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소세키의 등장인물은 공통적으로 지식인이다. 1900년 작가 소세키는 일본 문부성 제1회 국비유학생으로 영국을 유학을 가게 된다. 그 유학생활은 소세키를 지적, 정신적으로 팽창시키면서 동시에 신경쇠약이라는 딱지를 평생 안고 살아가게 된다. 서구문명을 직접 육안으로 대하면서 느낀 유학생활은 소세키의 내면세계의 큰 획을 그은 사건이 아닌가 싶다. 나쓰메 소세키는 100년이 훨씬 넘은 과거에 활동했던 작가이다. 그 작가가 어떻게 지금 우리 현대에서도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아마도 소세키가 묘사하는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집요한 탐구에 있지 않을까 싶다.

 

 

 

 

2

길 위의 생(이레)(한눈팔기(현암사)의 다른 번역본)을 번역한 김정숙은 제자들에게 ‘20대에게는 산시로를 추천하지만, 나이가 들면 길 위의 생(한눈팔기)을 추천한다고 했다. 확실히 산시로의 맛과, 한눈팔기(길 위의 생)의 맛은 확연히 다르다. 점수를 주자면 오히려 한눈팔기에 더 주고픈 마음이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지만, 인생의 중후한 맛을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한눈팔기(길 위의 생)이 아닐까 싶다. 도서관에 한눈팔기(현암사)가 없어서 길 위의 생(이레)을 빌려 읽었는데. , 이 책은 확실히 소세키를 이해하는데 굉장한 도움이 된다. 소세키의 산문 유리문 안에서도 소세키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한눈팔기(길 위의 생)을 더 추천하고 싶다. 내면세계에 대한 집요한 탐험과 성찰이 아마도 그를 일본의 세익스피어,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로 군림하게 하지 않았나 싶다. 일본의 지폐에 소세키가 등장한다는 이야길 듣고 굉장히 부러웠다. 우리에게도 이이’, ‘이황이나 세종대왕이 있긴 하지만, 근대와 현대의 문학가가 화폐의 주요인물로 등장한 것을 생각할 때 조금 부러울 따름이다.

  참고로, 한눈팔기(길 위의 생)』는 원제목이 <미치쿠사>이다. 일본 특유의 어휘로 사전적 설명으로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단순히 길가에 난 풀을 말하고, 또 하나는 길 가는 도중에 딴 짓으로 시간을 보낸다는 말이다. 보통 후자쪽이 '도중에서 지정거린다, 도중에서 한눈 팔며 시간낭비를 한다'는 관용구와 함께 널리 쓰이고, 소세키 또한 후자의 감각으로 이 제목을 붙인 것 같다(길 위의 생. 320p). 

    

 

3

소세키가 어떻게 인간의 내면세계, 마음 안으로 깊이 내려갈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은 그의 유학생활 이전에 그의 불행했던 유년시절의 경험들을 들 수 있다. 소세키는 아버지의 후처의 5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양친이 고령인데다 형제가 많은 탓에 그의 태생은 환영을 받지 못했다. 고물상의 수양아들로 보내졌지만 사는 게 변변찮은 것을 누나가 불쌍히 여겨 다시 생가로 돌아온다.

 

나는 작은 광주리 속에 뉘여 매일 밤 고물가게의 잡동사니와 함께 요츠야 야시장의 노점에서 밤바람을 맞으며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어느 날 밤 누나가 무슨 일인가로 그 앞을 지나가다가 발견하고서 가엾게 여겨서였을까, 품에 싸안고 집으로 데리고 왔는데, 나는 그날 밤 잠을 안 자고 밤새도록 울어 대기만 해서 누나는 아버지에게 몹시 꾸중을 들었다고 한다.’(유리문 안에서, 109-110p)

 

 

하지만 소세키는 또 다시 4살 되던 해에 어느 집에 양자로 보내진다. 8-9세때까지 그 집에서 자랐는데, 얼마 안 되어 양가의 묘한 분란이 생겨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웃고픈 현실은 소세키가 집에 돌아왔을 때 자신의 부모들은 소세키에게 부모가 아니라 조부모라고 여겼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모르고 지내다가 어느 날 밤에 하녀가 조용히 이 비밀을 알려준다.

 

 

도련님, 도련님이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분은 정말은 도련님 아버지와 어머니세요. 아마 그래서 저렇게 이 집을 좋아하는 모양이야. 참 묘하지, 하고 두 분이 말씀하시는 걸 제가 들었기 때문에 살짝 도련님에게 알려 드리는 거예요. 아무한테도 말씀하시면 안 돼요. 아셨지요?”(유리문 안에서, 111-112p)

    

이 비밀을 듣고선 소세키는 굉장히 기뻤다고 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사실을 가르쳐 준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단지 하녀가 나에게 친철한 데서 오는 기쁨이었다는 것. 그렇게 따져 본다면, 그 늦둥이자, 8남매의 막내인 소세키가 환대받지 못한 가혹한 운명이 얼마나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는지를 알 수 있다. 길 위의 생(한눈팔기)에선 이런 대목이 나온다.

주인공 겐조의 말이다.

 

친 아버지 쪽으로 보더라도 양아버지 쪽으로 보더라도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물건이었다. 단 친아버지가 그를 허드레 물건으로 취급한데 반해 양아버지는 당장 무슨 도움을 받으려는 속셈이었을 뿐이었다....사환이든 뭐든 시킬테니까 그리 알아라.’(길 위의 생275p)

 

친부나 양부도 모두가 소세키에겐 상처였다. 누구 하나 제대로 환대해주는 이가 없었는데, 소세키가 도련님이란 소설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도련님은 일본어로 봇짱이다. 봇짱에서 은 친근함을 주는 애칭이고, ‘봇짱은 도련님이란 뜻이라고 한다. 작품에서 등장하는 하녀 할머니는 누가 그를 뭐라고 해도 주인공, 도련님의 편을 든다.

 

도련님, 소원인데요. 기요가 죽거든 도련님 네 절에 묻어주세요. 무덤 속에서 도련님 오기를 낙으로 삼고 기다리고 있겠어요.”(도련님, 231p)

 

개인적은 생각인데, 기요 하녀 할머니는 소세키가 그리워하는 어머니에 대한 상징이 아닐까 싶다.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면서 힘겨운 삶을 살았던 소세키가 14살 때 생모 치에(54)는 죽는다. 1875년에 양가에서 생가로 돌아온 소세키는 1881년에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한다. 그가 어머니와 함께 보냈던 시간이 6년 남짓 되겠다. 생가에 돌아와도 부모님을 조부모님이라고 불렀던 소세키에겐 할머니란 단어가 어머니였던 것이다. 막둥이 소세키의 할머니는 나이 많은 엄마였던 것이다  

    

 

4

소세키의 가정사에 얽힌 슬픔은 숙부의 사기 사건이 더해진다. 아버지의 유산 상속문제를 믿고 따랐던 숙부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하지만, 돈이 결국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버린 것일까? 원래 사람이 그런 것일까? 소세키의 작품 속에는 항상 <돈>문제가 나온다. 아마도 돈은 우리 현실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아닌가? 특별히『길 위의 생』(한눈팔기)에서는 '돈'이야기로 계속 점철된다. 우리 인생도 돈 이야기 안 할 수 없는 인생이지 않는가! 소세키는 숙부에게 유산상속 문제로 인해, 돈 문제로 인해 받은 상처와 아픔을 그는 작품 속에서 등장시키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이 마음이다. 그 작품에서 등장한 선생님의 이야기들 속에 숙부는 선생님을 더욱 외롭게 만들어버렸고, 사람에 대한 불신, 세상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나는 외로운 사람일세.”(마음, 27p)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 시즈와 결혼하였지만, 선생님 당신은 고독하고 외로운 영혼이었다. 마음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 삼촌에게서 상처받은 데미지는 자신의 소울메이트 K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소세키의 이러한 집요한 마음탐구는 삼촌에게 받은 데미지, 상처로 인해 K까지, 자신의 결혼생활까지, 그리고 자신의 인생까지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하지만, 더 빛나는 성찰과 참회는 이렇게 나타난다.

 

숙부에게 속았을 당시 내 마음은 타인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했네. 그러면서도 나 자신만은 정직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 세상이야 어찌 되었든 나만은 훌륭한 인간이라는 믿음이 마음 속 어딘가에 있었던 걸세. 그 믿음이 K의 일로 맥없이 무너져버리면서 나 역시 숙부와 똑같은 부류의 인간임을 깨닫고 나니, 갑자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네. 타인을 불신했던 나는 이제 자신까지 불신하게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네.’(마음, 304p)

 

 

   

 

 

5

자신의 인생, 사람에 대해 불신감을 가득 안겨주었던 숙부의 사기 사건은 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191043세의 소세키는 3월부터 6월까지 아사히 신문에 을 연재한다. 그리고 6월에 위궤양 때문에 나가요 위장병원에 입원한다. 8월에는 슈젠지온천에서 다량의 피를 토하며 위독한 상태에 빠진다. 이를 슈젠지의 대환이라 부른다. 19161121, 49세의 소세키는 위궤양 악화로 쓰러진다. 122일에는 내출혈로 재차 위독한 상태에 빠지고, 129일 오후 645분에 사망한다. 소세키가 이야기한 문은 무엇일까?

은 주인공 소스케와 아내 오요네의 평범하고도 단촐한 일상을 그려준다. 외부사회의 단절은 그 두 사람 부부를 하나되게 만들었다.

 

소스케와 오요네는 확실히 금실 좋은 부부다. 결혼하고 나서 지금까지 6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아직 한나절도 서먹서먹한 마음으로 지낸 적이 없다. 말 다툼으로 얼굴을 붉힌 적이 없다....그들의 생활은 넓이를 잃음과 동시에 깊이를 얻었다. 그들은 6년간 세상과 산만한 교섭을 찾지 않는 대신 그 6년의 세월을 걸쳐 서로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그들의 생명은 어느새 서로의 밑바닥까지 파고들었다. 세상에서 보면 두 사람은 여전히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보기에는 도의상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유기체였다.’(, 168-169p)

 

하지만 그 부부는 세상을 등진 부부였다. 부모, 친척, 친구, 일반사회, 학교로부터 버림받은 타락학생이었다. 이 이야기는 20대의 산시로, 30대의 그 후, 그리고 의 이야기로 얼추 이어진다고 보면 되겠다. 소스케와 오요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있었던 야스이, 이 삼각관계에서 부부의 도덕적인 책임을 나타난다.

 

산시로에서 등장한 산시로와 미네코는, 그 후에서는 다이스케와 미치요가 등장한다. 20대의 푸르른 청춘이 이제 30대로 접어든 셈이다. 산시로에서도 돈을 빌리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 후에서도 다이스케가 친구 히라오카와 미치요 부부에게 돈을 빌려준다. 이 세 사람은 동창이다. 다이스케가 손수 히라오카와 미치오 커플을 이어주는 중개역할까지 했다. 그러기에 남다른 관계이다. 하지만 다이스케는 한량처럼 늘 지낸다.

남의 부인이 찾아오는 것을 그렇게까지 기다릴 까닭이 없다는 생각’(165p)을 하면서도 다이스케는 스스로 자기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상대방을 답답하게 만드는 사람’(176p)이라고 평한다. 다이스케는 모든 이의 만족이 아닌 오직 한 사람, 특별히 자기 자신의 결정에 따른다. 그 후의 다이스케의 결정에 대한 도덕적인 책임이 에서는 소스케 부부의 이야기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소세키는 이 도덕적인 잘못의 결과로 부부의 태의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태의 문도 문이긴 하다. 3번의 유산을 통해 6년의 결혼생활 동안 자식이 없는 불행을 안고 산다. 더 나아가 요오네는 점쟁이한테 찾아가 아이가 영원히 들어서지 못한다는 저주 섟인 발언을 듣게 된다. 자기 부부의 잘못으로 인해 인생이 완전히 틀어진 야스이가 몽골에서 돌아와도 대면할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에 소스케는 뜬금없이 10일 간의 참선체험을 하게 된다.

 

자신은 문을 열어달라고 하기 위해 왔다. 하지만 문지기는 문 너머에 있으면서 아무리 두드려도 끝내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다만 두드려도 소용없다. 혼자 열고 들어오너라하는 목소리가 들렸을 뿐이다(, 252p).’

 

그 자신은 오랫동안 문 밖에 서 있어야 할 운명으로 태어난 사람 같았다....그곳에는 견고한 문이 언제까지고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문을 지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문을 지나지 않아도 되는 사람도 아니었다. 요컨대 그는 문 아래에 옴짝달싹 못하고 서서 해가 지는 것을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253p)

 

소세키가 가정환경으로부터 느꼈던 불안과 트라우마는 평생 그의 가슴에 그림자로 남았다. 개인적은 가정사에서 느꼈던 불안은 외부환경에 상관없이 그의 마음을 늘 짓눌렀을 것이다. 그 어린 시절에 대해 소세키는 길 위의 생에서 이렇게 말한다.

 

“...설혹 사실에 선을 긋는다 하더라도 감정을 밟아 죽일 수는 없어. 그때의 감정은 살아 있으니까. 살아 지금도 어느 구석에서 꿈틀거리고 있으니까. 내가 죽어도 하늘이 부활시켜주니까 난들 어쩔 수 없다구.”(길 위의 생, 304p)

 

감정을 밟아 죽일 수는 없어. 그때의 감정은 살아 있으니까. 살아 지금도 어느 구석에서 꿈틀거리고 있으니까.’ 란 이 대목은 물론, 셋째 형에게 빼앗긴 첫째 형의 유품인 시계에 대한 부분이다. 소세키가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상처받았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의 파편이기도 하다 

 

    

 

6

소세키가 소유한 내면의 끊임없는 불안이 그는 <>에 대한 생각을 하게 했다. 물론 소세키는 자신의 작품의 제목에 대해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신문사에서 제목을 붙여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소세키의 <>은 인생의 문, 고통스런 인생의 문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의 마음 속에는 죽지 않는 아내와 튼튼한 아기 외에 면직이 될 듯 될 듯 하면서 안 되는 형이 있고, 천식으로 죽을 듯 죽을 듯 하면서도 아직 살아 있는 누이가 있었다. 새 지위를 얻을 듯 얻을 듯 하면서 아직 얻지 못한 장인도 있었다. 또한 이들과의 관계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로 있기도 했다.’(길 위의 생, 248p)

 

길 위의 생을 보면 진짜 겐조와 얽힌 관계들이 그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 작품이 소세키를 이해하는 데 제일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소세키는 유리문 안에서에서 이런 말을 남긴다.

 

죽음이 삶보다 고귀하다고 나는 믿는다.

불유쾌함으로 가득 찬 이 삶을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소세키는 자살하지 않았다. 그는 건강 악화로 인해 죽었다. 하지만, 그의 불행과 고통 가운데서 야기된 모든 것들이 그에게 이런 말을 남기게 하지 않았나 싶다.

 

문을 두드려도 소용없다. 혼자 열고 들어오너라

인생의 문, 죽음의 문은 누가 대신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혼자 열고 들어가야 할 문인 셈이다. 소세키가 말한 문은 죽음의 문이란 생각을 나 혼자서 해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눈팔기'란 제목은 잘 지은 듯하다는 생각도 해본다.

 

 

 

7

소세키는 확실히 잘 읽힌다. 확 읽힌다. 하지만 너무 마음이 무겁고 우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인 듯 하다. 소세키의 내면을 훑는 데는 아마도 무게감 있는 감정의 저울질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소세키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읽히는 것은 삶의 무거움에 대한 공감도 한몫하겠지만, 치열한 삶의 환경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한 인간의 내면세계의 깊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한 인간의 깊숙한 불안을 조망해 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8

위화는 모든 이야기는 영혼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소세키가 지닌 이야기의 영혼 때문에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읽는다.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가? ‘한 개인, 한 사람이 바로 세계라는 말...소세키에게 그 말이 적용되겠다 싶다

  -소세키의 작품 중에 오른쪽은 읽은 책들이고, 왼쪽은 읽으려고 빌린 책들이다. 현암사의 소세키전집은 진짜 탐나는데, 카알 벨루치 요즘 많이 참고 있습니다. ㅎㅎ내 마음대로 소세키 읽기는 계속됩니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yo 2019-09-08 1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이제 저는 알라딘에서 소세키 관련해서 깝치지 말아야겠네요.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

카알벨루치 2019-09-08 19:44   좋아요 0 | URL
그 자리가 그 자리이지 어디긴요 ㅋㅋ소세키 매력적이네요 인제서야 읽어내고 있습니다 소요 오늘도 즐겁게 하루 마무리 하세요 지금 설인가요?

syo 2019-09-08 19:46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저는 영대병원이요. 엄마 내일 수술이라서 오늘은 여기서 보초섭니다. 카알님도 주말 마무리 잘 하세요^-^

카알벨루치 2019-09-08 19:50   좋아요 0 | URL
아휴 수고가 많네요 어머니 수술 잘 하시길 어여 쾌차하시길 기도합니다 ~거기서도 책 볼듯 하네요 ㅎㅎ

syo 2019-09-08 19:51   좋아요 0 | URL
정답 ㅋㅋㅋㅋ

stella.K 2019-09-09 1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작 읽기 부럽습니다. 전 맘에만 있고 정작 읽지는 못하고...ㅠ
몇년 전 <나는 고양이로 소이다> 조금 읽다 말았습니다.
좋은 작품이긴한데 잘 안 읽혀지더라구요.
게다가 지금은 그런 짓 안하지만 당시 이벤트 도서를 엄청 많이하고
살아서 자꾸 읽는 게 미뤄지더라구요.
소설 보단 에세이나 인문학을 주로 읽기도 했고.
그런데 카일님은 <...고양이...>는 아직 안 읽으셨나 봅니다. 그건 안 다루셨네요.

카알벨루치 2019-09-09 20:01   좋아요 1 | URL
<나는 고양이...>는 전에 이북으로 읽다가 말았는데 이게 대개 두껍네요 빌렸으니 읽어야겠죠 읽으면 리뷰 올릴께요~리뷰가 밀려서 큰일입니다 그나저나 건강 늘 유의하소서

페크(pek0501) 2019-09-15 1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멋지군요. 한 작가를 탐독하기!
저는 <도련님>을 꽤 재밌게 읽었었습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오디오북으로 들었는데 신선했어요.
카알 님의 탐독이 계속되시길...
소세키의 다른 책 두 권을 가지고 있는데 올해 안으로 탐독해 보겠습니다.

카알벨루치 2019-09-15 12:42   좋아요 1 | URL
소세키의 전집을 읽으려고 시작한건 아닌데 <산시로>의 첫 감동이 너무 커서 읽고 있긴합니다 ㅎㅎ
 
산시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산시로는 소세키의 소설 중에서 특별히 그 후, 과 연결된다. 스토리 전개상 그렇게 볼 수 있다. 나는 산시로를 읽고, 을 읽고, 그 후를 읽었는데, 좀 더 흥미진진하게 보고자 하는 독자라면,

 

산시로-그 후-,

 

이런 순서로 읽으면 더 좋겠다 싶다.

 

 

 

2

8월 중순에 우연히 잡아 든 나쓰메 소세키의 산시로는 정말 경이적이었다. 100년 전의 일본작가가 어떻게 청춘의 아픔과 슬픔을 표현하는데, ‘스트레이 십stray sheep’이란 말로 대사를 쳐내는 게 압권이었다. 산시로는 갑 중에 갑이라고 생각한다. 구마모토 출신인 시골청년 산시로가 도쿄로 넘어와 생활하면서 도회인들을 만난다. 거기서 미네코를 만난다. 두 사람의 마음은 소위 썸을 타는 관계였다. 하지만, 미네코의 마음을 확 잡아채지 못하는 산시로...

 

마권으로 맞히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맞히는 것보다 어렵지 않은가요? 당신은 색인이 붙어 있는 사람의 마음조차 맞혀보려고 하지 않은 태평한 분인데 말이에요.”(225p)

 

미네코의 대화를 들어보면, 산시로가 미네코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든다. 미네코는 산시로가 요지로에게 빌려 준 20엔 때문에 하숙비를 못 낼 처지가 생겼다. 하지만 요지로를 통해 미네코는 기꺼이 산시로에서 20엔이 아니라 30엔의 돈을 빌려준다. 남녀가 돈을 빌려준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그런데, 미네코가 산시로에게 거금의 돈을 빌려준다. 30엔은 좀 과장해서 산시로의 가족이 반년은 먹고 살 수 있는 돈이기도 했다. 산시로와 미네코의 달달한 러브 스토리는 풍마우(風馬牛)로 마무리된다(풍마우: 발정기의 짐승도 찾아갈 수 없는 멀리 떨어진 거리,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비유한 말, 사기제환공기에서 나오는 말). 작가 나쓰메 소세키는 풍마우란 단어를 사용했다. 어떻게 이런 말로 남녀관계를 묘사할 수 있을까?

 

 

3

산시로의 스토리는 대단한 스토리가 아니다. 하지만, 작품 전반에 드러나는 소세키의 문장과 재치가 너무나 탁월하다. 산시로가 미네코의 미래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미네코의 마음이 이 문장에서 드러나는데, 이 문장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다윗이 자신의 충직한 부하였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을 하고 난 후 나중에는 우리야는 죽이는 계획을 실행, 밧세바와 결혼까지 하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죄를 지적한다. 다윗은 자신의 죄에 대해 참회하면서 적은 시편이다).

 

내 죄를 내가 알고 있사오며

내 잘못 항상 눈 앞에 아른거립니다.’(330p-성서(공동번역))

 

산시로를 떠나는 미네코의 마음이 걸려 있는

-스트레이 십! 스트레이 십!

 

미네코의 초상화인 <숲 속의 여인>의 그림제목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서 마지막으로 내뱉는 산시로의 말,

 

-‘스트레이 십! 스트레이 십!’...

 

이건 완전 영화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너무 작품의 느낌이 격하되는 것 같다. 무엇으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느낌! 현암사에서 소세키의 전집으로 나왔다. 개인적으로 너무 마음에 드는데, 디자인과 책이 주는 깔끔한 느낌이 작품과 너무 잘 맞아 떨어지는 듯 하다. 마음 같아선 당장 다 지르고 싶지만 참자!

 

 

 

4

나는 20대의 청춘에 얼마나 많은 방황을 했던가! 상처와 아픔과 슬픔을 나누면서 저돌적으로 살아왔던가! 하지만, 소세키가 보여주는 산시로의 방황은 정제되어 있다. 왜냐하면 작품의 초반부에 낯선 여인과의 잠자리를 같이 하고 난 후(말 그대로 그냥 잠자리였다!) 그 여인은 ‘23년간 지녀왔던 자신의 약점을 정곡으로 찔러 버린다.

 

당신은 참 배짱이 없는 분이로군요.”(24p)

 

산시로의 배짱 없음이 문제였을까? 미네코는 산시로도 아닌, 노노미야도 아닌 제 3의 인물에게로 가버린 것은 두 사람을 위한 배려였을까? 청춘의 계절에 해답을 찾을 수 없는, 해답을 찾기 위해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편린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100년 전에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번역자는 상실의 시대의 와타나베와 산시로를 비교한다. 100년 전 욕망을 거세하며(?) 배짱이 없이 산 산시로의 상실과 돈 쥬앙과 같은 여성편력을 자랑하던 현대의 욕망가, 와타나베의 상실! 현대는 욕망이 증폭될대로 증폭된 시대이기도 하다.

 

산시로의 무채색의 투명하고 정갈한 느낌의 상실감에 더 많은 점수를 주고 싶다. 내가 20대가 아니어서 그럴까?

 

 

 

5

멀리 구름 걸린 하늘의 두견새

작품 가운데 멀리 구름 걸린 하늘의 두견새란 하이쿠가 등장한다. 띠지에 그 문구가 나와 있어 두견새가 뭘까 싶어 뒤져보니 네이버 박사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두견이는 대체로 그 울음소리가 구슬퍼서 한()이나 슬픔의 정서를 표출하는 시가문학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였다

 

두견새가 가진 심상, 두견새의 슬픈 울음소리...일본에서나 우리나라에서나 그 소리의 느낌은 같은 동양권이니 더 하지 않을까 싶다. 배짱 없다고 지적받은 23세 청춘의 산시로의 깨진 심장소리가 들리는 듯 해 감동이 더 하다.

 

"스트레이 십! 스트레이 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랑비 속의 외침 - 2판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우리는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다양한 경험과 체험을 한다. 때로는 필요하고 시의적절한 경우case by case도 있고, 때로는 그 나이 때의 자아가 견뎌내기엔 너무 무겁고 버겁고 둔중한 damage를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도 있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들의 죽음을 목도하는 경우는 더할 나위 없는 충격이다. 무수한 충격, 총격에 버금가는 정서적, 정신적 충격에 거덜나지 않으면 좋으련만.

 

 

 

2

위화의 가랑비 속의 외침은 할아버지 손유원, 아버지 손광재, 그리고 주인공 손광림, 그리고 형제들, 친구들, 이웃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이야기들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환경 속에서 숟가락 하나의 무게를 덜기 위해 6살 때 왕립강과 이수영 부부에게 입양된지 5년 만에 다시 고향 남문으로 돌아오면서 소설은 마무리된다. 엽기적인 조부, 엽기적인 친부, 엽기적인 이웃들, 그리고 엽기적인 양부의 행각은 치를 떨게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위화의 기억을 관통한 이야기들이다.

 

 

 

3

주인공 손광림은 성장하면서 맞는 무수한 가랑비 속에 한 소년의 외침이 있듯이, 우리도 성장하면서 가랑비 속의 외침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4

광림과 소우의 우정의 한 컷은 감동적이다.

소우는 웬 아가씨를 성적인 충동, 욕구에 못 이겨 껴안고 도망친다. 그로 인해 학교에서 1년간 노동교육이란 처벌을 받게 된다. 1년이 지나 돌아온 후에 소우가 광림에게 한 여자를 껴안은 느낌친구 정량의 어깨를 안은 느낌과 비슷하다고 이야기했을 때 광림은 자신이 아닌 정량이라고 이야기해서 몹시 서운해한다. 하지만, 후에 소우는 이전의 이야기를 수정해서 다시 말한다.

 

사실 정량의 어깨가 아니라 네 어깨를 안을 때의 느낌이었어. 그때 그런 느낌이 들었어.”(147p)

 

광림과 소우의 따뜻한 우정이 한 shot이다.

 

 

 

5

마치 천명관의 고래를 보는 느낌이다. 고래는 잘 정리된 이야기라면, 가랑비 속의 외침은 주인공의 기억의 파편들을 흩어놓은 느낌이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도 집합된, 편집된 덩어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파편들과 조각들이 얽히고 설킨 채 우리의 뇌 속, 기억 속 저편에 남아 있지 않는가! 그래서, 이야기의 파편들임에도 불구하고 잘 읽힌다. 작가 위화는 인생을 쓸 당시에는 <마태수난곡>을 들으면서 적었다고 하는데, 이 작품을 쓸 당시에는 다 쓰고 나서 음악을 생각했다고 한다.

 

위화, 이 사람 이야기꾼이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테렌스 데 프레의 생존자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폴란드에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책은 2차 세계대전의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에 대한 책이다. 거기에 보면 커피 반 잔에 대한 일화가 있다. 수용소에서 매일 커피를 한 잔씩 포로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커피는 향긋한 향이 나는 아메리카노나 내가 매일 드리퍼로 내려 마시는 커피의 커피향도 아니고, 대한민국의 자랑꺼리인 맥심믹스 커피도 아니다(맥심믹스 커피를 외국인들이 그렇게 좋아한다고 한다). 그 수용소에서 내주는 커피는 악취가 나는 물에 불과했다. 수용소의 포로들은 목욕도, 심지어 세수할 물조차도 변변찮았다. 포로들 중에는 그 커피 한잔을 냉큼 다 마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커피 반잔은 마시고, 반잔은 고양이세수라도 하고 손도 씻고 그러했다고 한다. 수용소에서 세수는 무슨? 수용소에 있는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인데, 왜 그렇게 커피 반잔을 낭비한단 말인가? 수용소 내에서도 서로 다른 생각들이 교차했을 것이다. 하지만, ‘커피 반잔을 자신의 용모에 투자(?)한 사람들이 끝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 다들 들어본 이야기일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접하면서 새삼스럽게 커피 반잔의 힘에 대해 생각해 본다. 소통전문가인 저자 김창옥은 커피 한잔을 다 비운 사람들의 가슴에게 있었던 것은 절망이라고 했다. ‘커피 반잔을 남겨두고 자신을 관리(?)했던 사람은 희망을 가슴에 담아두었다고 볼 수 있겠다. 굳이 키에르케고르의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유명한 문구를 갖다대지 않는다 하더라도 절망은 희망을 좀먹는 좀비와도 같은 것이다.

 

 

 

 

2

존 번연이 쓴 대작 천로역정을 읽었다. 크리스천들에겐 성경 다음으로 읽어야 할 책이라고 선전한다. 읽어 보니 그럴 만하다고 생각한다. 존 번연은 라이센스가 없는 설교자였다. 정식적인 신학수업 과정을 밟지 않았기에 당대의 교권에서 추방을 당한 셈이다. 그 결과는 그는 감옥에서 12년을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12년이 그에게 없었다면 과연 그의 작품이 세상에 얼굴을 내밀 수 있었을까?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순례자인 크리스천’(주인공 이름이기도 하다)이 동행자였던 유순한과 함께 처음 봉착한 위기는 바로 낙담Despond’이라는 이름의 구렁텅이를 만나는 대목이었다. 같이 동행하겠다던 유순한은 이렇게 말한다.

 

길을 떠나자마자 이처럼 험악한 사태에 맞닥뜨린다면 남은 여정이나 목적지에서 겪게 될 일은 더 말해 무엇하겠소? 살아서 이 늪을 빠져나가거든 그 멋지다는 나라에는 댁 혼자 가시꾸려. 난 이쯤에서 관두겠소.”(천로역정, 36-37p)

 

유순한은 그 길로 낙담의 늪을 빠져나와 돌아가 버린다. ‘옹고집은 처음부터 동행하기를 거부했는데, ‘유순한옹고집의 길을 따라 가버린 것이다.

 

낙담이다. 낙심이다. 절망이다. 좌절이다.

우리 인생에 부딪히는 가장 큰 난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선 자리에서 내가 버틸 의지를 내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바로 낙담이고, 낙심이고, 절망이고, 좌절이 아닐까 싶다. 존 번연이 감옥생활을 한 이유가 무엇인가? 자기 확신과 믿음에 따라 복음을 설교하다가 갇힌 절망적인 감옥이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글을 썼다. 위화의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이란 책 제목처럼 그의 감옥은 글쓰기의 감옥이 된 셈이다.

    

 

 

3

잭 캔필드는 자신의 저서 내 영혼의 닭고기 스프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은 두려움 저편에 존재한다.”

 

동의한다. 우리가 가진 모든 두려움, 절망, 좌절, 낙담, 낙심, 트라우마, 실패감, 열패감 등. 그 모든 것들을 넘지 못한다면 과연 우리는 우리다울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존 번연의 주인공처럼, 낙담의 늪 너머에 멋진 나라가 존재하는 것이다.

    

  

 

4

솔직히 나는 김창옥의 강의를 유튜브를 통해 많이 접했고, 중복된 내용도 많다. 그래서 더 빨리 속도감 있게 책을 읽게 된 지도 모른다. 김창옥은 사연 뒤에 숨지 마세요’(38p) 라는 이야길 한다. 우리의 우여곡절의 사연들 뒤에 우리는 사연이 그림자가 되어 우리를 움츠러들게 만든다. 언제쯤 맨홀 뚜껑을 열고 지상으로 올라갈 수 있을까?’(내가 늘 애용하고 좋아하는 문구란 걸 여러분들은 아실 것이다)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해 댄다. 그 때 우리는 커피 반잔의 힘을 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5

문득 이전에 읽은 헤밍웨이의의 말에서 본 문장이 생각이 난다.

 

˝작가는 우물과 비슷해요. 우물이 마르도록 물을 다 퍼내고 다시 차기를 기다리는 것 보다 규칙적인 양을 퍼내는 게 낫습니다.˝(헤밍웨이의의 말, 7p)

 

나는 작가는 아니지만, 종종 글과 글의 소재를 숙성시킨다는 대의명분(?)아래 글쓰기를 미룬다. 글쓰는 속도가 읽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는가! 하지만 헤밍웨이는 규칙적인 양을 퍼내는 게 낫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예는 존 치버의 생애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가족과 함께 서튼 플레이스 근교의 아파트로 이사하다. 이후 오년 동안 매일 아침 정장을 차려입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실로 내려가 점심시간까지 글을 썼다.’(1946/34)(기괴한 라디오, 479p)

 

   

 

   

6

우리가 잘 아는 스티븐 킹은 그의 저서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자신이 ‘6년 동안 이 책상에서 썼는데, 당시 나는 술이나 마약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마치 정처 없이 바다 위를 떠도는 배의 선장과도 같았다’(123p)라고 기술한다. 하지만, 그는 그리고 글쓰기도 중단하지 않았다’(122p). 스티븐 킹은 세익스피어, 포크너와 예이츠와 쇼와 유도라 웰티 같은 작가들은 천재이며 거룩한 우연의 산물이다.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그런 재능을 갖기는커녕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다. 아니, 대부분의 천재들은 자기 자신조차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많은 천재들이 불행한 삶을 살아가면서 자기들은 결국 우연이 빚어낸 괴물에 불과하다고(적어도 어느 정도는) 느낀다.’(172p)

결국 스티븐 킹 자신도 우연이 빚어낸 괴물이 되었던 것이다. 어떻게 가능했는가? 계속 글을 썼기 때문이다. 특별히 그의 저서에서 <인생론>을 읽어 보면 왜 그가 글쓰기는 절망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308p)이라고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1999724, 산책을 하다가 봉변을 당한다.

 

허파가 함몰됐군.”

가슴에 튜브를 꽂아야 합니다. 스티븐. 약간 좀 아플 거예요. 조금만 참으세요.”(319p)

 

그는 5주 후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날 나는 꼬박 1시간 40분 동안 글을 썼다. 스미스의 승합차에 받힌 이후부터 그때까지 이렇게 오랫동안 앉아 있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작업이 끝났을 때 나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으며 너무 지쳐서 휠체어에 똑바로 앉아 있을 기력조차 없었다. 골반의 통증은 숫제 재앙에 가까웠다. 그리고 처음 500개쯤의 단어를 쓰는 동안 유별나게 힘이 들었다. 마치 난생 처음으로 글을 써보는 것 같았다. 예전에 갖고 있던 글쓰기 요령도 내 머리 속에서 몽땅 사라진 듯했다. 나는 마치 시냇물 속에 비뚤비뚤 놓여 있는 미끄러운 징검다리를 건너가고 있는 힘없는 노인처럼 낱말 하나하나를 어렵사리 써 내려가고 있었다. 그날은 영감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오기를 가지고, 그리고 이렇게라도 계속하다 보면 곧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버텨낼 뿐이었다.’(330p)

 

만신창이가 된 그의 몸을 이끌고 글을 써가기 시작한 스티븐 킹을 보면서 역시 작가는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커피 반잔의 힘을 안 인물이었다.

 

    

 

7

글쓰기의 목적은 돈을 벌거나 유명해지거나 데이트 상대를 구하거나 잠자리 파트너를 만나거나 친구를 사귀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글쓰기란 작품을 읽는 이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아울러 작가 자신의 삶도 풍요롭게 해준다. 글쓰기의 목적은 살아남고 이겨내고 일어서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것...글쓰기는 마술과 같다. 창조적인 예술이 모두 그렇듯이, 생명수와 같다. 이 물은 공짜다. 그러니 마음껏 마셔도 좋다. 부디 실컷 마시고 허전한 속을 채우시기를.’(332p)

 

글쓰기의 목적은 살아남고 이겨내고 일어서는 것이다는 말은 그의 삶에서 녹아내린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글쓰기는 헤밍웨이처럼 매일 물을 퍼내고, 존 치버처럼 매일 지하실로 내려가는 일처럼, 스티븐 킹도 동일한 이야기를 한다.

 

뮤즈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가 여러분의 집필실에 너울너울 날아들어 여러분의 타자기나 컴퓨터에 창작을 도와주는 마법의 가루를 뿌려주는 일은 절대로 없다. 뮤즈는 땅에서 지낸다. 그는 지하실에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오히려 여러분이 뮤즈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내려간 김에 그의 거처를 잘 마련해 줘야 한다. 다시 말해서 찡찡거리는 힘겨운 노동은 모두 여러분의 몫이라는 것이다.’(175p)

 

글쓰기의 고전古典이라고 할 수 있는 스티븐 킹의 저서는 읽지 못하신 분이라면 추천한다. 왜 그 책이 고전인지 느낄 수 있다. 작가들이 다들 그렇지만, 유쾌한 재미있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의 책의 <이력서>란 chapter에선 자기 이야기를 줄기차게 하고 있는데, ‘이 사람 괴짜 아니야? 마약과 알코올 중독자이기도 하고...’ 뭐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8

이 글을 읽고 있는 알라디너라면, 다들 글쓰기가 커피 반잔의 힘’, 커피 반잔의 힘은 글쓰기에서 나온다라는 것에 동의할 수 있는 분들일 것이다.

 

 

 

 

9

글쓰기는 절망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다’-스티븐 킹

 


댓글(4) 먼댓글(0) 좋아요(5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19-08-25 18: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문을 볼 때면 으레 커피 한 잔을 가져와서 마시며 보게 되고,
글을 쓸 때면 으레 커피 한 잔을 가져와서 마시며 쓰게 되고...
커피 한 잔의 힘으로 합니다, 저는...

흥미롭게 읽고 갑니다.

카알벨루치 2019-08-25 19:00   좋아요 1 | URL
페크님은 커피반잔의 힘을 아시기에 반잔을 더한 한잔의 힘으로 글을 쓰신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ㅎㅎㅎ 잘 지내시죠? 인제 가을입니다 감기조심하소서 조약한 글에 댓글 감사 드립니다 ^^

cyrus 2019-08-26 0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가끔 글을 쓸 때 하리보 젤리를 먹어요. 껌을 씹으면 집중력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입에 무언가를 씹으면 글 쓰는 일에 몰입이 잘 돼요. ^^

카알벨루치 2019-08-26 08:39   좋아요 0 | URL
우리 꼬맹이들이 좋아하는 하리보 젤리를 드신다는 말씀 ㅎㅎ집중력과 몰입을 위해 소도구를 애용하는 사이러스님은 엄연히 꾼이시군요 독서꾼^^
 
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가즈오 이시구로는 1954년에 일본에서 태어났다. 그는 5살 때 아버지(해양학자)의 진로에 따라 영국으로 이주했고 영국에서 철학과 문예창작을 공부했다. 특별히 이 남아 있는 나날1989년에 발표되어 부커상을 받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또한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1995년에는 문학적 공로를 인정받아 대영제국 훈장을, 1998년 프랑스 문예훈장을 받았고, 2010<타임스>가 선정한 “1945년 이후 영국의 가장 위대한 작가 50에 선정되었다고 한다.

2017소설의 위대한 정서적 힘을 통해 인간과 세계를 연결하고, 그 환상의 감각 아래 묻힌 심연을 발굴해 온 작가라는 평과 함께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작품을 이제야 알았을까? 그래도 지금에서야 읽은 게 어디인가? 싶다.

 

 

 

2 뭣이 중헌디?-a

스티븐스는 위대한 영국 귀족인 달링턴 경의, 달링턴 홀의, 위대한 집사의 역할로 한평생 잘 달려왔다. 아버지도 품격있는 집사였고, 자기 또한 품격있는집사에 대한 자부심과 승리감이 가득했다. 달링턴 홀에서 유럽의 각국의 대사들과 정치가들이 은밀한 회동을 벌이는 모임을 준비하기 위해 철두철미하게 움직였던 집사, 스티븐스! 회담이 진행되는 그 바쁜 와중에 아버지가 뇌졸중로 쓰러지셨다. 아버지의 임종을 옆에 지켜야 할 아들의 입장이지만, 그럴 처지가 못 되었다. 스티븐스는 아버지도 집사였기에 아들의 그런 입장을 충분히 이해해 줄 거라고 믿었다. 스티븐스는 이 소설 속에서 달링턴 홀의 새로운 주인인 페러데이의 배려로 여행길을 떠나게 된다. 그러면서 인생을 회상하는데, 19233월의 그 회담이 자신의 인생의 전환점이었다’(91p)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그 회담이 내가 집사로서 진정한 성년에 도달하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지금도 그날 저녁을 생각할 때면, 함께 떠오르는 가슴 아픈 기억들에도 불구하고 뿌듯한 성취감에 젖어 드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144p)

 

 

거기에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아들의 모습이 있었다.

 

 

 

 

3 뭣이 중헌디?-b

스티븐스의 사랑? 함께 달링턴 홀을 섬겼던 총무, 켄턴 양(후에 벤 부인이 됨)은 집사로서 프로페셔날한 직업적인 면모를 공유했다. 그 가운데 두 사람 사이에 감정의 기운이 싹트지만. 스티븐스는 위대한 집사’, ‘직업적인 실존을 위해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을 거세한 듯 절제한다. 이루어질 것만 같은 두 사람의 관계는 결국 아쉽고 안타깝게 마무리된다. 여자가 자신이 소개팅 or 선을 봤다면서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마음을 체크 해 볼 때, 남자가 그 순간 여자의 마음을 확 잡아채야 하는데. 스티븐스에게는 사랑의 품위보다 집사의 품위가 더 우선순위였나 보다. 그는 마음속으로 흠모하는 켄턴 양이 자신의 쉬는 시간에 집무실로 진군해 들어왔다고 굉장히 불쾌해한다. 보통 사랑하는 사람이 개인적으로 찾아왔을 때, 반가워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게 당연한 이치이지만, 스티븐스는 의외였다.

 

자기 직업에 자부심을 느끼는 집사라면, 그 옛날 <헤이스 소사이어티>가 명시한 자신의 지위에 상응하는 품위를 열망하는 집사라면, 남들 앞에서 결코 쉬지않는 법이다. 그때 들어온 사람이 켄턴 양이었던 생면부지의 인물이었든 그런 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그 때 켄턴 양이 불쑥 들어온 사건의 경우에 원칙의 차원, 아니 품위의 차원에서 중대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때 내가 완벽한 본연의 역할 속에 사는 모습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207-208p)

 

 

 

 

4

달링턴 홀의 달링턴 나리를 평생 섬기면서 세계 각국의 내놓으라 하는 위인들과의 만남을 준비했던 위대한 집사’, 스티븐스! 세계대전 중에 윈스턴 처칠까지도 달링턴 홀에서 섬겼다고 고백한 스티븐스였다.

 

자신이 봉사해 온 세월을 돌아보며, 나는 위대한 신사에게 내 재능을 바쳤노라고, 그래서 그 신사를 통해 인류에 봉사했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위대한 집사가 될 수 있다’(149p)

 

스티븐스는 여행 중에 만난 칼라일 박사와의 대화에서 품위에 대해

 

몇 마디로 설명하기는 힘들겠지만....., 결국 사람이 공중 앞에서 옷을 벗지 않는 것으로 귀착된다고 봅니다.”(260p)

 

라고 말한다. 스티븐스가 말한 직업적인 실존, 직업적인 프로페셔날리즘, 집사의 품위는 너무나 독보적이다. 스티븐스는 35년을 달링턴 경을 위해, 달링턴 홀을 서빙하는 것에 온 몸을 바쳤다. ‘내가 드려야 했던 최고의 것을 그분께 드렸지요’(298p) 스티븐스는 한결같은 충성심으로 달링턴 경을 섬겼고 그 35년간의 진액을 쏟는 직업적인 실존존재론적 실존을 압도한다. 거기서 그는 승리감과 보람과 성취를 자아도취적으로 느낀다. 하지만...그는 인생의 황혼 녁에 맞이하는 여행을 통해서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수십년 만에 만난 켄턴 양(벤 부인)은 노년에 이제 손주를 보게 될 기쁨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묻는다.

 

당신은 어떤가요, 스티븐스 씨? 달링턴 홀로 돌아가면 당신에게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요?”

 

글쎄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공허함은 아닐겁니다, 벤 부인. 그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럴 리가 없지요. 일 다음에 일, 그리고 또 일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죠.”(290p)

 

달링턴 경이 3년 전에 죽고, 미국인 패러데이가 달링턴 홀의 주인으로 바뀌면서 스티븐스 집사는 그 집과 함께 일괄 거래에 낀 한 품목으로서’(298p) 남게 된다. 스티븐스가 추구했던 위대한 집사로서 그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작가가 스티븐스가 인생에서 놓친 부분들을 보여주면서 우리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묘사해주는 듯 하다. 켄턴 양과의 사랑을 거세하면서 성취한 집사의 품격은 이제 노년에 접어든 스티븐스에게 점점 더 많은 실수들, 지극히 사소한 것들’(298p)이 치밀고 올라온다. 위대한 집사였던 아버지가 노년에 보여준 실수들처럼 그 또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세월을 비껴 가는 인생은 없지 않는가!

 

 

 

 

5 뭣이 중헌디?-c

35년을 달링턴 나리를 위해 헌신했다. 그 달링턴 경에 대해 스티븐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 분에 대해 엉터리 소리를 해대는 사람들 대다수를 난쟁이로 만들어 버릴 만큼 도덕적으로 대단한 거인이셨다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러셨던 분이라고 서슴없이 단언할 수 있다’(161p)

 

하지만, 스티븐스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19233월의 그 달링턴 홀에서의 회담은 1918년의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 편에서는 엄청나게 가혹한 조항들이었기에 수정될 수 있게 각종 방안들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스티븐스는 집사였기에, 주인인 달링턴 경의 모든 사업적인 결정, 직업적인 결정에 대해 따라갈 수밖에 없었지만, 그 결정들이 조심스러운 정치적인 사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무관심한, 맹목적인 충성심’(250p)이었다는 데 도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달링턴 경이 대부였던 젊은 카디널은 이런 스티븐스의 도덕적인 무감각과 무관심을 작품 중간에 지적한다. 달링턴 경이 주도하는 회담과 모임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스티븐스는 시종일관 무관심하며 무신경하게 반응한다. 그가 살아온 방식이기도 했다.

 

하지만, 달링턴 경은 죽을 때 자신이 잘못 살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자신의 명성과 명예가 전쟁 후에 끊임없이 추락하는 것을 경험한다. 그는 알게 모르게 히틀러의 사주받은 꼭두각시 노릇를 한 셈이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이런 도덕적인 책임에 대해 비겁한 핑계를 대고 있다. 일례로, 달링턴 경이 달링턴 홀의 직원 중에 유대인들을 해고하라는 지시에 대해 스티븐스는 총무 켄턴 양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명령 복종만을 내세워 해고시킨다.

 

달링턴 경의 노력이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어리석기까지 했음을 세월이 입증해 주었다고 해서, 어떤 면으로든 어떻게 내가 비난받아야 한단 말인가? 내가 그분을 모셔 온 세월을 통틀어, 증거를 저울질하고 나아갈 길을 판단한 것은 바로 그분 자신이었으며, 나는 다만 나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지극히 온당하게 움직였을 뿐이다. 그리고 가히 일등급이라 인정받을 만한 수준에서 내 능력 닿는 데까지 직무를 수행한 것 밖에 없다. 오늘날 나리의 삶과 업적이 안쓰러운 헛수고쯤으로 여겨진다 해도 내 탓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나에게도 응분의 가책이나 수치를 느끼라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251-252p)

 

이 대목에서 번역가 김남주는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악의 평범성에 대한 언급을 한다. ‘스티븐스가 위대한 집사였다면, 아이히만은 좋은 아버지, 자상한 남편, 성실한 직업인이었다’(308p)

 

 

 

 

6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

가족도, 사랑도 비켜 가고, 도덕성도 비켜 간 위대한 집사, 스티븐스에게 남은 것은 이제 황혼기의 남아 있는 나날뿐이다. 하지만, 몇 십년 만에 만난 옛 사랑 켄턴 양은 이런 말을 남긴다.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쭉 뻗고 즐길 수 있어요. 내 생각은 그래요. 아니,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그렇게 말할 거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300p)

 

하루의 일과가 끝나는 저녁 타임은 보통 사람들에겐 농담과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자리이다. 그러기에 하루 일과가 마무리 되었다는 데서 오는 성취와 보람이 내려앉은 자리이기도 하다. 두 남녀 노인이 선창가에서 바라 본 풍경은 저녁을 즐기는 보통 사람들의 영상이었다. 거기에는 위대한 집사에게 빠져 있었던 그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을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농담의 기술’(302p)이라는 메타포를 등장시킨다.

 

 

 

 

7

직업의 현장에서 칼날 같은 집사의 삶을 살았던 스티븐스에게 노년에 맞는 달콤한 6일간의 여행은 인생에 있어 뭣이 중헌디?’(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를 보여주면서 독자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지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19-08-23 0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통 사람들의 선악에 대한
통렬한 작가의 비판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네요.

달링턴 경으로 대변되는 영국
지식인 혹은 귀족들의 독일에 대
한 유화정책이 결국 전대미문의
전쟁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
오고, 자기 국가마저 풍전등화의
위기로 내몰았으니 말입니다.

영화에서 보면 스티븐스 아저씨
가 여행길에 어느 여인숙인가에
머물게 되는데, 그 집의 전사한
아들의 방에 머물게 되죠.

정말 의미심장한 한 컷이었습니다.

카알벨루치 2019-08-23 17:04   좋아요 0 | URL
영국의 정치적 배경이 묻어있네요 영화도 한번 보고싶은 작품입니다 영화가 더 돋보인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레삭매냐님 댓글이었던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