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은 어떻게 신화가 되는가
황교익 지음 / 지식너머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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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전체 먹을거리로 보면 100% 자급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 에너지 기준으로 보면 현재의 자급률은 40%대이다. 외국에서 먹을거리를 안 가져오면 60%의 한국인은 굵어 죽어야 한다. 농업 빈국이다. 한반도의 자연환경에서는 유기농은 생산성을 확보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한반도에서 유기농을 고집하는 것은 오히려 정의롭지 못하며 비윤리적일 수 있다.(-58쪽) 비타민이니 미네랄을 만병통치약이나 되는 듯이 떠든다. 대중이 원하는 딱 그 수준의 말을 해야 지위와 명예, 돈을 얻는다는 것을 '배웠다는 그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71쪽) 음식물 쓰레기가 엄청나게 넘쳐나는 세상에서 우리의 식량자급률이 40%대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외국에서 먹을거리를 가져오지 않으면 열명중 여섯명이 굶어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결국 이 나라의 현실을 부정하면서까지 버려지는 식생활의 형태는 계속될 것이다. 게다가 작금의 현대인들은 왜 그리도 건강식품에 연연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TV만 켜면 나오는 수많은 홈쇼핑에서 무엇이 어디에 좋다고 하면 즉시 마트에 그 식품이 깔리고 너도나도 그것을 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해도 자신에게 맞아야 한다. 그러나 지속성이란 명제가 자동으로 따라온다는 걸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게 잠깐 머물다가는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져버리고 이내 또다른 건강식품이 홈쇼핑 채널의 화면을 다시 채운다. 유기농도 그렇다. 우리의 현실적인 상황에서 과연 제대로 된 유기농이 가능하기는 할까? 늘 그런 생각이었는데 이 책을 읽으니 속이 다 후련해진다. 누군가는 입바른 소리를 해야하는 까닭이다. 무엇이 되었든 즐겁고 맛있게 먹으면 그게 보약이다. 그게 내 지론이다. 남들은 100년이상이 걸려 이루었다는 산업화를 우리는 30년만에 이루어 한강의 기적으로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작금의 우리 삶의 형태는 뭔가 아쉽고 안타까운 점이 너무나도 많다.

육류업체들은 한국인의 삼겹살 선호를 앞으로도 계속 부추길 것이다. 한국인이 삼겹살에 이미 입맛을 깊이 들인 것이 그 첫째 이유이고, 마진 좋은 수입 삼겹살로 돈을 벌 기회가 육류업체들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 넉넉하게 주어지는 음식을 맛있다고 여기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넉넉함의 기준은 자본이 결정하게 되어 있다. (-83쪽) 육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입장에서 보더라도 상당히 부아가 치미는 말이다. 우리가 삼겹살을 먹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좋은 부위는 수출하고 그들이 가져가지 않는 맛없는 부위를 국내에서 소비해야 했기때문이었다는 것은. 그것뿐이라면 그래도 나을텐테 우리가 먹어치우는 삼겹살이 부족해서 다른 나라에서 수입까지 한다고 한다. 그러니 저런 말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익을 앞에두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자본주의사회라는 건 이미 정해진 사실이다. 맛없는 고기를 맛있게 먹기 위해서 쌈이 필요했고, 그 삼겹살은 우리의 문화가 되었다. 이미 알고 있는 부대찌개나 내장탕의 유래와 다르지 않다. 서글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그 편집된 기억을 두고 개인의 것은 추억이라 하고 집단의 것은 역사라고 한다. 추억이나 역사란 것은 과거에 있었던 사실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 현재 우리의 욕망이 실현될 수 있게끔 과거의 일을 가져와 스토리를 붙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156쪽) 인간의 뇌는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는 말이 있다. 결국 기억이라는 것은 편집된다. 그리고 한번 믿은 것은 웬만해서는 바꾸려들지 않는다는 우리의 뇌처럼 속이기 쉬운 건 없어 보인다. 어쩌면 그래서 많은 것이 '스토리텔링'이라는 옷을 입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산업화와 도시화가 완료되어 가던 때, 농부들이 도시로 와 공장의 노동자가 되었다. 현대적인 삶에 지친 그들이 고향의 맛을 그리워했고 이에 맞춰 언론은 거기에 맞춘 프로그램과 기사를 내 보냈다. 그 욕구가 과해져서 음식 역사의 조작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스토리텔링이다. 영광 법성포 굴비, 강릉 초당두부, 의령의 망개떡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한다. 굴비란 '등이 굽은 조기'라는 뜻이다. 조기를 짚으로 엮어 매달면 구부러지게 되는데 그 모양새를 보고 구비조기라고 하였다는 말이다. 한국전쟁 후 전쟁통에 남자를 잃은 집안의 여자들이 호구지책으로 두부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초당두부의 시작이다. 그런데 왜 나는 당시의 사대부가 두부만드는 일을 했다는 말을 왜 의심하지 못했을까? 그 발상부터가 무리였던 이야기를 바보처럼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니! 망개떡의 시작은 일본의 카시와모찌였다. 일제강점기에 이 떡이 우리 땅에 들어왔고, 그 흔적은 많은 곳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향토음식의 유래와 역사는 대부분 이런 식으로 조작되었다. 서글픈 것은 그 조작의 주체가 중앙 또는 지방의 정부라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향토음식은 1980년대 '개발품'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그 스토리텔링으로 인해 우리의 역사마져 조작된다는 사실이다. 관료주의적 형태가 작금의 우리에게 얼마나 맞지않는 옷인지를 다시한번 깨닫게 된다. 거짓은 진짜인듯 보여지게 포장되어져 당당하게 우리앞에 선다. 정부의 힘을 믿고. 학창시절에 혼분식장려가 있었다. 있는 집 자식들은 도시락의 쌀밥 위에 살짝 보리밥을 얹어 쌀밥을 가리곤 했었는데 선생님은 그걸 또 헤집어 잡아내곤 했던 기억이 난다. 너도나도 가난했던 시대의 일이다. 그런데 그 시기에 밥그릇의 크기를 정부에서 규정하고 그것을 어기면 행정적인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 국민의 밥량을 줄여서라도 쌀 자급률을 늘리고자 했던 정부의 모양새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그렇게해서라도 뭔가 이룩했다는 성과를 보여주고 싶어했던 슬픈 역사의 단면이기도 하다.

책을 통해 너무나도 많은 것이 일제강점기를 거쳐 변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임진왜란 후 도망갔던 관료층들에 의해 허울뿐인 제사의례가 생겨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지금과 같은 상차림이 나오게 된 것은 길게는 가정의례준칙 같은 게 나온 일제강점기이고, 짧게는 한국전쟁 이후 가정생활백과나 가례집 등이 보급되면서부터의 일이라고 한다. 사실 저자의 말처럼 유교사회에서는 양반이외의 사람들은 조상에게 예를 올릴 수 없었다. 상것이었기 때문에. 그러다가 조선중기에 군역을 피하기 위해 족보를 샀거나, 구한말 신분제도가 사라지면서 모두 양반이라 주장하게 되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며 남을 따라하던 의례가 점점 구체화되면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제사의례가 되었다는 말이다. 게다가 지금도 정부에서 명절상차림에 드는 비용을 이야기하며 알게모르게 국민을 통치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말에 어떻게 공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책의 말미에 이런 글이 보인다. 다 읽었으면 이 책은 되도록 멀리 두라고. 괜히 읽었다 싶을 정도로 기분이 상했을거라고. 그러나 단언컨대 누군가는 쓴소리도 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항상 듣기 좋은 말만 듣고 살 수는 없다. 항상 보고싶은 것만 보고 살 수는 없다. 그러니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틀린 것은 틀렸다고 지적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은 별로 없는 책이라는 저자의 말과 달리 한국인이기에 도움이 된 내용이 많았다고 얘기하고 싶다. 저자를 알게 된 것은 '알쓸신잡'이라는 TV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꾸밈없이 이야기하던 저자의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어 손을 내민 책이었지만 시원하게 속풀이를 한 듯한 느낌이 든다. 유익한 시간이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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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했고 미워했다 에프 영 어덜트 컬렉션
캐서린 패터슨 지음, 황윤영 옮김 / f(에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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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한구절같기도 하고, 유행가 가사같기도 한 책의 제목. 그리고 묘한 표지그림. 처음엔 심리학이려니 짐작했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루면서 심리적인 면을 말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이 책은 딱 부러지는 성장소설이다. 한 아이가 태어나고 그 아이가 자라면서 겪어가는 삶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성장소설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희망조건까지도 완벽하게 갖추었다. 루이스와 캐롤라인은 쌍둥이로 태어났다. 몇 분 먼저 태어나 언니가 된 루이스는 몇 분 늦게 나왔으나 허약했던 캐롤라인에게 모두의 관심을 빼앗겨버린다. 그녀들이 태어난 곳은 바닷가 작은 섬이었으며 아버지는 어부였다. 그랬기에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필요했다. 이쯤되면 누가 아들 역할을 하게 될 것인지는 뻔하다. 게다가 캐롤라인에게는 아름다운 목소리마저 있었으니 그녀의 노랫소리는 작은 섬마을 사람들을 모두 행복하게 만들었다. 결국 루이스는 아버지 곁에서 묵묵하게 일을 거드는 딸이 되고 그 모든 수고로움의 끝에는 캐롤라인이라는 종착지가 있었다. 그나마 하나뿐이라고 여겼던 친구 콜마저 캐롤라인에게 빼앗겨버리고 만다. 이런 이야기라면 대충 줄거리를 짐작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책은 질투에 사로잡힌 소녀의 모습보다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소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섬을 떠나고 싶었으나 두려움에 떨었던 루이스에게 선장 할아버지는 말했다. 누구도 너에게 이곳에서 희생하라고 말한 사람은 없다고. 가족을 위해 떠날 수 없다는 말은 너의 핑게일뿐이라고.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물어보라고. 그리고 그녀 루이스는 떠났다. 의사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아서. 그녀는 의사가 되었을까?

 

이 책의 짧은 소개글을 읽으면서 심리적인 면을 많이 다룬 책이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었다. 누군가는 희생하고 누군가는 그 희생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가는 형제간의 이야기나, 비교당하면서 지냈던 시절의 아픔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사실 우리 주변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의 끝에는 항상 이런 말이 꼬리처럼 붙게 된다. 내가 누구때문에 이렇게 살아야했는데, 라거나 누가 그렇게 희생하라고 강요했느냐, 라는 식의 꼬리. 그래서 기대했던 것 같다. 누군가의 상처, 누군가의 희생에 대한 치유의 글을. 결국 선장 할아버지의 말처럼 자신에 대해 먼저 생각하는 게 옳은 일일까? 누군가를 위해서, 혹은 누구때문에 라는 말은 핑게에 불과한 것일까? 잘 모르겠다. 엄마와 비슷한 삶의 형태로 살아 가고 있었지만 자신만의 목표를 잊지않는 루이스의 여정을 응원하고 싶어진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기독교적인 분위가가 상당히 강하다. 저자에 대해 찾아보니 성경과 기독교 교육을 전공했으며 일본에서 선교사 활동을 했고 아동청소년문학 작가로 꼽히는 사람이라고 나온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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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미술관 - 그림 속 숨어있는 이야기
문하연 지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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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그림을 잘 모른다. 뭐 그림뿐이겠는가마는. 그러니 아무리 세계적인 예술가의 이름을 들먹여도 공감하지 못한다. 단순히 작가의 이름과 그의 작품만 연결시킬 뿐이다. 그렇다고 전시회나 미술관에 가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이렇다할 해설이 없는 작품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유명한 작가라고해도, 아무리 유명한 작품이라해도 내가 이해할 수 없고 공감할 수 없으면 그것은 그냥 누구의 작품에 머물기 때문이다. 얼마전 <빈센트와 테오>라는 책을 통해 빈센트 반 고흐라는 화가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흐의 작품에서 어떤 것도 느끼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예상치못한 어떤 순간에 한 작가의 이름과 작품이 느닷없이 내 앞에 설 때가 있다. 에곤실레가 그랬고 프리다 칼로가 그랬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들여다 본 그들의 작품이 절절한 아픔으로 다가왔다. 혹은 기괴하다고도 말하고, 혹은 외설적이라 말할 수도 있겠으나 내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뭔가 결핍되어진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내면의 고통을 숨기지 않고 마주볼 수 있었던 그들의 용기가 놀라웠다. 이 책을 통해 그들을 다시 만나니 반가웠다.

 

에곤실레는 그의 그림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인간의 육체에 대한 묘사가 압권이다. 성적인 욕망을 그대로 표현하기도 해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의 짧은 생을 훑어본다면 그의 내면적인 고통, 성에 대한 호기심과 욕망을 그대로 그림에 표현했다는 걸 눈치채게 된다. 그러나 시대가 그렇게 직접적인 표현을 용납하지 못했기에 그는 한때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그림에는 시선을 끄는 묘한 매력이 있다. 프리다 칼로는 내면의 고통을 가감없이 표현한 또한명의 화가다. 18세 때 교통사고로 버스의 기둥이 그녀의 몸을 관통하게 되어 크게 다친 후 30여차례의 수술을 받았지만 그 고통스러운 삶이 어쩌면 그녀의 예술세계를 열어준 문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그녀가 사랑했던 디에고 리베라와의 결혼도 행복하지 못했다. 리베라는 벽면에 프레스코 벽화를 그리며 멕시코 문화운동을 주도하는 유명한 예술가로 프리다 칼로에게 그림을 그리게 만든 원천이기도 했지만 그의 여성편력은 그녀를 힘들게 했다. 프리다 칼로, 그녀는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전시회를 보기 위해 침대에 누운 채 구급차를 타고 그 자리에 참석했다고 한다. 마치 자신의 삶이 다했음을 알기라도 하듯이.

 

15세기~ 17세기 르네상스와 바로크시대를 지나, 19세기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사실주의, 인상주의, 자연주의를 다루었다. 렘브란트, 세잔, 고흐, 수잔 발라동등이 이 시기에 등장한다. 그 다음으로 20세기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야수파, 입체파, 표현주의, 초현실주의를 다루며 루소나 피카소, 에곤 실레, 샤갈, 나혜석, 프리다 칼로등을 등장시켰다. 하나같이 그들에게는 영혼을 불사를 사랑이 있었으며 불완전한 사랑을 통해 예술적인 극치를 선보이게 된다. 단순히 작가와 작품만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그 작가에 대한 이야기와 작품에 대해 친절한 해설을 곁들이고 있다. 마치 그림을 앞에 두고 작품해설을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니 이야기와 작품에 몰입할 수 밖에 없다.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다. 학창시절에 미술을 이런 방식으로 공부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밀려오기도 한다. 이 책을 쓴 저자의 이력도 눈길을 끈다. 미술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면서 그저 미술이 좋아서 그것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 좋아서 미술사에 대한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뭣도 모르면서...'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는 말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어찌되었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을거란 생각이 든다. 이 책을 통해 타마라 드 렘피카라는 화가를 알게 된 것도 행운이다. 그녀의 그림을 찾아보고 선이 확실한 그녀의 그림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녀의 말처럼 어디에서도 자신의 작품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그림임이 분명해보인다. 자신감 넘치는 그녀의 그림들은 다분히 매혹적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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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엄청나게 가깝지만 의외로 낯선 가깝지만 낯선 문화 속 인문학 시리즈 2
후촨안 지음, 박지민 옮김 / 애플북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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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전 책날개에 보이는 지은이에 대한 소개글이 먼저 시선을 끌었다. 생활문화사 전문가이여 역사학자이자 인문학자. 소소한 물건들의 역사를 통해 시대를 이해하고, 일상 용품의 기원을 찾고 연구하기를 좋아한다. 음식에 관한 거의 모든 분야에 조예가 깊다. "지성으로 음식과 문화를 이해하고, 역사와 전통으로 미식을 이해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를 향한 평가가 상당히 이채로웠고 또한 놀라웠다. 음식을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보면 저런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이 책을 접하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음식을 통해 일본의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말 한마디가 흥미로웠던 까닭이다. 사실 나는 먹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인지 일부러 맛집을 찾아다니며 먹지 않는다. 더구나 음식이라는 건 사람마다 느낌이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기에 '맛있다' 라는 평가는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맛도 중요하지만 그 음식을 통해 역사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멋진 일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더구나 책의 제목은 거부할 수 없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기에 충분했다.

 

일본인은 육식을 하지 않았다. 기록에 따르면 일본인은 육식을 불결하게 여겼다. 육식을 하면 몸에서 좋은않은 냄새가 날 뿐아니라 몸과 정신이 혼탁해져 신을 모실 수 없다고 생각했다. 메이지 일왕이 조서를 내려 육식의 좋은 점을 강조했지만 일부 상류층에서만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럴 수 있다. 정말 많은 신을 모시는 일본의 전통이나 역사를 본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육식을 하기 시작하면서 그들만의 요리법을 만들어냈다. 양식과 서양요리는 무엇이 다를까? 서양요리는 영국, 프랑스, 독일등 유럽국가의 음식이며 양식은 일본식 서양요리를 일컫는 말이다. 크로켓, 카레라이스, 돈가스는 3대양식으로 불린다. <명치대정사> '세상'편에 실렸다는 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양식은 먹는 법에서 만드는 법까지 모두 우리 일본것이다." 도쿄의 유명한 돈가스 가게들이 저마다의 특색을 지녔다고 하는 걸 보면 그들에게 일본식 서양요리가 어떤 의미인지를 짐작할만 하다.

 

소가 인류를 도와 많은 이를 해 주는 것에 감사하여 소를 먹지 않았다는 일본. 그런 그들에게 고베규라는 유명한 소고기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 재미있다. 외국인이 일본에 정착하면서 소고기를 필요로 했고 여러 번잡스러운 과정을 피해 지금의 시가현인 오우미지역에서 기르던 소를 고베로 데려왔다는 것이다. 사실 오우미의 소는 고대 백제와 신라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키워 장군이나 제후들에게 바쳤던 것이기도 했다. 고베규에 대한 정의가 흥미롭다. '고베 지역 효고현에서 나고 키워진 소로 한번도 새끼를 낳지 않은 암소나 거세를 하지 않은 수소를 말한다.'

 

우나쥬, 소바, 덴푸라, 스시는 에도의 4대 음식으로 불린다. 특이하게도 이들은 모두 간장이 필요한 음식이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전통과 현대를 아우른 장인정신이 자연스러울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네가지의 음식이 모두 평민의 요리에서 출발했다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교토에서 에도로 수도를 옮기면서 그 당시의 사회적인 상황에 맞춰 탄생한 음식들이기도 하다. 국수의 역사는 한국도 일본도 굶주림과 연관성이 깊다. 일본의 공업화가 많은 농민을 도시로 불러들였고 대부분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에게는 빠르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값싼 음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중국에는 없다는 한국의 짜장면처럼 자유무역항에서 일하던 중국인들이 즐겨먹던 값싼 면이 점차 일본 노동자 계층으로 파급되었던 것이 또하나의 음식문화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스시 역시 초창기 에도시대의 사회적인 모습을 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일본의 역사에서 보면 일본 상류층의 요리는 네 종류로 나눈다. 관가에서 먹던 다이쿄요리, 사무라이 계급이 먹던 혼젠요리, 절에서 먹던 쇼진요리, 다도회에서 제공했던 가이세키요리. 지금 일본을 대표하는 가이세키요리는 승려들이 먹던 쇼진요리에서 비롯되었다. 가이세키란 단어는 원래 승려들이 추위와 배고픔을 이겨내기 위해 따뜻한 돌을 옷속에 품고 있던 선종수행의 한 방법이었다. 나중에 가이세키를 하는 동안 달콤한 먹을거리나 화과자를 함께 먹었다는 것인데 일본인이 좋아한다는 다도에서 공복에 차를 마시면 위를 상하게 하기 때문에 간단한 미소시루와 반찬 세가지 정도로 제공되었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는 게 흥미롭게 다가온다.

 

일본의 요리에서 가장 으뜸으로 취급되어지는 쌀. 일본의 '쌀'에는 그들의 문화와 종교가 담겨있다. 일본신화속 아마테라스 오오카미는 벼와 연관이 있다. 계속되는 기아를 막기 위해 아마테라스 오오카미에게 제사를 지낼 곳으로 선택되었던 곳이 바로 이세신궁이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음식교육정신'을 중시한다. 음식이 산지에서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배우게 하고 음식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정확히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전통채소'까지 있을까 싶다. 채소를 중시한 것은 육식을 멀리했던 까닭이기도 하겠지만 교외의 농작물을 통해 도시와 교외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고 제철음식의 소비자가 되기 위함도 들어있다고 하니 가볍게 생각할 일은 아닌 듯 하다. 대만학자의 눈으로 본 일본의 음식문화가 색다른 느낌으로 전해졌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흔해진 세상에서 내 앞에 오기까지의 과정을 모두 바라볼 수 있는 의식이 있다면 생각없이 장바구니를 채우지도 않을 것이며 함부로 버리지도 않을 것이란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에게도 장인정신이 살아날 것이며 자랑스럽게 여길 우리의 노포가 세계속에 우뚝 설 수 있는 날도 오지 않을까 싶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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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모험 - 인간과 나무가 걸어온 지적이고 아름다운 여정
맥스 애덤스 지음, 김희정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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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바타>의 어머니 나무 반 얀트리, 북유럽신화속 세상의 나무 물푸레나무, 크리스마스를 장식하는 구상나무와 호랑가시나무, 세계의 명작 <하이디>속의 커다란 전나무, 토토로가 살고 있던 녹나무, <어린왕자>가 사랑했던 바오밥나무,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었을 때의 무화과나무(보리수나무가 아니었다!), 경복궁 경회루 앞의 수양버들, 성균관 명륜당 앞 은행나무, 봉황이 깃든다는 오동나무, 그리고 동구밖에 서서 마을을 지켜주던 수많은 당나무들... 내 기억속에 자리한 나무들도 이렇게나 많은데 오직 나무만을 보고, 그 나무가 만들어낸 숲에서 살아온 사람은 더 말해 뭐할까? 문득 어린 시절에 읽었던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나무를 통해 정말 많은 것을 배웠고, 배우고 있으며, 앞으로도 배울 것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생태계는 작은 변화에도 취약하다는 사실이다. 이 책의 말을 빌리자면 나무가 베어져 종이가 되고 한 권의 책으로 사라진다는 걸 슬퍼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숲이 경제적인 가치를 창출해야만 사람들에게 좀 더 중요하게 인식되는 까닭이다. 숲이 돈이되면 숲의 생존이 보장된다는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슬픈 느낌을 주는 말이다. 우리를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것들이 그 중요성을 잃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아닐까 싶어 서글퍼지기도 한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나무심기 프로그램을 만든이가 누구인가를. 인도인 라주선생에게 고마움의 박수를 보낸다. 나무심기 프로그램이 바로 그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나무심기는 백번, 천번을 말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삶과 나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나무로 인해 숨을 쉬고, 나무에 의해 편안한 잠을 자며, 나무가 주는 열매를 먹기도 한다. 태어남(요람)과 죽음(관) 역시 나무와 함께 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왜 나무의 고마움을 모르는 것일까? 한 비석에 써 있다는 글이 시선을 끈다.

이 생애를 마감한 베자우드beza wood를 기억하며.

여기 한 나무wood가 잠들어 있네.

나무에 둘러싸여, 나무 안에 또다른 나무.

둘러싼 나무는 매우 좋은 나무.

다른 나무에 대해서는 칭찬할 말이 없음.

그야말로 칭찬할게 없는 인간의 존재? 이 책을 읽는 내내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너무나 컸다. 나무의 도움없이 인간이 풍요롭고 편리한 삶을 누릴 수 있을까? 우리의 삶속에서 나무를 떼어놓고 말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 종이도 나무에서 나오고, 집을 짓는 것도 나무가 없으면 안된다. 온갖 가구와 기구들을 보더라도 나무로 된 것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하다못해 집을 지켜주는 울타리도 나무였다. 그런 것을 모두 차치하더라도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공기를 내어주는 것도 나무가 하는 일이니 인간에게 있어서 나무의 중요성은 정말 대단하다. 나무가 모여 만든 숲을 파괴하면서 기후의 이상현상이 초래되었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나무를 베어내는데만 급급하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파괴하면서 인공적인 자연을 만들어내는데만 힘을 쏟고 있다. 대서양의 어센션섬의 예만 봐도 인간이 자연의 섭리에 개입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알 수 있다. 나무는 커녕 풀 한포기없는 황무지였던 섬에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고 밭을 일구고 작물을 심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런던에서 수많은 나무를 들여와 섬에 심었다. 10년사이에 500그루의 나무가 섬으로 옮겨져 지금 40여종의 수종으로 자라고 있지만 토종 식물의 절반 이상이 멸종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자연은 자연스럽게 내버려둬야 한다. 자연은 꼭 필요한만큼만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인간의 시선에 아름답게 보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동물과 식물은 서로 공존한다. 인간만이 그들과 공존하지 못하고 그들의 삶을 파괴한다. 이 책은 인간과 나무가 서로 공존과 공생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이 책의 저자 맥스 애덤스는 영국의 고고학자이자 숲 전문가이다. 인간과 함께 해 왔던 나무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나무는 후손들을 위해 선택도, 계획도, 계산도 하지 않는다. 그들을 위한 전략을 수립하거나 진화적 미래를 고려하지도 않는다. 자연은 감정이 개입된 행동을 하지 않는다. -85쪽- 그래서 나는 나무가 좋다. 곤충이 등장하기전부터 나무는 지구상에 존재했다. 종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아도 인간은 모든 것이 만들어지고 난 후에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존재일 뿐이다. 나무와 더불어 모든 것이 함께 살아간다. 바람도, 곤충도, 새도, 동물도. 그런 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나도 살고 싶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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