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1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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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즉 로마사는 우연챦게 세계사 도서들을 산발적으로 읽어가다가 구미에 당기게 된 책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의 16번째 책이기도 한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를 에피타이저로 읽고 나니 그가 이야기하는 로마인 이야기의 전체적인 조망을 할 수 있어 참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인 숲을 한 번 보고 나무를 본다는 그런 느낌이다.



1권은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부제를 달고 있다. 여기서는 제 1장, 로마의 탄생과 제 2장, 로마 공화정의 이야기를 다룬다.

 

제 1장, 로마의 탄생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로물루스와 레무스 쌍둥이


로물루스와 레무스 쌍둥이 형제

로마의 탄생은 기원전 753년에 로물루스에 의해서 건국되었다. 모든 나라의 건국신화는 존재한다. 우리나라도 단군신화가 존재하는 것처럼 로마도 로물루스 쌍둥이 형제의 전설, 신화가 존재한다. 건국신화는 그 나라의 건국에 대한 웅대함과 화려함을 돋보이기 하기 위한 하나의 과장법이다.

 

왕정 정치 7대(代)와 그들의 출신성분

로마는 공화정의 정치시스템을 취하기 이전에 7명의 왕정 정치가 있었다. 로물루스를 비롯하여, 제 2대 누마(사비니족 출신), 제 3대 툴루스(라틴계 로마인 출신), 제 4대 안쿠스(사비니족 출신), ,제 5대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최초로 선거운동을 한 인물-(혼혈 에트루스크 출신), 제 6대 세르비우스(타르퀴니우스의 사위), 제 7대 거만한 타르퀴니우스(세르비우스의 사위) 왕이다.

 

로마의 초대 왕정 제도에서 왕의 선출 기준은 독특하다. 왕들의 출신을 보면 알겠지만 라틴계, 에트루리아계, 사비니족, 순수 로마인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것은 로마의 사회가 얼마나 순수로마인이 아닌 다른 속주(식민지)나 이방 세계에 속한 사람들에게도 평등한 권리를 주었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로마는 열려진 사회이다. 이러한 개방성은 로마의 지형과도 맞물린다고 볼 수 있다.



로마인의 개방성은 지형적인 조건과도 맞물린다

로마는 7개의 언덕으로 지형적인 조건을 갖추어 있기에 전쟁을 안할래야 안 할 수 없는 도시국가였다. 완전히 고립된 것도 아니고 완전히 트인 평지도 아닌 이런 언덕의 지형적인 조건 자체가 로마의 국민성, 즉 ‘개방성’의 결과물을 낳게 된 것이기도 하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러한 개방성을 들면서 ‘로마를 강대하게 한 요인은 종교에 관한 사고방식이었다’고 전한다.

 

로마의 이러한 개방성이 로마로 들어온 에스투르크인 5대왕 타르퀴니우스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개인적으로 보고 싶다. 타르퀴니우스는 정말 에트루리아인이었지만 그는 정말 로마인이 되기를 원했고 그렇게 살았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다음 6대 왕을 바로 사위인 '세르비우스‘를 선택한 것이다. 혈통과 인맥과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이러한 로마의 ’왕의 간택‘부분만 보더라도 로마의 특수성을 엿볼 수 있다.

 

로마인의 개방성은 종교적인 원인도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의 종교적인 개방성-로마는 다신교였다-오히려 로마를 더욱 로마답게 했으며 나라를 더욱 확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유일신교가 로마의 종교였다면 로마는 그만큼 타민족과 그 민족이 가진 종교에 대해서 개방적인 태도를 취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인이나 게르만인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지는 것이

로마인이라고, 로마인들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로마인이 가진 것은 바로 ‘개방성’이었다고 한다. 이 민족 특유의 ‘개방성’이 그리스가 그렇게 융성하였지만, 그렇게 빨리 쇠망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로마가 더욱 번성케 한 원인으로 꼽고 있다.

 

로마는 로마인만의 군대를 원한다

하지만 로마의, 로마인의 이러한 개방성은 군대 편성에 있어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첫째, 로마는 말기가 될 때까지 용병제도가 없었다. 도시국가였던 이탈리아 남부의 도시 국가인 타렌툼은 로마의 침략기세를 알고 그 당시 전쟁에서 탁월한 에페이로스의 피로스 왕에게 도움을 청한다. 타렌툼은 군사력은 없었지만 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는 경제력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로마인은 돈을 주고 고용한 남한테 국가 수호를 맡기는 것을 싫어했다. 둘째는, 로마의 유력자는 많은 사람을 후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제로 결정된 수만큼 병사를 제공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로마는 16세-40세까지의 건장한 남자에게는 ‘세금’ 대신에 ‘병역’의 의무를 지웠다. 그래서 이것은 ‘혈세’라고도 했다.

 


사비니족 여인의 강탈


로마 건국 초기의 ‘사비니족 여인의 강탈’

‘사비니족 여인의 강탈’이란 이 그림은 우리에게 로마의 역사의 한 대목을 보여준다. 로물루스와 그의 부하들은 로마시민들이 건립 당시에 대부분 독신 남자였기 때문에 여자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이웃 사비니족을 축제에 초대하여 여인들은 우리 나라식으로 말하자면 ‘보쌈’하기에 이르른다.

서양에는 지금도 신랑이 신부를 안아들고 신방 문턱을 넘는 풍습이 있다. 이 사건 이후로 시작된 로마인의 풍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244년의 왕정 시대의 종말

로마는 ‘거만한 타르퀴니우스’의 치세를 끝으로 공화정 시대로 들어간다. 로물루스가 건국한지 기원전 753년부터 244년째인 기원전 509년의 일이었다. 민회에서 선출되는 것은 같지만, 임기가 1년밖에 안 되는 2명의 집정관이 나라를 다스리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루크레티아 사건은 이미 사명을 끝낸 왕정의 숨통을 끊어놓은 데 불과했다.



로마의 영웅들
-이들은 1,2,3, 4,5 권의 주인공들인 셈이다.

 제 2장, 로마 공화정

 

로마 공화정의 공로자, 브루투스

사적인 추문을 교묘히 이용하여 왕정 타도까지 이끌고 간 공로자는 바로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였다. 그는 그후 500년 동안 이어지는 로마 공화국의 창시자가 되었다.

 

거만한 타르퀴니우스는 자신의 왕정 회복을 위해 에트루리아 인들을 끌어들인다. 여기서 에트루리아의 명장인 포르센나와 이를 죽이기 위해 적장으로 뛰어든 ‘왼손잡이 무티우스’의 일화는 감동적이다.

 

로마의 공화정의 씨를 뿌린 사람은 브루투스였고, 뿌리를 내린 사람은 푸블리콜라였다. 이 두 사람의 뒤를 이은 로마인 가운데 왕정으로 돌아가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먼훗날 최고의 실력가인 카이사르 황제가 등장하기까지는 말이다.

 

로마에 영향을 미친 그리스인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사를 기술하기 위해서 로마에 영향를 미친 그리스의 역사를 잠시 기술하고 있다. 독자의 주된 포커스는 로마인 이야기이기에 그리스인 이야기를 하니 흥미가 조금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역사는 역사이고, 역사는 사람들만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로마이든, 그리스이든 그것이 무슨 대수랴!

 

그리스의 인물 중의 인물, 페리클레스

그리스의 역사를 들추다 보면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에서 만난 반가운 인물, 시오노 나나미가 지적 능력, 설득력, 육체적 내구력, 자기 제어 능력, 지속하려는 의지 의 5가지 분류기준을 만들어 100만점 만점을 준 카이사르와 더불어 유일무이한 인물, 페리클레스가 등장한다.

 

그리스는 트로이의 건너편에 있었다

나는 그리스의 역사를 맛보면서 또 다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이전부터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섭렵하고자 했는데 말이다. 그리스 이야기에서 우리는 유명하디 유명한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영화 ‘트로이’...브래드 피트의 멋진 마스크와 몸매로 우리들의 감동을 자아냈던 그 트로이가 바로 그리스 땅 건너편에서 벌어진 실화 아닌 실화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나는 전기밥솥에 밥을 하고, 초코 우유를 마셨다. 일단 먹어야 살지...ㅋ)

 

그리스(아테네)의 시민권 VS 로마의 시민권

그리스의 역사 가운데 아테네, 아테네는 아테네 시민권을 가질려면 부모 가운데 적어도 한 사람이 아테네 시민이어야 가능했다. 이것도 페리클레스 시대에 이르면 더욱 배타적으로 바뀌어, 부모가 모두 아테네 태생이 아니면 시민권을 가질 자격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아테네에서 오랫동안 살고 학교까지 열어 아테네 문화 발전에 이바지한 아리스토텔레스조차도 평생 동안 시민권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페리클레스는 자신이 아테네 출신이 아닌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다는 것이다. 반면에 로마는 시민권에 대해서 아주 개방적이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러한 아테네에 대해서 ‘모든 시민에게 평등한 권리를 주려면 자연히 시민의 수를 제한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고 피력했다. 아테네와는 상반된 이러한 시민권에서의 개방성을 보더라도, 그리스인인 플루타르코스는

“패배자를 동화시키는 방식만큼 로마를 강대하게 만든 요인은 없다”

고 했다.

 

그렇지만 외국인에게 자국민과 똑같은 세금을 물리면서도 피선거권은커녕 선거권조차 인정하지 않는 국가는 오늘날에도 드물지 않다.

 

그리스와 스파르타가 펼친 ‘페르시아 전쟁’

그리스의 아테네와 더불어 펠로폰네소스의 스파르타가 있다. 아테네는 경제력으로, 스파르타는 군사력으로, 두 무리가 충돌을 회피할래야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충돌을 보류하게 된 원인이 바로 ‘페르시아 전쟁’이었다. 페르시아 전쟁은, 격렬한 내분이 특징인 그리스 역사에서도 드물게 그리스 전체가 일치단결하여 적과 맞서 싸운 처음이자 마지막 사례이기도 했다. 페르시아 전쟁은 경제적인 이유로 일어난 경제 전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종교적 이유로 일어난 이데올로기 전쟁이었다.


영화 300의 크세르크세스, 델로스 신탁,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
 

그리스 연합군은, 아테네에서는 테미스토클레스가, 스파르타에서는 영화 ‘300’의 스파르탄과 함께한 레오니다스 왕이 지휘하였다.

 

이국인들이여, 라케다이몬(스파르타) 사람들에게 전하라.

조국에 대한 사랑에 목숨을 바친 우리는 모두 이 땅에 잠들어 있노라고.


 

스파르타 전사들의 명성은 후세에까지, 지금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라도 접하게 된 슬프고도 영웅적인 에피소드이다. 그러나 레오니다스 왕과 300명의 스파르타 병사들이 희생이 허사는 아니었다. 스파르타인조차도 그리스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싸운다는 것을 그리스 전체가 알았기 때문이다. 위기 앞에서의 공동전선은 이것으로 확고부동해졌다.

 

그리스가 중심인 ‘델로스동맹’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B.C 478년에 크세르크세스 왕이 이끈 페르시아와 전쟁이 끝났고 그리스는 밀레토스, 에페소스, 그리고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고향이기도 한 할리카르나소스 같은 이오니아 도시들도 그리스인의 손으로 돌아왔다. 에게 해도 다시금 그리스인의 바다가 되었다. 아테네의 해군과 스파르타의 육군의 합동작전의 성과이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아테네는 패권국가가 되었고 그리스의 폴리스(도시국가)들은 항구적인 방어체제를 갖출 필요를 느꼈고 이로 인해 ‘델로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이 동맹은 200개나 되는 도시국가의 연합체가 되었다. 이것은 그리스가 얼마나 많은 도시국가로 나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본부로는 델로스 섬이 선정된 것이다.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

하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이러한 평화관계는 그리 길지 못했다. 아테네가 주도권을 장악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스파르타는 동맹 참가를 거부하고 오히려 자기네,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강화하는 길을 택했다.

 

델로스 동맹 VS 펠로폰네소스 동맹

페르시아 전쟁에서 이긴 뒤, 바다에서는 아테네가, 육지에서는 스파르타가 점점 강해져갔다. 이 두 강대국의 적대관계는 기원전 431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47년 동안 냉전 상태로 계속된다.

 

테미스토클레스 VS 아리스티데스

그리스는 이제 델로스 동맹과 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 양분되었다. 하지만 아테네의 정치판은 급진파인 테미스토클레스와 온건보수파인 아리스티데스로 갈등이 빚어졌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이전의 페르시아 보다 이제는 스파르타가 더 위협적인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아리스티데스는 우리의 적은 페르시아이고 스파르타는 우방국가임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이 팽팽한 가운데 결국 테미스토클레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는 불과 7년 전의 원수나라였던 페르시아로 추방당하게 된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명장이었다. 원수의 나라 페르시아에게 환대를 받으며 10년 동안 평안하게 생활하였지만 결국 그는 70살에 독배를 마시고 자결하고 만다. 왜냐하면 크세르크세스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왕이 그에게 아테네 해군과 싸우러 가는 페르시아 해군을 지휘해주지 않겠느냐고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무리 조국에서 추방된 신세지만 칼부리를 조국을 향할 순 없었기에 양심에 따라 행동한 것이다.

 

페리클레스의 황금시대(30년)

명장 테미스토클레스의 부재로 인해 아테네는 위기를 겪지만 이 때 저 유명한 펠리클레스가 등장한다. ‘페리클레스의 황금시대’가 열린 것이다. 아테네에는 ‘도편추방제’라는 제도가 있어서 아테네시민의 6천표 이상의 반대표를 받으면 추방당하게 된다. 아무리 탁월한 군주라도 이러한 ‘도편추방제’에 발목을 잡히기 마련이다.

 

페리클레스 이전의 테미스토클레스도, 키몬도 이 제도의 희생양이었다. 하지만 페리클레스는 한 번도 이 제도에 발목을 잡히지 않고 30년의 장구한 세월동안 아테네의 부흥를 꾀한 위대한 왕이다. 페리클레스의 시대가 바로 ‘그리스 문화’가 왕성하게 꽃피운 시대이기도 하고 기점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이전에 철학의 중심은 이오니아지방이었지만 이제 그리스 철학의 중심은 아테네로 옮기게 되었는데 바로 이 무렵이었던 것이다.

 

그리스와는 다른, 로마만의, 로마인만의

이 페리클레스 시대에 그리스를 시찰하기 위해, 그리스의 법과 문화를 살피기 위해 로마에서 찾아와, 1년 동안이나 머물렀던 세 명의 로마인이 있다. 시오노나나미는 이 로마인들이 본 그리스의 문화와 정치와 경제 등의 총체적인 통찰과 관점이 로마를 더욱 성숙시켰다고 말한다.

 

그리스의 황금기를 관찰한 로마인이었지만 로마인은 결코 아테네를 모방하고자 하지 않고 독자적인 로마만의, 로마인만의 그 무엇을 만들어 냈다는 것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우리가 알다 싶이 로마는 공화정 제도를 가지고 있다. 아테네에서, 그것도 황금기를 지나고 있는 아테네에서 관찰하고 경험한 민주제를 그대로 가져올 수 있었으나 로마의 세 사람은 로마인만의 특유한 개방성 하에 이러한 것들을 맹목적인 답습이나 모방은 거두절미하고 잘 여과시켜 적용하였던 것이다.

 

로마의 세 가지 특징

왜냐하면 로마의 특징은 아래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로마는

첫째, 농경민족인 로마는 본디 보수적 경향을 가지고 있기에 변혁을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개혁이 불가피해도 천천히 추진했다.

둘째, 로마에서는 귀족과 평민의 대결 태세가 강력했다.

셋째, 로마의 평민들은 과두정치 아래서의 기회균등을 요구했지만, 과두 정치 자체를 바꾸려고 하진 않았다.


로마의 심장은 원로원이다
 

로마의 공화정

공화정 로마는 원로원, 집정관, 민회 이렇게 삼각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귀족과 평민의 불평등을 계기로 인해 평민들의 거센 저항과 파업은, 후에 ‘호민관’이란 제도를 탄생시켰다. 호민관은 평민 출신에게만 주어지는 최고의 권력이었다.



로마는 ‘클리엔테스’를 가지고 있다

또한 로마를 이해하는 데 있어 굉장히 중요한 Keyword가 있다. 그것은 ‘클리엔데스’이다. 이것은 영어의 ‘client’인데 말 그대로 ‘자기 사람(들)’을 지칭한다. 원로원 수하에 있는 클리엔데스라는 말은, 바로 ‘원로원의 사람들’이란 의미이다. 로마는 누구 누구의 사람이라는 이러한 ‘클리엔데스’가 많았다. 그래서 개개인이 확고한 귀속의식이 존재했기 때문에 오히려 국가적으로는 개방적일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로마의 가장 큰 보물은 바로 ‘사람’인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패한 아테네

한편, 선진국 그리스에서 일어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원전 404년에 결국 아테네가 페리클레스를 잃고 스파르타에게 패한 뒤,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계속 혼돈 속을 헤매고 있었다. 기원전 399년에는 혼돈에 빠진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당했다.

 

로마의 위기-켈트족의 침입

후진국 로마에서는 다양한 모색을 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은 바로 B.C 390년 북쪽 지방의 에트루리아인들로 인해 일종의 방파제역할을 했던 것이 에트루리아인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켈트족(갈리아인)이 로마를 침입해 온 것이다. 그러면서 로마는 공황사태에 빠졌다. 방어전을 지휘하게 된 포필리오스 레나의 말은 켈트족이 어떤 인간들인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지금 상대하고 있는 적이 라틴족이나 사비니족처럼 전투가 끝난 뒤에도 우리 동맹국이 될 수 있는 민족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번 적은 흉포한 짐승이다.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

 

맥없이 무너진 로마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에서 소수의 인원들이 올라가 최후의 저항을 했다. 이것은 로마가 건국 이후에 한 번도 맛본 적이 없는 굴욕이었다.

 

로마의 가장 큰 미덕은 ‘명예’

로마인이 가장 중시하던 미덕은 명예였다. 켈트족의 침입은 로마인의 명예심에 깊은 상처를 주었다. 로마인들은 명장 카밀루스를 추방시킨 시점이었다. 로마인들은 탁월한 인재들을 항상 잃어버리고나서 소중한 지 아는 습성이 있다. 하지만 이것도 욕할 수 없는 것이 그게 바로 ‘로마인’이기 때문이다. 항상 ‘소 잃어보고 외양간 고치는’ 격인 것이다.

 

위기는 위험한 기회이다!

결국 7개월 간의 굴욕스런 시간을, 굴욕적인 몸값인 300킬로그램의 금괴를 켈트족에게 준 다음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역사가들은 이 ‘켈트족의 침입’이 로마가 다시 더 위대하게 된 원인으로 꼽고 있다. 로마는 다시 일어서는데 4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지만 이 사건은 로마인의 마음에 깊이 새긴 못과 같은 교훈을 주었던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기원전 431년,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정면으로 충돌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스파르타가 승리를 쥐게 되었지만 스파르타는 배타적인 사회이기도 하고 생활철학이 없는, 단순한 ‘군사력’을 바탕한 나라였기 때문에 그 패권의 길이가 길래야 길 수가 없었다. 기원전 371년에 스파르타에서 테베로 패권이 넘어가지만 10년도 채 못되어 기원전 362년, 그리스의 주도권은 마케도니아의 손으로 넘어간다. 기원전 352년에 위대한 대왕, 알렉산더가 태어난다.

 

로마의 일어섬-세 가지 전략(구도)하에

로마는 다시 일어서려고 한다.

첫째, 방위를 중시하면서 파괴된 로마를 재건할 것.

둘째, 로마에 등돌린 동맹 부족과 싸워서 국경 안전을 확보할 것.

셋째, 귀족과 평민의 갈등을 해소하여 사회안정과 국론통일을 이룩할 것. 이것은 정치개혁을 의미했다.

 

로마의 심장은 바로 원로원이다.

로마의 심장은 바로 ‘원로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로마는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공화정’ 정치의 나라이다. 카이사르는 원로원 정치체제를 바꾸기 위해 개혁을 시도하고자 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자신의 목숨을 가져간 경우이다. 원로원은 ‘로마’인 것이다.

 

켈트족의 침입 이후 로마는 이전의 ‘라틴 동맹’에서 ‘로마 연합’이라는 약간은 변형된 정치 건축의 걸작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로마는 ‘라틴 동맹’의 그 비극을 몸소 체험했기에 새로운 시스템인 ‘로마 연합’을 동맹국들과의 관계에서 만들어 나간다.

 

로마의 길

 

로마는 모든 길로 통한다

로마는 이 로마 연합의 효율적인 소통을 위해 ‘로마 가도’를 설치하게 되는데 이것은 ‘로마의 동맥’과도 같은 것이다. 이 ‘가도’의 설치는 로마의 위대한 점이다. 여기서 ‘로마는 모든 길로 통한다’는 말이 나온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길’이 로마가 숙명적으로 전쟁을 영원히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로마인의 두 번째 굴욕-삼니움족에 의한 ‘카우디움의 굴욕’

로마인의 ‘켈트족의 침입’ 이후 두 번째로 절대로 되풀이되서는 안 될 치욕은 바로 기원전 321년에 삼니움족에게 당한 ‘카우디움의 굴욕’이었다.

 


병법의 천재, 피로스-얼짱이닷!!!ㅋㅋ


병법의 천재, 에페이로스의 피로스 왕

로마는 이제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와 대결 구도에 이르게 되었다. 켈트족과 에트루리아인 공동전선을 펼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로마였다. 하지만 타렌툼이란 도시국가에서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선 타렌툼이 고용한 용병격인 ‘에페이로스의 왕인 피로스’를 물리쳐야 했다.

 

피로스 왕의 실책의 3년

‘병법의 천재’였던 피로스와 전쟁에서 로마는 빈번히 패배를 거듭했다. 하지만 피로스는 로마와의 전쟁에 대한 명분도 약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는 시라쿠사를 거쳐 카르타고에 관심이 가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생각과 행동으로 인해 3년의 허송세월을 보내게 되버렸다. 죽도 밥도 안 되었다. 반면 로마는 시칠리아에서 에너지를 소모한 피로스의 3년의 시간 동안에, ‘로마 연합’을 단단히 굳히고 힘을 더욱 모으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다

로마는 타렌툼에 대한 정복욕은 없었으나 우연히 일어난 사건들로 인해 로마의 이탈리아 반도 통일이라는 역사적 필연이 되고 말았다. 기원전 270년 무렵인 이 시기에 이르러, 로마는 북쪽으로는 루비콘 강에서 남쪽으로는 메시나 해협에 이르는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을 완성했다. 기원전 753년에 건국된 뒤부터 헤아리면, 무려 500년에 이르는 긴 세월이 걸린 사업이었다.

 

로마인 이야기 1권의 이야기는 대충 이렇다.



로마의 융성한 원인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의 융성한 원인을 보편적인 사람들이 찾듯이 정신적인 태도에서 찾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리비우스, 폴리비오스, 플루타르코스, 디오니시오스의 작품에 나타난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첫째, 로마가 융성한 원인을 정신적인 것에서 찾지 않은 세 사람의 태도다. 로마의 흥망성쇠는 건강한 정신의 소유 여부가 아니라 당사자들이 만들어 낸 제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 이들 세 사람은 기독교가 보급되기 이전에 태어났으니깐 당연한 일이지만 나도 기독교도가 아니라는 사실, 기독교가 아니면, 이전에 로마를 바라보던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자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이것 역시 프랑스 혁명을 모르고 죽은 세 사람한테는 당연한 것이나, 프랑스 혁명이 드높인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이념에 이 세 사람은 전혀 얽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념의 방해를 받지 않으니깐 현실을 직시하는 것도 그만큼 쉬워진다는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디오니시오스가 거론한 로마의 종교적인 자세,

폴리비오스가 지적한 정치체제,

플루타르코스가 말한 포용력

은 고대에서는 모두 이례적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으며 이것들은 로마인의 개방적인 성향을 반영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Epilogue...

로마인 이야기 1번째 작품을 마무리했다. 흥미진지한 순간들이었고 아직 이러한 시간을 14번이나 더 보낼 수 있다는 것이 굉장한 쾌락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로마인 이야기와 더불어 ‘로마인 이야기 길라잡이’-만2천원하더라...ㅠ-와 전질 사면 끼워주는 ‘시오노 나나미 20문 20답’을 동시다발적으로 읽으면서 참고하고 있다. 이 기회에 로마사를 한 번 뿌리뽑아 볼 작정이다. 하지만 과연 뿌리가 뽑힐까? 하하하...

 

시오노 나나미는 열정의 대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과 동일한 습관대로 아침 7시에 식사를 준비하여 하고 8시 30분부터 저녁 5시까지만 글을 썼다고 한다. 그것은 로마인의 보편적인 습관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타자기나 노트북으로 자판을 두들기며 글을 쓴 것이 아니라 만년필 한 자루를 가지고 ‘로마인 이야기’라는 ‘황금의 알’을 낳았다. 1년에 한 권씩, 총 15권을 매년 한 권씩, 그리고 15년 만에 출산한 것이다.

 

이제 칠십줄에 들어선 그녀에게 이러한 ‘로마, 로마인에 대한 열정’은 정말 배우고 싶다. 자신의 삶을 통째로 집어 삼킬만한 그 무엇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붙잡기 위해 로마로 건너가서 5년 동안 유학하다가 다시 돌아왔다가 다시 이탈리아로 가서 의사 남편과 결혼을 하면서 그녀는 로마에 눌러 앉은 것이다. 대단한 여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자, 이제 그만 하고 ‘한니발 전쟁’으로 출두할란다. ‘한니발과 스키피오’, '포에니 전쟁‘...생각만해도 가슴이 뛴다!!! 들리는가? 내 심장박동소리를...ㅋㅋ

 

Written By Karl21

 

P.S...퇴근하자마자 ‘로마인 이야기, 1권’을 정리할 요량으로 시작했던 작업이 저녁 9시가 다 되어서야 끝났다. 물론 자기 전에 한 번 더 수정했다. 몇 시간을 투자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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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니다스 2008-02-21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보고 갑니다. 요즘 드라마 '롬'을 보고 있는데요,, 로마에 대해 너무 궁금해 여기저기 찾다가 여기와서 많이 배워갑니다..^^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지음, 한성례 옮김 / 부엔리브로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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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와 결혼한 시오노 나나미
  나는 시오노 나나미가 왜 로마로 건너갔는지 안다. 그녀는 로마에 대한 최고의 열정가였다. 내가 대학 수업 때 ‘영국 희곡’ 전공의 여교수님은 ‘나는 세익스피어와 결혼했다’면서 평생 독신으로 지내고 있다. 그만큼 세익스피어에 대해선 남다른 무언가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내가 아는 그 교수님 말을 빌리자면 ‘로마와 결혼한 여인’인 것이다. 나는 아직 시오노 나나미의 평생 대작인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를 아직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글에 대한 느낌이 조금은 미온적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책, 이 텍스트에 대한 느낌을 솔직하게 적어보고 싶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인물들의 로마, 로마인
  시오노 나나미는 역사가 주는 흥미와 재미는 바로 ‘인간의 역사,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을 들고 있다. 그렇다. 특히 로마인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시오노 나나미가 그렇게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이야기했다고 하는 카이사르의 대목에서 나는 벅찬 감동을 잊을 수 없다.

  로마의 역사를 새롭게 재편하고 구성하기 위해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말하면서 루비콘 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던 카이사르! 위대한 혁명가의 면모를 보여 주었지만 로마인, 로마라는 특별한 도시는 ‘영웅이 필요치 않는 공화정의 나라’라는 장애물에 부딪혀 아쉽게 막을 내린다. 로마는 모든 개방과 개혁을 스스럼없이 감행하는 특이한 나라이자 도시이지만 로마의 로마됨은 ‘공화정에서 출발’하였다는 것을 저자는 지적해준다.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인이나 게르만인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지는 것이
로마인이라고, 로마인들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습니다.‘


  로마는 로마의 자화상을 이처럼 현실적으로 그렸기에 ‘공화정’이라는 정치적인 시스템으로 유지, 보수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영웅이 필요치 않은 나라였지만 영웅은 많았던 로마
  비록 로마인은 아니지만 처음으로 ‘보편제국’을 꿈꾸었지만 11년이란 아쉬운 세월의 흔적만을 남긴 위대한 카리스마의 인물- 알렉산드로스 대왕, 그리고 포에니전쟁의 젊은 주인공 한니발과 그의 부하였지만 나중에는 원수가 된 스키피오, 카이사르 보다 70년 먼저 로마의 개혁을 주장하다가 아쉬운 마무리를 한 그라쿠스 형제,  역사가 제대로 구현할 수 없었던 ‘보편제국, 로마’의 꿈을 ‘관용’의 이름으로 구현하려 했던 카이사르(율리우스 시저)와 카이사르의 미완의 꿈을 기민한 처세술로 ‘로마사상 최대의 연기자’로 분한 아우구스투스 등. 힘과 기백이 넘치는 인물들이 로마사를 수놓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자기 나름대로 로마의 불세출의 영웅들의 리스트를 만들고 그 인물들을 5가지로 분류하는데, 이를테면 지적 능력, 설득력, 육체적 내구력, 자기 제어 능력, 지속하려는 의지 이다. 이 5가지로 개인적인 성적표를 제출했는데 모두 면에서 만점인 영웅은 카이사르와 페리클레스 뿐이었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플루타크 영웅전’에서 나는 브루투스가 시저를 암살하는 장면에서의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너무 슬펐다. 그런데 여기서도 한 시대와 한 나라인 로마의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하면서 나아갔지만 그가 너무 앞서 갔던가? 친구인 브루투스도, 당대의 지성의 대가라고도 할 수 있는 키케로조차도 카이사르의 속내를 읽지 못했으니 말이다. 진정한 리더의 발목을 잡는 눈 먼 부하들과 주변인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존재하는구나! 그런데 브루투스에 대한 점수를 보면서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브루투스의 점수를 보라! 30, 20, 20, 15, 60

  아리스토텔레스는 삶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해석’이라고 했는데, 시오노 나나미의 해석에 나는 공감하며 호쾌, 상쾌, 유쾌, 통쾌해했다! 하하하

  영웅이 행복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면 여운은 덜할 것이다. 로마의 영웅들은 여운이 깊다. 그것은 그들이 로마를 지독히 사랑하고 염려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로마라는 나라는 바로 ‘공화정’이라는 정치적인 시스템을 가진 나라이다. 이 시스템은 ‘영웅을 필요치 않는 시스템’이고, 이러한 구조의 벽으로 인해 영웅들은 미완성인 채로 남겨지게 된다.





모든 길을 로마로 통한다
  로마는 자신들이 점령한 나라와 영토에 대해서 다소 완만한 정책을 썼다. 그것은 역사가 플루타르코스의 말처럼 ‘패자마저도 자신들에게 동화시킨다는 그들만의 정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로마연합’이라는 식민지에 대한 로마만의 스타일이었고 이것이 후에는 ‘팍스로마나’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로마는 네트워크로서의 도로망을 잘 건설함으로 말미암아 ‘로마연합’이라는 광대한 포괄정책을 잘 구현하기도 한 것이다. 로마사에 대해 막연했던 나에게 저자는 굉장한 통찰을 부여해주었다.

로마인의 개혁 이야기
  로마인의 이야기를 시오노 나나미는 ‘혁명’의 키워드의 관점에서 기술하고자 했다고 한다. 그녀는 로마의 혁명은 과거의 로마를 부정하는 차원이 아님을 밝혔다.
‘자칫하면 개혁이란 오래된 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내세우는 것이라고 생각되기 쉽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성공한 개혁은 자신들의 현재의 모습을 다시 들여다보고 그 속에서 유효한 것을 골라내어 그것이 최대한 효과를 거둘 수 있게 재구축해 나가는 작업이 아닐까’(289)
  ‘어제는 오늘의 결과이며 오늘은 내일의 거울이다’
  역사는 바로 그런 것이다. 로마인의 이야기는 오늘의 결과로서의 현실을 주목하게 되며, 오늘은 또 다른 오늘인 내일을 가름하는 시금석이 된다. 로마인의 이야기는 오늘날 여러 측면에서 나눠볼만한 유용한 어제의 오늘인 것이다.

로마인의 대가, 시오노 나나미의 유혹
  사람이 한 우물을 오랫동안 파면 그 분야에 대가가 될 수 있다는 말처럼 시오노 나나미는 나름대로의 로마사의 대가의 위치에 서 있는 듯하다. 대가가 쓴 로마사에 대해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를 읽고픈 충동을 굉장히 자극하고 도전한다. 조금만 기다려라! 물론 이것이 시오노 나나미가 1권의 책으로 자신의 15권의 시리즈 책을 읽게끔 꼬드기며 유혹하는 것이라고 해도 나는 미소를 감추지 않고 그 꾐에 넘어가고 싶은 충동이 일게끔 시오노 나나미는 글을 적고 있다. 그래서 부정적인 시각에서 보면 15권을 읽히기 위한 또 하나의 전략적인 masterpiece라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오히려 15권을 읽기 전에 이 한권으로 ‘로마, 로마인’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 Survey한 것에 굉장한 만족감을 누렸다.

디저트가 아닌 에피타이저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는 또 하나의 디저트라고 보기 보다는 내겐 하나의 에피타이저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맛은? 굉장히 좋다.  

Written By Karl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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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고백
이덕일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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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사건은 내게 엄청난 울분과 분노로 점철된다. ‘누가 왕을 죽였는가?’에서 보았던 조선왕조의 역사 가운데 제왕의 길을 타고난 사도세자의 비극...

아버지 영조의 ‘삼종의 혈맥’이라는 명분과 ‘경종독살설의 콤플렉스’...

영조는 그 콤플렉스를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벗어나기는커녕 자신의 외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꼴이 되버렸다. 영조는 오랜 세월 집권하여 탕평을 시도하려 했지만 ‘나주벽서사건’이후 그는 완전히 노론의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일종의 정신병적인 광기로 사도세자를 죽이게 만들었는데 이는 역시 영조의 complex였고 딜레마dilemma였다. 사회적으로 완전히 고립될 수 밖에 없었던 사도세자...그 옆에 혜경궁 홍씨라도 같이 했다면.

혜경궁 홍씨는 외척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남편을 죽음으로 몰았지만 정조만큼은 버리지 못한 것이 그녀의 딜레마였다. 사도세자가 일찍 즉위했더라면 조선의 방향은 많이 엇갈릴수 있었으리라. 제왕감이었던 그의 꿈은 북벌이었고 이는 물론 당시 조잡한 당파싸움의 정치판에서 시선을 뗄 수 있는 위대한 Kingwork였고 Keyword였다. 물론 조선은 당파와 당쟁의 나라이므로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정조 또한 제왕이었지만 결국 노론에 의해 독살 당한 혐의를 소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기품을 이어받아 참으로 빛나는 정치를 추구했지만 애석하게도 미완의 꿈일 뿐이었다.

조선의 파란만장한 역사는 정조 이후 순조부터 퇴색되어진다. 권력에 찌든 외척과 사대부들의 세도정치는 걷잡을 수 없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조선은 일제의 악어 같은 입에 삼키게 되고 만다.

영조...정조...그리고 그 가운데 사도세자...

참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동시에 많은 뒷담화를 남긴 3代이다.

사도세자의 원혼을 위로하고 싶다.

문(文)과 무(武)를 동시에 겸하였고 자신의 적성엔 무가 더 적합했던 사도세자...
정조는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외치고서 시작했던 개혁revolution의 역사...

아쉬운 조선의 역사이다.

그 수많은 당쟁과 당파싸움은 그 시대에 팽배했듯이 그 피를 이어받아 대한민국 정치판에서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 이 역겨운 정피와 권력의 역사여!

사도세자는 영웅이 될 수 있었는데...

Written By Karl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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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세계사 - 거꾸로읽는책 3 거꾸로 읽는 책 3
유시민 지음 / 푸른나무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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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왜 “거꾸로 읽는” 인가?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제목 그대로 거꾸로 읽는 세계사인가? 여기서 거꾸로는 내가 생각할 때 유시민이 이 책에서 14가지의 사건과 인물의 세계사 에피소드를 들추어내는데 그 취사선택한 것이 ‘거꾸로 읽는’ 관점이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억울하고 힘든, 다소 숨겨진 이야기Behind Story가 엿보인다. 

첩보와 혁명과 전쟁과 사건과 대공황과 사회주의를 발발케 했던 사건과 세계 대전과 억압과 울분과 눈물과 강대국과 약소국의 갈등과 대립과 인종차별과 역사왜곡과 힘의 논리 등....

그러기에 그의 책은 ‘거꾸로 읽는 세계사’인 것이다. 독자들은 그의 글을 대하면서 마치 예전에 알지 못했던 역사의 비밀단지의 뚜껑을 여는 호기심으로 가득차게 된다. 하지만 그 어둡고 유쾌하지 못한 역사의 면모들에 의도적으로 포커스를 두는 유시민의 관점 자체가 바로 ‘거꾸로’인 것이다. 

대학시절 학생운동으로 점철된 캠퍼스생활 속에서 그가 틈틈이 적었던 글이기에 더 그럴 것이다. 젊은 열정과 운동의 와중에 역사를 읽고 ‘거꾸로 읽는 역사’를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경제학도였지 역사학도는 아니었다. 꼭 그 분야에 전공을 해야 그 분야의 책을 쓸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곰브리치는 세계사 전공이 아니지만 세계사를 썼고, 슈바이츠는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했고, 수많은 위인들이 자신의 전공 이외의 분야를 연구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작품을 내놓지 않았는가?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정말 자기가 전공한 영역에서 수많은 업적을 남긴 사람도 많지만 반대로 자기의 전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연과 필연의 결과로 업적을 성취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는 것이다.

Ph. D는 예전에는 철학박사를 가리켰다(Doctor of Philosophy). 하지만 이제는 Ph. D란 말은 모든 박사에게 다 해당되는데 특히 Ph. D학위를 받은 사람은 다른 전공에 손을 대도 손색이 없을 만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학위인 것이다. 아무리 오늘날의 박사가 ‘파리 뒷다리만 연구해도 박사학위를 받는’ 시대이긴 하지만 ‘파리 뒷다리를 연구할 줄 아는 능력’이 아무에게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예술문화 뿐만 아니라 건축과 다른 분야에서도 팔방미인이 될 수 있는 것은 모든 학문과 지식은 갈구하는 자들에게 끊임없이 도전하고 자극하는 에너지원을 제공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부류의 책에 대해서 머라고 해야 할까? 참고도서도 없고 단지 몇 권의 책들을 아우르며 정리하여 출판하는 책 같은 느낌도 없지 않다. 그래도 이런 책이 나와서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읽힌다는 것은 뭔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야기 있는 책이다

세계사의 도서들을 찾다가 이 책도 읽게 되었는데, 이 책은 세계사의 전반적인 흐름이나 줄기를 보고자 하는 독자들은 피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세계사의 단편들을 모아 놓은 컬렉션 같은 것이다. 하지만 재미와 흥미는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 자주 찾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 책은 이야기가 있다. 요즘 문화는 전부 이야기가 있다. 광고CF조차 이야기가 있다. 뮤직비디오도 이야기가 있고 에피소드가 있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할머니에게 ‘재미난 이야기 해 주세요, 옛날 이야기 해 주세요’라고 칭얼댔다. 이런 기억은 인간이 원래부터 이야기를 좋아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런 인간의 습성에 대해 기대 부응하는 책이다.

나는 근래에 세계사에 대한 흥미로 말미암아 세계사의 책들을 섭렵하는 중에 있다. 그런데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는 애가 이야기하기를 세계사, 역사는 전체적인 흐름을 대하면 굉장히 흥미 있고 재미있지만 막상 그 구체적인 사건들, 디테일에 들어가면 머리가 아프고 복잡하다는 평을 했다. 그렇다. 역사는 사건이고 사실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건과 사고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에 의한 나름대로의 해석이 붙기 때문에 역사가 굴절될 수도 있고 왜곡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에 대한 년도까지 여러 가지 이론과 설이 존재하니 말이다. 하지만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전체적인 역사 조망은 힘들지만 부분적인 접근은 다소 지루하지 않고 흥미롭게 글을 엮어나간다는 것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유시민을 ‘얼치기 역사가’라고도 하고 정치가로서의 유시민에 대해서 정색을 하는 이들도 있다. 정치의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를 어떻게 평가할지는 잘 모르겠다. 역사를 쓴 작가로서의 판단도 보류하고 싶다.

다소의 독자들이 ‘자본주의를 혐오하고 사회주의를 은근히 찬양하는 이념적 편향성’을 지녔다며 노파심을 표현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소련 동유럽 사회주의체제 붕괴와 독일 통일>에 대한 글을 덧붙여서 개정판을 냈다. 20세기 인류역사에서 가지는 의미를 보여주고자 한 면도 있겠지만 자신의 다소 편중된 시각, 거꾸로 보는 역사관(?)을 다소 무마하기 위해 마지막 장(章)인 ‘20세기의 종언, 독일 통일. 통일된 나라 분열된 사회’라는 글이 추가한 것은 아닌지...바라보기 나름이겠다.

Epilogue...‘거꾸로 읽는’-‘신데렐라맨’의 제임스 브래독의 복싱 이야기

우리는 러셀 크로우와 르네 위젤거가 주연한 복싱영화, ‘신데렐라맨’을 감명 깊게 읽었다. 그 영화는 미국 대공황 시절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던 복서 제임스 브래독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의 ‘검은 이카루스, 말콤 X-번영의 뒷골목 할렘의 암울한 미래 ’장에서 보면

‘1937년 6월 ’갈색 폭격기‘ 조 루이스가 백인 제임스 브래독을 KO시키고 헤비급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쥐었을 때 모든 흑인은 기뻐 날뛰었다. 적어도 권투에 관한 한 이제 그 누구도 흑인이 ’열등하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라고 적고 있다.

우리는 관객의 입장에서 단순히 바라보았던 영화의 또 다른 측면을 들추어내는 ‘인종차별’의 문제. 단순한 복싱경기에서도 가난과 싸우며 복싱으로 일어서는 한 개인, 제임스 브래독(우리는 그가 흑인이건, 백인이건 그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영화가 그랬다.

하지만 조 루이스가 제임스 브래독을 Ko시킴으로 백인들에게 늘 짓눌려 차별대우 받는 흑인들의 아픔과 애환을 위로하고 승화시킴으로 오히려 ‘흑인들도 할 수 있다’는(단순한 복싱경기, 스포츠경기지만 우리는 그런 것에 꿈과 희망을 얻기도 하고 때론 절망과 좌절을 하기도 하지 않는가?) 꿈을 심어주는 관점도 있다는 것이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가 보여주는 ‘거꾸로’의 관점은 바로 이런 관점이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머리말 

드레퓌스사건-진실의 승리와 더불어 영원한 이름



피의 일요일-혁명과 전쟁의 시대가 열렸다



사라예보 사건-총알 하나가 세계를 불사르다



러시아 10월 혁명-세계를 뒤흔든 붉은 깃발



대공황-보이지 않는 손의 파산



대장정-중화인민공화국을 낳은 현대의 신화



아돌프 히틀러-벌거벗은 현대 자본주의의 얼굴

 

거부하는 팔레스타인-피와 눈물이 흐르는 수난의 땅



미완의 혁명 4.19-자유의 비결은 용기일 뿐이다



베트남 전쟁-골리앗을 구원한 현대의 다윗



검은 이카루스, 말콤 X-번영의 뒷골목 할렘의 암울한 미래

 

일본의 역사왜곡-일본제국주의 부활 행진곡


과 인간-해방된 자연의 힘이 인간을 역습하다



20세기의 종언, 독일 통일-통일된 나라 분열된 사회

 

 

그림과 같이 제 글에 대한 감상을 보시려면,

http://blog.naver.com/karl21/150023173575

로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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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현대사상
프란시스 A.쉐퍼 / 성광문화사 / 199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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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기독교신앙에 대한 철학적인 분석과 해부와 아울러 지적 체계를 세우는 초석을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신앙은 일종의 '비약a leap'라고 말했던 유신론적 실존주의자 죄렌 키에르케고르의 비약적인 관점은 받아들일만한 것이 아니다. 신앙은 말 그대로 합리적인 것이며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은 과장하거나 축약하는 것도 절대 아니다. 신앙은 말 그대로 실제적인 것이며 쉐퍼의 의견에 따르면 믿음은 견고한 철학적인 체계이며 절대 비합리성이나 불합리성이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은 돌팔이 의사나 사기꾼으로 모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기꾼이냐? 돌팔이 의사인가?

 

 그렇지 않다. 쉐퍼의 '기독교와 현대사상'이란 책은 쉐퍼가 당대의 문화사와 철학사를 아우르며 정리하면서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을 포함하면서 시대적인 철학적 조류와 사상을 분석하고 해석하면서 기독교적인 시각으로 비판하고 있다. 그의 기독교 철학적 해부는 너무나 날카롭고 견고해서 정말 나의 상처받은 감수성과 상처입은 기독교적인 허물허물한 철학관을 보수해주었다.

 

나는 당시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읽고 깊은 신앙적인 회의와 감정적인 혼돈을 경험했었다. 이문열에 이어 '경마장 가는 길'의 하일지 소설을 읽고서도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다. 갓고등학교 졸업한 내가 문학적인 여정을 통해 현대의 문화, 특히 성문화를 간접경험하는 것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요즈음은 매스미디어 자체가 굉장히 육감적이고 도발적이라서 웬만한 육체적인 '몸'문화에 대해서 청소년들도 익히 알고 있다. '사마리아'라는 영화에서 보면 여고생이 원조교제를 하지 않던가? 모든 청소년들이 다 그런것은 아니지만 내가 학창시절을 보낼 때보다 지금의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이 성적으로는 더 조숙한 것은 사실이다.

 

나는 무신론자가 쓴 소설을 읽고 깊은 신앙적인 혼란을 경험했더랬는데 프란시스 쉐퍼의 책을 통해 굉장히 위로를 받았다. 사람의 글이 이렇게 사람의 사상을 손보고 사람의 생각을 정립하게끔 하고 감정적인, 영혼의 상처까지도 치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다.

 

 조금 어렵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나는 대학1년 때 집으로 바로 오지 않고 도서관에서 사무엘 스텀프의 '서양철학사'를 붙들고 씨름했던 기억이 있다. 철학을 멋도 모르고 좋아해서 머리에 정리도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철학사를 붙들고 읽어댔다. 완독은 못했지만-완독을 못한 책들이 얼마나 많던가? ㅠㅠ- 후에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를 정복하고자 했지만 결국 내 서재에 꽂혀있기만 하다.

 

우린 철학을 생각할 때,

철학이란 것은 굉장이 동떨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일상의 잔재, 말 그대로 일상 그 자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철학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전유물이긴 했으나 그 철학의 사상적인 줄기는 지금 인류를 지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세계관은 20세기가 다 될 때까지 깨어지지 않는 하나의 견고한 사상적인 기둥이었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도 당연히 오류가 있기 마련이고 실수가 있지 않겠는가? 철학은 단순한 사상의 차원을 넘어 문화와 예술과 모든 삶의 영역에 스며들게 되었다.

 

프란시스 쉐퍼는 이 책을 통해 현대의 문화와 예술의 리트머스 가운데 번진 철학적인 오염들을 분석, 진단하고 있다. 모더니즘의 세계관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오면서 얼마나 많은 철학자들의 사상과 저작이 예술가들의 뇌를 뚫고 자극했는지는 이 책을 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현 시대의 현상들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프란시스 쉐퍼가 어떤 인물인지, 그가 만든 공동체 라브리가 어떤 공동체인지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대학 1년 시절의 겨울방학 때 난 쉐퍼를 만나면서 신앙적인 둥지를 다시 손보게 되었고 쇄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은 너무나 고맙고 정겹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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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6, 기억을 더듬으며 이 책에 대한 회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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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0-11-04 0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제가 요즘 신앙에 대한 고민이 많은데. 이책 한번 읽어봐야할 것 같아요.

카알벨루치 2020-11-04 08:54   좋아요 1 | URL
미국의 복음주의가 자유주의의 흐름에 밀려 표류하고 있을 때 프란시스 쉐퍼가 있었다는 말이 있죠 쉐퍼의 책은 그리스도인의 지성을 깨우는 그 무언가가 있습니다 이전책은 절판이고 쉐퍼 전집으로 나온 듯 한데 이 책은 기독교 철학이 마음에 위로를 주는 책이라 그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네요 본질을 제대로 알고 있으면 흔들릴 이유가 없지요 화이팅 han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