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 제19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문미순 지음 / 나무옆의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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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이다. 벌써 19권의 책이 발행되었다는 말이다. 그 중에서 몇 권이나 읽었을까? 몇 권을 읽었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세계문학상이라는 포장지는 화려하지 않아서 좋다. 그래서 읽은 책이다. 이번에는 또 어떤 주제를 다루고 있을까? 이번에는 또 얼만큼의 몰입도를 불러 올 수 있을까? 은근 기대가 되었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단면을 아주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웃음기 싹 빼고 이런 얘기를 한다면 짜증스러웠을지도 모르지만 간간히 웃음을 머금게도 하니 지루할 틈없이 단숨에 읽게 된다. 빠르게 변해가는 사회.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고령화사회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준비되어 있을까? 이 책은 아무런 준비없이 고령화사회를 받아들이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읽고나면 입맛이 씁쓸해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도?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젊은이가 되었든 늙은이가 되었든 어차피 모두가 겪어내야 할 일이지만 발등에 떨어진 불을 남의 일 보듯 하는 나라의 허울이 분노를 불러올지도 모른다. 법보다 주먹이 앞서는 세상은 되지 말아야 하는데...

치매를 앓던 엄마가 죽었다. 온전치 못한 몸과 궁핍한 생활은 딸에게 죽은 엄마의 연금이 필요했다. 사망 신고를 하지 않은 채 미라가 되어버린 엄마와 함께 사는 딸. 그녀도 산업 현장에서 재해를 당했으나 법은 그녀를 끝까지 보호해주지 않았다. 매달 엄마의 통장으로 들어오던 100만원 남짓한 돈은 이혼했고, 일이 없었던 딸에게는 생명줄이었다. 중년의 그녀를 찾아주는 일은 없었다. 방향제를 사고, 에어컨을 사고, 이웃과의 소통은 끊어지고. "엄마, 나 천만원만 해 줘!" 업친데 덮친 격으로 철없는 딸아이의 협박까지 받게 된다. 701호에 사는 공명주의 삶은 눈물겹다.

하나, 둘, 하나, 둘. 조금이라도 좋아질까 하여 병든 아버지를 부축해가며 운동을 시키는 청년도 있다. 뇌졸중 아버지를 돌보며 대리기사를 뛰고 있는 준성. 그런 아들의 마음도 모르고 아버지는 몰래 술을 마신다. 경찰서에 불려가 술에 취한 아버지를 데리고 오면서 아들은 몇 번이나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다. 결국 쓰러진 아버지는 중환자실에 입원해야 할 처지가 되지만 입원비와 간병비를 감당할 수 없었던 아들은 아버지를 집으로 모셔온다. 그리고 목욕을 시키려다 그만 일이 터져 버렸다. 넘어진 아버지의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면서 죄책감으로 오열하던 준성에게 701호의 아줌마가 찾아온다.

돌봄의 무게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해한다고, 공감한다고 감히 말하지 말라. 자신을 돌볼 시간을 말한다는 것 만으로도 사치다. 명주와 준성이 그랬다. 한 사람은 50대의 중년이었고 또 한 사람은 20대의 청년이었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었던 세상 천지에 홀로 내몰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부모의 죽음을 은폐했고, 사망 선고를 유예시켰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막다른 길에서 그들이 선택해야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어떤 선택을 했던 그들에게 손가락질 할 자신이 없다. 따뜻하고도 잔혹한 이야기라고 책의 소개글에 써있지만 이게 정말 따뜻한 이야기일까? 서울의 임대 아파트를 떠나 증평 시골집으로 이사가는 결말은 아름답다고, 끔찍한 현실에서도 희망을 보여준 작품이라고 또 책의 소개글에 써 있는 걸 보게 된다. 심사위원의 말이 껄끄럽게 들리는 건 왜일까? 불현듯 희망고문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국가가 해주지 못하는 일을 국민이 스스로 해결한다는 내용을 희망이라고 보았다면 그들은 아직 여유있는 사람들이다. 현실은 냉혹하다. 그리고 현실은 힘겨운 사람에게 내일을 꿈꿀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 비관적이라고 말하겠는가? 이 이야기는 소설이 아니라 지금 대한민국에 닥친 현실이다. 그나마 희망이라면 준성이 자신의 꿈을 지켜주고자 했던 이웃 명주를 만난 것일 것이다. 책을 덮으면서 살짝 소름이 돋았다. 주변을 향한 작가의 예리한 시선이 느껴져서.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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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어 : 삶의 의미
박상우 지음 / 스토리코스모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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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가르침 중에는 위험한 세뇌들이 많다. 무조건적으로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우러나는 것들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인생의 시작도 끝도 모두 ‘나’와 결부되지만 그 ‘나’라는 것이 헛것, 다시 말해 일종의 망상이라는 게 이제는 확연한 진실이 되었다. 수천 년 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깊은 가르침이 21세기에 이르러 과학과 접목되는 놀라운 진경을 목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여러 군데에서 반복적으로 ‘나’를 문제 삼고 있고 그것을 문제 해결의 유일무이한 방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있다’는 가르침은 사실 석가모니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그것이 21세기의 과학자들에 의해 낱낱이 밝혀지는 장면은 참으로 진경이 아닐 수 없다. - 작가의 말 -

책의 제목이 선뜻 눈에 들어왔고 그 다음은 책표지 뒷면에서 읽을 수 있었던 작가의 말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까닭에 일부러 찾아보지는 않는 에세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책에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에세이의 특성상 개인의 사적인 감정들이 많이 보일거라 짐작했지만 다분히 현실적인 언어들이 책속에 담겨 있었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어쩌면 우리가 외면했거나 외면하고 싶어했던 주제가 아니었을까?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지 못하는 낡고 오래된 가르침과 세뇌들에 파묻혀버린 것들이란 말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평행우주, 자아, 시련, 생명, 기도, 사랑, 집중, 약속, 명상, 인연, 행복, 말(언어), 친절, 돈, 맛, 명작, 교양, 학문, 관상, 청춘, 중년, 인생, 노년 등등의 문제들. 작가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을 이제는 우리도 외면하면 안될 그런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빨간 밑줄이 그어지던 문장이 많았다. 그만큼 공감을 할 수 있었다는 말일까? 어쨌거나 저자가 제기한 문제점들은 이미 우리 사회의 빨간불이 분명해 보인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저자의 질문과 대답은 명쾌하다. 철학부터 과학까지 모든 분야에 걸친 저자의 사색이 담겨 있다. 문학을 다룬 부분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안타깝게도 세계문학의 한국 이식은 일제 강점기에 맥이 닿아 있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교양과는 별개라고. 그러면서 저자는 책을 읽는 관점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진정 좋은 책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과 인생의 문제를 생각하게 만들고, 그것을 타자들과 나눌 수 있는 대화의 장을 마련해 준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명작의 조건이다. 그러므로 화려한 장정, 넘쳐나는 홍보물, 과장된 추천사와는 별개로 좋은 책을 찾고자 하는 독자적인 탐사 과정을 꾸준히 지속해야 한다.(-132쪽) 또한 외모지상주의에 찌들어가는 21세기의 현대인들에게 저자는 일갈한다. 폼 나게 그랜저를 타고 가다가 논두렁에 쑤셔 박히는 인생보다 티코를 타고도 고속도로를 질주할 수 있다는 걸 발견함으로써 자기 인생의 가치와 의미, 보람과 기뿜을 얼마든지 만끽할 수 있다고.(-156쪽) 프랑스의 지성 자크 아탈리는 30억 명 이상의 인류가 일상적으로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는 놀라운 미래 사회를 예견했다는데 그의 저서 『호모 노마드(L'homme nomade)』를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인류의 정체성을 호모 노마드, 즉 '유목하는 인간'이라고 풀어냈다는 저자의 말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아이비생각

요컨대 모든 우주론은 증명 불가능한 가설일 뿐이라는 얘기다. (-15쪽)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참 많은 계(界)가 존재한다. 사람이 만들어놓은 경계가 무수한 계를 낳아 동물계, 식물계, 인간계가 확연히 구분된다. - 계와 계가 경계를 만들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갈등과 쟁투가 끊이지 않는다. 사람은 모두 자신이 속한 계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계가 서로 맞물려 에너지 연동이 일어나고 있으나 오직 자신이 속한 계만 존재하는 듯히 행동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속한 계만 앞세우면 드넓은 세상과의 소통과 화합에 근원적인 한계를 노출한다. (-20쪽)

날마다 기도하면서 기도하는 걸 숨겨야 하는 이중성, 이것이 디지털 문명을 살아가는 21세기 현대인의 한계인 동시에 비극이다. 인류가 사라지지 않는 한 기도도 사라지지 않을 터이니 이제는 그것을 더 이상 기도비닉企圖秘匿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 기도는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평범하고 나약한 모든 인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52쪽)

21세기는 디지털 노마드의 시대이다.(-83쪽)

21세기는 무절제한 과잉 인연의 시대이다. 옛날에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지만 이제는 손가락만 움직여도 인연이 맺어지는 소셜 네트워크 시대이기 때문이다. 무제한적인 연결로 인연의 개념이 희박해지고 그것으로 인해 인연의 중요성 또한 인지하지 못한다. 사람의 소중함을 간과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손가락으로 만나니 헤어지는 것도 손가락으로 '삭제'하면 그만.(-90쪽)

행복해지고 싶다는 욕구는 지금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조건으로부터 해방되고 싶다는 심리적 상태를 반영한다.(-93쪽)

21세기, 우리가 살아가는 SNS 감옥은 팡세 시대의 비유가 무차별하게 팽창하고 또한 극대화된 세상이다. 날마다 무차별하게 처형하고 또한 처형당한다. 프랑스혁명 당시 날이면 날마다 무수한 사람들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막스 밀리앙 로베스 피에르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아이러니가 온 세상에 만연한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97쪽)

생각은 길게, 말은 짧게 하라는 말이 있다. 부질없는말, 장황한 말을 경계하는 말이다. 요점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은 말, 맥락을 잃은 말을 한정 없이 늘어놓는 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KISS 화법'을 중시한다. 'Keep it short & simple'. - 좋은 말보다 말장난이 횡행하는 시대, 진지함과 집중력을 상실하게 만든다는 걸 간과해서는 안된다. 말이 곧 사람이다.(-106쪽)

"아무리 튜닝을 해도 티코가 그랜저가 되는 건 아닙니다." (-1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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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워 모티브와 소품 - 일 년 내내 즐길 수 있는 코바늘뜨기
애플민트 지음, 구연경 옮김, 조수연 감수 / 참돌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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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코바늘뜨기는 일 년 내내 즐길 수 있다. 실과 바늘만 있으면 되니 장소와 시간에도 구애받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취미중의 하나다. 어릴 때 겨울이면 엄마가 털실로 떠주시던 옷을 입었었다. 아마 그 때 엄마에게 대바늘뜨기를 처음 배우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이리저리 모양을 내며 뜨는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그러다가 언니 결혼할 때 코바늘로 레이스를 떠서 선물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대바늘뜨기나 코바늘뜨기로 좀 더 멋진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도안이 필요하다. 기초뜨기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르겠지만 뭐든 시작하고나면 좀 더 색다른 걸 해보고 싶어하는 게 사람 마음이 아닐까 싶어 하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도안은 45가지나 된다. 보여주는 작품들마다 화사하다. 사계절의 꽃을 주제로 했으니 오죽 할까. 뜨기의 고수들이라면 모를까 입체적으로 꽃을 뜬다는 게 그리 쉽진 않다. 실의 종류나 바늘에 따라, 혹은 뜨는 사람의 손땀에 따라 작품의 맛이 달라지기도 한다. 소개되어진 작품들을 보면서 눈호강을 했다. 말미에 처음 코바늘 뜨기를 배우는 사람을 위해 도안을 보는 방법이나 첫 코를 만드는 방법등도 세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책에 실린 소품들을 보면 누구나 한번쯤 도전하고 싶어질 것 같다. 너무 예쁘니까. 요즘 튤립뜨기를 많이 뜬다길래 도안을 찾아서 떠보았다. 작은 꽃송이들이 한줄로 늘어선 모양이 귀엽다. 뜨개질로 만든 작품은 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마법이 있다. 예쁜 작품이라면 더 말 할 필요도 없다. 간단해 보여도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는 게 뜨개질인 까닭이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조금은 귀찮은 마음에 모양내서 뜨는 것보다 기초뜨기만 사용하는 것이 더 편하기는 하다. 기초뜨기라해도 도안만 있으면 실의 색을 바꿔가며 그림을 그릴 수 있어 색다른 느낌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서 그동안 욕심났던 플라워 모티브를 한번 떠보기로 했다. 모티브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으니 가볍게 뜰 수 있을 것 같아서. 45가지나 되는 꽃을 다 뜰 수 있다면 좋겠지만 실력이 모자라니 큰 욕심은 내지 않기로 한다. 29쪽에 나와 있는 시네라리아라는 작품이 시선을 끈다. 그걸 뜨고 나면 가장 먼저 소개하고 있는 아이리시 로즈 납작 주머니를 하나 만들어야겠다. 파우치로 쓰면 딱 좋을 것 같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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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로 떠나는 힐링여행 : 덕수궁 인문여행 시리즈 10
이향우 글.그림, 나각순 감수 / 인문산책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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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궁궐로 떠나는 힐링 여행이라는 책의 제목에 공감한다. 먼 길 떠나는 여행은 아닐지라도 고궁의 담장을 따라 조용히 걷다보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낄 수 있으니 힐링이라는 말이다. 마음에 어떤 녀석들이 들어와 시끄럽게 떠들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버스나 지하철을 탄다. 그리고 가는 곳이 박물관이나 고궁이다. 개인적으로는 창경궁을 가장 좋아하고 두번째로 좋아하는 곳이 경복궁과 덕수궁이다. 창덕궁은 왜 빠졌냐고 묻지 마시라. 경희궁은 너무 한적해서 혼자 가기엔 좀 그렇고. 특별히 사랑하는 곳이 있다면 운현궁이다. 쪽마루에 앉아 쏟아지는 햇살을 느끼고 있노라면 마음속의 시끄러운 것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처마의 곡선을 바라보며 참 좋다, 라고 중얼거리게 된다. 궁궐을 자주 찾다보면 늘 아쉬운 느낌이 드는 곳이 있다. 바로 동십자각이다. 홀로 섬처럼 떨어져 있는 동십자각은 사실 경복궁의 망루였다. 담장과 연결해 주는 것이 마땅함에도 동십자각은 여전히 외롭게 서 있다. 덕수궁의 대한문도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이 책의 54쪽에서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914년 숭례문에서 광화문까지 일직선의 도로가 뚫리면서 덕수궁의 담장을 뚫고 지나가니 대한문만 홀로 생뚱맞게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되면 또 한번 아쉬움에 한숨을 내쉰다. 경운궁 시절의 모습을 제대로 간직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그것을 잃은 것은 서울이라는 도시의 불행이다.

덕수궁은 접근성이 좋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찾아가는 이가 그리 많지는 않은 듯 하다. 꽃피는 계절이나 특별 관람을 하는 시기가 아니라면 대부분 근처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오후에 잠깐의 쉼을 얻는 곳으로 쓰임새가 더 많아 보인다. 한동안 덕수궁이냐, 경운궁이냐 이름을 두고 왈가왈부 말이 많더니 결론이 났나? 뭐 어느 쪽이 되었든 궁궐이 가진 의미만 제대로 안다면 굳이? 덕수궁도 경운궁도 그 이름이 안고 있는 역사가 있으니 무엇이 맞다 그르다 목소리 키울 일은 아닌 듯해서 하는 말이다. 덕수궁을 잘 아는 사람이라 해도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많아 보인다. 많은 사진이 실려 있기도 하지만 직접 그림을 그려 세세하게 설명해 주는 부분에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저자의 말처럼 덕수궁으로 들어가기 전 건너편에 있는 환구단 터를 둘러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대한제국 시기까지도 경운궁은 상당히 넓었다. 돌담길을 따라 걷게 되는 정동 일대까지 경운궁의 영역이었지만 1904년 함녕전에서 시작된 화재로 인해 많은 것을 잃었다. 일제강점기의 일이다. 돌아보면 우리에게는 아픈 역사가 참 많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역사는 사라지지 않을테지만. 갑자기 석어당이 보고싶다. 昔御堂... 선조가 주로 사용하였다고 하여 '옛날 임금의 집' 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광해군이 인목대비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곳이기도 하다. 석어당은 단청을 하지 않아 더 살가운 느낌을 전해받는 곳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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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있었다 - 경제학이 외면한 인류 번영의 중대 변수, 페미니즘
빅토리아 베이트먼 지음, 전혜란 옮김 / 선순환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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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이분법적인 논리에 휘둘리는 것 같다. 어쩌면 남보다는 나를 먼저 내세우고 싶은 심리가 깔려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작금의 사회가 자꾸만 그렇게 만들어가고 있다. 개성을 이야기하면서 몰개성의 시대를 살게 하고, 각자의 그림을 그리라고 말하면서 같은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안될 것처럼 몰아가고 있다. 서글픈 일이다.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는 식의 사고는 위험하다. 신냉전의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말들하는 요즘 이 책을 보게 된 건 우연이 아니다. 페미니즘이라는 말의 정의에 대해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한다고 느끼던 참인 까닭이다. 관심도 없던 단어가 시선을 끌었던 이유는 페미니즘의 정의가 너무 좁게 해석되는 건 아닌가 싶어서였다. 단순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혹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 줄을 긋는 일이 그 목적은 아닐 것이기에. 궁금했던 주제였다.

학자로서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틀어박혀 글을 쓴다는 저자는 영국 출신의 페미니스트 경제학자이며 케임브리지대학교의 경제학 연구원이자 교수다. 일상에서 여성의 신체를 금기시하는 현상에 저항하기 위해 여러 차례 나체 시위를 벌였다는 말도 보인다. 그녀가 원한 것은 성에 대한 경제학의 근본적인 태도 변화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다는 말은 씁쓸하다. 지구환경에 관심 있는 사람들과 과학자, 학자들이 모여 만든 프로젝트에서 80가지 지구온난화 해결책을 제시했는데 가족계획과 여성 교육이 10위를 차지했다는 말은 놀랍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는 경제의 내면에 여성이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었다는 말일 터다. 이미 1869년 존 스튜어트 밀은 여성 억압이 인류 발전을 방해하는 주요 요인 중 하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발언에 귀 기울이는 경제학자는 없었다는 점이다. 근래에 우리도 여성의 가사노동이 무급노동에서 유급노동으로 바뀌었다. 근로기준법 제정 이후 무려 68년만의 쾌거라고 한다. 진즉에 그랬어야 했다. 일상생활 자체가 경제인데 그 경제의 밑바탕에는 항상 여성이 있었다. 힘든 시절에 가정과 가족을 책임졌던 엄마가 있었고 누나가 있었다. 여성이 돌봄을 도맡는 불평등한 현실은 19세기에 생겨난 '가정성 이념' 때문이다. 가정이 평등하지 않은 한 시장도 평등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시장이 평등하지 않은 한 가정도 평등할 수 없다. 가정과 시장은 서로 상호작용한다. 여성의 신체 자율권을 폭넓게 보장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불평등의 해결책도 보일 것이다.(-130쪽) 그러면서 저자는 성과 여성의 신체를 향한 기존의 사회적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몸으로 일을 하는 여성과 두뇌로 일을 하는 여성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도 어쩌면 고정관념에서 온 것일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정의 혹은 규칙이나 규범에 대해 세뇌 당하며 자란다. 그것을 교육이라고 말하면서. 이 책은 단지 여성 그 자체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역사와 함께 했던 여성의 존재감을 말하고 있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목소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는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성에게 불리한 법, 규정 및 제도에 녹아 있는 사회규범과 싸울 수 밖에 없다고. 또한 집단 간의 이익 상충으로 발생할지 모르는 갈등도 생각해야 한다고.(-186쪽) 기나긴 역사와 학문에서 여성은 소외당했다는 말에 공감한다. 정치가 억압하고 사회가 차별했다는 말에도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강하게 말하고 있다. 그때, 그곳에 항상 우리가 있었다. 결핍과 폭력, 차별과 모멸을 끝내 견디고 우리가 있었다...고.

'방 안의 코끼리'... 책을 읽으면서 이 말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 누구도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는 크고 무거운 문제를 비유하는 말이다. 머리속에 그림을 그려보라, 방 안에 그 커다란 코끼리가 있는 것을! 페미니즘도 그렇겠지만 플라스틱 문제도 그렇고, 미래의 먹거리 문제도 그렇고 작금의 우리가 방 안에서 키우고 있는 코끼리는 한두마리가 아닐 것이다. 방 안에 코끼리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모두가 눈치만 살피고 있다. 그것으로 인해 엄청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이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걸 인정했을 때 감내해야 할 것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모른 척 할 수 만은 없는 일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참 꼼꼼히도 읽었다. 이 책을 통해 페미니즘이란 말을 다시 한 번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어느 특정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여성을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남성과 여성 사이에 줄을 긋는 것이 페미니즘은 아니라고.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남긴 말이라 한다. 서문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회는 독립적이고 당당한 여성들을 위협적인 존재로 느낀다. 사회는 자신을 대변하고, 목소리를 내고, 스스로 선택하는 여성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역사를 통틀어 전염병이 돌아도, 지진이 발생해도, 전쟁이 벌어져도, 기근이 들어도 이는 모두 여성들의 탓으로 돌렸다. 여성을 '통제하에 두려는' 가부장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가부장제를 이용해 여성의 독립을 막고, 목소리를 제한하고, 자신감을 떨어뜨리는 건 바로 여성들이 강하기 때문이다.(-26쪽) 이렇게 자신있게 한 말들에 대한 근거를 이 책이 제시하고 있다. 어쩌면 이 책을 통해 또다른 역사의 뒷면을 보게 될 지도 모른다. 책 표지의 말이 시선을 끈다. 경제학이 외면한 인류 번영의 중대 변수, 페미니즘...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경제학자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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