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권을 읽어도 제대로 남는 메모 독서법
신정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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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를 좋아한다. 분야는 가리지 않는다. 소설과 에세이를 가장 좋아하지만 인문, 철학, 과학까지 두루두루 읽는 편이다. 책장에 책을 쌓아두고 읽다 보면 권수에 집착하게 될 때가 있고, 쉽고 얇은 책을 찾는다. 문득 의문이 든다. 나는 책을 읽는 게 맞나? 책 내용을 잘 소화하고 있을까? 그저 글자만 훑고는 책 내용을 숙지도 못한 채 많이 읽기에만 집착하지는 않을까?


이럴 때면 항상 독서법에 관한 책을 읽는다. 인생을 허망하게 날려먹는다는, 뭔가 자기개발적인 사고가 스물스물 나를 휩싼다. 그래, 독서는 시간과 돈과 노력을 들이는 엄청난 일인데 책에서 뭔가 정수를 제대로 뽑아먹어야지! 메모와 독서노트를 통해서 책을 100% 내 것으로 만들어야지! 읽기만 하는 피상적인 행위라면 나를 발전시킬 수 없어!


과거의 저는 책을 그저 소비했습니다. 저에게 책이란 가끔 필요에 의해 만나지만 금방 잊어버리고 마는 일시적 만남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인생에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 못했죠. 메모 독서를 하면서 저는 비로소 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독서 노트에 꾹꾹 눌러서 쓴 문장들이 제 마음속에 새겨져 삶의 방향을 조금씩 틀었습니다. 책을 읽고 삶에서 실천하는 경우가 늘면서 독서가 제 삶에 끼치는 영향력이 점점 커졌습니다.


260쪽의 책을 아주 거칠게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메모 독서법의 정수!


- 책에 메모하면서 읽기(깨끗이 읽기 No!)

- 독서노트 쓰기

- 마인드맵 그리기

- 한 편의 글 완성하기


첫번째부터 난항이다. 책에 줄을 긋고 메모를 남기라니! 애서가에게 가장 어려운 항목일 테다. 저자는 책을 깨끗하게 보면 깨끗하게 잊어버린다며 나를 설득한다. 흠, 어느정도 인정한다. 나는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문장을 발견하면 포스트잇 플래그를 붙여놓는다. 나중에 독서 노트를 쓰려고 보면 이 문장을 왜 남겨두었지 하는 의문이 든다. 물론 문장에 대한 감상과 감정은 그떄그떄 다르다. 하지만 내가 포스트잇으로 표시해둘 때 그 생각을 정확히 알 수가 없으니, 매번 아쉽다.


으으, 메모 독서법의 가장 기초가 되는 첫 발걸음부터 떼지 못하겠다. 책 표지를 쫙 펴는 것도 못한다. 심지어 표지에 기스가 날까 책을 파우치에 넣어 다닌다. 책이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고, 재미없으면 중고서점에 팔 수도 있으니까, 더럽힐 수 없다. 책이 상전이고, 나의 주인인 셈이다. 나는 물질의 노예일까? 사실 책은 그리 비싸지도 않고, 내가 좋아하는 친구인데 좀 친하게(다르게 말하면 거칠게) 지내면 좀 어떤가... 싶기도 하고.


덕분에 2월에 산 에세이에 연필로 줄을 긋고 종이를 접어서 표시했다. 이렇게 하면서도 속으로는 울었다. 엉엉.


저자가 언급한 독서노트와 마인드맵은 요새 많이 퍼진 방법이다. 당장 유튜브에 ‘독서노트’를 검색하면 수많은 결과를 찾을 수 있으니 이 부분은 참고만 하고 넘어갔다. 다 쓴 독서노트를 다시 읽고 또 줄을 친다는 것에 조금 놀라웠다. 아, 이 분은 책을 정말 전투적으로 읽으시는구나. 나는 그럴 깜냥이 못된다. 황새 따라가려다가 가랑이 찢어질라.


방법론적인 면만 보면 중요한 내용은 많지 않다. 차라리 저자가 쓴 독서노트를 예시로 많이 보여줬으면 어땠을까 싶다. 자기가 꾸리는 독서모임 영업하는 분위기도 조금 풍긴다.


열심히 공부하듯 읽으려는 마음가짐을 다지기에는 좋은 책이다. 메모 습관을 다룬 저자의 다른 저서도 읽을만하다. 하지만 책을 덮고나니 이렇게까지 읽어야 할까 하는 회의도 든다. 책을 좀 재미로 읽어도 되잖아. 치열하지 않게, 적당히 각잡고, 그냥 흘러가는대로 읽기. 책의 분야에 따라 다르겠지만, 모든 게 다 머리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머리 속 어딘가에 암묵지로 남아서 불현듯 생각날지도 모른다. 떠오르지 않으면 그것도 나름대로의 독서라고 생각한다. 내 필요에 따라 힘을 줬다 뺐다, 잘 운영하는 것도 묘미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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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과 열심 - 나를 지키는 글쓰기
김신회 지음 / 민음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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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무튼, 여름>과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를 쓴 김신회 작가의 에세이다. 민음사 유튜브 채널인 민음사TV에서 이 책 출간 소식을 알릴 때부터 장바구니에 담아뒀지만 읽을 책이 쌓이고 쌓여 한켠으로 물러나 있었다. 책 반납하러 도서관에 갔다가 번뜩 생각나 빌려왔다. 빌려왔는데도 또 한참을 책꽂이에 뒀다. 아내가 먼저 읽고 지금의 내게 딱인 책이라고 해서 폈다. 사흘만에 후루룩 읽었다.

 

 

2.  책은 크게 4부로 나뉜다.

 

1부, 쓰기. 사실 이 책이 글쓰기와 독서에 관한 에세이인줄 알았다. 뒷표지 홍보문구에도 ‘글쓰기를 일상으로 만드는 방법’이라는 카피로 홍보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반만, 아니 반에 반만 맞는 이야기다. 1부만 글쓰기를 다루기 때문이다. 저자가 글을 쓰는 방법이나 루틴, 그만의 팁을 전한다. 그래도 1부만으로도 꽤나 마음에 드는 책이다.

 

기억에 남는 부분은 ‘첫 문장보다 끝 문장’ 장. 저자는 첫 문장보다 마지막 문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끝까지 너무 힘을 주면 지나치게 비장한 다짐과 교훈으로 점철된 글을 쓰게 된다고 하는데, 이런 식이다.

 


1. 오늘의 경험을 통해 일상은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의 깨달은 밝히기.)


2. 이 마음을 잊지 않고 더 나은 내가 되어야겠다.

(되고 싶은 나에 대해 말하기.)


3. 앞으로도 이 같은 열정을 계속 간직하고 싶다.

(간직하고 싶은 것 굳이 알려 주기.)


4.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을 살고 싶다.

(갑자기 분위기 종교 집회.)


 

비장함에 눈물이 나네. 근데 내가 쓴 일기나 독서노트를 보니 다 이런 식으로 마무리되고 있지 않은가! 다짐과 교훈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모든 글이 이렇게 끝나면 다양성도 없고 반성하고 주장하는 글밖에 되지 않을까? 내 맘을 가볍게 털어놓을 수 있는 마무리도 좋은 것 같다. 그러고보니 이 책에 실린 모든 글이 비장과 다짐과 교훈과는 거리가 멀었다. 신기했

 

 

3.  2부는 프리랜서로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쓴다. 아쉽게도 월급을 받는 직장인으로서 크게 공감을 못했다. 그래도 책을 읽고 글을 써보려는 내게 한가지 팁을 주었는데, 바로 일하는 공간의 분리다. 저자는 일하는 방을 하나 따로 만들었단다. 거기로 출퇴근을 하는 거다. 회사처럼 출퇴근시간도 만든다. 집이라는 걸 잊도록 업무를 제외한 집안일은 작업 전후에 한다. 심지어 일하기 전에 씻기도 한다. 공간이 분리되니 작업 능률이 올라가고 꾸준히 쓸 수 있게 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도 일상 - 식탁이나 거실 테이블이 아닌 다른 곳에 앉아야 독서/글쓰기 모드가 켜지지 않을까. 퇴근하고 한 시간은 카페에서 작업을 해볼까. 집 근처에 조용하고 근사한 카페는 몇 있으니, 아지트 삼아 주말에 종종 들러보기로 했다. 집에서 새로운 공간을 찾아 작업실로 생각도 해볼까? 봄이 와서 날이 따뜻해지면 우리집에서 최고로 특별한 공간인 발코니에 나가볼 거다. 아내가 멋드러진 테이블과 의자를 두었다. 여기서 신나게 놀 생각을 하니까 벌써부터 기분이 좋다.

 

 

4.  3부와 4부는 에세이 모음이다. 3부는 저자 자신, 4부는 타인과의 이야기를 다룬다. 심각한 분위기의 글은 없고 대부분 일상적인 주제, 소재를 다룬다. 무게를 엄청 잡지 않으니 읽기도 편하고, 그와중에 나와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게 만든다. <아무튼, 여름>의 저자로 처음 알게 됐지만 사실 책은 읽지 않았다. 책 후반부를 읽고는 <아무튼, 여름>을 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정도로 유쾌한 글을 쓰는 작가라면 믿고 볼만 하지.

 

 

5.  유쾌함과 유머로 가득 찬 책이다. 가벼운 소재의 에세이를 읽고 싶다면 추천한다. 아, 글쓰기에 관심이 없다면 1, 2부는 넘기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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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 숲속의 현자가 전하는 마지막 인생 수업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지음, 토마스 산체스 그림, 박미경 옮김 / 다산초당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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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겨놓을만한 좋은 문장이 많으나 마음 깊숙히 다가오지는 않는다. 마음이 성장하려면 아직 먼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제 안에선 늘 뭔가 부족하다고 솔살거리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말귀를 못 알아듣거나 실수를 저지르는 등 당황하거나 멍청한 짓을 저지를 떄마다 그 목소리는 더 커졌습니다. 반면에 무언가를 성공적으로 해냈을 때는 잠잠해졌고요. 당시에도 저는 그게 저라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소산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자란 세상에서는 가혹한 내적 비평가의 끊임없는 불평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의도치 않게 지극히 사소한 실수를 저지를 때조차 가차 없이 비난을 던지는 목소리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죠. 이런 환경의 사람들은 자신이 기대에 비해 부족하다는 느낌과 언젠가 그 부족함을 남들에게 ‘들킬 것 같은’ 두려움을 안고 살며, 다른 이들이 자기 실체를 알면 경멸당할 거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본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갖은 요령을 부립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당연히 주변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에도 큰 영향을 끼치지요.

명상을 진지하게 시도해보면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까지 아무리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분별 있고 실용적인 사람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일지라도, 알고 보면 대부분 사고 과정이 이리저리 날뛰는 서커스의 원숭이처럼 제멋대로 오락가락하는 생각들로 이뤄져 있다는 걸 말입니다. 많은 이가 명상을 처음 시작할 때는 마음이 금세 고요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잠깐 동안은 그럴 수 있지만, 정말 잠깐뿐입니다. 죽은 사람의 마음만이 계속해서 고요할 수 있지요. 살아 숨 쉬는 한 우리는 두뇌를 쓰기 마련인데, 본래 어떤 안을 구상하고 그 안을 다른 안과 비교해서 새로운 안을 재구성한 뒤 그것에 또다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두뇌의 일이니까요.

우리는 인간이 지식에 도달하는 방식이 한 가지 이상있다는 점을 자꾸 잊어버립니다. 이성이 우리의 도구함에 들어 있는 유일한 도구가 아니라는 점도 자꾸만 간과하게 됩니다. 저는 이성이 별 의미 없는 특성이라거나 덜 중요한 능력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이성은 우리에게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을 수없이 제공했습니다. 기술, 과학, 의료, 민주주의, 평등 등 소중한 발상과 체제가 만들어지는 원천이지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성만 있는 게 아닙니다. 지식에 도달하고 결정을 내리기 위한 다른 방식도 있습니다. 바로 영감의 순간입니다. 불교도들은 이를 지혜라고 부릅니다. 아울러 그들은 명상과 지혜는 확고하게 이어진다는 것을 합니다

지식은 자신이 아는 것을 자랑한다. 지혜는 자신이 모르는 것 앞에서 겸손하다.

"갈등의 싹이 트려고 할 때, 누군가와 맞서게 될 때, 이 주문을 마음속으로 세 번만 반복하세요. 어떤 언어로든 진심으로 세 번만 되뇐다면, 여러분의 근심은 여름날 아침 풀밭에 맺힌 이슬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스님의 손바닥 안에 있었지요.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다들 숨죽이고 스님의 다음 말을 기다렸지요. 스님은 몸을 살짝 내밀더니 극적인 효과를 내려고 한 번 더 뜸을 들인 뒤 입을 열었습니다.
"자, 다들 그 주문이 뭔지 궁금하시죠?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훗날 태국을 떠나 영국의 어느 사원으로 옮겼을 때, 저는 누군가와 사소한 일로 언쟁을 벌였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 훌륭한 아잔 수시토 주지 스님이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옳다는 것이 결코 핵심이 아니라네."

통제 욕구를 내려놓고 당면한 상황을 의식하려면 불확실성에 직면할 용기를 내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상당히 벅찬 일입니다. 인간은 본래 무엇이든 알고 싶어 합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충동이지요. 앞날을 알 수 없다고 느낄 때 우리는 불안을 느끼면서 행동 또한 경직됩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엄청난 불확실성 속에 살아가면서도 상황을 예측할 수 있는 척합니다. 일이 어떻게 흘러가야 하는지에 대한 계획과 예상에 집착하고 필사적으로 그렇게 되기를 고대하지요. 물론 계획을 세우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오히려 어느 정도 삶을 미리 계획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계획을 세우는 것과 그 계획이 반드시 결실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모든 오래된 종교와 영적인 전통이 우리가 언젠가는 죽을 운명임을 기억하라고 강조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삶 속에서 결정을 내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할 때도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을 늘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살아가기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그리고 내일은 그보다 더 많이. 인생은 짧습니다. 우리가 그 점을 진정으로 이해할 때, 우리가 그 사실을 마음으로 깨달을 때, 상대를 내 뜻대로 휘두르려고 하지 않을 때, 지금 누리는 것들을 당연히 여기지 않을 때, 우리의 삶은 지금과 달라질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네가 모르는
전투를 치르고 있다.
친절하라, 그 어느 때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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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공장 블루스 - 매일 김치를 담그며 배우는 일과 인생의 감칠맛
김원재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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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는 대기업 카피라이터로 10년을 일했다. 일반 회사원도 아니고 카피라이터니, 자기만의 능력이 있을테니 퇴사 후 프리랜서로 일하는 게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런데, 그가 회사를 나간 후 선택한 직장은 무려 김치 공장이다. 힙한 동네 이태원에서 일하던 그는, 이제 멧돼지와 고라니가 뛰어노는 파주’읍’ 부곡’리’로 출근한다.



2. 대기업에서 김치 공장이라니 각오가 대단하네. 라고 생각했건만 웬걸, 어머니가 사장님이란다. 그러니까, 속된 말로 공장 후계자가 되기 위해 낙하산 취업을 한 것이다. 사원, 과장을 뛰어 넘어 바로 부사장으로 말이다! 이 부분에서 한번 갸우뚱 했다. 뭔가 사연이 있겠지, 하면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 의문은 풀리게 됐으니…



3. 그 사연은 책을 읽어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2023년, RHK 출판사에서 발매된 핫한 에세이, 절찬리 판매 중!



4. 재벌 2세들이 가업을 잇기 위해 경영수업을 하듯이, 저자도 부사장 직급을 달고 있다 하더라도 저 아래 직급의 일부터 차근차근 배워나간다. 자기 손으로 사업을 일궈낸 어머니의 경험을 허투루 버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아침에 현장에서 절임실과 세척실을 연결하는 작은 구멍에서 쏟아져 나오는 배추를 건진다. 하루에 오이 3천개, 열무 7백단을 자르고 썬다. 8년 동안 16만 킬로를 뛴 작은 아반떼로 배달을 하기도 한다. 말 그대로 바닥에서 열심히 구르는 중이다.



5. 힘든 업무에도 저자를 지탱해주는 건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다. 한국인 부장, 팀장들과, 외국인 현장 근로자의 이야기들. 사장님과 오랜 시간 회사를 함께 일궈온 직원들의 이야기는 소소하면서도 참 특별하다. 특히 기숙사 친구들(저자는 외국인 근로자를 이와 같이 칭한다)의 에피소드가 참 재밌다. 일상적으로 겪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 반제품들을 저장하는 냉장창고는 귀여움의 각축장이다. 외국인 작업자들이 써둔 이름표들 때문이다. 까르상이 붙여둔 특선 겉절이 양념 이름표에는 ‘특산 같자리 양념’이라 쓰여 있고, 바타는 보쌈 양념에 반듯한 글씨로 ‘보삼 얌념’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어느 날 가나는 포장지 박스에 ‘너나없이 잘합ㅅ다’라고 써놨다. 수딥은 한국말을 잘하면서도 휴가계를 낼 때는 꼭 사유에 ‘아프다’라고 적어서, 먹고살이의 고됨을 강조하는 것 같다.  _44,45쪽


다소 서툰 한국어마저 귀엽고, 수딥의 고됨의 강조는 정말, 외국인의 한국어 언어 구사 능력을 떠나서 그냥 감각이 좋아 보인다.


공장에서 양념을 담당하는, 저자보다 네 살 적은 바타는 저자에게 누나라고 칭한다. 외국인들은 누나를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여성을 부르는 통칭’으로 알고 있을 것 같다는 그럴싸한 이론. 그런데 웬걸, 스물 여섯의 품질팀 대리는 현장에서 이모라고 불렸다면서 한탄한다. 하하, 빵 터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6. 저자에게 힘을 주는 다른 존재는, 사장님인 자신의 어머니다. 공장을 힘겹게 성장시킨 엄마의 이야기는 저자를 시큰하게 만든다. 빚도 지고, 잘못된 결정을 하기도 하면서도 뚝심있게 자리를 지켜온 사장님. 제주도 출신인 엄마는 열네 살에 출도했고,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도 공장을 비우지 못하고 절박하게 공장을 운영했다(258쪽). 엄마의 청춘과 인생이 모두 담긴 공장을 이어 받는 저자의 마음은 어떠할까. 감히 상상할 수 없다.


> (사장님, 즉 엄마와의 인터뷰에서. 엄마 왈,)

> 나는, 아주 멋지게 살 거야. 앞으로 더 멋지게 살 거야. 영어도 배우고, 피아노도 배우고, 더 많은 사람들 도와주면서 정말 멋지게 살아볼 거야. 

> 원재야, 너도 멋지게 살아.



7. 읽는 내내 흐뭇했다. 우악스러우면서도 반듯한 사장님,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때론 달리는 차 안에서 울기도 하는 부사장(저자), 공장과 기업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한데 버무려져 맛깔난 글이 완성됐다. 그들의 정성이 잘 발효되고 숙성되어 맛있는 김치 같은 시간이 펼쳐지기를 기원해본다.



8. 나는 김치를 사먹지 않는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 이들이 만드는 김치라면 한번 먹어보고 싶단 생각이 든다. 저자가 다니는 업체명을 이 글에 남길 수는 없겠고, 책을 들춰보시면 나오니까 한번 열어보시길.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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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
파스칼 키냐르 지음, 백선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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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스칼 키냐르의 전작 <음악 혐오>는 읽기 꽤나 어려운 책이었다. 당시 책의 홍보문구를 보고 지적 허영심에 취해 샀는데, 문구는 이렇다.


> ‘음악 혐오’라는 표현은 음악을 그 무엇보다 사랑했더 니에게 그것이 얼마나 증오스러운 것이 될 수 있는지를 말하고자 한 것이다.


공쿠르 상 수상 작가인 파스칼 키냐르가 말하는 음악의 시원과 본질이라며. 음악이 잉태된 곳에 관한 깊은 밤의 몽상이라며. 아니었다. 이 책은 음악으로 시작해 문학, 역사, 철학, 그리고 대체 알 수 없는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진 에세이였다. 책을 읽기는 읽었으나, 내 머리에는 책 제목과 저자밖에 남지 않았다. 어떤 강렬한 인상과 함께.



2. 솔직히 말해볼까. 사실 이번에 읽은 책인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이하 ‘수사학’)도 이해를 1도 못했다. 하나도 못한 게 아니라, 정말 1도 못했다. 전작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 때문에, 내 주제도 모르고 이 책을 고른 것이다. 문학과 말을 다룬다길래 냉큼 폈는데 웬걸, <음악 혐오>와 마찬가지다. 말로 시작해 문학, 역사, 철학, 그리고 대체 알 수 없는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진 에세이다.



3. 위키피디아는 수사학을 설득의 수단으로 문장과 언어의 사용법, 특히 대중 연설의 기술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말한다. 흔히들 대중연설과 언어적 레토릭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키냐르의 수사학’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책에서 수사학을 단순히 말의 기술이라고 칭할리는 없다.


저자는 언어의 의미를 여러 갈래로 말한다. 단순히 수사학을 설명하기도 하고, 언어-기호-세계로 이뤄지는 여러 관계를 말한다. 하지만 문학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언어와 문학 작품의 미학적 가치를 말하는 부분에 눈이 갔다.


> 문학인은 자신을 언어 체계와 동일시하지 말아야 하고, 특유의 지방어와도 동일시하지 말아야 하며, 발아 상태의 언어, 태초 종자, 문자, 언어의 문자적 실체, 문학적인 사물과 동일시해야 한다.  _30쪽


> 위대한 시인이나 위대한 산문 작가는 몰아지경의 말을 찾는다. 절정에 이른 언어는 thauma(놀람, 감탄)와 ekstasis(황홀)를 뒤흔들고, 생각에 빛의 감각을 안긴다.  _49쪽


> 소설은 언어로 만들어진 세상이 아닌 다른 무엇을 담는다.  _129쪽


소설과 에세이를 읽다보면 정말 헉, 하는 부분이 종종 있다. 장면을 세세히 그려내겠다는 의지로 묘사로 똘똘 뭉친 문장. 작품 속 인물, 배경, 그리고 독자인 나까지 한번에 꿰뚫는 통찰력 있는 문장. 뾰족하지 않지만 세심하게 말을 건내고 나를 감싸주는 문장.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내가 평소에 쓰는 일기는 무엇인가, 싶다. 오스카 와일드는 자기 일기만큼 재밌는 글이 없다고 하는데 말이다.



4. 거진 2주를 읽었지만, 언어와 문장을 섬세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부분 말고는 기억에 남는 게 거의 없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이해하지 못한 채 읽기를 끝냈는데 뒤늦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울림이 느껴지더라는 독자가 있다는데(11쪽), 아쉽게도 나는 이 부류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사실 이 책을 그만 읽고 싶을 때도 많았으나 한글자 한글자 우겨넣듯이 읽었다. 


> 이해하지 못한 채 읽기를 끝냈는데 뒤늦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울림이 느껴지더라는 독자도 있고, 간혹 독서를 도중에 포기하는 독자도 보인다. 우리는 대개 길을 잃을까 겁낸다. 도로에서건 독서에서건 기를 써서 길을 잃지 않으려 든다. 리베카 솔닛은 <길 잃기 안내서>에서 길을 잃는 건 우리가 모르던 것을 발견하는 방법이라고 역설적으로 말한다. 우리가 길 잃기를 겁내지만 않는다며, 모든 걸 파악하고 출구를 찾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내려놓고 거닌다면 미궁도 평온한 산책로가 될 수 있다.  _11쪽


책 안에서 뱅뱅 도는 2주였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공부하듯 연필을 들고 줄을 치고 종이를 접으며 열심히 읽었다. 다소 쉬운 책을 선호해서 책 안에서 길 잃기에 익숙하지 않다. 보통 책을 포기하고 말지. 하지만 이번에는 끈질기게 읽어봤다. 불가해한 부분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안에서도 노트에 옮겨 적고 싶은 문장을 꽤 건졌다. 좀 더 정진하고, 다시 읽어봐야겠다. 한번 길 잃어봤으니, 이번에는 해매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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