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9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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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거울을 보면 새치가 부쩍 많아진 모습을 보게 된다. 이렇게 나이를 먹어간다니 서글픈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젊음이 지나가고, 나이가 들어가고, 흰머리가 나고, 그렇게 노쇠해지며 몰락해가는 것이 인간의 육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에 아이는 점점 자라고, 젊어지고, 그리고 내 자리를 대치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현인(賢人)처럼 이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육체적으로 몰락해 가는 나 자신을 부정하며, 다시금 육체적 젊음을 돌이키기 위해 몸부림을 칠 것이다. 결국에 몰락할 것을 알면서도 몸부림을 치는 것, 그것이 인생이 아닐까.

가을날 디자이 오사무의 [사양]이라는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감성적인 생각들을 해 보게 된다. 디자이 오사무는 [인간실격]이라는 작품을 통해 만났다. '자기 비하'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점점 그 늪 속에 잠식되어 가는 한 인간의 비참한 운명을 그린 작품이었다. 한 인간 내면의 어둡고 음침한 모습과 함께, 스스로를 파멸해 가는 과정들을 읽으며, 조금의 답답함과 무거움을 느꼈었다. 그러나 또 그만큼 인간 내면의 어두운 감정에 대해 공감하기도 했었다.

[사양]은 [인간실격]보다는 조금 덜 어두운 면이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소설의 제목처럼 몰락해 가는 일본의 귀족 가문과 그 가문의 여성을 주인공 설정하고 있어서, 어두운 부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사양(斜陽)이란 지고 있는 해를 의미한다. 소설의 몰락해 가는 가즈코의 가문을 이야기한다. 소설의 배경은 일본이 2차 세계대전의 패망 직후이다. 가즈코의 가문은 권위 있는 귀족 가문이었으나 패전과 아버지의 죽음으로 몰락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일본이 패전하던 해에 집을 팔고 이즈이의 산장으로 집을 옮긴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시름시름 앓고 죽어간다. 전쟁에서 돌아온 동생 역시 아편과 알코올 중독으로 집안의 재산을 축낼 뿐이다. 주변의 상황과 경제적 압박으로 인해 가즈코는 점점 압박을 당한다. 그 과정에서도 동생의 스승인 우에하라를 사랑하게 된다. -물론 소설을 읽다 보면 이것이 정말 사랑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일반적인 사랑과는 다른 모습이다 - 우에하라는 한때 이름있는 소설가이지만, 지금은 아내와 자식이 있지만 술과 폐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상태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우에하라를 연모하고 그의 아이를 낳는 것이 마치 마지막 희망처럼 생각한다.

"저는 불량한 사람이 좋아요. 더구나 딱지 붙은 불량이 좋아요. 그리고 저도 딱지 붙은 불량이 되고 싶어요. 그렇게 하지 않고는 단지 제가 살아갈 방도가 없을 것 같아요. 당신은 일본 제일의 딱지 붙은 불량이겠죠. 그리고 최근 다시 맣은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추접스럽다. 역겹다며 몹시 미워하고 공격한다는 이야기를 동생한테서 듣고, 더욱더 당신이 좋아졌습니다. 당신에겐 틀림없이 애인이 여럿 있을 테지만, 머지않아 저 한 사람만 좋아하게 될 거예요. 어째선지, 제겐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듭니다. (P 92)"

결국 가즈코의 어머니는 폐병으로 죽고, 동생도 자살하지만, 가즈코는 우에하라는 만나 아이를 임신하며 소설을 끝낸다. 저자는 가즈코의 주변의 모든 것이 몰락해 가고,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아이를 임신한 것 한 가지로 희망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며 소설을 끝낸다. 아마 그런 희망 밖에 찾을 수 없는 당시의 상황이 소설에 반영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소설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몰락해가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런 이미지에 뱀의 이미지를 더해서 조금 더 섬뜩하고 잔인한 느낌까지 더 하게 된다. 이 뱀의 이미지는 소설의 복선적인 역할과 함께 가문의 몰락과 어머니의 죽음을 암시한다.

"저녁 해가 어머니의 얼굴을 비추어 어머니의 눈이 푸르스름하니 반짝였다. 얼핏 노여움을 띤 그 얼굴은, 대뜸 달려가 안기고 싶을 만치 아름다웠다. 그리고 나는 아아, 어머니의 얼굴을 아까 본 그 슬픈 뱀과 어딘가 닮았다고 생각했다. 또한 내 가슴속에 살무사처럼 흉측한 뱀이 굼실굼실 자리 잡고 있어, 깊은 슬픔으로 덧없이 아름다운 어미 뱀을 언젠가 물어 죽이고 마는 게 아닐까, 어쩐지 자꾸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p 19)"

아마 이 소설은 2차 세계대전 때 패망해 가던 일본인의 심정이 되지 않고서는 온전히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일본의 제국주의는 우리에게는 끔찍한 경험이었지만, 일본인에게는 나름 한여름 밤의 꿈처럼 화려한 경험이었을지도 모른다. 몇 천 년간 섬나라에 갇혀서 대륙으로의 진출만을 꿈꾸었던 그들이, 태평양의 대부분과,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점령하는 것을 지나서 인도와 호주까지 영역을 넓혔을 때, 마치 세상이 자기 것인 양 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거대한 거인이 서서히 몰락해가고, 미국의 압박에 의해 점점 심장이 조여 왔을 때 그들이 받은 충격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미국에 의해 패망하고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몰락하고 있는 사양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소설은 그런 몰락 속에서도 작은 희망이라도 잡으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그 시대의 젊은이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설은 시대를 반영한다는 말이, 디자이 오사무의 [사양]이라는 소설에 딱 맞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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