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107) 
어느 날, 피해 여학생 중 한 명이 다른 여학생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가해자들이 더(?)놀란다. 그녀는 성폭행을 당한 다음 날, 삭발을 하고 단정한 교복 차림으로 등교해 공부에 매진한다. 아무도 그녀를 건드리지 못한다. 가발을 쓰지 않는 한, 삭발한 채 원조 교제 시장에 나갈 수는 없을 테니까. 이 지옥에서, 여성 특히 10대 소녀들의 가치는 섹스 뿐이다. 그러므로 ‘삭발한 계집애는 필요 없다’. 그녀는 그렇게 그들에게 쓸모없는 여자가 됨으로써 살아남는다.
세상이 망했지만, 망한 사회도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그 사회가 원하는 주체가 되려고 한다. 그래야 성원권을 얻으니까. (...) 성폭행을 당하면 인생을 포기하고 그들이 원하는 여자가 되어야 하는가? 고통스럽게도 이 영화의 여학생들은 그 방식을 택한다. 그런데 그 소녀는 삭발이라는 ‘반여성적인’외모로 이렇게 선언한다. “너희들이 나를 망치기 위해 아무리 발악을 해도, 나는 너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이 소녀가 희망을 찾는 방식은 망한 세상의 타자가 되는 것이다. (....)
상처의 크기는 권력의 크기이기도 하다. 상처를 강조하면 상대방의 권력도 커진다. 그 소녀는 ‘상처받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권력에 저항하고 그들을 비웃는다. “너희들은, 나를 망칠 만큼 대단하지 않아.” ‘우리’는 상처받았음을 강조하는 대신에 저들의 폭력을 폭로해야한다. ‘우리’의 상처가 크고 작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슈가 되면, 우리는 지배 집단과의 싸움보다 누가 더 큰 상처를 받았는가를 두고 ‘경쟁’하게 된다. 문제는 ‘그들’이 사는 메커니즘 자체이고 그들의 잘못이지 ‘우리의 약함’이 아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주체이자 타자이다. 물론 이것은 곡예다. 주체가 되는 방식은, 여성이지만 남성의 규범을 따르는 ‘주변부 남성’이 됨으로써 가능하다. 타자되기는 전략적 선택일 수도 있고 낙인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성폭력과 성매매라는 제도에 강제당함으로써 성적 타자로 만들어진 상태에서는 ‘반여성’이 되어야 한다. 남자들이 원하지 않는 여자가 되어야 한다. 이 영화에서는 삭발, 즉 자원으로서 외모를 버리는 것이다.(...) 나는 이 소녀의 저항방식을 알려준다. 피해자는 여성의 성 역할이다. 이 소녀는 피해자 역할을 거부했다. 




내가 사랑했던 영화에 내가 사랑했던 장면을 내가 왜 좋아했는 지 말로 표현하지 못했었다. “쿠노야ㅜㅜ잘해써.. . 츠다야ㅜㅜ아..안돼..” 당시 내 감상의 전부. 15년 전 소녀였던 나에겐 언어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페미니즘이 없었다.

오늘 내가 사랑하는 작가가 그의 프리즘으로 영화 장면을 해석한 글을 읽었다. 20년 가까이 흘렀는데도 텍스트가 지금과 딱 붙어있다. 

15년 동안 잊지 못한 영화 속 장면에 적절한 각주가 생겨 너무 반가웠던 나는 거의 페이지들을 씹어먹을 뻔 했다.

(102)이 영화를 여러 번 보는 관객이 있고, 그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관객이 있을 것이다” 

맞춤한 언어가 없어 너무 아파 후자의 관객이었던 나, 근 미래에 ‘(두 번은 볼 수 없었던)인생 영화’를 한번 더 보기로 마음먹다. 이젠 소녀도 아니거니와 영화가 폭로하는 고통에 당하지만은 않는 무기를 갖게 되었으므로.

덧, (mp3시절) 릴리슈슈 ost 였던 Glide 귀에 닳도록 들었는 데, 오랜만에 생각나서 멜론 뒤졌으나 찾을 수 없다. 아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