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마음산책 짧은 소설
김금희 지음, 곽명주 그림 / 마음산책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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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리뷰어는 이 소설을 읽고 이렇게 평했다. 아무 주제도, 의미도 없이 그저 아름다움만 좇아 소설로서 가치가 떨어진다, 고. 대체 얼마나 대단한 분이길래 소설을 이렇게 평했을까.

소설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인간 본연을 탐구하고(<죄와 벌>),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전쟁과 평화>), 사회의 부조리함을 비판하고(<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그냥 이야기 자체가 끝장나게 재밌는 소설이 있다(스티븐 킹의 많은 작품). 소설에 이렇게 계보가 많은데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이하 나는 생각해)는 어떻게 분류해야 할까. 나는 과감하게 ‘무용하지만 쓸데없이 섬세해서 아름다워 좋은 소설‘류에 두고 싶다.

250쪽의 분량에 판형도 작고 한 쪽에 글자 수도 적다. 그런데 총 8~15쪽으로 쓰인 19편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책 자신도 첫 페이지부터 김금희의 ‘짧은 소설‘이라고 명명한다. 아, 가뜩이나 단편은 이해하기 힘든데 길이도 짧다니, 난항이구만. 각각에 대한 소감을 말하기에는 지식과 정성이 부족하므로 대충 분위기를 나눠보자면 낭만, 이별, 일상의 위화감 정도 되겠다.

낭만의 테마를 가진 작품들은 나를 살짝살짝 웃음짓고 설레게 했다. 책의 포문을 여는 ‘원피스를 돌려줘‘는 원피스를 돌려달라는 여자의 요청에 헤어진 연인이 잠시 만나는 이야기다. 주말 오후에 할 일이 없어 헤이리로 드라이브를 갔다가 주차한 차가 어디 있는지 잃어버리고 마는데, 여자가 작품의 마지막에 되뇌는 ‘산술 불가의 여름밤‘이라는 단어가 계속 머릿속에 맴돈다. 사람의 감정은 그래, 순수 논리로만 이어진 산술과는 정반대로 제멋대로인 거겠지.

이별의 분위기는 발췌문이 덕지덕지다. <나는 생각해>를 읽은 사람 중 꽤나 많이 이 부분에 줄을 쳐두었으리라 생각한다. 책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감각적인 문장이다. 이별의 고통과 견딤에 대해 예리하게 써내려갔다.

> 나는 지하철을 탈 때마다 문득문득 하는 생각, 대체 지하철의 이 빈 공간들이 어떻게 지상의 압력을 견디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빈 공간이 견디는 것이 아니라 지상이 빈 공간을 견디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 견디고 있어야 이 도시라는 일상의 세계가 유지되는 것이고. 각별히 애정한, 마음을 준 누군가 우리 일상에서 빠져나갔을 때, 남은 고통이 상대와 유리된 오로지 내 것이 되면서 그 상실감을 견뎌내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상대 역시 견뎌야 완전한 이별이 가능한 것처럼. _‘우리가 헤이, 라고 부를 때‘에서, 77,78쪽

또 하나 소개하자면, 우리가 소중한 것을 잃을 때 마음 속에서 뚝 부러지는 느낌을 표현한 문장이다. 물리적 충격으로 시디가 부서지고, 그 파편들이 가슴에 박혀 콕콕 쑤시는 느낌이 절로 든다.

> (좋아하는 가수 보아 음악은 엠피스리로 안 듣는다면서) ˝그건 뭐 다른 데서 다른 게 아니라 쉽게 지울 수가 없으니까, 지우려고 하면 이른바 일종의 충격, 버튼을 누르든 시디를 부러뜨리든 아무튼 힘을 써야 하는 거니까, 그렇게 해야 뭔가를 지울 수 있다는 건 중요해. 그런 건 정말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닮았달까.˝ _‘영건이가 온다‘에서, 122쪽

마지막으로는 일상의 위화감이다. 낭만과 이별은 몽글몽글하고 감성적인데 반해 위화감이 풍기는 작품은 꽤나 불쾌하다. ‘이행성‘은 한 가족이 밀림을 끼고 있는 리조트에 여행을 가는 이야기다. 작중 아버지는 리조트에 몰래 얹혀 살아온 투숙객(멀쩡한 사람이었는데 모든 것을 버리고 오랑우탄 같은 모양새를 하고 리조트에 몰래 머무른다고 한다)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기묘한 불안감을 느낀다. 그리고 아들과 아내가 그들만의 다정한 대화를 나눌 때, 밀림의 깊숙하고 텅 빈 공간을 통과하는 바람소리를 들을 때 - 즉 자신도 모르게 가족에게서 소외되고 마음 깊숙한 곳에 공허가 자리잡았다는 것을 깨닳을 때마다 불안에 휩싸여 호텔 체크아웃 날짜, 비행기 편명, 직장과 직급을 떠올린다. 자꾸 아버지와 소문의 투숙객의 이미지가 겹치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나는 생각해>를 말랑말랑한 감성과 아름다운 문장으로만 채운 소설집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려면 정교한 장치가 분명히 필요하다. 이것이 가장 잘 계산된 작품은 단연 ‘오직 그 소년과 소녀만이‘인데, 일정 시점 이전의 기억을 지울 수 있는 기술에 대한 이야기다. 남자와 여자 모두 어릴 적의 나쁜 기억을 지웠고, 작품의 마지막에 여자는 단골 술집에서 <올리버 트위스트>와 <장 발장>을 몰래 가져온다. 재밌게도 두 작품 모두 과거 자신의 모습을 지우고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인물의 이야기다. 위 두 편의 소설에 비춰보면 과거를 지운 둘은 밝은 미래로 향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스토리가 압축된 소년소녀세계문고를 아무리 읽어도 작품 전체를 정확하게 알 수 없듯이, 과거의 한 부분을 지웠다면 나를 온전한 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 만든다. 단골 술집 이름이 ‘없는 집‘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 한 해의 마지막인 12월은 어떤 시간을 밀어내고 예정되어 있는 그 뒤의 시간을 적극적으로 끌어오는 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다음에 올 시간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기대가 있는 때였다.
˝행복하다. 못할 게 뭐 있나, 맞제?˝ _‘나의 블루지한 셔츠‘에서, 146쪽

1년의 마지막 달 12월에 읽기 딱 좋은 작품집이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김금희 작가를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읽기 싫은 마음이 들었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그래, 산술불가의 이유였다. 사소한 일, 아무 의미 없이 우리 곁을 지나쳐간 많은 일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사사롭지 않게 기록해둔 김금희 작가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나도 당신들을 아주 오랫동안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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