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전>. 이 영화는 좀 특별하다. 리메이크 판인 이 영화가 오리지널 판 <마약전쟁>의 그저 그런 스토리를 빌려 철학적으로 완전히 다른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더 놀라운 것은 수준 높은 철학적 메시지를 관객들에게 들이대지 않고 단순한 범죄 스릴러 영화 같은 일종의 착시효과를 통해 관객동원까지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품의 완성도를 갖춘 영화가 대중적 성공까지 거두는 것은 모든 영화인의 소망일 것이다.

 

<독전>이 선생이 누구냐는 데 재미의 초점을 맞추라고 제안한다. 뭐 그렇게 어려운 수수께끼는 아니다. 하지만 그 수수께끼를 모두가 맞힌 순간 정작 다른 문제가 제기된다는 점이 핵심이다. 그 문제는 이렇다. ‘모두가 이 선생이라고 생각하는 이 선생이 진짜 이 선생이 맞는가?’ 드러난 이 선생, 즉 락이 이 선생인 건 맞다. 하지만 그 락이 원호가 인생을 걸고 추적한 이 선생일까? 원호가 추적한 이 선생은 락의 실상이 아닌 허상이었다. 원호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실재한다고 믿었던 락의 허상,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 문제의 핵심을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왜 이 선생의 실상이 아닌 허상이 세상을 지배하는가?’ 조금 다른 식으로 변주하면, ‘왜 이 선생도 이 선생의 허상을 필요로 하는가?’ 이 화두의 철학적 문제의식은 생각보다 깊고, 넓고, 심지어 불온하기까지 하다. 아마도 많은 이들은 이 철학적 문제의식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고 불쾌해 하거나, 피하거나, 공격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모두가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이 선생의 허상을 필요로 하는 우리 삶에 대한 각자의 (거부) 반응을 다음 명제를 통해 직접 확인해보기 바란다.

 

나는 명품의 치장을 통해 나의 허상이 존재하는 걸 원한다.’ ‘회사 대표인 나는 내 실제 능력보다 훨씬 더 큰 능력과 권력 네트워크를 가진 것처럼 보이고 싶고, 그런 허상을 활용하고 있다.’ ‘나는 예수나 부처의 실상에는 별 관심 없고, 인간이 믿는(만든) 그 신적 허상에만 관심이 있다.’ ‘나는 노무현의 실상엔 별 관심 없고, 그 허상(이미지)에만 열광한다.’ ‘연예인인 나는 대중이 나를 바라보는 허상을 즐기기도 하고, 그 때문에 고통스럽기도 하다.’ ‘나는 전쟁이나 스포츠에서는 상대를 속이거나 겁먹게 할 허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독전>의 감독 이해영은 누구보다 이런 모순을 더 절감하며 살았는지 모른다. 그는 성소수자임을 고백한 사람이다. 성소수자는 자신의 겉모습, 즉 바깥으로 드러난, 그리고 모두가 실상이라고 간주하는 허상이 내면의 실상과 모순을 빚는다. 남의 삶을 대신 산 락이 그 남의 어릴 적 사진을 보며 원호에게 말한다. “저 아니에요. 근데 저 맞아요.” 원호가 창밖을 내다보며 눈물을 그렁거리다 락에게 너는 살면서 행복했던 적 있냐?”고 묻는 엔딩 대사는 락의 진실에 대한 뒤늦은 반응이자, 허상을 쫒아온 자신의 공허한 삶에 대한 회한이다.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면 허상과 실상의 모순에 대한 그런 개인적 질문이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현상을 놓고 보면 다른 관점의 질문이 훨씬 더 심각해진다. 우리는 과연 사회적 실상에 관심이 있긴 한가? 세상은 오히려 허상의 메커니즘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닐까? 허상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쉽고 편리하게 허상이 지배할 수 있도록 순응해야 하는 건 아닌가? 그건 우리가 실상보다는 허상을 통해 우리를 위로하고, 조작하고, 지배하고, 이익을 얻고, 만족하려는 속내가 본능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은 아닌가?

 

<마약전쟁>빌리는 허수아비로 밝혀지는 실재 인물이었다. 이런 맥거핀적 발상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한데 <독전>의 이해영은 이 평범한 기법을 실재하는 이 선생부재하는 이 선생’, 즉 실상과 허상의 모순이라는 모티브로 비범하게 변경했다. 그리고 이 모티브를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로 담아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마약전쟁>과는 아예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작품으로 재탄생시켰다. 거의 찾기 힘든 특별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독전>의 영어 제목은 친절하게도 <Believer>. 그러므로 우리는 그 제목이 함축하고 있는 진지한 질문에 잠시라도 정색하며 대답하는 게 예의다. 우리가 믿는 것은 실상인가, 허상인가? 아니, 우리가 믿고 싶어 하는 것은 실상인가, 허상인가? 실상이 아닌 허상으로 살아가는 자, 혹은 그 허상을 실상으로 믿고 (싶어 하며) 살아가는 자,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도 행복할 수 있는가? 어차피 그것이 삶이고, 세상인가? 엔딩에서 외롭고 차갑게 울리는 한 방의 총소리가 우리의 맹목적 삶을 소스라치게 각성시킨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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