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1일 일요일

5월은 조금 다르게 살아보자, 굳건히 다짐했건만 역시는 역시다. 되는 거, 하는 거 하나도 없이 시간은 흐른다. 지나가는 시간을 하염없이 눈으로 좇으면서도 몸은 영 앞으로 가기를 거부한다.

노트북으로 쓰던 일기를 다시 펜으로!를 외친 후 귀찮다는 이유로 또 쓰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오늘도 2주만에 쓰는 기록이다. 요새 회사 일에 치여 아무 여유가 없어 쓸 말이 없다는 이유로 책과 일기를 멀리했다. 매일 반성은 하는데 글쎄, 되는 게 아무것도 없구만.

읽는 책이라고는 가볍고 얇은 책뿐이다. 어려운 책은 거부감이 든다. 너무 두꺼워, 다 못 읽겠지, 다 읽어도 이해는 반도 못할 거야. 시작하기도 전에 변명부터 한다. 책이 많아서 고르기 힘들다는 말은 변명이다. 그냥 어렵고 힘드니까 애써 외면하려는 느낌이다.


5월 22일 월요일

필사의 기초(조경국, 유유, 2016)을 읽었다.

숭례문학당에서 ‘신영복처럼 쓰기’ 수업을 들으면서 필사에 관심이 생겼다. 처음 해보는 필사이기에 필사 선배인 저자는 어떤 방식으로 필사를 하는지 궁금했다.

사실 필사를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글쓰기 실력을 늘리려고 필사를 하기도 하는데, 사실 필사는 글쓰기 실력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필사를 단순히 베껴쓰기라고 생각했다. 문장을 처음부터 단어 하나하나를 미련하게 옮기는 작업. 사실 김훈의 <칼의 노래>를 필사한다고 깝쳤던 적이 있다. 그것도 손글씨가 아니라 노트북으로 말이다. 글을 읽지도 않고 그저 글씨만 옮기려니 재미도 없고 아무 쓰잘대기도 없어 보였다. 네댓 쪽 옮기다가 그만 뒀다.

내가 간과한 점은 글자를 그대로 옮기기였다. 글은 읽지도 않고 무작정 베껴쓰려고 했으니 얻는 게 있을리가 있나. “필사의 재미를 느끼려면 책 읽는 재미부터 느껴야 한다”는 말처럼 먼저 글을 읽고 이해한 뒤 필사하면서 천천히 생각하는 방식으로 글을 옮겨야 한다. 나처럼 단순한 베끼기는 의미가 거의 없다. 단어를 옮기다보면 행간과 구조를 체득하게 되고, 거기에 자신의 견해(긍정이든 부정이든)를 밝히면 생각을 넓힐 수 있다. 필사는 독서보다 저자와 조금 더 적극적인 대화를 하게 만든다.

글씨체가 예쁘면 좋겠지만… “끌씨를 꾸미는 데 에너지를 쏟는 것은 금물이다”. 물론 노력하면 좋지. 그러나 굳이 단정한 글씨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하니까.


5월 24일 수요일

매년 이맘때쯤에 찾아오는 독서불감증이 같은 변명 아닌 변명에서 해맸다. 지루하고 부담스럽고. 3월까지는 열심히 읽는다고 읽었는데 마치 식곤증이라도 찾아오듯 무기력해졌다. 가벼운 독자인 내가 직전에 다소 두꺼운 책(사피엔스, 롤리타)을 읽었기 때문이리라. 드디어 그걸 깨뜨릴 책을 찾았다. 3년 전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구해온 장강명의 <표백>이다.

전체 사건을 이끌어가는 인물은 현대는 완성된 사회라는 주장을 편다. 그럴듯하고 멋진 선언이나 운동은 이미 과거에서 다 해먹어서 지금은 끝났거나 뒤처리밖에 남지 않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환경운동 따위의, 과거에 비하면 작은 것들 뿐이다. 현대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아무리 자신의 색을 발하고 칠해도 세상이라는 벽은 티도 나지 않고 하얀색을 유지한다. 그는 이런 세상을 ‘그레이트 빅 화이트월드’라고 칭한다.

이런 사회에서 단순하고 소극적으로 살지 않고 세상에 무언가 흔적을 남기고 대단한, 대담한 일을 하려면? 그는 자살로서 자신의 선언을 이어가려 한다. 단, 사는 게 힘들어서 하는 자살이 아니다. 진짜 선언을 위해 어떤 성공을 앞둔 자살이어야 한다. 아무런 업적도 남기지 못하고 그냥저냥 살아내는, 궁지에 몰린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자살선언은 매력적이다. 소설 속 많은 이가 그의 자살선언에 동조하고 실제로 자살하기도 한다.

이에 작가는 다른 인물의 입을 통해 다른 의견을 내놓는다. 자살선언은 위대해지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그저 남의 관심을 받기 위해 벌이는 어린 행동이다. 위대하고 성공한 삶도 좋지만 소소하고 작은 것에 기뻐하는 삶도 필요하지 않냐고.

작가는 두 가지 상반된 의견(위대함 vs 소소함)을 제시하지만 어느쪽에도 수긍하기 힘들다. 일면을 들여다보면 둘 다 그럴듯하고 맞는 말이다. 작가는 답을 내리는 대신 묻는다. 넌 어느 쪽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어려운 선택이다.

내가 소심하게 내놓은 답은, 살아가면서 작지만 위대한 것이 무엇인지 끝없이 고민하는 것, 이다. 게바라의 ‘리얼리스트가 되지.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라는 말이 떠오르기도 한다.


5월 25일 목요일

마음에 드는 필기구 찾기가 생각보다 어렵다. 대학시절부터 쓰던 세일러 에이스가 참 좋았는데 오랜만에 써보니 생각보다 세필이 아니다. 반년 정도 쓴 싸구려 에르고그립에 비해서 이다지도 두꺼울 줄이야. 에르고그립을 몇번이나 땅에 떨어뜨려 닙이 흔들리지만 않았어도 다른 만년필로 눈을 안 돌릴텐데. 게다가 망할 몰스킨 노트는 만년필을 사용하면 글씨가 조금만 두꺼워져도 뒤에 다 비쳐서 쓰기 정말 안 좋다. 연필이나 볼펜을 써야 제격인 듯하다(그래서 독서노트는 연필로 쓰는 중이다). 만년필을 쓰기에는 미도리 노트도 좋다고 한다. 검색해보니 가격이… 하아, 참 사악하구만.


5월 27일 토요일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문학동네, 2015)를 읽기 시작했다.

책읽기로 잘난척하기를 좋아하는 내가 이 책을 이제야 읽은 이유는 무엇인가 자문해봤다. 전쟁 이야기이기 때문일까. 군대에서 한국전쟁을 접하면서 세계사 속 전쟁에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미 많은 전쟁 관련 책이 출간되었는데 굳이 이걸 읽어야 할까, 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산 지 1년이 조금 넘어 드디어 책을 펼쳤다.

이제 막 책을 펼쳤기에 많은 내용을 알지는 못했지만, 위에서 말한 의구심과 위화감에 대해 저자의 답변이 있다. 여태껏 수많은 전쟁 이야기는 남자들이 남자들의 목소리를 들려준 것이다. 여자도 전쟁에서 싸웠는데 여자들은 침묵한다. 여태까지 알려진 전쟁 이야기는 남성 중심의 폭력적인 이야기다. 그런데 전에 들었던 이야기로는, 이 폭력이 적군을 향하기도 했지만 아군의 여성을 향하기도 했고 적군의 여성만을 노리거나 여성만이 겪을 수밖에 없는 경험도 있다. 많은 이야기에 숨겨진 참혹한 진실. 저자는 인터뷰에서 여자들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고 서술한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이야기, 내가 과거로 돌아가도 성별 때문에 겪지 ‘않을’ 이야기. 사실 읽기가 조금 두렵다. 이전에 생각했던 ‘나만의 상식’이 무너질까 겁이 나서이다.

그러고보니 이 책도 조금 두껍다. 이것도 겁나네.

덧. 책에 연필로 밑줄을 치고 생각을 쓰면서 읽기 시작했다. 5년 전에 읽었던 <정치의 발견> 이후로 처음이다. 처음에는 무서웠으나 금세 편해졌다. 공부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생각은 지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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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5-30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만의 상식‘이 한 번 무너지면, 정신이 혼란스럽긴 해요. 정말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내 자신이 부끄러워지고, 상대방의 상식을 의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정말로 마음이 편해져요. 묵혀둔 낡은 상식이 깨끗이 제거된 기분이 들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