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중지] 선택을 선택하지 않는 방법도 있다는데요?

어제는 정희진처럼 쓰기의 대미를 장식하는 5권 <새로운 언어를 위해 쓴다>를 재독했다. 작년에 읽을 때는 ‘공부’에 대한 의미를 재의미화하는 부분에 꽂혀서 읽었는 데, 이번에는 논쟁의 구도나 지식의 전제 같은 부분들이 눈에 더 많이 들어왔다. 차피 또 읽을 거라서 독후감을 쓸까 말까 하다가 이번에 읽으면서 가장 눈에 들어온 부분을 좀 적어두고자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선생님이 줄곧 주장해오신 여성혐오라는 단어를 미소지니misogyny로 바꿔 부를 데에 대한 요청인데… 지금까지 난 이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고. 여전히 “그건 미소지니예욧!!!”라는 말로는 저들의 말(과 행동)을 무력화시킬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으잉~? 지니??🧞‍♂️ 소원을 말해봐??! 할 것이 뻔함. 그에 비하면 “그건 여성혐오예욧!!!” 가해자가 되길 꺼려 하는 세상에서 거북함과 거부감을 끼얹는 공격의 언어로 매섭고 날카롭지 않나? 어차피 말로 상처주는 세상. 나도 니들을 상처주고 싶은 데 말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여혐/남혐의 이항대립 구도를 강화시켜서 더 중요한 다른 문제를 은폐하게 돼버리는 현실에 대한 지적은 중요하다. 용어를 바꿔쓰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번에 내 눈에 *쎄게* 읽힌 부분은 바로 이 문장들이었다. 


-(180) (특히 20, 30대를 중심으로) 사안에 따라 젠더 문제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데, 모두 ‘여혐, 남혐’으로 몰고 간다. 남성은 남성대로, 여성은 여성대로 서로 “말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나 역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매일 놀란다. 일단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젠더 갈등, 젠더 전쟁으로 미화되고 있다. 


-(183) 검찰 문제를 다루는데 왜 배우자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들먹이며 비난하거나 반대로 개방적인 척 하는가. 윤 씨 측의 물타기인가, 진보 진영의 무지인가. 어쨌든 결과적으로 검찰 문제는 은폐되었다. 위 두 가지 사안은 복잡한 현실을 젠더로 은폐하거나 젠더 문제처럼 보이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젠더만 동원된 것이다.


특히 나의 어떤 부분을 긁은 것 같은 문장. 


-(236) 이제까지 여성주의자들은 사회 구조로서 젠더를 가시화하는 데 주력해왔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나 노동 시장의 성차별, 성별 분업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젠더는 동시에 다른 사회적 문제를 은폐하는 데 동원되기도 한다.* 김건희 씨 사건의 경우 젠더는 본질적인 문제(검찰 개혁)를 은폐하는 데 효과적으로 작동했다. 더구나 내가 가장 좌절한 점은 김건희 씨가 여성성이라는 자원을 활용한 점을 비판한 페미니스트도 없었고, 이를 문제 삼은 내가 여성주의자들로부터 ‘여성 혐오’라고 비난을 받은 사실이다. 이는 현재 한국 여성주의의 일면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매우 우려스럽다. 김건희 씨는 억울하다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여론은 그를 도왔다. ‘회원 유지(Yuji)’와 ‘쥴리’는 비판이든 조롱이든 냉소든 그 자체로 윤 씨를 삭제하고 문제의 성격을 이동시켰다.


지역 감정과 분단 현실을 이용한 (하, 슬프게도 한국 사회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것일까) 선동 정치는 신자유주의의 직격탄(노동시장 자체에 진입 어려움 ㅠㅠ)을 맞은 2030세대가 헬조선/흙수저 담론으로 본인들의 위치성을 자각하는 것 보다 여혐/남혐 대결을 조장하는 것이 통치에 더 유리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습득했을지도 모르겠다. 젠더를 정치에 활용하는 것, 그게 얼마나 위력적인지는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정치를 보면 안다(오스트레일리아의 여성 정치인 줄리아 길라드와 관련한 여성 영화(트랙백 참고)를 본 적이 있는 데, 정말 정말 속상했다). 1세계들의 민주주의도 젠더가 정치의 최종 심급이 되어버린 현실. (희망적으로 보아야 하나? 미국 페미니즘 책 보면 뭔가 희망이  꿈틀 느껴지기도...) 


그런데 한국은. 논쟁의 구도가 여혐/남혐으로 정리돼버리면 백전백패다. 왜냐면 남자도 여자 미워하고 여자도 여자 미워하거든. 심지어 여성주의자도 여자 미워함. 이러다 젠더(성역할 고정관념)를 문제화 하는 데 주력해온 여성주의적 성과마저도 다 무너지는 꼴이 날 지도 모르겠다. 한 줌의 빨갱이를 골라내려다가 후퇴한 민주주의가 얼마인가. 한국은 보수/진보 였던 적이 없다. 레드 콤플렉스와 지역감정을 이용한 정치였지. 언제나.  


논의를 이항 대립으로 끌어서 획득할 수 있는 최대치의 정치는 대단하게도 윤석열 정부를 탄생시켰다.  됐고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점점 더 유효해질 것 같다. 마치 종북논란처럼 논의를 산으로 끌고 가는 데 여혐/남혐 이라는 정치적 선동 구도는 말이다.


- 이러한 신자유주의 시대의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가부장제의 일시적 패퇴*다. 물론 성차별은 여전하지만 그 작동 방식이 바뀌었다. 역사상 가부장제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경제 패러다임은 없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계급과 젠더 질서를 가시적으로 변화시켰는데, 이 가시성이 지나치게 과잉 재현되어 ‘남성 역차별’이라는 난센스를 낳았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보다 남성과 남성의 차이, 여성과 여성의 차이가 커졌을 뿐인데, ‘흙수저 남성의 군 입대 vs 중산층 여성의 사회 진출’로 왜곡되었다. 이 왜곡은 이대남 현상, 페미니즘의 대중화, 현실 정치에서 젠더 이슈의 비중이 높아진 점(정치 지도자들의 성범죄와 남성 유권자의 분노) 등으로 드러났다.


사실 이는 *여성의 지위 향상이 아니라 생계 부양자로서 남성, 가사노동자로서 여성이라는 기존의 가족 이데올로기가 실업의 만연화로 남녀 모두 더 이상 실현 불가능해짐으로써 나타난 현상*이다. 저출산, 비혼, 1인 가구의 등장, 남성의 계급분화의 가속화는 실업에 대한 대응이자 현실이다. 취업과 결혼이 동시에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본주의는 여성에게 가족 내 성 역할이 아닌 사회적 개인으로서의 지위를 부분적으로 부여했다. 게다가 신자유주의의 기술 발전의 산물인 1인 매체, SNS는 여성과 사회적 약자가 남성과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가 되었다. 여성은 더 이상 참지 않는다. 비록 여성 노동시장의 질은 100위권 밖이나, 한국 여성의 높은 교육 수준은 여성주의 언어에 대한 접근성을 높였다. 남성 지배 문화에서 여성과 사회적 약자의 개인화는 신자유주의 가장 원치 않은 결과이다.  (릿터, 31호 <정희진 ‘모두가 작가인 시대’를 사는 법-신자유주의 시대의 자아와 글쓰기>)


나는 똑똑하다. 얼마나 똑똑하냐면. 취업과 결혼이 동시에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다. (ㅋㅋㅋ) 사회에서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넘나 기력과 체력이 없으므로 반려묘 돌봄 + 자기 돌봄도 간당간당한 처지에, 돌봄을 동거인 남성 및 낳게 될지도 모르는 자식에게 제공할 여력이… 그래… 나는 없다… 나는 내게 그런 대단한 에너지와 사랑이 없다는 것을 슬프지만 인정해야했던 것이다.


여성의 개인화는 신자유주의의 가장 원치 않는 결과이긴 했겠지만… 내가 신자유주의 덕분에 암튼 저임금이나마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나는 아주 좋고… 하하하하하!!! 성역할 때문에 왠지 해야할 것만 같은 돌봄 안 하는 대신 자기 돌봄에 매진하며 책 읽고 독후감 쓸 수 있는 것도 정말 좋은 데… (ㅋㅋㅋ 내 자랑 그만하고)


남성vs남성의 차이, 여성vs여성의 차이가 / 남성vs여성의 차이보다 더 커졌다는 지적이 맞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가시화라기 보다는 내 현실에서... 사회의 노동력이 되어야 하는 진입 단계에서랄까. 어쨌든 IMF이후 이젠 일하지 않는 여성은 거의 없다. 전문직 종사자가 아니라면 나보다 윗 세대 여성 대부분은 돌봄과 관계된 저임금의 일자리와 자영업을 할테고, 그녀들은 나에게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나와 동생들(여남 둘 다 해당된다)이 사회 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의 대부분은 또래 여성/남성들과의 불화가 아니었다. 이미 기득권이 되어있는 윗 세대 (가부장)남성 집단의 빻음—무능력, 일대신 정치, 각종  허세, 눈치 없음, 갑질, 행패, 멸시, 희롱, 추행, 성 역할 강제 및 저임금 강요(이중 노동) 등등—이다. 나는 삼진그룹영어토익반 영화를 보다가 엉엉 운적이 있었는 데... 존경할만한 남자 어른을 만나는 것이 로맨스보다 더 심각한 판타지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 뭐 그래 이것도 흙흙수저 우리 가족 기준 일반화다. 내 친구들은 여자 상사 비위 맞추는 게 더 힘들다고 했다. 나도 그런적 있고. 직군과 직종마다 또 다를테지. 여초회사에서는 여성들 간의 문제가 더 도드라질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생각했었다. 젠더 보다 계급보다 지역에 대해. 흙수저 그리고 지방수저가 있다고. 월급 180을 받던 지방 출신 나는 월세로만 50만 원을 냈다. 같은 월급을 받던 동료는 집에서 다니면서 시드머니를 모았을 수도 있겠다. 우리는 다르다. 다르더라. 나는 쪼잔해지지 않기 위해서 퇴근 후에 치맥이라도 한잔 할라치면 기꺼이 반띵을 했지만, 옷 좀 사 입으라면서 상사한테 은근 비교 당할 때는 정말 화딱지가 났다. ㅋㅋㅋㅋㅋㅋ (옷 안사고 치킨 먹고 맥주 마시는 게 더 중요햇!!) 


직장 동료와 나는 다른 옷차림을 하고 있긴 했지만, 일자리 자체가 없는 현실에서, 이직으로 경력 물타기하면서 버텨야하는 사회 초년생의 처지는 많이 다르진 않았다. 다 흙수저였고 나는 좀더 흙흙이었다는 소리. 그런 우리에게 일도 주(떠넘기)고 모욕도 주는 상사/대표 들은 대부분 남자였다. (권력에 도취되어 눈치없이 쩝쩝대는 생긴것 포함 한남스러움의 표본이 바로 *선출*된 현 대통령이시다.) 무슨 말이냐면. 나의 남혐에는 근거가 있다!!!!!는 소리다. 물론 이것도 생물학적 남성이라기보단 개인적 인격과 그 위치가 근거란걸 인정해. 그리고 일반화/유형화 할 수 있을만큼 그런식으로 사회화된 인간들이 득시글 거리지.  


그런데 동년배 또래의 남성들에겐? … 곰곰 생각해 봤다. 인터넷에서 여성 혐오하는 이상한 놈(이 치들의 포르노에 쩐 뇌에 대해서는 내가 그 머릿속에 들어가 보지 않아서 모르겠으나 포르노는 너무도 너무도 대중화 되어서  다 똑같다. 정도의 차이지만 관대하게 패스하겠다.)들 말고, 일상에서. 남자들. 어떤 종류의 대화를 하면 너무도 역지사지가 안되는 데다가 맨스플레인을 일삼지만, 나는 말을 잘해서 내 앞에서는 차마 맨스플레인을 하지 못하지 니들. 그래. 너희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나는 모른다. 


생각해보면 젠더 갈등은 남친이랑 했고, 동료 남자들과는 그냥 담배나 노나 피면서 윗사람들 욕하기 바빴다. 그러니까. 신자유주의 직격탄을 맞은. 취업 시장에서는 경쟁했었어야하며, 결혼 시장에서는 아마도 미리 탈락된. 나와 비슷한 계층의 또래의 남성들에게. 인간적으로는 애잔한 마음이 든다.…  (근데 그걸 포르노로 풀고 여혐으로 풀면 안되지 않을까? 하, 됐다. 입아픔) 


어쩌면 정말은. 또래 남성들에게 느낀 남혐의 근거는. 관습적 이성애 사회에서 친밀한 관계의 실패 경험일테다. 성적 대상화, 평가. 질 나쁜 연애. 질 나쁜 섹스. 혹은 실패한 연애. 위험했던 섹스. 몰 이해. 소통 실패. 사회생활 속 이중의 억압에 대한 하소연에 돌아오는 맨스플레인. 그들과 비슷한 몸을 한, 좀처럼 성찰하지 않는 종족 일반에 대한. 그리고 인터넷 덕에 드러난 그들의 저열한 문화와 서열질, 속내. 뭐 그런 것들.을 깨치고 나면. 로맨스는 불가능하다. 취할 것이 없는 걸리적/징징 거리는 집단. 나에게 남성은 그런 종족으로 타자화되어 버렸을 지도.


그리고 어떤 집단을 타자화하는 건 여남 불문 빌어먹을 인간의 속성이기도 하다. 

“(182) 문명은 여성의 타자화로부터 시작되었다. 남성을 인간의 대표로 만들기 위해 다른 인간은 배제되어야 했다 겉보기에 남성과 다른 존재, 타자(the others)가 필요했고 ‘바로 옆에 있는’ 대상인 여성이 가장 적합했다. 백인과 유색인종,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가 대칭을 이루지 않는 것 처럼 남성과 여성도 대칭적이지 않다. 단지 가부장제가 인간을 남녀로 구분했기 때문에 여성이 인구의 반이라는 현실이 만들어졌을 뿐이다. 타자 중에서 가장 큰 집단이기에 대칭적으로 보이기 쉽다.”

- 정희진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에 펼쳐진 성애화된 여성성의 이미지(포르노)를 볼 때마다 눈을 질끈 감게 되는 것은 논외로 치자. 이 책이 알려주는 바에 따르면 모든 걸 환원주의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선후차의 문제가 아니다. 젠더가 뒤에 오는 문제도 아니지만(해일 오는 데 조개 줍는) 맨 앞에 항상 위치해야 하는 문제도 아니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이미 완전 승리해버린 한국 사회에서 젠더 가시화가 아니라 젠더가 다른 사회적 문제를 은폐하는데 동원되는 방식으로도 쓰인다는 지적은 건조하게 놓고 생각하면 정말 소름끼친다. 마치 지역 감정과 레드 콤플렉스처럼 사람을 재빨리 아메바로 만들어 버리는. 


언젠가 가까이에 있는 대상을 다른 존재로 규정하고 배제하고 싶은 감각(감정)에 대해서 쓴 적이 있다. 

(https://blog.naver.com/jyanggrim/223134792973- 작가라는 문제, 대상화의 문제, 유대인 문제 /  


미세하게 추적해 보면 출발은 위기 앞에서의 자기 보호이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지배와 통제가 목적이기도 할테지만 조금 더 원초적인 것은 방어- 아닐까. 


자신을 보호하지 않으면 잡아먹히는 시절이다. 사실 나는 그것에 거의 완벽히 지쳐버렸다. 살아남은 것은 그것대로 장한 일이지만, 타인에게 가혹해지는 순간들은 낯설었다. 스스로에게. 그리고 이내 익숙해져야 했다. 매번 나를 낯설게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내가 나와 타인에게 미세하게나마 관대해지기로 한 것은 어찌저찌 살아 남은 후에 고독을 구축할 수 있게 된 후 부터다. 그 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셀프 마취(대체로 취해 있었음).


힘듦과 불안의 이유를 내 안에서가 아니라 나의 외부에서 찾는 것. 가까이 있는 미운 타인에게서 찾기는 참말로 쉬운 일이라, 일찍/이찍을 서로 비난하는 정치만큼이나 여혐/남혐은 심해질 것 같다. 정희진의 지적대로 *신자유주의 덕분에 정말로 젠더가 가시화*되어버린 것이다. 경쟁에서 탈락된 젊은 남성들의 열등감 폭발은 내가 어떻게 해줄 수가 없는 노릇이고. 그들이 자신들의 불만을 가장 쉬운 약자를 혐오하는 방법으로 찾고 있는 것도 너무 짜증스러운 일이지만. 논의를 자꾸 여남 대결로 몰고 가는 것에 대해서는 예리하게 보아야 할 것 같다. 


얼마 전 위근우의 인스타그램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위근우 인스타그램 @plusratioquamvis99)


갈등 자체를 문제시 하는 프레임. 페미니즘 때문에 역차별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이대남. 허어... 어렵다. 어려운 줄은 알았지만, 너무 어렵네. (한숨 폭폭~😮‍💨) 


무언가로 스스로를 정체화하는 것은 언제나 조심스럽지만, 나는 페미니즘에서 나의 언어 찾고 공부하는 여성주의자다. 다만 내 여성주의적 언어 생산(?)이 현실에서 여혐/남혐의 구도를 부채질해 중요한 다른 문제들을 덮어버리는 데 사용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어떤 언어를 입장을 가져야 하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을 더 해야한다는 것, 더 면밀히 보아야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동안은 머뭇머뭇했지만, 또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에 따라서 달라지긴 하겠지만 앞으로는 여성 혐오라는 표현보다는 미소지니라는 용어를 더 자주 써야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맘을 좀 고쳐먹었다는 소리다. 하지만 역시 입에 착 달라 붙진 않네.



어쨌든 복잡한 현실이다. 

생각하자 생각하자 생각을 하자.

공부하자 공부하자 공부를 하자.


왜?


생각 안 하고 공부 안 하면 영원히 일찍/이찍으로만 싸워야 할 테니. 


그런 공동체에서 이미 충분히 살아 왔으며, 싸우느라 맘이 격해져서 계속해서 모두 함께 멍청해지는 기분… 난 좀 싫다. (물론 싸울 땐 싸울 거다. 그러나 미련을 남겨둔 편향을 인식한 결단 쯤으로.) 



2023. 8. 12.


(여름에 썼던 거 가져옴 ㅋㅋ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젠더 갈등이 아니라 성차별이다" 부분 읽어보면 좋을 듯!)



https://blog.naver.com/jyanggrim/223181537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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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2-18 18: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내 하트도 여름 거 가져옴.

공쟝쟝 2023-12-18 18:24   좋아요 2 | URL
히히❤️❤️❤️❤️❤️❤️❤️❤️❤️❤️❤️❤️❤️❤️❤️❤️❤️
근데 나 그거는 못하게쒀여. 쭈아아압쫩~! 이건 은오님 주자.

단발머리 2023-12-20 19: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안타까운 건 과계몽된 여성들과 이해 못 하는 남성들간의 간극이겠죠. 여성혐오는 미소지니로 번역된 것이 옳았을 거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오천년 가부장제에 도전(?)하고 일부 성공한 건 신자유주의 뿐이라는 정희진 선생님의 말씀에 완벽 동의합니다.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여전히 여성이 더 열악한 처지에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한줌의 이대남들이 과대표되는 현실이 무척 안타깝습니다. 소리는 더 크게 나지만 투표율은 20대 여성이 더 높다고 하죠.

대상화와 타자화에 대해선, 저도 더 생각해보려고요. 그게 참 어려운 문제더라구요.

공쟝쟝 2023-12-21 09:59   좋아요 1 | URL
대상화 타자화는 저도 읽는 사람에 머무르는게 아니라 쓰면서 계속 가지는 질문였어요. 한번에 결론 빵 나면 것두 윤리라고 하긴 어렵지 않겠습니까?… 저는 읽는 사람에 대한 예의와 쓰는 나 자신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않아야하겠다… 정도로만 맘 먹었어요. 아무도 상처주지 않는 글을 쓰는 것 역시 환상이라고 생각하니깐요! (찡긋-!)

그리고 그래봤자ㅋㅋㅋ!! 독후감ㅋㅋㅋ 더 잘 쓰고 싶긴 합니다!!

단발머리 2023-12-21 10:00   좋아요 1 | URL
그 지점 좋네요.
그리고 그래봤자 ㅋㅋㅋㅋㅋ독후감ㅋㅋㅋ
많이 안 읽으심, 내 글을 ㅋㅋㅋㅋㅋ
누가 주의해서 보신다고 이리 조심하나요? 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12-21 10:00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그래봤자 좋아요 50 안된다 ㅋㅋㅋㅋ 하지만 난 안다. *중요한 건 필력이다* ㅋㅋㅋㅋ

단발머리 2023-12-21 10:04   좋아요 1 | URL
좋아요 100 넘으면 나도 좀 진지하고 알차고 자기성찰적인 글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써보려 합니다. 그러나 50이 안 된다 ㅋㅋㅋㅋ 그것도 이웃님들이 💜으로 눌러주시는 것임 ㅋㅋㅋㅋ 여러분, 감사해요 💕

공쟝쟝 2023-12-21 10:05   좋아요 1 | URL
😊😊😊😊😊😊😊😊💕💕💕💕💕💕💕💕💕💕💕💕

단발머리 2023-12-21 10:43   좋아요 0 | URL
🤣🤪🤣🤪🤣🤪🤣🤪🤣🤪🤣🤪🤣🤪🤣🤪🤪❤️🧡💛💚🩵💙💜💖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성정치학의 쟁점들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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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년 동안 변화(없음)가 한마디로 진단 끝. “(55) 여성의 ‘사회’ 진출이 사실상 공사 영역에 걸친 이중 노동이라는 현실 때문에 여성들은 과로와 경력 단절을 피해 비혼을 선택하고, 이는 저출산과 동물과의 반려 인생으로 이어졌다. 도대체 언제까지 ‘성차별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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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1-24 19:3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엥 어떻게 벌써 읽죠? 관계자입니까?! 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11-24 19:38   좋아요 4 | URL
정희진 선생님과는 관계가 없지만 그분에게 진심인 천하장사 소시지와 관련있는 분의 관계자입미다 ㅋㅋㅋㅋ 구매 기념 책속에서의 문장만 보고도 이미 별다섯은 확정이라 ㅋㅋㅋㅋㅋ 북플이 자동으로 읽었다고 해버리네욬ㅋㅋ 고쳤습니다!! (천하장사 소시지의 진심 앞에서는 진실해질 뿐…)

잠자냥 2023-11-24 19:41   좋아요 4 | URL
서문은 저도 미리보기로 읽었삼 ㅋ

공쟝쟝 2023-11-24 20:30   좋아요 3 | URL
너무 읽고 싶어서 손떨리는 현상😫😫

잠자냥 2023-11-24 22:27   좋아요 4 | URL
밥 먹어!

단발머리 2023-11-26 15: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금요일에 당일 출고라더니 어제 확인해보니 화요일에 출고된대요. 어찌된 일인지… 🤔

공쟝쟝 2023-11-26 23:29   좋아요 1 | URL
제가 구매할 때는...... 화요일에 출고예고가 되어있었다는 ....... 그전에 빨리 <애국의 계보학>을 다 읽어야할텐데요.....🤔 참고로 저 책 맛도리입니다! ㅋㅋ
 
말에 구원받는다는 것 - 삶을 파괴하는 말들에 지지 않기
아라이 유키 지음, 배형은 옮김 / ㅁ(미음)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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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의 강추로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정주행했다. 매 화가 다 좋았는데, 주인공이 우울증에 걸린 상황을 볼 때 눈물이 계속 나서 힘들었다. 재경험. 재인식. 애도. 필요했던 과정이라고 애써서 생각하지만. 가끔 참기 힘든 마음은 내가 나를 이상하고 아픈 애라고 스스로 여겼다는 거다.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좀처럼 빠져나오기 힘들었다. 학습된 성격과 무기력의 결과겠지.



별 뜻 없이 했을 말들만 귀에서 울려 퍼지고 가슴에 남아서 나를 할퀴더라. 뒤늦게 지속적으로 상처받고 말았다. 여전히 상처는 벌어져 있는 모양. 내 마음을 나는 보호할 줄을 몰랐다. 귀를 막을 줄을 몰랐다. 그래. 어쩌면 나는 앞으로 내가 해서는 안 될 말들을 배웠을지도 모르겠다. 배웠어야 했던 거다.


올해 읽으면서 가장 많이 운 책은 이 책.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보다 80배는 정교한 방식으로 소수자에 대한 사회의 편견과 제재 받지 않은 혐오의 말들이 만나 화학작용을 일으킬 때 세상에 어떤 지옥이 펼쳐지는 지를 세밀하게 알려준다. (동시에 가능성도)



- (30) 언어에는 내리 쌓이는 성질이 있다.


나는 이 문장을 나의 방식으로 그러나 아라이 유키의 의도에 가깝게 이해할 수 있다고 느낀다. 그러니까 마지막 잘못 빼든 젠가 같은 거지. 내 존재를 빼서 그 위에 하나하나 올려두는 말들. 기우뚱하다가 와르르 무너져 내릴 때까지. 내가 들었던. 내게 쌓이고 쌓인 못된 말들. 나를 통제하기 위해 했던 말. 내가 나를 포기시키기 위해 했던 말. 내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못 들은 척 나는 아닌 척 했던 말이. 나를 내가 공격하는 말로 바로 바뀌는 순간. 그래 어쩌면 이건 자기 비판적인 성격의 내 경우일 테고, 대부분은 타인들을 공격해도 되는 (때로는 물리적으로까지) 정당화의 근거로 사용되는. 말은 사회적이다. 말은 맥락적이다. 말은 권력적이다. 말은. 그래서 누군가를 살리고. 가차없이 누군가를 죽인다. 그러니까. 말은 닿는다. 글은 닿는다. 닿는다. 닿는 단다. 어떤 마음을 품고 써야 하는 건지. 어떤 건 왜 혼자 만의 일기장에 써야 하는지 까지도.


(30) A 선배가 겪은 ‘마음의 병’에 대해서도 “나약하다”, “어리광부린다”, “게으름 피울 뿐이다”라고 평하곤 한다. A 선배도 ‘마음의 병’으로 휴직한 동료들에 대해 비슷한 말을 했다. 하지만 그런 말이 쌓이고 쌓여 이번에는 본인이 그 ‘압력’에 짓눌리게 되었다. 바쁘고 피곤하면 “힘든 건 나도 마찬가지야”라고 불평 한마디 흘리고 싶어진다. 욕하고 싶을 때도 있다. 나 역시 그런 감정과 아무 연 없이 살고 있지 않다. 

하지만 ‘살기 괴로운’ 정도를 서로 비교해봤자 결코 편해지지않는다. 도리어 ‘입을 다물리는 압력’이 높아질 뿐이다. 이런 ‘압력’을 높여서는 안 된다. ‘살기 괴로운 사람이 불쌍하기 때문’이 아니다‘불쌍하다’는 감상은 ‘나는 그런 문제와 관계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발상이다. 그 압력을 높여서는 안 되는 이유는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해서’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좋았던 것은. 몰랐던 세계를 알아가는 느낌들보다는 (증상에 대한 연출이 정말 대단하다) 내가 나를 통해 어렵게 닿게 된 인식이 사람들이 공감하며 생각해 볼 수 있을 만한 콘텐츠로 만들어져서 유통되고 있구나 하는 것에 대한 감사함이었다. 어딘가에서 짓이겨 망쳐지고 있는 언어들이 어딘가에서는 보듬어지고 다독여지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 아라이 유키 책을 읽을 때와 비슷한 마음이 들었다. 안도감.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아팠던 것은 아팠던 거였고, 힘들었던 것은 힘들었던 거라서.

그때에는 안 보이던 것들이 이제는 보이니까. 음.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내 마음은.


분명한 건. 누가 나를 어떻게 보는가가 그다지 상관 없어졌다는 것이다.

내가 나를 보는 방식이 바뀌었으니까. 아직은 좀 아슬아슬한가.

그런데 과정에서 벼려지게 된 생각과 글들이. (나 스스로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매번 내 놓고 나서는 생각보다는 후유증이 남는 나름의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들이었나 보다.

여전히 어떤 동의를 구하는 것만 같은 내 연약한 마음이 좀 서글퍼서 좀 뒤척였다.


그래 나는 나약하다. 내가 여린 것은 사실이고. 그렇기 때문에 강하고 독한 부분도 있다. 그것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힘내고 싶은지, 더 용기 내고 싶은지, 혹시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은 것인지까지도.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 아니, 난 그냥 일상을 잘 지내고 싶어.


사랑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사랑받기 위해서 쓰는 것이다. 글은.

모든 글은 부치지 않은 편지다. 그것은 언어가 그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으로는 모두가 안다. 그러므로. 취향으로 에두를 필요가 없다.

발신인 자신이 모른다고 주장해도. 수신인은 알아차린다.

오배송되었다 하더라도. 이미 그 문장은 내게 도달했다.

그리고 언어는 내리 쌓이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조심해야 하는 거다.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엄마, 사랑해. 전화를 끊고.

누구의 사랑을 받고 싶은지. 어디에 서 있고 싶은지를 묻는다.

당연히 나는 내 편이며, 나를 사랑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옆에 서 있고 싶다. 이젠 서운하거나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내가 나를 살고 있다는 뜻인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수다를 떨고 맛있는 것을 먹어야겠다. 그래야겠다.



"우리 모두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있는 경계인들이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엔딩멘트-

언어에는 ‘내리쌓이는’ 성질이 있다. 입 밖으로 나온 언어는 개인 안에도, 사회 안에도 내리쌓인다. 그러한 언어가 축적되어 우리가 지닌 가치관의 기반을 만들어간다. ‘배려 없는 말’이야 예전에도 있었지만 소셜 미디어의 영향으로 ‘말의 축적’과 ‘가치관 형성’속도가 폭발적으로 빨라졌다. 심지어 그 폭발을 누구나 일으킬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무섭다.
‘누군가를 입 다물게 하기 위한 말’이 내리 쌓이면 ‘입을 다물게 하는 압력’도 반드시 높아질 것이다. ‘삶의 괴로움을 떠안은 사람’이 "도와줘"라고 말하지 못하게 만드는 압력이다. - P30

오해의 우려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장애인들은 전쟁을 찬미하도록 강요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발적’으로 찬미했다. 정확히 말하면 ‘자발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어졌다.’ ‘내 생각이 그러하다고 표명한 순간에만 세상으로부터 괴롭힘당하지 않고 조금이나마 편해질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했다. 이는 노골적으로 무언가를 ‘강제‘당하는 일보다 훨씬 무섭다. 강권적이고 억압적인 사회에는 몇 가지 단계가 있다. 우선 누군가에게 ‘쓸모없다는 낙인’을 찍는 데 망설임이 없어진다. 다음에는 낙인 찍힌 사람들을 박해하고 배제하고 입 다물게한다. 입을 다물린 뒤 이번에는 거꾸로 말하게 한다. ‘이렇게 말하면 동료로 받아줄 수도 있다‘는 태도를 취하며 ‘강제’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말하게 만든다. ‘강제로 말하게 한 사람’의 책임은 이런 식으로 사라지고 ‘자발적으로 말한 사람’만이 상처받는다. - P101

누군가에게 ‘쓸모없다‘는 낙인을 찍는 사람은 남에게 ‘쓸모없다는 낙인’을 찍음으로써 ‘나는 무언가에 쓸모가 있다‘고 착각하곤 한다. 특히 그 ‘무언가‘가 막연히 커다란 것이라면 주의할 필요가 있다(‘국가’, ‘세계’, ‘인류’ 등 말이다). 제6화에서 언급한 사가미하라(장애인 시설 살상) 사건의 범인에게서도 같은 문제가 파악된다.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것’이 ‘쓸모없는 사람을 찾아내 비난하는 것’을 뜻한다면 나는 절대로 어떤 쓸모도 있고 싶지 않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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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1-23 23:5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사랑한다고 포도만 주는 사람한텐 그래도 노라고 말하는 쟝이 되길.

공쟝쟝 2023-11-24 06:54   좋아요 4 | URL
여성들이 사회 속에서 싫어요, 안돼요, no라고 조금 더 수월하게 말할 수 있도록 노력해온 따뜻하고 멋진 잠자냥🐈‍⬛님~ 사과에 땅콩 잼을 발라서 먹으면 맛있어요. 포도만 주던 엄마는 좀 바보.

독서괭 2023-11-28 1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보다 80배는 정교한 방식으로,,라니, 궁금해지는 책이군요.
˝모든 글은 부치지 않은 편지다. 그것은 언어가 그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요기에 밑줄 쫙 긋고요.
저도 이 드라마가 누구나 정신질환을 겪을 수 있는 경계에 있다고 잘 보여주고 있어서 좋더라고요. 아직 박보영의 우울증 극복기는 못 봤는데, 얼른 보고 싶네요.
잘하고 있는 쟝쟝님!!♥

공쟝쟝 2023-11-29 17:5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잘 해내고 있는 독서괭님 ^^
 
[감정의 문화정치] ‘무엇이 끈적이는가’라는 질문

월요일 아침부터 내 <감정의 문화정치> 페이퍼에 <좋아요>로 발작 눌리게 하는 *철학 책 읽는 미소지니 남*에게 감정 한뭉탱이 섞어서 인용 문장 가져온다. (트랙백 참조)



가방 끈. 때로는 독립 연구자. 지식 노동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이론에 특별히 재능이 있었던지, 아니면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살게 된 것이던가. 이론이라는 리그 안에서 이론으로 다투면서 세상을 덜 망칠 해석을 얻기 위해 반지성주의라는 용어를 써 왔다는 거 이해했음. 지성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끼리는 더 치열하게 다퉈야지. 그래야 하는 게 맞고.


내가 아직도 좀 화나는 거는. 사회 전반의 미소지니가 너무 힘들다고, 살겠다고 뛰쳐나온 여성들한테 대고 본질주의, 반지성주의, 혐오주의라는 규정부터 잽싸게 들고 와서 분석하려 하던 종래의 여성주의자들 포함한 분석, 평가하고 싶어서 안달났던 종류의 지식인들이었다. 그래 결론은 그들이 하는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때 만들어진 앙심은 결국은 정말로 나 같은 대중을 반지성주의로 만든다. 쉬운 규정의 말. 언어(지식)를 가진 사람들이 가장 조신하게 돌아봐야하는 태도였을텐데도... 


더 신경질 나는 건. 

그 사람들이 규정한 지식에 기대서 결국 *하고 싶은 미소지니를 정당화*해야겠는 여성혐오자들의 탄생이겠지만. 


내가 페미니즘이라는 게 너무 아파서. 이건 아닌가? 저건 아닌가? 생각하는 방법을 잘 몰라 휘청일 때. 이미 여성주의 지식으로 알고 있던 잘 배운 한남은 나한테 물어보더라. 너 스까야? 랟이야? 난 그 말이 뭔지도 몰랐다. 그래서 내가 랟이었으면 너는 내가 무서워~ 아무말도 안 했겠지. 그때 나는 워마드다!!! 그랬어야 했는데. 그냥 몰라서 그건 뭐야? 헤헤 웃었다. 랟은 아니라며 딴 이야기 계속 하더라. 난 또 열심히 들었지. 하. 아마 내가 들어줬으니까 했겠지. 옳다고 안했는 데. 궁시렁. 이제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대체. 책은 왜 읽냐. 라는 말을. 정말 해주고 싶다. 그래. 한국 사회에서 책 읽기야 말로. 식민화 된 영역이라는 걸 이젠 안다. 여성주의 고맙고 탈식민주의도 땡큐입니다. 이 모든 걸 하나 하나 볼 수 있게된, 그 동안의 나의 무지성과 반지성 위치성도 땡큐다.    


계속해서 하고 있는 말이지만 나의 (젠더화된) 감정에 평가와 걱정과 우려는 필요 없다. 진짜 해악인 건. 그런 감정을 가진 대중과 섞이지 못하는 섞일 생각 조차 없는. 지 혼자 잘난 지식이라는 거. 근데 지식이 권력이야. 나도 그건 이제 알아. 그거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걸 내려 놓을 생각이 없다는 것도 오케이. 요컨대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인 거지? 


그래서 아메드의 <감정의 문화 정치>가 탁월한 거고. 내 페미니즘 선생님 이민경, 정희진 만세입니다!  


(139) 대리자 없는 발화, 매개 없는 이해와 표현은 언어라는 관점에서 보면 문법이 아닌 회화에 해당하며, 이 능력은 무조건 연습으로부터만 나온다. 특정한 언어를 갓 접한 입문자가 문법적 지식을 학습하는 건 유창성에서 철저히 부차적이거나 혹은 능력을 갖추는 데 도리어 방해가 되기도 한다. 규범보다는 그것을 활용하여 말하고 싶은 내용을 갖는 게, 누군가가 하는 말을 귀기울여 듣고 모방할 준비를 하는 게 더 중요하다. 여러 번 듣고 여러 번 말하면 오류는 줄어든다. 

강남역 살인이 일어났을 때 여성들은 전부 동요했고 상처 입었다. 그 흔들림으로 의식의 장막에는 틈새가 생겼다. 그 틈을 타 뱃속 깊이 눌러두었던 기억들이 혀뿌리까지 타고 올라왔다.

누군가는 여자들이 진실을 말하면 세상은 터져버린다고 했다. 세상이 터질 기미를 불안해한, 대학에서 만난 철학과 남자 선배는 ‘비이성적으로 구는’ 주변 여성들을 진정시키겠답시고 ‘우리의 적은 남자들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가벼운 에세이가 아니라 이론서다’ 같은 글을 페이스북에다 올렸다. 리베카 솔닛의 페미니즘 에세이가 인기를 끈 무렵이었다. 몸속에서 울컥 올라온 물질을 글자로 담아 남자에게 전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틀렸으니 조용히 계세요.*  


분명히 처음이 맞을 것이다. 짧은 한 줄에도 그는 아주 놀라 내게 따로 연락을 해 왔으니까.

이날 시작한 응수는 보름쯤 지나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라는 내 책 첫 제목과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론서가 아니다”라는 설명 문구에 담기게 되었다. 실용 회화 매뉴얼!


- <꼬리를 문 뱀>, 이민경


틀렸으니 조용히 계세요.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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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3-11-20 13: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후 시원해!

공쟝쟝 2023-11-20 20:1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ㅋㅋㅋ 모처럼 사이다.

yamoo 2023-11-20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기야 말로. 식민화 된 영역...이라고 하셨는데..
몰라서 그러는데 말씀하신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려주실 수 있는지요??

공쟝쟝 2023-11-20 13:33   좋아요 1 | URL
서울대 나온 검사가 공부를 못해서 이런 대통령이 되었겠습니까? 책을 어떻게 읽느냐의 문제이겠지만.
‘언어-지식-상징계 질서‘가 이미 권력이라는 소리고, 그 권력에 진입하려고 미친 듯이 공부하고 있는 게 한국 사회 아닙니까? 한국에서 지식인으로 알려지기에는 서울대 아니면 미국박사 학위 말고 필요한 인정, 권위가 또 있나요? 그런 책들 읽다보면 그런 사람들 생각을 내면화 하겠죠.
야무님의 질문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얼마 전에 읽었던 아시스 난디의 <친밀한 적>을 권합니다.
˝난디는 그들에게 내재된 식민주의, 곧 서구 지배자에게 봉사하거나 인정받은 서구 방식의 개념, 문화적 우선순위, 계층화, 지배적 자아를 ‘우리 안의 적‘ 곧 ‘친밀한 적‘이라고 불렀다. 난디의 논리를 따르면 ‘친밀한 적‘을 다정하게 껴안은, 식민지배를 경험한 나라의 엘리트들은 정신의 식민화를 겪고 있는 셈이다.˝
뭐 그렇다고 제가 서구를 벗어나서 우리나라 최고여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열심히 공부해서 얻게 된 지식을 간단한 문장들로 한꺼번에 정확하게 설명해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열공하세요~

2023-11-20 1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20 2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20 2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20 2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20 2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20 2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20 2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20 2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3-11-20 2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꼬리를 문 뱀....이 마침 집에 있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랍니까. 제가 함 읽어볼게요!

공쟝쟝 2023-11-20 21:13   좋아요 2 | URL
저를 영어공부의 길로 떠민 (그리고 붙잡지는 못한...ㅋㅋㅋㅋ) 아주 훌륭한 책입니다. 페미니즘이 키우고 페미니즘을 키운 또래의 동료 여성의 거침없는 행보에 깊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큰 일은 여자가 합니다!! 참, 단발머리님 저도 그 병 앓고 있어요. 너무 좋으면. 너무 좋아서. 책 읽고 독후감 못쓰는 병.

단발머리 2023-11-20 21:23   좋아요 1 | URL
그거 불치병이고 난치병이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가장 심하게 앓았을 때는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읽고 나서였죠. 한 문장 쓰고 멈추고 또 한 문장 쓰고 멈추고.... 치료제 찾아봅시다 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3-11-21 07:32   좋아요 1 | URL
그거 치료제는요,
이책 너무 좋아 별 오십 개야. 꼭 꼭 읽어, 라고 리뷰로 친구들 꼬셔서 전염시키기 뿐이에요. 근데 잠시 낫다가 (친구랑 그 책 얘길 할 수 있다면) 재발함.

2023-11-20 2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23-11-20 21:14   좋아요 0 | URL
어떤 질문은 통제가 목적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지만. 잘난 척 하고 싶으니까 한다 ㅋㅋㅋ

2023-11-21 1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22 07: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행복의 약속>과 같은 질문 방식이다. 감정은 무엇인가. 가 아니라 감정은 무슨 일을 하는가. 

(41)

감정은 단순히 ‘나’ 혹은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니다. 감정을 통해서 혹은 다르게 표현하자면 우리가 대상이나 타자에게 반응하는 과정을 통해서 표면과 경계가 만들어진다. 즉 ‘나’ 혹은 ‘우리’는 타자와의 접촉으로 형성되고 더 나아가 접촉의 모습을 취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몸의 표면surfaces은 타자가 남긴 인상의 효과로 인해서 ‘이루어진다surface’. 나는 타자가 남긴 인상을 통해서 개인의 몸의 표면뿐만 아니라 몸으로 형상화된 집단의 표면이 어떻게 모습을 갖추는지 이야기할 것이다. 다만 감정이 안과 밖을 만들어내는 효과를 발생시킨다고 해서 감정이 그저 심리적인 동시에 사회적이라거나 개인적인 동시에 집단적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제시하는 감정의 사회성 모델은 ‘동시에’라는 말로 에두르는 것과 거리가 멀다.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정신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대상으로 구성되는 과정에서 감정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정신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라는 ‘객관적 실재’가 [감정의] 원인이 아니라 효과임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서 감정은 개인이나 사회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마치 대상인 것처럼 구분해 내는 표면과 경계 자체를 생산한다. 나는 감정이 여러 대상을 서로 구분해내는 경계와 표면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분석할 것이다.

(45)

서로 다른 전통을 지닌 이론을 함께 엮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도 이들 이론을 연결하는 단 하나의 열쇠는 ‘무엇이 끈적이는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바로 이 질문이 책 전체에 녹아 있다. 이 질문은 어떤 면에서 더욱 익숙한 질문, 그러니까 ‘왜 사회적 변화를 성취하기 어려운가’ ‘왜 권력관계는 집단적인 저항에도 완고하게 지속되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제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존의 심리학 모델과 감정 사회학 연구에서 부지불식간에 ‘감정을 우리가 소유한 것’으로 전제하게 되는 관점에 대해 아메드가 거리를 두며 내놓는 분석 틀은 감정이 지닌 ‘방향성 + 대상과의 접촉(관계맺음)’이다. 감정이 표면과 경계 자체를 만들어내며 그것은 ‘끈적인다’라는 말을 곰곰 생각했다. 나의 관계를 바꾸고 나의 몸을 바꾸고 나의 감정 반응을 바꾸는 일이 얼마나 딱 달라 붙어 있어 끈끈하고 어려운 지에 대해서. 어쩌면 아직도 과정 중인 나는 그것을 쓰면서 가두기 위해, 사후적인 해석으로 끝낼 수 있기를 바라며. 다만. 책들을 읽다가 내가 만나는 어려움일지도 모르겠는(기존의 독서 습관을 바꿔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던) 부분은. 나였던. 나인. 나였을. 나일. 고립되고 싶지 않아서 더욱 열렬히 동조하고 싶어했던 관계들과 온기들. (언제나 헤어지는 게 어렵다. 애초에 너무 붙으려고 하지 말라는 사람들의 만류를 나는 한가하게 여긴다. 현재의 나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눈꼽 만큼도 없어졌다는 상태와는 별개로.)

프랑스 엘리트 지식인들의 위선과 도덕적 이중성을 문제삼으며, 그들의 사유가 지닌 내적 타당성에까지 타격을 가하는 신자유주의(우파)자들의 수법은 ‘반지성주의’다 라는 지적(그렇다. 나는 기 소르망의 페도필리아 공작 때문에 푸코를 읽으려다 때려치운 전적이 있다. 그렇게치면 페미니즘도 그랬고. 나는 언제나 대중을 더 알게하려하지 않는 자들의 획책(?)에 놀아나는 무식한 독자인 것이다! 어쩌라고? 매번 말하지만 계속해서 인식을 깨트려야 하는 데 있어, 앞으로도 계속 할 예정이지만 그래도 적응 안될 때가 많아. 하여튼 개소리🐶를 경계하는 참다운 지성인의 태도를 연마하려면 폴 벤느의 책 개정판 후기를 읽으세요.)을 읽으면서는 되물었었다. 그렇다면 나의 도덕적임-_-;;은 프롤레타리아의 도덕이란 말인가?🤔 (흠흠. 한참 루틴 뭉개고 있던 반백수 주제에 할 말은 아니라고 본다는 마음이 올라오지만 패스.) 

아무리 어떤 계기로 인해 정치적으로 각성하더라도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어쩌면 독서의 양과 질은 별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내가 길고 긴 그 역자 해제를 꼼꼼 읽은 까닭은 푸코를 옹호하고 싶었으니까.다. 애당초 별 관심 없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푸코가 소아성애했냐고 안 했느냐고 만 궁금하고 그래? 아니면 말고. 하게 되었을 거란 소리. 이러한 의미에서 나의 지성을 연마시켜준 푸코는 나의 사랑. 트루 럽. 사랑은 나를 공부시킨다!! 😤 때문에 사랑에서 대상을 잘 만나야 한다는 언니의 지적은 백퍼 옳다. 사랑은 아아무나 하나. 아니 사랑은 아무와 하면 안 됨... 기왕이면 전 세계 엘리트 지식인들이 밀어주는 남자를 사랑하...(그만햇!) 

그러니까 “정체성의 정치를 넘어서야 한다”는 일련의 주장들을 머리로. 머리로만 이해하면서 와닿지 않았던 까닭.은 결국. 이론이 가진 정확성 보다는 이론이 보여주는 맥락 안에서의 마음🧡🩷. 마음으로. 어떤 정체성들은 정말로 나를 살려주는 것 같았으니까. (동시에 나를 질식시키며.)

깊고 복잡하게 사유하지 못함을 반지성주의라고 말하는. 나와 같은 (읽을 여력이 없었던) 대중들에 대한 어떤 <괴로움 없이> 논의 되는 듯한 ‘(너무 잘난)이론의 글’들이 조금은 아팠었다. (내게는 대략 짜증스러움으로 표현된다.) 받아들이기 싫은 감정을 일으켰다. 

그래서 “(45)무엇이 끈적이는가” 라는. 아메드의 정동에 관한 문장들은. 

나의 반지성주의를 (조금은 흔쾌하게) 인정하게 하고.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상황’들에 대해서도 어루만져 준다. 사람이 마음(감정)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아메드 식으로 사람이 사람에게 영향을 받는 존재라는 것. 그러니까. 내 몸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게 아닌 물성을 지닌 것이라는 사실. 내 감정은 오랜 기간의 내 삶의 역사가 축적된 대체 불가능한 고유한 무엇이며,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보다 언제나 더 구체적으로 ‘나임’이라는 사실에 대해 (그것이 우울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옹호받는 느낌. 그의 연구는 계속 나를 훌쩍이게 한다. 하~ 완전히 투항한다. 정체성을 정당화하고 싶어서 안주하려 했던 나의 읽기는 반지성주의 맞다. (흥!!)

“(46) 감정에 주목하는 일은 개인이 특정한 구조에 투자하게 되는 문제에 답하도록 이끈다. 주체는 특정 구조가 해체되는 일을 자신이 죽는 것과 다름없는 일로 느끼기도 한다.” 

나는 죽었고. 다시 살아난다.

짠!!! 다시 살아났다~!! ㅋㅋㅋ 

아니 근데 사라 아메드 이야기하면서, 관습적 이성애 각본을 차마 다 못 버려서... 게이 남자 철학자만 사랑하는 이야기에 대해서 쓰고 나니. 퀴어는 내가. 내가 퀴어다. 혼종은 내가 혼종이네. 어후. 한숨. 푹~


아마 올해의 책이 될 듯. <감정의 문화정치> 강추!👍🏻



퀴어 정치와 페미니즘 정치에서 애착에 주목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이 [권력관계를] 초월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감정은 ‘끈적이며’ 우리가 투자를 철회하려고 할 때도 우리는 끈적이는 감정에 달라붙을 수 있다. 다만 끈적임이 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은 당연히 존재한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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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틀렸으니 조용히 계세요
    from 의미가 없다는 걸 확인하는 의미 2023-11-20 12:48 
    월요일 아침부터 내 페이퍼에 <좋아요>로 발작 눌리게 하는 *철학 책 읽는 미소지니 남*에게 감정 한뭉탱이 섞어서 인용 문장 가져온다.가방 끈. 때로는 독립 연구자. 지식 노동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이론에 특별히 재능이 있었던지, 아니면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살게 된 것이던가. 이론이라는 리그 안에서 이론으로 다투면서 세상을 덜 망칠 해석을 얻기 위해 반지성주의라는 용어를 써 왔다는 거 이해했음. 지성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끼리는 더 치열하
 
 
공쟝쟝 2023-11-20 11:3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기 추풍오장원씨 좋아요 반대합니다. 당신은 여성주의자들의 반지성주의 조롱하는 행태가 본인의 초월적이며 우월한 무의식 자랑의 발로임을 정말로 모른단 말입니까? 책 그딴 식으로 읽지 말고, 미소지니 반성문 백 장 쓰고 오세요. 아 진짜. 저자의 지적 권위 뒤에 숨어서, 자기가 사유한 줄 아는 지가 철학하는(줄 아는) 남자들 다 쥐어 패고 싶다...

건수하 2023-11-20 15: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뭔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나 봅니다. 쟝님 멋짐!

공쟝쟝 2023-11-20 20:31   좋아요 4 | URL
그러게요. 한국에 여성주의 정체성의 정치가 제대로 있었던 적도 없는데, 그거가 생기기도 전에 정체성의 정치 넘어서야함을 걱정해주시는 분들의 의견. 이제는 그래. 이마저마한 역사적, 이론적(그리고 현실에서 실제로) 맥락에서 그럴 수도 있었겠다. 하게 되는 시점이고요. (사실은 이미 외국의 여성주의 운동에서는 <페미니즘의 도전(2005)>나오기 이전부터 페미니즘 이론이 도전하고 있었던 것이었을 테고요. 아마도 아카데믹한 강단 내의 여성학에서는 진지하게 다루고 있었지 싶습니다만. 여튼. 저는 잘 모르는 데다 시간도 부족했으니까.) 내가 가진 해석의 부족함을 공부해서 반성하고, 넘어서는 것은 제 읽고 쓰기가 넘어서야 하는 거지. 자기 미소지니에 논리를 부여해주는 걸로 확대 해석해서 <좋아요> 누르면 제가 너무 화나죠. 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고 알은 체 하고 싶은 모양인데. 바로 그런 식의 읽기가 문제 적이란 것을 철학책 백날 읽어봐라. 너는 모르겠지.

단발머리 2023-11-20 21: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너무 화끈하고 너무 시원하네요. 글, 댓글 모두요.
잘난 척, 비아냥, 수근거림을 모두 헤치고 찬찬히 읽어가 봅시다. 앞으로 재미있을 일만 남았네요!!

공쟝쟝 2023-11-22 10:43   좋아요 2 | URL
제가 우치다도 이퀄리스트라 패가면서 읽는 상여자입니다 ㅋㅋㅋ
남성 독자를 <여성이라는 제도에 묶여본 적 없이 한가하게 공부하는 사람들>이라고 퉁치고 싶지 않은데, 편한 몸에서는 저토록 편한 평가의 자세가 나오게 마련인가 봅니다.
아. 그 말이 하고 싶었구나. 네가. 전 세계의 반지성주의를 한탄하고 싶은 그 미소지니 남이 읽는 책들을 그는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아요>였습니다. 모르는 게 부끄러울 일은 아닌데, 그의 모름은 악의적 모름이기에 부끄럽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