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살아있는 자 전두환
고나무 지음 / 북콤마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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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광주에 나타난 날, 하필 광주 출신 가수 승리가 자신이 ‘국민역적 되었다’는 등의 자의식 과잉을 보여주는 바람에 제 때에 모두 함께 혀차고 침뱉지 못하는 것이 화났다.(솔까.. 국민 급의 역적은 전씨에게 가야하지 않냐..)

그러다 문득 내가 그에게 “관성적으로 침뱉어(337)”오지 않았나 싶어 읽었고 덮고 나니 내 미움에 무엇이 빠졌는지도 조금 알게 되다.

“(246) 선행을 영웅화하고 악행을 악마화하는 지적 태도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센스 있는 책 표지와 제목, 무엇보다 저자의 필력과 태도가 마음을 잡아 챈다. 구태여 악을 이해하려는 이유는 나의 단순한 미움이 복잡한 악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아서.... 물론 이해한다고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는 살아있다.
전두환은 “박제된 악마나 한물간 개그맨(13)”이 아니다.
한마디 더 덧붙여 화내보자면 2019년 봄, 자유한국당 지지율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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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빈센트를 잊고 있었다 - 빈센트 반 고흐 전기, 혹은 그를 찾는 여행의 기록
프레데릭 파작 지음, 김병욱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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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사람을 한면만 보고 멋대로 이상화하면 안된다. <반고흐, 영혼의 편지> 속에 나타난 고흐는 이상을 위해 자기 자신을 너무 몰아붙여 안쓰러운, 선량하고 미련한 사람이었으나. 프레데릭 파작이 쓴 전기 속에 나타난 고흐는 일종의 구원자 컴플렉스에 시달리는 실패자이자, 세상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집요하게 자신을 완성하려는 괴팍한 고집쟁이 그 자체다. 게다가 연애는 드럽게 못하고, 무슨 사창가는 왤케 많이 다니는 거며, 평생 가난에 시달렸다면서.... 빈대생활 와중에 길에서 거둔 여자와 살림도 차리고, 그녀의 사생아‘들‘까지 거두어 갓난아이까지 키워내는 정녕 박애...주의자... (내 가족이었으면 진짜 뒷목 잡고 쓰러졌다.) 그를 후원해준 동생 테오에 대한 궁금증이 더 깊어짐. 부처의 환생인가.


라고 마구마구 화내며 적었지만,

읽으면서 ‘빈센트’라는 이해하기 힘든 캐릭터의 입체적 매력에 더 흠뻑 빠졌다. 파작의 유려한 문체도 한 몫 했지만, 고흐의 글들이 그의 생애와 함께 적절히 인용·배치되어 조금 더 깊이 이 인물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이를테면 아래와 같은 문장들.

“(61) 처음에 사람들은 호기심에 이끌려 이 신참 전도사의 설교를 들으러 왔으나, 그의 설교를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더 오기를 망설인다. 그의 설교를 듣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욕설을 하는 일이 잦아진다. 금방 줄이 듬성듬성해진다. 빈센트는 이에 개의치 않고 더욱더 열심히 설교한다. 그는 정원의 오두막에서 자기로 결심한다. 그의 그런 자기 희생에 사람들이 불안해한다. 방의 안락함을 거부하고 밀짚 위에서 잠을 자는 이 ‘하느님의 미치광이’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누구이기에 빵과 쌀과 당밀만 먹고, 차가운 날씨에 맨발로 걷고, 포장용 천 조각만 걸친단 말인가?”

ㅎㅎㅎ
이런 부분이 딱 이 부분만 있지는 않아서, ‘이 인간 참 징하다!’ 고 감탄(!)했다. 그가 화가여서 다행이지만, 꼭 화가가 아니라도 뭐라도 되었을 것 같다.... 😨😨

다만 현실에서 이런 전도사를 보면 좀 무서울 것 같고, 이런 선생님을 보면 도망다닐 것 같으며, 그가 보험설계사나 뭐 비슷한 계통의 세일즈를 했다고 생각하면.... 후우... 화가여서.. 창작자여서 다행이다.. 😞 빈센트씨, 진로를 잘 설정하셨군요..

“(254) 형의 주머니에서 테오는 형이 쓴 편지 한 통을 발견한다. 편지는 다음과 같은 말들로 마무리된다. ‘글쎄, 내가 해야 하는 일, 난 거기에 내 인생을 걸었고, 그 일로 내 이성은 반쯤 망가져버렸어 - 그래, 좋아 -한데 내가 아는 한 너도 장사꾼 부류는 아냐. 그래서 내 생각엔 너도 마음을 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진정으로 인류와 더불어 행동하면서 말이야. 대체 뭘 어쩌려는 거야?’”

광기와 맞닿아 있는 듯한 집요한 정열. 꾸준한 열심. 자신이 아는 만큼을 삶에 구현하려 했던 현실에서 만나기 진짜 힘든 사람. 그래서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겠지.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사람에게는 생애를 통틀어 쓸 수 있는 일정량의 ‘생의 에너지’ 같은 것이 있어서, 짧은 시간 안에 압축적으로 그 에너지를 다 써버린 이들은 빠르게 세상을 떠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이를테면 고흐나 벌써 올해 30주기라는 기형도 같은. 그들의 시간은 다른 이들과는 달리 그들 안에서는 매우 천천히 흘러서 ㅡ 고작 서른 몇 해 뿐 일지라도 남들이 평생 느낄 것을 다 느끼며, 순간순간을 강렬하게, 아주 밀도 있게 자기 몫을 다살고 간 것은 아닐까하고.

범인인 나는 밀도 있는 삶보다는 가늘고 길고 몸이 건강한 삶(!)을 꿈꾼다. 그러나 어떤 작품 속이든 혹은 역사 속 인물이든 고흐같은 삶에 눈을 떼지 못하게 되는 것을 보면 역시 인생이 한,번, 뿐인 것이 아쉽다.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욕심. 그 삶들이 탐나서 영화를 보고 책을 읽을 때가 많다. (엿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배불러서 엄두는 안나는 듯?ㅋㅋ)

늦은 저녁 카페테리아, 압생트를 앞에 두고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에 대한 논쟁적 이야기를 끊임없이 횡설수설 하고 있을 사회성이 없어보이는 고흐를 상상한다.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나는 그의 전혀 신경쓰지 않은 외모에 놀라지 않을 것이며, 따뜻한 시선으로 그 맥락없는 이야기를 채근하거나 비난하지 않으며 끝까지 들어주고 싶다. 물론 다음 날 눈뜬 빈센트는 취한 어제가 기억 안나겠지만, 그래도 다른 아침들보다는 후련한 마음 상태였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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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갑자기 미안하네...;;; 전날이 기억은 안나지만 기분만큼은 후련했던 20대의 숱한(!!!!)아침들.
아, 따뜻한 눈의 내 사람들아~ 이제와서 사과할게...미안. 난 고흐도 아니었는데.....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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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나는 빈센트를 잊고 있었다. 하지만 아! 광기 발작 이후의 차가운 평온을 말 해주는 그의 자화상, 무감동한 시선으로, 입에 파이프를 물고 있는 그의 그 귀 잘린 자화상 앞에서 나는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던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밭두렁 길에 잘린 밀밭,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하늘, 그리고 풍경의 거짓 정적에 흠집을 내는, 검은 십자가 같은 그 까마귀들은 또 얼마나 감동적 이었던가.
물론 나는 미술관들에서 그를 다시 보곤 했다. 그는 환한 빛 속으로 솟아올라, 언제나 곧장 나의 두 눈에 부딪히곤 했지만, 그러나 나는 그를 잊고 있었다.
그의 남프랑스 그림은 나의 숨을 멎게 하곤 했다. 그 많은 물감, 그 많은 색깔, 그 많은 태양이라니.

(50)
1878년 7월 5일, ㅡ너무 힘든 공부에 낙담한 빈센트는 에턴의 부모님 댁으로 돌아간다. 암스테르담에서 보낸 이 열다섯 달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하기다. ˝내 인생 최악의 시기였다.˝
그는 자신을 실패한 설교자로, 아니 실패자 그 자체로 여긴다. 그런 감정이 그에게 소학교 시절의 불행들을 상기시키고, 자신의 실패를 곰곰이 되씹으며 그는 지독한 엄격주의자 프로테스탄트로 행동한다. 자신의 수치를 한입 가득 들이마시는 것이다.

(216)
이제 빈센트는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는다. 그에겐 포도주잔이 거부된다. 그는 압생트에 만취하던 때를 기억한다. 그에게 생생한 색깔을 고취시킨 것은 바로 파리의 카페들에서 미친 듯이 마시던 알코올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림을 좀 더 칙칙하게 그리고 싶어”한다. 때때로 그는 창문의 쇠창살 앞에서 되씹는다. ˝무슨 짓을 해도, 돈 문제는 여전히 군대 앞의 적처럼 저기 있구나.˝

(255)
빈센트가 죽은 지 6개월 후, 1891년 1월 25일, 테오 반 고흐도 위트레흐트의 한 요양소에서 구금생활을 하다가 사망한다. 두 형제의 시신은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작은 공동묘지에 나란히 안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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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영혼의 편지 (스페셜 에디션, 양장)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옮김 / 예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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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의자였던 고흐에게 사랑하는 동생은 돈(현실)에 대한 인식을 끊임없이 환기 시켜주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림을 추구하면 따라올 수 밖에 없는 자신의 경제적 무능이, 뒷바라지하는 동생에게 미안함을 느끼게 만들고 종래에는 그의 마음을 황폐하게 했을 것이다. 


고흐가 조금 더 뻔뻔한 류의 자의식 과잉의 혹은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자기‘만‘너무 중요한 인간이었더라면 미쳐버릴 일은 없었을 것이고, 동생(테오)에게 당연한 듯 요구했을 것이며, 그랬다면 테오가 미쳤을 지도 모르겠다.
부인의 식모살이로 번 돈을 사업으로 날리는 인간, 누나가 여공으로 뒷바라지 해서 공부시켜놨더니 지가 잘나서 명문대(?)갔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어쩐지 예시에서 젠더가 강조되는 것은 요즘 읽는 책들 영향탓),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의 남모르는 희생과 헌신을 너무도 당연히 여기는 이기적인 인간들 (나포함) 세상에 꽤 많잖아.

˝(47) 내가 계속 그림을 그리는 일에 대해 네가 반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신 나도 가능한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하마.˝

하지만 이 인간은 정말 끊임없이 미안해 했고, 미안해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정말 매번 최선을 다해서 생의 에너지를 다 소진시켜 버린듯 하다. 고흐는 너무 착하고 동생을 사랑했고, 동생 테오도 너무 착하고 고흐를 사랑했다. 이 형제들의 삶은 서로 너무 사랑해서 생긴 파국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

˝돈이 없구나, 돈 때문에 미안하구나, 돈을 좀 보내다오, 언젠가는 네게 돈을 부탁하지 않고 싶은데, 돈이 없구나˝가 슴슴이 베인 그의 편지. 먼저 서울에 취직한 죄로 3년 정도 경제적으로 신세졌던 동생이 생각나서 많이 괴로웠다. 미안해서, 너무 미안해서, 정말 정말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그 마음. 미련하고 안쓰럽고, 또 이해되기도 하고 해서. 결국엔 세상에 지고, 미쳐가는 마지막 부분에서는 많이 울었다.


˝(243) 나는 단순하지만 지속적이고 결정적인 것을 찾아내려고 노력해왰다. 그런데 이제는 이미 패배한 싸움을 해왔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내 성격의 나약함이 문제인지도 모르지.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자책감만 남았다. 발작이 일어난 동안 그토록 소리를 많이 지른 까닭도 그 때문이겠지. 나 자신을 지키고 싶은데 지킬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자신이 선택한 어려운 길, 돌아보지 않음,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까지 완벽해야한다는 강박. 그리고 현실적인 이유로 중도반단한 (돈과 명성에 그림을 파는) 이들에 대한 분노. 그 분노는 자기 자신에게 고스란히 돌아와 현실과의 타협을 튕겨냈을 것이다.

아, 미련한 사람. 그래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
책을 읽으면서 그 미련한 열정을 응원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고흐가 미치지 않으려면 무용한 응원보다는 부자 후원자가 필요했겠지!? 성격상 멋진 후견인이 나타나도 미안해서 (고갱 등 더 고생하는 화가들) 더 자신을 질책하며 몰아붙였을 것 같지만. (넘 깨끗해서, 영원히 고통받는 영혼ㅠㅠㅠ)

*

종종 타인의 우직한 신앙과 신념을 비웃기도 하고, 그것에 옳고 그름을 가져다 대려하는 나의 편협이 조금 비루하게 느껴졌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데 모든 것을 내어주고 하나를 취하여 붙잡는 이들이 못나 보일때가 있다. 어쩌면 부러운 걸지도.
모든 열정을 낭만화할 필요는 없지만 고흐같은 낭만적 열정가들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응원할 수있는 마음을 남겨둬야지.

*

덧, 젊고 열정있는 예술가, 창작자들게 사회적 보장과 지원을 해주는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



(85)
여전히 흡족해 할 수 없었다. 기억 속에는 낮에 본 장관이 생생하게 남아 있어서 도저히 그 그림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장면의 흔적은 남아있었다.

(107)
나는 개로 남아있을 것이고, 가난할 것이고, 화가가 될 것이다. 또 나는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169)
오늘 아침, 꽃이 핀 자두나무가 있는 과수원을 그리고 있는데, 갑자기 멋진 바람이 불어오더니 다른 곳에서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광경을 보았다. 그럴대면 작고 하얀 꽃잎들이 햇빛을 받아 불꽃처럼 반짝이곤 한다.
그 자면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순간순간 땅이 진동하는 걸 바라볼 각오를 하고 그림을 그렸다. 이 하얀색 화면에는파란색과 라일락색, 노란색이 많이 있다. 하늘은 하얗고 파랗다.

(174)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기를.

(220)테오
형은 내게 빚진 돈 얘기를 하면서 내게 갚고 싶다고 말하는데, 그런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 내가 형에게 원하는 것은 형이 아무런 근심 없이 지내는 거야. 내가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다는 건 맞아. 우리 둘 다 가진 게 별로 없으니 너무 많은 짐을 지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지. 하지만 그 정도만 염두에 둔다면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지낼 수 있을 거야. 아무것도 팔지 않더라도 말이지.
...하지만 그 많은 그림을 한점당 100프랑으로 계산하는 건 이해할 수가 없어. 그 그림이 100프랑씩에팔리기를 바란다면 그건 아무 가치가 없다는 말이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이 지긋지긋한 사회는 그걸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 편이거든. 하지만 이사실을 알고 있다면 우리도 사회가 하는 대로 하면서 이렇게 말하자고, 우리도 그거 필요 없다고 말이야.
...형이 너무 힘들게 일해 와서 마치 살아본 적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할 때면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를 거야.
다른 무엇보다 난 그게 사실이라고 믿지 않아. 실제로 형은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것도 이 땅의 위대한 사람들처럼 품위 있게. 물론 형이 지나치게 곤궁하게 살아왔다고 느끼지 않도록,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빵을 갖지 못해아프게 되는 일이 없도록 적절하게 내게 미리 경고를 해주기를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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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코 후미코 -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 제국의 아나키스트
야마다 쇼지 지음, 정선태 옮김 / 산처럼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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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에 만난 인물 중 가장 매력적이었던 사람. 가네코후미코. 그를 알게 된 것은 영화 <박열>. 영화를 본 후 박열보다 후미코가 더 짙게 마음에 남았었다. 깊이 매료되는 대상이 있다면, 그 인물이 가진 매력과 함께 자신의 무의식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차였다. 내 안에 무엇이 그렇게 그녀에게 공명했는지 알고 싶었고, 평전을 읽기 시작했다. 


“일본인 식민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인간’이었던 조선인이라는 존재가 후미코에게는 ‘보였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물론 자신과 같지는 않았지만,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는 조선인들이 할머니 보다는 친근한 존재로서 곁에 있었다.(p.74)”

그녀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인 것이 좋았다. 무적자, 일본인, 여성, 그리고 부모에게 마저도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어린아이. 어쩌면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깊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후미코는 다른 이의 고난에 무감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고통에만 몰입되었다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울음을 울면서 타인의 눈물을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사회주의 사상이 나에게 특별히 새로운 것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는 과정에서 겪었던 일들을 통해 형성된 나의 감정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것을 이론적으로 확인해주었을 따름이다. 나는 가난했다. 지금도 가난하다. 그 때문에 나는 돈 있는 사람들에게 혹사당하면서, 가혹한 대우를 받으면서, 괴롭힘에 짓눌린 채 살아왔다. (p.114)”

나는 가난했다. 지금도 가난하다. 한번도 부자였던 적이 없다. 꾸준히 이어지는 물질적 결핍. 나는 그녀가 가난해서 좋았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후미코가 놓쳐버린 행복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박열과 한참 사상운동을 하고 있을 때, 활동을 지지하는 누군가가 그들의 경제생활을 고려하여 간이식당을 낼 것을 제안했다. 후미코는 자신들에게 처음 찾아온 행운을 즐겁게 승낙했다. “정말이지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운명입니다. 나는 나물 무치는 법까지 연구했는데..(p.426)” 물론 식당을 낼 겨를도 없이 그녀는 대역죄인이 되었다. 식당주인이 된다해도 그들이 부자가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녀는 가난과 싸우고, 생계와 싸우면서도 세계의 생겨먹음을 걱정하고 천황제와도 싸웠으며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싸웠다.

“이런 세상에서는 고학 따위를 해서 훌륭한 인간이 될 턱이 없다는 것을! 소위 훌륭하다는 인간들만큼 하찮은 자는 없다는 것을 나는 명확히 알았다! 사람들에게서 훌륭하다는 말을 듣는 게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의 참된 만족과 자유를 얻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바로 나 자신이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지금껏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노예로 살아왔다. 너무나 많은 남성들의 장난감이기도 했다. 나는 나 자신의 삶을 살지 않았다. (p.115)”

기성의 가치관에 편입되기 위해 아등바등한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 무엇보다 나 자신을 살 수 없다면 훌륭할 필요도 없다는 것. 그녀는 ‘자기 자신’을 살기 위해 거듭 마음 먹는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나 자신’에 대한 깊은 통찰. 그리고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세상과의 투쟁.

나 또한 끊임없이 궁구하고 있다. 나 자신을 살면서 누군가와 연대하는 방법. 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기꺼이 헌신하는 방법. 세상과 싸우면서 세상에 물들지 않는 방법..

“‘당신은 민족운동가이십니까... 나는 사실 조선에서 오랫동안 산 적이 있기 때문에 민족운동에 몸담고 이는 사람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조선인이 아니어서 조선인처럼 압박당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과 함께 조선의 독립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3.1운동에 깊은 공감을 보였던 후미코가 이런 질문을 던진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그것은 후미코가 자신이 밑바닥 체험과 피차별의 경험을 거울삼아 조선인의 해방운동에 지속적으로 깊은 공감을 보이기는 했지만, 자기가 억압민족에 속해있는 까닭에 피억압 민족인 조선민족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예리하게 통찰하고 있는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p.124)”


내가 그녀에게 푹 빠진 강력한 이유 중 하나는 솔직한 단호함이다.
당신과 함께 싸울수 있지만, 나는 당신이 아니다. 비슷한 처지에 놓였다고 하여 섣부르게 그를 다 이해했다고 단정 짓지 않는 모습.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며 연민과 동정 또한 평등일 수 없다는 단호한 태도.

“기성의 가치관에 저항했던 박열은 빈곤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고, 일본에 의해 억압받고 있는 민족적 체험에 입각점을 두고서 열정적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 박열의 이렇듯 철저한 투쟁자세는, 지금까지 만났던 일본인 사회주의자의 기성가치관에 대한 타협적 태도와 달리 신선한 매력으로 다가왔음에 틀림없다. 자서전에 후미코는 박열을 만나고서 “저다지도 그를 힘차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찾고 싶었다. 그것을 나의 것으로 삼고 싶었다”고 술회했다.
후미코는 박열이 “직접적인 민족운동가는 아니지만 언제나 자아에서 출발하여 그 운동을 위해 생명을 걸 수 있는 힘을 가진 남자라는 것을 알았다”고 진술한 바 있다. 그러나 이는 후미코가 박열을 자신에게 맞추어 해석한 것이다. 후미코가 자기를 철저하게 투시함으로써 비전향 즉 반천황제를 꿰뚫고자 했던 데 비해, 자기 사상의 기저에 민족을 두고 있었던 박열은 그녀만큼 자아를 깊이 있게 탐색하지는 않는다. 제국주의 나라의 국민은 내셔널리즘으로부터 탈피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리고 당연하게도 억압받은 식민지 민족의 구성원에게는 개인의 해방보다 민족해방이 우선하는 과제라고 말할 수 있지만, 민족과 개채로서의 자아의 관계를 심도 있게 묻지 않은 것이 박열이 얼마 안 있어 옥중에서 조선민족으로부터 이반하여 천황제에 굴복하고 전향한 내적원인이 아니었을까. (p.142)“


자신에게서 나온 것을 살기 위해 분투했던 후미코와 투쟁에 헌신적이었으나 자아를 탐색하는 데는 서툴렀던, 그러나 분명 탁월한 조직가이자 혁명가였을 박열. 그 둘의 마지막 모습이 같지 않았던 이유는 두 사람이 처한 민족적 입장이 다르기도 했겠지만, 남녀 성차이가 분명히 존재하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해본다.
끊임없이 침해당하는 것이 기본값이었던 “여성” 후미코에게는 스스로의 안을 깊이 더듬어서 그것을 지켜내고 빛내며 살아가는 것-자신을 설득하는 것-이 중요했을 것이다. (박열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겪은 남성 동지들 중에는 ‘지키는 운동’을 하더라도 ‘확장’이 기본값인 경우가 많았다. 즉, 현상을 해결하고 일이 잘되게 되는 데-타인을 설득하는 것-중심을 둔다.

“....동시에 여자로서도 박열에게 만족하고 있었기에 몇 가지 문제를 뛰어 넘어 박열과 함께하는 죽음을 긍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후미코는 구리하라 가즈오에게 보낸 것으로 보이는 편지에서도, 한 달에 60전 이상 차입해줄 여유가 있다면 박열에게 주고 싶다. 뭔가를 먹게 하고 싶다. 자신을 포함에서 동료들의 박열에 대한 몰이해가 실패의 희생물로 그의 쇠약한 신체를 옥사에 갇히게 하고 말았다고 말한 뒤 ‘그가 뭔가 먹을 수 있게 해주세요. 간절히 바랍니다. 그의 부탁은 가능하다면 뭐든 들어주세요’라면서 박열에 대한 아내로서의 생각을 적고 있다. (p.312)

사랑꾼 후미코. 부러워서 열심히 연표를 뒤적인 결과, 스물 세 살의 짧은 생애 동안 박열과 함께 살았던 시기는 대략 1년 6개월 정도.. 한참 뜨거울(?) 때 형무소가 갈라놨으니 이 절절한 편지가 더욱더 이해되는 바,
그렇다 하더라도 재판장에서 마저 

“나는 박열을 알고 있다. 박열을 사랑하고 있다.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과실과 모든 결점을 넘어 나는 그를 사랑한다. ... 부디 우리 둘을 함께 단두대에 세워 달라고. 박열과 함께 죽는 다면 나는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박열에게 말해두고자 한다. 설령 재판관의 선고가 우리 두 사람을 나눠놓는다 해도 나는 결코 당신을 혼자 죽게 하지는 않을 것 이라고. (박열 후미코 재판기록 748족)” 

이런 뜨거운 고백을 할 정도인 그녀의 당당한 모습이 가장 좋았던 것 같다. 흐흐.

영화 속 대사와 책속의 이 구절은 몇 번을 반복해 읽어도 여전히 내 마음을 떨리게 한다. 진정한 사랑은 두 사람에게서 머무르지 않는다. 투쟁하게 한다. 연대하게 한다. 각자의 이상을 실현시키게 만든다, 그리하여 그녀의 사랑은 박열 개인에 대한 사랑임과 동시에 일본 천황제(일제는 천황제를 바탕으로 민족주의를 강화하며 곧바로 제국주의로 나아갔다)에 대한 목숨을 건 투쟁이자, 식민지 조선에 대한 연대이기도 했다.

“나는 ‘스스로 자신의 생각을 실행해 보’는 것 이에는 그것을 시험할 만한 적당한 방법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리얼리스트입니다. 그리고 실천가입니다.. 누가 뭐라해도 자신의 생각, 자신이 말한 것만은 모조리 실행합니다. 적어도 실행해보려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말이나 훌륭한 논리가 내 앞에 널려있습니다. 하지만 실천할 수 없는 말이라면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실행의 시련을 거쳐야만 비로소 확실한 것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실행해 봅니다. 한 곳에 고착되지 않고 흐르면서 자신의 생명의 성장을 추구하는 나는 내일 일을 걱정하여 오늘 말하고 싶은 것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영악하지 못합니다. 동시에 어제 말한 것에 얽매어 오늘을 말하고 싶은 것을 거둬들일 정도로 갇혀있지도 않습니다. (p.308)”

그녀는 실행을 통해서 자신의 사상을 형성하고, 또 실천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구체화하는 방법론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그녀의 삶과 그녀의 사상은 일치했다. 그녀의 일관됨이 좋았다.

“불령사 동인의 회합 장소였던 박열의 집에는 ‘불령사’라는 표찰이 당당하게 걸려있었다. 이층벽에는 붉은 잉크로 커다란 하트무늬가 그려져 있었고, 그 안 에는 검은색으로 ‘반역’이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씌어있었다.(p.168)”

시대가 그들을 반역자로 몰지 않았다면, 다소 급진적인 자신들의 생각을 이처럼 개구지게 표현하면서 앳된 스물세 살의 얼굴을 하고 살아갔겠지.

슬픔과 고난으로 엉겨붙어있는 그녀의 짧은 생을 사랑한다.
평등과 존엄을 자기 자신에서부터 출발해서 살아보고자 했던 그녀와 같은 사람 덕분에, 나는 감히 아직까지는 ‘모든 인간은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어떤 선언이나, 제도가 아니라 - 자신이 선언하고, 평생 지켜가기 위해 노력해야하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 그녀를 좋아하는 만큼 그녀를 닮아가고 싶다. 정말로. 


p.5-6
자신의 삶을 초점으로 하여 사회적 모순을 자각하는 순간, 실천적 삶을 통해 모든 억압에 저항하는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개인의 삶은 ‘역사적 삶‘으로 비약한다. 그리고 역사적 삶을 살아낸 사람들은 지금-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쉼없이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 생명력을 유지한다. 당신들은 당신의 생명과 정신의 진정한 주인인가? 주어진 삶을 아무런 저항없이 받아들이는 노예인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물들, 예컨대 로자 룩셈부르크나 체게바라 그리고 사파티스타의 지도자 마르코스 등은 기존의 제도와 가치관이 부여한 삶이 ‘노예적‘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기꺼이 탈주의 길을 선택한다. 그들은 정신의 파르티잔이다. 새로운 삶과 사유를 꿈꾸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정신의 파르티잔! 그들은 필연적으로 이상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일상적인 삶에 안주하는 범인들의 눈에 그렇게 비칠 따름이다.
그들에게 이상은 현실처럼 구체적인 모습이었을 터. 도스토예프스키는 <악령>과 <미성년>에서 낙원에 대한 그리움 없이는 인간으로서 살 자격은 물론이고 죽을 자격도 없노라고 예언한바 있지 않은가.

(p.7)
지금 내가 찾고 있는 것은 남자가 아닙니다. 여자도 아닙니다. 인간일 뿐입니다. 나는 인간으로서 살고 있습니다. 나는 이상의 이유에 기초하여 ‘연약한 성을 지닌’ 여성으로 간주되는 것을 거부함과 동시에 그런 전제 위에서 내게 제공되는 모든 은혜를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상대를 주인으로 간주하여 시중드는 노예, 상대를 노예로 간주하여 딱하게 여기는 주인, 이 둘 모두를 나는 배척합니다. 개인의 가치와 평등한 권리 위에 선 결속 그것만을, 오로지 그것만을 긍정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 상호간의 정당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와 타인의 모든 교섭을 그 기초 위에서 구할 것임을 나는 다시금 소리 높여 선언합니다.

p.126
근대 일본인은 서구의 근대에서만 인간해방의 이념을 구했다. 근대일본은 일본문명에 의해 억압받고 있는 조선인을 멸시하거나 아니면 무관심의 저편으로 추방해버렸다. 그것은 서구의 문명대국을 정점으로한 세계지배와 차별구조를 바꾸는 게 아니라, 그 구조속에서 자신만이 ‘선진국민‘으로 올라서기만 하면 그 뿐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환상 속의 해방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후미코는 역으로 일본문명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인의 일원인 박열의 모습에서 자신이 살아갈 방향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것은 근대세계의 지배질서 맨 밑바닥에 놓여있던 인간의 해방을 향한 길에서 자기 해방을 서로 포개는 보편적인 인간해방의 길이었다.

p. 310-11
˝그러나 나에게는 백 명의 동지보다 나 한사람의 자아가 훨씬 소중했으며, 설령 적과 우군으로부터 동시에 버림받아 감옥문을 넘는 순간 자살을 한다 해도 나는 지금의 나 자신을 획득할 필요가 있다˝라고 그당시 후미코는 생각했던 것이다.
박열과 그녀의 사상에서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박열의 행위가 실패함으로써 자신이 희생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후미코가 그와 함게 죽겠노라고 각오한 것은, 이미 서술한 바와 같이, 대역사상을 갖고 있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그녀는 사상적 차이를 뛰어넘어 박열과 함게 투쟁해야할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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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보급판, 백범 김구 자서전
김구 지음, 도진순 주해 / 돌베개 / 2002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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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6)



#1. 


큰뜻을 품고 상해까지 온 청년들이 결국엔 경제난으로 취직하게 되었다.(그때도 역시 제일힘든건 경제문제였구나.) 수천명에 달하던 독립운동자가 차차줄어들어 겨우 수십명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김구본인도 거지중에 상거지였다고 썼다.옥바라지때부터 봉양하던 부인은 병들어 죽고, 아들들마저 부양할수 없어 어머니가 데려가셨다. 담담히 적고 있지만, 본인의 억장은 얼마나 무너졌을까. 그때 은전한두냥을 꼬박꼬박 쥐어주며 존경과 친절을 전하던 지인의 부인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못하는 모습도 나온다

돈몇푼의 양이 아니라, 존중과 의지를 세워주는 그 마음. 운동가로사는 것도 운동가를 도와주는 것도. 그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다.

 

#2. 


운동의 호기에는 너도나도 찾아들던 임정이 청사 36달러 집세 마저 내지못할정도로 어렵던시기. 정부의 사업발전은 고사하고 이름보전하는 것마저 막연했다... 그래도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것을 인식시키기위해 김구는 동포들에게 편지사업을 조직했다.

 

여러모로 많은생각이 드는 부분. 영화암살처럼 멋있기만 한게 독립운동은 아니었을 거다.


 

#3.


여기나오는 민국6년은 대한민국6, 1924년이다. 임정은 3.1운동정신을 계승하며 만들어졌고 1919년 기미년을 원년으로 삼아서 독자적 연호를 사용했다. 대한민국 헌법이 상해임정을 잇고있다면 건국절은 1948년이 아니라 1919년이 되어야할것이다. 그저 친일반공친미를 건국으로 포장하기위해 815에 건국절 운운하는 ××들은 똑바로 알기를.

 

백범일지가 막바지에 다다를 수록. 마음이 먹먹하다.

 


이후, 정부의 분란은 일단 가라앉았으나, 경제적으로는 정부 명의마저 유지할 길이 막연하였다. 청사 가옥세가 불과 30원, 고용인 월급이 20원을 넘지 않았으나, 집세 문제로 집주인에게 종종 소송을 당하였다. (중략) 잠은 정청에서 자고 밥은 직업있는 독포들 집에서 얻어먹으며 지내니, 나는 거지 중의 상거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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