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죽음은 산 자의 것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인류의 역사를 굳이 길게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우리의 최근 현대사만 살피더라도 그 흔적은 차고 넘친다. 아직도 많은 이들의 뇌리 속에 남아 있을 김지하의 1991년 칼럼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조선닷컴, 199155) 지금 곧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그리고 그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는 발언은 상징적이다. 심지어 그는 죽음을 찬양하고 요구하는가?”라고까지 물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당대 죽음의 행렬을 그저 어떤 세력의 요구라고 본 김지하의 관점에 온전히 동의하진 않는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의 관점은 죽은 자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지하의 세상을 보는 이런 시각이 자신의 개인적 경험의 반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다. (믿거나 말거나) 그의 아내 김영주는 이런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 세력은 김 시인을 소위 민족의 제단에 바치는 제물로 삼으려고 했지요. 박정희 체제에 더 극렬하게 저항하는 문건을 옥중에서 계속 쓰도록 요구했어요. 박정희로 하여금 김 시인을 죽이도록 해 김 시인을 투사영웅으로 만들려는 것이었지요. 그 동력으로 박정희 체제를 엎어버리려고 했습니다. ([최보식이 만난 사람] 박경리의 딸·김지하의 아내김영주 토지문화관 관장, 조선닷컴, 2011228(수정1025.))

세월이 지나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는 시절이 됐다. 그때도 유사한 죽음이 있었다. 그리고 죽음의 바라보는 유사한 시각도 여전했다. 대통령 노무현은 한 노동자의 분신자살을 이렇게 바라봤다.

 

노 대통령은 정부담화에 대해 지금과 같이 민주화된 시대에 노동자들의 분신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투쟁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며, 자살로 인해 목적이 달성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노대통령, "노동담화 어정쩡" 관계장관 질타, 인터넷 한겨레, 2003115.)

 

노무현은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애도가 아닌 질타를 한 셈이다. 자신의 시대에는 막다른 삶의 절망적 표현인 분신자살을 할 이유가 없으므로, 그렇게까지 하는 건 오직 (산 자들을 위한) 투쟁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권력자의 냉혹한 오만이다. ‘죽음의 요구운운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노무현의 편향적 시각이 김지하의 그것과 기본적으로 어떻게 다른 건지 나는 잘 모른다.

 

 

정치적 죽음을 죽은 자의 것이 아닌 산 자의 것으로 만드는 정치적 모습은 지금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박정희의 피격 원인을 승복하지 못 한 자들은 박근혜를 만들었고, 노무현의 자살 원인을 승복하지 못 한 자들은 문재인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노회찬의 죽음 원인에 승복하지 못 하는 자들도 있는 듯하다.

 

사실 노회찬의 죽음은 노무현의 죽음에 대한 오마주로 읽힐 법도 하다. 그들이 남긴 유서엔 공히 자신들의 행위가 정치적으로 자신들의 세력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절하다. 자살 직전 노무현은 홈페이지에 저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수렁에 함께 빠져서는 안 됩니다”("민주주의-진보-정의 말할 자격 이미 잃었다. 헤어날 수 없는 수렁... 여러분은 저를 버려야", 오마이뉴스, 2009422(최종23))라는 말을 남겼으며, 노회찬은 유서에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전문] 노회찬 유서"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연합뉴스, 2018723)는 말을 남겼다.

 

한데 그들의 유지는 실현되지 않는다. 그들 공히 부끄러움으로 함께 갈 수 없어 자살한 셈이지만, 산 자들은 노무현을 비극적 영웅으로 재탄생시키고, 정의당 대표 이정미는 원통한 죽음에 대한 책임운운하며 난해한 정치적 발언을 시작하고 있다. 한편에선 죽음이라는 결과에 불복하며 호명하고, 다른 한편에선 그 죽음의 원인을 상기시키며 호명한다. 이렇게 산 자의 정치적 욕망은 죽은 자의 부끄러움을 소환한다.

 

하고 싶은 말의 요지는 이것이다. 한탄스럽게도 이명박박근혜가 이 나라 정치수준을 한 없이 낮춘 기준선이 돼버렸다. 문재인 정부의 포퓰리즘이 이명박박근혜의 타락수준보다 훨씬 낫다며 기고만장하는 세상이 돼버렸다. 마찬가지로, 노회찬이 인정한 비리가 살아 있는 정치인들의 짐작 가는 타락수준보다는 훨씬 낫다며 원통해하는 퇴행적 논리가 당당히 머리를 쳐들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 정치의 위기는 차악의 정치를 부끄러워하며 최악의 정치를 소멸시키려는 대신, 최악의 정치를 핑계로 차악의 정치를 합리화하려는 데 있다. 대한민국 정치가 노회찬의 명복을 비는 최선의 방법을 찾길 바란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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