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대부분 끝을 알지 못한다. 그 끝을 어렴풋이 안다고 말하는 이도, 믿는 이도 모두 결국 또렷하게 그 끝을 알 수는 없다. 가봐야 끝이고 끝이 되었을 때 우린 그게 끝인 줄 모른다. 알고나면 이미 늦는다. 그런데 이 영화들은 우리마저도 끝이 어딘지 아주 잘 알고, 결코 해피엔딩이 될 수 없는 이야기다. 우리는 그것을 비극이라 부르고,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현실을 잘 몰랐던 때와 마찬가지로 도울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아프가니스탄은 4단계 여행금지국가, 이란은 2단계 여행자제국가로 외교통상부 <해외안전여행> 홈페이지에 친절하게 안내되어 있다. 1,2,3,4단계 국가가 쭉 나열되어 있는데 일단 두 개만 하자. 죽어도, 반드시, 꼭, 가야할 이유가 없는 곳. 공교롭게도 더 가고 싶고 알고 싶은 곳.
이제 그 땅의 여자들이 어째서 그렇게 살아가는지 눈 감고도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잘 안다. 하지만 영화와 뉴스를 통해 접하는 게 그들의 실상 전부다. 물론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전부다. 이보다 더한 상황이 버젓하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자꾸 눈돌리게 된다. 채널을 멈추고 찾아보게 된다. 중동,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핍박과 비윤리에 관심가질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이슬람 과격파의 비도덕성을 비난하게 되지만 그런다 해서 그곳 여자와 아이들,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남자들의 상황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여기 한 편의 아프간 영화. 문학으로는 [천 개의 찬란한 태양]과 [연을 쫓는 아이]의 카불 출신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가 있지만 영화로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천상의 소녀>가 처음이다. 이전에도 아프간 영화는 있었고, 이후로도 있어왔을 것이다. 다만 탈레반 정권이 붕괴된 후 제작되어 칸 영화제에서 호평 받은 영화가 [Osama]라는 원제의 <천상의 소녀>다. '오사마'는 소녀의 정체를 아는 어떤 소년이 소녀를 감싸기 위해 거짓으로 지어낸 남자이름으로 제목이기도 하다. 감독은 탈레반 붕괴 후 아프간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 의해 탄압받는 여성과 여성해방투쟁으로 가난에 시달리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주인공 레일라 역의 여자아이는 길거리에서 즉석 캐스팅 됐고, 엄마와 할머니 역할의 배우는 포로수용소에서 만났다고 한다. 소녀는 영화에 출연하겠냐는 말에 영화가 뭔데요? 되물었고, 탈레반 붕괴 후 자신의 영화가 아프가니스탄의 실상을 알리는 역할을 하리라 믿었던 감독은 국제사회의 무관심에 상처 받았다. 아쉽거나 슬프다고는 말하지 않았으나 말 속에 체념이 섞여있음을 짐작했다. 아프간 문맹률은 여전히 높고, 세계의 지원도 미미하다고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했던 감독이 전했다.(이 모든 내용을 감독의 인터뷰 기사로 보았다)
이 영화는 투박하고 부석거린다. 모든 거리와 건물이 헐벗었고 늘 폭격 맞는 땅 답게 풀한포기조차 없어 삭막하기 그지 없다. 툭툭 치며 다가오는 흔들리는 화면은 세련되지 않아도 폭발하는 힘을 지녔다. 뼛속까지 진실이라는 명확함이 주는 진정성 때문일 것이다. 소녀의 두려움이 서린 눈빛은 또래가 가져서는 안되는 안타까움을 담아낸다. 낯설고 황량한 중동 땅으로 우리를 안내할 때 무려 시적이고도 신비롭다. 금지된 땅, 자유와 생명이 버려진 곳. 그 땅에서 <천상의 소녀>는 탄생했다.
폭격으로 아버지가 죽은 뒤 소녀의 집에는 생계를 이을 남자가 없다. 식구라곤 달랑 늙은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레일라 뿐.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여자의 몸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 땅의 여자들은 오로지 알라 신이 부여한 자격을 가진 남자에 의해서만 의식주를 이어갈 수 있다. 할머니와 엄마가 레일라에게 제안한다. 가만 있어도 우린 죽을 거고, 들켜도 죽지만 들키기 전까지는 괜찮다고. 두려움을 숨기지 못한 채 떠밀리다시피 남장을 한 레일라는 일터에 나간다. 그즈음 군사훈련 명목으로 남자 아이들이 징집된다. 연약하고 호리하고 예쁘장한 소녀가 우직하고 그악스런 남자들과 소년들 틈에 섞여 있다. 목욕 시간을 무사히 넘기지만 아이들의 놀림과 수근거림이 계속되는 한 들키는 건 시간 문제. 결국 재판이 열리고 공개처형 당할 위기에 처하자 한 남자가 나서 자기가 데려갈테니 아이를 처형시키지 말아달라 하고 재판장에게 받아들여진다. 늙은 남자는 집으로 데려가 꽁꽁 잠긴 빗장을 열고 그녀를 가둔다. 이미 여자와 아이들이 여럿 가둬진 남자의 집. 레일라는 애원하지만 알고 있다. 더이상 자유를 찾지 못할 것이며, 다시는 소년이 무지개를 건너면 소녀가 되고, 소녀가 무지개를 건너면 소년이 된다는, 남자와 여자는 똑같다는 할머니의 오래된 옛날 이야기를 들을 수 없을 거라는 것을.
덩치 큰 늙은 남자가 목욕통에 몸을 담근다. 겁에 질린 여자 아이의 다리 아래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이 순간 여자가 된 것이다.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는 영화는 어느 것 하나 해결하지 않은 채 레일라를 내동댕이 친다. 희망적 결론을 염두에 뒀던 감독이 현실적 결론으로 바꾸기로 결심한다. 운명에 순응할 것인가, 대항할 것인가. 순응하면 살고 대항하면 죽을텐데, 이곳이 저곳보다 낫다는 보장이 있을까. 꺾여버린 날개로 모든 여자가 "신이시여, 어째서 여자를 만드셨나요" 만 하고 있기에도, 맞서기에도 이들이 치러야 할 희생이 너무 커 보인다. 부당함에 치가 떨린다. 다큐 보다 진한 현실감, 두려움과 공포로 흔들리는 레일라의 눈빛, 황량하게 파괴되고 척박하게 메말라버린 땅을 구경하는 게 내가 한 일 전부다.
한편, 이란 영화 <천국의 아이들>은 전혀 다르다. 이 영화는 놀랍게도 '구두(운동화)'와 '마라톤' 만으로 아이들의 모든 것을 표현해낸다. 세속에 찌든, 가난이란 이름 앞에 고개 숙이고 자존심 굽힌 우리들을 진짜 천국으로 데려간다. 모든 것은 오빠 알리가 여동생 자라의 구두수선을 해오다 감자 사러 들른 사이 숨겨둔 구두가 없어지면서 시작된다. 자라는 울먹이고, 알리는 자기 운동화를 오전 등교인 자라가 오후 등교인 알리에게 넘겨주면 둘 다 걱정없이 학교에 다닐 수 있다고 설득한다. 부모님에게는 숨기기로 하지만 혼이 날까봐 그런 것만은 아니고, 다시 빚을 져야하는 아버지가 걱정돼서다. 알리와 자라에게는 갓난 동생이 있고, 엄마는 허리를 다쳤으며, 아빠는 허드렛일을 하며 돈을 벌지만 넉넉치 못한 형편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가난을 모르는 이 아이들의 예쁜 마음은 운동화가 도랑에 빠져도, 등교시간에 늦었다며 추궁 받아도 굴하지 않고 그 씩씩함과 순수함으로 모든 것을 돌파한다. 대단하다.
어느 날 학교 내 마라톤 대회의 3등 선물이 운동화라는 것을 본 알리는 꼭 동생에게 운동화를 선물해주겠다며 죽을 힘을 다해 달리다 결국 1등을 하고 만다. 중동 그러니까 이란 영화 중에서는 제법 알려진 편이고, 1997년도 영화라 연식도 꽤 된데다, 큰 사건 없어 보이면서도 큰 울림 주는 희망적 주제로 좋은 평을 받는 영화다. 15년이나 지났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요즘 세태에 딱 들어맞기까지! 그저 가난 이야기로 볼 수도 있겠지만 <천국의 아이들>은 좀 더 나아가 '구두(운동화)'나 '마라톤'이 철저히 상징과 비유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어른용이래도 손색이 없다.
자라가 학교에서 자기 구두로 보이는 신발을 신은 여자아이를 보고도(확신하고도) 말하지 않은 것, 알리에게 알려 함께 그 여자아이의 집 앞에 몰래 찾아간 것, 가난한 여자아이의 맹인 아버지를 보고 발길 돌린 것, 거리낌 없이 여자아이와 친구가 된 것. 이 모든 것이 아이들의 것이라기에는 벅찰 만큼 눈부시다. 혼자서 돌파하려 마라톤에 나간 것이나 힘들게 결승선을 밟은 것, 동생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 부모님에게 징징대지 않은 것 등 사실 어느 시점부터는 어른들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아이들 시선으로 돌파하는 현실과 부조리, 희망에 대한 영화다. 사랑스럽고 어여쁘다. 작은 아이의 커다란 눈망울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짠해온다. 시작부터 끝까지 뭐 하나 잘라내거나 버릴 부분 없는 영화.
1편의 명성이 자자했다. 대학 때 '부조리'에 관한 설명이 필요할 때마다 단골등장한 작품이었으니! 실제로도 많이 컸겠다. 1997년도면 나도 열다섯 살인데, 알리는 그보다 몇 살이나 어릴지. 극중에서는 아홉 살 정도로 나오는데. 어쨌든 눈물 짠한 그 남자아이도 지금은 20대 청년이 됐겠다. 세월은 마법 같은 것.
그리고 배경지식은 전혀 없지만 <천국의 아이들 2-시험 보는 날>이 2005년에 나왔다. 전편보다 나은 속편 없을텐데^^;;
일단 이 영화를 확보해 놓고 나중에 봐야지! <거북이도 난다>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도 가지고 있는데 나중에 봐야지! 이러다가 중동으로 가는 여행가방 쌀 것 같기 때문에. 이러다가 조만간 때려치우고 어디로 갈 것 같으니까. 나는 그런 거 잘 하고 이젠 별로 망설임도 없다.
우리는 결혼해서 이민을 생각해보기도 하고, 아이 없이 서로만 바라보고 살지, 아님 명절이나 아플 때나 친구들이 자식 자랑하거나 자식 걱정할 때 너무 쓸쓸해질테니 딸 하나만 낳아서 예쁘게 키우자던가,
어제 <신들의 만찬>에서처럼(드디어 짜증나는 <애정만만세>와 재미없는 <천번의 입맞춤>이 끝나고 <무신>과 <신들의 만찬>이 시작했다) 평생 지중해 크루즈를 타보자던가(물론 드라마는 국내 크루즈), 연금 꼬박꼬박 챙기든가 아주 나이가 많이 들어서 연금을 퇴직금으로 챙겨가지고 암스테르담에서 묵을 때 봤던 마음씨 좋고 따뜻하고 예의 바르고 지성적인 게스트 하우스의 노부부처럼 늙어가자던가. 뭐 그런 꿈들을 재빨리 실현시킬 수 있다. 있겠지! 있어야지! 있어야 한다.
어째서 중동과 아프리카에 자꾸 관심이 가는지, 일부러라도 국제사회 섹션을 찾아 읽고 여기 봐봐, 이런 일도 있대, 하면서 내 삶으로 자꾸 끌어오는지, 마우스 커서도 아닌데!!! 그래도 이들의 처절한 삶과 고통의 아픔, 자유를 위한 투쟁, 인권을 쟁취하기 위한 사활을 건 싸움이 절대 내 것이 되지가 않는다. 내 것이 될까봐 두렵지만 내 것이 아니라서 안도하지만 내 것이 되지 않는 것이 때때로 그래서 내가 그들을 즐기는 대상으로 여기는 걸까봐, 그들의 아픔을 통해 조금 불행한 내 삶도 행복하다고 반추할까봐 죄스럽다.
학창시절 무용 선생님이 내준 숙제에는 무용공연을 보고나서 써야 하는 감상문이 있었다. 친구들과 무려 학교 바깥으로 어른없이 외출할 기회를 얻은 것만으로도 너무 기쁜 나머지 문화회관에서 맛난 것도 사먹고(그래봐야 김밤,핫도그,어묵,떡볶이,코코아,음료수 정도였을!) 수다 삼매경으로 시간을 보내다 드디어 들어가 앉은 객석에서의 무용은 사실 지겹기만 한 지루한 예술이였다. 그때 예술은 모두 지루했다. 여중생에게 전위예술은(하물며 그림,음악 또한) 그냥 사람이 움직이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는 스물 두 살에 부산에서 열린 샤갈 전과 달리 전에서 뭔가를 느꼈고, 인상파 거장전을 스물 네 살에 보고는 전율마저 느꼈다. 그 후 유럽 삼대 미술관과 내셔널 갤러리, 테이트 모던, 초상화 미술관, 자연사 박물관, 빈 미술사 박물관, 고흐와 렘브란트 미술관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감동면에서는 단연 벨베데레의 클림트와 쉴레가 최고였다.
모르는 예술도 한 번에 눈에 확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그때 지루했던 무용공연에서도. 4.19를 형상화 시킨 단체 무용이었는데 고요함과 적막함, 소용돌이 치는 분노와 절정, 다시 찾은 희망 순서로 이어지는 멋진 작품이었다. 나중에 붉은 장미 꽃잎이 무대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데 정말 핏빛 절규처럼 여겨져 눈물까지 글썽일 뻔 했다. 무용을 모르지만 무용은 아름다운 예술이었다. 이 영화들이 그때 본 무용과 다르지 않다. 희망과 자유를 가볍게 그리려 하면 할 수록, 오히려 가볍고 발랄하게 현실을 반추할 수록 점점 더 그때 바닥에 떨어지던 붉은 꽃잎이 떠올랐다. 붉은 피, 처절한 욕망, 그것들이 모두 상처와 자유를 상징하고 있음이 또렷이 느껴졌다.
아픔과 슬픔과 분노 같은 것들이 문화적 코드가 되기란 쉽다. 영화,문학,무용,음악 마저도 그것들을 극복하려 탄생한 부수물들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것 뿐만이 아니지만 문화란 그게 다인 것이 아닐까 하고. 누군가를 이해하도록 돕고, 나의 트라우마를 끄집어 내고, 남의 상처를 이해하는, 또는 우리가 이루고 싶은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해 소통하고 노력하는 과정. 이 모든 것이 문화예술이라면, 아프간과 이란 영화는 그 절정에 있다.
사실 서른이 되기 전에는 아프리카와 남미 빼고는 세계 지도 어느 대륙이든 한 번씩 발 담글 수 있을 줄로 알았다. 특히 아프리카 희망봉. 쿠바와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브라질리아. 칠레, 콜롬비아, 페루. 새들이 가서 죽었다는 로맹가리의 그 페루 말이다. 그러려면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가 필수일텐데 짧은 시간에 되는 게 아니니까 [러브 스토리 인 하버드]에 나오는 김태희처럼 1년 동안 준비하다 김래원을 두고 휑 하니 꿈을 찾아 가버릴 수 있는 그런 여자가 되어야 하나, 뭐 그런 생각들.
같은 것을 보아도 스물 살에 보는 것과 서른,마흔,쉰에 보는 것이 여러가지 의미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며 살았다. 위험하지만 그런 곳에서도 꿈을 키우는 중동은 아프리카나 남미 보다 더 두렵지만 다이내믹 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이젠 감히 꿈꾸지도 못한다. 초콜릿과 바나나와 사탕수수를 캐내며 살아내는 아프리카와 남미 소년보다 [천상의 소녀] 오사마가 이 순간 내게는 더 안쓰럽다. 일을 해도 목숨 걸고 성별 바꾸어 해야 하는 현실이라면 거긴 희망이 티끌 만큼도 없는 거니까. 남자에게만 매달려 사는 여자들이 행복한 꼴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내가 탐내면서 곱씹고 신비해 마지 않을 그런 대상의 땅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 이 곳이 아닌 곳을 사랑한다. 힘은 없지만 그곳이 지금 보다 조금씩 좋은 쪽으로 달라지기를 바란다. 어떤 체제, 전통, 관습에 의해 고통 받고 희생 당하는 이들이 차차 자기 권리를 찾아가서 우리 만날 수 있기를. 작은 기도로 큰 꿈을 바랐다. 나는 그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