현 정권을 지역주의 양비론으로 시작해 은폐된 투항적 영남패권주의로 끝난 정권으로 규정했다.

 

그런데 현 문재인 정권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렇게 하는 순간 호남은 이제 즉시 다른 선택을 할 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현 문재인 정권의 속마음이야 어떻든 그들은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으며, 이번 지방선거와 다음 총선에 이르기까지 계속 민주평화당과의 피로한 경쟁을 해야만 한다. 호남인들에게는 이런 사태가 생소할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아직 한참을 더 나아가야 한다. 정치학자 최장집은 우리나라의 정치적 과제를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논한 바 있다. 나는 이 관점에 동의하지 못 한다. 우리나라는 아직 제도(형식)적인 차원에서도 민주화 도정에 있다. 굳이 그런 식으로 표현하자면 영남군부독재 이후의 영남패권주의시대를 살고 있다. 군사정권의 종식은 그저 민주주의의 진일보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정치는 그간 역사적으로 보수/진보가 아닌 영패/반영패 모순이 주된 모순으로 작용해왔으며, 아직도 진행 중에 있다. 이 주된 모순을 우선적으로 극복해야만 한다.

 

우리나라가 아직 제도(형식)적인 차원에서도 민주화 도정에 있다는 자명한 근거가 있다. 영호남에서의 일당지배체제 이데올로기와 그 체제로의 회귀 가능성이다. 그간 영남은 패권적 지배를 위해서, 호남은 민주적 저항을 위해서 그런 체제를 지속해왔다. 소수지역 호남은 저항을 위해 김대중을 내세운 일당지배체제와 노무현을 내세운 전략적 선택으로 대선 승리를 쟁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 이후, 호남의 전략적 선택호남불가론이라는 자기 함정을 파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제 호남은 반영남패권주의 투쟁의 방법을 바꿔야 한다. 지금까지 호남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스스로를 일당지배체제라는 비민주적인 체제에 가두고 전략적 희생을 감수해왔다. 호남 외부에서는 이 현실을 호남 신성화이데올로기로 포장하여, 호남의 일당지배체제를 역이용했다. 그래서 나는 호남 세속화를 주장했으며, 그 첫 조건이 바로 호남의 정치적 선택이 가능한 복수정당제였다. 그리고 주지하듯이 지난 2016년 총선을 통해 이런 내 소망이 실현됐다. 오랜 기간 희생을 강요한 비민주적 체제에 대해 호남은 스스로 균열을 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런데 다시 이 민주주의 선거혁명이 위기에 처해 있다. 전 대통령 박근혜 탄핵에도 불구하고 자유한국당이 영남의 지지에 힘입어 고사 위기를 극복하는 것으로 관찰되자 애초에 자유한국당을 극복하고자 했던 바른미래당이 오히려 궁지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한국당을 힘겨워하는 바른정당과 호남의 전략적 선택의 가능성을 기대할 수 없게 된 안철수 정파는 세력 확장의 한계를 느끼고 합당을 했다. 그리고 과거사에 대한 정치적 성찰 없이 자유한국당과 우호관계를 모색하는 (최소한 이데올로기적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는) 세력과 단호하게 결별한 민주평화당이 탄생했다. 문제는 호남이 이런 정치적 사태의 맥락을 이해하고 있느냐이다.

 

사실 자유한국당의 생존력, 즉 영남패권주의 이데올로기의 뿌리 깊은 생존력에 당황한 것은 기회주의적 바른정당만이 아니었다. 호남도 마찬가지였다. 영남이 과거로 회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호남도 과거로 회귀하려는 방어본능을 보이고 있다. ‘영남의 자유한국당이 건재한데 호남만 분열되면 전략적으로 영남패권주의에 저항하는데 불리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일어난 것이다. 어쨌든 전국적으로 더 넓은 범위의 지지를 받는 더불어민주당에 호남이 일체로 편승해 그간 해오던 방식대로 영남패권주의의 본산인 자유한국당에 저항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호남이 복수정당제를 포기하고 다시 일당지배체제로 회귀하는 건 명백히 역사의 퇴행이다. 호남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호남의 민주화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호남의 민주화, 즉 호남의 복수정당제를 통해서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추동해내야 한다. 복수정당제를 통한 호남의 민주화가 호남을 인질로 잡으려는 은폐된 영남패권주의세력에게 얼마나 큰 정치적 압박이 되고 있는지를 상기해야 한다.

 

민주평화당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현 정부의 호남 우호전략을 강요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 사실을 충분히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호남도 민주평화당이 살아야 호남의 민주주의가 살고, 호남의 민주주의가 살아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도 산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호남이 복수정당제 확립이라는 민주화를 스스로 포기하면 대한민국은 결코 민주화될 수 없다. 그 역사적 사연이 어떠했든, 호남과 영남이 앞으로도 계속 일당지배체제를 지속시켜나감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 제도적현실적으로 민주화됐다고 말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차원에서 말하건대, 민주평화당의 존재 그 자체에 호남의 민주주의는 물론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실현 가능성이 달려 있다. 호남이 민주평화당을 죽이고 다시 일당지배체제로 회귀한다면 호남은 스스로 영남패권체제의 인질을 자청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호남이 다시 인질이 되면 대한민국은 상상 속에서만 적대하는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의 공생관계로 다시 회귀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의 옛 체제로는 영남패권주의라는 반민주적 적폐를 결코 청산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이 적대적 공생관계를 상상적이라고 규정하는 이유는 양 세력은 실제로 적대해 상대를 소멸시킬 생각도 없고, 소멸시킬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 진보와 퇴행의 모든 가능성이 민주평화당의 생존력과 호남의 선택에 달려 있다.

  

. 호남의 선택을 위하여

 

민주국가에서 선거란 선거일과 선거일 사이에 누적된 정치적 평가를 유권자가 하루 동안 진행되는 투표행위를 통해서 표출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선거에서 어떤 정당과 후보를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는 단순히 선거 운동기간 동안의 공약과 관심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선거일은 일상적으로 누적되는 정치적 의사를 그저 한꺼번에 결산하는 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날마다, 끊임없이, 유권자의 장기간에 걸친 여론형성과정이 조작되고 왜곡된다면 투표과정이 제 아무리 공명정대하게 이루어진다고 해도 민주적 정당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드루킹 사건은 단지 지난 대선과정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을 정치적으로 공격하는 소재로만 이용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일을 겪고도 제도적법적으로 대비책을 강구하지 못 하면 오늘의 피해자가 내일의 가해자로 서로 앞 다퉈 변신해가며 민주주의의 앞날을 전근대적 수렁에 빠트릴 것이다. 드루킹 사건은 매크로 조작 등 불법행위가 주로 부각됐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현재와 같은 조건 하에서는 몇 천 명 열성적인 조직만으로도 얼마든지 합법적으로 댓글 여론조작을 시도할 수 있다. 또한 정상적인 댓글이라 할지라도 인터넷 접근이 쉬운 계층 위주로 과잉 대변되는 문제를 막기 힘들다. 보다 근원적이고 철저한 대책이 필요한 이유다.

 

민주국가에서 언론의 자유를 통한 여론형성을 특별히 존중하는 것은 그 자정능력에 기초해 비례적으로 반영된 국민의 다양한 생각의 분포를 참고하는 데 있는 것이지 불과 몇 천 명이 절대 다수를 대변하는 양 지속적으로 여론형성을 왜곡조작하는 것을 보장하려는 데 그 취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근원적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포털 뉴스의 인링크 방식 폐지, 댓글 실명제, 공감추천제(공감추천순 노출) 폐지, 검색 기능만 허용하는 것 등, 모든 가능한 대책을 합리적으로 검토한 후 강력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이 대책에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달려 있다.

 

이념과 제도에 대해서는 나름의 확신을 피력할 수 있지만 호남의 선택에 대해서 내가 말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다. 모든 것은 호남 스스로가 선택할 일이다. 하지만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라면 나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지만, 대한민국 정치는 상대다수대표 선거제도에 기초한 대통령제를 바탕으로 다수지역인 영남 출신 정치인이 제왕적패권적 권력을 휘두르는 전근대적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호남은 호남대로, ‘힘을 합쳐 자유한국당과 그 산물인 적폐와 싸우자는 더불어민주당의 전략적 태도에 현재까지는 절대적 지지를 보내고 있다. 한데 문제는 이것이 다른 한편으로 호남의 복수정당제를 부정 혹은 위협하는 난해한 정치적 부작용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경우라도 호남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현 정권의 호남에 대한 우호적 태도는 그저 현 정권의 자발적 선의의 산물이 아니다. 정치를 그런 식으로 비과학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호남이 스스로의 각성으로 정당 선택 가능성을 실현시킨데 따른 과실일 뿐이다. 나는 호남 스스로 이런 사실을 잊는 것을 크게 우려한다. 만약 호남이 이런 사실을 잊고, 앞으로 선거를 통해 민주평화당을 소멸시킴으로써, ‘상상 속에서만 적대하는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의 공생관계를 회귀시킨다면, 이것이야말로 호남의 정치적 이익은 물론이고, 이 나라 민주주의를 퇴행시키는 불행한 선택이 될 것이다. 나는 적어도 그것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호남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민주평화당도 자신의 존재 이유를 명확히 되새겨야 한다. 복수정당제의 한 축인 민주평화당이 우선 호남에서 존재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호남의 민주주의는 물론이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달려 있다. 그러므로 민주평화당은 우선 호남을 시작으로 대한민국에 이 점을 설득시켜야 한다. 나는 민주평화당이 자신에게 부여된 이 역사적 소명을 분명히 인식하고, 또 그것을 꿋꿋이 실현시켜나갈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이 땅의 민주주의에 대한 간절한 희망과 함께 그렇게 믿는다.

 

http://www.kjdaily.com/read.php3?aid=1525258329437329018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5.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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