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일간지 기자가 <책혐시대의 책읽기> 저자 인터뷰를 하자면서 대뜸 그랬다. “책읽기 책을 왜 썼냐? 당신이 쓴 책이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거다.” 하긴 그러는 것이 당연했는지도 모르겠다. 책읽기 책은 아주 많다. 내가 여기에 한 권을 더 추가하려고 했던 이유가 뭘까? 책에 그 이유를 적었지만 더 그럴 듯한 해명이 필요한 듯싶다.

 

흔하기 짝이 없는 책읽기 책을 쓴 죄(?)로 나는 기자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얘기 중에 이런 말을 했다. “스님들은 왜 각자 자신의 화두를 붙잡고 깨우치려 하는가?” 선어록은 누구라도 쉽게 구할 수 있다. 해설서도 있다. 선대 고승들이 이미 깨달은 내용을 학습해 그런가 보다고 그대로 따르면 될 텐데 뭣 때문에 스스로 화두를 붙잡고 시간을 낭비하며 씨름을 할까? 더 심란한 의문은 그렇게 고생해서 깨달아 봐야 고승들의 깨우침과 다른 혹은 더 뛰어난 특별한 내용이 있을까 하는 점이다. 내가 책을 쓴 이유는 이 대답과 관계가 있다.

 

그에 대한 구체적 대답은 조금 뒤로 미루고 먼저 할 말이 있다. 나는 이 책을 독자 모두가 각자(!) 자신의 문제의식(화두)으로, 자신의 머리로, 자신의 노력으로, 역사 속의 '아름답고 잔인한 생각의 진화과정을 따라잡아보라고 권유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런데 우리가 천재들의 생각을 따라잡는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가능하다!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긴 하지만 충분히 가능하다. 모두가 천재가 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천재를 이해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그 이유는 책에 좀 더 자세히 설명했다.

 

, 그럼 그렇게 천재를 이해했다 치자. 이 이해는 이제 내 것인가?! 아직은 아니다. 섣부르게 이 이해를 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앞에 얘기한 고승들의 해탈 경험을 모아 놓은 선어록을 해설서를 통해 이해한 다음, '이제 그들의 해탈이 내 것이 됐다'고 우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흥미로운 건 심지어 불교계에도 그런 식의 주입식 화두문답에 의한 유사 해탈 모습이 있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말한다면, ‘뭔가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 때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내 스스로 다시 알게됐을 때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다시 알게 될지도 모른다. 무협지의 젊은 주인공이 얼떨결에 무림 절대고수로부터 주입받은 내공을 실전을 통해 끊임없이 제 것으로 만들어가며 눈앞의 새 세상을 극복해가는 이치와도 유사하다. <돈키호테>와 <파우스트>는 그런 앎의 고행과 관계가 있는 가장 유명한 책일 것이다.

 

우리는 주입식 교육에 너무 익숙하다. 그래서 심지어 책읽기에도 그런 습관이 마치 우리들의 본성인양 아주 강하게 나타난다. 역사 속 위인들, 우리 시대의 뛰어난 학자들, 유명 저자들의 책을 그저 주입식으로 이해했을 뿐이면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는 풍조가 넘쳐난다.

 

이쯤에서 강한 의문이 있을 것이다. 결국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게 중요하지 자기 것인지 아닌지가 뭐 그렇게 중요하며, 설령 자기 것이 아니라도 모두 똑똑한 사람들의 훌륭한 생각과 결국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인데 그게 나쁜가?

 

나쁘다! 그런 식의 자기 것처럼 보이는 훌륭한 남의 생각을 아무리 소중하게 간직해봐야 책읽기의 목적이랄 수 있는 새로운 문제 해결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지식을 책읽기를 통해 자신의 논리와 생각으로 재구축한 것만이 내일을 위한 내 지혜고, 내 힘이다!

 

강조하건대, 자신이 훌륭한 사람들의 생각과 결론적으로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문제라는 게 아니다. (아마 실제로 대부분, 그리고 대부분의 사안에서 그럴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 결론적 생각을 내 나름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그렇게 터득한 것이 아니라면 바로 그게 문제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읽기에서까지 주입식 정보와 결론만을 탐하는 습관을 강화한다면 책읽기는 약이 아니라 오히려 독이다. 이런 식의 책읽기는 사람을 똑똑한 바보로 만드는 지름길이다. 이럴 거라면 왜 전 국민이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들여 구태여 책읽기를 해야 하는가?

 

극단적으로 말해, 그게 정말 우리의 민주주의에 아무 문제도 없다면 대한민국의 아주 소수만 열심히 책읽기를 하고, 그들이 우리를 뭐라고 생각하든(심지어 개돼지로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들 생각(결론)을 이해했다면서 당신 생각이 바로 내 생각이라고 영혼은 없지만 너무나 편리한 맞장구만 쳐주면 될 일 아닌가?

 

하지만 그러고 싶은가? 나는 절대 그러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악착같이 앞으로도 내 스스로의 머리로 책읽기를 하려 한다.

 

나는 <책혐시대의 책읽기>를 통해 파편적이 아니라 체계적인 책읽기를 아주 강조했다. 그건 다시 말해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가다듬기 위한 최선의 방책이어서 그런 것이다. 처음엔 다소 막연하게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입체적인 사고로 스스로의 생각을 강하게 만들고, 재미를 얻게 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으로 책읽기를 안내하는 맘에 드는 책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흔한 책읽기 책을 정색하며 다시 쓴 것이다. 이것으로 변명이 됐기를 바란다. 끝으로 이 책을 눈여겨 봐준 미디어의 다음 필자들에게 감사한다.

 

http://www.hankookilbo.com/v/080a6e99d30a44a3bab2cc90c9f10ae2

http://view.asiae.co.kr/news/view.htm?idxno=2018051807312926968

http://www.fnnews.com/news/201805161709362294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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