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따라온 의혹들 - 로맨스에서 돌보는 마음까지, 찬란하고 구질한 질문과 투쟁에 관하여 앳(at) 시리즈 3
신성아 지음 / 마티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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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촛불, 미투와 엔번방, 팬더믹 이후에 정치와 한국사회가 진지하게 묻고 논의했어야 할 거의 본질에 가까운 질문들. 혹은 읽었어야(읽어 온)할 책들. 페미니즘은 사랑을 없애지 않는다. 기만없는 사랑과 정치를 더 요구하고 기꺼이 책임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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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03-25 10: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멈춘 곳에서 다시 시작하자. 모르겠으면 아니 모르니까 책부터 읽자.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 - 로맨스에서 돌보는 마음까지, 찬란하고 구질한 질문과 투쟁에 관하여 앳(at) 시리즈 3
신성아 지음 / 마티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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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의 잘한 일:
이 책을 이웃의 글에서 발견한 일.
책을 공유한 문장에 몸을 떨고 당장 도서관에 가서 펴서 읽은 일.
그리고 이 책을 돌보면서, 초조해하면서, 눈치 보면서 읽는(었던) 이들에게 선물한 일.
우리에겐 내 삶을 억압하는 말들을 찢어낼, 삶과 일상과 사유에서 건져올린, 더 많은 단단하고 아름다운 문장이 필요해요. 

언니, 안 읽고 뭐해요? 안 쓰고 뭐해요?



“(100) 그는 알아야 했다. 그를 비롯해 이 시대 남자들의 돌봄에는 알맹이가 없다는 것을.
그들이 사용하는 사랑의 언어는 천편일률적이고, 현실을 외면한 채 관념으로만 존재한다. 그래서 그것은 키치다. 소도시 변두리에 느닷없이 들어선, 먼 나라의 르네상스 양식을 조야하게 흉내 낸 왕궁 예식장 같은 키치다. 책에서 본 성평등을 흉내 내고 아직 실현되지 못한 인간해방을 추종하고 있지만 결국 그 본질은 가부장제인 가짜 성곽이다. 또한 그것은 밀란 쿤데라의 키치, 똥을 부정하다 못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구는 태도로서의 키치다. 돌봄의 현장은 어디나 처절하고 불완전하며 때로는 똥기저귀처럼 추하다. 그런데 이 체험에 동참하지 않고 부정하며 아름다운 환상으로 돌봄의 정의를 새로 내리는 한국식 라떼파파의 태도가 바로 키치다. 독박 육아의 현실을 부정하고 말뿐인 가사분담, 공동육아를 앞세우며 좋은 아빠이자 다정한 남편으로 행세하려는 허위가 바로 키치다. 그들은 돌봄이 어떤 것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끝내 모른다. 이 키치적 돌봄은 “앞은 파악할 수 있는 거짓이고, 뒤는 이해할 수 없는 진리”라는 키치의 특성에도 정확히 들어맞는다. 모성이 타인이 만든 환상이라면 부성은 스스로 만든 키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여전히 이해하고 싶다. 용서나 체념은 답이 아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그의 잘못만은 아니다. 어쩌면 그는 다른 남편에 비해 부당할 정도로 과도한 비판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또 그가 잘한 것도 아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사랑하는 남자가 자행하는 ‘남녀차별’을 철폐할 수 있을까? 내가 힘들 때마다 스스럼없이 기대온 바로 그 어깨에 언제쯤 정치적 잣대도 나란히 드리울 수 있을까? 아포리아다.”


그는 알아야 했다. 그를 비롯해 이 시대 남자들의 돌봄에는 알맹이가 없다는 것을.
그들이 사용하는 사랑의 언어는 천편일률적이고, 현실을 외면한 채 관념으로만 존재한다. 그래서 그것은 키치다. 소도시 변두리에 느닷없이 들어선, 먼 나라의 르네상스 양식을 조야하게 흉내 낸 왕궁 예식장 같은 키치다. 책에서 본 성평등을 흉내 내고 아직 실현되지 못한 인간해방을 추종하고 있지만 결국 그 본질은 가부장제인 가짜 성곽이다. 또한 그것은 밀란 쿤데라의 키치, 똥을 부정하다 못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구는 태도로서의 키치다. 돌봄의 현장은 어디나 처절하고 불완전하며 때로는 똥기저귀처럼 추하다. 그런데 이 체험에 동참하지 않고 부정하며 아름다운 환상으로 돌봄의 정의를 새로 내리는 한국식 라떼파파의 태도가 바로 키치다 - P100

모성이 타인이 만든 환상이라면 부성은 스스로 만든 키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여전히 이해하고 싶다. 용서나 체념은 답이 아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그의 잘못만은 아니다. 어쩌면 그는 다른 남편에 비해 부당할 정도로 과도한 비판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또 그가 잘한 것도 아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사랑하는 남자가 자행하는 ‘남녀차별’을 철폐할 수 있을까? 내가 힘들 때마다 스스럼없이 기대온 바로 그 어깨에 언제쯤 정치적 잣대도 나란히 드리울 수 있을까? 아포리아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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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3-20 14: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알맹이 없는 돌봄이라도, 그런 돌봄의 시늉이라도 내는 남성이라도, 그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공쟝쟝 2024-03-21 10:29   좋아요 1 | URL
이 댓글을 곰곰 생각해보아요. 시늉과 위악과 선의와 의도. 구조와 언어. ☺️🥹

자목련 2024-03-20 17: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출연한 다큐를 보고 책이 궁금했는데 쟝쟝 님은 바로 읽으시네요. 기민하게 실천하는 모습!

공쟝쟝 2024-03-21 10:30   좋아요 1 | URL
궁금하게 많은데 그걸 모참는 조급한 사람을 기민하다 해주시니 몸 둘 바!!ㅋㅋㅋ
 

- 지는 게 이기는 거야, 참고 살아야지. 여기 말고 어딜 가겠어. 너 땜에 산다. 


엄마는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날까지 (물론 할머니는 대체로 내게는 천사셨다) 관절 마디마디가 부어오르는 병에 걸리도록 같이 사는 시어머니의 구박을 견뎠는데 엄마가 우리에게 했던 아주 많은 조언의 말이 본인 스스로에게 하는 주문이었다는 걸 이젠 안다. 그 말은 딸들에게 겸손의 미덕, 자기 한계 짓기, 엄마 때문에 살아야 할 것 같은 저주로 작용해서. 우리들은 어른이 되어서까지 낮은 자존감과 알 수 없는 분노에 허덕였다. 


페미니즘이 필요했다. 엄마를 죽도록 미워하고 다시 사랑하기 위해서. 처음엔 엄마의 노동(돌봄)은 안 보였고 나를 억압한 말들이 작용하는 지점들이 보였다. 엄마라는 제도에 묶인 엄마의 말들. 그러니까 언어. 그 자신을 살리기 위해 타이르는 말이 자신을 죽이는 말이 되기도 하며 누군가를 살리는 동시에 죽이기도 한다. 


일기 너무 쓰면 자의식이 오만해져서 (주체가 되어버려서) 안되니까 기록 남기지 말고 그냥 물 흐르듯이 사는 것도 방법이라고 서양 철학의 한계 어쩌고 글로 먹고사는 인문학을 한다는 남자들이 실은 자기 삶을 위로하기 위해 자신한테 하던 말. 들은 삶에 언어가 부족해서 지식인(가끔은 스님…)의 고견을 들으러 온 여자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쳤을까. 여성으로 호명하기도 전에 미리 엄마로 호명하고, 부르는 자신의 위치는 탐색하지 않는 채로 들어주는 대상을 넘겨짚음이 역력한(그때는 몰랐다) 마이크의 말들. 나는 또 불리는 대로 불렸고 유명인의 말을 유명해서 탐욕스럽게 섭취했다. 그 남자들은 나에게 공부를 독려하지 않았다. 그건 지들에게도 힘든 거니까. 아니, 엄마가 될 사람은 엄마를 공부해야지. 오은영 선생님께로 떠밀려진 것 같기도. 여튼 내가 쓰지 않아도 될 까닭은 너무 많았고 넘쳤다. 페미니즘을 만나기 전까지는.



서른 이후의 일기 쓰기. 아니 페미니즘.


가끔, 글을 쓰는 까닭을 거창하게도 살기 위해서라고 썼던 것은. 가부장제라는 판타지, 아버지라는 보호막이 찢어져 버린 imf 이후를… 시어머니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엄마의 말들만으로 살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다른 말들이. 다른 대타자의 말들이 필요했다. 평범한 한국 여성에게 쏟아지는 아주 많은 무거운 중력을 지닌 말들은 돌처럼 날아와서 나를 퍽퍽치고 휘청이게 하였다. 보호하기 위해서는 다른 말로 일기를 써야 했다. 그 인문학자의 말처럼 주체가 되기 위해서 자의식을 갖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칫하면, 내가 나를 돌보는 말이 없으면. 타인의 말들에 자기를 검열하다가 뼈를 말리면서도 베이글녀가 돼야 하고. 너무 똑똑하면 안 되지만 개념은 장착해야 했던 20대를 지나. 


남부럽지 않은데 취직은 하되 특정 나이 대부터는 일하지 않기를 독려 받으며… 혹… 안정적 직장이라면 워킹맘이라는 이중 노동을 감당하면서도 자책하고, 전업주부라는 사실로는 기생충 취급을 받고, 노처녀라서 히스테리인가 봐. 시집가 시집이나 가. 좋은 남자 만나야지. 사랑 못 받는 여자들은. 그런 너를 누가 사랑해 주니. 여자는 여자는 여자는…. 그것도 아니면 돈 성공 돈 성공.


<서른 이후의 일기장들. 많이도 썼다.>


나를 말에 맞게 더 바꿨다간 흉측한 히드라가 될 것 같아서. 공부. 모든 말들을 어쩌면 30년 치를 한꺼번에 급속하게 찢어내는 과정에서 내 삶은 유달리 심각해졌고 결과적으로는 남들이 뭐라든 무서울 게 별로 없다. 120살까지 80년. 이제는 공처럼 날아오는 말들을 라켓으로 팡팡 튕겨내면서. 그렇게 살면 되는 거라. 다만 억압이 여성 하나만은 아닌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성별은 정말 거대하고도 기본적인 억압이다. 여남 모두에게.) 겹겹이 싸인 다른 담론들. 


나는 나를 잘 보호하고, 나의 곁을 이루는 나와 손잡은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듣고. 분석하고 사유하고 적합한 저항의 말을 함께 찾아보고 싶다는 나름의 욕망이 생기게 되었다. 


저 말들에 포획되지 않기 위해 셀프 자아 규정을 해야겠다 / 주체가 되어야 합니까? 해체되기 위해서? / 주체가 되고자 하는 나는 본질주의자인가? / 정체성의 정치는 불가능 한가? 


라고 좌충우돌 물었던 질문들을 지나. 


1월에는 책으로 라캉과 바디우를 만났고. 사건으로서의 주체에 대해 힌트를 얻고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일기를 쓰지 말라는 인문학자들의 말은 (부분적으로) 맞다. 모두를 끊임없이 소비자로 호명하는 자아 중독의 시절, 근대적 의미의 주체는 인류세의 원흉이며 해체되어야 한다. 그래도 나는 감히 쓰고 싶다. 재현의 윤리, 잘 모르지만 그것도 탐사해가면서 읽고 쓰면서 내게 맞는 말들을 찾는 재미, 쾌락. 내 공부. 인생은 생각보다 더 길고. 이 재미를 멈출 수는 없으니. 찬찬히 더듬더듬 읽는 나는 진지하고 쓰는 나는 좀 허심해지자고 같이 읽고 쓰고자 하는 친구들과 말했다. 


지금의 최선. 나의 적정선. 



2024.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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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3-20 1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쓰지 않아도 될 그 많고 많은 이유를 넘고 넘어서 이제 읽는 인간, 쓰는 인간이 되신 거 축하드려요.
여성이라는 하나의 억압만 존재하는 건 아니죠. 하지만 성별억압의 그 음흉하고 끈질김을 우리 같이 파헤쳐봐요.
주체와 해체와 전략적 본질주의와 정체성의 정치에 대해 이야기합시다.
나는 시간이 많아요…. 🤔🤪

공쟝쟝 2024-03-21 02:27   좋아요 1 | URL
분명 2월에는 읽고 쓰기 따위 … 이러면서 돈이나 벌자고 하던 나는…. 막상 못하게 되자 너무 그리워졌고… 청개구리 ㅋㅋ 저도 시간이 많아요 😫😩
 
매니악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송예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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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특정한 발명품의 비뚤어진 파괴력이 위험을 초래하는 게 아니야. 위험은 원래부터 내재해 있지. 진보를 치유할 방법은 없어” 폰 노이만 나쁜 쉑. 인간은 진보를 치유하지 않았고 인공지능은 인간을 이겼다. 인간 스스로가 치유하지 못한 것을 인공지능에게 맡기자는 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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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2-23 08: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폰 노이만 나쁜 쉑. 쉑쉑버거.
얼굴은 잘생겼다. 쉑쉑버거.

공쟝쟝 2024-03-04 13:32   좋아요 1 | URL
아... 독후감 쓰고 싶네요. 진짜 잼나게 읽었는 데...
 
공교로움. 해체되어야 합니까?
내가 내게 일어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전략적 본질주의(Strategic Essentialism)

내가 경계하게된 종류의 화법이 있다. 나 자신은 저들과 무관하다는 자기 인식이 드러나는. 너도 그래, 너도 똑같아라고 뱉어주려다가 참는다. 말해줘도 못 알아먹으니까. 어쨌든 나 자신은 무고하다고 항변하지만 이 구조 속에 있는 한 모두 한 비탈이라는 걸 그들은 알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정말로 무고하고, 그래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아니 어떤 부분에서는 그런 이들을 인정하고 있다. 헌데 그게 백인성이고 그게 근대성이고 그게 애석한 (가끔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은) 남성성이다. 바람을 피우지 않았으니 너를 때려도 되고, 성매매 업소에 출입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좋은 남성이 된다. 그들의 자긍심에 훼방을 놓고 비아냥을 투척하고 싶다. 당신의 무고함에 나의 피해는 상쇄되지 않으며. 집단으로서의 남성은 집단으로서의 여성을 억압해왔다. 그건 사실이다. 나는 전제를 질문하는 데, 너의 억울함이 고작 성 구매를 하지 않았다 일 때. 그게 억울해? 고작? 그렇게 치자면 나도 꽃뱀 아니야. 나도 김치녀 된장녀 김여사 아니야. 그게 억울하면 군대가.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감정적 불쾌함 말고 무슨 도움이 되는 거지?  


내 입 말로 구조주의는 그런 질문과 반성에서 시작되었고(우리 모두가 어떤 시스템 안의 가담자라는), 포스트구조주의는 그렇다면 그 안에서 그걸 넘어설 수는 없단 말인가.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발본색원을 위한 사유 방법을 제안한 거라는 생각이다. 구조 안에서 구조를 넘어서는 (서구 지식인들의) 반성, 반성문이다. 각자가 넘어선 방식은 다르지만. 조건은 치열해야 한다는 거. 그러려면 일단 먼저는 심각한 구조주의적 태도로 생각해 보아야 했던 것이 맞다. 요즘엔 치열하게 자신을 분석한 한 사상가의 정신분석/자서전을 읽고 있다.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치밀하게 관계 속에서 연결되어 만들어지는지를 대목마다 발견한다. 벗어날 수 없구나. 선택할 수 없구나. 때로는 선택했다고 믿어야만 살 수 있었겠구나. (물론 이러한 사후 해석으로는 불충분한 우발성까지도 그는 이야기하겠지?ㅋㅋ)



노오력 하면 된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 조건을 문제 삼지 않은 채로. 너와 나의 관계성을 부정하는 것. 코기토적 자아를 전제하는 것. 즉 대상화. 타자와의 연결을 끊고 외부를 만드는 것. 그러한 인식의 전면적 재생산이 자본주의(근대)의 시작이며 결과는 2차 대전과 인류세다. 물론 이전에도 폭력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폭력이 (물리적 폭력 포함 언어, 제도, 인식과 시선까지도) 대량 생산되며 속속들이 개별 인간을 (셀프포함) 통치하지는 않았을 거다. 대상화의 시초는 잉게보르크 바흐만 전기 영화 속 그녀의 주장대로 여성에 대한 타자화에서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성 억압은 노예제보다 먼저 시작되었고, *근대적 주체성은 젠더화와 동시에 본격화되었다.* 때문에 근대적 주체 혹은 본질주의는 부지런히 해체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 (물론 사람들은 자기가 근대의 인식구조 안에서 말하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걸 위해 공부가 필요한 것 같은 데. 대체 누구라서? 나의 물음표는 그러한 공부의 조건을 겨냥한다.)  


언젠가 스스로 물었던 적이 있다. 나는 주체가 되어야 합니까? 해체되기 위해서?

(https://blog.aladin.co.kr/jyang0202/14315328)



지금은 그렇다.라고 임의고정 해두겠다. *해체되기 위해서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들에게 규정당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를 규정해야 한다. penis/pen을 들고 써야 한다. 구조 안에서 억압의 인식. 그것을 쓰는 데에 내가 본질주의자라는 혐의를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억압이 없다고 생각하면 적응해 살면 된다. 못 살겠으면 내가 억압받고 있다는 걸 인식해야 한다. 명목상의 신분제가 사라진 사회에서 그건 꽤 어려운 일이다. 


별수 없다. 읽고 써야 한다. 내 안에 있는 것들. 따로 떨어져 있지 않은 것들. 나는 감히 그렇게 느낀다. 크게는 문명에 역사에. 작게는 나 자신의 일기장에 나 스스로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내가 있으니까. 나는 없지 않으니까. 여성의 목소리는 역사에 기입되지 못한 채로 오랫동안 수다 혹은 잔소리로 휘발시켜졌으니까. 자아를 만들지 못해서 타자를 매만지다가 클리셰가 되어버린 엄마들 또는 신경증으로 고통받았던 여성들. 마녀들. 역사(문자) 이후의 여성의 역사. 그들과 명확하게 선을 그으며 나타난 18세기의 일부 여성들. 다락방의 미친 여자들(글 쓰는 여자들. 명예 남성들.)이 탄생했고. 그리하여 애석하지만 페미니즘은 1세계의 것(부유함과 한가함을 일부 여성에게도 풍족히 나눠주었던)이 맞다. 


“(29) 푸코는 글쓰기와 욕망의 대립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푸코는 *근대 욕망이 언어, 그중에서도 특히 글쓰기에 기대고 있다는 점*을 사유하도록 만든다. (30) 푸코의 주장에 따르면, 섹스가 지금까지 오해되어 왔기 때문에 제대로 알아야 할 어떤 것으로, 억압되어 왔기 때문에 해방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재현하는 것은 그 자체로 성의 한 요소로 작용한다. 무엇보다 섹스에 대한 이런 재현들은 근대적 성에 특정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한다. 그런데 *이는 특정한 형태의 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한다*. 푸코가 말했듯이, 18세기와 19세기 동안 욕망이 개인의 내면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그때까지 육체의 표면에 놓여 있던 에로티시즘을 효과적으로 대체하는 광범한 언어화 과정을 촉발시켰다. 성담론은 이런 유형의 쾌락을 더 근원적이고 자연적이지만 여전히 환상적인 욕망의 대체물로 보았다. (31) 억압되어 왔다고 가정되는 성의 형태를 언어화하려는 시도는, 인간의 본질적 본성과 문화에 의해 부여된 개별 정체성을 구별하는 행위를 반복한다. 하지만 이런 구별을 통해서는 문화와 자연을 상호 의존적 구성물로 다룰 수 없다. 이 상호 의존적 구성물은 문화가 수행하는 정치적 기능이다. 푸코만이 성의 연구를 욕망의 본성에서 욕망의 정치적 효용성으로 이동시켰다. 그는 근대 욕망이 글쓰기에 기대고 있다는 점을 주장하기 위해 욕망과 글쓰기의 대립을 거부한다.  … 다시 말해 *푸코는 억압을 수사적 비유일 뿐 아니라 욕망의 생산수단으로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33) 내가 주장하려는 논점은 근대문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여성적 영역과 남성적 영역을 만들어 내기 위해 언어의 해체가 일어났다는 점, (34) 나는, 젠더화된 근대 주체성은 19세기 시와 심리이론에 기호학을 제공해 주기에 앞서 먼저 여성용 글쓰기에서 여성적 담론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다. *성담론이 사람들의 상식 속으로 들어가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자신들이 타인에게서 욕망하는 바를 이해하도록 만든 것은 18세기의 인식론적 논쟁이 아니라 젠더화된 담론*이었다.” 

- 낸시 암스트롱 <소설의 정치사>


글쓰기(혹은 언어)와 자꾸 엮어서 생각하게 된다. 추측건대 스피박이 말하는 *전략적 본질주의*는 이런 의미일 것이다. 규정 당하지 않기 위해 규정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규정한다는 것은 본질주의라는 혐의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셀프 규정도 마찬가지. 어쨌든 우리는 엮여 흐르고 있는 의미들을 끊어내 절단면을 만들어 냈을 때만 의미화 할 수 있지 않는가. 얼마나 날카롭게 잘 끊어냈느냐가 잘 쓴 글의 척도 아니겠는가.) 언어활동 자체에 내장되어 있는 것이 본질이니까. 그러나 그것은 아무리 정교하게 끊어낸다 한들 실재 일 수는 없다. 라캉. 결여. 언어. 그러니까 언어 자체에 내장된 결여. 언어로 다 포섭되지 않는 나머지(실재). 우리는 거기에 다다르고 싶어 하지만. 언어로는 실재를 완벽하게 잡아챌 수 없다. 언제나 의미의 여분이 남는다. 그래서. 현실에서 중요한 것은 시니피앙. 결국 그걸 가지고 하는 게임 아닌가. 그렇다면 누구의 언어로 게임에 참여할 것인가. 타자들의 언어? 아니라면… 그들의 목소리에서 가까스로 추출해낸 나의 언어. 


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해체되기를 언제나 염두에 두며. 내가 주체가 되어야 하는 까닭은 근대가 규정하는 타자로 남고 싶지 않기 때문이며. 때때로 나의 입장에서 잠시 같이 서줄 사람들의 시야와 공명하는 것이며. 그건.


“(52) 다시 한번 우리는 ‘본질주의’의 문제, 즉 모든 여성이 실제로 억압받는 공통의 위치와 단일한 공통의 입장을 공유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도나 해러웨이와 같은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인식론자들은 확실히 서로 중첩되는 여러 억압의 형태가 존재하며, 그래서 또한 수많은 ‘부분적 시각 partial perspectives’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 시각 각각은 실재의 어떤 차원에 관해서는 통찰력이 있지만 다른 차원에 관해서는 왜곡되어 있다. 이에 대한 해러웨이의 은유는 *우리 모두가 각자의 타자의 피로 세공된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의 어떤 양상을 보는 능력은 언제나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특정 타자에 대해 특권을 갖는 데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 앨리슨 스톤 <페미니즘 철학>



타자의 피로 세공된 눈을 가지는 것. 즉, 나는 점점 더 무고하지 않아질 테다. 언어를 가질 거니까. 나에게도 나의 죄를 고백할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아마 나는 아주 엉망으로 개념들을 활용/오용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나의 공부라고 생각하고 부끄러워하지 않기를 결단한다. 나에겐 내가 쓰는 것의 진위 여부를 보증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마도 없지만 부지런히 읽었다는 것으로 정당화하련다. 부끄러움마저 책임지고 감당하기로 한다. 해체를 염두에 둔다는 것은 허심해지기로 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잘못 알고 있거나 잘못 떠들었다면 그건 기꺼이 고치면 된다. 다 허물어도 된다. 파도는 덮치고 모래는 쓸려간다. 자국은 남지 않게 될 것이다. 인간 자신이 구축한 판타지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아무리 어떤 성을 쌓고 그림을 그린 대도. 바람은 파도는 불가항력. 


나는 내가 만든 것들이 폐기처분 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들어 내는 과정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세계의 문제는 자신들이 주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건 세계에 속한 내게도 있다. 


앎비앎 친구님의 글속(https://blog.aladin.co.kr/798187174/15259889) 아래 문장에 영향받아 썼다. 종종 탈식민주의/포스트구조주의 텍스트에서 등장하는 미소지니적 인식에 나는 분노와 같은 밀도의 긴장감을 느낄 때가 있다. 타자의 피로 세공된 눈.에 대해 더 알아가고 싶다.


그러니까,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내가 발견한 파농은, 탈식민을 시도하는 지식인이되, 완벽한 인간 백인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백인 여성이 필요한 혹은 백인 여성을 ‘도구화’  해야만 하는 유색인 남성이다. 오리엔탈리즘의 렌즈로 ‘니그로’로 규정된 남성이 똑같은 방식으로 ‘여성’을 타자화,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고,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 혹은 인식이 내 읽기 방식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적어도 내게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그렇게 읽혔다. 이 책의 저자는, 파농을 그렇게’만’ 읽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한다.”

- 단발머리, <전략적 본질주의>


(덧, 또 민원들어오겠네. 알아먹게 쓰라는ㅋㅋ 아직은 공부가 부족해서 안되겠습니다. 10년 뒤에는 도전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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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항주체인 여성의 전략적 본질주의
    from 책이 있는 풍경 2024-01-30 11:01 
    첫 번째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라는 텍스트가 가진 독특함이다. 저자 이경원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 보자면 ‘딱히 자서전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전문학술서로 보이기도 힘든 이 책은 정신의학, 심리학, 철학, 사회학 등의 온갖 범주를 넘나든다. (55/624) 파농의 정신과 삶은 사망 이후, 그가 선택한 조국 알제리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서서히 흩어지고 만다. 오히려 파농을 가장 ‘파농답게’ 기억한 곳은 생전에 파
 
 
단발머리 2024-01-29 17: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은 글입니다.
잘 써서 놀랍고 빨리 써서 놀라워요.
나의 앎비앎 친구글에 먼댓글 써야 하는데 이번주에 우리 교회 부흥회라 나 지금 교회 가요!
일단 아멘!! 하고 올게요! 😘😘😘

공쟝쟝 2024-01-29 17:43   좋아요 2 | URL
아. 나는 왜 이렇게 좋은 글을 빨리 써버리는 것인가. 대체 사유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저 대신 회개 부탁드리오며..... 나 내일 마감인데 이거 쓰고 있어서 지금 똥줄 타기 시작... 주여. 제게 체력을 주세요.

단발머리 2024-01-29 17:45   좋아요 2 | URL
그걸 중점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주님! 우리 쟝님에게 체력을 주소서!
새 힘을 주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