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 - 존재를 절멸시키는- ‘(여성)살인’에 대한 이야기. 영아살해와 인도의 사티, 마녀사냥. 이 책을 그저 ‘그런 일도 있구나’ 수준으로 모르는 먼 나라의 옛날 이야기처럼 읽고 싶은데도 그렇게 안된다. 

여남이 동등한 인격이 아니라는 오래된 소유-통제의 가부장적 개념들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고 당연히 ‘청산’되지도 않았으므로 지금, 우리에게서는 관계에서의 불협화음으로 폭력으로 그리고 종래에는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원리가 된다.

페미니즘은 공기처럼 익숙해서 보이지조차 않았던 폭력을 보게 해준다. 때문에 ‘살인’을 읽고 있지만 일상에서 맞닥뜨렸던 (공기같아서 인식조차 못했던) 촘촘한 가부장제의 폭력적 경험들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 숨막히는 것은 나역시 가부장제의 산물이라 당시 상황들에서 스스로를 문제시 했다는 거다.

무서워서 혹은 갈등을 피하고 싶어서 - ‘그래, (화를 돋군) 내가 문제구나.’ 재빨리 참고 침묵했었다. 미안 잘못했어, 진심없는 사과를 하고 웃은 적도 많았지. 그토록 참고, 때로는 반성까지 했는 데, 나를 조절하는 것이 더 어른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는 데. 관계에서 ‘자아조절’은 나 일방의 노동이었겠구나 하게 되니 참 허탈하다.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투사하게 마련이므로, 내가 조절하는 만큼 상대도 자기를 통제하거라 생각했다. 지금도 곰곰이 되짚고 있는 데, 그건 나의 착각. 그렇게 생각해야 마음이 편했으니 그렇게 생각해 버린 것이다. 지겹다. 이해의 코르셋.

*

“ (214) 가부장제 가정 : 여성에게 가장 치명적인 장소
단 5명 (8퍼센트)의 여성만이 낯선 이에게 살해되었으며, 그 중 4명은 강도사건 도중에 살해되었다. 8명(12퍼센트)이 신원미상의 남성에게 공격을 받아 살해되었으며, 5명은 강간까지 당했다. 이 5명이 해당 기간에 데이턴에서 낯선 이에게 성적 살인을 당한 사람의 전부였다. 이러한 살인사건은 비교적 드물게 일어남에도, 미디어의 주목을 많이 받는다. 성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사건들에만 관심이 집중되는탓에, 여성들이 낯선 사람보다 남편이나 남자친구에 의해 더 많은 위험에 처한다는 사실이 간과되는 불행한 결과가 빚어진다.”

우리가 페미니즘 을 공부하는 이유, 어쩌면 페미니즘을 알고부터는 이 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유.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울타리’가 사실은 그 선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는 ‘울타리’였다는 것. ‘강남역 여혐 살인사건’도 문제지만, 정말의 문제는 너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친밀한 그의 위협이라는 것.

*

리메모리 “(57)기억이 우리를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기억해야 한다.”

솔직하고 싶지만 솔직할 수 없다.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다. 말하려고 하면 다시 기억해야하고, 기억하기 시작하면 일상을 살아갈 수 없다. 그 모든 이해와 노동을 통해 겨우 안주하고 있는 이만큼의 안정도 포기해야하는 것이다. 이미 어떤 의미에서는 기득권이며 부역자이기도 한 나는 솔직히 페미니즘이 힘들고 어렵고, 버겁다.

모든 텍스트들이 나에게 ‘너 그렇게 살지마!’ 라고 강하게 말하고 있는 데, 당장 이 삶의 방식을 멈추기는 어려우니까. 너무 너무.

읽는 것과 사는 것의 괴리가 심해지면 결국에는 살기를 멈추던가 읽기를 멈추던가 해야하는 거겠지. 그때의 난 뭘 멈출까. 당장은 둘다 멈추고 싶지 않은데. 이 심각한 불균형을 앓으며 살아가는 사람은 미치거나 합리화의 달인이 되거나. 그렇게 되겠지. 결국 나는 위선자가 되는 걸까. 그건 진짜 싫은 데.



이 세계에 별로 기여한 바가 없는. 그러므로 지은 죄가 없는. 젊고, 그래서 더 잘 말할 수 있고, 볼 수 있고, 지적할 수 있으며, 변화시킬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진 젊은 페미니스트 동생들을 떠올린다.

“(57) 그 기억 위에서 살아가지 않은 사람들이 아마도 앞으로 나아갔을것이다… 하지만 페미사이드 세계에 맞서 싸우는 여성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우리 또한 참상을 직면하되, 우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방식으로해야 한다.”

아직은 살아가지 않은 너희는 앞으로 나아가라고. 함께 나아갈 수는 없으나 기꺼이 비키겠노라고.

가부장제에 기여하고 있는, 당장 이 모든 것을 박찰 수 없으며, 코르셋을 벗어 제낄 수도 없는 (모순적인) 나는 조용하지만 굳건하게 너희들의 투쟁을 지지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러니까 요지는 얇디얇은 지갑을 열자.. ... ㅜ_ㅜ)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연 2018-12-13 0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리메모리‘ 라는 단어에 밑줄 쫘악 그었었어요. 기억이 우리를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게 해야 한다... 한 단어인데도 너무나 멋진 말인 것 같습니다.

공쟝쟝 2018-12-13 12:57   좋아요 0 | URL
그쵸. 눈에 딱. 꽂히면서 위로 되는 단어 ㅜ_ㅜ 토니모리슨의 소설도 읽어보고 싶어지더랍니다.

단발머리 2018-12-13 0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쟝쟝님의 한 문장, 한 문장이 아주 마음을 콕콕 찌르네요.
저도 페미니즘 읽어갈수록 그런게 힘들어요.
내가 알게 된 지식과 내가 사는 현실 사이의 간극. 그래서 쟝쟝님처럼 저도 그런 의문을 자주 갖게 되요.
나도 위선자 아닐까.
나도 가부장제의 부역자 아닐까.
아침부터 고민되는 질문들이지만 쟝쟝님 글 읽으니까 좋으네요.

공쟝쟝 2018-12-13 12:58   좋아요 0 | URL
힝..... 마자여.. 부역자....... ㅜ_ㅜ
인정은 하겠는 데, 그 후에 무엇을 해야할지는 너무도 고민되요.
다들 너무 가까이 있는 것들이라. 흙흙..

다락방 2018-12-13 0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좋습니다.
우리는 같은 책을 읽으며 같은 고민 또 각자 다른 고민들을 하게 되네요.
가장 많이 우리는 자신 안의 여성혐오를 돌아보고 잘못에 대해 반성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아마, 그래도 앞으로 또 같은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겠죠. 끊임없이 앞으로 나가기 위해 우리가 서로에게 필요한 것 같아요.

저는 어제 몇 장 못읽고 잤어요. 너무 졸려서...
우리, 12월에 최선을 다해 함께 나아갑시다!

공쟝쟝 2018-12-13 13:00   좋아요 0 | URL
읽는게 사는 것을 초과하지 않게 하고 싶은 뎅... ㅜㅜ.. 갑자기 다른 선택들을 할 수 있는 용기는 아직 없다 말이죠 ㅜ_ㅜ 그래도 함께 읽고 있다는 것이 주는 묘한 안전한 기분이 있습니다. 같이 읽어나가요. 서로에게 필요한♡ 우리!

cyrus 2018-12-13 2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르셋을 하지 않는(못하는)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그 사람한테 ‘모순적이다’,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사람은 늘 완벽할 수 없고, 모순된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유독 페미니스트의 ‘인간적인 결함’을 거론하면서 페미니스트 자격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진짜 페미니스트와 가짜 페미니스트를 구분하면서 페미니즘 자체를 문제 삼으려고 해요. 그런 말을 들을 필요가 없고, 자책하지 않아도 돼요.

공쟝쟝 2018-12-13 19:57   좋아요 0 | URL
탈코운동은 넘사벽이고.. 사실은 저도 모르고 지었던 죄들과..일상에서 좋은 사람이고 싶어서 웃고 참고, 괜찮다고 넘겨버리는 것들이요.. 그런 것들이 맘이 아프게 하네요~ 자책은 좀만 할게요!

cyrus 2018-12-13 20:31   좋아요 1 | URL
제가 ‘코르셋을 하지 않는‘이라고 쓸려고 했는데 ‘탈코르셋을 하지 않는‘다라고 잘못 썼네요.

공쟝쟝 2018-12-13 20:42   좋아요 0 | URL
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