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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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독후감을 쓰기 쉬운 책이 있다. 내용이 너무 엉망이면 실컷 욕을 하고(<언어의 온도>, <뉴욕, 어퍼이스트사이드), 어중간하게 마음에 들면(<열두 발자국>,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소감도 어중간하게 쓰면 된다. 반면에 마음을 강하게 흔들면 소감을 적기가 어렵다. 내가 감당하기에는 담고 있는 내용이 너무 크기 떄문이다. 발췌문만 잔뜩 가져오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저 좋다, 좋다, 고만 하는 소감을 싫어하지만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하 슬픔)은 아쉽게도 좋다, 좋다, 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책이다.

문학 평론가 신형철의 신작이다. 2010년 이후에 발표한 글과 미발표 원고를 추렸다고 한다. 영화에세이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 이어 두번째 읽은 신형철의 책인데, 앞선 두 권(<몰락의 에티카>, <느낌의 공동체>에 비하면 이 두 권은 일기 정말정말정말 쉬운 편이었다. 초기 두 권은 읽다가 덮어버렸으니 말 다했지.

한 리뷰어는 신형철의 글이 이전보다 문제의식이 얕아지고 글의 길이가 줄었다고 말했는데, 나름 수긍이 가기도 한다. 초기보다 더 대중친화적이지만 나쁘지 않다. 이게 신형철식 진화가 아닐까. 저 같은 무지랭이에게 좋은 글 읽게 해줘서 감사드립니다.

책 내용에 대해서는 감히 평을 할 수 없다. 제목처럼 책은 대체적으로 ‘슬픔‘이라는 감정을 골자로 삼았다. <정확한 사회의 실험>에서 보지 못한 사회에 대한 글 - 진보와 보수, 박 전 대통령 탄핵, 혐오사회, 국가주의 - 은 신형철이라는 사람을 조금 새롭게 바라보게 만들었다. 아내의 수술과 같은 개인적인 이야기도 들어있다. 그래도 신형철은 문학평론가니까, 가장 눈에 밟히는 부분은 역시 문학에 관한 부분이다.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들인데 신기하게 신형철의 목소리, 아니 글소리를 통해 읽으니 새롭게 다가온다.

400쪽이 조금 넘는 분량은 아주 많지는 않고 글이 크게 어려운 편도 아니다. 하지만 한 달이 넘게 책을 못 끝내다가, 12월의 끝자락에 마음먹고 마지막 장을 덮었다. 이렇게 보내기 아쉬운 책이었다. 산문집의 출간 간격이 7년이니, 다음 산문집은 2025년에 출간되나? 작년에는 2018년까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영화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 때문이라고 농담했는데, 2025년까지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 생겼다.

이하는 발췌문. 찜해둔 문장이 너무 많아서 정말 마음에 드는 친구들을 고르고 골라 소개한다.

> 상처와 고통의 양을 저울 위에 올려놓는 일이 비정한 일인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비정한 일은, 네가 아픈 만큼 나도 아프다고, 그러니 누가 더 아프고 덜 아픈지를 따지지 말자고 말하는 일일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덜 아픈 사람이다. 지배하는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의 공통점 중 하나는 저울을 사용할 줄 모르거나 사용하지 않으려 하는 데 있다. _53쪽

> 자신의 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채 규정되는 모든 존재들은 억울하다. 이 억울함이 벌써 폭력의 결과다. ‘폭력‘의 외연은 가급적 넓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이런 정의를 시도해본다. ‘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 단편적인 정보로 즉각적인 판단을 내리면서 즐거워하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 어떤 인터넷 뉴스의 댓글에, 트위터에, 각종 소문 속에 그들은 있다. 문학이 귀한 것은 가장 끝까지 듣고 가장 나중에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문학은 4.3과 5.18의 반복을 겨우 저지한다. 제주에서 광주로 돌아오는 길 위에서, 그것은 나의 확신이라기보다는 다짐이었다. _93쪽

> 인간은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바뀌는 존재이므로 나를 진정으로 바꾸는 것은 내가 이미 행한 시행착오들뿐이다. 간접 체험으로서의 문학은 다만 나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가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피 흘릴 필요가 없는 배움은, 이 배움 덕분에 내가 달라졌다고 믿게 할 뿐, 나를 실제로 바꾸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아무리 읽고 써도 피는 흐르지 않는다. _176쪽

> 시가 그토록 대단한가. 그렇다면 시는, 있으면 좋은 것인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인가. 소설과 영화와 음악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다면 시 역시 그렇다. 그러나 언어는 문학의 매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삶 자체의 매체다. 언어가 눈에 띄게 거칠어지거나 진부해지면 삶은 눈에 잘 안 띄게 그와 비슷해진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마음들이 계속 시를 쓰고 읽는다. 시가 없으면 안 되는 것 아니라 해도, 시가 없으면 안 된다고 믿는 바로 그 마음은 없으면 안 된다. _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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