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로 유명한 E.H.카는 '사실의 기록하는 역사'보다 '해석의 역사'를 중요시한다. 그는 역사란 과거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라는 기존의 생각이 사실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과거의 수많은 사건이 모두 역사가 될 수 없기에, 역사가는 그중 현시대에 의미 있는 몇 가지 사실을 끄집어 내어 역사에 기록한다. 이 과정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역사가의 시각이나 관점이 배제될 수 없다. 그렇다면 역사란 역사가의 주관적인 생각을 담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역사가는 현재의 필요에 따라 과거의 사건들을 기록하는 것이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과거의 역사의 해석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거는 현재에 비추어질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또 현재도 과거에 비추어질 때에만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이 과거의 사회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리고 현재의 사회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증대시키는 것, 이것이 역사의 이중적인 기능이다." - [역사란 무엇인가], 까지, P 79


 


 

이런 E.H.카의 주장을 더 분명하게 설명해 주는 역사에 관련된 서적이 최근 출간된 일본인 학자 사토 마사루의 [흐름을 꿰뚫는 세계사 독해]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아날로지적 사고'를 강조한다. 아날로지적 사고란 현재 상황과 비슷한 과거의 역사를 통해 조금 더 지혜로운 판단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결국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의 실패를 통해서는 현재에 그런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이고, 과거의 성공을 통해서는 그런 성공을 이어가기 위해서 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500년도 더 넘은 사건인 '임진왜란'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이 전쟁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현재에 더 나은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사실 [징비록]이 위대한 이유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런 사실을 바탕으로 앞으로 이와 같은 재난이 발생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기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징비록은 단순히 임진왜란의 역사를 기술하는 것에 뛰어넘어 그 전쟁을 판단하고 평가하고, 해석하고 있다.

사실 임진왜란이라는 개관적인 역사적 사실을 바라보는 중국과 일본과 한국의 시각은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아카넷에서 출간한 [교감 해설 징비록]은 기존에 출간된 다른 징비록들과 차이가 있다. 책 제목에서 보듯이 징비록을 단순히 번역하는 것에서 넘어 그 징비록의 내용을 해석하고 다른 문헌과 비교하고 있다. 저자인 김시덕 교수는 여러 자료, 특히 중국과 일본의 자료들과 징비록의 자료들을 대조하며 같은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보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서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삼국의 시각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일본의 경우는 임진왜란에서 자신들의 승전 부분만을 강조한다. 그러기에 백제 관전 투나 칠천량 해전, 울산성 전투 등을 강조한다. 백제관 전투는 평양성을 함락한 명나라 장군 이여송이 퇴각하는 일본군을 쫓다가 백제관에서 패한 전투이다. 칠천량 해전은 이순신 대신 삼군 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패한 전투이다. 임진왜란 해전 중 우리나라가 유일하게 패한 전투이기도 하다. 울산성 전투는 이여송의 뒤를 이은 명나라 제독 양호가 울산에 쌓은 일본 왜성을 공격한 전투이다. 명나라 군대가 거의 승리를 거두었지만, 어리석은 판단으로 후에 일본군이 기사회생한 전투이다. 일본이 이런 전투들을 강조하는 것은 이 전투가 일본이 크게 승리한 전투이기도 하지만, 칠천량해전 외의 두 전투에서는 모두 명나라 군대와 맞붙어 승리했다는 것에 이유가 있다. 그러기에 일본은 백제관전투를 1000년 만에 중군과 싸운 전투로 본다.

"임진왜란 당시 일어난 수많은 전투 가운데 어떤 것이 중요한 전투였는지에 대해 조선, 명나라, 일본은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인다. 일본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전투는 백제관 전투, 울산성 전투, 사천 전투 등 자신이 명군에 승리한 전투였다. 그중에서도 백제관전투에 대해 일본인들은 임진왜란의 국면을 결정한 중요한 전투임과 동시에, 고대 일본의 백제 구원군이 당군과 백촌강에서 맞붙은 이래 거의 천 년 만에 다시 중국군과 일본군이 정면으로 충돌한 전투라고 이해했다." [교감 해설 징비록], 아카넷, P 392-3

반면 일본이 크게 대패한 행주산성 전투 같은 경우는 단순히 권율 장군이나 조선군에게 패한 것으로 보지 않고, 행주성에 명나라 군대가 있었다는 왜곡된 기록을 한다. 자신들이 얕보는 조선에 대패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식의 기록은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은 임진왜란에서 중요한 시기인 1592년의 기록은 거의 없고, 다음 해 자신들이 참여해 평양성을 함락시킨 전투부터 전쟁을 기록하고 있다. 자신들이 전쟁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전쟁의 승리 역시 자신들의 역할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징비록은 임진왜란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방대한 징비록에 나와 있는 사관을 모두 분석하기 힘들지만, 류성룡이 전쟁을 바라보고 있는 시각은 조선의 수군, 특히 이순신이 전쟁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이다. 임진왜란 발발과 함께 일본군이 평양까지 파죽지세로 점령한 후에 일본군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를 못 했다. 그들이 이렇게 파죽지세로 진군한 이유는 선조를 잡기 위해서인데 선조가 있는 의주를 놔두고 평양에 머문 것이다. 징비록에서는 그 이유를 이순신의 옥포해전과 한산도해전의 승리로 본다. 육지와 바다에서 진군하던 일본군이, 바다에서 길이 막혀 버린 것이다. 특히 일본 수군들은 식량을 비롯한 보급품을 수송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평양까지 진군한 일본군에게 보급품이 끊겨 버린 것이다. 그들은 지원군도 보급품도 없이 평양에서 고립된 것이다. 이를 통해 전쟁의 승기가 잡히고, 의병들과 관군들의 반군으로 전쟁이 승리한 것으로 보는 것이 [징비록]의 시각이다.

징비록에는 임진왜란과 관련된 잘못된 판단들과 정책들이 적나라하게 기록돼어 있다.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동시에 임진왜란에서의 승리가 명군의 도움이 아닌 이순신을 비롯한 많은 군사와 백성들이 목숨을 버리고 싸워서 얻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외세에 의존하지 않는 자주적인 역사관으로 전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임진왜란을 모두 류성룡과 같은 시각으로 본 것은 아니다. 의주까지 도망간 선조는 전쟁의 승리가 이순신과 같은 장군들이나 백성들이 협력해서 얻는 것이 되면 자신의 입지가 말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기에 그는 전쟁이 끝난 후에 전쟁의 승리를 자신이 명군을 데려와서 승리한 것으로 해석한다. 결국 승리의 주역이 명나라 군대였고, 그 명나라 군대를 데려온 자신이 전쟁 승리의 일등공신이었다는 것이다.

이번 왜란에 적을 평정한 것은 오직 명나라 군대의 힘이었다. 우리나라 장수들은 명나라 군대의 뒤를 따르거나 혹은 요행히 패잔병의 머리를 얻었을 뿐 일찍이 제 힘으론 한 명의 적병을 베거나 하나의 적진도 함락하지 못 했다. - [역사 저널 그날 4], 민음사, P309

만약 징비록이 남아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지금도 임진왜란을 명나라와 일본의 전쟁으로, 명나라의 도움으로 우리가 승리한 전쟁으로 알고 있지 않을까? 징비록이 기록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선조와 같은 몇 명의 위정자들이 자신들의 치부를 덮기 위해 왜곡한 잘못된 역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징비록을 읽으며 역사를 단순히 사실로 기록하는 것보다 그 역사를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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