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동화
최용탁 지음 / 나무그늘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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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동화? 도대체 뭐가 어쨌길래 이상한 동화라는 제목을 붙여야 했을까? 이 책을 처음보는 순간 내가 한 생각이다. 무서운 동화도 나오는 세상인데 이상한 동환들 못나올 건 없잖아? 하면서도... 하지만 읽고난 뒤에 내가 붙인 제목은 이렇다. 단 세명의 어린이를 위해 지어진 아름다운 동화, 슬픈 이야기를 읽고도 행복해지는 아름다운 동화..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어린이들의 시선만이 아닌 어른의 시선으로 동화를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동화이기도 했다. 전혀 이상하지 않은 아홉편의 아름다운 동화속에서 내가 만날 수 있었던 메세지는 뜻밖에도 많았다. 단순히 동심만을 이야기하지 않았던 동화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자신의 아이들을 위하여 하나씩 만들었다는 이야기속에는 아이들을 향한 아버지의 바램과 아버지로서의 노파심과 그리고 아버지의 염려, 한마디로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있었음을 보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장애를 가진 아이의 꿈을 우리는 얼만큼이나 배려하고 있는가? 비록 장애를 가졌더라도 그들이 품고 있을 꿈의 크기에 대하여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무시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다시한번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이야기, <누리의 하루>.. 배고프고 힘겨웠던 계절속에서 아이들을 위하여 먹이를 구하러 나갔던 엄마 아빠노루. 하지만 엄마는 그만 인간들의 덫에 걸려 아이들의 곁을 떠나버리고 부상을 당한 아빠노루는 아이들을 위해 길을 떠나기로 한다. 힘겨울수록 함께 해야 한다는 <노루 가족의 겨울> 이야기속에는 사랑이라는 강한 메세지가 들어 있었다. 살기 위하여 가족이 함께 하지 못하는 삶의 여정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보고싶은 동생을 위해 분홍머리핀을 사는 아이 선재의 마음을 그렸던 <분홍 머리핀>은 삶의 힘겨움이 변화시키는 어른들의 세계와 그것을 바라보는 아이의 아픔 또한 함께 그려주고 있음이다. 오동나무의 가장 어린 잎이었던 끝동이가 엄마에게서 떨어져나와 바다로 가는 여정을 그려준 <바다로 간 끝동이>에서는 우리가 무심코 망가뜨리고 있는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 외에도 <아빠와 두더지>, <소진이의 일기장>, <은행나무 네 그루>를 통해 보여주었던 가족간의 끈끈한 사랑이야기는 슬며시 작은 감동을 일으키며 지나가기도 했다. 

얼마전에 읽었던 <두꺼비가 뿔났다>와 애니메이션으로 즐겨 보는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을 떠올리게 했던 이야기, <참목이와 도토리 삼형제>.. 참목이는 어린 참나무이다. 하지만 아주 어린 나무가 아니었던 까닭에 인간에게 베임을 당해야 하는 빨간칠을 하게 된다. 이제 막 자신에게 생겨난 도토리,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도토리 삼형제를 끝까지 지켜주기 위해 애를 쓰던 참목이.. 그 참목이를 살려내기 위한 숲속 친구들의 노력과 바램도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고 마지막 희망이었던 늙은 밤나무 할머니의 죽음마져도 참목이를 구해내지는 못했다. 동물이 없으면, 그리고 나무와 자연이 없으면 인간들도 살 수 없다는 것을 인간들만 모르고 있다던 소나무 할아버지의 말이 울림처럼 나의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도토리 셋중에서 둘은 다람쥐에게 주고 하나만 심어주었으면 좋겠다던 참목이의 마지막 소원속에는 무엇이건 채워야만 하는 인간의 이기심에 대한 질책이 들어있는 것만 같아 가슴 한 쪽이 찡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童話는 자연속에서 나오는 것 같다. 그 자연과 가장 친밀하다는 童心.. 어쩌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아이들마져 동심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너무 아이같지 않은 아이들을 만나게 될 때마다, 아니 그런 아이들을 너무 많이 만나게 되는 이 세상속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해주고 싶었던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문예창작과를 나왔다는 작가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농부의 일이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내 아이만큼은 진정 아이답게 살아가기를 원했던 그 마음을, 결코 이상하지 않은 그 마음을 이상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 작가의 세 아이들, 정말 행복하겠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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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대한 끔찍한 사랑
제임스 힐먼 지음, 주민아 옮김 / 도솔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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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대한 끔찍한 사랑이라는 제목부터가 이상했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도 어디에 전쟁에 대한 사랑이 존재하는지 열심히 찾아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쟁에 대한 끔찍한 사랑을 찾지 못했다. 이 책속에서 내가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전쟁에 대한 끔찍한 사랑이 아니라 그만큼의 사랑을 가지고 전쟁을 바라보아야 하며 또한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목소리였다. 보편적으로 우리는 전쟁에 대한 사랑보다는 그야말로 말하기조차 싫은 끔찍한 단어들로 구성되어지는 안좋은 이미지를 먼저 떠올린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끔찍한 단어들이 지목하는 상황과 단한번만이라도 마주쳐본 적이 있을까? 나는 전쟁을 겪은 세대도 아니고 또한 앞으로 그런 전쟁을 겪을 가능성조차도 가늠할 수 없는 현실속에서 살고 있다. 단지 영화속에서나 책속에서 혹은 실제로 전쟁을 겪은 나이드신 어르신들의 기억을 통해서만 전쟁에 대하여 상상하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니 그럴 것이다, 혹은 그랬을 것이다라고만 예측할 뿐..

총 네장으로 구성되어져 있는 이 책의 내용은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해하기 힘겨웠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것인지 정리하기에도 벅찼다.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과 그가 했던 말 혹은 그의 저서들을 나열해가며 알아듣겠느냐고 외쳐대고 있었지만 나는 몇번씩이나 이미 지나쳤던 부분들을 되짚어 가야만 했다. 그야말로 나는 이해하고 싶었을 뿐이고~~를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제목만큼이나 끔찍한 시간이었다고 해도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1장에서는 전쟁은 정상적이며 심리학으로 풀어야 할 숙제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현상이 무엇이든 그것에 공감해야 한다는 심리학의 제1원칙을 거론하며 전쟁에 대한 우리의 공감을 끌어내려하고 있다. 전쟁에 대한 혐오와 평화주의자들의 공포나 반감 따위는 멀찌감찌 치워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작가의 말처럼 그렇게 될 수가 있을까?  평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전쟁을 위한 전쟁을 해야만 한다는 말은 아무래도 받아들이기 수월한 말은 아닐듯 싶다.

전쟁은 비-인간적이다라고 외치는 2장속에서는 전쟁으로 인하여 피폐해져가는 상황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전쟁으로 인하여 변해가는 모든 것들이 그 속에 나열되어있다. 전쟁속에서 변해갈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의 비인간적인 모습들을, 그야말로 인간성을 포기해버린 인간들의 모습들을 끔찍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그렇게 변해갈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대며 그들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가? 를 따져묻기도 하지만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투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왠지 작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부분들이 있다. 그렇겠구나, 정말 그렇겠다, 그럴수도 있겠다 싶어서 인정하게 되는 부분들이 많아 나 스스로도 깜짝 놀라고 만다. 일본이란 나라속에 발을 붙였던 총이 어느날 시나브로 그들곁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게 되는 그 배경은 사뭇 경이롭기까지 했다.

신화를 통해서 보는 전쟁이야기는 재밌었다. 전쟁의 신 아레스와 (마르스)를 끌어들여 우리의 마음속에서 용암처럼 부글거리는 전쟁에 대한 욕망, 전쟁으로 맛볼 수 있는 황홀한 광기, 전쟁이 있어 경험할 수 있는 공포감 따위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아름답다는 말로 포장하기까지 한다.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말이다. 전쟁이 치명적인 아름다움과 함께 온다는 것을.. (마치도 행복과 불행처럼..) 아레스와 바람난 아프로디테가 남편 헤파이토스에게 걸렸다. 다 아시겠지만 헤파이토스는 최고의 대장장이다. 그의 그물에 걸려버리고 만 두 신의 모습을 보며 던졌던 아폴론의 물음에 비록 발가벗은 채 그물에 걸렸지만 내가 아레스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던 헤르메스의 신화를 예로 들어 준 것은 적어도 내게만큼은 책속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신화속에 등장하는 신들을 거론하며 그들의 특징에 맞게끔 인간의 심리와 접목시킨 부분들은 정말이지 기가 막히다. 신의 형상과 닮은 인간이라고 했던가? 그래서인지 그들의 생각과 행동속에 인간의 모든 것들이 들어있다는 말이 왠지 거북스럽지가 않았다.  

종교는 전쟁이라고 말하던 마지막장에서 다룬 전쟁과 종교의 이야기는, 어찌보면 마녀사냥과도 같은 특정 종교 때리기처럼 보일수도 있겠지만, 우리 모두는 이미 기독교적인 인간들이라는 말이 왠지 서글프게 다가왔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 책을 통하여 어렴풋하게나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겉으로는 평화를 이야기하지만 속으로는 모든 권력이나 야심, 즉 호전적인 (마르스)나 아레스적인 면을 숨기고 있다는 말 또한 거부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신화와 종교의 차이점에 대한 이야기는 내게 새롭게 다가왔다. 인간속에 머물러 인간과 함께 살아가느냐 아니면 인간위에 군림하느냐 하는 것은 분명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내가 잘 모르기는 해도 이미 우리곁에 머무는 유일신의 종교는 분명 인간위에 군림하고 있을테다.

'전쟁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전쟁은 사람들, 언론, '적'을 규정하고 싸움을 유도하는 지도자들의 마음속에 담긴 날카로운 목소리에서 시작된다. 그 현혹적인 격정과 기만적인 행위의 분출은 서로를 부추긴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절박한 심정에 사로잡혀 고귀한 선전포고라는 위선으로 우리 자신을 은폐한다.(321쪽)  색다른 주제를 다룬 책이 아니었나 싶다. 신선한 느낌도 있었지만 거부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던 책이었다. 어찌보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모든 현실 또한 전쟁일게다. 하나부터 열까지 따지고 들면 마르스나 아레스적인 면이 없지않다. 그렇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다고 감히 말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전쟁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아주 작은 작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너무도 많은 것들을 나열하며 신들의 이름까지 거들먹거린 작가의 노고가 대단하다. 읽기에 아주 버거운 책이었지만 말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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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자오선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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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오선(子午線) ... 시각의 기준이 된다는 線... 처음 이 책의 제목을 대할 때 왠지 싸아한 느낌이 들었던 것을 기억해낸다. 표지그림은 사막이었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책속의 소년이 시간에 등떠밀리며 이리저리 헤매고 다녀야만 했던 그 사막의 덧없음이 어쩌면 그 소년이 살아내야 했을 삶의 여정이었을 것이다. 어디에서 마주치던지간에 삶이란 것이 그리 평탄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삶이 아름답다고 예찬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정말 너무 지독하다. 열네살 어린소년이 버텨내야 했을 그 사막에서의 여정이 너무도 지독스럽고 잔혹하게까지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자신의 의지보다는 타인에 의해, 주변에 의해 끌리듯이 휩쓸려가던 그 소년의 시간들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한마디로 이 소설은 정말 재미없다. 그리고 읽는 나로 하여금 달려갈 수 없게 만들었다. 아니 달려갈 수 없는 상황속으로 나를 밀어넣었다는 게 옳은 말일게다. 소년과 더불어 그 지독한 사막속을 헤매이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헉헉거렸고 갈증에 힘겨워하기도 했다. 화살맞은 다리를 질질 끌며 살아야한다는 무의식속에서 소년의 시간이 버둥거릴 때 나도 함께 그 아픔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그 느낌처럼 내게 전해져오는 확실한 것은 없었던 것 같다. 난해하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몰라 조바심을 태웠다. 그런데도 이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던 것은 그 잔혹한 실상을 너무도 아름다운 말들로 설명하고 있다는 아이러니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저 번역가의 욕심이려니 치부하고 싶었지만 번역가야말로 원작자의 뜻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또하나의 사람일테니 그럴수도 없을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고나니 정말 이렇게 지독한 현실을 이렇게 멋지게 표현할 수도 있는거구나 싶었다.

그들이 지나치는 곳마다 살인과 방화가 난무하고 그들이 머물때마다 약탈과 무질서가 춤을 춘다. 소년이 그 부대에 합류하게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살아야한다는 것. 배곯지않으며 살아내야 한다는 것 뿐이었다. 글랜턴이라는 사람이 이끄는 부대속에는 홀든 판사와 전직 신부였다는 토빈이 있었다. 죽인다는 것에 대하여 아무런 느낌도 갖지 않은듯 보여지는 냉철한 성격의 소유자 홀든 판사는 아주 철저한 현실주의자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가는 곳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을 그림으로 그리며 역사를 쓰고자 했던 그는 아주 철저하게 과학적이기도 하다. 늘 소년의 곁에 머물며 소년 또한 그 곁에 머물렀던 전직신부의 역할이 소년에게는 그다지 커다란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 같지는 않다. 단지 함께 있음으로써 느낄 수 있는 아주 작은 감정 하나일뿐이다. 이렇게 세개의 구축점을 이루며 소년의 곁에 맴돌던 글랜턴과 홀든 판사와 전직신부가 보여주고 싶어하는 모습은 제각각 다른 것 같은데 나는 그들이 전해주고자 하는 메세지를 제대로 전해받지 못한 것 같아 한편으로는 안타깝고 아쉽고..그렇다. 그렇지만 이 책을 다시 손에 잡기에는 힘겨울 것 같다. 소년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나를 지치게 했던 까닭이기도 하지만 너무나도 냉혹한 현실의 모습과 맞닥뜨린다는 게 자신없는 때문이기도 하다.

작자는 시간과 함께 자라는 소년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것 같다. 마냥 그 모습으로 그 힘겨운 여정속을 헤맸던 것 같은데 어느날 소년이 마흔살의 남자가 되어버리고 그 순간부터 시간을 끌어가는 주체가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지만 판사의 손에 의하여 삶의 종지부를 찍어버린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마지막 부분에서 자꾸만 흔들리던 내 감정때문에 오래도록 멈췄던 것 같다. 소년이 마침내 어른이 되었는데 그 힘겨움의 끝자락에서 살아남았던 두 사람중 한사람에게 끝내는 시간을 약탈당하고야 마는 그 결말이 나는 너무도 싫었던 것 같다. 미국이 어떻고 멕시코가 어떻고, 배경적인 모습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었다. 단지 그 소년을 이끌고 갔던 시간속의 여정만을 따라갔을 뿐이었다. 이 헛헛함을 어찌할까... 자신도 모르게 변해가던 소년의 모습속에서, 그리고 그 소년을 변화시키던 현실속에서 내가 마주쳐야 했던 두려움의 실체에게 이렇게 무릎을 꿇어야하나 싶었다. 그 소년이 과연 '희망'을 가져보기나 했을까? 그랬다면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소녀의 이야기'라는 말에 동의할수도 있겠지만 왠지 나는 그렇게 느껴지지가 않아 곤혹스럽기만 하다. 희망.. 과연 그 소년에게 희망이 있기나 했을까?  일상같은 죽음... 일상같은 무질서.. 일상같은 그 잔혹함 앞에서 아무것도 표현하지 못했던 소년의 그 무덤덤함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책장을 덮으며 이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책띠의 글을 본다. 과연 그 화면속에서 무엇이 살아 움직일 수 있을까?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려 했던 모습, 혹은 현실과 타협하지 못했던 모습이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같잖은 생각을 해본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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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수도원 - 오드 토머스 세 번째 이야기 오드 토머스 시리즈
딘 R. 쿤츠 지음, 조영학 옮김 / 다산책방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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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속에서 아주 많이 보아왔던 설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딘 쿤츠의 소설은 재미있다. 마력같은 속도감에 불을 붙이며 끝까지 달려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오드 토머스 세번째 이야기라는 부제를 보면서 잠시 망설였지만 딘 쿤츠의 소설을 처음 대하는 것이 아닌 까닭에 주저하지 않았다. 왜일까? 이런 억지스러운 설정 자체를 싫어하면서도 알 수 없는 끌림이 생겨나는 까닭은?  부쩍 많아지는 인간의 오만방자함의 대표격이랄 수 있는 생명에의 도전 또한 현실과 맞물리는 상황으로 이어지는 걸 보니 왠지 살풋 웃음이 나기도 한다. 그도 그럴것이 이 황당스럽기까지한 내용의 책을 읽으면서 책 귀퉁이마다 도그지어가 생겨났던 까닭이다. 환상속을 달려가면서도 작가가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현실의 징검다리를 밟을 수 밖에는 없다. 픽션조차도 이제는 오롯한 픽션으로서의 모습에서 탈피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드 토머스의 세번째이야기지만 첫번째도 두번째도 나는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앞선 두번의 만남이 부럽지 않다. 오드 토머스.. 죽음을 볼 수 있는 자.. 하지만 그 죽음에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은 그 죽음의 목전에 이르러서야만 가능하다. 그 특별한 재능앞에서 수도없이 절망했을 주인공의 심리적 고뇌와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을 구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교묘하게 얽히며 이야기는 진행되어지고 있다.  '온'의 세계를 그렸던 일본소설이 생각났다. 죽은 이들이 저쪽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한 채 저마다의 이유로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떠돈다는.. 그리하여 어떻게도 할 수 없는 복수심에 불타오르기도 하지만 각양각색인 그들의 모습을 그려주었던 그 책을 읽으면서 왠지 모르게 동화되어져가던 나를 느꼈던 기억이 있다. 오드 토머스가 볼 수 있는 것 역시 망자들의 모습이다. 이제는 죽어줘야만 할 사람들 주변에 끝도없이 나타나 서성이는 기괴한 모습들을 보게 된다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일게다. 하지만 동정을 바라는 게 아니라고, 누구에게나 고민은 있고 누구나 자기 고민의 무게가 더 버거운 법이라고 말하는 그의 다부진 말 한마디에 마음을 내려놓는다.

수도원이라는 장소가 배경으로 깔리는 소설을 보면 기가 막히게 어울어지는 善과 惡의 대립을 보게 된다. 이미 善이라는 옷을 입고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善속에서 惡은 잉태되어진다. 아니 교묘하게 善으로 위장한 채 숨어들어와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알아채지 못한다. 그만큼 善이라는 건 어쩌면 허울뿐인 하나의 명제에 불과한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행과 불행처럼 善과 惡 또한 형제이니 그런 설정이 이제는 낯설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당연히 있어야 할 목차도 없이 소설이 시작되어지지만 한고개씩 넘어갈수록 드러나는 惡의 정체를 짐작하기에는 무리가 없다. 인간의 욕심.. 늘 그것이 발단이다. 잘 나가는, 혹은 잘 나가던 사람일수록 자신의 욕심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 채 가장 중요한 인간성, 혹은 사랑을 버린다. 책 속 惡의 화신으로 등장한 존 하이네만 박사 역시 친절하게도 그 절차를 그대로 잘 따라주고 있다. 약혼자의 몸에서 기형의 아이가 태어나고 그것을 부정한 채  죽게 내버려 두라고 무정하게 말하는 그 역시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들의 존재에게 '없었던 자'가 되어버렸다.  그가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은 과연 신의 영역이었을까? 아니면 완벽을 꿈꾸며 살아왔던 자신의 내면에 대한 도전이었을까?

책을 읽고 이 글을 쓰면서도 생명체에 대한 생각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생명이 없는 생명체와 진정한 생명이 살아 숨쉬는 생명체에 대하여.. 생명이 없는 생명체의 살아 숨쉬는 생명체에 대한 도전.. 이 순간에 나 역시도 생명이 없는 생명체에 의지하여 또하나의 생명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느낌이 드니 은근슬쩍 소름이 돋는다. 그러다가 또다시 이런 결론을 얻게 된다. 생명이 없는 생명체의 포로가 되어 아주 단단하게 손목을 묶인 채로 끌려가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 대한 일종의 경각심이 필요한 때라고 경고하는 것만 같다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생명이 없는 생명체를 과연 누가 만들었는가를 되묻고 있다.

어찌되었든 재미있다. 점점 오버랩되어져 오는 악의 구도가 폭설에 고립되어진 수도원내에서 죽어버린 수도사의 망령과 만나기도 하고 죽은 수도사의 사라진 시신을 찾아내는 오드 토머스의 숨찬 시간들.. 이 책속에는 어린 시절에 만났던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또다른 변형이 숨어 있다. 그리고 영원을 향해 달려가고 싶어하는 인간의 삐뚤어진 욕망이 질퍽거린다. 그리고 현실은 늘 냉정하다.. /아이비생각


과거를 구원할 수는 없다. 과거에 있었던 일과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 현재를 낳는 법이다.
슬픔을 알고 싶다면 시간의 강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슬픔은 현재를 먹고 살며 주야장천 우리와 험께 살아가겠다고 우긴다.
시간과 시간의 무게를 정복하는 건 오로지 시간뿐이다.
시간의 전에도 시간의 후에도 슬픔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위안은 그것뿐이다. (162쪽-163쪽)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빛만 보려하고 보이지 않는 본원의 빛은 무시해버리는 세계에서,
우리는 밤이라는 이름의 일상적인 어둠을 만나고,
이따금 죽음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어둠과도 맞닥뜨린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
하지만 하루 24시간 언제나 함께하는 세 번째의 어둠은 바로 우리 마음의 어둠이다.
편견과 아집과 증오.
우리는 안타깝게도 그 어둠을 우리 안으로 불러들여 너그러이 대접하고 있다. (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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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도미노 경제학
가도쿠라 다카시 지음, 박선영 옮김, 정우열 그림 / 예문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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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라는 말만 들어도 딱딱한 느낌을 주는 탓에, 아니 어쩌면 내가 경제를 모른다는 이유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책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책장을 넘기면서 나의 생각들이 기우였음을 바로 알게 되었다. 어렵다는 경제용어들을 제쳐두고서도 이렇게 쉽고 간결하게 경제학을 설명할 수도 있는거였구나 싶었다. 매스컴을 통해 자주 듣고 자주 보아오던 어려운 용어들이 너무도 쉽게 다가왔다. 그동안 궁금했었던 것들을 이해하기 쉽게 풀이해주는 저자의 마음 씀씀이가 느껴졌다.

13억이라는 어마어마한 크기를 가진 중국인들이 커피를 마시기 시작하면서 세계의 커피시장에 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말이나 홍차를 주로 수출했던 인도나 후추산업이 주를 이루었던 베트남에서조차 커피산업을 주력상품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말에 이미 커질데로 커져버린 공룡 중국의 모습이, 그것도 바로 우리의 머리위에 자리한 중국의 그림자를 생각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스타벅스를 예로 들어 설명해주었던 경제의 한단면을 보면서 커피하나만으로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파급효과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커피 경제학)

스시... 일본의 초밥이다. 나 역시도 간결하고 깔끔한 맛에 초밥을 좋아한다. 그 스시가 미국과 유럽시장을 평정하고  브릭스에도 상륙하면서 전세계적으로 참치나 장어등의 어획량이 감소하고 있다는 말은 정말 놀라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얼하고 있었나 싶기도 하다. 세계시장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한국만의 독특한 음식이 없었을까? 김치마져도 기무치로 탈바꿈되어지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던 탓에 도대체 우리의 정부에서는 뭘 믿고 그렇게 손을 놓고 있는지 퍽이나 궁금하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런 식품이 있다없다가 아니라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시처럼 세계시장속에 파고들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스시 경제학)

지금 현재도 기름값이 올라 주차장에 세워둔 차들이 많을 것이다. 원유를 자원으로 둔 나라들에 의하여 오일값이 들먹거린다는 말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그건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중국과 인도가 치열하게 유전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는 말에는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과연 우리는 얼만큼이나 원유를 비축해두고 있을까?  선진국 대열에 끼어들었다는 우리 나라가 세계경제가 콧물만 흘려도 우리는 몸살을 앓는 현실을 언제까지나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싶었다. (오일 경제학)

툭하면 들먹거리는 원유가에 대항할 만한 자원으로 천연가스를 들 수 있다고 한다. 바이오 연료라는 말은 내게는 좀 생소하게 들리지만 나름대로 받아들이기에는 그리 어렵지 않았던 것 같다.  각 나라의 경제가 자원으로 인한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 지금 차세대의 자원을 가진 나라마다 미래에 대비하여 준비중이라는 말은 얼만큼이나 발빠르게 움직여주느냐에 따라  그 나라가 살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바이오 경제학)

중국인들과 터키인들이 금에 투자를 하고 있다고 한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한 까닭에 각 나라의 발빠른 기업들은 벌써 그 자원을 가진 나라들과 손을 잡고 있단다. 문득 몇년전 금모으기 운동을 하던 때가 떠오른다. 장롱속에 깊숙히 감춰두었던 금이나 아이들의 돍잔치에 받았던 작은 금반지까지 모아지던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금이라는 게 투자 목적보다는 소장하기 위한 것이 더 크다고는 하지만 유사시에는 그것처럼 도움이 되는 것도 없기에 귀금속의 수요는 꾸준하거나 더 많아지거나 할거라는 생각이 든다. 굳이 신흥경제국을 말하지 않더라도 당장 우리 역시 재테크의 수단으로 여기니 말이다. (귀금속 경제학)

그외에도 세계화의 중심이 되어가는 나라에들에 대한 이머징마켓 경제학이라거나 환경문제로 이어지는 에코 경제학 또한 나의 눈과 가슴속에 뜨거운 느낌을 전해주었다. 브릭스(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등 신흥경제4국을 일컫는 경제용어) 라거나 그 브릭스의 시대를 넘어 이제는 비스타(베트남,인도네시아,남아프리카,터키,아르헨티나 5개국의 머리글자를 연결한 조어.. '조망','전망'이라는 의미를 가진 영어 단어 VISTE도 동시에 뜻함) 의 시대를 예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 속할까? 브릭스도 아니고 비스타도 아닌 어정쩡한 상황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선진국의 대열에 올랐다고는 하지만 굳이 선진국이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찜찜한 생각도 들고 그렇다고 후진국인것 같지도 않다. 그런 상황인데도 우리는 너무 안이하게 팔짱만 끼고 있는 것 같아 앞으로에 대한 불안감만 더 커져버린 듯 하다. 

편리함과 신속함만을 추구하는 게 그리 좋은 일만은 아니다.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사용하고 거리낌없이 버리는 나무젓가락으로 인하여 중국의 사막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지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봄마다 일어나는 황사현상에 대해 원망할 수도 없는 일이다. 오래전에 물전쟁에 관한 영화도 있었지만 가속도가 붙은 물부족현상이 내일의 일만은 아닐것이다. 지금 현재도 우리는 물을 사먹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물쓰듯 한다는 말이 무색하다. 환경에 대한 경고는 이미 오래전에 있었지만 설마하는 마음으로 지금의 상황을 초래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역시도 지구의 허파라는 아마존은 파헤져지고 있을 것이다. 아마존이 사라지면 지구도 숨을 멈출거라는 말이 공연히 나온 말은 아닐것인데도 우리는 좀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또다시 그 경고를 무시하고 있는 것 같다. 환경을 위하여 많은 조약을 맺기도 하고 제제를 가하기도 한다지만 파괴되어지는 환경의 속도에 비하면 정말 턱도 없다.  진화라는 것은 단순히 자신에게 맞게 변화하는 것일뿐이라던 말이 떠오른다.

주부인 내가 느끼는 것은 가장 가까운 시장바구니 경제가 아닐까 싶은데 이 책은 바로 우리가 체감으로 느낄 수 있는 거리에서부터 경제학을 펼쳐주고 있어 이해하기가 더 편했다. 나무젓가락 하나로 인하여, 기름값이 조금 더 올랐다고 하여 우리의 생활필수품들이 가격이 오른다. 없어서는 안될 생활필수품들의 가격이 인상되면 결국 그 책임은 고스란히 우리의 몫이다. 부유층과 신흥부유층이 늘어날수록 빈부의 격차는 커질 것이다. 힘겨운 사람은 늘 힘겹게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말도 될 것이다. 귀에 자주 들었던 말, 그리고 우리가 늘 곁에 두고서 가볍게 생각했었던 것들을 예로 들어준 경제학을 듣다보니 책속의 말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며 끌려나오는 경제의 비밀이 하나씩 풀려가는 느낌을 전해받을 수 있었다. 세계경제가 우리네의 일상까지 파고들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았다. 아하, 그런거였구나! 싶은 생각에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했다. 군데군데 징검다리처럼 놓아둔 도표나 일러스트는 이 책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아쉬운 것은 왜 우리에게는 이런 책을 내는 사람이 없을까였다. 저자가 일본사람이었다는 건 정말 씁쓸했지만 바로 곁에 있는 나라였던 탓에 마치도 우리의 경제학처럼 느껴졌던 것은 다행이었다. 굳이 경제학 이론이라고 하기보다는 하나의 상식처럼 거부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어서 좋았던 시간이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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