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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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까뮈의 <이방인>을 떠올리게 만드는 첫 문단이다. 제목도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 대부분 손석구가 출연한 ‘나의 해방일지’를 떠올릴테다. 북토크에서 작가가 말하길, 편집부에서 의도가 빤히 보이는 제목을 권해서 조금 싫었다고 한다. 소설의 소재와 다르게 책 표지는 둥글둥글하고 가볍게 그려졌다. 독자들에게 조금 가볍게 다가갈 수 있는 좋은 방법인 것 같다.


2. 소설 초장부터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죽은 아버지는 혁명전사다. 지금 나로서는 무슨 중2병 같은 이름이 있나 하겠지만, 아버지 ‘고상욱’은 실제로 빨치산으로 생활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동지들과 죽음을 무릅쓰고 총을 들고 투쟁한 것이다. 심지어 아버지의 딸이자 소설 속 화자의 이름인 ‘아리’는 부모가 활동한 산 이름에서 따왔단다(아빠 - 백아산, 엄마 - 지리산).
젊은 나이에 감옥에 수감됐다가 출소 후 고향인 구례로 내려온 아버지는 농사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농부이자 전직 빨갱이인 그는 노동이 힘들다며 몰래 빠져나와 막걸리와 소주를 마셔다. 커가면서 ‘나’는 가족에게 고압적인 아버지와 서먹한 사이가 되어 멀어지게 된다. 장례식에서 울지도 않는다. 그렇게 남인 것 같던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마주친 여러 인물들과 함께 대화하고 과거를 회상하며 아버지의 생을 돌아보게 된다.


3. 라는 게 대충 이야기의 골자다. 상당히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이들에 얽힌 과거 이야기가 서술된다. 단편적이고 다소 진부한 설정들의 이야기여서, 소설 자체로만 보면 솔직히 조금 아쉬운 편이다. 거의 모든 장면이 회상으로만 이루어진, 선호하지 않는 양식이다. 종국에 아버지를 이해하며 마무리되는 결말도 너무 쉽게 풀어지지 않았나 싶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 말하나 싶지만, 나도 독자이자 소비자이니 할 말은 해야지.


4. 형식과 틀 이야기를 벗어나, 소설을 읽고 곰곰이 생각해 볼 포인트는 세 가지였다.


5. 가장 먼저, 나는 부모님을 100% 알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부모님과 20년을 한 집에서 살았다. 학창시절에 공부하기에 바빴지만 매일 보는 사이였다. 이리도 가까이 붙어 있었던 우리인데, 나는 부모님을 잘 알고 있는가?

> 오십년 가까이 살아온 어머니도 아버지의 사정을, 남자의 사정을, 이제야 이해하는 중인 모양이었다. 나 또한 그러했다. 아버지는 혁명가였고 빨치산의 동지였지만 그전에 자식이고 형제였으며, 남자이고 연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남편이고 나의 아버지였으며, 친구이고 이웃이었다.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 하자고 졸랐다는 아버지의 젊은 어느 날 밤이 더이상 웃기지 않았다. 그런 남자가 내 아버지였다. 누구나의 아버지가 그러할 터이듯. 그저 내가 몰랐을 뿐이다.

아버지는 정말 다양한 사람과 접점을 가졌다. 생각해보면, 인생은 하나가 아닐 성싶다. 관계를 맺은 사람마다 내가 보여지는 모습은 조금씩 다르다. 그렇다면 지인의 수만큼 인생의 갯수도 늘어나게 되지 않을까.

가끔 부모님의 과거 얘기가 궁금해 묻곤 한다. 특별할 게 없다고 생각했던 부모님이지만, 아버지의 군시절 이야기, 어머니의 빛났던 학창시절 이야기를 들으면 놀라움의 연속이다. 부모님으로 살기 전, 한 사람으로서 살 때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부모가 된 후에도 어떤 자아와 생각으로 지냈고, 버텨왔는지. 김하나 작가의 ‘빅토리 노트’처럼, 부모님도 자신의 인생이 있었을텐데, 거기에 귀를 기울여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6. 둘째로, 인간이 소외된 이념 투쟁의 허망함이다.

> 아버지는 백운산에 가장 오래 있긴 했지만 이산 저산 떠돌며 48년 겨울부터 52년 봄까지 빨치산으로 살았다. 아버지의 평생을 지배했지만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던 건 고작 사년뿐이었다. 고작 사년이 아버지의 평생을 옭죈 건 아버지의 신념이 대단해서라기보다 남한이 사회주의를 금기하고 한번 사회주의자였던 사람은 다시는 세상으로 복귀할 수 없도록 막았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작 사년의 세월에 박제된 채 살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분명 빨치산으로 살았다. 국가 안보에 안 좋은 영향을 준 것은 확실하다. 사회에 위험하다고 판단과 처벌이 가능하다. 죄를 지은 사람이 있다면 그 죄에 있어서만 사람을 벌해야 하는데, 소설에서는 연좌제로 아버지의 친인척들도 벌을 받았다. 그의 할아버지는 총에 맞아 죽었고, 그 충격으로 동생은 평생 형(아버지)을 원망했다.조카는 고위공직에 오르지 못했다.

빨치산 운동은 고작 4년을 했건만, 아버지는 평생 범죄자라는 낙인이 찍혔고 사회는 그가 살아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기 껄끄러운 주제다. 위험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을 영원히 억압할 자격이 있을까? 영원한 딜레마가 될 터다. 사람이 빠진, 오로지 이데올로기만의 대립에서 소외되는 것은 결국 우리다.


7. 마지막으로, 빨치산 ‘고상욱’이 아닌 그냥 사람 ‘고상욱’을 생각해본다.

아버지는 고향에서 많은 사람과 만나고 살았다. 과거 빨치산 동지는 물론이오, 조선일보를 보는 교련선생 출신 박선생과 단짝이고, 자신을 감시하는 담당형사와 술잔을 나누기도 했다.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소매를 걷고 찾아갔다.

> “생각이 다르면 안 보면 되지, 애도 아니고 맨날 싸우면서 왜 맨날 놀아요?”
>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아랫목에 자리를 잡고 신문을 촥 펴면서 말했다.
> “그래도 사램은 갸가 젤 낫아야.”
> 아버지에게는 사상과 사람이 다른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사상보다 사람을 믿는 것이다. 그것이 사상과 빨치산 운동으로 발현되었지만, 뿌리에는 결국 사람이 있었다. 당시 빨치산들이 어떤 마음으로 총을 들고 투쟁했는지는 모르겠다. 우파 - 좌파, 모든 이들이 한반도라는 좁은 땅떵이에서 비극과 뒤엉켰을 뿐이다. 결국 사람 ’고상욱’은, 우리는 대단한 것 없이, 이상한 것 없이, 사람의 선의를 믿어야 한다고, 자신의 인생을 걸고 온몸으로 말하는 셈이다.


8. 소설에서 가장 가슴을 치는 문장은, 가장 마지막에 수록된 ‘작가의 말’에 있다.

>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 아버지 십팔번이었다. 그 말 받아들이고 보니 세상이 이리 아름답다. 진작 아버지 말 들을 걸 그랬다.

우리가 욕심, 시기, 질투, 의심을 조금만 내려놓고 상대에게 자그마한 진심을 담아 손을 내민다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유토피아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저 세상에 슬픔이 차츰 사라지고 웃음과 신뢰가 피어나길 바랄 뿐이다. 사람을 믿는 신념을 고수하려면 얼마나 무던해져야 할까. 아버지가 꿈꿔왔던 세상이 오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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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수 2023-06-03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저는 작가 임승수라고 합니다. 이번에 제가 쓴 인문에세이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출간 소식을 전하기 위해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진심을 담아서 한 글자 한 글자 열심히 썼지만 딱히 홍보할 방법이 없다 보니 답답한 마음에 저자가 이렇게 직접 나서게 되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책 여러 권을 가방에 넣고 무작정 지하철에 올라 승객분들에게 직접 육성으로 알리고 싶은 심정입니다(그래서는 안 되겠지만요). 갑작스러운 댓글에 불편하셨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여러 일로 바쁘시겠지만 1분 정도만 시간을 내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도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무척 재미있게 읽었는데요. 그러고 보니 문득 제 신간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의 내용이 <아버지의 해방일지> 21세기 실사판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 속 아버지가 빨치산 출신 사회주의자로서 신념을 버리지 않고 살아오면서 생긴 독특한 인간관계와 에피소드가 있듯이, 두 딸의 아빠이자 반백살의 남성인 저도 30년째 사회주의자로 살아오면서 그런 삶을 견지했을 때만 경험할 수 있는 평범하지 않은 사건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학생 때 사회주의자가 된 이후 인생이라는 여행의 경로가 대폭 변경되었습니다. 가치관이 바뀌다 보니 갈림길에서 예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인데요. 글치였던 공대생 출신이 멀쩡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서는 느닷없이 마르크스주의 책을 쓰는 작가가 되고, 선거 날 투표할 때면 지지율이 1%도 안 되는 후보에게 거침없이 한 표를 행사하고, 뜬금없이 와인에 홀딱 빠져서는 대한민국 검사뿐만 아니라 노동 조합 간부들을 대상으로 와인 강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인생 경로는 명승지 투어 같이 잘 차려진 패키지 여행과는 결이 달라서, 오지 탐험에서나 맞닥뜨릴 돌발 장면들이 순간순간 펼쳐졌습니다.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에는 제가 사회주의자라는 여행 경로를 선택하게 된 이유, 그리고 이 경로를 선택했을 때만 접할 수 있는 풍경, 경험할 수 있는 사건,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여전히 이 여행이 제법 맘에 들어서 설사 구부러질지언정 부러지지 않고 사회주의자로 살고 있습니다. 모두가 이 이야기에 공감하리라 기대한다면 과욕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오지 탐험 여행서 같은 흥미진진함을 제공하리라 작은 기대를 해봅니다.

이 책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쓴 건 아닙니다. 그저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삶이 생각보다 괜찮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썼습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재밌게 읽으셨다면 제 책도 ‘실사판’으로서 무척 흥미롭게 읽으시리라 확신합니다. 혹시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권의 여행서를 읽는다는 느낌으로 읽어주기를 바랍니다. 아래에는 출판사의 책소개 일부를 발췌해서 옮깁니다. 귀중한 시간 할애해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책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아래의 인터넷서점 링크들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119181643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17534357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2430088

”우리는 과연 사회주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사실 사회주의는 생각보다 훨씬 우리의 일상 가까운 곳에 스며들어있다. 일례로 전 세계가 주목한 코로나19 감염병 대처 방식도 지극히 사회주의식이었다. 국가가 앞장서서 공공 재원과 행정력을 동원해 감염병에 대처했으며 코로나 진단 검사와 치료를 누구나 무상 또는 저렴한 비용으로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보건 의료 정책과 더불어 국민건강보험공단, 국공립학교, 국공립어린이집, 무상 급식, 공공 임대 주택, 부자 증세 등등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복지 및 재분배 정책은 모두 사회주의적 성격을 가졌다. 그런데 복지를 확대하길 원하면서도 왜 사회주의에는 유독 반감을 가질까?

저자는 사람들이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사회주의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본격적으로 해소한다. 이를 위해 자본주의가 대세이면서 동시에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에서 30년 차 사회주의자로 살아온 자신의 이야기를 아낌없이 들려준다. 또한 자본주의의 은폐된 착취 시스템이 작동하는 원리를 해설하고, 역사적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태생과 최후를 통찰한다.

사회주의로의 강요는 없다. 다만 질문이 시작될 뿐이다. 최악의 빈부 격차, 극심한 이윤 지상주의, 유례없는 환경 파괴, 만연한 생명 경시 풍조가 지배하고 있는 이 땅에서 우리는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며 지켜나갈 것인지. 증오와 배척, 불평등와 불공정 너머의 세계를 꿈꾸며, 우리 삶의 지표에 진중한 화두를 던진다“

양손잡이 2023-06-03 11:50   좋아요 0 | URL
이전에 출간된 책을 사두기만 하고 읽지를 못했는데(책 쇼핑 욕구가 많아서 좋다 생각하는 책은 무작정 사둡니다)이번 신긴은 얼른 사서 꼭! 읽어야겠네요. :)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 가성비의 시대가 불러온 콘텐츠 트렌드의 거대한 변화
이나다 도요시 지음, 황미숙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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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에 의하면 20~69세 남녀 중 빨리 감기로 영상을 시청한 사람은 34.4퍼센트로 조사됐다. 20대는 49.1%, 30대는 34.1%의 비율이다란다. 표본수가 적지만 대학교 2~4학년생은 87.6%가 빨리 감기를 한다고 한다. 젊은 세대일수록 빨리 감기나 건너뛰기로 영상을 시청하는 셈이다. 물론 나도 그중 하나다.

2. 유튜브 영상을 1.5배속으로 본 게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1.25배도 아니고 1.5배. 영상을 빨리, 또 많이 보려고 그런 건데, 종종 음성이 잘 들리지 않아 앞으로 돌아가 다시 듣기도 한다. 때로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자막을 켠다.

3. 1.5배속 재생을 한번 경험하니 다른 영상도 자연스레 배속으로 보게 된다. 처음에는 간단한 정보성 영상에서 시작된 1.5배속이, 애니메이션, 드라마, 영화 – 심지어 인물간의 감정을 다룬 영화까지 퍼졌다. 이제 정속의 영상은 너무 느리게 느껴진다. 사람이 원래 이렇게 말을 천천히 했나 싶을 정도다.

4. 우리가 1.5배속뿐만 아니라 2배속으로 영상을 보고, 때로는 10초, 15초 건너뛰는 가장 큰 이유는, 세상에는 볼 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기존에도 TV 쇼, 드라마, 영화 같은 컨텐츠는 많았다. 마블 영화나 영드 닥터후 시리즈, 애니메이션 심슨 시리즈도 맘먹고 보려면 몇 주를 지새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 유튜브나 틱톡에서 유저들이 업로드하는 영상까지 더해지니, 넷상에는 영상과 컨텐츠는 무한대에 가까울 정도로 넘친다. 유튜브에는 1분마다 400시간의 영상이 업로드된다고 한다. 2019년 기사 내용이니, 지금은 400시간보다 훨씬 많지 않을까 싶다.

5. 하나 더. 기존에는 서사와 드라마를 즐기기 위한 영상이 많았다. 천천히 이야기를 즐기며 소화하면 됐다. 인터넷의 발달과 UCC의 출현, 거기에 유튜브라는 거대 공룡이 출현한 후 영상은 유행을 주도, 사회현상을 만들기도 한다. 간혹 사람들과 이야기하다보면 잘 모르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농담, 소재가 있다. 찾아보면 유튜브에서 유행한 밈과 유행어, 인물들이다. 덕분에 한참 펭수, 빵송국, 숏박스, 스낵타운의 영상을 쭉 본적이 있다. 물론 이것들을 모른다고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는다. 주변에 발맞추기 위해 우리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온갖 컨텐츠를 소비한다. 빨리빨리, 빨리 감기로 말이다.

> 고전적 명작 《로마의 휴일》(1953)에도 ‘샤레이드’가 사용되었다. 오드리 헵번이 연기한 앤 공주가 각국 중요 인사들과 차례로 악수하며 인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녀는 시종일관 지루해 보인다. 다만 “아, 지루해”라는 대사는 없다. 대신 카메라가 그녀의 드레스 속 발끝을 비춘다. 그녀는 지루한 나머지 발을 꼼지락거리며 한쪽 구두를 벗어둔다. 발끝이 신발을 잃어버리고 급기야는 자리에 앉을 때 구두를 놓쳐버린다. 이 장면은 앤 공주가 지루해하고 있음을 대사 한 줄 없이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이 시나리오 기술이다.

6. 영상을 빨리 보면서 우리는 그 안에 담긴 분위기와 내러티브보다 ‘내용과 소재’ 그 자체에만 집중하게 된다. 수많은 컨텐츠 속에서 우리가 중요시 여기는 것은 컨텐츠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맥락을 이해하는 능력이 조금 낮아지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컨텐츠는 그것이 가진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한다. 위 인용과 다르게 인물의 기분을 보여주지 않고 지루하다고 직접 대사를 내뱉는 것이다.

7. 길이가 1분 미만의 숏폼 동영상도 비슷한 결로 바라볼 수 있겠다. 세부 줄거리 흐름이 중요하지 않은 숏폼 컨텐츠를 지속적으로 보다보면 논리 구조를 파악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긴 호흡의 영상은 점차 소화하기 힘들어지고, 텍스트는 당연지사, 자극이 적으니 읽기 지루하다. 컨텐츠의 주인이 아닌 노예가 되는 셈이다. 이건 100% 내 경험이다. 유튜브 쇼츠를 중독된 듯 볼 시기에, 책은 고사하고 한 시간짜리 드라마 한 편도 보기 조금 힘들어했다.

> “디테일한 부분이야 상관없어. 스토리만 알면 돼.”
> “건너뛸 수 있는 작품을 만든 게 잘못이지”
> “어떤 식으로 보든 그건 내 마음이야.”

8. 저자는 빨리 감기를 시대적 필연이라고 말한다. 가급적 적은 자원으로 이윤을 최대화하려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거의 절대적 정의가 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추었다고도 한다. 충분히 이해는 하나, 이런 의문이 남는다.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본다니 대체 어찌 된 일일까?

9. 책을 덮고 유튜브 영상을 정속으로 봤다. 못참고 다시 1.5배속으로 설정한다. 빨리 보기에 중독되면 벗어날 수 없다. 그래도, 배속과 건너 뛰기, 숏폼 컨텐츠의 부작용을 몸소 겪었으니 답답함을 꾹 참고 1.25배속으로 타협을 해본다. 넘치는 인터넷 밈을 다 알 필요 없다. 유행에 민감하지 않아도 된다. 조급함을 내려놓고 나만의 감정선을 찾으려고 노력해본다. 아, 영화는 배속으로 보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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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 코리아 2023 - 서울대 소비트렌드 분석센터의 2023 전망
김난도 외 지음 / 미래의창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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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읽고 말았지. 매년 바뀐 게 없다, 똑같은 소재로 몇 년을 우려먹는다, 되지도 않는 키워드로 억지로 끼워맞춘다, 자신이 유행을 선도하려고 한다, 이렇게 욕을 들으면서도 연말이면 꼬박꼬박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트렌드 코리아>. 이맘때 즈음이면 유행에 뒤쳐지지 않으려고 습관처럼 읽고마는 책이다. 트렌드에 민감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괜히 훑어본단 말이지. 매년 사서 읽었지만 올해는 밀리의 서재에 일찍 올라와서 읽었다.

‘검은 토끼해’인 2023년의 키워드는 “RABBIT JUMP”이다. 부제는 ‘더 높은 도약을 준비하는 검은 토끼의 해’. 매년 키워드와 부제를 만드느라 힘들기도 하겠다. 2014년에 <트렌드 코리아>를 처음 읽었을 때에는 동물에 맞추서 이렇게 뜻을 잘 맞춘 키워드를 만들지,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억지다. 뭐, 이것도 능력이다.

사회의 흐름을 읽는 것은 중요하다. 아무리 고전이 좋다고 한들 고전만 읽으면 사람은 성장할 수 없다. 현재에 맞게 재해석해야만 고전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트렌드, 이게 참 중요하긴 한데... 이걸 매년 챙겨봐야 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트렌드가 아무리 빨리 변한다지만 1년에 한번씩 사회 현상을 짚을 필요가 있을까? 그것도 일개 소비자인 내가?

나는 온갖 유행과 밈에 민감하다. 30대 중반이 됐는데도 온갖 커뮤니티와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유행을 흡수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트렌드 서적을 읽다보니 역설적으로 이 강박을 놓게 됐다. 트렌드를 모른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조금 늦게 시류에 편승한다고 벌받는 것도 아니다. 유행을 좇기보다 내면을 가꾸는 게 더 중요하다. 진득하니 소설이나 읽고, 트렌드는 이삼 년에 한번씩 알아보기로 했다.

참, 트렌드 도서는 ’트렌드 코리아‘보다 ’트렌드 노트‘ 시리즈를 추천한다.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책을 써서 근거가 명확하고 예시들이 피부에 더 와닿는다.

아래로는 올해의 키워드와 각 키워드에 대해서 간단히 느낌을 남겨본다. 제대로된 요약은 아니고 눈에 띄는 단어와 문장을 적어놓은 내 맘대로 노트다.


**R**edistribution of the Average : 평균 실종
**A**rrival of a New Office Culture: ‘Office Big Bang’ : 오피스 빅뱅
**B**orn Picky, Cherry-sumers : 체리슈머
**B**uddies with a Purpose: ‘Index Relationships’ : 인덱스 관계
**I**rresistible! The ‘New Demand Strategy’ : 뉴디맨드 전략
**T**horough Enjoyment: ‘Digging Momentum’ : 디깅모멘텀
**J**umbly Alpha Generation : 알파세대가 온다
**U**nveiling Proactive Technology : 선제적 대응기술
**M**agic of Real Spaces : 공간력
**P**eter Pan and the Neverland Syndrome : 네버랜드 신드롬




**R**edistribution of the Average : 평균 실종
평균이 사라진다. 양극화(중간이 사라짐), N극화(N개의 소비자, N개의 취향), 단극화(한쪽으로 쏠림)의 경향이 커진다.
양극화는 주로 경제적인 측면에서 부각되는 단어인데, 부익부 빈익빈이란 단어도 있고, 경제가 불안해지니 다이소 같은 저렴한 가게가 성행하기도 한다. 일례로, 경기불황 때는 천원샵이 유행이라고 하니, 확실히 경제에 찬바람이 불고 있긴 한 것 같다.
N극화는 워낙 예전부터 나오던 이야기다. 소품종 대량생산이 아닌 다품종 소량생산의 시대. 이 취향이 워낙 다분화되고, MZ세대의 개성 다양화와 맞물려 N극화가 더욱 가속화된다.
단극화는 플랫폼 경제에서 보이는 현상이다. 동영상은 유튜브, 쇼핑은 아마존(미국), 검색은 구글, 이렇게 사용자가 한쪽으로 쏠린다.

평균이 사라지면서 마케팅은 더욱 세분화될 필요가 있다. 평균이라는 안전한 전략을 사용하면 시대에 도태될 수 있다. 거대하고 독점적인 플랫폼을 만들지 못한다면 소수의 팬/팬덤을 잘 공략하는 전략이 필요한 시대다.


**A**rrival of a New Office Culture: ‘Office Big Bang’ : 오피스 빅뱅
이전부터 재택 근무, 공유오피스처럼 전통적인 오피스 업무에서 벗어난 시류가 있었다. 이것이 팬더믹 시대와 맞물려 새로운 업무 방식의 속도가 가속화되고 다양해졌다. 재택은 기본이거니와, 메타버스에서 근무하는 방식을 도입한다는 회사도 있다(카카오).
또한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진다. 10년 전, 내가 입사하던 시절에도 왕왕 돌던 이야기인데, 요즘에는 더욱 강조된다. 다소 보수적인 대기업 제조부문에서도 부서이동, 이직 이야기가 활발하다. 회사의 처우가 안좋아지면 이전 세대보다 불만을 잘 표출한다. 덕분에 회사는 점점 복지에 신경을 쓰고 있다.

제조업에 직을 둬서인지, 재택근무보다 사무실에서 대면업무가 편하고 효율도 좋다. 영원히 젊을 줄 알았는데, 나도 나이를 먹고 기성세대의 반열에 오르는 것 같다. 팬더믹 시대 이후 온라인 미팅 활성화는 손들고 환영할 만하다. 덩치가 큰 대기업임에도 조금씩 업무 환경은 변화하고 있다.


**B**orn Picky, Cherry-sumers : 체리슈머
필진은 ‘체리피커’라는 말을 자신들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건 모르겠고, ‘체리슈머’라는 단어를 제시한다. 체리슈머란 경기 불황에 접어들면서, 한정된 자원을 극대화하고 다양한 알뜰 소비전략을 펼치는 소비자층을 일컫는다. 체리피커는 혜택만 쏙쏙 빼먹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는 반면, 체리슈머는 소비자로서 현명한 선택을 강구한다는 긍정적이 이미지라고 한다. 내가 봤을 때는 거기서 거기다.
체리슈머의 몇가지 예를 찾아보자. 1인 가구에 자게 각종 물건을 다소 비싸더라도 필요한만큼만 구매한다. OTT를 쪼개서 사용하는 서비스를 이용한다. 인터넷 공구를 넘어서, 오프라인에서 입주민끼리 배달공구를 한다. 메모지나 향수 등을 소분해서 판매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뭘 그렇게 하느냐고 생각했곘지만, 요즘 소비자에게 소분 거래는 단순한 절약을 너머 재미와 성취감을 선사하는 놀이에 가깝다.

사실 OTT 쪼개기 서비스는 약관 위반이고, 소분 판매는 불법이다. 경험하고 싶으나 많이 필요하지 않거나 다소 부담되는 서비스를, 판매자와 기업은 역이용할 수 있다. 발문간에 발 들여놓기 전략을 사용하는 것이다. 소비자를 브랜드/서비스에 익숙하게 만든 뒤 자신들의 생태계에 편입시키는 것이다.
소비자에게는 절약도 좋지만 그보다 우선시되는 것은 소비자 윤리다. 법에 저촉되지 않는 적당한 선을 지켜야 한다.


사실 여기부터 책이 조금 질리기 시작했다. 읽기도, 정리도… 이 아래로는 간단히 적어본다. 사실 각 장마다 소감을 두세 줄만 쓰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스케치가 길어졌다.


**B**uddies with a Purpose: ‘Index Relationships’ : 인덱스 관계
오프라인에서의 관계가 전부인 시대가 있었다. 인터넷의 발전으로 많은 관계를 맺었다. 기술이 발전하고 여러 소통 창구가 생긴 지금, 목적에 따른 관계를 세분화한다.
예를 들면, 선망하는 ‘인친’ - 최신 뉴스를 알려주는 ‘페친’ - 동네에서 만나는 ‘실친’ 등 관계는 창구와 목적으로 여러 스펙트럼을 가진다. 인스타그램을 목적별로 나눠서 운영하는 것도 여기에 포함이 될 것이다(나는 일상 계정, 책 계정, 사진 계정을 따로 운영 중이다). 각 관계마다 인덱스를 붙여 중요도를 구분하는데, 가장 휘발성이 높은 놀이로는 랜덤채팅(랜챗), 에어드랍 놀이(불특정 다수에게 에어드랍으로 사진을 보내는 놀이)도 포함된다. 이것은 개인화의 발달과 N극화와도 이어지는 이야기다.


**I**rresistible! The ‘New Demand Strategy’ : 뉴디맨드 전략
상품과 서비스의 과잉 공급 시대, 기업들은 새로운 수요 창출을 전략을 짜야 한다. 필자들은 이 전략을 ‘뉴디맨드 전략’이라고 명명한다. 별로 의미있는 단어는 아닌 것 같은데, 흠. 뉴디맨드 전략은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 교체 수요 : 업그레이드하기 / 컨셉 덧입히기(환경, 프리미엄 컨셉) / 지불방식 바꾸기(할부, 렌탈, 구독, 후불BNPL)
. 신규 수요 : 전에 없던 상품(핸드폰, 디지털 사진, 전기차) / 새로운 카테고리 상품(스타일러 슈케이스), 마이크로 세그먼테이션에 기반한 상품(특정 사용자게에 특화된 상품들)

전에는 산업이 문화를 이끌어갔다면, 지금은 소비자가 이끌어가는 시대다. 이 말은 개발자와 마케터에게 너무나 당연한 말이겠지만, 새로 개발, 판매되는 상품을 보면 그들은 정말 골머리 썩겠구나 싶다. 새로운 카테고리와 상품군을 만드는 데 큰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T**horough Enjoyment: ‘Digging Momentum’ : 디깅모멘텀
단순한 취미, 덕질과 팬심을 넘어서 상황과 취미에 몰입하는 현상이다. 책은 컨셉에 열중하는 컨셉형,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 몰두의 정도를 높이는 관계형, 수집을 통해 만족과 과시를 추구하는 수집형으로 나눴다. 컨셉형의 예가 재밌는데,

**나는 ‘그리핀도르 기숙사’의 얼짱녀 헤르미온느**
나는 헤르미온느다. 공부가 너무너무 좋다. 나는 영국인이기 때문에 모국어인 영어는 특히 잘해야 한다. 이번 시험 1등도 당연히 내가 차지하겠지만, 경쟁자 말포이를 이기려면 방심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라면서 해리포터 공책, 기숙사 목도리, 마법지팡이를 챙기고, 유튜브에서 그리핀도르 기숙사 ASMR을 들으면서 공부한다. 유튜브에 검색해보니 실제로 영상이 꽤나 많다. 실제 공부에 몰입하려는 목적인지는 모르겠지만, 흥미롭다.


**J**umbly Alpha Generation : 알파세대가 온다
이제 MZ를 넘어 알파세대다. 2010년 이후 태어난 이들을 알파라고 칭한다. A가 아니라 알파로 붙은 이유가 의미심장하다. 단순히 Z 다음 A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세대를 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010년 생이라니, 13살 아이들이라니. 자녀가 없기에 더욱 멀게 느껴지는,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 없는 세대다. 외동인 경우가 많아 사랑을 많이 받고, 제일 중요한 것은 나라는 생각이 강하다고 한다. 또한 본 투 디지털이기 때문에 디지털에 친숙하고 초등학생 유튜버와 틱톡커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행복한가에 대한 의문을 지울 수 없다. 전보다 심한 경쟁사회에서 어릴 적부터 코딩, 영어, 심지어 경제 공부까지 한다. 저 나이대 아이들의 학창 생활에서 공부와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을지 상상도 안된다. 나도 힘들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알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다.


**U**nveiling Proactive Technology : 선제적 대응기술
그동안 소비자는 필요한 서비스와 물품을 찾아서 사용했다. 하지만 기술과 인공지능의 발달로 소비자가 필요를 느끼기 전에 먼저 솔루션을 제안해 불편함을 해소시켜주는 기술을 ‘선제적 대응기술’로 명명한다.
정보 제공 - 맞춤 조정 - 예측 수행의 단계를 밟는데, 각 단계는 완전히 구분되지 않고 혼합되어 있다. 예측 수행이 가장 발달한 기술로 생각되는데, 대표적인 분야는 자율주행이다. 사용자가 대응하기 전에 차량이 자체적으로 판단하고 기계장치를 제어하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맞춤 조정의 기술이 활성화되었고, 예측 수행 단계까지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트렌드라기보다는 미래학의 한 부분으로 생각돼 가장 흥미가 떨어졌던 장이다.


**M**agic of Real Spaces : 공간력
우리는 결국 코로나를 이겨내지 못했다. 그저 같이 살아갈 뿐이다. 엔데믹 시대로 접어드는 지금,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 - 실제의 공간이 주는 힘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책에서 말하는 공간 변화의 특징이 몇 가지 있는데, 하나는 크기다. 시간이 갈수록 대형 쇼핑몰에 사람이 몰린다. 공간의 덩치가 크면 즐길거리가 많아지고, 자연스레 사람이 더욱 몰린다. 다른 하나는 공간이 주는 경험이다. 효율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다른 곳에서 경험할 수 없는 고객경험이 소비자를 끌어모으는 것이다.
다만, 가상과 현실을 연결하는 메타버스는 아직 체감하지 못했다. 최신 기술을 파악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아직 섣부른 유행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기술의 임계점을 돌파하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구현될 기술.


**P**eter Pan and the Neverland Syndrome : 네버랜드 신드롬
나이보다 어리게 생활하고 행동하는 양상을 말한다. 책에서는 어릴 적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고, 나이듦을 거부하고, 아이들처럼 명랑하고 재밌게 노는 등의 예시를 든다. 힘든 현실에서 어릴 적 향수를 꿈꾸며 위안을 삼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면서 동반된 현상이라는 분석이다.

이같은 현상은 여러 산업이 발달하는 기회이고 소비자가 겪는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하나의 창구다. 하지만 사회의 유년화가 걱정된다. 요즘들어 전문가의 상담 예능 프로그램(오은영쌤 등)이 성행이다. 고성장 시대에 살았던 어른들의 조언은 현재에서는 빛이 바랬다. 저성장 시대의 청년들은 실패해서 안된다는 강박감과 더불어 성장 가이드도 없으니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댄다.
결국 사회는 청년의 성장으로 완성된다. 네버랜드에 빠져 있다고 걱정만 할 게 아니라 함께 걱정하고 공감하며 커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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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의 마음 - 나를 잃지 않으면서 꾸준히 일하는 법에 대하여
이다혜 지음 / 빅피시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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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혜 작가의 새 책이다. 제목으로 보건데 2019년에 출간된 <출근길의 마음>과 세트다. <출근길>은 부제 ‘일터의 여성들에게 필요한 말, 글 네트워크’에서 볼 수 있듯이 여성에 주안점을 준 책이다. <퇴근길>은 특정 성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직장생활 전반에 대한 이야기다.

위키에서 찾아보니, 작가는 2000년 씨네 21 기자로서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무려 23년차 직장인이다. 내가 이제 막 10년을 일하고는 오래 일했네 힘드네- 했는데, 23년이면 부장님급이네. 책은 저자가 오랜 시간 동안 일하면서 얻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조언이면서 부탁이다. 저자는 책을 통해 ‘매일을 단단하게, 작은 고비들을 넘기면서 꾸준히 일하는 사람이 되는 법’을 말한다.

예를 들어, 이런 문장들.

> 잘 안된 것 같은 일 한 가지가 마음을 잡고 늘어질 때는, 잘한 일 아홉 개를 생각하자. 안된 일을 개선하기보다 잘된 일을 계속하 겠다는 마음이, 우리를 더 잘 살게 한다.

열 가지 중 한 가지를 놓쳤다면, 결과적으로 놓친 하나 때문에 실패로 규정되고 질책받을 때가 있다. 회사와 일은 결과만 두고 판단하니까. 하지만 사람이 백날천날 결과만 두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게 되면 너무 허무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그래도 아홉 개는 잘 했잖아, 앞으로 한 개를 못하는 경우를 줄여보자는 마음으로 일하는 거지.


> 세상에는 참 똑똑한 사람이 많아서 다른 사람들이 어떤 것을 ‘몰라서’ 못 하는 줄 알고 기고만장한 모습을 본다. SNS를 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하지 않고자 해서일 수 있고, 자기 PR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것쯤이야 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하지만 ‘못된 말’은 다르다. ‘못된 말’은 친구들과 자주 쓰는 표현인데, 요청받지도 않았는데 굳이 하고야 마는, 정교하게 구성된 악의적인 말’을 뜻한다. 굳이 그런 말을 왜 하느냐고 항의하면 “틀린 말은 아니잖아?”라는 답이 돌아오곤 한다. 그렇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틀린 말이 아니라고 아무 때나 아무 데서나 해도 된다는 건 아니다. 심지어 악의가 실린 말을 악의가 없어 보이는 어휘를 동원해 그럴듯하게 하면 ‘사이다’가 된다고 생각하는 게 더 문제다. 요청받지도 않았는데 굳이 좋지도 않은 이야기를 분석적인 척해서 상대방 입을 막을 작정으로 하는 말도 비슷할 때가 있다.

회사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충분히 곱씹어볼 문장도 더러 있다. 회사라고 해서 일만 하지 않는다. 결국 일은 사람이 하고, 회사도 결국 사회의 일부다. 인터넷에서 더러 일은 일일뿐, 사람들과 거리를 두라는 이야기를 본다. 하루의 절반을 보내는 회사에서 만들어가는 적절한 인간관계는 때로 직장생활의 활력이 될 때도 있다.

비슷한 주제의 책이 많고, 다른 결로 일 잘하는 법을 다룬 책도 많지만, 작가가 가진 따뜻한 마음이 배어나서인지 따뜻한 책이다. 타인과 관계 맺기에 관한 이야기를 더 풀어내 뜻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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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고전요약.zip -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외 다섯 작품
Team. StoryG 지음 / oldstairs(올드스테어즈)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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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특히 고전을 소개하고 해설하는 책은 중독성이 있다. 읽지도 않은 책을 읽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이런 책을 읽다보면 온갖 세계문학은 다 읽은 것 같은데, 독서기록을 훑어보면 삼십 권도 채 못 읽었다. 책을 읽은 게 몇 년이 지났는데 고작 삼십 권이라니. 매번 안 읽어야지 하면서도 결국 읽고마는 책.

고전 여섯 권을 그래픽노블의 형태로 묶었다. 책은 아래와 같다.

베니스의 상인 - 셰익스피어
햄릿 - 셰익스피어
위대한 개츠비 - 피츠제럴드
죄와 벌 - 도스토예프스키
1984 - 조지 오웰
동물농장 - 조지 오웰

여섯 권을 요약하고 화두과 되는 토픽을 한두 개 정도 던진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샤일록, 그는 빌러인가?”(베니스의 상인). “첫 번째, 두 번째 유령의 의미”(햄릿). “이성과 종교의 대립적 구도”(죄와 벌). “1984는 우리와 무관한가?”(1984), 등등. 고전에 관련된 책을 읽었다면 평이한 내용일 수 있으나, 어차피 기억하지 못하는데 다시 읽는 게 도움이 된다.

고전을 다룬 다른 책과 내용 면에서는 크게 다를 건 없다. 하지만 그림과 함께 쓰여 있으니 뇌리에 쏙 박히는 기분이다. 그렇다고 내용 소개가 엉망인 것도 아니고, 정석대로 잘 요약했다. 둥글둥글한 카툰 형식이 아니라 그래픽노블의 그림체를 따와서 더 감각적이게 느껴진다.

고전을 겁내는 나같은 사람에게 딱인 책이다. <죄와 벌>을 다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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