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 가공선 창비세계문학 8
고바야시 다키지 지음, 서은혜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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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


  2012년, 창비 세계문학 첫 11권이 출판되었을 때 단연 돋보이던 책이었다. 제목을 다르게 달고 나온 <젊은 베르터의 고뇌>도, 새빨갛고 두꺼운데다 두 권짜리인(!!!) <돈 끼호테>보다도 말이다. 제목부터 느낌이 다르지 않은가! 게다가 보라색이라니, (의도치 않게) 이렇게 불길한 색의 표지라니, 참 판타스틱한 책이다.


  유독 첫 문장이 맴도는 소설들이 있다. 너무 아름답든, 충격적이든 말이다. <게 가공선>도 그런데, '어이, 지옥으로 가는 거야!'라는 첫 문장은 이 책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1926년 북양어업 게 가공선에서 린치와 가혹학 노동으로 사망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 사건을 조사해서 쓴 책이 <게 가공선>이 되겠다. 회사는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 데려다가 바다로 내몬다. 고된 일을 그냥 시키면 안 될 것 싶으니, 회사는 '국가적 산업', '러시아와의 국력 싸움'이라는 간판을 내건다.


  뭐든 일이 안되면 '일본제국'을 들먹이다. 일본제국의 거대한 사명을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바다로 나가야 한다. 일본제국을 위해 모두가 떨쳐 일어나야 할 '때'라는 이유로 밥도 제대로 주지 않고 나쁜 노동환경에서 노동자에게 채찍질을 한다. 기업의 부 증진을 '국가적 부의 원천 개발'이라는 식으로 결부시켜 일을 하는 데에 헛된 긍지감과 자부심을 심어 감쪽같이 합리화시켰다.


  견고하다 못해 도를 넘어 꽉 막힌 국가주의는 자연스레 작은 단위인 사람(국민)을 더욱 작게 만든다. 폭풍우가 치는 깜차까 바다에서 카와사끼선을 잃어버린다. 이틑날, 카와사끼선 수색을 겸해서 게 무리를 쫓아 본선이 이동하는데, 이유는 우습게도 인간 대여섯 '마리'야 아무것도 아니지만 카와사끼선이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어느 밤에는 425명이 탄 배가 가라앉는 걸 눈앞에서 보고서도 높은 보험금 때문에 괜찮다고, 차라리 가라앉으면 득 보는 거라고, 선원들은 말한다. 감독들은 애시당초 노동자를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지나친 국가주의는 대를 위해 소가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가 팽배하다. 홋카이도오의 대대적 철도 건설 사업이 있었는데, 철도의 침목이고 간에 그것들 하나하나가 말 그대로 시퍼렇게 부어오른 노동자의 주검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많은 노동자가 죽어나갔다. 배 윈치 가로대에 잡부를 묶어 매달아 벌을 주기도 하고, 노동을 피해 숨은 이를 화장실에 가두어 변기에서 서서히 죽게 만든다. 모두 큰 것을 위해, 이 잡는 것보다 더 간단히, 인부들은 맞아 죽었다.


  하지만 큰 사고에 갇힌 이들은 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인지한다고 해도 무력감이 생기면 포기하고 적응하게 된다. 탄광 광차로 운반되어오는 석탄 속에 엄지나 새끼손가락이 섞여 있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여자나 아이 들조차 그런 것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렇게 길들여졌던 것이다. 모두들 보이지 않는 굵은 쇠사슬을 질질 끌고 다니는 격이다.


  무려 90년 전 이야기인데도 이 책이 이리도 재밌고 실감나게, 동시에 너무나도 역겹게 느껴지는 이유는 역시 현재에서도 소설에서 묘사한 장면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팔려간 사람, 국가적 사업을 위해 죽어나간 수많은 노동자,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끔찍한 일도 태연히 꾸며대는 '위에 있는 인간'들, 하지만 눈 번히 뜨고 당하기만 하는 보통 사람들. 시간이 흘러도 반복되는 모습이다.


  과연 국가의 개념이란 무엇인가. 나와 국가 중 어떤 것이 위에 있어야 하는가. 이쯤 되면 '대-한민국'을 외치며 신나게 응원하던 모습을, 김규항이 불편하게 보았다는 이야기가 얼핏 수긍이 가기도 한다. 다수결의 원칙과 공리주의의 지나친 결벽도 슬슬 의심이 간다. 무너진 벽 뒤에서 살려달라고 발버둥을 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벽을 열면 안전한 쪽의 사람이 위험하니 그들을 구하지 않고 벽을 더 굳게 쌓겠다는 궤변을 늘어놓는 당신에게 고한다. 국민 편이라고? 웃기고 있네, 개똥이야!


* 참고로 발췌문이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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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4-07-03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예전에도 한번 출판됐는 데 책의 저자가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거장이라 하여 참으로 읽고 싶었는 데 구하지 못 하던 중, 출판이 되어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나요 ㅎ
제가 한참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읽는 중 이었거든요 배가 침몰하는 데 그게 돈이 더 남는다는 것 장면을 보며 세월호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섬찟하네요...

안녕하세요? 인사가 늦었네요 ㅎ 예전에 읽었던 책이라 한 번 들어와 봤습니다. 글 깔끔하시게 잘 쓰시네요 ㅎ 양손으로 쓰시나봐요 ㅎㅎㅎㅎ

양손잡이 2014-07-04 03:34   좋아요 0 | URL
저도 근래의 여러 사건과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장면이 주욱 펼쳐지는 것 같아 아쉽고 아쉬웠습니다. 앎은 얕지만 우리나라 노동환경이나 부의 불평등에 대한 책을 몇 권 읽으니 <게 가공선>을 타게 되었네요. 좋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덧글 감사합니다. 키보드는 당연히 양손으로 두드립니다 ㅎㅎ
 

땡스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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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서 좋아 - 도시 속 둥지, 셰어하우스
아베 다마에 & 모하라 나오미 지음, 김윤수 옮김 / 이지북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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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7.


미래에는 공유(share)가 단지 경제적인 걸 아끼고 평등을 위한 미덕의 의미로만 사용되진 않을 것이다. 이미 미국에서는 교통 공유 형태의 기업이 큰 소득을 벌어들이고 있다. 아직 국내에는 카쉐어링은 사업의 형태보다는 사회 공동체의 한 가지 형태로 나타났지만, 큰 도시의 게스트 하우스만 봐도 공유경제가 은근히 가까이 다가왔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여행지의 게스트하우스는 매우 성행한다. 혼자 여행할 때 홀로 편히 쉴 수 있는 모텔이나 찜질방을 찾기도 하지만 처음 보는 이들과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게스트하우스에 묵기도 한다. 특별한 목적을 가진 집이지만 이는 분명 셰어하우스의 한 형태임이 분명하다. 경제적인 면보다 주거에 더 초점을 맞춰보면 하숙이나 기숙사 등이 책에서 말하는 셰어하우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네이버는 셰어하우스에 대해 다수가 한 집에서 살면서 개인 공간인 침실은 각자 따로 사용하지만 공용 공간(거실, 화장실 등)을 공유하는 생활방식이다. 책에서 말하는 셰어하우스는 아예 남남인 사람들이 모여 주택이나 맨션을 임대하여 완전히 혼자 사는 원룸(개인 방)과 가족이 함께 사는 집(공용 공간)을 적절하게 나눈 형태이다.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같은 공간에서 부대끼면 정이 떨어질 수 있다. 하물며 오랫동안 따로 살던 사람들인데, 불편함이 없을 수 없다. 개인공간이야 그렇다 치고 공용공간에서 각자 생활방식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서로 워낙 다르게 생활하니 불편함을 초래하기 십상이다. 명확한 규칙과 이를 철저히 지켜야 공동체 생활에 금이 가지 않을텐데, 당연히 쉽지 않다. 타인과의 새로운 삶이 펼쳐질 거라 기대하고 셰어하우스에 입주한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점이라고 한다.


타인과의 다름이라는 큰 단점이 있음에도 셰어하우스가 각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다름’이 함께 살기의 단점이자 장점이 된다. 타인을 받아들이고 다름이 틀림이 아니라는 점을 아는 순간부터 타인이라는 이름의 우주를 받아들이게 된다. 여러 정보와 가치관을 접함은 곧 삶이 풍부해짐을 뜻한다.


다름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같이 산다는 것은 1인 가구가 늘어나는 지금에 큰 강점으로 다가온다. 퇴근 후에 텔레비전과 컴퓨터만이 친구였다면, 셰어하우스에 입주하는 순간은 아주 가까운 이웃이 두셋이 생긴다는 것을 뜻한다. 단 한 마디 인사도 고독감을 해소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식사 시간이 즐거워지고 대화 상대가 있다는 점에서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책은 셰어하우스에 실제 거주하는 이들의 인터뷰를 실어 더 실재적인 예시를 보여준다. 저자의 나라인 일본에만 해당할 거라고? 국내 출판물에는 국내의 셰어하우스 입주자의 인터뷰를 별도로 수록하였다. 아직 국내에는 생소한 개념인 셰어하우스에 대해 실거주자가 쓴 책인만큼 셰어하우스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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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
조지 오웰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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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


  언제나 그렇지만, 리뷰따위의 타이틀은 버리고 잡담을 위시한 발췌문 모음이다. 왜냐고? 이 책의 시간적 배경인 스페인 내전 당시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파시즘, 사회주의, 공산주의(오, 나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같은 건줄 알았는데!), 무정부주의, 노동당(오, 전국노동자연맹과 노동자총연합은 도대체 왜 구분하는 것인가!) 우파, 좌파, 프랑코…. 나를 좌절하게 만든 단어들이다.


  오웰 스스로 사족이라 불렀던 5장과 11장은 당시의 역사와 정당간의 다툼, 언론 기사 등을 다룬다. 다른 장에 비해 지루하지만 배경지식을 늘려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걸 읽어도 도무지 모르겠는 걸 어떡해. 그리하야, 역사에 관해 무지한 나로선 사실주의에 입각한 <카탈로니아 찬가>(이하 찬가)를 르포로서 평할 수가 없다.


  어떤 고전이나 마찬가지로 <찬가> 또한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다. 배경이 되는 1935년 후로 80년이나 지났는데도 말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이라면 역시, 언론이다. 오웰에게 전쟁의 가장 끔찍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모든 전쟁 선전물, 모든 악다구니와 거짓말과 증오가 언제나 싸우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점이다.(89쪽) 적군을 헐뜯고 아군의 사기 증진(사실 사기증진이랄 것도 없다)을 위한 '공작'은 총알과 진창으로부터 수백 킬로미터는 떨어진 곳이다.


  언론은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은 일을 아군에게 유리하게 날조한다. 의용군은 장교와 사병간의 사회적 평등이 이루어졌다. 장군의 등을 툭 치며 담배 한 대 달라고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무방했다. (40쪽) 하지만 그들은 전시에서 수준이 그리 높진 않았다. 나중에 의용군을 비난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훈련과 무기부족으로 인한 결함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평등주의적 체계의 결과인 것처럼 호도된 것이다.


  여러 매체의 보도는 사실에 무지한 대중을 의식적으로 견야하고 있으며, 편견을 심어주는 것 외에는 다른 목적이 없는 경우가 많다. (215쪽) 이러한 보도는 편견을 조성한다. 트로츠키주의에 대해 들어본 영국인은 많지 않은 반면 영어를 하는 모든 사람들은 무정부주의자라는 말만 들어도 몸서리를 친다. 적폐가 그 본 모습을 드러내는 현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오웰을 분노케 한 것은 전쟁이 무엇보다도 정치적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66쪽) 파시즘에 대항하여도 모자를 판에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노동자연맹(연합? 둘을 같이 언급하는 이유는 아직도 이 두 단체를 구분하지 못해서다)은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안달이 났다. 바르셀로나 시가전 이후 공산당은 선전을 통해 통일노동자당을 파시스트의 앞잡이로 몰아간다. 이에 수많은 당원들이 잡혔으며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나갔다. 이런 죽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파시즘에 대항하여 전투 중에 죽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277쪽)


  이렇게 발췌문 몇을 묶어놓고 보니 뭔가가 보이지 않는가? 우리는 아직도 이런 세상에 살고 있다. 언론은 아무도 믿지 않을 사진을 찾거나 합성해서(오, 이런!) 보여준다. 불과 몇 년 전에 했던 말을 뒤집고선 아군이 하는 일에 무조건, 무논리적으로 편든다. 속보를 통해 사실관계가 확실치도 않은 일을 단언하듯 말하고, 언론 정신을 잃은 그들은 그저 '알 권리'만을 외치며 자극적인 발언만 외쳐댄다.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개인적인 측면에서 언론의 폭력성을 말했다면, <찬가>는 국가와 이념적 측면을 강조한다. 국가와 이념을 위해 개조된 입은 사악한 지능을 가진 거대한 존재가 도시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우리 소시민들이 무얼 할 수 있겠는가. 당신의 한 표가 중요하다고 그리 외쳐도 내 한 표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지레 포기하곤 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위대한 고전을 쓴 오웰도 사실 정치적인 생각을 하고 스페인으로 간 것은 아니다. 자신의 이념조차 잘 몰랐다. 오웰은 좌파의 입장이었는데 그가 속했던 것은 통일노동자당이었다. 스페인을 떠나고 싶은 진짜 동기는 주로 이기적인 것이었다. 단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은 엄청난 욕구를 느꼈을 뿐이다.(256쪽) 심지어 제대증을 얻자 관광객이 된 듯한 느낌을 받고(261쪽) 스페인에 처음 왔던 때 보이지 않던 거리, 오래된 돌다리, 사람들의 수레바퀴, 재미있는 반지하 상점들을 인식한다. 앞에서 느껴진 분노와 환멸과는 거리가 멀다.


  당신은 민주주의를 위해 무었을 했습냐는 질문에 오웰은 식량만 축냈습니다, 라고밖에 답하지 못했다.(96쪽) 그는 죽지 않기 위해 스페인을 떠났고 (그의 입장에선) 파시즘에 대한 대항에 아무런 힘도 싣지 못했다. 그 후 오웰은 자신의 재능인 글쓰기를 통해 분노를 토해냈고 이는 <카탈로니아 찬가>라는 책으로 탄생,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과 경각심을 불어주었다. 전장에서는 무능(역시 그의 입장에서이다)했던 오웰이지만 결국 진실을 호도하기에 이르지 않았는가.


  자, 그러면 우리도 가슴에 손을 얹고 고민해봐야 한다. 분노가 단순히 분노로 끝나는 순간, 행동하지 않는 양심으로 변하는 순간 그것은 악의 편이 되고 만다. 우리 일반인들이 오웰처럼 큰 영향력을 미칠 필요는 없다. 아무리 작은 우리지만 하나의 불씨라도 만들 수 있다. 꺼진 불도 다시 봐야 하는 세상에 자신이 티끌만한다고 주눅들 필요,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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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미, 칠월의 솔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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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한국 단편집이다.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와 정서가 다른 책들과 비슷하다. 허나 김연수만의 것이라 느낄 수 있는 표현과 묘사가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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