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멸은 출발점이다. 실망과 패배는 다르다 _ 수전팔루디
백래시 - 누가 페미니즘을 두려워하는가?
수전 팔루디 지음, 황성원 옮김, 손희정 해제 / arte(아르테)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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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영화 “비밀은 없다”는 인상적이었다. 아주 여러 부분에서 ‘존띵작’이다라고 생각했지만, 특히 영화가 소녀들을 다루는 방식이 좋았다. 나 역시 그 시절을 겪어 왔으므로, 아주 잘안다. 소녀들의 세계는 우리의 많은 미디어가 보여주는 것 처럼 “아름답고, 순수하며, 낭만적이지” 만은 않다. 못됐고, 잔혹하고, 거칠고, 영악하고, 또 복수심에 들끓지. 그게 반항처럼 보이기도 하고. 음.

이 영화의 마지막 대사처럼 페미니즘 적인 대사를 찾기 힘들 것 같다. 
스포가 될 것 같아 여기다 적지는 못하겠지만.

그러고 보면 나의 소녀시절은 ‘백래시’의 시절이었다. 그것이 가부장제라는 어떤 구체적인 제도는 아니었지만, 가족- 정확히는 ‘아버지와 그의 가족들’에 대한 반항과 저항/ 그리고 거기에 딸려오는 폭력(반격)/ 그러게 왜 ‘맞을 짓’을 하냐는 (그러나 지켜주고 싶었던) ‘엄마(동생들)’의 만류. 혼자 싸우는 느낌. 무력감. 정말 내가 유별나서 그런건가. 자책.

그렇다고 내 안에서 올라오는 독기를 참지는 않았다. 때문에 두어달에 한 번쯤은 매번 파국이었고, 끝끝내 몸에 든 멍을 감추고 탈출하듯 대학으로 피신했으며, 그 후로 나는 오랫동안 - 아버지의 세계로 상징되는 ‘세상’과도 싸우느라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세상과 싸우다 보니 아빠를 향했던 독기가 분산되고, 아빠도 늙었는지 많이 너그러워져서 요즘의 집은 평화 아닌 평화..)

몇 달도 전에 본 이 영화 이야기를 꺼낸 것은, 한참 책을 열심히 읽다가 잠든 날 아마도 ‘비밀은 없다’의 영상을 덧입힌 것 같은 장면들이 꿈속에서 리플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악몽이었다. 비닐 속에 결박 당해 죽어있던 소녀의 얼굴로 나타난 그 이미지는 아마도 노화를 막고 결혼을 하기위해 가슴 확대수술을 하고, 지방을 긁어내던 <백래시>속 증언자, 다이애나에 대한 내 날 것의 감정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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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이 사회의 많은 것을 바꿔가던 1970년대가가고 찾아온 미국의 1980년대는 백래시=반격의 시대였다. 
동시에 레이거노믹스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불황의 시대였다.

미국의 신뢰할만한 “‘양켈로비치 모니터’의 조사 요원들은 20년간 대상자들에게 남성성에 대해 정의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20년간 압도적으로 우세한 정의는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이는 지도자나 운동선수, 바람둥이, 의사 결정자가 되는 것도, 심지어는 단순히 ‘남자로 태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가족을 잘 먹여 살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만약 이 설문조사의 결과에 따른다면 “1980년대의 경제적 상황에서 반격이 분출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시기에는 ‘전통적인’ 남성의 실질임금이 급격히 들었고 전통적인 남성부양자는 멸종위기에 처했다.(133)” 그러므로 “이 시대의 경제적 희생자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미래를 훔쳐 달아났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그 절도범이 여성이라고 의심한다. ...미국 인구조사국에서 공식적으로 가장을 남편으로 정의하지 않게 된 해가 1980년이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남성들 중 일부가 보기에 분명 자신들을 일자리에서 밀어낸 것은 여성인 것 같았다.(136)”

현실에서 실직한 남성들의 생계까지 떠안으며 과로와 저임금 노동으로 더욱더 많은 경제적 희생을 감당해낸 것은 여성들이었지만. but 미국 남성들은 부양하던 것들에게 부양 당해서 이중적으로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다고 한다. (남자가 소심하기는..ㅉㅉ) 반페미니즘 테제의 창시자들은 경제적 불황으로 생겨나는 분노의 타겟을 페미니즘으로 돌렸고, 저소득층 남성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여성들에게 분노하고 또 분노했다.

팔루디는 말한다. 오늘 날(80년대) 진행 중인 반격의 본질이란 “(사회가 여성이라는 대상에 공포를 한 번 투사하고 나면) 여성들을 통제하기 위해, 문화적 상상 속에서 여성을 관리 가능한 크기로 축소시키고 편안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규범에 여성들이 순응하게 압력을 가함으로써 이런 공포를 차단하려는 시도”라고. 80년대의 미디어는 끊임없이 “침묵당하는, 어린애 취급당하는, 꼼짝 달싹 못하는, 혹은 생명의 기운이 없는, 말없는, 조신하고 내성적인 아이-여성을 떠받들었다(140-1)” 동시에 살아있는, 말하는, 적극적인, 싸우는 여성들을 악마화하기도 했다. 이 두꺼운 책은 미국사회가 얼마나 다양하고 구차한 방식들로 그 시도들을 이어갔는 지에 대한 각주 모음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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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서. 난 왜 하필 고분고분하지(ㅋㅋ) 않아서 얻어 맞았을까. 딱히 탈선을 하지 않았고, 공부도 그럭저럭 했고, 가끔 내 주장을 하고 눈을 내리 깔지 않았을 뿐인데도 말이다. 책과 연관되어서 조금 재밌게 생각되는 건, 그 시기 우리 집이 경제적으로 매우 힘들었다는 거다. 연이은 사업의 실패와 그 무렵 엄마가 앓게된 병 소식은 아버지에게 가장으로서의 심각한 무력감을 안겨주었을 것이다.(그러고 보니 아버지와 나의 갈등은 내가 그의 노동에 기대지 않으면서 급속도로 해결되기도 했다.)

훗날의 나는 (자본주의를 공부하며) 그의 분노를 이해하게 되지만, 또 시간이 지난 지금의 나는 그 분노의 타겟이 하필 ‘말하는 딸’인 ‘나’여야 하는 이유를 한번 더 이해하며 (페미니즘-그 폭력에 엄연히도 ‘가부장제’가 끼어있다는 사실) 몸서리 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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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래시(반격)는 모든 층위의 ‘여성혐오’를 뜻하지는 않는다. ‘여성의 진보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반격이다. “반격이 가지는 대응이라는 본질, 다른 힘에 대한 반응으로서만 존재하는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

어떤 현상에 대해 적당한 언어를 붙인다는 것은 때로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팔루디가 1980년대의 반페미니즘현상을 분석하며 ‘백래시’라고 이름 붙인 것은 - 여성들이 힘있게 싸워왔음을 잊지 않을 것-을 당부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에필로그 부분을 읽으며 더욱더 그 생각에 확신이 갔다. 싸우는 사람들에게 필연적으로 찾아올 수 밖에 없는 ‘막막한 피로감, 무력감’이 ‘파괴적 자기분열’이나 ‘자기부정으로서의 투항’으로 번지지 않으려면 싸움의 의미와 성과를 짚는 시간은 꼭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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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격이 반격이므로 - 80년대 반페미니즘에 추가된 전술이 하나 더 있었다. 이른바 “다 안다는 듯한 냉소와 거리두기”: “대중문화에 냉소를 퍼뜨리는 치들은 하품을 참아가며 페미니즘은 “대단히 1970년대적”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우린 ‘포스트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한다. 그건 여성이 평등한 정의에 도달했고 그걸 넘어섰다는 뜻이 아니라, 그저 자신들이 관심있는 척조차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결국 미국 여성의 권리에 가장 파괴적인 한 방을 날릴 수 있는 것은 이런 심드렁함이다.(143)”
음음. 이분은 밑줄을 슥 그어두자. 그렇다.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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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가장 화가 났던 부분은 12장 ‘심리-그건 모두 당신의 마음속에 있어요’챕터였다. ..넘나 할말이 많은 데, 더 길게 적고 싶지 않아서..줄이려 하는데........ 그래도 한마디 적자면 진심 오늘날의 심리학자나 상담가들에게 페미니즘 꼭,꼭 투약해야한다. 애초에 ‘사회’를 다루지 않는 ‘심리학’이나 심리치료라는게 가능한 건지도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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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난다면 100개는 좀 모자라게 붙인 듯한 ㅋㅋ 플래그를 다 뜯어내면서 발암구절들을 정리하고,
먹지 말고 입지 말고 쓰지 말아야할 반페미니즘 브랜드(도미노 피자, 게스 청바지... 또....무슨 향수 음.. 기억이...ㅠㅠ)들도 체크해두고 싶었지만. 아마 시간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고, 12월에 같이 읽기로 한 벽돌책 페미사이드가 배송 완료되었으므로 영영 못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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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12-04 06: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휴 좋은 책 읽고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비록 몇 장 안읽김 했지만 어젯밤부터 페미사이드 시작했습니다. 자,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