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심 이병욱의 두 번째 소설, K의 고개중에 가장 인상적인 단편 <수심 9미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두 주인공, 이대연 선생과 하 사장

   이야기는 현직 교사인 이대연과 운진읍의 허름한 횟집 주인인 하 사장이 등장한다. 스킨 스쿠버를 취미로 즐기는 이대연과 하 사장이 스쿠버에 필요한 꼼프레서가 매개가 되어 주말마다 두 사람은 같이 잠수를 하게 된다. 꼼프레서는 300만원 정도하는 가격이고 읍내에는 하 사장만이 가지고 있는 잠수에 필요한 도구였다. 공기통에 공기를 집어넣는 도구인 셈이다. 이대연에겐 잠수는 스포츠이지만, 하 사장에게 잠수는 생업이었다. 변두리에 허름한 횟집에 장사가 잘 될 리 없다. 그래서, 하 사장은 자기가 강에서 잡은 쏘가리를 다른 횟집에 넘겨주면서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스쿠버의 취미생활과 잠수라는 생업

   이대연과 하 사장은 이렇게 만나 각각 스쿠버를, 잠수를 시작한다. 이대연은 쏘가리를 잡지도 못한 반면, 하 사장은 쏘가리를 작살로 잡으면서도 죽이지 않고 15마리씩 잡아 올린다. 이대연에겐 스쿠버는 스포츠였고, 모처럼 꼼프레서가 있는 하 사장의 도움으로 잠수를 할 수 있게 되어 너무 감사한데, 이젠 쏘가리를 잡지 못하는 것이 기분이 안 좋은 것이다. 이대연은 가족들에게 쏘가리를 잡아 올 테니 매운탕 끓일 준비를 하라고 김칫국부터 마셨다. 하지만, 두 주에 걸쳐 허탕을 쳤다. 기분을 잡친 탓에 쏘가리 회를 먹고 가라는 하 사장의 아내의 제안을 뿌리친다. 이대연은 하 사장이 잡은 쏘가리 한 두 마리라도 자기에게 주면 가오가 설텐데 말이다. 이런 사정도 모르고 이대연의 아들은 아빠, 쏘가리는 어딨어?’라고 질문한다.

 

, 여기서 우리는 왜 하 사장이 쏘가리를 이대연에게 주지 않았는가? 라고 질문해보자. 하 사장은 부자가 아니다. 쏘가리 잡아 근근히 새활하는 그에겐 쏘가리는 금빛무늬의 지폐’(223p)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대연에게 쏘가리는 취미활동에 의해 생겨난 부산물에 불과한 것이다. 이대연은 그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쏘가리 사진 (사진출처: By Gaeho77 - 자작, CC BY-SA 4.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71392813)

 

만원짜리의 선물, 만원어치의 도리

   그리고 그는 꼼프레서를 사용할 수 있게 해준 하 사장에 대한 고마움의 도리를 매주 갈 때마다 만원 어치의 생필품 정도만의 선물로 퉁 친다. 나중에 하 사장과 잠수도 못 하게 되었을 때 그는 이 만원어치의 선물별 쓸데없는 습관’(249p)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대연은 하 사장과의 관계를 자신의 취미생활을 유지시켜주는 무엇thing에 지나지 않았다. 이대연도 양심이 있는지라 한 번씩 그런 생각을 한다. 자신이 하 사장과 스포츠만을 하는 단순한 관계를 너머 좀 더 사려 깊은 행동을 했더라면, 이를테면 쏘가리를 잡지 못해도 거기서 회를 시켜 먹고 회값을 지불하든지...단지 만원어치의 도리를 넘는 좀 더 인간적이고 친밀하고 배려하는 관계성이 필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들.

 

 

 

이대연 선생의 욕심과 그 변화

   쏘가리를 잡지 못하는 이대연에게 하 사장이 비밀을 하나 가르쳐준다.

 

이런 플래시를 구해서....바우 틈바구니들을 비춰 보드래요.”

 

이대연은 플래시를 주문해서 주말을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이대연도 쏘가리를 잡게 되었다. 이대연은 쏘가리 잡는 비밀을 하나 챙겼다. 이제 이대연에겐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작살로 쏘가리를 잡는데, 어떻게 죽이지 않고 산 채로 잡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쏘가리 잡는 일은 이젠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산 채로 비밀만 알아내면 된다.’라는. 아아 나의 무지몽매함이여.‘(248p)

 

하지만, 이대연은 그 비밀을 밝히지 못한다(물론 후에 우연히 알게 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왜냐하면 허 사장이 죽었기 때문이다.

 

 

 

 

전기배터리로 고기잡는 사건

   어릴 적 시골에서 종종 강가의 고기들을 잡기 위해 전기배터리를 사용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다. 그러면 고기들이 충격을 받아 허연 배를 드러내며 강물 위로 고기가 뜨게 된다. 그러면 바구니나 뜰 채로 고기를 거둬들이기만 하면 된다. 얼마나 쉬운가! 하지만, 그 전기배터리로 고기를 잡는 행위는 물고기의 생식력을 멸종시키는 사악한 짓이다. 우리 집안의 먼 친척인 한 분은 그렇게 고기를 잡다가 감전사하여 돌아가셨다. 위험한 행위이다. 소설 속에서도 전기배터리로 고기를 잡는 통에 고기의 생식력이 멸종되었다며 혀를 차는 사건이 발생한다. ‘전기배터리사건 이후로 허사장의 쏘가리 잡기는 주춤한다. 생계가 위협을 받게 된다.

하지만, 하 사장의 이런 궁핍한 처지에 대해 이대연은 별 상관하지 않는다. 그에게 하 사장은 모르는 사람들인 셈이다.

    

내 입장을 속으로 정리했다. 강이 망가져 하 사장이 그리 되었다 해도 나는 상관없다. 쏘가리들을 구경하기 힘들게 되었다 해도 나는 그냥 스쿠버 하는 재미로 강물에 들어가면 되는 것이다.’(236p)

인간이 얼마나 간사한가! 스쿠버만 하면 된다고 했다가 쏘가리를 잡는 걸 보고 쏘가리를 잡고 싶어했던 이대연, 그런데, 쏘가리 씨가 마른 것처럼 보이니 다시 자기 취미생활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런 심리! 문학이 위대한 것은 우리에게 뭔가를 가르치기 보다는 우리를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은 인간을 보여준다.

 

 

 

 

우째 한 놈도 없지?

   하 사장은 이번에 물거품이 심하게 이는 뻥대 강의 바위 쪽으로 가자고 한다. 그곳은 종종 사람들이 급류에 휘말려 죽기도 하는 위험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이대연은 어린 아이 만한 쏘가리를 잡고야 만다. 전기배터리 때문에 멸종되다 싶이 한 쏘가리가 어찌 거기에 있었단 말인가!....시간이 흘렀다. 운진읍의 그 강에는 이제 소수력 댐이 생겨 생태계가 완전히 파괴되고 만다. 댐에 사용된 시멘트가 강의 생태계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하 사장에게 이제 생계는 절망적인 위기에 놓였다.

 

우째 한 놈도 없지?”

 

   하 사장의 이 말은 그의 아뜩한 미래에 대한 절망적인 발언으로 보인다. 시간이 지나 운진읍에 마이카 바람이 불 때 하 사장도 검정색 새 지프차를 샀다. 도저히 감당 안 되는 시츄에이션인데...쏘가리를 잡아서 할부금 내기도 벅찬 그 새 차를 샀단 말인가! 하 사장의 죽음을 그의 아내로부터 소식을 전해 듣고 부조금을 들고 하 사장 아내를 찾는 이대연, 그러면서 하사장은 지프차 할부금과 빚으로 인해 신용불량자가 된다.

이대연은 문득 하 사장의 죽음이 자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사장은 이전에 월남전이 어땠느냐?’고 묻자, 허허 웃더니 사람 사는 게 다 그렇고 그런 거죠. 전쟁터나 여기나 다 같드래요.’답한 적이 있었다(253p).

 하 사장은 잠수의 달인이었고, 강에 익사한 사체를 건질때 경찰들이 항상 찾는 잠수부 출신이었는데, 그가 소주 한병 마시고 강에서, 수심 9미터에서 죽었다는 것은 자살로 설명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 사장은 그 전쟁터에서 결국 낙오하고 만 것이다...

 

 

하 사장의 몰락에 대한 이대연의 책임

   이대연은 하 사장이 죽은 이후에 자신의 만원어치 도리를 넘어선 그 무언가가 필요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 사장의 몰각에 자신도 한몫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종종 우리 마음의 마지노선을 정하고 그것을 인간에 대한, 사람에 대한 도리라고 치부하고 있지는 않은가! 뭐 그런 생각을 해본다.

 

 

 

 

수심 9미터 같은 깊은 삶의 바닥으로 내려앉다

   이대연이 하 사장의 죽음에 대한 애도를 표하기 위해 그의 아내를 만난다. 그 꼼프레서를 가져가기 위한 것도 있었다. 이전에는 쏘가리로 가득했던 수조는 텅 비어 있었고, 텅 빈 수조 안에는 걸레뭉치와 작은 방비들이 어색하게 채워져 있었다. 더군다나 하 사장의 아내는 가슴 골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부담스러운 옷차림으로 이대연을 맞았다.

 

너무 고마워요. 방에서 쉬다가 가드래요.”(256p)

 

쏘가리의 멸종, 남편의 죽음, 그리고 남겨진 하 사장의 아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뇌쇄적인 기운은 수심 9미터에 깊은 삶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기운이었다. 이 대목이 <수심 9미터>, 이 소설의 백미이다.

 

 

이 단편소설을 읽으면서 우연히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 요나에 대한 이야기와 오버랩된다.

 

 

 

 

요나의 수심 깊은 곳의 물고기 뱃속

   요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져버리고 자신의 소명의 목적지인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게 된다. 그는 거기서 풍랑을 만나게 되고 배가 난파되기 일보직전의 상황에서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말한다. 이 모든 풍랑과 폭풍우의 책임에는 자신의 여호와에 대한 불순종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가 바다에 뛰어들자, 풍랑은 잔잔해진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삼키워지게 된다. 요나는 수심 깊은 그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의 기도를 한다. 삼일 동안 그 물고기 뱃속에서 사투의 기도를 통해 그는 바닷가로 토해지게 되는 기적의 주인공이 된다. 그는 그토록 싫어했던 니느웨를 향해,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식민지생활을 할 때 일본을 싫어했듯이, 여호와의 미션을 감당한다. 그런데, 요나는 자신의 설교에 회개하고 돌아오는 니느웨의 모습이 정말 꼴불견의 꼬락서니(?)로 보였다. 그만큼 싫었던 것이다.

 

    

 요나와 큰 물고기(사진출처: Fruitfulife)

 

 

 

더 수심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요나

   선지자 요나는 선지자답지 않게 니느웨가 얼마나 잘 되나 보자 싶어 집을 짓었는데, 거기에 여호와께서 박넝쿨로 멋지게 그늘을 만들어주어 다행히 시원하게 보낼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 지방의 박넝쿨은 30-40cm까지 자라기도 하고 그늘에 유용하지만, 벌레에 약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늘에서 시원함을 느끼는 요나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벌레를 보내셔서 박넝쿨을 다 없애버려, 요나에게 시원함의 그늘을 삭제시켜버렸다. 그랬더니 요나가 완전 불평 불만자가 되어버렸다. 이젠 살기보다는 죽고 싶다고 푸념을 한다. 여호와의 니느웨 인들을 향한 사랑이 지독히도 싫었던 이단아같은 선지자 요나의 이야기이다. 이런 모습 때문에 함량미달의 선지자가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한다.

 

 

 

살기 위한 몸부림과 죽기 위한 몸부림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있을 때는 살고자 기도하면서 사투를 벌였다. 그래서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팔레스타인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사라져버린 그늘로 인해 죽고 싶다고 불평과 불만을 토해내고 있다. ! 이것이 인생이 아닌가!

우리는 죽을 것만 같은 삶의 전쟁터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친다. 큰 위기와 나를 압도하는 절망과 아픔과 상처 앞에서 살고자 고군분투한다. 그래서 살아남는다. 하지만, 아주 사소하고도 지엽적이고 하찮은 일들에 때때로 목숨을 건다. 그러면서 죽고 싶다고 한다. 요나와 똑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게 인간이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요나 4:3, 8)

 

거대한 대의명분과 위대한 슬로건에는 살기 위해 몸을 불사르지만, ‘잎새에 이는 바람과 같은 사소한 말의 칼날과 내 삶의 자잘한 먼지들로 인해 우리는 울분을 토하며 죽고 싶어한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 인생인가!

 

    

 

 

 

과연 이대연은 안전한가?

   자주 이대연은 하 사장과의 관계에 대해 자가 진단을 하지만 별다른 진전이나 발전적인 관계는 보이지 않았고, 결국 하 사장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과연 이대연은 안전한가?

이대연은 보이지 않는 수심 9미터에 가라앉아 있진 않은가! 무더위를 식혀줄 그늘이 사라졌다고 투덜대는 함량미달의 선지자 요나! 요나는 일상의 사소함 가운데 수심 9미터로 가라앉아 가는 중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안전한가?

 

 

 

    

 

 

 

 

 

 

 

 

 

 

*이 책 K의 고개는 이웃이신 무심 이병욱님께서 친히 보내주신 책입니다. 좋은 단편소설집을 읽게 해주셔서 너무 감사할 따름입니다. 특히, 이발소이야기를 다룬 <이발 유정>도 특이하고, 7개의 단편이 모두 재미있었고 특별히 변두리 이야기라서 더 정겨웠습니다. 작가님의 자전적인 이야기도 스며들어 있다고 봅니다. 무엇보다도 무심 이병욱님은 소설이 읽히지 않는 시대이니깐 자신은 계속 더 소설을 쓴다고 하는 사명의식이 더 대단해 보였습니다. 작가님, 더 많은 글을 우리에게 소개해주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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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2 0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oren 2019-02-12 1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쏘가리 이야기 재미있네요. 제가 어릴 때 봤던 풍경도 떠오르고요.

아주 옛날이었는데, 아마도 60년대말이나 70년대 초쯤이었을 껍니다. 말도 ‘버버버버‘ 거리는 ‘버버리 아저씨‘가 우리 마을 인근 어디에서 살았는데요, 그 사람은 꼭 우리 마을에서도 제일 수심이 깊은 쏘에서 쏘가리를 잡았더랬지요. 장착한 장비라고는 오로지 물안경과 작살 밖에 없었고요. 황금빛이 번쩍거리는 팔뚝만 한 쏘가리를 잡아 올릴 때마다 물 위로 튀어나와 우리들에게 자랑하곤 했더랬지요. 쏘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신작로 한켠에서 멀찌감치 구경하던 우리 꼬맹이들 한테요. 그런데, 그 쏘는 워낙 물살이 사납게 휘돌아 나가는 곳이라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할 것 없이 ‘접근 금지 구역‘에 가까웠지요. 아마도 그 때문에 그 버버리 아저씨가 그 쏘를 독점하다시피 하면서 쏘가리를 많이 잡았던 것 같아요. 물론 그 아저씨는 그게 직업이자 생업이었을 듯하고요. 한 철이 언제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시즌 때는 그 쏘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으니까요. 그런데 나중에 차츰 자라고 어른에 가까워 지니까 그 쏘에 얽힌 슬픈 비밀을 듣게 되더라고요.(아마도 우리집에서 함께 살았던 막내고모한테서 들은 얘기일 껍니다.) 앞집 순옥이 바로 위에 언니하고 저 아래 사는 양계할배네 맨 큰 딸하고 둘이서 멱을 감다가 그 쏘에 함께 빠져 죽었다고요.

카알벨루치 2019-02-12 19:22   좋아요 0 | URL
옛날에 그런 비극적인 일과 사건이 많았죠 이 소설은 그런 옛날의 기억과 추억을 소환해주는 듯해 너무 좋더군요 많이 알려진 작가와는 다른 느낌이~ 지금은 우리가 너무 문명화가 되어 숨 쉴 겨를도 없이 살아가는 듯 합니다 강에 얽힌 사연이 어릴 적 많았는데 사건 사고가 줄어든 건 다행인데 추억을 소환하는데는 너무 큰 변화가 발목을 잡기도 하네요 독일이나 유럽 은 몇십년이 지나도 그대로인 일관성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너무 급변해서 문화의 정통성이 많이 떨어지는 건 사실입니다 김정운교수 이야기입니다 긴 댓글 감사합니다 오렌님~

무심이병욱 2019-02-12 2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심 이병욱입니다. 카알벨루치 님의 리뷰를 읽으면서 제가 쓴 ‘수심 9미터‘ 이상의 글이 재창조됐음을 목격했습니다. 님의 리뷰는 작가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까지 낱낱이 들어올렸습니다. 성경의 내용까지 원용될 줄이야!
소설책이 안 팔리는 시대이므로 소설을 쓴다고 천명했지만 가슴 한켠으로 스며드는 쓸쓸함까지 붙잡기는 어려웠는데 -----카알벨루치 님의 리뷰를 읽으면서 용기를 얻었습니다. 제 머리 속에는 아직도 소설로 써서 발표해 달라‘는 소재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잠시 쉬고 다시 집필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렵니다. 어느 대작가가 말한 황홀한 감옥 속으로.

카알벨루치 2019-02-12 20:08   좋아요 0 | URL
응원합니다 별 소용없는 저의 비천한 안목입니다 용기가 되셨다면 전 너무나 감사할 따름입니다 텍스트는 언제든지 살아숨쉴 것이기에 주욱 계속 쓰시면 되겠습니다 응원합니다^^

“남들로 하여금 말하게 내버려두어라 그리고 너는 너의 길을 걸으라” -단테 <신곡>중에서

카알벨루치 2019-02-13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가적인 부연설명을 붙이자면, 여호와 하나님은 왜 요나의 박넝쿨의 그늘을 삭제시켰는가? 인간의 사소한 즐거움과 위로를 방해하는 처사를 즐기는 사디스트 하나님인가? 그런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요나서 4장 끄트머리에선,

“4: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 하는 자가 십이만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사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나의 니느웨에 대한 편견을 지적하며 요나의 마음을 돌아보게하기 위해 이런 깨달음을 주시고자 하는 의도가 들어있지만 요나는 여전히 뿔난 망아지 모양으로 있는 채 요나서의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내용의 오해가 있을까봐 추가설명을 올립니다

오늘도 모든 분들 행복하소서 🙏

단발머리 2019-02-13 09:26   좋아요 1 | URL
요나서가 하나님의 질문으로 끝난다는 게 특별하기는 해요. 요나가 또 고집쟁이 답을 할 것이 하도 확실해서 그러신걸까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결국 요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끝까지 헤아리지 못할것 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카알벨루치님도 좋은 하루 되시어요~~

단발머리 2019-02-13 0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내면을 보여주는 문학의 힘이 느껴지는 소설이네요. 이기적인 이대연의 마음이 저의 마음인 적도 많았구요.
그 와중에 요나 이야기가 반갑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카알벨루치 2019-02-13 09:07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열독중이시죠?
문학은 정말 수 많는 창window을 통해 인간의 관점과 시각을 도발하고 도전하고 위로하고 분노케하고 들었다놨다 하는 듯 합니다 이 리뷰땜에 작가님하고 통화도 했답니다 ㅎㅎ 요나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의 내면을 들추어내게 하는 또 다른 창입니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