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고전요약.zip -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외 다섯 작품
Team. StoryG 지음 / oldstairs(올드스테어즈)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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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특히 고전을 소개하고 해설하는 책은 중독성이 있다. 읽지도 않은 책을 읽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이런 책을 읽다보면 온갖 세계문학은 다 읽은 것 같은데, 독서기록을 훑어보면 삼십 권도 채 못 읽었다. 책을 읽은 게 몇 년이 지났는데 고작 삼십 권이라니. 매번 안 읽어야지 하면서도 결국 읽고마는 책.

고전 여섯 권을 그래픽노블의 형태로 묶었다. 책은 아래와 같다.

베니스의 상인 - 셰익스피어
햄릿 - 셰익스피어
위대한 개츠비 - 피츠제럴드
죄와 벌 - 도스토예프스키
1984 - 조지 오웰
동물농장 - 조지 오웰

여섯 권을 요약하고 화두과 되는 토픽을 한두 개 정도 던진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샤일록, 그는 빌러인가?”(베니스의 상인). “첫 번째, 두 번째 유령의 의미”(햄릿). “이성과 종교의 대립적 구도”(죄와 벌). “1984는 우리와 무관한가?”(1984), 등등. 고전에 관련된 책을 읽었다면 평이한 내용일 수 있으나, 어차피 기억하지 못하는데 다시 읽는 게 도움이 된다.

고전을 다룬 다른 책과 내용 면에서는 크게 다를 건 없다. 하지만 그림과 함께 쓰여 있으니 뇌리에 쏙 박히는 기분이다. 그렇다고 내용 소개가 엉망인 것도 아니고, 정석대로 잘 요약했다. 둥글둥글한 카툰 형식이 아니라 그래픽노블의 그림체를 따와서 더 감각적이게 느껴진다.

고전을 겁내는 나같은 사람에게 딱인 책이다. <죄와 벌>을 다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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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김영민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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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고전 게임의 엔딩이 생각난다. 대충 이런 내용이다. 챔피언에 오른 권투선수는, 챔피언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면서 동시에 목표를 잃었다. 목표가 사라진 주인공은 결국 ‘허무’를 느낀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후 결국 챔피언은 권총 자살을 한다.


2. 허무란 무엇인가. 구글 검색을 해봤다.

- 아무것도 없고 텅 빈 것.
- 세상의 진리나 가치, 또는 인간 존재 자체가 공허하고 무의미한 상태.

예전에는 첫번째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는데, 현재 우리에게는 오로지 두번째로만 다가온다. 분명 목표를 이루고 성과를 달성했다고 생각하는데, 마음은 텅 빈 느낌.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의 구멍은 한없이 커져만간다. 종종 느껴지는 서늘함. 잊으려 할수록 커지는 마음. 우리는 분명히 허무한 세상에 살고 있다.


3.
>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데, 생이 이토록 빨리 지나가다니. 이럴 때 두려운 것은, 화산의 폭발이나 혜성의 충돌이나 뇌우의 기습이나 돌연한 정전이 아니다. 실로 두려운 것은, 그냥 하루가 가는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시간이 흐르고, 서슴없이 날이 밝고, 그냥 바람이 부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_19쪽

아직 달성한 목표도 없건만 허무를 느끼곤 한다. 이럴 때 말이다. 황금 같은 주말. 간만에 찾아온 휴식 시간을 그냥 날릴 수 없다. 평일에는 피곤하다고 못한 일 - 청소, 진득한 독서, 밀린 독서노트, 영화 - 을 하려고 계획한다. 하지만 피로에는 장사 없다지, 늘상 그렇듯 늦잠을 자고, 게으름은 게으름을 불러 유튜브 뒤적이고 게임을 하다가 하루를 다 보낸다. 나는 대체 뭘 했지, 허무하다. 이런 작은 허무가 쌓여 삶 전체가 허무하게 느껴지고 만다.


4. 우리가 영원히 산다면 허무하지 않을 수도 있다. 끝이 없기 때문이다. 한없이 갈망하면 허무가 생길 틈이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허무함에 몸부림치는 이유는 시간 속에서 필멸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유한하며,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77쪽)을 너무나도 절실히 안다. 부와 명예 모두 한때의 영광일 뿐이다. 공수래 공수거, 빈 손으로 왔다 빈 손으로 가는 인생. 생에서 많은 성공을 일궈냈다 한들 죽음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셈이다.


5.
> 나는 오랫동안 목적 없는 삶을 원해왔다. 왜냐하면 나는 목적보다는 삶을 원하므로. 목적을 위해 삶을 희생하기 싫으므로. 목적은 결국 삶을 배신하기 마련이므로.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해보자. 대개 기대만큼 기쁘지 않다. 허무가 엄습한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뭐하지? 목적 달성에 실패했다고 해보자. 허무가 엄습한다. 그것 봐, 해내지 못했잖아. 넌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 았지? _288쪽

저자는 인생을 보는 관점을 바꿔보자고 말한다. 목적이 없어도 되는 삶을 위하여 인생을 즐기려고 노력해보자고. 성적과 자격증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공부하는 순간을 좋아해보자고. 언제 올지 모르는 영광된 내일을 위하여 오늘을 포기하지 않는 마음을 가져보자고(103쪽).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인가. 나는 절대 하지 못할 것 같다. 경쟁을 포기하면 사회에서 도태된다. 실패의 쳇바퀴에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결국 적당한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인생을 사는 동안 절대 떨칠 수 없는 허무. 이 지긋지긋한 놈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6. 번외로, 책에 대해 아쉬운 소리를 조금 해본다. 글이 전체적으로 현학적이다. 뜬구름잡는 느낌이다. 실제 삶이 투영됐다기보다는 학자의 입장에서 글을 풀어쓴 느낌이다. 적벽부니 명화니 해도 모든 개념이 관념적으로만 느껴진다. 허무라는 개념을 다루다보니 글마저 허무에 잠식당해버렸을까? 김영민 교수의 책 중에 가장 아쉬웠다. 아이러니하게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글이 가장 좋았다는 것이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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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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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하자마자 책을 구입했다. 김훈, 안중근 - 이 두 이름에 눌려 이제야 폈다. 역사의 무거운 이야기인만큼 마음이 어둑해지는 걸 막으려고 짧게 끊어서 읽었다. 다들 알다시피 이 책은 일제 치하,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 죽인 이야기다.


역사는 다들 알테고, 결말은 바뀌지 않으니 내가 이 책을 읽고 느꼈던 점을 몇가지 남긴다. 정리가 안된 거친 스케치다.


1. 온통 무미건조함

김훈의 문체는 건조하기로 유명하다. <하얼빈> 역시 그러하다. 실제로 하얼빈의 추운 기후가 느껴질 정도다. 무거운 역사이기에 더욱 그렇게 쓴 걸까 생각될 정도다. 문장과 인물 모두 과장이 없고 담담하다. 

인물 간 대화만 보면 이게 남자인지 여자인지 노인인지 청년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모든 인물이 평면적으로 그려진다.  <하얼빈>은 일부러 이 모든 것을 배제시켰다는 느낌이 든다. 인물의 개별성을 제거시킴으로써 역사에서 아무것도 아님을 강조함과 동시에, 역설적으로 뭔가 말할 수 없는… 특별성을 만들어냈다.



2. 역사란 무엇일까

이토가 죽고나서의 일이다. 황실은 물론이고 당시 많은 이들이 이토의 죽음을 기렸다. 

> 같은 날 서울 장충단에서 한국 황실과 내각과 민간인들이 합동으로 관민 추도회를 열었다. 

흰 베로 장막을 치고 그 안에 이토의 위패를 모셨다. 위패에 ‘문충공'의 시호를 써붙였다. 황족과 각부 대신, 고위 관리. 한성부민회 임원들, 각 지역 대표들이 이토의 위패에 절했다. 서울의 모든 학교가 수업을 중지했다. 교사들이 학생을 인솔해 와서 절했다. 수도 거주민들은 대문 앞에 삼베를 감은 반기를 걸었다.  _197쪽



마지막 황태자이자 일본으로 유학간 이은은 슬픔을 떠나 조선과 일본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한다.

> 이은은 깊이 상심했다. 강하고 또 너그러운 스승 이토가 왜 조선인의 손에 죽어야 하는지, 조선은 무엇이고 일본은 무엇이고, 어째서 조선이 따로 있고 일본이 따로 있으며, 조선과 일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은 것인지 이은은 생각할 수 없었다.  _169쪽



복잡 미묘한 순간들이다. 현대에 사는 우리는 일제치하가 옳지 않음을 알고, 독립투사들의 희생과 업적이 숭고함을 안다. 동아시아 문화의 개발은 허울뿐인 구호였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당시의 역사를 사는 이들은 이같은 역사의 흐름을 볼 수 없었다. 그러하기에 자신의 조국을 침략한 이에게 슬픔과 애도를 느꼈을 것이다.


한국에 있던 천주교 주교는 아래와 같이 생각하기도 한다.

> 뮈텔은 약육강식하는 세계의 맨 앞에 서서 몸으로 세상을 끌고 나가던 이토의 고단한 영혼을 하느님께서 거두어주시고, 그의 수고로움을 가엾이 여기시어 그가 스스로 알지 못하고 저지른 죄를 사하여 주실 것을 뮈텔은 하느님께 간구했다.  _175, 176쪽


> 미개한 사회의 원주민들이 문명개화로 이끄는 선진의 노력을 억압으로 느끼고 거기에 저항하는 사례들을 뮈텔은 세계의 후진 지역에 파송된 동료 성직자들의 보고를 통해서 알고 있었다.  _177쪽



종교는 조금 복잡한 소재다. 대표적인 서양 문물인 종교로서는, 동아시아 문화 개발이라는 일본의 구호에 긍정적이었을 수도 있겠다. 과거 서양 - 특히 유럽은 강자와 열강으로서 역사를 지배해왔으니, 같은 수탈자의 시각과 논리로 미개 사회의 개발에 쉽게 수긍하지 않았을까.


단, 과거 조선도 천주교를 핍박했는데, 핍박을 받은 것과 수탈자의 논리를 긍정하는 것은 사실 별개의 이야기다. 둘 사이의 공통점은 바로 ‘국가’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종교 관점에서는 국가보다 사람을 더 중시한다고 생각하면, 국가라는 개념이 역사에 끼친 영향을 고민하게 된다.



그래도 역사는 약동하며 다시 쓰인다. 1993년 김수환 추기경은 안중근 추모 미사를 집전했다. 그는 미사의 강론에서 일제 치하의 한국 천주교회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그릇된 판단을 내렸으며, 안중근의 행위는 국권회복을 위한 타당한 행위라고 고쳐 말했다. 2000년, 한국 천주교회는 민족 독립에 앞장서는 신자들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어지러운 시대, 역사의 파도 한 가운데에서 무엇이 정답인지 모른 채 표류하는 이들 가운데, 안중근이라는 하나의 별이 빛나고, 스러졌다. 영웅적인 면모 뒤에 가려진 개인의 고뇌와 갈등, 그리고 수많은 생각들을 책을 통해 읽을 수 있었다. 안중근이 정답인 시대에 살고 있어서 다행이다.


> 한국의 근대는 문명개화의 꿈에 매혹되었고 제국주의의 폭력에 짓밟혔다. 이 문명개화는 곧 서구화였고, 한국인이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이미 이룩한 문명은 개화의 추동력에 합류할 수 없었다. 20세기 초의 한반도에서 과거는 미래를 감당할 힘을 상실했고 억압과 수탈을 위장한 문명개화는 약육강식의 쓰나미로 다가왔다.

한국 청년 안중근은 그 시대 전체의 대세를 이루었던 세계사적 규모의 폭력과 야만성에 홀로 맞서 있었다. 그의 대의는 ‘동양 평화’였고, 그가 확보한 물리력은 권총 한 자루였다. 실탄 일곱 발이 쟁여진 탄창 한 개, 그리고 ‘강제로 빌린(혹은 빼앗은)’ 여비 백 루블이 전부였다. 그때 그는 서른한 살의 청춘이었다.  _305쪽, 작가의 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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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1-04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중근이 정답인 시대에 살고 있어서 다행이다.‘라는 문장을 읽으니 아침부터 감동이 밀려오네요
잘 읽었습니다^^
전 김훈의 저 건조한 문체가 정말 힘들더라구요 <남한산성>도 그렇고...

양손잡이 2023-01-04 09:26   좋아요 1 | URL
덧글 감사합니다 :)
남한산성은 여러 의미로 진짜 역대급이라고 들어서 도전을 못했습니다 ㅠㅠ 도전해봐야겠어요..!
 
2022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편혜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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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는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라면, 가을에는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이다. 두 상의 기준은 등단 10년이다. 전자는 등단 10년 이내, 후자는 10년이 지난 작가를 대상으로 한다. 등단 10년 이내 작가는 주로 젊은 편이기에 뭐든 해보려는 젊은 에너지가 넘친다. 사회의 부조리함을 가감 없이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이때문에 봄이면 문학 커뮤니티는 시끌시끌하다.


등단 10년이 넘은 작가들은 어느정도 초연함이 느껴진다. 뭔가 중년의 안정감이랄까, 하하하. 문장도 성기지 않고 잘 읽힌다. 대체로 무난하고 논쟁거리보다는 아름다운 소묘의 느낌을 풍긴다. 그래서인지 주목도는 ‘젊은작가상’이 훨씬 높지만, 나는 ‘김승옥문학상’을 선호한다.


각 단편을 소개하면서 느낌을 말하고 싶지만 그럴 깜냥은 되지 못하고, 전체적인 느낌은 뭐랄까, 성인이 되어서도 이기지 못하는 사회의 짐과 굴레가 가득한 소설집이라고 하겠다. 이는 표제작인 ‘포도밭 묘지’(편혜영)에서 가장 잘 느껴진다. 역시 편혜영 작가는  암울한 분위기의 이야기를 잘 쓰는 것 같다. 이야기 안에서 발생한 갈등(개인 - 개인이든, 개인 - 사회든)을 봉합하지 않고 끝맺음하여 찜찜한 느낌을 주는 것도 여전하다.


‘진주의 결말’(김연수)에서는 사회가 한 인물에게 부여하는 부정적인 이야기와 이에 재귀적으로 동조하는 사회를 보여주며, 자극적인 것만을 따라가는 우리의 모습을 묘사한다. 하지만 ‘홈파티’(김애란)에서는 기득권이라 칭할 수 있는 인물들의 민낯을 보기좋게 깨부수면서 오롯이 자신을 드러낸다. ‘일시적인 일탈’(정한아)도 사실인지 허구인지 알 수 없는 인물을 내세우면서 자신의 내면과 욕망을 들여다본다.


문지혁의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는 근래의 10.29 참사(이태원 압사 사고)와 이어져서 뜻깊게 읽힌다. 이 단편에서는 성수대교 붕괴 사고를 겪은 화자가 자신의 경험을 소설과 논문으로 쓰려고 한다.


> 경험을 소설로 만드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경험을 논문으로 만든다는 것 역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애초에 소설과 논문은 같은 영역에 있지 않지만 그래도 그 둘이 같은 차원(글쓰기)이기는 하다면 경험은 아예 다른 차원(실재)의 일이니까.  _187쪽,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에서


어떤 사건/사고가 일어났을 때 당사자가 아닌 나는 글로 사건을 접한다. 처음에는 뉴스 기사로 읽고, 나중에는 심층적으로 사회학, 인문학적으로 다뤄지고 분석된 글로 읽는다. 하지만 당사자의 경험을 인지할 생각은 못한다. 그것은 극한의 공감의 영역인데, 사실 이건 불가능하다. 글로는 말할 수 없는 그들의 이야기. 나는 10.29 참사를, 아니 세상의 모든 불행한 일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백수린의 ‘아주 환한 날들’ 이야기를 안할 수 없다. 이 단편집에서 가장 이질적이면서 가장 환한 단편이다. 작가의 다른 단편집 <여름의 빌라>에 수록된 ‘흑설탕 캔디’와 결이 비슷한 단편이다. 메시지가 아주 직설적이고 단순해서인지 마음에 쏙 들었다.


> 수없이 많은 것을 잃어온 그녀에게 그런 일이 또 일어났다니. 사람들은 기어코 사랑에 빠졌다. 상실한 이우의 고통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되고 마는 데 나이를 먹는 일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_236쪽, ‘아주 환한 날들’에서


세월이 흘러 온갖 이별과 상실을 알았음에도, 우리는 사랑을 잃지 않고 마음에 꾹꾹 눌러 담고 사는 존재라는 걸 소설을 통해 깨닫는다. 각박한 세상에서도 희망을 갖고 사는 건 나를 믿고, 내 주위의 다정한 사람들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 사이에서는 종국에도 사랑과 신뢰가 피어날 테니.


잡담이 길어졌다. 좋은 책이어서 그런가 보다. 두고 읽을만하다. 단편들이 실린 작품집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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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소감 - 다정이 남긴 작고 소중한 감정들
김혼비 지음 / (주)안온북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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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함으로 무장한 김혼비 작가의 에세이 최신작이다. 전작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전국축제자랑>을 워낙 재밌게 읽어서 기대감이 컸던 책이다. 그래서 작년 10월에 책이 출간되자마자 샀는데, 결국 1년이 지난 지금에야 책을 폈다.


> 결국 모든 글이 다정에 대한 소감이자, 다정에 대한 작은 감상이자, 다정들에서 얻은 작고 소중한 감정의 총합인 것 같아서.  _에필로그에서


<다정소감>은 일상에 대한 에세이다. 일상과 저자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있었던 일과 작은 다정함에 대한 이야기. 전작들이 특정한 소재(술, 축구, 축제)를 다뤄서 뭔가 공감대를 만들기 쉬웠다면, 저자의 일상은 워낙 광범위하면서도 평범하다. 그래서인지 조금 산만한 편이다.


무엇보다 전작에서 보여준 저자만의 작가만의 특별한 무언가가 보이지 않는다. 통통 튀는,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특유의 입담이 사그러든 느낌이다. 이런 느낌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 같은데, 이것을 기대하고 책을 편 나에게는 평이한 에세이로 느껴졌다. 같은 소재와 주제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에세이의 흥망(?)이 갈리는데, 사실 다정한 이들과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는 에세이는 차고 넘쳤다. ‘김혼비’의 에세이를 읽을 이유가 없어지는 셈이다.


저자에게 정말 미안하지만, 특정 에피소드는 다정함이 너무 많아 넘칠 지경이어서 오히려 작위적으로 느껴진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언어의 온도>를 보는 느낌이었달까. 이런 게 조금씩 쌓이니 책에 대한 기대가 점점 낮아졌다.


진지와 유쾌 그 사이에서 줄타기하다가 이도저도 아니게 되어버렸다. 적어도 나에게는 이런 책으로 다가왔다. 흠, 어쩌면 작가를 내 기준과 시선에 꽉 잡아두고 가두지 않았나 생각도 해본다. 김혼비라면 이런 글을 써야지, 하며 고나리짓하는 건 아닌가 돌이켜본다. 아니면, 내 일상에 이미 다정함이 풍족해서, <다정소감> 속 세상을 살고 있는 중이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일상적인 이야기를 읽고 있자니 영 심심한 거다. 그래, 이게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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