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저지른 최대의 잘못은
 신을 하늘에 들여놓고 거기서 다시는 나오지 못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지...
 신은 모든 존재와 모든 물체 속에 내재해 있어. 어떤 일이든 신의 의지를 표시하는 것이지."

"신이 성체속에 존재하는지, 아니면 어디에도 없는지 알기 위해 서로 으르렁대는 저들을 봐.
 창조물로부터 신을 몰아내더니 이제는 또 신에게 보잘 것 없는 자리를 주겠다며 궤변을 쏟아놓고 있어."

"인디오들에게는 만물이 신성한 것이지.
 꽃,바위,산에서 흐르는 물, 무수한 정령이 살면서 사물이며 풍경과 존재들을 보고해주는 세상.
 이런 것들을 지켜주기는커녕 아무 거리낌 없이 나쁜 짓을 저지르는 사람은
 이 세계의 아무것도 건드릴 수 없어."

"그들은 자연의 신성함을 벗기고 수많은 생명을 살육하는 흉악한 행위를 일삼으면서
 자연을 무방비 상태로 방치해두고 있지.
 그들이 섬을 어떤 꼴로 만들어놨는지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어.
 거기서는 생명이 자라지 않아.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는 걸 봐.
 그들이 이 땅의 주인이 된다면 죽음의 땅으로 만들어놓고 말거야."

"지상의 낙원에서 쫓겨난 것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야.
 그리고 인간은 창조물을 파괴하기 위해 낙원을 점령한 것이야."

 《 붉은 브라질 中에서 》

 



내 영혼의 깊이는 얼만큼이나 될까?
느닷없는 나의 이 궁금증앞에서 너무 당황스러웠다.
영혼의 깊이를 논할만큼 성숙되지 못한 나의 모습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종교에 관한 생각자체를 이제는 접어야지 하면서도
작은 불씨를 살려두었던 탓인지 화르륵 타오르고 말았다.
그저 한줌의 평안만을 원했을 뿐이라고 우겨대면서 위안삼기를 몇번인지..
나의 잣대로 만들어놓은 틀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아집의 뭉텡이.
언제쯤이면 홀가분한 마음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을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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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속에는 네 개의 방이 들어 있다는 인도 속담이 있다.

육체의 방, 정신의 방, 감정의 방, 영혼의 방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하나의 방에서 보내는 경향이 있는데

네 개의 방을 드나들지 않는다면 완전해질 수 없다.

< 사람은 왜 만족을 모르는가? > 중에서-

사람은 왜 만족을 모르는가? 를 읽으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과 느낌들이 교차했다.
단지 나 한사람의 잣대로 인하여 주변 사람들을 너무도 힘들게 한 것 같아 마음이 싸아해졌다.
이제는 어느정도 받아들이며 살아갈 나이도 되었건만 끝도 없이 내 욕심만 차린다.
반평생을 살고도 알지 못하는 삶의 아이러니...
서글픈 일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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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옛날에, 이 땅에는 거대한 공허함이 있었어요. 무엇가를 기다리고 있었죠.
채워지길 기다리며, 사랑을 줄 수 있는 누군가를...

아주 멋진 카피라는 생각을 한다. 공허함이 있었고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야기..
태초의 카오스도 아니고 너무도 지극한 그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무엇일까? 족장의 혈통으로 태어났으나 족장이 될수 없다. 족장으로서의 영민함과 자질을 충분히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족장의 후계자로 키워지지 못한다. 그러나 무언가 되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할 수 있을거라고 믿는 그 커다란 생각속에서 자라나는 파이키아.
고래등을 타고 왔다는 부족의 선조 이름이 파이키아였기에 아버지는 그 아이에게 억지로라도 파이키아라는 이름을 지어준 채 떠났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쩌면 자기 자신이 받아들이지 못했던 책임과 의무에서 해방되고 싶었던 이유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마을의 족장이었던 할아버지만큼은 파이키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여자라서, 여자이기 때문에 결단코 마을의 족장이 될 수 없었고 또한 지도자로서의 길을 갈 수 없다는  아주 단순한 전통에 의한 관념때문이다. 왜 안될까? 여자는 왜 안되는걸까?

자연을 소재로 한 영화이거나 동물 혹은 곤충들의 세계를 그려내는 영화속에는 작은 감동들이 하나씩은 자리를 차고 앉아 나 여기 있소~ 하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영화속에서는 어린 소녀 파이키아와 고래의 의사소통이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아니 인정해 줄 수 없는 지도자로서의 의무를 선조가 타고 왔다던 고래만이 인정해 주고 또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러니다. 어쩌면 그리도 고집스러운지 우리의 유교적인 관습에 젖어 여자가 어딜 감히? 라고 호통을 치던  우리네 할아버지들과 아주 똑같다. 은근슬쩍 짜증과 화가 밀려온다.  족장으로서의 길, 지도자로서의 길을 원하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되야만 하는 운명을 지녔던 파이키아. 아버지의 차를 타고 떠나던 그 소녀에게 바닷속의 고래가 말을 한다. 떠나면 안된다고.  차를 세워요! 집으로 돌아가겠어요... 그러나 소녀의 귀환은 환영받지 못한다.

  


짜여진듯한 각본이지만 늘 그렇다.  배역과 배우가 얼만큼의 혼연일체가 되느냐에 따라 영화를 보는 재미가 한결 좋아지던가  아니면 별것 아닌것으로 전락하게 된다. 파이키아 역을 소화해내던 소녀 배우의 모습은 정말 가녀리다.  아마도 소녀가 소화해내야 할 배역의 의미를 더 커보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고래등에 올라 타고 발을 차며 '가자'고 말하던 소녀는 이미 맑은 영혼의 파이키라와 닮아 있었던 듯 싶다.
자연속의 모든 것들은 우리와 동화되지 못하면 소통을 원하지 않는 듯 하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위대하다는 뜻일까? 그만큼 맑고 순수해야 한다는 뜻일까?  영화한편속에서 참으로 많은 것들을 찾아낸다.  죽어가는 자연을 살리고 싶어하는 이미지와 여자와 남자의 차별에 대한 말없는 항변과  어찌보면 인종적인 그 무엇까지도 담아내고 싶었던 듯 하다. 고집스럽던 할아버지의 그 무표정과 눈물을 흘리며 할아버지에게 바치는 웅변과 노래를 하던 소녀의 가녀린 이미지가 오버랩되어 온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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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둔... 아주 오래전부터 보고 싶었던 영화였다. 목마름을 잠시 채워주었던 <티벳에서의 7년>을 보면서도 이 영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었다. 왜 그랬을까? 뭔지 모를 끌림을 부정할 수 없다. 달라이라마... 지혜의 바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티벳에서의 7년>이 달라이라마의 일면성을 그렸다면 이 영화는 달라이라마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환생을 믿는 나라, 불교의 나라, 비폭력을 대표할 수 있는 달라이라마가 살았던 곳에서 만나는 불교 혹은 종교에 대한 정의는 나로하여금 되돌아보게 하여 작은 깨우침을 준다.

달라이라마의 환생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입적하기 전에 달라이라마가 쓰던  물품을 하나씩 골라내는 장면에서는 마음이 좀 안스럽기도 했지만 어디든 종교라는 테두리안에 갇히다보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들게 되는 그런 아이러니가 있기도 하니 어쩌겠는가 싶었다. 환생하였음을 예시하는 환영을 보았다는 레팅 린포체를 통해서 아직 어린아이인 달라이라마를 찾아나서는 승려들의 가슴속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들의 가슴속에는 아마도 가슴 벅찬 환희와 기대가 가득찼을 것이다. 스승이 될, 자신들의 모든 것을 받아줄 그런 존재의 의미였으니 말이다.  라모.. 불과 다섯살에 쿤둔으로 불려워지는 소년. 그가 나중에 제 14대 달라이라마가 된다. 소년시절의 기억을 잃어버려야 했던 아이는 결국 영적인 존재로써 키워짐을 받아들였고, 그토록 험난한 역사속으로 한걸음씩 걸어가게 된다. 자신과 자신이 안아주어야 할 중생들의 앞날일랑은 모두 부처님께 맡기운채로... 다섯살 소년이 쿤둔으로서의 첫발자욱을 뗐던 순간과 이미 성인이 되어 18세에 즉위하는 달라이라마로서의 소년은 그 의미자체가 너무도 달라보였다. 그가 짊어져야 할 짐만큼 그의 어깨와 가슴도 넒어져 있었으니 말해 무얼할까.

영화속에서는 그야말로 신적인 존재로 만들어져가는 인간의 모습을 담대하게 그려주고 있다. 무언가에게 기대고 싶어하는 우리네 여린 가슴을 알기라도 하듯이 하나씩 하나씩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가는 그 모습이 왠지 경이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변해야 한다고, 이제는 우리도 변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입을 통해서 어쩌면 티벳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의 침입으로 티벳은 피투성이가 되어버리는 가운데 정치와 가까워지지 말라던 시종의 한마디는 시사하는 바가 컸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중국이 그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던 까닭에 힘겨운 망명길을 선택해야만 했으니... 인도로의 망명길을 계획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의 여정이 아직은 어렸던 달라이라마에게는 너무도 힘겨운 고통이었으리라...  고통이 무엇인가 물으니 그것은 집착하고 했었던가? 모든 것은 내 안에서 시작되고 멸하니 오직 나만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법을 했었던가? 그 고통의 크기를 어찌할까?

중국의 식민지로 전락해버린 티벳에서도 독립을 하기 위한 치열한 반란은 계속 되었고 그 와중에 너무나도 많은 생명들이 사라져 갔다. 비폭력으로 저항하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겠으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다른 곳으로 가야만 한다던 시종의 말을 들으면서도 끝까지 티벳의 국민들과 함께 하고 싶어했던 달라이라마의 마음. 그가 인도로 망명길을 올랐을 때의 심정은 어떠했을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을 것 같다.  영화를 보면서 찡하게 눈물고여지는 순간도 있었다. 안타까움에 두손을 모았던 순간도 있었다. 그만큼 사실적으로 묘사되어진 장면들이 아직도 나의 시선속에 갇힌채로 머물러 있다.

인도로의 망명길을 떠나 무사히 국경에 이르니 국경수비대가 다가와 묻는다.

감히 여쭈오니 그대는 누구시옵니까?

보시다시피 미천한 비구일 뿐이오.

당신이 부처이시옵니까?

나는 그림자일뿐이오.

물 위에 비친 달처럼 나를 통해서 그대들 자신의 선한 그림자를 보길 원할 뿐.

아직도 달라이라마는 티벳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며 산다고 한다.
그에게 노벨 평화상을 백개, 천개 준들 무슨 소용일까? 돌아가고 싶은 제 나라로 돌아갈 수 없으니....

부처님도 남의 죄를 씨을 수 없으며

남의 고통을 대신 덜어 줄 수 없으며

대신 깨쳐줄 수도 없나니.

중생은 오직 진리를 통해서 해탈을 얻을 수 있느니라.

이것이 궁극의 진리이니라.

종교..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이 무엇이건데 그토록이나 인간의 마음속을 헤집어 놓는가..
알 수 없는 하나의 존재를 앞세워 목소리만 높일게 아니라
진정한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는것이 종교가 아닐까?
감히 말하건데 어떤 형식적인 면만을 앞세워 마음을 다스릴 수는 없을것이다.
마음을 유혹하는 존재로써 우리곁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 종교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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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움이 쌓여
     내 어깨를 짓 눌러도
     당신과의 그 따듯했던
     사랑의 힘으로
     오래전 아직도 그리운
     애틋한 그 추억들로
     늘 감싸 안고
     감사하며 인내 합니다

    - 이성진 '그리움이 쌓여 내 어깨를 짓눌러도'


묻고 있다. 5월이 당신에게는 어떤 의미를 주느냐고.
대답한다. 어제와 같은 날일뿐이라고.
늘 곁에 머무는 날들속에서 무슨 의미를 찾아야 하는지
나는 되묻고 싶었다.
살아온 날과 살아질 날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내 안에서 나와 내 밖의 세계에 머무는 것들은
또 어디로 가야 하는것인가.
나는.. 그저 나일뿐이다.
어떤 특별한 의미조차도 부여해 줄 수 없이
그저 오늘을 살아내는 나일뿐이다.
행여 묻고 싶다면 다시한번 생각해주기를.
모든 것은 그 첫번째이거나
아니면 그 마지막인 것을 알고 있는데.../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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