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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의 역사
마크 마조워 지음, 이순호 옮김 / 을유문화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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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이지만 유럽같지 않은 곳, 발칸. 터키 서쪽에 위치해 유럽과 아시아의 완충지 역할을 했던 이곳은 수백 년간 오스만의 지배를 받았고 최근까지도 분쟁지역,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으로 서유럽인들에게 유럽의 못난 동생 취급을 받는 분위기다. 오스만의 지배 때문에 발칸은 유럽으로부터 고립되었고, 암흑기를 보냈다는 관점은 과연 옳은가? 발칸이 겪는 어려움의 근원은 무엇일까? <발칸의 역사>는 오스만 제국 통치기와 지리적 조건, 민족주의를 통해 발칸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본 책이다. 많은 나라와 민족이 이합집산하는 발칸 이야기를 따라가기 힘들었지만, 몇 안되는 발칸 역사서라 읽어 보았다.

기존 학자들은 발칸이 분쟁으로 들끓는 이유가 민족성 때문이라 했지만, 저자는 발칸의 고단한 역사가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한다. 발칸은 루마니아를 (비스듬이) 가로지르는 산맥 이름이다. 이베리아 반도는 피레네 산맥으로, 이탈리아 반도는 알프스 산맥으로 대륙과 분리된다. 그러나 이 두 산맥과 달리 발칸 산맥은 산맥 너머 침입을 막아주는 방어벽 역할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산맥의 지형이 고르지 못한 탓에 발칸 사람들은 반도 안에서 활발히 교류하지도 못했다.

200년 전만 해도 발칸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곳은 오스만제국이 지배했던 구‘로마인’의 땅, ‘루멜리아’였고, 학자들에게는 ‘유럽의 터키’로 불리다가 19세기 말 강대국들이 오스만제국 영토를 분할하고 감독하면서 ‘발칸’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오스만의 유럽 지배를 종결시킨)1912년 제1차 발칸 전쟁이라 불리게 되었고, ‘동방문제Eastern Question’를 다루게 되면서 발칸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

 

 

"세계지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래야 고작 200여 년, 실타래처럼 엉킨 '피정복민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발칸은 그 비극의 역사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시원스레 해법을 찾기 힘든 고질적 문제를 안고 있다. (...) 이미 동서로마의 경계선을 따라 동방과 서방, 정교회와 카톨릭, 키릴 문자와 라틴 문자의 상반된 문화를 가진 모순된 역사적 과정을 밟아왔다." (발칸의 역사, p. 272)

 

 

바다로의 출구가 막힌 유럽 내륙에서는 영토경계선을 두고 다툼이 끊이지 않아 나라의 경계가 옮겨 다녔다. 그리스나 이탈리아, 폴란드 등은 오스트리아 제국이나 오스만 제국 지배를 받았고 전쟁을 치르며 나라가 없어졌다가 다시 생겨나기도 했다. 한때 오스만 제국은 유럽 상당부분을 지역을 지배했으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가 강성해지면서 동유럽과 흑해 주도권을 두고 다투기 시작한다. 이후로 머리아픈 발칸 근현대사가 시작되었다.

 

 

그리스를 살펴보자면, 동방정교회 중심이었던 그리스는 1453년 동로마제국 멸망 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하에 오랜 기간 이슬람의 영향을 받았다. 18∼19세기 러시아-투르크 전쟁, 프랑스 혁명 등의 영향으로 독립 운동과 전쟁이 본격화되었고 1830년대에 이르러 독립을 승인받는다. 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압력을 받은 그리스는 독일에 맞서면서 승전국이 되었지만 2차 세계대전에서는 독일 수중에 잠시 들어갔다가 독일 패망으로 독립한다.

 

 

발칸은 아직도 보스니아 내전, 코소보 사태 등 민족간 분쟁으로 전쟁과 보복이 잇따르는 곳이다. 제국의 사람들은 민족보다는 종교로 융합되어 살았던 것 같다. 오히려 국가가 탄생하고 경계선이 생기자 민족으로 서로를 구분하면서 문제가 시작되다었고 볼 수 있다. 즉. 발칸이 폭동과 유혈로 얼룩지게 된 배경은 오스만 제국 지배보다는 민족주의로 보는게 타당하다.

 

독일, 이탈리아의 경우 19세기 민족주의가 소국들을 묶어 더 크고 합리적인 통합 국가를 이루게 한 반면, 저자는 발칸의 민족주의가 반대 결과를 낳았다고 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타난 냉전체제에서 민족주의는 잠시 억눌려 있었다. 그리스는 영국과 미국이 관여했고, 그 외 국가들(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불가리아, 폴란드 등)은 러시아가 공산주의로써 하나로 묶어 어느 정도의 경제 발전을 이루도록 지원을 했다. 공산주의는 남동부 유럽을 잠시 하나로 묶어 주었지만, 공산주의 붕괴 후에 그동안 해결하지 못하고 억눌렀던 민족 문제가 터져나왔다. 공산주의가 발칸을 혼란스럽게 만든 면도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인종적 다양성, 오랜 기간의 종교·문화적 갈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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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보는 법 -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감상자의 안목 땅콩문고
황윤 지음, 손광산 그림 / 유유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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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박물관 설립부터 최근의 미술관에 이르기까지 “전시 공간에 관한 이야기를 큰 흐름으로 (p.214)” 밝힌 책.

최초 근대 박물관인 이왕가 박물관부터 세계 6대 박물관으로 손꼽히는 국립 중앙 박물관, 간송 미술관·호암 미술관·호림 미술관 등 3대 사립 박물관,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과 동아대학교 박물관 등 유명 박물관의 설립·특징 ·전시품을 소개한다. 200페이지 남짓 얇은 책, 푹 빠져 읽다 보면 한국 박물관 100년의 흐름이 잡힌다.

게티 뮤지엄 등 외국 박물관, 천안과 서울의 아라리오 뮤지엄을 통해 박물관이 나아가야 할 미래도 제시한다. 박물관사는 정치인과 기업인이 등장하는 근현대사 단면이기도 하여 흥미롭다. 박물관이 다시 보인다! 아래는 필요한 부분 요약.

 

 


 

최초의 근대 박물관 - 이왕가 박물관

 

 

한국 최초의 박물관은 1909년 조선 말기 순종이 창덕궁 안에 건립하여 대중에게 공개한 이왕가 박물관이다. 이왕가 박물관의 설립은 일본의 종용에서 비롯된 것으로 식민 지배 정책의 일부였다. 조선 왕조를 ‘전근대’로 몰아세우고 근대화의 상징인 박물관을 건립함으로써 일본이 조선을 근대화한 선진국임을 선언하고자 했던 것. 이는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도 식민지에서 써먹던 방법이었다.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내 세자궁을 허물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만들었던 것 역시 조선 법궁을 격하시키려는 의도였다.

 

 

혼란스러운 시기였지만 박물관 건립을 맡은 조선 왕실은 문화유산을 지키려 1만 점 이상의 유물을 수집했고 그중에는 최고의 문화재로 손꼽히는 고려 청자와 동양의 ‘생각하는 사람’으로 유명한 금동반가사유상이 있다. 1969년 국립 중앙 박물관과 통합된 후 이왕가 박물관 소장품이었던 유물들은 ‘덕수’라 표시되어 전시 중이다. 참고로 ‘본관'이라 표시된 유물들은 옛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있던 것들이며, 현재 용산에 국립 중앙 박물관은 유물은 대개 이왕가 박물관과 조선총독부 박물관 소장품이라 한다.

 

 

일본은 왜 우리 유물을 훔쳤을까

 

 

일제강점기 당시 30여 년간 많은 유물이 도굴되어 일본으로 건너가거나, 서양에 팔려 일본인들의 잇속만 채우고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더불어 일본의 도굴로 무덤 밖으로 나온 유물들이 지금까지 한반도의 골동과 미술 시장을 지탱하고 있다는 점도 아이러니다. 일본은 왜 우리 유물을 파헤치고 훔쳤을까? 일제는 당시 유행한 제국주의 역사관에 따라 한반도 통치를 정당화할 명분을 얻으려 고분 조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고대 일본이 한반도에 영향력을 미쳤다는 증거 혹은 가짜 증거라도 찾기 위해서였다.

 

또한 이런 문화재 수집과 약탈에서 일본의 영토 확장 열망을 볼 수 있다. 일본 도쿄 국립 박물관에는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와 서아시아, 이집트 유물이, 오하라 미술관에는 인상파와 피카소 등 유럽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한다. 일본 바깥으로 영향력을 넓히길 원했던 동시에 유럽을 동경하고 따르려 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최초의 사립 박물관 - 간송미술관

 

1938년 간송 전형필이 한국 최초의 사립 박물관인 보화각을 성북동에 건립했다. 대개 수집가들은 개인 박물관이라는 꿈을 갖는데, 간송은 보화각에 그동안 수집했던 서화나 백자를 전시했고, 박물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1937년 영국인 존 개스비가 소장했던 고려청자를 일괄 인수했다고 한다. 매입비로 공주의 전답을 모두 팔아 매입 비용을 대는 등 상당한 비용을 투자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전형필의 사립 박물관은 상설 전시는 하지 못했다.

 

간송이 세상을 뜬 후 간송의 자손들과 학자들은 1971년 박물관 이름을 '간송 미술관'으로 바꾸고 재단을 새롭게 정립해 다양한 기획전을 선보이고 있다. 간송 이외에도 기업가 이홍근, 의사였던 박병래 역시 조선백자와 고려청자 등 상당량의 소장품을 수집해 사립 박물관 건립을 꿈꾸었지만 여의치 않자 국립 중앙 박물관에 유물을 기증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3대 사립 미술관

 

간송 미술관, 호암 미술관, 호림 박물관은 모두 개인 소장가가 설립했고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이 설립한 호암 미술관은 정선의 인왕제색도, 수월관음도 등의 고려 불화, 청화백자, 대가야 금관 등 국보급 유물을 비롯 김홍도, 김정희의 그림을 볼 수 있는 보물 창고다.

 

호암의 공간이 다 차자 삼성은 소장품을 전통 분야와 해외 분야로 나누어 전시하기로 하고, 2004년 서울 한남동에 리움 미술관을 건립한다. 유럽의 유명 건축가들이 설계에 참여해 공간 배치가 독특한 리움은 한국의 경제·문화적 위상을 높였고 대기업의 문화적 이미지를 상징하는 공간이 되었다. 다만 멋진 외관에 비해 전시 기획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 지적이 있고, 박물관을 운영하는 삼성문화재단이 삼성 경영권을 2세 이건희에게 편법으로 증여하는 과정에 이용된 과거가 있어 미술관 운영 목적이 삼성 일가 재산 관리라는 의혹이 여전하다고 한다.

 

 

림미술관

 

개성 출신 기업가 윤장섭이 설립한 호림 박물관은 인지도가 높지는 않지만 국보와 보물을 포함한 1만 5천여 점의 유물을 보유중이고, 운영 면에서도 선진적이다. 1981년 재단을 설립해 소장품 전부를 호림 박물관 재단에 귀속시켰으며 모든 자료를 누구나 활용할 수 있도록 공개하는 등 사립 박물관이 나아갈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현대미술관의 미래 – 김창일과 아라리오 뮤지엄

 

천안 시외버스터미널을 소유한 사업가이자 미술 작품 수집가·작가인 김창일은 본인이 소유한 터미널 주변에 야외 조각 공원을 조성하여 현대미술 작가 데미안 허스트의 대표작 <찬가>와 <체러티> 등 세계적인 대가의 작품들을 전시해 일반인들에게 개방했다. 그는 해외 미술품을 수집하면서 영국의 yBa (젊은 영국 작가들의 모임 young British artists)에 매료되어 서구 수집가들보다 한발 앞서 과감하게 이들의 작품을 매입했다고 한다.

 

 

김창일은 2013년 건축가 김수근의 설계로 유명한 공간 사옥을 인수해 다시 화제에 올랐는데, 노후한 공간 사옥을 리모델링하여 아라리오 뮤지엄으로 재탄시키는 과정에서 역사성을 살리고 새롭게 가치를 발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어 제주도의 탑동 시네마와 동문 모텔을 리모델링하여 미술관으로 변모시키는 등 현대 미술관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다.

 

 

박물관은 어디로 향해야 할까

 

 

박물관의 수준은 곧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이다. 우리나라 박물관은 유물 구입비를 증액해 유물 확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약탈되어 국외로 반출된 유물을 돌려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증 또는 매매 등 합법적인 경로로 반출된 유물을 돌려받기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해외에 존재하는 유물을 일괄적으로 조사한 뒤 현지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도 있다.(...) 그런 관점에서 해외 전시관을 잘 꾸리는 일도 중요하다.(p165)"

 

박물관 진흥을 위한 창의적인 시도도 필요하다. 일례로 아랍에미리트는 프랑스 유물을 1조 원에 임대해 자국에 "루브르" 미술관을 열었다고 한다. 아랍에미리트는 대여한 작품으로 관광 소득을 올리는 동시에 문화 중심지로 거듭날 수 있고, 프랑스는 대표 브랜드인 루브르를 중동에 알리는 동시에 1조 원을 자국 박물관에 투자할 수 있으니 양국 모두 윈윈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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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배꼽, 그리스 - 인간의 탁월함, 그 근원을 찾아서 박경철 그리스 기행 1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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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철 님의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여행기. 십 대 때 읽은 니코스 카잔자키스가 그의 인생을 바꾸었고, 오십을 앞두고 드디어 고대하던 그리스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그는 따로 일정을 정하지 않고 코린토스 - 네메아 - 아르고스 - 스파르타를 거치며 문명과 역사를 서술하고, 그리스의 참모습을 확인한다.

 

 

여행지에서 저자는 카잔자키스 작품의 구절을 되뇌며 그와 마음속으로 대화를 나눈다. 사실 카잔자키스를 잘 모르는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두 분 대화에 끼기 어려워’ 조금 소외감을 느끼기도 했다. 에필로그에 따르면 이 책은 10권으로 예정된 그리스 기행 시리즈의 1권이고, 2권도 집필 중이라 했다. 출간이 보류된 것일까? 2권은 서점에서 보지 못했다.

 

 

그리스는 유럽 최초의 문명 발상지인 미케네 문명이 발흥된 곳이다. 학교 다닐 땐 세계 4대 문명을 강조해 배웠기 때문일까, 서양 역사에서 지중해 세계가 가장 중요한 지점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로마는 그리스를 흠모해 따랐고, 수백 년 후 르네상스시대 역시 인간이 중심이었던 그리스 헬레니즘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었다.

 

 

다른 곳이 아닌 그리스에서 서양 문화의 바탕이 형성된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졌다. 기후? 동과 서를 잇는 지중해라는 위치? 지금의 그리스는 화려했던 고대보다 못한 모습일까. 이 책에는 그리스가 국민소득 3만 불 국가라 하는데, 지금의 그리스는 어쩌다 경제 위기를 맞았는지도 알고 싶어졌다.

 

"여행하는 동안 신화의 콘텍스트, 문명, 민주주의, 터키, 압제, 레지스탕스(저항세력), 코라보레이터(매국노), 대중, 신앙, 돈, 권력, 신, 인간 등 어마어마한 키워드들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이 땅에서 무엇을 보아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431쪽 에필로그 중)

 

윗글처럼, <문명의 배꼽, 그리스>는 무척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몇 가지만 정리하려고 골랐다. 그리스의 키워드는 영웅(탁월하나 인간의 한계를 지닌)과 공동체다. 아래는 코린토스의 샘, 네메아의 수도원, 올림피아의 신전, 아르고스의 신화, 스파르타와 헬레네 간단 정리.

 

 

 


 

#1 코린토스

 

 

코린토스는 펠로폰네소스반도의 관문에 위치해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아크로코린토스의 성채는 ‘피로 반죽하고 살로 구운 벽돌’로 만들어졌다. 성채가 만들어지기 전엔 아프로디테의 신전이었다. 모셨던 주신이 말해주듯 코린토스의 문화는 퇴폐와 향락 그 자체였다고 한다. 그리스는 로마와 마케도니아라는 두 강국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저항과 복종, 연대와 분열을 지속하다 결국 기원전 146년 로마군에 고대 코린토스는 사라졌다. 아크로코린토스에는 로마식, 베니스식, 터키식 건물과 모스크가 섞여 있다.

 

 

로마가 코린토스를 초토화시켰고, 대지진까지 일어나 그리스 유적 대부분은 사라졌다. 아폴론 신전이 코린토스의 거의 유일한 그리스 유적이다. 그리스 도자기들은 예술적 가치와 경제적 고대 코린토스 항구에는 아시아 전역의 상인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카키아 스칼라, 고약한 고갯길이라 불린 코린토스로 가는) 이 길은 고대 그리스인의 영원한 주제였던 '금기를 넘어서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신과 어깨를 겨루던 당대의 영웅조차도 결국에는 인간의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신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는 '나약한 인간의 실제'에 대한 내러티브가 담긴 비디오 가이드인 셈이다. (p.29)

 

 

그리스 사람들은 이중적이라는 평을 자주 듣는다.(...) 그리스에는 지중해의 태양 같은 뜨거운 격정과 말라비틀어진 마른 풀 같은 무기력이 공존하고, 처음 만난 여행자를 집 안에 들여 재워주는 인류애적인 친절과 백주대낮에 불법체류자를 둘러싸고 돌을 던지는 야만이 공존한다. (pp.34-34)

 

 

역사시대 이전부터 이곳에 터를 잡고 언덕 위에 돌을 쌓기 시작한 코린토스인들은, 기원전 338년 처음 성채에서 밀려난 이후 마케도니아, 로마, 비잔틴, 노르만, 프랑크, 베네치아, 터키에 교대로 능욕당하며 19세기에 이를 때까지 굴종의 역사를 이어가게 된다. 사라센, 슬라브, 훈족을 비롯한 북방의 이민족들에게 당한 노력질을 제외하고도 그 정도다. ... 그런 탓에 아크로코린토스의 성채를 세상에 둘도 없는 특별한 양식의 구조물로 재탄생시켰다. (p.40)

 

 

#2 네메아의 수도원

 

 

네메아는 헤라클레스의 무운을 기리는 범그리스 네메아 제전이 열리던 곳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기 자신을 이상화한 모습을 창조하고, 그것을 닮으려고 노력했다. (...) 그들은 성스로움, 고행, 투쟁, 심오한 슬픔 등 전체적으로 볼 때 신비롭지만 성스럽기까지 한 존재를 창조하고 그것을 ‘영웅’이라 불렀다. 나아가 그들 스스로 그 영웅 혹은 영웅의 삶을 닮으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그리스 문명이 발화한 원천이었을 것이다. (p.146)” 영웅은 “육체와 영혼의 갈등과 분열을 이겨낸 자”, “이성(소명)과 육체(삶)의 화해를 이루며 극적인 죽음을 맞는 자”이다.

 

 

네메아의 수도원은 입구도 출구도 없이 절벽에 매달려 있다. “처음 로마 제국에서 일단의 수도사들이 사막으로 들어간 것은 예수가 경험한 황야의 고행을 몸소 체험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후 이들은 육체를 극한까지 몰아붙이며 사막에서 동굴로, 결국에는 기둥 위로 올라갔다.(pp.174-175)"

 

 

#3 올림피아의 신전

 

 

“신화에서처럼 아시아에서 흑해를 건너온 인도유럽어족이 그리스를 세웠다는 고고학적 사실이 그 신화에 깃들어 있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또 다른 하나는 그리스인이 서쪽 바다를 건너가서 이탈리아에 식민지를 개척했다는 사실이다.(p.197)”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만들었을까? 신화는 역사의 거울이다. 물론 다 역사를 반영한 건 아니다. “제우스 자신이 성소를 지었다는 얘기나, 아폴론, 펠롭스 또는 헤라클레스가 지었다는 여러 가지 전승들은 이주민들이 토착화된 후 스스로의 역사에 자긍심을 고취하려는 노력으로 보아야 옳다. (p.202)” 주신인 제우스를 기리는 올림피아 경기는 기원전 776년부터 서기 393년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금지될 때까지 이어졌다.

 

 

“(제우스 신전에서) 이곳의 유적은 야만에 대한 이성의 끝없는 도전이 이뤄낸 결과물이다. 그리스 문명은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열정 그리고 단련된 육체가 어우러져 피워낸 꽃이며 정신과 육체의 조화로운 균형을 추구하던 현장이기도 하다. (p.212)”

 

 

“올림피아 박물관은 스파르타인에 대항해 승리한 기념으로 서남부의 메세니아 인들이 만들어 바친 승리의 니케상과 헤라 신전에서 발견된 헤르메스 상이 있는 유물의 보고이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빛나는 유물들도 제우스 신전에서 내려온 페디먼트에 새겨진 부조 앞에서는 빛을 잃고 만다. (pp.230-231)”

 

 

#4 아르고스의 신화

 

 

아르고스는 신화의 땅이다. “그리스의 수많은 신화들 가운데서도 가장 논쟁적인 신화들의 발원지라 일컬어지는 곳, 역사를 가른 페르시아 전쟁의 불씨가 되기도 했던(p.273)” 곳이다. 참주 페이돈 통치기에 아르고스는 아르골리스를 지배했고 스파르타와 함께 위세를 떨쳤다. 아르고스의 공주 이오가 납치당한 이야기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잘 기술되어 있다. 제우스와 사랑을 나누던 이오는 암소로 변신하게 되는데, 암소는 헤라가 보낸 등에에게 쫓겨 ‘보스포루스(암소의 나루라는 뜻)’ 해협을 건너고, 암소가 건넌 바다는 ‘이오니아 해’가 되었다고 한다. “이 신화는 헤로도토스가 페르시아인들의 입을 빌려 기록한 페니키아인들의 아르고스 공주 이오의 납치 사건에 대한 훌륭한 메타포(p.281)”다.

 

 

이렇게 신화와 전설에는 역사적 사실과 그것에 대한 당대의 평가가 담겨 있다. 아이스킬로스가 쓴 ‘아가멤논’에서, 동맹군의 지도자였던 아가멤논은 교활한 장수인 오디세우스보다 더 낮게 평가된다. 아가멤논은 메넬라오스가 그의 아내 헬레네를 납치해간 파리스에게 복수하기 위해 일으킨 트로이 전쟁의 장수였다. 아르고스의 백성들은 여자 때문에 일어난 전쟁에 동원되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없었고 아가멤논을 그리스 정신에 반한 어리석은 장수로 평가했다. 반면 지중해를 탐험하다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식민지 제국의 발판을 만든 영웅으로 그렸다.

 

 

#5 스파르타와 헬레네

 

 

스파르타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최소 해발 수백 킬로미터의 고원이나 산맥을 넘어야 한다. 천혜의 자연방벽으로 보호받는 땅이다. 스파르타는 일찍부터 단결해 주변을 정복해 나갔고 복속시킨 이들을 노예로 부렸다. 소수의 지배층이 노예들을 잔혹하게 다루었다. 두 명의 왕은 의무와 특권을 가졌지만 정치적 권한은 원로원과 민회보다 약했다.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법을 가졌고 공동체에 헌신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었다.

 

 

“(호메로스의 <일라이스>는) 신의 정체, 본질, 인간의 숙명과 한계, 그러나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장엄함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다.(p.305)”

 

 

“나는 오히려 바로 그 때문에 일리아스의 정통성이 아킬레우스가 아니라 헬레네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양립하고 수용할 수 없는 것을 수용하며, 지극히 비현실적인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그리스 혹은 그리스인의 특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헬레네이기 때문이다. (p.308)”

 

 

“(...) 그리스인은 아킬레우스를 최고의 영웅으로 받들고 칭송한다. 이 용기와 우정이라는 두 가지 정신은 고대 그리스의 탁월함 그 자체였으며, 지금도 그리스인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p.318)”

 

 

스파르타의 지형은 외부에서 침입하기가 쉽지 않다. 삼면이 험한 산맥이고 나머지 한쪽도 높은 고원이다. 군사강국을 지향할 이유가 없어 보이는 지형이다. 스파르타는 호전적이고 잘 조직된 전력으로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부 메세니아와 라코니아를 정복하고 주민들을 노예로 삼아 “전 시민이 군인이 되고 일은 노예가 도맡아 하는(335)” 군사국가를 만든다.

 

 

왕의 권력은 생각보다 크지 않아 교전권을 제외한 사항은 원로원과 민회에서 결정했다. 왕권을 비롯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관한 법과 규율이 존재했고, 세세한 도덕률까지 구체적으로 정해 두었다고 한다. 의외로 여성들의 지위는 높았지만, 열등하게 태어난 아이는 더 자라기 전에 살해하고 남은 아이들을 최고의 전사로 키우기 위해 치열하게 훈련시켰다.

 

 

“코린토스는 다양성은 있었지만 그 내용이 문란하여 창조적 긴장이 발아하지 못했고, 스파르타는 진중했으나 획일성이라는 척박한 토양을 취했기에 문명의 씨앗이 잉태될 수 없었다. 더구나 스파르타인들은 자신들이 정복하거나 이웃한 이들과 어울려 문화의 이종교배를 이루기보다는, 이들을 억압하고 순혈주의를 강조함으로써 문화의 동종교배에만 만족하여 더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p.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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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를 찾아서 - 인간의 기억에 대한 모든 것
윌바 외스트뷔.힐데 외스트뷔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노르웨이 신경심리학자 윌바 외스트뷔, 작가 힐데 외스트뷔 자매가 함께 썼다. 기억을 연구하는 윌바, 기억에서 글감을 꺼내어 재구성하는 작가 힐데 모두 기억을 다루는 사람들이다. 「인간의 기억에 관한 모든 것」이란 당당한 부제와 신비로워 보이는 표지에 끌렸고, 연구자들이 밝혀낸 기억의 메커니즘을 문학적 · 비유적으로 표현하여 신선했다. 한 철학자는 '당신이 먹는 것이 곧 당신이다'라고 했다는데, 이 책을 읽고는 '내가 기억하는 것이 곧 나'임을 알게 되었다.

 

 

 

제목의 '해마'는 뇌의 '해마'지만 본문에서는 바다생물 해마로 비유되기도 한다. 기억 연구자가 잠수사들이 잠수 중 기억했던 것을 물 밖으로 나와 회상하는 실험을 진행하는데, 이를 '잠수사들이 해마에서 일어나는 일을 찾는다'고 표현했고, 그것이 책 제목 Diving for Seahorses 이 되었다. 해마는 우리 뇌에서 기억을 관장하는 부분으로, 450년 전 이탈리아 의사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란티우스가 뇌에서 바다생물인 해마와 비슷하게 생긴 작고 꼬부라진 부위를 발견하고 '해마'라 명명했다.

 

 

해마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1950년대 되어서야 밝혀졌다. 한 외과 의사가 뇌전증 환자 헨리 몰레이슨을 낫게 하려고 그의 해마를 제거하는 수술을 해 버렸는데, 헨리는 수술 이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수술 이전의 기억만 갖고 살았다고 한다. 책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헨리 몰레이슨 이야기로 시작하여 기억이 뇌에 어떻게 자리 잡는지, 사람은 무엇을 얼마나 정확하게 기억하는지, 트라우마나 허위 기억은 어떻게 생성되는지, 우리는 왜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지 등 지금까지 이루어진 기억에 관한 여러 연구결과를 풀어낸다.

 

 

기억은 대뇌피질에 퍼져 있는, 맥락으로 연결된 개별 기억들의 커다란 네크워크다. 뇌와 기억 연구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장소는 장소 세포나 격자 세포에서 관장하고, 신경 외막은 신경 간 연결점을 보호해 기억 흔적을 단단하게 고정시키며, 뉴런들 사이 연결점에 흔적이 생기면서 장기 기억이 이루어진다는 등의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한다. 이런 연구는 뇌의 반응을 눈으로 볼 수 있는 fMRI가 개발된 덕분이었다. 모든 기억이 해마에 저장되는 건 아니다. 기억에서 해마가 중요한 이유는, "해마가 기억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연출가처럼 하나로 모은다는 것이 기억에 대한 현대의 주도적 이론 중 하나(p99)"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까? 장기 강화된 경험은 그물망에 엮이고 해마의 장소 세포에 연결되어 우리 뇌에 자리잡는다. 모든 경험이 기억으로 남는 건 아니다. 여러 번 반복되거나 특색있는 경험이 오래 남으며 특히 우리는 삶에서 의미 있는 것을 주로 기억한다. "가장 강력한 기억의 네트워크는 우리가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을 학습할 때 우리가 직접 만들게 된다. (p68)" 그래서 '기억은 인생이고, 내가 기억하는 게 나'인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순간들이 나의 정체성을 이루고, 우리 모두는 기억으로 자서전을 쓰는 작가가 된다.  경험에 구조를 부여하는 이 자서전을 기억 연구에서는 '라이프 스크립트(인생 원고)' 라 한다.

 

 

 

"기억의 운명에는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의미가 있는가가 결정적이다. 개인적인 경험은 우리 자신에 관련된 것들이다. 이들은 우리가 도달하려고 하는 것,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 우리가 우리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들로서 경험하는 것들과 관련이 있다. 우리 자신의 자서전 형태에 중요한 기억들은 우선적으로 저장된다.(p83) "기억은 창조하고 열려 있는, 모든 것을 흡입해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스펀지 같은 도구이다."(p95)

 

 

기억은 불완전하고 늘 재구성된다. 사람들은 기억에 관심이 많아 기억력을 향상시킬 방법을 연구하고 체스 선수나 배우, 노인들은 기억술을 배우기도 하지만, 사실 기억은 디지털 기기로 촬영한 데이터와는 달라서 매우 부정확하다. 기억은 오히려 "계속해서 같은 작품이 매번 새로 무대에 올려지는 극장과 비교할 수 있다.(p148)" "관자놀이 뒤에서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기억의 극장으로부터 조종을 받는다. 공연이 끊이지 않는 이 극장에서는 언제나 해석이 달라지고, 때로는 배우도 바뀐다."(p41)

 

 

만약 있었던 일을 그대로 기억한다면 트라우마도, 기억 왜곡도, 허위 기억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을 변형시킨다.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후스트레스장애)의 증상 중 하나는 겪었던 사건이 여느 경험과 달리 극단적으로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는 것이다. 트라우마는 기억 시스템이 평소처럼 작동하지 않고, 기억의 볼륨을 최고로 올려 경보를 계속 내보내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같은 사건을 겪어도 내적인 판단과 해석을 내리는 이들은 기억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지만, PTSD를 겪는 이들은 사고의 세부사항을 더 많이 기억하여 항상 몸이 비상사태에 있는 것과 같다고 한다. 저자는 2011년 7월 22일 노르웨이 우퇴위아 섬에 있었던 폭탄 테러 피해자를 인터뷰하며 그 예로 들었다.

 

 

기억을 가위질하고 포토샵하는 과정에서 사실이 아닌 걸 믿게 되기도 한다. 허위 기억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어떻게 일어났다고 믿을 수 있는지 놀랍지만, 오래된 일일수록, 일상적인 일일수록 허위 기억이 생기기 쉽다고 한다. 허위 기억이 생기는 경우 중 가장 주목해야 할 장소는 법정이다. 취조나 심문 과정에서 사법 체계가 증인들의 허위 진술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진술을 할 때 압력을 가하거나 사람들을 모아놓고 심문하면, 기억에 오류가 생기고 그 피해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특히 법정에서와 같이 정확한 기억이 필요한 상황에서 허위 기억이 발생하지 않도록 돕는 연구가 필요하다.

 

 

늘 궁금했던 문제, 우리는 왜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할까? 해마가 아직 성숙하지 않아서? 퍼트리샤 바워의 연구에 따르면, 서너 살 유아들도 몇 달에서 일 년 전까지의 일을 기억하지만 그 기억은 수명이 짧아서 나이를 먹어가며 점점 초기 기억을 잊는다고 한다. 즉 어릴수록 ‘기억의 유통기간’이 짧고, “어린이가 나이를 먹으면서 기억은 점점 유통 기간이 길어져서, 통조림처럼 거의 제한이 없는 성숙한 보존성에 도달한다(p268)”는 설명이다. 만약 아이가 어렸을 때 일을 부모가 아이에게 지속적으로 얘기해준다면, 그 아이는 실제 경험의 ‘허위 기억’을 저장하게 된다. 부모에게 들은 이야기를 마치 자신의 진짜 기억처럼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행복한 유년 기억을 심어주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기억의 진화적 효용이다. 변형되고 왜곡되기 쉬운 취약한 인간의 기억, 대체 어떤 효용이 있는 걸까? 디지털 기기로 녹화와 녹음을 하듯 정확하게 기억하면 좋을 텐데 왜 기억은 변형되고 왜곡될까? 저자는 기억을 유연하게 변형시킴으로써 미래에 다가올 일을 상상할 수 있다고 한다. 진화심리학적으로 기억이라는 정신작용이 생존과 재생산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설명하자면, 기억은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람쥐가 부지런히 도토리를 묻어놓았던 자리를 기억해야 겨울에 찾아 먹을 수 있는 것처럼 모든 생물은 기억을 필요로 한다. 사람에게 기억은 일어났던 일을 상상하는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위험했던 순간을 기억하고, 앞으로 다가올 위험을 상상하며 방어할 준비를 하는 능력 덕분에 인류가 돌도끼를 만들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fMRI를 통해서도 “기억을 할 때나 미래를 생각할 때나 공통의 일련의 뇌 영역이 두드러져 나타나는 것(319)"이 발견되었다니 연구자들의 통찰이 놀랍다.

 

 

우리는 깨어있는 시간의 반 정도를 기억하고 상상하는데 보낸다고 한다. 일어났던 일과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는 이런 '시간 여행'은 ‘디폴트 네트워크’ 즉 휴식 상태에서 활성화된다. '과거는 연료고, 기억은 모터로 미래를 상상하게 한다'는 저자의 비유가 멋지다.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은 창의적 문제해결력의 바탕이 되고,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행위를 하도록 이끌기도 한다. 윤리와 규범을 지켰을 때 돌아올 사회적 보상을 세밀하게 상상하는 사람일수록 그 보상을 더 크게 느끼고, 자신의 행동을 잘 통제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기억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무슨 일이 생길지 상상하고, 미래 비전을 다른 구성원과 공유한다.

 

 

마지막으로 검은 배경에 해마와 뇌가 은은하게 떠 있는 아름다운 표지를 말하고 싶다. 초등학교 때 미술시간, 크레파스로 밑바탕에 무지개색을 칠하고 그 위를 모두 검은색으로 덮어버린 후, 이쑤시개로 긁어내어 아래 무지개색을 드러내던 기억이 떠오르는 표지였다. 기억은 뇌라는 블랙박스 안에 저장되어 볼 수도, 꺼내어 관찰할 수도 없다. 아직은 블랙박스 속이 훤히 보일 창을 내지는 못하지만,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일부분이나마 슬쩍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언젠가 뇌 안의 기억 지도가 밝혀질 날을 오기를. 문학적이고 서정적인 과학서다. 기억이란 무엇이며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신 분들께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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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1주년 한정 리커버 특별판) - 나, 타인, 세계를 이어주는 40가지 눈부신 이야기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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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지대넓얕 팟캐스트를 열심히 들었습니다. 채사장과 대화를 한 것은 아니지만 목소리를 거의 매일 듣다 보니 그가 친구처럼 느껴졌습니다. 똑똑한데 엉뚱하고, 재미있는데 왠지 자신을 감추는 듯한, 성공한 친구 말입니다. 그는 제게 시야를 넓혀주고 책 읽는 즐거움을 알게 해준 은인이기도 합니다. 저는 지적 호기심보다는 그를 더 알고 싶은 마음에 그의 책을 읽어 왔습니다. 이번 신간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는 자아, 타자, 세계를 다룬 책입니다. 짧은 산문 40편을 <타인>, <세계>, <도구>, <의미>로 분류했습니다.


<타인>은 외롭고 슬프게 느껴졌습니다. 사람들은 타인과 세계를 주관적으로 해석합니다. '실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감각기관과 뇌가 그려주는 '그림자'를 보는 것이지요. 내가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나의 의식으로 그를 재해석하는 것일 뿐, 그의 실체를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채사장은 우리 모두는 결국 '자폐'와 같다고 합니다. 타인에게 진정으로 닿을 수 없기에 타인과의 관계를 힘들어한다고,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은 자극이며 통증일지 모른다고 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는 제목이 역설적으로 들렸습니다. 타인과의 온전한 만남은 그저 우리 의식이 꾸며대는 것이거나, 이룰 수 없는 소망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여행자의 눈으로 <세계>를 본다고 합니다. 눈 가려진 경주마처럼 앞으로만 달리지 말고, 길가를 둘러보며 여유있게 그리고 신중하라 걸어가라 합니다. 채사장의 동년배들은 한창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높은 지위를 얻으려 분투하고 있을텐데, 그는 종교인이나 철학자가 말할 법한 불교적인 색채의 인생관을 말합니다. 아마도 그가 겪은 일들이 그에게 죽음과 그 이후의 삶을 생각하게 했고, 삶은 여행이고 순례임을 깨닫게 했나 봅니다.

 

<도구>에서는 자아와 타자를 이어주는 수단인 '언어'를 설명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언어를 다듬어 분량을 늘린 것이 '책', 분량을 줄인 것이 '시'입니다. 텔레파시라면 모를까, 언어는 불완전하기에 언으를 통한 완벽한 소통은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화하고 책과 시를 읽습니다. 책과 시를 읽을 때 생기는 불완전한 소통의 빈 틈 사이를 독자가 재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데, 이것이 작가와 독자의 소통입니다.

 

 

<의미>에서 채사장은 무엇보다도 자아 내면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합니다. 변하지 않는 진리나 남의 말이 아닌, 아득한 내 의식의 목소리 말입니다. 그의 결론은 내가 곧 세계가 곧 나라는 겁니다.

 

"내 앞에 펼쳐진 빛으로서의 세계가 곧 나 자신이라는 진실. ... 서구철학은 이를 '현상'이라 부르고, 고대 인도에서는 이를 '마야'라고 부르며, 불교에서는 이를 '색'이라고 말한다.(p240)"  

 

그의 요지는 자아에 집중하자는 것이고 인생을 현실적(생즉고), 초월적(죽음/꿈/환생), 관조적으로 보는 듯 합니다. 저는 저자의 삶과 인생관을 더 알게 된 것으로 이 책에 만족했고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둡게 느껴졌습니다. 팬으로서 신간을 매우 기다렸는데 분량이 짧아 아쉬웠습니다. 이제 다시, 다음 책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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