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초보 7일 완성 손글씨
유제이캘리(정유진) 지음 / 진서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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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筆揮之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잘 쓴 글씨가 아니라 글씨를 힘있게 잘 쓰는 모습을 표현한 말이다. 붓글씨는 한번에 다 써야지 그은 자리에 다시 그으면 안된다는 말에서 나왔다는데 一筆揮之는 고사하고 글씨체도 엉망이니 그게 문제다. 세상에 떠도는 글씨체가 엄청나게 많다.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글씨체도 많고. 블로그 글쓰기만 열어도 고딕체, 명조체, 굴림체, 돋음체, 궁서체는 기본으로 쓸 수가 있다. 글씨를 예쁘게 쓰기 위한 노력은 아주 오래전부터였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펜글씨교본도 있었다. 그리고 서예를 위한 수업시간도 있어서 무거운 벼루나 먹, 붓, 한지를 챙겨가야 했었다. 한글뿐만이 아니라 한자도 여러 글씨체가 있다.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오죽했으면 옛날 선비들은 文房四友라해서 종이, 붓, 벼루, 먹을 서재에 꼭 챙겨야 할 품목으로 보았을까. 예나 지금이나 글씨를 잘 쓰는 사람에 대한 부러움은 똑같은 모양이다. 이 책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글씨만 잘써도 그 사람이 달라보이는 게 사실이다. 글씨를 써서 達筆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면 왠지 모르게 어깨를 추켜올리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글씨를 잘 쓰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같지 않을까 싶다. 지금은 어느정도 대중화되었지만 언제부터인지 예쁜 손글씨라거나 캘리그래피라는 게 유행처럼 번졌다. 처음에는 캘리그래피라는 게 뭔지 몰라 당황했었지만 나중에야 붓글씨를 말한다는 걸 알고 아하, 했었다. 한마디로 말해 손으로 아름답게 쓰는 글씨다. 글씨도 멋을 부리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건 아마도 광고가 많아진 탓도 있겠지만 뭔가 저만의 개성을 나타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욕망이 그런 것들을 만들어낸 듯 하다. 그런데 딱봐도 정말 예쁜 글씨가 많다. 특히 詩의 한구절 한구절을 그 의미에 맞게 그림처럼 예쁘게 쓴 걸 보면 저절로 시선이 간다. 그만큼 글씨의 매력이 크다는 말일 터다. 그러니 글씨를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이겠지... 책을 펼치니 저자의 어머니께서 아니 지금같은 세상에 무슨 글씨를 배우러 오는 사람이 있느냐,고 하셨다는 말을 보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하... 각설하고 세상에 7일만에 글씨를 어떻게 잘 쓸 수 있느냐고 나 자신에게 묻고 있는 걸 발견하고는 은근히 속상함이 밀려왔다. 무엇을 하든 꾸준함이 필요하다. 바른 자세에서 예쁜 글씨가 써진다는 말에 공감한다. 글을 쓸때마다 잘쓰려고 해도 항상 삐딱하니 옆으로 기울어져 마치 음계를 따라 올라가는 것처럼 써지는 게 싫었었는데 그게 모두 바르지 못한 자세때문이었다는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결국 바른 자세에서 모든 것은 비롯된다. 글씨체도, 건강도. 이 책은 나처럼 그런 욕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도전해 볼 만 하다. 7일에 완성이 되든 미완성이든 그게 중요할까?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도전해보는 게 더 멋진 일이다. 하루 10분 연습이라는 책의 말처럼 꾸준함을 잃지 말고. 책이라기보다는 연습장에 가깝게 느껴져서 손맛이 괜찮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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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가지 않고 통증 잡는 5분 스트레칭 - 유튜브 누적 조회수 1,300만 국민 건강지킴이 피지컬갤러리
피지컬갤러리.정유진 지음 / 피오르드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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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난 적도 없었고 심하게 움직인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무거운 짐을 들고 다닌 것도 아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어깨가 너무 아팠다. 한동안 한약방에 다니며 침도 맞았다. 부항이라는 것도 태어나서 처음 해봤다. 그랬는데도 통증은 여전했다. 그래서 병원을 옮겼다. 근육주사라는 걸 맞았다. 조금 뻐근했지만 통증이 어느정도 잡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웬걸, 통증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엑스레이를 찍었다. 원인을 잘 모르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라목이니 일자목이니 평상시의 자세가 좋지않아서 그렇다느니 좋지않은 말은 다 들었다. 멀쩡한 사람이 느닷없이 장애인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결국 의사는 이상한 종이 한장을 내게 내밀었다. 그리고 간호사는 말했다. 이건 이렇게 하라는 말이고 저건 저렇게 하라는 말이라고. 하루에 몇 분씩 이렇게 운동을 해보라고. 그게 다였고 나의 어깨통증은 여전했다. 그런 와중에 눈에 띈 이 책의 제목, 병원 가지 않아도 5분만 스트레칭을 하면 통증을 잡을 수 있다는 말은 그 자체로 구세주처럼 느껴졌다. 펼쳐든 책장속에서 가장 먼저 나를 맞이해준 말은 통증의 원인을 찾아내야 한다는 말이었다. 사람마다 생김새가 다르듯이 같은 증상일지라도 그 원인이 조금씩 다르다는 거였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내게 통증을 안겨준 곳이 승모근(트리거 포인트)이었다는 걸. 책에서 말하듯 두통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트리거 포인트를 활용하여 통증의 원인을 찾는 방법과 그에 맞는 스트레칭과 같이 쉽고 간단하게 효과를 볼 수 있게 해준다니 한번 따라해보기로 했다. 며칠을 그렇게 따라하면서 몸이 개운해지는 걸 느꼈다. 그렇다고 아직까지 여기서 보여주는 자세때문에 크게 효과를 보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일단은 따라해보길 잘했다는 생각은 든다. 우리의 몸을 그림으로 보여주면서 각각의 근육을 알려주는 것도 재미있다. 견갑거근, 승모근, 사각근, 삼각근, 이두근, 근하근, 다열근, 장녹근, 흉쇄유돌근... 하, 근육이름이 많기도 하다. 이 책은 글자보다도 사진이 더 많다. 대충 실은 사진이 아니라 누구나 따라할 수 있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뻣뻣한 목, 등 통증, 허리 통증, 무거운 어깨, 지긋지긋한 두통에서 벗어나기... 목차만 봐도 따라하고 싶게 만든다. 내게 필요한 부분만 펼쳐놓고 하라는대로 따라 하면 되겠지만 무엇보다도 반복의 필요성이 가장 중요하다. 한번 했다고 모든 통증이 사라질수는 없는 까닭이다. 무거운 어깨를 위한 스트레칭, 골반을 안정적으로 지탱해주는 스트레칭, 계단을 두렵게 만드는 무릎 통증을 위한 스트레칭을 따라하고 있다. 많이 배웠다. 무표정한 모델 빡빡이 아저씨의 자세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아니, 책을 보지 않고도 스트레칭을 할 수 있도록 더 많이 따라해야 할 것 같다. 피지컬갤러리는 의학 전문가들의 지식과 정보를 비전문가들의 눈높이에 맞게 가공하여 유튜브를 통해 전달하는 건강 전문가 협력집단이라고 한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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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 박사와 하이드 생각뿔 세계문학 미니북 클라우드 18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안영준 옮김, 엄인정 / 생각뿔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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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이 두 개의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내 학문은 거기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나와 의견이 같은 사람도 있겠지만, 나보다 더 연구 실적이 뛰어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궁극적으로 인간이 조화롭지 못하고, 독립적인 개체들이 모인 조직체라고 생각했다. 나는 성격상 이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옳다고 믿으면 오직 그 길로 갔다. 내가 인간의 이중성을 인지한 것은 내 안에 있는 도덕적 측면 때문이었다. 내 안에 존재하는 두 가지 성격 가운데 어느 한쪽도 모두 나지만, 그것은 내가 두 가지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서술할 기적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나는 선과 악을 분리한다는 공상에 종종 빠져들고는 했다. 나는 이 두 가지를 각각 분리할 수있다면, 삶의 괴로움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악한 본성은 고상한 쌍둥이인 착한 본성의 야망과 양심의 가책에서 해방되어 자신의 길을 가면 되고, 착한 본성은 악한 본성이 저지르는 짓에 대해 괴로워하거나 참회할 필요없이, 그에게 기쁨이 되는 일을 하면서 위로 향하면 된다. 이란성 쌍둥이가 의식 세계라는 자궁 안에서 끊임없이 투쟁해야 한다는 것은 인류에게 저주이다. 그렇다면 그 둘을 어떻게 분리할 수 있을까? (-89, 90쪽) 

 

이 세상은 어쩔 수 없이 이분법적으로 되어 있는 것일까? 하늘이 있으면 땅이 있고, 산이 있으면 바다가 있고, 물이 있으면 불이 있고, 행복이 있으면 불햏이 있고, 지옥이 있으면 천당도 있고, 善이 있으면 惡이 있고. 그렇다고해서 완전한 이분법도 아닌 듯 하다. 결과가 있으려면 원인이 있고 그 결과에 다다르기 위한 또 하나의 과정이 있을테니. 이 책은 늘 그런 고민을 하게 한다. 성선설일까? 성악설일까? 를.  인간의 본성을 선천적으로 선하다고 본 맹자와 인간의 본성은 원래부터 악하기 때문에 禮와 공부가 필요하다고 본 순자의 대립은 아주 오래되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이 인간의 성선설을 믿을지 성악설을 믿을지 이쯤에서 상당히 궁금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지킬박사와 하이드>라는 작품은 문제작임이 분명하다. 선과 악은 언제나 우리에게 대립을 불러온다. 그것도 인간의 본성이 어둠에 가깝다는 말과 함께. 그런 까닭으로 성선설보다는 성악설쪽에 무게를 두는 사람도 많다. 나처럼.  하이드는 창백하고 난쟁이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기형은 아니었지만 왠지 불구라는 인상을 주었다. 웃는 것조차 불쾌했다. 그는 거칠고 낮은, 째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25쪽) 이 책에서조차 인간의 본성은 어둠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어두운 본성을 제어하기 위해 그토록이나 많은 법과 규제가 필요한거라고. 또하나, 추리소설을 쓰는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도 지나칠 수 없다. 이 작품은 분명 경계선안에 있다. 인간이 본디 선하다고 말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악하다고 말하지도 않는 까닭이다. 주인공 지킬박사 역시 겉으로 볼 때는 부와 명예를 갖춘 박사였지만 자신안에 내재된 본성에 대한 강한 호기심으로 또하나의 자신인 하이드를 만들어내게 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도덕적인 관념과 사회적인 규범을 벗어나 자신의 마음대로 살고 싶었던 욕망을 억제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 않다는 말일까? 많은 사회적 규제와 도덕적인 관념으로 포장된 자신의 모습을 보여야 하니 그것은 어쩌면 순자의 말처럼 인위적이거나 혹은 위선적으로 꾸며낸 모습일 것이다.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제대로 읽어보고 싶었다. 책을 읽는 내내 조여오던 몰입도와 긴장감은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명예로운 삶을 이어갈 수 있었던 지킬박사는 인간의 본성을 선과 악으로 분리하는 실험에 성공한다. 하지만 지킬박사의 삶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했던 그는 또다른 자신의 분신 하이드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쾌락의 어두운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다. 선과 악의 세계를 동시에 오갈 수 있었던 지킬박사가 행복했을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선한 것이라해서 모두 옳은 것도 아니며 악한 것이라해서 모두 나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선과 악이 완전한 균형을 이룰 수는 없겠지만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지않기 위해 최소한의 양심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야 한다고 지킬박사와 하이드는 말하고 있다. 지킬로 사는 쪽을 선택한다면, 나는 오랫동안 숨겼지만 마음껏 누릴 수 있었던 욕구를 포기하며 살아야 했다. 하이드로 산다면 지킬이 쌓아올린 명예와 이익을 포기하고 사람들의 경멸을 감내하며 외톨이로 지내야 했다. (102쪽) 는 지킬박사의 말처럼 어쩌면 이 작품은 우리가 지켜야 할 수많은 규율과 법제의 필요성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우리는 누구나 일탈을 꿈꾸며 살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궤도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안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이드로써 죽음을 맞게 된 지킬박사가 자신이 선택했던 욕망과 일탈에는 그에 따른 대가와 결과가 있다고 하는 것만 보아도 우리의 욕망, 혹은 쾌락이 얼마나 큰 결과를 불러오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논쟁은 인간의 역사만큼 오래되고 평범한 것이다. 신의 뜻을 어겨 벌을 받는 죄인들도 이와 같은 유혹에 이끌려 주사위를 던진다. 나 역시 주사위를 던져야 할 때가 오자, 더 나은 쪽을 선택했다. 하지만 이전의 많은 사람처럼 결심을 지킬 힘이 부족했다. (-102쪽)  질서와 규율에서 벗어나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욕망을 얼만큼 억제할 수 있는가 묻고 있는 것만 같다. 마음의 고삐를 너무 오래도록 느슨하게 두어서는 안된다고. 이 책의 말처럼 하이드에게 지배당한 사람은 지킬 박사 하나로 충분하니까. /아이비생각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1850년 11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부유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토목기사였던 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해 에든버러 공과대학에 입학했지만 몸이 약하고 문학에 흥미가 있었던 루이스는 법학으로 전공을 바꾸게 된다. 아버지와의 갈등과 점점 악화되는 건강으로 요양차 유럽여행을 떠났는데 그 때의 경험이 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보물섬>이란 작품을 통해 작가로서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으나 힘겨운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창작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았던 그는 1894년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했다.

 

 

... 생각뿔의 미니북 시리즈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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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헨리 단편선 생각뿔 세계문학 미니북 클라우드 21
오 헨리 지음, 안영준 옮김, 엄인정 / 생각뿔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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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렴에 걸려 병원에 입원중이던 가난한 화가 존시. 의사는 살아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하면서도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면 살아날 가능성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있던 존시가 보고 있었던 것은 희망이 아니었다.  창밖에서 떨어지는 담쟁이덩굴의 잎을 세면서 그녀는 말한다. 저 잎이 다 떨어지면 자신도 죽을 거라고. 존시를 간호하던 친구 수는 출판사에 제출할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이웃에 사는 노인 버만을 불러 모델로 삼는다. 버만 역시 가난한 화가로 근근이 삶을 이어가던 사람이었다.  다음 날 존시는 커튼을 열고 나뭇잎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확인한다. 간밤에 거센 비바람이 불었기 때문에 나뭇잎이 다 떨어졌을거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단 하나의 잎이 떨어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 마지막 남은 잎을 보면서 존시는 삶에 희망을 되찾고 의사에게서 살아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말을 듣게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버만이 폐렴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 마지막 잎새는 버만이 존시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밤새도록 그린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라는 작품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보았거나 읽어보았을 작품이다. 남을 위한 배려와 희생정신을 그린 오 헨리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마지막 잎새> 못지않게 유명한 작품으로 <크리스마스 선물>도 있다. 크리스마스에 남편에게 선물을 하고 싶었던 아내는 자신의 긴 머리를 잘라 남편의 시계에 어울리는 시계줄을 산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의 긴머리에 어울리는 머리핀을 선물로 사기 위해 자신의 시계를 판다. 결국 두사람에게는 필요없는 선물이 되어버렸지만 서로를 향한 마음이 얼마나 커다란 선물이었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오 헨리의 작품 대부분은 이렇듯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쓰여졌다. 가난한 사람들과 노숙인과 같은... <마지막 잎새>와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 모두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다. <경찰관과 찬송가>에서는 추운 겨울을 감옥에서 편하게 보내기 위해 이런저런 사건을 일으키던 부랑자 소피가 일자리를 구해야겠다고 다짐하던 순간 거리를 배회한다는 이유로 경찰관에게 체포되는 모순을 그리고 있으며, <20년 후>에서는 한사람은 경찰로 한사람은 수배자로 20년 후에 다시 만나게 되는 두 친구의 모습을 그렸다. <추수감사절의 두 신사>에서는 추수감사절에는 누군가를 도와줘야 한다는 사회의 관습에 얽매여 거리의 부랑자를 그 날만큼은 배불리 먹도록 하기 위해 자신은 사흘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채 굶어죽은 사람을 그리고 있다. 관습이란 굴레에 얽매인 사람들의 모습, 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악습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한다.  <백작과 결혼식 손님>, <메뉴판 위의 봄>, <가구가 딸린 셋방 >, <도시물을 먹은 사람 >, <카페 안의 세계주의자 >등도 주제는 비슷하다. 하지만 배경과 그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모두 다르다. 짧은 이야기를 통해서 작가의 심중을 어렵지않게 알아낼 수 있다. 작가의 시선은 언제나 주변 사람들에게로 향한다. 그들을 관찰하면서 이야기거리를 만들어냈다. 모두가 상점의 판매원처럼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거나 사회에서 낙오된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그럼에도 그들에게서 희망을 보며, 그들에게 사회의 관심과 배려가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성공한 사람만이 이 사회를 이루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눈을 돌리는 곳마다 이야깃거리가 있어요. 세상의 모든 일은 모두 작품의 소재가 됩니다.”오 헨리의 말이다.

 

오 헨리는 작가로서의 활동 기간에 무려 300여편의 단편 소설을 남겼다. 대부분의 작품이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가 활동하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미국은 공업화와 산업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은 수많은 발전을 이룩하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도 있어 서민들은 더욱 살기 힘들어지고 부를 가진 사람들도 정서적으로 피폐해졌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었다. 작품을 통해 이기적이고 잔인한 도시인들을 향한 안타까움과 비판적인 시선을 함께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이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적은 돈으로 근근히 생계를 유지해 나가는 소시민, 집 없이 거리를 떠도는 부랑자들이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것만 보더라도 그것을 알 수 있다. 미국 단편 소설의 대가로 불리워지는 오 헨리의 생애를 보면 어릴 적 어머니를 폐결핵으로 잃었으며 그 역시도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폐결핵을 앓고 있어서 건강이 좋지 않았다. 알코올 의존증에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아버지 대신 할머니와 숙부의 손에서 자라며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숙부의 약국일을 도왔다. 20살에 텍사스주로 넘어가 직공생활을 했으며 25살에 결혼을 한다. 하지만 아내 역시 폐결핵을 앓아 건강이 좋지 않았다. 예전에 잠시 근무했던 은행에서 공금횡령죄로 수배령이 떨어졌고, 후에 수감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본명 '윌리엄 시드니 포터'라는 이름 대신 '오 헨리'라는 필명으로 작가활동을 한다. 작품속에서 그의 험난했던 생을 보게 된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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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 일기 (리커버 에디션)
롤랑 바르트 지음, 김진영 옮김 / 걷는나무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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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을 잃고 그 사람 없이도 잘 살아간다면, 그건 우리가 그 사람을, 자기가 믿었던 것과는 달리, 그렇게 많이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까.....? (-78쪽)  이 물음은 우리에게도 많이 다가왔던 것이다. 그토록 사랑했으나 그 사람이 없이도 우리는 나머지 삶을 잘 살아낸다. 아무리 사랑했다해도 남은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삶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머지 삶을 잘 살아간다해도 단언컨대, 그것은 잘못된 일이라거나 그 사람을 많이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작가의 말처럼 슬픔은 순간마다 밀려오기도 한다. 이 중단없는 새로 시작하기. 시시포스. 어느날 오후에 엄마의 물건들을 정리하다가 아침부터 그녀의 사진들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던 그가 짧게 쓴 단상이다. (슬픔이 멈춘 것도 아닌데) 또 하나의 이름 모를 슬픔이 시작된다고. 잊은 것이 아니라 잠시 잊혀져 있었던 거라고. 함께 지냈던 순간들은 어떤 형태로든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다. 불쑥 찾아올 때마다 슬픔도 함께 찾아온다. 강하게 혹은 약하게. 추억이 되었든 기억이 되었든 사랑했던 사람과 함께 했던 모든 것이 함께 사라지지 않는 까닭이다. 어떤 공간속에, 혹은 어떤 시간속에 기억과 슬픔은 함께 존재하는 게 아닐까?  그러다가 조금씩 나아질 것이다. 책 속의 말처럼. 시간이 지나면 슬픔도 차츰 나아지지요. - 아니, 시간은 아무것도 사라지게 만들지 못한다. 시간은 그저 슬픔을 받아들이는 예민함만을 차츰 사라지게 할 뿐이다. (-111쪽)  슬픔을 겪는 사람에게 흔하게 하는 말 중의 하나지만 어쩌겠는가, 저 말보다 더 적당한 말이 없어보이니. 시간이 약이라고. 시간이 지나면 그 슬픔도 엷어진다고. 그 때는 당장 어떻게 될 것처럼 펄펄 뛰던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게 마련이다.  다른 것들에게 떠밀려 저만치로 밀려나서 색이 바래는 것이다.

 

바르트의 어머니 앙리에르 벵제는 1977년 10월 25일 사망했다. 그 다음 날부터 바르트는 <애도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작은 종이에 순간순간 찾아왔던 자신의 느낌을 적은 글이니 사실 처음부터 애도일기라고 하는 건 무리일 듯 하지만... 이 일기는 2년 뒤인 1979년 9월 15일에 끝난다. 그리고 1980년 2월 25일 교통사고를 당했으나 일반적인 치료외의 심리적인 치료는 거부했다고 한다. 공식적으로는 사고사였던 바르트의 죽음이 혹시 자살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게 만든 건 바로 이 말 때문이 아니었을까? 마망의 죽음은, 모든 사람들은 죽는다는, 지금까지는 추상적이기만 했던 사실을 확신으로 바꾸어주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 어떤 예외도 없으므로, 이 논리를 따라서 나 또한 죽어야만 한다는 확신은 어쩐지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216쪽)  바르트는 1915년에 태어나 전쟁으로 아버지를 일찍 잃고 평생을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고 한다. 그에게 어머니의 존재는 대단한 의미였을 것이다. 어쩌면 또 하나의 자신이라고 여겼을 어머니의 죽음후에도 변함없이 여전한 자신의 일상에 대한 자괴감으로 괴로워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런 것들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에게 찾아왔던 여러가지 감정이나 소소한 일상 중의 하나를 쪽지에 적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의 말로는 이것이 책으로 만들어지길 바라지 않았다고 하나 씁쓸하지만 이 일기의 문체속에는 문학적인 느낌이 가득하게 담겨있는 듯 하다. 형언할 수 없는 슬픔, 이라고 표현되어지는 것들조차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역시 표현되어지는 그 어떤 것일 뿐일까?  책을 읽으면서, 책을 읽고나서 가장 공감했던 부분은 이 한마디뿐이었다. 누구나 자기만이 알고 있는 아픔의 리듬이 있다. (-172쪽)  섣불리 말하지 말자. 누군가의 아픔을, 누군가의 슬픔을,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그 사람의 아픔과 슬픔, 고통을 똑같이 겪어낸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아픔의 깊이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기에.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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