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깁스는 일주일 더 해야 한다. 약 하루에 0.15킬로그램씩 증량 중이다ㅋㅋ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병상 일지 페이퍼를 쓰라는 권고를 들었는데, 듣는 둥 마는 둥… 쓰라는 건 안 쓰고. 어제는 쇼파에 최대한 편한 자세로 안착하여 밀린 <눈물의 여왕>시청으로 감정 낭비를… 하느라 그만 지치고 말았다. 


[독서 중독자는 이 책이 뭔 책일지가 궁금하다]


용두리의 엄마 사투리가 넘나 고향 집이 생각나서(워매. 으째야쓰까잉. 엄마……) 즐겁게 보다가 막화에 드라마 속도가 너무 질질… 주인공이 “내 기억이 바로 나”라고 하는 장면들에서 정말 그럴까? 그렇긴 하겠지만. 그것만이 정말 너야? 따지고 들고 싶었다. “나로 살았으니 나로 죽겠다”라는 말. 그 완고한 [‘나’ 임 = 일종의 자긍심]에 대해 인정, 킹정 드리고 싶었지만.


논리적으로… 너에 대한 기억은 네 해마 말고도(몸도 있고). 모두가 나눠서 가지고 있잖아. 그 사람들의 기억들 역시 너라고. 즉 그들과 함께라면 너 자신을 잃어도 아주 다 잃은 것은 아니지 않나? 그러니까 살아. (드라마 넘 늘어지쟈냐) 얼렁 뇌종양 수술해. (참고로 여자 주인공 평소에 논리왕 임) 새로 태어나서, 너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그 모든 사람들의 기억을 다 흡수해서 또 너를 만들어 가!


어쩌면 이것은 나의 사춘기 이후 (나름의 심각한 숙고를 거친 관계론적) 세계관이었다. 다만 이런 종류의 세계관이 얼마나 나 자신을 무책임하게 방치하게 되는 논리로 수월하게 작용했던지에 대해서 적고 싶진 않다. 즉, 해인은 옳기도 하다. 나는 죽도록 자기 자신으로 살아야만겠는 사람들에 대해 차츰 차츰 이해하고 싶어져왔다.


다, 다르잖아. 누군가는 영혼을 질식시키느니 가스 오븐에 머리통을 스스로 넣어 질식사한다. (실비아 플라스의 예)


다리 다치고 난 뒤 느닷없는 불안이 우주 통째로 밀려와서 밤에 잠들기 전에 엉엉 울었던 날, 딱 하루 있다. 불안한 건 너무 당연하지. 실컷 울고 나니까 개운해서 푹잤다. 몇 년 전에는 그걸 느끼지 않으려고 술을 잔뜩 마셨다.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오늘의 나는 그렇지 않다. 아마, 다쳐서 술을 마실 수도 없었겠지만. 그때에 비해 상황이 딱히 좋아진 것도 아니지만. 나는 나의 ‘실체 있는’ 불안을 셈할 수 있을 만큼 가볍다. 가볍다. 가볍다니. 역시 지금이 좋아. 가벼운데다 한가하기 까지 한 나는 드라마 속 무언가가 너무도 중요한 해인의 괴로움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보았다. 절대 잊지 않아야 할 것(남편 이름)을 외우면서 수술실로 들어가는 모습에서. 


나는 누구의 이름을 부를까. 나는 무엇을 잃을 때, 가장 아까우려나.

불러야 할 것 같은 사람 말고 정말로 부르고 싶은 이름이 있을까.

머리가 아닌 입술로 외워야 하는 이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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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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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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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벼움의 증거이며. 관계론 인생관 어쩌고로 살다가 제대로 큰코다친 자의 고독한 최후이다. (😭크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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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눈을 감기 전에 다시 태어날 내게 당부할 것으로 인간의 이름이 아닌 단어를 하나 정해두기로 한다. 체력, 체력, 체력 … 새로 태어난 쟝쟝아 너는 운동을 잘하는 사람이야. (*나여, 온 몸에 새겨진 운동 못함 기억*을 상실해 줘.) 다시 태어나면 다시 살아갈 수 있다면 다른 시냅스들은 연결 안돼도 되니까… 근육 좀… 운동을 즐기고 좋아하는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 난 운동을 이렇게 못하는가. 왜 신은 내게 몸치, 박치, 음치, 런치를 주셨는 가.



서론이 길었네. 드라마 리뷰 아닙니다. 독후감 맞고요.

매일 쓰는 병상 일지는 좀 무리고 몰아 쓰는


#병상읽기 1.

“(55) 어느 날 아침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레고르 잠자는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예상치 못한 다리 부상으로 정형외과에서 읽기 좋은 책에 #카프카 의 #변신 만한 것이 있겠는가.>


나는 출근을 안 해도 되고, 부모님은 내가 아직 그레고르가 된 것을 모르시며(영원히 모르게 할 계획), 살뜰히 들어둔 보험이 있는 데다, 각자의 *불행 앞에서만* 강해지는 자매애를 지닌 여동생이 둘이나 있다(그녀들은 마치 그레고르의 여동생처럼 청소기를 돌려주고 갔다). 그렇지만 고양이 털들과 먼지는 매일 쌓이는 법이다. 매 끼니는 내가 나에게 해서 먹여야 하는 것이다. 처음엔 확실히 거동이 힘들었다. 하지만 역시 가장 힘든 것은.


“(60) 마침내 그 다리로 그가 원하는 동작에 성공했어도, 그 사이에 다른 다리들이 모조리 해방이나 된 듯이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고통스럽게 버둥거렸다. “쓸데없이 침대에 누워 있으면 안 돼.” 그레고르가 혼잣말을 했다.”


ㅋㅋㅋㅋㅋㅋ 아.... ‘쓸데없이 침대에… 누워…’ 있어도… 된다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그것이 나의 궁극의 수련 목적인 거시지만. 나는 타고 나기를 <눈물의 여왕> 속 홍해인이 아니라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에 이입하기가 더 수월한 종류의 인간인 것이다. (여기서 한 번 불러보는 그 이름 잠자,냥) 드라마 속 홍해인은 재벌 3세라서 수술 만 받으면 살겠지만… 평범한 가족의 평범한 사람들은 가족 성원에게 닥친 불행을 인식하는 순간 부턴 잠자 씨네처럼 계산 촤륵촤륵 머리 굴리겠지.


- 꼭 살아. 살기만 해.

를 부르짖는 변호사 남편 김수현? 드라마는 판타지다. 로맨스는 판타지여. 즉 바쁜 현대인의 감정을 몰아서 쓰게 끔 잘 설계되어 있단 말. 나는 끊임없이 철철 눈물을 흘리는 두 배우의 절절함에 자동으로 함께 울고 웃는 것에 걸끄러운 나 자신을 의식하며 찔끔 흐르는 눈물을 재빨리 닦아내고 현실로 돌아온다. 왜냐, 우리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찬찬히 느끼면서 곱씹기엔 할 일도 많고 걱정도 많고 사야 할 물건들이 너무 많으시다.


바퀴벌레가 된 *평사원* 그레고르는 일단 출근부터 생각한다. 빚이란 무엇인가. 대출이란 무엇인가. 가족이란 무엇인가. 가부장제란 무엇인… 사랑의 공동체인가. 기능의 공동체인가. 카프카는 알고 있다. 가족이 사실은 서로에 대한 명분의 공......읍읍🫢


아들 그레고르는 출근을 해야 했지만. 2024년 출근하고 싶어도 못하는 아들들이. 일자리가 없어요. 아, 그럼 수요와 공급의 논리에 맞추어 자기 계발을 해야죠. 살뜰히 남는 시간에는 투자를. 주식을. 코인을. 돈 벌기 참 쉬운 시절입니다. 부의 파이프라인을 2개 만드세요. 부업으로 자동 수익화를. 여러분 가난은 지능 순이며, 수저 타령은 루저들이나. 그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모든 것은 여자들이 살만하니까 눈이 높아져서이기 때문입니다. 드라마 속 재벌3세는 나를 잃는 게 싫고, 소설 속 그레고르는 출근 못하는 걸 걱정하고, 현실의 청년 그레고르들은 출근을 하.고.싶.어.서. 걱정일 것이다. 


뭐 그건 이제 여남 상관 없다. *취업 당사자*가 되려면 이미 변신된 그레고르 취급을 받으면서 스펙을 쌓거나, 시험 공부를 하며. 집이 그 처지도 안된다면 똥 값인 저임금의 노동을 감수해야 한다. 경력은 쌓이지 않는다. 숙련이 필요없는 플랫폼의 시절이니까. 키오스크가 대체해서 알바 마저 쉽지 않다. 누구나 투자자가 돼버린 현대사회는 누구나 녹아내린 돈을 복구하기 위해 엔잡을 뛰어야 하는 상황. 나랏님은 대파 값도 모르시니 알아서 각자도생 모두가 경쟁하는 한국은 빨리 빨리. 그런데 정이 많은 한민족 우리에겐 걱정도 참 많고 이 걱정 저 걱정 남눈치 보며 방어하기 위해 사야할 물건들이 특별히 더 많으시다. 바쁜 우리 쉴 때 도 가성비 넷플릭스. 눈물의 여왕. 다 보면 안된다. 유튜브로 한번에 몰아보기. 


지난 주 수업 마지막 날 선생님이 물어보셨다.

- 뭔 책을. 왜 (일반인이) 푸코 강좌를? 이렇게 열심히?

대략 이런 대답을 했다.

- 선생님. 저 역시 이런 걸 읽고 싶어 하는 제가 괴짜라고. 뻘짓이라고. 현실 도피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그걸 하고 있으면. *적어도 다른 걸 덜 해요.* 어려워서… 읽으면 지치거든요. 집중하지 않으면 못 읽고요. 유튜브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만 뒤처진 것 같고, 인스타 보고 있으면 뭔가 사야 할 것 같고, 내가 엄청 못나 보이고. 어차피 느낄 자괴감이면 차라리 어려운 책 읽으면서 느끼자 싶더라고요. 다들 각자가 욕망하는 것을 선망/책망하는 구조라면 난 책으로 하겠다. 물론 그것도 책 읽어서 알게 된 거지만. 어쨌든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지금은 좋아요. 읽다보니 남들한테 중요한 것이 나한테는 안 중요해졌어요. 그게 주는 해방감이 있다. 그러니 샘, 더 열심히 공부하셔서. 공부 많이 나눠주셔야 해요. 저는 알 것 같아요. 인문학? 철학? 그러니까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이 평범한 사람일 수록 더 필요해진 세상 같아요.


#병상읽기 2.


어쩌다 보니 #나카마사마사키 의 책들을 좀 훑어봤는데. 이 사람 문체가 재수 없다. 사람이 뭣도 없이 저렇게 시건방을 떨면 내가 동질감이…읍읍🫢🫢 아니다. 뭐시 있으니까 건방진 것이다. (나는 없지롱 ㅋㅋㅋㅋㅋ 무지의 지가 아니라 무지의 건방 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라캉. 푸코. 아마추어. 푸하하. 미리미리 나대지 말자고 일러두길 다행. 안 그랬으면 이거 읽고 수치스러워서 냅다 던졌음. 나대는 스스로를 나댄다 알고 있기를 다행인데.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치고는 행동이 교정이 안된다. 나.는.내.가.기.특.하.단.말.이.다. 옆에 김수현도 없는 데 누가 나를 기특해하나. 나나 나를 기특해... 


또 얼마 전에 주워듣게 된 풍문이 있는 데. 철학 제대로 하는 사람들은 프랑스 현대 철학은 너무 쉬워서 쳐주지 않는다고 한다ㅋㅋㅋㅋㅋㅋ (웅. 헤겔 레스토랑 읽다가 알 것 같아지긴 했다ㅋㅋㅋ너무 쉬운 것도 어려운 나 자신을 인정합니다.) 근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싶은 것이. 내가 아무리 서백남 통째로 재수 없다 씹어도 걔네가 그냥 세계 제패했겠냐고 뭐가 있응께 했겄제. 인정한다니까? 근데 남들이 쳐준다고, 나도 쳐줘야 하는 거냐?? 


제대로 읽은 사람들의 고상함이야 내 알 바 아니고, 각자는 각자의 읽기가 있지. 나는 올림픽에 나가고 싶어서 달리기 연습을 하는 게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말로 그걸 이해를 못하더라) 나의 아마추어임은 겸허하게 인정하는 바지만... 그렇다고 겸손해지면 재미가 없잖아요? 그러니 프랑스 철학 쉽게 읽는 사람들은 좀 쉽게 써달라. 나는 내 기량에 맞게 조금씩 더 어려운 것을 긴장하며 읽을 준비가 되어있다. 아, 나는 못 읽어. 보단 이 태도가 낫지 않나? 그럼 마저 자뻑을 하면서 일본에서 건너온 입문서들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암튼 철학 꼰대 냄시 철철 나는 나카마사의 <인간의 조건을 읽는 시간>을 읽다가 점점 감탄하게 되어버려서 사람이 궁금해. 마지막 부분 저자 후기 먼저 읽다가 깨닫고 말았다. 나 *이 사람이 싫어하는 사람을 함께 싫어*한다. …… (역시 좋지는 않은 데. 싫지도 않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동질감을 느끼며.

“(520) (영화 <한나 아렌트>를 보고) 세부 묘사 중에는 이러저러하게 불만스러운 점도 있었지만 영화 관람이 끝나고 한 가지 중요한 점을 깨달았다. 이 영화를 보는 사람은 누구의 시점에 동화되고 감정을 이입할까? 거칠게 말해서 세 가지 시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① 아렌트, ② 아이히만, ③ 아렌트를 아이히만의 편이라고 말하면서 비난하는 사람들. 그중 하나가 ‘정답’인 것은 아니다. 다만 무척 확실한 것이 있다. 아무런 의미 없이 ①에 동화하여 ‘감동’해 버리는 사람은 아렌트의 사상과 전혀 무관하다. 아니, 어떤 계기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사상가를 만난다면 곧장 ③처럼 행동할 사람들이리라.

이런 질문을 하면 문화연구에 한쪽 발을 들인 바보들 중에 낭패 한 표정으로 이렇게 외치며 뛰쳐나올 사람들이 떠오른다. “아니야, 제4의 선택지가 있어. 그건 이 영화도 표상할 수 없었던 사람들, 즉 목소리를 빼앗긴 사람들이야. 여기에 생각이 미치지 못한 나카마사는 수가 얕다고 해야겠지. 역시 심오한 사상을 이야기할 만한 인사가 못돼!” 영화 자체를 보지 않더라도 금방 떠올릴 수 있는 이런 생각을 트위터에 중얼거리며 낄낄거리는 놈들에게는 듣는 약도 없다. ①에 단순히 동화하는 사람들보다 질이 더 나쁘다.”

그러니까. 나는. 푸하하 나카마사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말았다. 제기랄. 팬심보다 강한 건 *안티의 동질감*이다. 정체성의 정치와 혐오의 쾌락이 (그리고 그게 드러나는 선거 결과가…) 그토록 위험하면서 치명적인 이유다.


참.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아마도 ③번의 시점에 이입했을 것이다. 그게 내가 정희진에게 배운 영화를 보는 방식이며. 아렌트와 관련한 책들을 읽을 때 스스로 가장 긁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지적 당하는 순간의 부끄러움. 아렌트가 요구하는 끝끝내 사유하기를 중단했던 순간들에 대한. 부끄러움과 어쩔 수 없었음. 핑계대고 싶음. 다 그렇게 살아라는 익명성 속에서 책임을 면피하고 싶은 자기 기만. 그리하여 내가 사유하게 되는 부분은 어쩔 수 없음.에 머물러 있다. 현실직시의 어려움에 대한 현실직시일까나. 


#병상읽기 3.


아렌트를 좋아한다. 멋있다. 나와 많이 달라서다. 아렌트를 배우고 싶다.

#사만다로즈힐 은 이렇게 <한나 아렌트 평전>을 마무리 짓는다. 거의 98프로에 가깝게 동의한다.

“(309)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한나의 말대로 우리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는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면서 눈앞에 놓인 것과 똑바로 마주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한나가 살던 시대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 한나가 우리에게 전하는 핵심은, 이 세상을 끊임없이 새롭게 바라보고, 새로이 한계를 설정하며, 다시 배열하라는 것 그리고 새로운 언어로 새 이야기를 들려주라는 것이다. 이것이 한나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다.”


#병상읽기 4.

다시 돌아가서 까먹기 싫어 써두자 싶은 부분이다. (이거 쓰려고 앞의 썰 풀다 보니 엄청 길어짐 🫠)



토요일에는 결국 나카마사의 <현대 철학의 최전선>까지 구매해서 1장을 순.식.간.에 읽고 말았는데. 두둔. 탁월하다. 그래서 더 재섭다. (1장 한정) 롤스의 ‘정의론’으로 뿌리(맥락이랄까) 잡고 논쟁적인 부분들 탁탁 잡아채 정리하는 데. 이해를 명쾌하기가 이를 데가 없네. 와. 정석적으로 공부 잘하는 사람’의 노트다.


이런 책의 장점은 왠지 다 안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는 것이지만… 그게 저자가 제일 싫어하는 읽기 일 게 뻔하지만… (나카마사 아재여, 당신의 빼어난 필력이 자국 내 트이타 날라리 철학 평론 사태의 주요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랑가요? 아님 말고ᄏᄏᄏ) 하지만 <OOO의 인생 강의>류의 철학 에세이조차 자기계발 시장에 밀리는 한국의 독서 생태계를 생각하면 이런 본격 인문학 입문서의 독자 시장 층이 형성되어 있는 일본 좀 부럽다.


그만 부럽고 <1장. 정의론 - 공정한 사회의 근거를 둘러싸고>을 읽다가 롤스와 하버마스에 동의가 절대로 안 되는 것이… 나의 당파성에 기인한 것임을 눈치 깠다. (아마 이래서 공부를 못했나 보다. 성질 급한 것도 있지만… 대학에서 가르치는 분과 학문의 ‘전제’에 동의가 잘 안됨.) 


이들의 (고상한) 주장에 대한 짜증스러움과는 별개로 그분들이 세우고자 하는 체계의 가치와 방향의 의도… 즉, 모종의 절박한 책임감으로서의 세계에 개입하려는 태도를 인정하게 되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 언제나 우리의 문제는 [이론+도그마+기득권(옹호 무의식) => 내맞너틀, 내로남불]인 것이다. 그들의 이론을 무전제로 추종(?) 하는 세력들은 내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한 채 물음표를 압살한다. 그들이 파악하지 못하는 것인데, 나더러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다고 하므로… 기분이 드러워서 나의 물음표는 결국 ‘권력’으로 가게 되어버린 것도 같아. (여기서 푸코 쉼표, 한번 눌러주기ㅋㅋㅋ)


주체할 수 없는 나이브함과 직관은 내 읽기의 강점이지만. 내가 느끼는 책임감보다는 훨씬 더한 책임감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느끼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때, 세상에 책임질 거라고는 나불대는 내 손가락과 나 자신뿐인 안 겸손한 나는 겨우겨우 겸손을 찔끔 배운다. (나에게도 차릴 체면이 있었으면 좋겠...지않다. 없어 다행.) 그러나 겸손을 배운다고 재수 없는 기분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스스로는 나의 이 감정이 곧 지성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설명하기 위해 책의 54페이지를 가져오겠다.


“(54) (롤스를 포함한 자유주의자들 전제의 역설을 지적한 아시아인 최초 노벨 경제학 상에 빛나는 아마르티아 센과 그의 공동연구자인) *마사 누스바움*은 잠재 능력 측면에서 가장 곤란한 상황에 있다고 생각되는 (개도국의) 여성을 기준으로 그녀가 어떤 처지에 있든 반드시 있어야만 할 최소한의 잠재 능력을 목록으로 작성하고, 그것을 인간의 보편적 가치 옹호 차원에서 정당화하려 시도한다. 단, 누스바움은 *여성을 종속적인 위치에 처하게 만드는 관습 속에서 태어나 성장한 여성들, 요컨대 자기가 처한 현실을 ‘자연’이라 여기는 여성들의 경우에는 보편적인 잠재 능력의 목록을 수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고, 그런 것을 제안받아도 갈팡질팡하거나 도리어 성가셔 할 여성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인정하고있다. 이는 노르웨이의 분석적 마르크스 주의 철학자 욘 엘스터(1940~)가 <신포도>1983에서  ‘적응적 선호 형성 adaptive preference formation’이라 칭한 문제로, 페미니즘과 자유주의뿐만 아니라 개인의 자유 확대와 급진적 사회 변혁을 동시에 표방하는 사회사상 분야에서는 늘 부딪히게 되는 난제다. 누스바움은 적응적 선호 형성이 건전한 인간성의 발전이 아니라고 보면서도, 이미 그런 식으로 적응되어 버린 사람에게 무리하게 강요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일종의 딜레마*에 빠져있다.”


‘적응적 선호 형성’. 나는 내가 가진 잠재적 가능성을 엄청나게 스스로 처박았다. 사실을 알고 난 뒤에는 좀 억울했지만 그 빡침을 이리저리 방사하던 시기도 지났다. 그게 나의 조건과 처지였고. 아무리 생각해도. 거기선 거기까지가 다였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아서 ‘자연화’해 버린 나의 자기 기만을 들여다보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만) 성가시고 두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페미니즘을 만나기 이전까지 아니 그것을 포함하여. 나의 ‘스스로’가 있었는가. 있었던가. 있었을까. 질문을 더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면. 실은 모두가 ‘적응적 선호 형성 중’인 것이다. 자기가 갈 수 있는 곳까지 가고 거기서 성가셔서 멈춘다. 멈춘 채로 살다가 더.는.이.렇.게.는.못.살.겠.을.때. 그때. 그때. 다시 질문을 시작한다. (어쩌면 살만해질 때 질문은 끝난다.) 시작한 질문을 언제 어디까지에서 멈추는… 어쩌면… 거기까지가 딱 그 사람이 도달하는 인식이겠지만. 나는 치열하게 질문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는 과정이 정말 너무 좋다. 고작 읽는 것뿐일 테니. 그 정도의 성가심은. 감수하다가 말겠지. 성가셔서 멈출 때 까지. 


아마도 그런 것 아닐까. 그 딜레마란 게. 특별히 제3세계의 여성들뿐만 아니라 인간 모두의 조건 아닌가. 홍해인에게도 잠자에게도 누스바움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모두에게. 모두가. 각자의 적응적 선호 조건이 있다. 기억이. 재화가. 경험이. 문화가. 가까운 인간관계와. 매체들. 우리의 잠재성은 가까이 있는 사람들 특히 나 자신이 가장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딜레마는 해결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간파되어야 하는 조건이다. 롤스의 정의론이 가진 역설들처럼. 심지어 다소 자명해 보이는 수학도. 물리학도. 아무리 엄밀한 체계를 구축한다고 해도 그것에는 구멍과 역설이 있다. 누스바움의 딜레마는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분투하는 인간들을 내가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그것들이 화학 작용해서 빚어내는 알 수 없는 결과들을 진보로 애써 해석하지도 않지만. 다만. 이해를 다르게 하는 쾌락은 있다. 그 쾌락이 (이것 만큼은 공리주의적으로다가) 많았으면 좋겠다. 이런 나도 책을 읽는 기쁨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그건 내게는 참 다행이지 않은가. 


그래서 다시. 로즈 힐. “한나가 우리에게 전하는 핵심은, 이 세상을 끊임없이 새롭게 바라보고, 새로이 한계를 설정하며, 다시 배열하라는 것 그리고 새로운 언어로 새 이야기를 들려주라는 것이다” 변하는 현실이 있고. 내 삶이 있고. 계속 배열하는 내가 있다. 내게 이야기가 있다. 내가 누군가가 아닌 나이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 내가 가진 딜레마를 간파하고 싶은. 다른 딜레마로. 다른. 또 다른. 


*


그날 달리지 않았던 게 좋지 않았겠느냐고?

아니요. 지금도 빨리 나아서 달리러 가고 싶은데요.

왜요?

달리지 않았다면 달릴 줄 몰랐을 테니까. 이제는 달릴 줄 알고(물론 잘 달리지는 못한다), 그 쾌감을 느끼며, 조심히 살살 달리면서, 바닥도 잘 살피면서, 느리게 천천히 달리면 돼요.

그걸 꼭 넘어져서 다리 부러져 봐야 알아요?

꼭 넘어져야만 아는 건 아닌 데, 달려봐야 알아요. 음~~~청~~ 못 달려도요. 달리는 걸 좋아할 수 있다는 건.


카프카를 생각한다. 일과 글쓰기. 글쓰기와 일. 생존과 실존. 그는 분열 속에 살았다. 딜레마 속에 살았다. 나는 그의 글에 깊게 감동했다. 문학에는 그런 것들이 있다. 철학 역시 그런 것들이 계속해서 논쟁되며 열려 있는 채다. 괴델(수학)도 하이젠베르크(양자물리학)도 결국 그걸 말한다. 인간의 인식이 장담할 수 있는 닫힌 완결은 없다는 것. 요즘 들어 자주 낙담하는 동생에게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인생 끝까지 가봐야 아는 겨. 물론 삶을 꼭 길게 살 필요도 없다. 


자, 이제 생존하러 갈 시간이다. 나의 딜레마를 껴안는다. 미래를 설계하거나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 불안해하느라 술을 마시게 될 테니까. 다시는 그렇게 시간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다. 차라리 낮잠을 잘거다. 나는 시간이 많다. 느끼지 않기 위해 취할 시간은 없다. 매일의 절단면을 만들어 둔다. 할 수 있는 걸 한다. 못하는 건 미룬다. 쓸 데 없이 침대에 누워있으면 안돼? 놉. 돼. 침대에 누워있어도 돼. 쓸데 없지 않으니까. (다만 누워 있을 때 폰은 끄자.)


시간이 흐르면 다리는 붙을 거고. 나는 일어날 거고. 충분히 누워있어도 된다. 누워 있는 것이 쓸 데 없다는. 생각.이 바로 현대인의 질병이다.


덧붙임, 참고 참으며 읽다가 병상 읽기4에서 결국 읽기를 포기한 당신. 이 있다면. 미안하다… 4장은. 오로지 미래의 나를 향해서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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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4-22 1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쟝쟝님 다리 왜.. ㅜㅜ

공쟝쟝 2024-04-22 20:05   좋아요 0 | URL
네... 들켰어요... 제가... 너무 행복한 거.... 들켜가지고.... 운명이... 정신차리라고.... 자만하지 말라며... 아... 건방졌던 것입니다...

서곡 2024-04-22 2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흐 지금 ott에서 ‘눈물의 여왕‘ 보는 중입니다 잘 완쾌하시길요!!!

공쟝쟝 2024-04-22 23:52   좋아요 1 | URL
ㅇ ㅏㅋㅋㅋㅋ 멜랑꼴리아 부터 서곡님과 저는 드라마 메이트 ㅋㅋㅋㅋ 실은 재가 김수현(귀여움)과 이도현(천재느낌)을 좋아합니다…!!ㅋㅋㅋ

공쟝쟝 2024-04-23 00:03   좋아요 1 | URL
차은우와 임시완은 얼굴만 강하늘은 연기 잘 맞는 역할 맞을 때(좀 순딩한)… 완벽했던 현빈은… 이제 품절남… 끝 입니다! (안물어봤는 데 왜 알려드리냐면 ㅋㅋㅋ 나름 엄선된 목록인데 ㅋㅋㅋㅋ 비슷하거나 새로운 재질의 인력이 수급되면 재빠른 소식을… 배우 기근이다 기근…)

서곡 2024-04-23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김수현 귀엽네요 범자고모의 러브라인도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ㅋㅋㅋ차은우 연기는 본적 없지만 임시완 강하늘 저도 연기자로서 호감 있고 현빈 사랑의불시착 정주행했었습니다 ㅎㅎㅎ 안녕히주무세요 ~~~

2024-04-23 0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4-04-23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다치셨군요.
빨리 완쾌되시길,,,
그 와중에 이런 어려운 책들을!

단발머리 2024-04-23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대 철학의 최전선>을 제가 읽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책을 알아둬야겠네요. 그러나 구할 수는 없단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마사 누스바움 이야기 인상 깊네요. 저는 ‘~~라서 안 돼!‘ 중에 ‘여자라서‘가 아직도 가장 강력한 주문이라 생각하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역시나 ‘젠더는 힘이 쎄다‘이고요.

침대에 누워 있어도 돼....... 라고 쓴다는 건, 그 사이사이, 이러면 안 될텐데... 얼른 일어나야 하는데... 라고 생각했다는 것이구요.
당신에겐 아직도 베짱이 습성이 부족합니다. 물론 이건 DNA가 중요하지만요. 타고난 베짱이인 제가 알려드립니다. 제 말을 따라하세요.
침대에 누워 있어도 돼.
침대에 누워 있어도 돼.
침대에 누워 있어도 돼.
 


올해 처음 산 책은 바디우 입문서 #가끔씩우리는영원을경험한다 와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사소한것들


어떤 독서는 정말인지 ‘사건’처럼 도래해 내게 ‘진리’처럼 작용할 때가 있어.

이 시점에서 #알랭바디우 소개 받아(?)버렸는 데 (수학 공격 포함해도)바디우 나 좋은 듯! 이랬더니 “어제까지 지젝이라며!!” 지젝은 재밌고 바디우는 좋.아. 그건 이 책에서 말하는 형이상학적 충실성 때문일지도 모르겠어. 그러니까. 그는 20세기 후반에도 철학을 형이상학을 존재론을 못(안) 버렸대. 난 그런 사람 미워할 만큼 좋아해. 고지식하고 미련한 사람.

실은 키건의 새 소설에 대한 나름의 감상을 이 바디우 입문서의 밑줄 그은 문장으로 갈음하고 싶었다.


“(27)실제 사건의 투사들로 스스로를 주체화하는 개인들은 세계의 이전 법칙들에 순응하지 않음으로써 그 세계의 새로운 부분을 산출하려 적극적으로 작업한다. 바디우는 이런 확장 부분을 ‘유적인 것the generic’으로 묘사한다.”

물론 이 문장에서의 투사는 鬪士(combatant) 일 테지만 소설 주인공 펄롱의 심리에 빗대어 投射(projection)로 읽어 두는 것이 좋겠다. 

내 안에 저 밑바닥에 남은 경험의 흔적들(곧 나임)은 어떤 사건을 맞닥뜨릴 때 내 세계(혹은 루틴)의 법칙들을 휘저으며 출현한다. 나는 하지 않을 다른 선택을 하고 그리고 그것은 (사후적 해석일지라도. 혹은 묵살되어질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가끔씩. 진리가 된다. (진리라면 좋겠다.) 소설은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삶에서의 그런 ‘사건’에 관한 섬세한 묘사였다.

‘충실한 주체’가 되고 싶다.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는. ‘한 일’에 대해서는 실컷 후회할지라도.

그러니 오늘의 안녕에 안락에 충분히 머무를 테다. 하고 있는 일 때문에 하지 않은 일을 만들고 싶지 않거든 나는. 어쩌면 정말은 하지 않은 일들 덕에 생겨난 이 틈새의 시간에. 소설을 읽고 개념을 소화하고 짤막한 것들을 사색하면서.
이다음의 충실한 삶을 위해.

“(40)인간은 수많은 세계들 속에 참여하고, 셀 수 없는 장소들에 출현하는 속성이 있는 동물이다. 이런 세계들의 무한성과 그런 세계들의 초월적 조직의 배경 하에,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거의 끊임없이 인간을 이동시키는 이런 종류의 객체적 편재성은 기적을 요구할 필요도 없이 그것 자체로 은총이다: 셀 수 없이 출현하는 온전히 논리적인 은총... 그 짧은 현존 속에서도 여러 번, 모든 인간 동물은 어느 한 진리의 주체적 현재 속에 스스로 통합시킬 기회를 부여받는다. 이념을 위해 사는 은총(삶 그 자체인)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며, 여러 유형의 절차로 부여된다..... 우리는 세계들의 무한성에 열려있다. 산다는 것은 가능하다. 따라서 삶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Alain Badiou, Logics of Worlds (New York: Continnum, 2009) 513-514쪽.



#바디우와의조우 #그러나이글은 #클레어키건 #소설의독후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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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4-01-16 17:2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충실한 주체‘라는 표현이 참 좋아요 쟝님! 한 일에 대해서는 후회하더라도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기^^ 저도 새겨둘 말인 것 같아요. 책을 읽으며 반하는 사람들이 늘어간다는 것은 신선한 자극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 읽지는 않았지만 좋을 것 같네요.

공쟝쟝 2024-01-16 20:06   좋아요 2 | URL
저의 표현은 아니고 바디우의 개념이랍니다..ㅋ!
지적으로 자극받는다는 말이 뭔지 몰랐는데, 독서 햇수가 거듭될 수록 (인생도 길어진 만큼ㅋㅋ) 문제의식과 함께 반하게 되는 학자, 작가, 사상가들이 생겨나서 저도 매번 신선해요.
소설이 아주 압축적이면서도 섬세하고 인상적입니다. 철학자의 개념만큼 함의가 있고요. 역시 좋은 문학은 꼭 필요하구나! 싶더랍니다~ 거리의 화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올해에도 신선한 자극주는 읽기 이웃이 되어요!!😀

단발머리 2024-01-16 1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클레어 키건을 저도 막 시작했다고 합니다. 저는 한 일에 대해 아쉬워하고 하지 않은 일에 대해 후회하는 사람인지라... ‘말하지 말 걸‘과 ‘그 때 그렇게 말할 걸‘....... 그럼 누구 책을 읽어야 하는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페이퍼에 한자 쓸 때는, 괄호 안에 독음 달아 주세요. 한문이 어려운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건 바로....

공쟝쟝 2024-01-16 20:09   좋아요 1 | URL
클레어 키건을 다 읽고 이 리뷰를 한번 더 읽어주시묜 ㅋㅋㅋ 감사하겠읍니다!! (뻔뻔ㅋㅋㅋ)

누구의 책을 읽을 것인가…. 저는 오늘은 바디우…. 내일은.. 사랑… 모레는 라캉… 이 원흉은… 박영진… 영진씨…?

그분은 바로 small things like these읽는 사람…

수이 2024-01-17 08: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몰 띵스 라이크 디즈 지하철에서 읽다가 뭐야 왜 이렇게 어려워, 이거 영어야? 그러다가 영혼을 놓고 세 페이지 아무 생각 없이 글자를 읽다보니 그제서야 아 이해되는 문장을 두 문장 발견하고 기뻐하고 또 아무 생각 없이 두 페이지를 더 읽다가 아이씨 짱나 하고 라캉을 다시 폈지요. 알랭 바디우 왜 안 와? 주문했는데? 하면서 앗 미리 주문하지 말고 쟝님 페이퍼 읽고 땡투할걸, 아쉬워하며 오늘도 총총.

공쟝쟝 2024-01-17 09:34   좋아요 0 | URL
책 조아용 ㅋㅋ 언니께 좋을지는 모르게쒀요 📷📷

2024-01-17 0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1-17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떤 자살은 질병사다

얼마 전까지 서경식의 <책임에 대하여>를 읽다가 (어려워서) 놓고 있던 중이었다.



“(148) 일본의 경우는 어떤가요? 자국, 자민족이 자행한 식민주의를 비판하지 않은 채로 포스트 콜로니얼 연구가 성립될까요? 식민주의 비판이라는 의식이 박약하고, 결핍된 포스트 콜로니얼 연구는 단지 ‘지적 유행’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고, 나쁜 경우에는 의도하지 않게 국가와의 공범 관계를 형성할지도 모릅니다. 조선의 통일 운동과 오키나와 반기지 투쟁 등 전체적으로 제3세계의 민족 해방운동을 ‘내셔널리즘’이라고 지칭하는 것으로만 자족하면서, 자국의 내셔널리즘을 극복하려는 데 대한 관심은 희박한 듯 보입니다. 내가 박유하 씨를 예찬하는 일본 지식인들의 언설에서 느끼는 위화감은 그런 것입니다. (중략) 1990년대 이후에 냉전이 무너지고 포스트모던의 사상 조류가 일본에 들어왔을 때에 그것을 섭취하여 흡수하지 못한 채, *결국 타자비판 도구로 삼았지만 자기비판 도구가 되지는 못해서* 일본 사회의 반동화, 리버럴파의 퇴락, 아카데미즘의 형해화……로, 전부가 발을 맞추어서 진행하는 듯한 생각이 들어요. 예컨대 리버럴파 지식인의 대표 격으로 우치다 다쓰루 씨가 있지요.” - <책임에 대하여>, 서경식


일본의 지성계의 상황이 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내 프랑스 현대 철학 독서의 한줄기 빛이었던 일본의 미소지니 꼰대 할배 우치다 센세🤪를 꼬집어 조근조근 씹어 주시는 서경식 선생님의 혜안에 피식피식 웃긴했다.)


음.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 호기심이 생겼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더 정확하게 적자면 일본의 지식인이 고안하고 황국신민이 동조한 서구를 선망했던 제국주의와 한국에서 나고 자란 국민(K-장녀...)으로서 내게도 뿌리박혀 있는 선진국을 따라잡고자 하는 심성(?)에는 어떤 간극과 어떤 다름이있는지 궁금했다.


아니. 사실은 궁금하지 않다. 거칠게. 혹은 잔인하게. 나는 이미 “거기엔 다름이 없다”는 결론 내린 채. 이런저런 책들을 뒤진다... (일단은 내려놓는 가장 가혹한 전제. 이건 페미니즘 책을 읽다가 터득한 어떤 방어기제일지도.)



“(23) 일본의 제국주의 실행은 좀 복잡하다. 일본은 유럽식(영국과 프랑스)을 벤치마킹하면서도, 이를 자신의 방식대로 변용을 했다. *일본은 스스로를 ‘동아시아의 영국’으로 상정*하고 영국식을 모방했다. 이른바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 (중략) 일본은 서양문명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를 보편적인 방식으로 인식했다. 그런데 일본이 직면한 고민이 있었다. 자신들과 아시아인들 사이에 피부색과 문명의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았다. (중략) 일본인은 자신과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차이가 없고, 분리 또한 쉽지 않다는 점을 인식하여 자신의 우월성과 제국 건설을 정당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고심했다. 한 가지 방법은 조선의 후진성을 부각시키고, 문명화의 필요성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 <탈식민주의에 대한 성찰>, 박종성 -


“(29) 슈미드는 한국의 민족주의와 일본의 식민주의가 정치적 의제의 차원에서 정반대임에도 불구하고, *한일 모두 문명개화에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비슷한 목표에 매진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일본 당국은 한국의 민족주의적 자기비판 양식을 손쉽게 채택해서, 문명개화라는 동일한 원칙하에 식민 착취를 정당화하는 데 활용했다.” -<애국의 계보학>, 실라 미요시 야거


“일본이 대일본 제국이라는 다민족 제국이던 시대에는 지배층이 일본 민족(야마토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한편 조선인·대만인 등 식민지 신민臣民들에게 야마토 민족과 마찬가지로 국가에 대한 충성을 요구했습니다. 식민지 신민을 ‘이등 국민’으로 취급하고 심하게 차별하면서 그 차별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천황과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패전을 전후해서 일본 지배층은 ‘국체’ 유지를 최우선 목표로 삼아 옛 식민지 출신자들을 내버리고 야마토 민족에 의한 단일민족 국가로서 전후 일본을 재출발시켰습니다. 여기에 전후 일본 ‘국민주의’의 기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중략).” -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 서경식 -




올해 1월, 케이트 만의 <남성 특권>을 읽고 인셀의 심리에 대해서 곰곰 생각하다가 그건 나에게도 있다는 결론에 가닿고 소스라친 나머지 (나의 인셀스러움ㅋㅋㅋ) 차마 글로 정리하지 않은 것.


인셀의 심리(라고 쓰고 내게도 있는 심리라고 읽는다. 나는 야, 여자 인셀). 자신의 내면 안에 사회(다수)가 암묵적으로 허락한 위계를 짓고. 그 위계에 따라서 인간(이 자리에는 숱한 정상성 혹은 규범이 들어간다. 남성, 백인, 황국신민, 국민, 정규직, 중산층, 스카이, 정상인... )/비인간을 분류하고. 라벨링, 규정하고. 혐오하거나 배제하거나 지배할 명분을 스스로가 멋대로 ‘정당화’한 채. “다들 그렇지(나 같지) 않나?” “그래도 되는 상황에서는 그렇게 해 버리는” 인간이 인간이기에 지니는 어떤 속성에 대해. (이게 N번방이 가능했던 까닭 아닐까?) 


동시에 비인간들(특히 여성)과의 연결을 끊어버리는. 옆에 있는 데. 연결되어 있는 데. 자신이 비인간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멍청함. 어쩌면 스스로를 보지 않으려는 거대한 억압에 대해. 그러니 혹은 그러나. 운이 나빠. 아마도 삶이 짓궂어 어쩔 수 없이 우연하게 다른 위치에 서게 되었을 때. 나는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보고 싶지 않았던 심연. 두려움. 도망치고 싶음. 자기기만.


에 대한 이야기로.


나는 그런 방식으로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개인적인 체험>을 읽었다.

“(193) 하지만 내 아내에게서 비정상적인 아기가 태어난 것은 단순한 우연일 뿐 *우리에게 책임은 없어*. 그리고 내가 아기를 그 자리에서 눌러 죽여 버릴 만큼 터프한 악한도 아니지만, 아무리 치명적인 증상을 가진 아기라도 의사들을 총동원하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어떻게든 살려내 보려고 할 정도로 터프한 선인도 아니라고 한다면 나는 아기를 대학 병원에 맡겨두고 자연스런 쇠약사를 선택하는 것 말고 다른 길이 없지. 그러던 끝에 *자기기만이라는 질병*에 걸려 쥐약을 먹고 막다른 골목으로 뛰어든 시궁쥐처럼 되어버린다 한들, 그것도 내겐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개인적인 체험>, 오에 겐자부로-


그리고 내부자가 아닌 외부인. 아니, 외부인도 아닌 코리안 디아스포라 서경식은 그의 책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에서 작가 오에를 ‘애매한 일본인’에 저항한 지식인(일본에 몇 없는) 계보에 두고 검토한다.


“1990년대 중반 이후의 ‘반동기’는 보수파와 우파들만의 작품이라기보다 오히려 일본 국민 다수의 ‘국민주의’적 심성이 이들을 크게 이용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전쟁 책임·식민지배 책임을 철저히 파고드는 것은 피하고 싶지만 동시에 자신을 ‘민주주의자’로서 도덕적으로 높은 곳에 올려놓고 싶은, 동요하는 머조리티의 이율배반적으로 분열된 소망*이 이 ‘국민주의’입니다. 국가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해낸 ‘아시아여성기금’이나 그것을 이어받은 2015년 말의 한일 위안부 합의가 바로 그러한 모순(‘애매함’)을 보여주는 흔한 사례겠지요.

미국의 ‘핵우산’에 스스로를 의탁하면서 자신들이 ‘유일한 피폭국’이며 ‘평화 국가’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애매함’의 또 다른 사례일 겁니다. 일본 국민 다수는 이 ‘애매함’을 받아들여 자신들이 평화 애호가이며, 자국은 평화 국가라고 확신하고 있는 듯합니다.” -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 서경식


지지난 달 이 책을 읽고서 내가 독서 앱에 남겨놓았던 단상은 아래와 같다.


“일본에서 살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70대 한국인 택시 기사의 내면화된 애향심과 분열된 애국심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애국주의-> 가족주의까지 연결되는 내면화의 흐름 잡아채서 쓴 부분은 보통 훌륭하지가 않음. 


서경식의 위치는 사유를 치열하게 해야 하는 위치였을 거다. 멈추지 않고 자신의 위치에서 사유하는 사람이라 느낌. 무튼. 깊었다. 때때로 서슬퍼렇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내가 일본의 지배 계층, 국민주의적 심성에 물든 국민, 혹은 이 책에서 계속 때리는 ‘진보적 리버럴’이었다면 그의 입을 막고 싶었을 듯. 그런데 서경식은 일본에서 대학교수다. 한국에는 이렇게까지 불편한 지식인이 있나? 그게 일본 사회의 어떤 면모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혜택(?)을 입은 그가 피해자로서 가해자 집단에게 가해 의식을 가지라! 지적하는 것은 대단한 결기와 용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가해 집단이 셀프로 “우리 모두가 애매한 죄인입니다”라는 종류의 말은 아무 말도 아닌 게 맞다. 그것은 피곤한 갈등을 평안하게 봉합시키는 비열하기까지 한 장치로도 보인다. 실은 거기까지 염두할 필요가 없는 위치성에서 어쩔 수 없이 게으른 사유가 나온 것일 테지. 일본의 메조리티들이 공유하고 싶어 하는 은근 징그러운 품위 유지의 일면도 알게 되었음.


어떤 부분은 한국인으로서는 듣기 좋았는데, 서경식이 말하는 반일과 한국인의 정서에 있는 반일주의는 그 결이 완전히 다른 듯. 일본 내부의 상황은 전혀 몰랐는데, 한국과 어딘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차라리 들었다. 서경식 더 읽어보겠으.”


더 읽어보겠다고 하고, 또 밀어두고 다른 책 읽느라 바빴었다. 그러다 예상치 못하게 선생의 부고를 듣게 되었다. 이상하고 착잡한 마음이 든다. 생각 자체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어떤 ‘지성’이라 이름 붙인 것의 미덕이라고 한다면. 존재 자체가 다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의 몸에서 나온 사유가 이토록 뜨거우면서 서늘해지기까지 그 지성을 가다듬는게 얼마나 어려웠을까하고 생각했다. 불편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는커녕 제거해버리고 싶어 하는 눈초리만 그득해져가는 한국과 일본의 현실에서. 선생의 몸이 강건하게 버티고 있을 거라 생각한 것 자체가 염치없었구나. 하게 되는.


언젠가 코리안 디아스포라 가족의 일대기를 다룬 <파친코>라는 소설을 읽고 친구와 이야기 나눈 적이 있다. (트랙백 https://blog.aladin.co.kr/jyang0202/13981035 참고) 그때 나는 노아의 자살을 질병사(우울증)라고 썼다.


글을 끝내는 시점에서 왜 서경식 선생님과 노아가 겹쳐지는지 모르겠다. 더 써볼까.


내 위치에서 나를 보는 훈련. 페미니즘을 읽는 것은 지금까지 익히고 배워왔던 (남성) 언어와 내 존재가 얼마나 불화하는지를 굳이굳이 선사시대까지 꺼내와서 재독해 하는 일이었다. 어떤 남자 철학자(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까지 했는데.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언어로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런데 이제는 안다. 그 은유마저 penis인 pen으로 자신을 규정해왔던 여성주의 언어의 역사를. 그들을 읽던 나는 나의 언어를 내가 만들어야 하는 까닭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알아차리게 되었다. (힘들지만 보람있는 과정이었다.)


재일 조선인 노아는 영문학을 전공했다. 그는 1세계의 책을 열심히 읽었다. 아마 문학에서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내가 사랑한 언어(권력, 조직, 집단, 가족, 사람...)가 나를 살해해온 바로 그것일 때.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을 때. 아니. 도망쳤는데 결국은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휘몰아치는 낙담.을 어떤 경험에 기대어. 노아를 내 맘대로 해석했을 지도 모르겠다. 다만.


나는 그때 그렇게 적었다. 노아가 썼다면 어땠을까? 일본어로 썼다면?


나는 서경식 선생님의 강의를 들은 적은 없으며, 이제서야 막 그의 저서를 읽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런 선생이 어색한 한국어를 구사했으며 일본어로 사유했다는 이웃들의 댓글을 보면서 당연하다 느끼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번역된 책에서 느낀 그의 사유가 너무도 깊었기 때문이다.


어떤 삶이었을까.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닌 삶.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일본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이니치. 그러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마이너리티 지성. 그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 그 복잡함에 대해. 그 치열함에 대해.


이제서야 책을 읽는 재미를 알게된 나는 책에서 좋은 사람을 만날 때 정말 기쁜데.

아주아주 좋은 사람을 채 알기도 전에 떠나보낸 것만 같다.

몰랐던 것이 부끄럽다.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텐데도, 바쁘다고만 생각했다.


그의 사유가 담긴 책을 읽으면서 그의 글에 빚을 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서경식이 없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는 사유들이 페이지 마다 빼곡했다.  


읽는 것으로 연대가 가능하다는 것을. 이젠 안다. 그래서 부단히 읽기 다짐해본다.

서경식 선생님. 영면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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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2-21 05: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경식,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단발머리 2024-01-13 13:4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제가 이래서 공쟝쟝님 팬입니다. 알아본 나의 안목을, 내가 칭찬합니다.

탈식민주의와 그것을 바라보는 나, 그러니까 식민지였던 나라의 인간도 아닌 여성인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는 부분이 많네요. 쟝님이 링크해준 책을 좀 읽어보고 오겠습니다.
반성하는 지식인의 마지막 계보라는 생각이 드네요. 너무 안타깝습니다. 또 한 가지는 그 분이 일본 대학의 교수인건 맞지만, 일본인들은 그를 절대 일본인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 같아요. 제가 보기엔... 그는 영원히 한국 사람입니다. 한국어에 서툰 한국인이요. 그가 가진 위치,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그 자리가 그를 그렇게 이끌었다고 전 생각해요. 우리 인생에는 겪을 수 밖에 없는 난관이 있고 이런 사유는 그래서 가능할 수도 있었겠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쟝님이 추천할 때 얼른 읽을것을.... 소식을 듣고 나니 많이 후회가 되네요.....

공쟝쟝 2023-12-21 09:57   좋아요 2 | URL
저는 잘은 모르지만 자이니치에 대해 궁금했던 적이 있어요. (고등학교때 가네시로 가즈키 많이 읽음 ㅋㅋㅋ)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영화 박열을 보고 후미코에게 잠깐 눈길이 간 적이 있고요. (일본 천황제에 반대한 일본안의 무국적 여성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충격)

책을 읽을 수록 점점 소속(?)이나 이념이 아니라 한 사람을 보게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서경식의 책에서는 상황 속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서 끝까지 사람을 사람으로 보려는 그런 맘을 느꼈던 것 같아요. 좋은 사람이다. 이렇게…

그리고 누가 뭐래든 저는 제가 한국사람인게 좋습니다. ㅋㅋㅋ 포스트 콜로니얼 어쩌고해도. 나는 고려거란전쟁 10분에 몰아보기 하는 여자ㅋㅋㅋㅋ

2023-12-21 1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22 1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수 2023-12-21 22: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공쟝쟝 2023-12-22 10:56   좋아요 2 | URL
유수님! (댓글 기쁨)

서곡 2024-01-03 16: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쟝쟝님 새해 복많이 많이 받으세요!!

공쟝쟝 2024-01-03 17:12   좋아요 1 | URL
든든한 레퍼런스 서곡님 2024년에도 폭풍 자료 업데이트 잘부탁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서곡 2024-01-03 1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민망합니다 ㅋㅋㅋ 조은 저녁 되세요 감사합니다 ~~
 

음악도 듣지 않는 채로 달리기를 하고 있는 사람은 부모의 복수를 다짐하는 자들이라는 댓글을 어디서 봤던 것 같다. 나는 오늘 내 부모의 원수 놈들에게 피의 복수를 다짐하며 음악을 듣지 않고 30분 뛰었다.



뻥이다.


음악을 듣지 않고, 달리면서는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생각했다. 이게 더 미친 소리 같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런데 아주 가끔 그런다. 작년에는 비트겐슈타인 생각했었다ㅋㅋㅋ 아 뭐 대단한 사색을 하는 건 아니고. 음악도 없이 그냥 달리기만 하면 심심하니까 한 가지 생각에 집중해 보는 거다. 읽은 것에 대한 나만의 의미랄까. (생각이 가능해지다니!!! 다시 달리기에 익숙해졌나보다. 이제 좀 덜 힘들여 뛰게 되는 듯. 체력 1년 만에 회복했네. 음, 잘하고 있어.)


오늘은 조난주의 푸코 교실 줌 강의 들은 날이었고, 내가 감동받은 부분은 (혹시 샘 에고 서치하시다 내 블로그 보게 되면 놀라시겠다 ㅋㅋㅋ 난주 샘 혹시 보셨다면.... 공부 나눠주시는 거 넘 감사하고요. 출처 밝힙니다!)


"말은 그냥 말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 효과를 담지한 것이다.

나의 본질을 규정하는 어떤 말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나는 선생님이 한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 먹는다. 내가 푸코를 읽는 까닭임과 동시에, 내가 참을 수 없어하는 종류의 언행이 바로 그것이니까. 나는 이걸 규정 폭력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걸 내 안에서 언어로 정리하고 나자, 이젠 과거의 방식으로 상처받지 않게 되는 것 같다. 오랫동안 나를 나보다 더 잘 안다는 듯이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에게 저항할 말을 찾지 못해서 고통 받았다. 그래서 나는 언어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욕망이 구체화 된 것은 블로그에도 걸어둔 버지니아 울프의 말을 만나고 부터이다. 아마도 2019년.


- 무엇이든 말로 바꾸어놓았을 때 그것은 온전한 것이 되었다. 여기서 온전함이란 나를 다치게 할 힘을 잃었음을 의미한다. 

오늘처럼 선생님이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해주실 때, 내가 푸코를 아주 엉망으로 읽고 있는 건 아니구나. 어깨가 조금 올라간다. 히힛.


강의 마지막에 수업 참여하시는 다른 선생님들(샘은 선생님이라고 참여자들을 호명하시는 데, 원래 그런지는 모르겠지만ㅋㅋㅋ 선생님이라는 말이 좋다. 흐흐.)과의 대화가 좋았다. 푸코를 읽을수록. 특히 <감시와 처벌>의 경우, 새로운 관점을 주는 것과 동시에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저항할 수 있는 건가? 하는 질문을 계속하게 되신다고. 



푸코 읽기의 어떤 코어에 닿은 질문. 저항에 관한 질문은 친구들도 했었다.


아마 나에게도 찾아왔던 질문이기도 했었을텐데... 내 경우는 약간 달랐다. 그러니까, 일종의 가해 의식에 시달렸던 것 같다. 실제로 내가 무슨 대단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은 아니고. (요즘엔 이게 나라는 인간의 피학적 성향인가도 싶은데.)


푸코의 권력 개념을 직관적으로 이해한 다음, 나를 이루고 있었던 모든 관계에서  역학 작용 혹은 권력 구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무서워졌다. 내가 가지고 있는 관계(권력)를 최소화하고 싶었다. 내게 영향력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원래 없다는 듯 사라지고 싶었다. 그렇지만 당장 사라지기엔 수습해야할 것들이 많았고(지겨운 K-장녀). 어쩔 수 없지. 사람들을 실제로 거의 만나지 않고 지냈다. 푸코의 의도야 어쨌든. 그건 아마 내가 일종의 피해자 정체성에 안주하고 싶었기 때문일 거다. 뭐?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난 책임지고 싶지 않은데? 


저항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것은 가까스로 혼자가 되어 가해자-공모자-뭐 여타의 라벨링을 스스로 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내면 세계(나에게도 목소리가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 일기 쓰기?)를 조금은 구축하고 나서 일거다. 


그런데 다시 돌아가서 저항. 


선생님들은 저항을 궁금해하셨다. 그건 같이 읽던 친구도 그랬던 것 같다.

- 권력이 이런 모습이라면, 어떻게 저항해야한단 말입니까?

한계 안(물론 이 한계를 알아차리는 데에는 희진 샘 말대로 공부가 필요할 테고)에 엄연한 자유(인식하게 되면 알게 되면, 지배받지 않게 되는 부분이 분명 있다. 지배받더라도 호락호락 다 넘겨주지는 않는다)가 있다.라고 난 종종 표현해왔지만.


우리에게는 각자의 에피스테메(인식론적 단절ㅋㅋㅋ)가 있고. 질문의 결이 좀 달랐을지도 모르겠다며.


나는 푸코 철학이 가진 맹점(?)이라는 저항의 불가능성(?)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동의하지도 않는다. 잘은 모르지만, 기존의 저항 개념 역시 탈구축해야할 것). 지금도 그렇다. *내게 문제는 왜 저항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인지다.* 왜 투항하고 싶은 걸까. 그냥 남에게 나를 맡겨버리고픈 거냐. 왜 그만 읽고 싶은 거지. 현상유지. 그리고 어렴풋한 불만. 어떻게든 이유와 구실을 찾아내서 더 알고 싶지 않아 하는 의식. 어쩌면 무의식. 내가 내게 가혹한 부분일지도 모르며, 내가 내게 용기 내라고 하는 부분일 수도 있고, 내가 내게. 저질러 왔던 스스로를 한계 짓는 규정. 나여, 한계 안에 엄연한 자유가 있다니요. 너는 자유가 싫어서 한계를 스스로 지어 오기를 반복한 인간 아닌가. 


그러니 저항이라는 단어보다는 지배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나는 왜 권력에 차라리 지배받고 싶어하는 걸까. 푸코 식으로 질문하자면. 나는 어쩌다 지배받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인간으로 만들어졌는가. 이런 나를 어떻게 다르게 형성할 것인가.


얼마 전에 읽은 <한나 아렌트의 말>을 가져온다면. 


“(143) 그보다는, 미스터 스탈린을 신봉했었고 이후 개인적으로 그런 환상에서 깨어난 사람들을 가리키는 거예요. 즉, 진정한 혁명가였거나 정치적 활동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말하듯 신神을 상실하고 새로운 신을 찾아 나섰다가 반대편에 있는 새로운 악마한테 향했던 사람들을 말하는 거예요. 그들은 그저 패턴을 역으로 바꾸었을 뿐이죠.”

 <한나 아렌트의 말>


나는 말을 잘 듣고 싶었다. 그냥 다 믿고 싶었다. 그게 내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그러고 있을 때가 있다.  


그리고 푸코는 근본적으로 바보와 교조주의를 아주 싫어하지. 아마 그건 내가 푸코를 좋아하는 이유이면서 나와 동일시하는 까닭일 것이다. 사실은 내 안에 있는 내가 가장 마주보기 싫어하는 특징이기에 가장 저항하고자 하는 것. 


어이없는 반골 기질이 욱 튀어나오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하자는 대로 하고 말을 잘 듣는 편이었다. 그냥 내 의지나 내 의사나 감정은 그 사람 자체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느낄 때가 많다. 나는 그런 나를 알아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신기하고 부럽고 좋아서 나도 모르게 또 그런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고 행동하곤 했지만. 이제는 이렇게 생긴 나를 더 먼저 더 많이 좋아하기로 결단했다. 당신들의 평가와는 상관없이. 그리고. 그 결단들이 쌓여야 하는 거라고. 


달리면서 생각한다. 나를 좋아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거라고. 호흡에 집중. 내가 있어야 나를 좋아하지. 근데 집중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을 잡은 것 같다가도, 제대로 가고 있나 잘 모르겠는 날들이 온다.


오늘 같은 날.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드는 날.

책은. 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걸 실감하게 될 때.


“(179) 내 생각에 우리에게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심사숙고하는 거예요. 그리고 사유한다는 말은 항상 비판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이고,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거예요. 실제로 모든 사유는 엄격한 법칙, 일반적인 확신 등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건 기반을 약화시켜요. 사유하다가 일어나는 모든 일은, 거기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건 비판적으로 검토할 대상이 돼요. 즉, 사유 자체가 그토록 위험한 일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위험천만한 사유란 존재하지 않아요. 이걸 어떻게 확신하느냐면….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편이 훨씬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거든요.”

- 아렌트 머모님.... 아마도 사람들은 외로운 게 싫어서 사유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사유는 쩜 외로워엉.


그랬다.

오늘 수업의 마지막 화두는 저항이었고.


서른 살 이후의 나는 나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세계에 저항하려고 악착같이 읽고 썼구나 하게 되었다. (요즘엔 그냥 재밌어서 읽기도) 

내가 지배받고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른다면 저항조차 할 수 없다. 나의 내면은 내면화된 그 말들에 지배받는다. 어느 덧 내 안에 자리잡은 타인들의 시선은 그들이 사라져도 내 안에 남아 나를 감시한다. 


복잡해진 지배의 현실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지성을 벼려야 해. 정신 안 차리면, 생각하던 대로만 생각하면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하게 된다. 이 시선은 누구의 시선인가. 이 말은 누구의 말인가. 내 몸에 적합한 말인가. 생각하자. (다르게) 생각하자. (몸 먼저) 생각하자. 나는 저항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


그런데 정말 재밌는 것은. 


책에는 너무도 고상하고 고매하고 대단한 사람들이 많아서. 

지배받고 싶어 하는 성향의 나는 정신 안차리면 금세 책에게 지배당한다는 거다. 대상을 바꾸어 만들어낸 다른 신. 내 안의 교조. 나는 내가 이러다 책들에 저항하지 않고 싶어질까 봐. 


그럴 땐 별 수 없다. 책 덮고, 동생이랑 놀아야지. 

동생이 안 놀아주면 재밌는 거나 봐야지. 


이렇게 쓰고 보니 엄청 책 읽는 사람 같네.

아니다. 요즘엔 돈 버느라 바쁘다. 

책 읽을 시간 음슴. 

ㅋㅋㅋㅋㅋ


올봄부터 내가 공들여서 만드는 나는. 책에 의존하지 않는 나인데, 현대를 사는 도시인의 슬픔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해서, 책에 의존할 겨를이 통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못하게 하면 더 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생겨먹음인지라. 으아아아아. 책!!!!!!!! 읽고 싶!!!!!!지만... 암튼 책을 읽기 위해서라도 체력을 먼저 키워야 한다.


* 결론 : 내일도 운동 열심히!! 내 부모의 원수!!! 복수!!! !!! 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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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10-26 09: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사유는 외롭다. 홀로 음악도 없이 사유하며 하는 달리기는… 부모의 원수를 생각하는 급.. ㅋㅋㅋ 전 뭐 안 들으면 달리기 싫던데, 대단해요! 전 달리기 쉬고 홈트 시작한 후 허리가 안 아픕니다ㅎㅎ
저도 책 너무 읽고 시퍼요.. 실컷 ㅠㅠ

공쟝쟝 2023-10-26 09:48   좋아요 3 | URL
맞아요 달리기 잘못하면 무릎이랑 허리 나가요.(그건 나?) 그래도 유산소 하면 기분 좋으니... 엄청 살살 달립니다. 목숨을 걸고 뛴다고 하면 다 웃던데... 진짠데.... 언제나 탑골송을 듣는데 어제 밤에는 음악 텐션이 아니더라고요. 뛰는 데 계속 부모의 원수가 생각나서.... 웃었다.........

괭님의 생애 주기에서 책을 손에 안 놓는 것 만으로도 정말 대단한 거예요. 인간은 본디 외로운 데다, 곁에 있는 사람들도 반드시 다 사라질테니.... (하나도 하나도 위로 안되겠지만) 째애끔만 견뎌보아요ㅜㅜ 대신 자기 몸 많이 돌보시고요. 오래 살아야 책 실컷 읽죠.........!!

잠자냥 2023-10-26 1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엔 칼 차고 달려요!

공쟝쟝 2023-10-26 21:01   좋아요 0 | URL
검은 옷을 입고. 복면을 쓰고. 씨익.

서곡 2023-10-31 07: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티‘ ‘제‘ 니까 비판적 사유야 숨쉬듯 자연스럽게 가능하실 겁니다 ㅋㅋ 오늘 이달의 마지막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공쟝쟝 2023-10-31 10:08   좋아요 1 | URL
엔티…!! 시월의 마지막 날이네요… 서곡님도 하루 잘 보내시고 읽고 계시는 책들 모두 ❤️💘💖 박살 내버리세요!!!
 

1.


사람들은 남의 행운이 거저 오는 것처럼 여기고 싶어 한다. 그런가 하면 남의 불운은 자초한 것 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내 생각에 행운이야 말로 끌어당기는 쪽으로 끌려오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인력이 더 강한 쪽으로. 당신에게 뜻하지 않은 행운이 생겼다면, 그건 당신이 그것에 다가갔기 때문이다. 


지나고 보니 내 인생에도 행운 같은 사건들은 몇 번 있었다. 지금은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도 분명 처음엔 행운이었다. 행운들을 거슬러 올라가면 어떤 우연의 연쇄 작용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촉발한 계기는 내가 만들었더라. 이를테면 생각지 못한 비싼 계약 건이 들어왔을 때, 그건 돈과 상관없이 일단은 성실히 일했던 과거의 내가 불러온 복. (하지만 비싸다고 더 열심히 할 생각도 없는 게 나는 좀 문제 😩 이렇게 평등한 사람입니다. 내가.)


*그리고 불운은 랜덤이다. 무조건.* 


그런데 불운은 내게 뭘 가져다 주냐면… 배움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불운이 닥쳤을 때는 과도하게 서사를 부여해 억울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당연히 그러기가 쉽지가 않다. 불운을 자초한 것 처럼 여기게 되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내가 너무 주인공이라서.  


“오! 신이시여! 어쩌다 내게 이딴 개 같은 일이!” 일어나는 까닭은 신의 영역이므로 내가 알 수가 없다. 순간닥친 똥 같은 기분을 강렬하게 느껴내고, 이 불운이 내게 어떤 신호를 보내는지 곰곰 생각해 본다. (인생의 코어와 관련된 반복 강박의 경우 무의식까지 파고 내려가야 하는 난이도 최상의 숙제지만 간단한 불운의 경우는 잠깐 머물러 통찰하는 것만으로도 큰 배움을 준다. 어쩌면 이건 사업가의 마인드 일지도.)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뭐였지? 

이 상황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이를테면 이번 겨울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아르바이트생의 실수로 나에게 끼얹어졌을 때. 동네마다 하나씩 있는 커피 프랜차이즈에 매뉴얼이 없다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뭐 여차저차 쏼라쏼라 친구에게 물어보고 하는 과정에서… 세탁비와 병원비도 받고, 약간의 화상에 대한 실비 보험을 탈수 있다는 걸 배웠다!!! 수년 동안 돈을 내고도 좀 처럼 탈 생각을 (귀찮아서) 한 적이 없던 내 실비… (응?) 친구가 당장 신청하라고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그날 내 운 똥망~ 운명을 탓했겠지. 


또 있다. A와 ‘헤어질 결심’을 하지 않았더라면 다 알지 못했던 A의 새로운 모습을 보지 못했을 것이며, 코로나 후유증 관리를 잘못해서(자초한 불운) 허리가 작살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걷기가 내 몸에 얼마나 도움 되는 지를 10년 후 쯤에야 알았겠으며, 에… 또… 



내 인생에 없었으면 좋았을 그 …



2.


를 쓰는 이유는 바로 ‘억울함’ 때문이다.


뭐지? 나 왜 하나도 안 억울하지? 

나는 억울하지 않다. 내면에 억울함이 없다.


응? 왜죠? 😀



한때 나를 휘감고 있던 그 감정이 일상에서 사라진지 꽤 오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낯설었다.

아. 편하다. 내가 편한 것은. 억울함이 사라졌기 때문이구나. 


오늘 오전엔 이걸 써봐야지.



3.


아침엔 낯설고도 익숙한 손길을 받으면서 일어났다.


- 이렇게 이쁜데 ...


.

.


라며 엄. 마. 가. 내 이마를 쓸어서 깨웠다. 


… 뒤에 생략했으면 좋았을 말. 이렇게 예쁘게 낳아놨는 데 왜 아무 놈도 안 데려가냐고 궁시렁. 까지 다 들어버렸네. 들으라고 한 소리겠지만. 음음.


오전에 병원 가려고 어제 늦은 저녁에 비행기 타고 오신 울 엄마. 


분명 어젯 밤엔 딸들이 면세점에서 사다 준 가방을 받고 즐거워 보였는 데. 

오늘 아침에는 본인 입으로 “이렇게 예쁜 딸 얼굴”을 보니 우울증이 난다고 하신다. (이유: 시집을 안 가서) 아빠가 은퇴하고 요즘 계속 골골대는 이유도. 수년째 반복되고 있는 지겨운 레파토리이지만 나는 하나도 억울하거나 감정이 상하지 않았다. 우하하하!!! 내가 계속 히죽거리면서 맞장구를 치고 있었기 때문에 엄마는 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했고 (조금만 더 참고 가만히 들으면 윤석열이 나온다. 대통령 때문에 자식들이 시집을 못감) 이 바닷 마을의 부부는 자식들이 자식을 낳지 않아 생긴 우울증으로 불운한 삶을 마칠 예정이라는 훈훈한 경고를 들으며 난 침대에서 일어났다.


내가 예쁜 것과 내가 아이를 낳지 않는 것과 엄마의 급격한 우울감(증이라곤 절대 생각 안 함. 엄마가 리모델링한 시골 집에서 얼마나 신나고 즐겁게 사는 지는 내가 봐.서. 알고 있다!!!).


오늘의 나는 엄마의 거대한 논리적 공백을 채우지 않기로 해. 


대신 수치에 의거한 팩폭을 날려주지. 


- 여성이 가사노동에서 해방되는 나이가 평균 84세래. 가사 노동 해방 만세! 


이럼시롱 기지개를 켜며 일어서는 데.


- 그건 죽을 때 까지 해야지! 


하신다. 


- 엄만, 안 억울해?


- 네 아빠가 더 억울하지. 평생을 일했는 데. 아빠가 없으면 엄마는 밥 먹기도 싫을 거 같아. 아빠가 있으니까 뭐 맛있는 거 해먹을까? 이러면서 맛있는 거 하지. 


- 우와, 신혼이네 신혼. 즐겨. 


<딸들은 밤 11시에 모여 엄마가 가져온  고구마대 김치랑 생 배추 김치 먹음> 



4.


엄마 나도 그랬어. 내가 혼자가 돼보니까 가장 어려운 일이 매번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밥 챙겨 먹는 거더라고. 그제서야 알았지. 나는 먹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구나.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랑 맛있는 걸* 먹는 걸 좋아하는 구나. 맛이 없더라고. 혼자 먹으면 아무리 맛있는 거 먹어도 맛 없어. 


하지만 곁에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오로지 나의 생존 만을 위해서 제 때 먹어야 내 삶이 유지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시간들을 지나. 


지금은?


여전히 오늘은 무얼 먹을지 고민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귀찮지만, 이제 나는 나만을 위해서 먹어. 내가 맛있는 걸 먹기 위해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필요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내가 먹는 것을 즐기는 편이 아니라서, 그냥 매번 대충 맛없게 먹어. 


하지만 나는 동네 카페에서 까다로운 책을 읽으며 골똘할 때 행복해. 엄마가 가사 노동 다 끝내놓고 컴퓨터로 고스톱 30분 치면서 행복해 하는 것 처럼. 세상에는 곁에 구체적인 사람이 꼭 없어도 되는 종류의 행복도 있다고. 


<이를 테면 *감시와 처벌* 이라던가 7월까지 절반 읽었습니다, 좀처럼 다시 펴지 못하는 중 ㅠ,,ㅠ..>


내가 억울하지 않은 것에는. 밥이 나에게 무슨 의미인지를 끈덕지게 고민하는 과정이 있었다. 

예전의 엄마는 아빠 밥을 하는 건 억울하지 않지만, 시부모님의 밥을 하는 건 때때로 억울하다고 했었다. 오늘의 엄마는 아빠 밥을 생각 하는 것이 엄마가 맛있는 것을 챙겨 먹게 되는 이유라고 했다. 


엄마와 나 사이의 공백.


억울할 일은 하지 않는 게 좋다. 라는 생각이 든 건 내가 자초한 깊은 불운에서 배우게 된 것일 거다. 나에겐 이상한 억울함이 있었다. 나조차도 알 수 없는. 그리고 언제부턴가는 억울하지 않다. 나의 억울함을 해체하기 위해 내 불운에서 배우기 위해서 그토록 읽고 썼던 걸까 싶을 정도. 


내가 여자라서 밥을 해야 하는 거라면 분명 억울했을 것이다. 엄마 몫까지 껴안은 채로 이상한 억울함을 느꼈을 것이다. 엄마의 경우 아빠는 무조건, 그리고 시부모님들은 불평없이 맛있게 잡수면 된다고 했는데, 나는 어디까지는 되고 어디까지는 안되는 지를 잘 모르겠더라고. 누구까지는 되고 누구까지는 안되는 지도. 동생들한테 맛있는 걸 해줄 때는 좋은 데, 그러다가 어느 순간 기분이 팍 나빠질 때. 안하는 게 좋지. 안하는 게 좋아. 이제는 하지 않지만. 어떤 기대와 근거에 대한 생각을 좀 많이 했어야 했어. 


어디까지는 내가 원하는 것이고 어디서부터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파고들기 위해서는 통증과 내 상태에 무감각하지 않은 몸을 가져야 했고 느낌과 느낌 사이의 공백 안을 채워 넣을 엄밀한 논리가 있어야 했다. 나에겐. 


자본주의 가부장제, 성 역할 고정관념,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 돌봄 혹은 재생산 노동, 신자유주의, 관습적 이성애, 권력의 미시 물리학, 감정과 무의식, 정체성의 정치, 개념의 탈구축, 담론이라는 통치성, 타자와 악의 평범성, 기억의 우울증의 괴롭힘의 뇌과학 …









5.


새 학기에도 연장된 아르바이트에 대해 엄마가 자기는 운이 좋은 것 같다면서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 갑자기 (서울에서 시집 안 가고 있는) 


- 너희들만 생각하면 우울하다!!


나는 엄마의 우울. 나는 엄마의 우울. 


예전이라면 그 말을 들으면서 어딘가 미안했을 텐데, 오늘은 계속 웃겼다. 


자식들만 ‘없으면’ 바로 행복해지는 엄마를 나는 사랑한다. 

내 사랑의 최고 실천은 엄마와 떨어져서 지내는 것. 


엄마 눈에 내가 보이면 우울해 지실 테니까. 



푸하하하. 

엄마의 뇌를 괴롭히지 않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비행기로 1시간 정도의 물리적 거리. 


엄마의 시냅스에는 나라는 존재가 자신과 분리되지 않을만큼 무척 가까이 있고, 엄마의 안녕과 행복은 아빠라는 존재인데 그것이 없는 나는 불행해 보일 테고, 엄마는 내가 불행하(할거라고 여기)니까 우울하고. 나는 내가 사랑하는 엄마를 우울하게 하는 내가 우울하고.


서로가 서로를 탓하면서 유지해야 하는 제도. 

가족 제도. 

혹은 제도로서의 가족.




6.


모든 지식은 필요에 의해 생산되고, 모든 제도 역시 필요와 합의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필요 없던 지식과 거추장스럽기만 한 제도와 규범은 없다.

낡아가는 것들은 있을 수 있겠지만 거기엔 만들어진 이유가 있다.


가족이야 말로. 우리의 분리되기 어려운 연약한 시냅스야 말로. 

인간의 친밀함이야 말로. 돌봄이라는 사랑의 노동이야 말로. 


엊그제는 유기체적 인간의 동물성에 대해서 적어 놓고,

오늘은 인간이라는 종족의 사회성에 대해서 생각한다.


인간이 원하는 친밀함의 농도, 생존 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관계와 언어. 

사랑의 필요, 필요로서의 사랑. 

인간이기에 느끼는 행복감. 고독감. 안전함.


그리고 

가족들과 밥을 먹어야*만*,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나를 생각하면서. 


또 내가 기억하기에 단 한번도 엄마의 밥은 맛이 없었던 적이 없다는 걸 떠올렸다. 울 엄마는 진짜 진짜 훌륭한 요리사. (그의 피를 이어 받은 나도… 응?)



새 가방을 메고서 엄마는 병원으로 향했다. 

나는 껴안으면서 구호를 한번 더 복창했다. 


- 84세 가사노동 해방! 울 엄마는 120살에 해방! 사랑해요!


당신과 나 사이의 어떤 공백을 기백권의 책을 읽어  논리로 채우고 나니, 나는 이상할 정도로 억울하지 않고, 공백을 포함한 채로도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엄마는 알까.

아마도 엄마는 모를 거야. 


하지만 나는 안다. 과거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아마 나는 재생산을 포기했으므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하는, 할 사람은 엄마 뿐이라는 걸. 엄마. 나는 사랑하기 위해서 책을 읽었어요.



7.


(72)

경상도 농가의 맏아들이었던 아버지는 서울 사람이 될 만큼 부드러웠고 폭력의 대물림을 끊고자 결심할 만큼 이지적이었지만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진정성에 대한 숭배를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서로가 마음의 문을 열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쌍방이 대등한 관계일 때에만 성립한다. 그러나 모든 부모는 아이를 스무 해 이상의 제작 기간을 요구하는 수공예품처럼 생각하기 마련이었다. 공예품이 자신의 형태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제작자에게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소통은 허위와 폭력의 게임이어야만 했다. 진의를 다정함으로 감싸고 아이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밀어 가는 것이, 그러다가도 격렬한 거부 반응 앞에서는 압도적인 차이를 드러내 기세를 꺾고 복종시키는 것이 부모의 일이었다. *진정성과 정직의 힘을 동경하는 이들*은 그 역학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악질 적이었다. 


(159)

돈을 벌어야 해. 텅 빈 배속에 주문처럼 메아리치는 한 문장. 돈을 벌어야 해.

“나쁜 일이라도 있어?”

엄마의 목소리가 오후 나절의 햇살처럼 내 위에 내려와 얹혔다. 나는 뻐근하고 불편한 낮잠으로부터 깨어나듯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니, 왜?"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

고개를 돌려 엄마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무드 등의 주홍색 불빛이 마른 어깨를 덮고 있어서, 엄마의 머리도 무드 등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꽃받침처럼 보였다. 나는 갑자기 트램펄린에서 뛰놀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서 물었다. 

“엄마.”

“응.”

“내가 만약 잘 안되면 어쩔 거야?” 


(234)

나는 선물이 아니라 주식이나 부동산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각각은 선물과 다른 시장인 만큼 다른 나쁨이 있었다. 공장에서 사고가 나면 노동자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주가를 먼저 살피는 나쁨. 사람의 총체적인 가치가 소유한 아파트의 가격으로 환산될 수 있다고 믿는 나쁨. 모든 시장은 어떤 이유로든 다르게 나빴고 어떤 이유로든 똑같이 나빴다.

그리고 나는 아주 뒤늦게 시장의 참여자들이 심판을 기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려 냈다. 잘못 처신한 사람은 계좌에 손해를 입었으며 그것으로 충분했다. 여기에서는 방역당국의 노고를 들먹이며 확진자들을 꾸짖을 필요도, 메뚜기 떼가 하나님의 진노라고 믿을 필요도 없다. 인간의 도리를 따질 것도 없다. 현학이나 영성을 명분 삼아 남 위에 올라서려는 이가 없다. 오직 수익률과 잔고뿐이다.

그렇다면 돈이란 무엇이고 시장이란 어떤 공간인가. 세속적인 원칙도 하늘의 공의도 그 어떤 인과도 빌리지 않고 욕망을 욕망으로서 돕는 것은. 그래서 몹시도 사나워지고 잔인해지고 무규칙해지는 것은. 그럼에도 이 견고한 세계의 중심축을 이루는 것은. 그 사이의 접점과 간극은...

한 달간 삭였던 기억이, 그동안 시장을 바라보며 느꼈던 껄끄러움이,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따끔거리는 심장이 서로 맞물리며 실패한 인의와 욕망의 총체가 되었다. 나는 그것을 오래도록 똑바로 바라보다가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소설 <인버스> 23살 여주인공은 엄마와 함께 살 아파트를 위해 선물거래에 뛰어든다.

부모 세대와 나의 세대의 공백과 단절에 대해 생각했다. 손에 땀을 쥐고 아주 재밌게 읽었다.  



덧. 제 독서의 원흉(?)이었던 엄마와의 화해도 결론처럼 알려드릴겸 궁금해 하시는 분이 있어 생존 신고를 합니다!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책을 예전 처럼 많이 읽지는 않지만 일기는 더 자주 쓰고 있습니다. 새로 둥지 튼 블로그 주소 걸어놓고 갈게요~ https://blog.naver.com/jyanggrim 슬슬 독서의 계절 가을도 다가오는 데 ~ 서재 식구들~ 평안한 독서를 이어가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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