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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갈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3
사쿠라기 시노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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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에게 부모는 자신의 몸을 기댈 수 있는 버팀목과 같은 존재이다. 길에서 넘어졌을 때나, 친구에게 놀림을 당했을 때, 몸이 아프거나 배가 고플 때, 아이는 부모에게 찾아가고 부모에게 기댄다. 그렇게 아이는 사람을 신뢰하며, 서로에게 기대며 의지하는 법을 배운다. 그런데 만약 그런 기댈 수 있는 부모나 그 누구도 없이 자란 아이가 있다면 어떨까? 황량한 벌판과 같은 삶을 살아가면서 아무에게도 기댈 수 없다면... 누구에게 기대 본 경험도 없고, 기댈 사람도 없다면 그 사람을 얼마나 외롭고 삭막할까?


사쿠라기 시노의 [유리 갈대]라는 소설의 여주인공 '기노 쎄스코'라는 여인이 바로 이런 사람이다. 쎄스코는 이제는 한때의 흥청거림만을 기억하는 낡은 항구도시의 유각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곳에서 술을 팔고 몸을 파는 여성이었다. 쎄스코는 어린 나이부터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학대를 당하고 자랐다. 심지어는 그녀가 어머니 가게에 드나드는 남자에게 강간을 당할 때도, 어머니는 그 일이 끝날 때까지 모르는채 했다. 그리고 일이 끝난 후 남자를 협박해 돈을 뜯어내는 일을 했다.


소설의 쎄스코가 어머니의 유각에서 화재로 자살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머니의 애인과 결혼했고, 어느 정도 부유한 삶을 사는 그녀가 왜 어머니의 술집에서 자살을 했을까? 소설은 다시 이주 전으로 돌아가 그녀의 일상을 비춘다.


그 날 쎄스코의 남편 기이치로는 아침부터 드라이브를 간다고 집을 나선다. 한때 어머니의 애인이었지만, 지금은 자신의 남편인 기이치로는 변두리 호텔의 사장이다. 그는 쎄스코에게 부족함 없는 결혼생활을 약속하고 결혼했으며, 실제로 그녀가 가집까지 낼 수 있도록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일본 '가집'이 무엇인지는 접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른다. 아마 한국의 시조 정도 비슷한 운율을 가진 시집이나 수필 정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그 날 오후 기이치로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기이치로는 그 사고로 혼수상태가 되고, 기이치로가 사고난 길은 어머니의 유각과 연결된 도로였다. 결국 기이치로는 그 날 어머니를 만나러 갔던 것일까? 이야기는 기이치로가 혼수상태가 된 이후의 사건들을 통해 쎄스코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녀의 가집 제목인 '유리갈대'처럼 그녀는 아무에게도 기대할 수 없고,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소설 곳곳에는 그런 그녀의 상황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쎄스코는 숨을 토했다. 생각해 보면 아무리 거르실리는 말을 해도 엄마는 이제 자신을 아프게 하지 않는다. 생각나는 말을 전부 퍼부으며 욕해도 상처 따위나지 않는다. 자신이 엄마를 원하지 않는다. 태아난 뒤로 단 한 번도 원한 적이 없다." (p73-4)


"사모님이 홀가분해지는 건 상관없어요. 아직 젊고, 여러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는 것도 알아요. 그렇지만요, 홀가분해지는 건 무서운 거예요. 속박이 없는 생활의 무서움, 아세요? 의지할 데도 없고 구속하는 곳도 없는 사람에게는 내일이 필요 없어져요." (p221)


소설은 추리소설의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끝에서는 예상치 못한 반전까지 등장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일본 소설이 그렇듯, 추리소설의 형식에 주인공 쎄스코의 공허한 내면을 잘 끄집어 내고 있다. 특히 쎄스코가 쓴 가집 제목인 '유리갈대'와 함께 소설 중간중간에 갈대의 이미지가 쎄스코의 이미지와 겹치며, 그녀의 공허한 삶의 모습을 표현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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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1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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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예산 영화이고, 인디영화적 성향이 강해서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성장영화 중에서 [18: 우리들의 성장 느와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열여덟의 고교생들의 성장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주인공 동도(이재응)는 작은 키와 찌질한? 외모로 인해 항상 소외감을 느끼고 친구들에게 무시를 당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같은 반에서 잘 나가는 현승(차엽)과 친구가 된다. 커다란 덩치와 시원시원한 성격의 현승은 동도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에게 잘 대해주며, 현승의 친구 무리에 들게 한다. 그러나 모두들 동도를 친구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현승의 친구 중에서 가장 폭력적인 동철(이익준)은 현승을 여전히 자신들보다 아래 단계로 보고, 그에게 빵 심부름을 시킨다. 이 일로 현승과 동철 사이가 갈라지고, 결국은 주먹다짐까지 하게 한다. 오래 전에 본 영화여서 줄거리가 모두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영화를 본 후 오랜동안 어린 시절의 추억과 친구에 대한 씁쓸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인상 깊은 영화였다.


 

 

 

미나코 가나에의 [리버스]를 읽고 이 영화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미나코 가나에라는 작가의 명성과 그녀의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그녀의 작품을 읽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단순한 추리소설 정도로 생각하고 읽은 이 소설은 읽은 후에도 계속해서 여운이 감도는 영화이다.


주인공 후카세는 평범하다 못해,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다. 학창시절에도 거의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가끔씩은 반에서 따돌림까지 당했다. 그나마 공부를 잘 해서 도쿄에 있는 일류대학에 와서 동아리에서 4명의 친구를 사귄다. 그들 역시 모두 잘 나가는 친구들이다. 야구부 주장이며 리더격인 다니하라, 의원인 아버지를 두고 돈을 물쓰듯이 쓰는 무라이, 교사가 되기 위해 공부에 열중하는 아사미, 그나마 자신의 친구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히로사와뿐이다. 후카세는 동아리 중에 3명은 잘 나가는 친구들이고, 히로사와와 자신은 소외된 친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로 마음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졸업을 앞 둔 어느 날 무라리의 별장으로 여행을 가고, 저녁에 술을 마신다. 술을 못 먹는다는 후카세가 비난을 당하자 히로사와는 후카세를 보호하기 위해 못 먹는 술을 마신다. 그리고 늦게 온 무라리를 마중나가기 위해 등떠밀리듯이 혼자 운전을 하게 된다. 결국 히로사와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운전 중에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은 것이다.


그 후 3년이 흘러 나머지 세 친구들은 모두 좋은 직장에 취직했지만 후카세만이 변변치 않은 복사기 업체에 취직을 했다. 그나마 찾아 온 행운은 미호코라는 미모의 아가씨와 연애를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미호코 앞으로 의문의 편지가 도착한다. 그리고 그 편지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후카세 가즈히사는 살인자다!'


미호코는 이것이 무슨 의미냐고 묻고, 결국 후카세는 3년 전 사건을 모두 털어놓는다. 자신을 이해할 줄 알았던 미호코는 차가운 표정이 되어 후카세를 떠난다. 그리고 다른 세 친구들에게서 같은 편지가 도착한다. 심지어 아사미는 지하철에서 떠밀려 죽을 위기까지 겪는다. 후카세는 과연 누가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알기 위해 히로사와의 고향집과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이 알지 못했던 친구의 본 모습을 알아간다.


후카세는 히로사와를 알아갈 수록 그가 대단한 친구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각종 운동에 소질을 보이고, 야구는 거의 선수급이었다. 커다란 덩치와 공부실력으로 많은 여학생들이 그를 좋아했었다. 다만 특이한 점이라면 따돌림을 당하거나 약한 사람들을 보면 그를 보호하며 친구가 되어 준다는 것이다. 그들과 같은 낮은 단계로 내려가 친구가 되기에 상대는 히로사와가 자신과 같이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알게 된다.


후카세는 히로사와가 동정심 때문에 자신과 친구가 되어 주었고 생각하고, 자신과 같은 급이었다고 생각하던 히로사와가 사실은 주변에서 인정을 받는 잘 나가는 친구였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히로사와의 동정심으로 친구가 된 또 다른 자신과 닮은 친구를 만나게 된다.



 

일본도 우리나라처럼 같은 무리끼리 어울려 다니고, 약한자를 따돌리는 경향이 매우 강한 것 같다. 어쩌면 이런 비열한 습성을 우리가 일본에게서 배운 것일 수도 있다. 점점 더 사회나 학교가 각자 등급을 나누고 약한자를 무시하고 따돌리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하다. 이 소설은 이런 일본의 학교 분위기와 사회 분위기를 예리하게 잘 담고 있는 소설이다. 과연 히로사와는 후카세의 진정한 친구였을까? 아니면 단지 동정심으로 만난 친구였을까?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저자의 예리한 시각에 놀라움을 느끼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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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 제21회 전격 소설대상 수상작
기타가와 에미 지음, 추지나 옮김 / 놀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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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인생이 마치 어린시절 운동회에서 있었던 오래 달리기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들과 함께 운동장을 달리고, 부모님들과 주변 사람들이 응원을 한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체력을 아끼며 달려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지치고,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것 같은 시간이 온다. 그러나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단순히 옆 친구에게 지기 싫다는 생각때문만은 아니다. 나를 보고 있는 부모님과 주변사람들의 기대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서 포기하면 1년 내내 친구들에게 패배자로 놀림을 당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를 악물고 달린다.




이 소설에서도 이렇게 열심히 달리고 있는 한 남자가 등장한다. 이름은 '아오야마', 일본에서 꽤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힘겹게 회사에 취직을 했다. 그도 회사에 취직을 하기 전에는 자신만만해 했다. 직장생활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우울증을 겪고 있는 선배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은 그러지 않을 자신감이 있다고 말했었다.


"진짜로 잘난 사람이란 어떤 환경에서나 잘나게 돼 있어. 사회에 나가서 가장 중요한 건 체력도 참을성도 아니야, 머리가 얼마나 잘 돌아가는가 하는 점이지. 어떤 사람과도 일해 나갈 수 있는 적응력이랑. 말하자면 '생존 능력'이 있는 사람이 가장 강한 거야. (P15)"


그러나 막상 힘겹게 직장생활을 시작한 후 그의 삶은 매일같이 쫓기는 시간의 연속이다. 아침 6시에 기상을 해 전철을 타고 회사에 출근하고, 저녁 9시가 넘어서 퇴근을 하는 생활을 일주일간 반복을 한다. 그리고 일요일이면 그저 쓰러져 잠만 잔다. 그럼에도 상사의 잔소리와 일의 압박은 점점 커져가고, 심지어는 퇴근 시간이나 일요일 휴식시간까지 일에 대한 제촉전화가 걸려 온다.


하지만 아오야마에게 사직이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여기까지 너무나 힘들게 왔기에, 그리고 여기서 관두면 다시는 직장을 못 잡을 것 같다는 압박감에 그는 계속해서 달려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모든 것을 놓고 싶다는 유혹에 지하철에서 난간을 바라본다. 그 때 그를 아는채 하는 '야마모토'를 만난다.


자신의 초등학교 친구라고 말하는 야마모토는 아오야마를 만나 너무 반가워하지만, 아오야마는 그런 야마모토가 기억에 없다. 간신히 초등학교 친구에게 연락을 해 오사카로 전학을 간 친구 중에 야마모토라는 친구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아오야마는 자주 야마모토를 만나 회사생활에 대한 고충을 이야기하고 그를 통해 위안을 받는다.


조금 나아질 것 같던 회사생활은 그의 실수로 인해 거래처를 잃을 뻔한 위기에 처한 이후부터 점점 더 최악을 향해 나간다. 직장 상사의 호통은 더 거세지고, 주변의 따돌림도 심해진다. 더 결정적인 것 자신의 실수로 알았던 것이 사실은 자신의 거래처를 빼앗기 위한 직장선배의 속임수였다는 것이다. 막다른 골목까지 이른 아오야마는 힘들게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힘겹게 이야기를 꺼낸다.


"만약에...... 만약에 말인데, 내가 회사를 그만둔다고 하면 어떡할 거야?"


어머니는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어머나, 뭐 어떠냐?"


그러면서 힘들면 돌아오라고 말한다.


어머니와 야마모토의 위로와 도움으로 그는 결국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 물론 책의 후반에는 야마모토의 정체?가 밝혀지지만 스포가 될 수 있으니 여기서는 생략한다.




나 역시 젊은 시절에 아오야마처럼 주변에서 압박감으로 인해 무너지는 사람들을 보면 정신력이 약하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요사이는 점점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한계에 직접적으로 대면할 때가 많다. 예전에는 몸을 혹사하고 정신적으로 압박을 당해도 하룻밤 자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회복되었다. 그러나 요사이는 점점 정신적인 압박에 몸이 반응을 한다. 아마 그 때도 몸에 표시만 나지 않을 뿐 이미 속에서는 압박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자주 인간의 '한계'라는 것을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한계'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훈련이나 노력을 통해 어느 정도 조절을 할 수 있지만, 누구나 결국 한계라는 것은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한계까지 자신과 타인을 몰아붙인다.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몸과 마음이 병들어간다. 어리시절은 꿈과 희망을 잃어버리고, 그저 살기 위해 달리는 무의미한 삶을 살게 된다. 모두들 다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자조하면서...


이 책을 읽으며 가족과 친구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았다. 아오야마는 한계에 몰린 상황에서 어머니에게 전화를 한다. 더 이상 달릴 수 없다거나 한계에 이르렀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아오야마가 한계에 이르렀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내려 오라고 말한다.


나 역시 가끔 사회 생활에 힘들 때거나 일을 쉴 때면 오랫동안 고향집에서 쉬고 온 적이 있었다. 남들은 비난을 해도 어머니만은 항상 반겨주시며 쉬고 싶을 만큼 쉬고 가라고 말한다. 만약 우리에게 그런 어머니나 가족, 친구가 한 명만 있어도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아오야마에게는 그런 어머니와 야마모토라는 친구가 있었다.


가끔 자신이나 타인을 한계상황까지 몰아 붙이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은 충분히 인간은 그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그렇게 자신과 남을 몰아 붙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만약 내가 그 한계를 뛰었다면,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닐 것이다. 예전의 나를 버리면서까지 과연 그 한계를 뛰어넘을만한 가치가 있을까? 그러기보다는 잠시 내려놓고 쉬면서 예전의 나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 아닐까? 결정은 어차피 자신의 몫일 것이다. 아오야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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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타기리 주류점의 부업일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8
도쿠나가 케이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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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왕국과 같은 다큐멘터리를 보면 가끔은 상처 입은 맹수가 나온다. 다른 짐승을 사냥하며 자신의 배를 채우던 사자가 어느 날 우연한 사고로 다리를 다친다. 그로인해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고 사냥을 하지 못해 힘을 잃어간다. 그럼에도 살기 위해 다리를 절뚝거리며 걸어간다. 그럼 어김없이 그 뒤에 늑대나 하이에나 같은 무리들이 사자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뒤를 따라온다. 사자가 조금이라도 상처입은 기색이나 지친 기색을 보이면 어김없이 뒤에서 달려든다. 그러기에 사자는 절뚝거리면서도 뒤를 돌아보며 아무렇지 않은듯 포효한다. 그러다가 다시금 주저않으면 기회를 누리던 사냥꾼들은 다시금 달려든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한 후 결국 사자는 늑대나 하이에나 무리에게 잡혀 먹는다.


어쩌면 우리 인간의 모습도 상처입은 사자와 같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살면서 이런 저런 이유에 마음 깊은 곳까지 찢기고 상처를 입었지만, 그 상처를 보여주는 순간 사람들은 그 약점을 물고 늘어지기 위해 달려든다. 그러기에 상처를 입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간다. 오히려 자신의 상처를 보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향해 '나 아무렇지도 않다!' '나 아직 건장하다!'라는 메세지를 던져주기 위해 더 날카롭게 소리친다.



이 소설을 처음 접했을 땐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다. 책 제목이 말하듯이 가볍고 재미있는 소설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작가 역시 [이중생활 소녀와 생활밀착형 스파이의 은밀한 업무일지]란 소설로 데뷔한 전직 만화가 출신의 일본 작가이다. 이 소설 역시 만화적 상상력으로 풍부한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배달한다는 '가타기리 주유점'이란 이미지를 처음 접할 때, 무언가 판타지적 요소를 기대했다. 사랑이나 미움같은 추상적인 요소를 배달한다거나, 시공간을 뛰어넘어 필요한 것을 배달하는 그런 것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소설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아주 오래된 낡은 주류점, 그리고 그 주류점을 어쩔 수 없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가타기리, 주류점의 오랜 직원이자 짱아치 매니아인 후사에, 마작으로 돈을 다 날려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러 왔던 후사에의 짱아치에 중독된 마루카와... 이것이 소설의 배경와 인물 전부이다.


가타기리 주류점은 술만 팔아서는 유지할 수 없는 작은 상점이기에 아버지 대에서부터 배달을 해 왔다. 가게의 모토는 '무엇이든 배달합니다!'이다. 항상 검은 양복을 입고 저혈압으로 인해 아침부터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주인공 기타기리는 이 모토에 충실히 배달을 하려 한다. 그래서 위협을 무릅쓰고 아이돌에게 선물을 배달을 하기도 하고, 조폭같은 아버지의 위협에도 아이의 어머니를 찾아 아이의 의뢰품을 배달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배달을 의뢰하는 사람이나 배달을 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상처입은 사람들이다. 화려해 보이는 아이돌의 가면 속에서 어머니의 임종을 앞두고 괴로워 하는 소녀, 불륜으로 이혼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신혼기념품을 바다에 뭍으려는 남성, 회사에서 궁지에 몰려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중년여성, 모든 기억을 잃은 엄마, 자신을 돌보아 준 아버지를 불구로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빠진 소녀... 이들에게 의뢰품을 배달하면서 가타기리 안에 숨겨져 있던 상처들이 들추어진다.


청색 유리잔 너머로 풀현듯 낮에 봤던 바다 빛이 되살아났다. 바닥이 없을 것 같던 깊고 깊은 감청색 바다. 그때 친절한 남자가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한기가 들었다. 만물의 소음을 남김없이 삼키는 세찬 바닷바람은 때때로 정상적인 사고까지 휘감아 데려가는 것이까. 마음을 흘리는 감청색 바다 앞에 섰던 순간 그는 분명 저쪽으로 가고 싶은 충동에 쉽싸여 있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저 맑은 바다 너머를 한 번 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내가 이렇게 술잔을 비우는 사이에도 이 세상 어디서가, 누군가는 절벽에서 몸을 던지겠지. 저마다의 무거운 이유를 등에 지고 절벽 끝에서 바다를 내려다볼 남자들과 여자들. 거기까지 와야 했을 그네들의 심정은 알길이 없지만, 어쩌면 눈 밑에서 일렁거리는 아름다운 빛깔에 홀려 몸을 던지는 사람이 있을지 누구 알랴 (P208)


천천히 고개를 들자 거울 속에 창백한 얼굴이 있었다. 축축한 머리가 한 움큼 관자놀이에 달라붙어 있다. 침을 삼키자 목울대가 커다랗게 출렁였다. 초췌한 그 얼굴 너머에 가타기리는 마침내 이물감의 정체를 깨닫는다. 그것은 지극히 미세한 틈새로 흘러나온 죄의 기억이었다. 우물 속처럼 깊이 가라앉아 있던, 결코 지울 수 없는 죄의 기원. 기타리기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때였나? 낮에 그 절벽 끝에 섰을 때? 거기서 나도 모르게 뚜껑이 열었을까? 아니, 아니다. 기억의 뚜껑은 이미 오래전부터 헐거워졌 있었다. 그리고 그 기묘한 의뢰를 계기로 열렸던 것이리라, 그 의뢰인을 대신해 누군가에게 '악의'를 배달한 날, 그날부터 뚜껑은 밀려나기 시작했고 오늘은 끝내 꿈이 되어 밖으로 흘러넘친 것이리라. (P217)


소설은 기타기리의 배달로 파국을 맞던 인생이 갑자기 좋아지거나, 자살을 하려던 소녀가 갑자기 소망을 찾는다는 극적인 반전은 없다. 기타리기 역시 배달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극적으로 회복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런 배달을 통해 그들은 자신 안에 감추어 두었던 상처를 서로에게 보여 준다. 나의 상처를 이용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잠시 접어 둔채... 그리고 자신의 상황에서 줄 수 있는 조금의 위로를 서로에게 던질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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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2-22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물의 세계나 인간의 세계나 상처 입은 자들이 온전히 자신을 유지하고 살 수 있는 곳이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가을벚꽃 2016-03-05 11:29   좋아요 0 | URL
그러기에 더욱 더 상처입고 약한 사람에 대한 보살핌이 절실하다고 느껴지네요. 이 책처럼 작은 위로라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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