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코린토스
코린토스는 펠로폰네소스반도의 관문에 위치해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아크로코린토스의 성채는 ‘피로 반죽하고 살로 구운 벽돌’로 만들어졌다. 성채가 만들어지기 전엔 아프로디테의 신전이었다. 모셨던 주신이 말해주듯 코린토스의 문화는 퇴폐와 향락 그 자체였다고 한다. 그리스는 로마와 마케도니아라는 두 강국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저항과 복종, 연대와 분열을 지속하다 결국 기원전 146년 로마군에 고대 코린토스는 사라졌다. 아크로코린토스에는 로마식, 베니스식, 터키식 건물과 모스크가 섞여 있다.
로마가 코린토스를 초토화시켰고, 대지진까지 일어나 그리스 유적 대부분은 사라졌다. 아폴론 신전이 코린토스의 거의 유일한 그리스 유적이다. 그리스 도자기들은 예술적 가치와 경제적 고대 코린토스 항구에는 아시아 전역의 상인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카키아 스칼라, 고약한 고갯길이라 불린 코린토스로 가는) 이 길은 고대 그리스인의 영원한 주제였던 '금기를 넘어서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신과 어깨를 겨루던 당대의 영웅조차도 결국에는 인간의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신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는 '나약한 인간의 실제'에 대한 내러티브가 담긴 비디오 가이드인 셈이다. (p.29)
그리스 사람들은 이중적이라는 평을 자주 듣는다.(...) 그리스에는 지중해의 태양 같은 뜨거운 격정과 말라비틀어진 마른 풀 같은 무기력이 공존하고, 처음 만난 여행자를 집 안에 들여 재워주는 인류애적인 친절과 백주대낮에 불법체류자를 둘러싸고 돌을 던지는 야만이 공존한다. (pp.34-34)
역사시대 이전부터 이곳에 터를 잡고 언덕 위에 돌을 쌓기 시작한 코린토스인들은, 기원전 338년 처음 성채에서 밀려난 이후 마케도니아, 로마, 비잔틴, 노르만, 프랑크, 베네치아, 터키에 교대로 능욕당하며 19세기에 이를 때까지 굴종의 역사를 이어가게 된다. 사라센, 슬라브, 훈족을 비롯한 북방의 이민족들에게 당한 노력질을 제외하고도 그 정도다. ... 그런 탓에 아크로코린토스의 성채를 세상에 둘도 없는 특별한 양식의 구조물로 재탄생시켰다. (p.40)
#2 네메아의 수도원
네메아는 헤라클레스의 무운을 기리는 범그리스 네메아 제전이 열리던 곳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기 자신을 이상화한 모습을 창조하고, 그것을 닮으려고 노력했다. (...) 그들은 성스로움, 고행, 투쟁, 심오한 슬픔 등 전체적으로 볼 때 신비롭지만 성스럽기까지 한 존재를 창조하고 그것을 ‘영웅’이라 불렀다. 나아가 그들 스스로 그 영웅 혹은 영웅의 삶을 닮으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그리스 문명이 발화한 원천이었을 것이다. (p.146)” 영웅은 “육체와 영혼의 갈등과 분열을 이겨낸 자”, “이성(소명)과 육체(삶)의 화해를 이루며 극적인 죽음을 맞는 자”이다.
네메아의 수도원은 입구도 출구도 없이 절벽에 매달려 있다. “처음 로마 제국에서 일단의 수도사들이 사막으로 들어간 것은 예수가 경험한 황야의 고행을 몸소 체험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후 이들은 육체를 극한까지 몰아붙이며 사막에서 동굴로, 결국에는 기둥 위로 올라갔다.(pp.174-175)"
#3 올림피아의 신전
“신화에서처럼 아시아에서 흑해를 건너온 인도유럽어족이 그리스를 세웠다는 고고학적 사실이 그 신화에 깃들어 있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또 다른 하나는 그리스인이 서쪽 바다를 건너가서 이탈리아에 식민지를 개척했다는 사실이다.(p.197)”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만들었을까? 신화는 역사의 거울이다. 물론 다 역사를 반영한 건 아니다. “제우스 자신이 성소를 지었다는 얘기나, 아폴론, 펠롭스 또는 헤라클레스가 지었다는 여러 가지 전승들은 이주민들이 토착화된 후 스스로의 역사에 자긍심을 고취하려는 노력으로 보아야 옳다. (p.202)” 주신인 제우스를 기리는 올림피아 경기는 기원전 776년부터 서기 393년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금지될 때까지 이어졌다.
“(제우스 신전에서) 이곳의 유적은 야만에 대한 이성의 끝없는 도전이 이뤄낸 결과물이다. 그리스 문명은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열정 그리고 단련된 육체가 어우러져 피워낸 꽃이며 정신과 육체의 조화로운 균형을 추구하던 현장이기도 하다. (p.212)”
“올림피아 박물관은 스파르타인에 대항해 승리한 기념으로 서남부의 메세니아 인들이 만들어 바친 승리의 니케상과 헤라 신전에서 발견된 헤르메스 상이 있는 유물의 보고이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빛나는 유물들도 제우스 신전에서 내려온 페디먼트에 새겨진 부조 앞에서는 빛을 잃고 만다. (pp.230-231)”
#4 아르고스의 신화
아르고스는 신화의 땅이다. “그리스의 수많은 신화들 가운데서도 가장 논쟁적인 신화들의 발원지라 일컬어지는 곳, 역사를 가른 페르시아 전쟁의 불씨가 되기도 했던(p.273)” 곳이다. 참주 페이돈 통치기에 아르고스는 아르골리스를 지배했고 스파르타와 함께 위세를 떨쳤다. 아르고스의 공주 이오가 납치당한 이야기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잘 기술되어 있다. 제우스와 사랑을 나누던 이오는 암소로 변신하게 되는데, 암소는 헤라가 보낸 등에에게 쫓겨 ‘보스포루스(암소의 나루라는 뜻)’ 해협을 건너고, 암소가 건넌 바다는 ‘이오니아 해’가 되었다고 한다. “이 신화는 헤로도토스가 페르시아인들의 입을 빌려 기록한 페니키아인들의 아르고스 공주 이오의 납치 사건에 대한 훌륭한 메타포(p.281)”다.
이렇게 신화와 전설에는 역사적 사실과 그것에 대한 당대의 평가가 담겨 있다. 아이스킬로스가 쓴 ‘아가멤논’에서, 동맹군의 지도자였던 아가멤논은 교활한 장수인 오디세우스보다 더 낮게 평가된다. 아가멤논은 메넬라오스가 그의 아내 헬레네를 납치해간 파리스에게 복수하기 위해 일으킨 트로이 전쟁의 장수였다. 아르고스의 백성들은 여자 때문에 일어난 전쟁에 동원되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없었고 아가멤논을 그리스 정신에 반한 어리석은 장수로 평가했다. 반면 지중해를 탐험하다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식민지 제국의 발판을 만든 영웅으로 그렸다.
#5 스파르타와 헬레네
스파르타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최소 해발 수백 킬로미터의 고원이나 산맥을 넘어야 한다. 천혜의 자연방벽으로 보호받는 땅이다. 스파르타는 일찍부터 단결해 주변을 정복해 나갔고 복속시킨 이들을 노예로 부렸다. 소수의 지배층이 노예들을 잔혹하게 다루었다. 두 명의 왕은 의무와 특권을 가졌지만 정치적 권한은 원로원과 민회보다 약했다.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법을 가졌고 공동체에 헌신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었다.
“(호메로스의 <일라이스>는) 신의 정체, 본질, 인간의 숙명과 한계, 그러나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장엄함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다.(p.305)”
“나는 오히려 바로 그 때문에 일리아스의 정통성이 아킬레우스가 아니라 헬레네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양립하고 수용할 수 없는 것을 수용하며, 지극히 비현실적인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그리스 혹은 그리스인의 특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헬레네이기 때문이다. (p.308)”
“(...) 그리스인은 아킬레우스를 최고의 영웅으로 받들고 칭송한다. 이 용기와 우정이라는 두 가지 정신은 고대 그리스의 탁월함 그 자체였으며, 지금도 그리스인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p.318)”
스파르타의 지형은 외부에서 침입하기가 쉽지 않다. 삼면이 험한 산맥이고 나머지 한쪽도 높은 고원이다. 군사강국을 지향할 이유가 없어 보이는 지형이다. 스파르타는 호전적이고 잘 조직된 전력으로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부 메세니아와 라코니아를 정복하고 주민들을 노예로 삼아 “전 시민이 군인이 되고 일은 노예가 도맡아 하는(335)” 군사국가를 만든다.
왕의 권력은 생각보다 크지 않아 교전권을 제외한 사항은 원로원과 민회에서 결정했다. 왕권을 비롯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관한 법과 규율이 존재했고, 세세한 도덕률까지 구체적으로 정해 두었다고 한다. 의외로 여성들의 지위는 높았지만, 열등하게 태어난 아이는 더 자라기 전에 살해하고 남은 아이들을 최고의 전사로 키우기 위해 치열하게 훈련시켰다.
“코린토스는 다양성은 있었지만 그 내용이 문란하여 창조적 긴장이 발아하지 못했고, 스파르타는 진중했으나 획일성이라는 척박한 토양을 취했기에 문명의 씨앗이 잉태될 수 없었다. 더구나 스파르타인들은 자신들이 정복하거나 이웃한 이들과 어울려 문화의 이종교배를 이루기보다는, 이들을 억압하고 순혈주의를 강조함으로써 문화의 동종교배에만 만족하여 더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p.3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