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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마크하기 슬퍼말아요, 돌아올 거니까. (추천14 댓글6 먼댓글0) 2012-02-03

좀 색다르고 덜 알려진 여기 아닌 낯선 곳의 소설을 읽고플 때 민음사 모던 클래식 시리즈를 찾는다. 스스로에게 책공급이 원활하지 않고, 본래 따박따박이 불가능한 성격이라 사모아둔 것은 아니고 몇 권 가진 게 있는데 그 중 이게 제일 얇아서 읽기 시작했다. 책탑 맨 아래에 있어서 꺼낸다고 먼지 다 뒤집어 쓰긴 했지만. 보기 드물게 이탈리아 여성작가인데 태생은 스위스. 아, 이럴 경우 이 여자는 스위스어를 쓸까, 이탈리아어를 쓸까. 아님 둘 모두를 쓸까. 아참, 스위스는 독일어, 불어, 이태리어 등등을 섞어쓰는 연방국가였지. 스위스어란 게 없지. 그러면 어떤 언어로 소설을 썼을까. 그런 것들이 궁금해지긴 해도 오래 가지 않는 단편적 의문이라 책을 펼치고 읽어내려가는 즉시 잊어버린다.

 

뭘로 썼든 무슨 상관이람, 어차피 나는 번역된 글을 읽을 뿐이잖아. 아주 오랫동안 내게 이탈리아어로 말하는 나라는 로망이었다. 그걸 어디서 써먹을 거라고 나는 그토록 열을 올렸던가. 베네치아에서 사온 보라색 목걸이가 유난히 반짝이면 나는 로망 속 바로 그 나라로 꿈나라 여행을 떠난다. 내게는 아주 어릴 때부터 머리맡에 있던 불이 켜지는 커다란 지구본과 색색깔로 칠해진 멋진 세계지도와 이제는 세계지도마저 그릴 정도로 달달달 외워버린 국가와 수도이름. 더이상 그것들이 낯설지 않다. 그래버린 나도.

 

 

 

 

 

 

 

 

 

 

 

 

 

 

여기 <아름다운 나날>에는 두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표제작 '아름다운 나날'과 '프롤레테르카 호'. 두 편의 상관점을 쉽게 찾지는 못하겠다. 완전히 다르지만 또 닮은 구석이 없지도 않다. 일단 주인공이 사춘기 소녀란 점에서 닮았다. 건조하면서 미끌거리는 문체가 닮았다. 배경이 그렇지 않은데도 불구, 설산을 연상시키는 새하얀 아름다움이 연상된다는 점에서도. 일단 '아름다운 나날'은 작가 플뢰르 이애기의 자전적 소설이란다. 아니,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는데 작가 또한 스위스 산골마을 기숙학교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아름다운 나날>의 배경이 바로 스위스 명문 기숙학교로 그곳에서 체험한 일을 담담하고 절제있는 어투로 회상한다. 회상 대부분의 시간을 전학생 프레데리크를 향한 동경과 열망, 시기와 애증 같은 것을 설명하는 데 쓰고 있는 걸로 봐서 아주 완벽한 여자아이의 이야기다.

 

일곱 살에 기숙학교에 넣어진 '나'의 생활은 그저 폐쇄된 여기숙학교에서의 일상 뿐인데, 아무 것에도 애정을 두지 못하던 나에게 프레데리크의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무엇, 시크한 매력으로 똘똘 뭉쳐진 그녀를 닮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기숙학교 전체에서 공부는 물론, 사고하는 방식까지 그녀를 따라잡을 자 없다. 오로지 통제, 박탈, 공허, 고독을 느껴야 했던 여학생들 틈에서 프레데리크를 따라잡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왜, 어째서 그녀여야 했을까. 이기고 싶고 넘어서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과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도를 넘어 나를 괴롭히곤 했다.

 

많은 학생들에게 일기장이 있었다. 돋을새김 장식이 달린 일기장. 열쇠가 달린 일기장. 그들은 자신들이 인생을 독차지했다고 여겼다. (p.44)

 

설명할 수 없는 끌림과 동경으로 나는 프레데리크를 사랑했고, 그애는 나에게 별로 잘 보이려는 관심조차 없었다. 나는 늘, 무엇을 하든 그애를 신경 썼고 그애에게 어떻게 보일 지를 먼저 걱정했으며, 그애가 나를 바라봤으면 했다. 나는 여기는 없는, 먼 곳에 있는 엄마로부터 모든 것을 철저히 통제 받고 있었다. 심지어 독일어를 배우게 하기 위해 독일 애와 방을 함께 썼으면 좋겠다는 편지에 수도원 원장 부인은 나에게 독일인 짝을 붙여준다. 아, 모든 것이 그랬다. 나는 여기 있는 동안 늘 조정 당하고 통제 당하며 엄마가 원하는 데로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런 내 생활의 균형에 금을 낸 것이 프레데리크였다.

 

그애의 관심을 조금씩 받으며 프레데리크에게 인정 받겠다는 욕구마저 균열이 일어나자 나는 다른 친구를 사귄다. 프레데리크가 관심사에서 아주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지만, 하물며 다른 친구와 정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게 어딘지 모르게 부끄럽기도 했지만, 나는 프레데리크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그애는 아버지 부고 소식에 '아듀' 한 마디 작별인사만 남긴 채 떠나버렸다. 나는 헤어짐을 예감하지도 인정하지도 못한 채 수도원과 학교와 기숙사를 배회한다. 졸업할 때까지 기숙생활은 더이상 달라지지 않았고 졸업식 날 모두 좋은 차로 딸들을 데려갈 때 나는 기차를 타고 목적지에 내려서야 비로소 마중나온 아빠와 만난다.

 

후에 다시 기숙학교로 돌아왔을 때 더이상 기숙학교는 그곳에 없었다. 언젠가 다시 만났던 프레데리크의 불행도 그즈음에는 더이상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버렸다. 소녀는 숙녀가, 숙녀는 여자가 되었다. 그러기까지는 금방이었고 무엇도 제동을 걸 수가 없었다. 지난 날들, 무엇에 그토록 목 매고 바랐던가. 프레데리크. 그토록 닮고 싶고 인정받고 싶었던 그녀는 이제 더이상 그 대상이 아니다. 대체 과거의 여러 날들 나를 사로잡았던 프레데리크만의 싱그러움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어떤 것이었을까. 난 더이상 그때의 나를 마주할 수 없을까. 그 시간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걸까. 그 시간들과 나를 이제 어디에 가면 다시 만날 수 있나.

 

 

<프롤레테르카 호>는 소녀의 은밀한 비밀일기를 훔쳐 읽는 것 같은 감성적임과는 다른 분위기로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버지와 함께 지중해 일대를 항해하는 프롤레테르카 호를 탄 나의 과거,현재,미래의 독백. 독백이 아니지만 독백 같고, 새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 선명하게 떠오르는 나(아마도 여자)를 둘러싼 가족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아버지가 없는 동안 나를 돌봐준 아버지의 엄마, 아빠와 엄마, 나, 그리고 모든 이들을 둘러싼 비밀들. 배는 그리스 전역을 돌며 이곳저곳을 관광객마냥 누빈다. 베네치아에 정박되었던 프롤레테르카 호는 산토리니, 크노소스 등 지중해를 찍으며 나의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확대시켜 나간다.  

 

아버지와 딸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보다 깊은 애정은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지켜보되 침묵할 것. (p.115)

 

사실 아버지와 나는 그다지 살가운 사이가 아니다. 그런 적도, 그랬던 기억도 없다. 하지만 함께 배를 타고 여행을 한다. 배는 지루하다. 선장과의 첫경험은 나쁘지 않다. 어른들은 늘 여자아이가 이해 못할 비극적인 비밀을 갖고 있지. 나는 그들의 비밀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알게 된다. 진실이란 과연 올바른 것인가. 진실을 알기 전과 후가 달라져야 할까.

 

나는 이해해야만 한다. 진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사악한 열정, 흑사병과도 같이 부부에게 충격을 가져다부었던, 진실에 대한 우상 숭배와도 같은 열정을. 아버지라는 자와 깍듯하고도 열정적인 그 부인. 진실이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을 때 진실을 말하는 것. 진실이 아무 소용이 없을 때. 나이 든 자들의 경박한 고집. 그들 두 사람은 만족한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진실을 말하는 것. 그들은 나에게 그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녀는 내게 상처가 되었다면 슬픈 일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해해야 한다. 그들이 진실의 언어를 더 이상 말하지 않게 하려면 말이다. (p.206)

 

아빠는 기억을 잃어간다. 나는 진실을 알게 된다. 여행에서 돌아와도 부녀관계는 흩트러지지 않을 것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그럴 것이다. 다만 여행만은 또렷하게 남아 내가 살아갈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 늘 그렇듯 변한 건 아무 것도 없는 것. 소녀의 삶은 다시 숙녀로 여자로 그렇게 커가는 것. 명확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황금의 기억과 산의 기억이 황금 산의 기억이 된다"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기억과 자각과 글은 얼마나 뜬금없는 것인지. 그것들의 간격과 시차는 또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불투명한 아름다움. 알프스의 눈처럼 희고 깨끗하면서 차갑고 절제된 소통공간. 눈이 부셔서 쳐다볼 수 없는 생명력이 바닥에서부터 차고 올랐다. 이름 모를 두 편의 짧은 소설이 말을 걸어왔다. 과거를 딪고 현재를 무기 삼아 미래로 나아가자고. 스케치 없는 투명한 물감이 수채화처럼 번지는 것을 느꼈다. 감수성이 충만했던 소녀시절, 내 곁에 있던 보물들은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며 밤을 보내고 있을까. 글을 쓸 때 밤이었고, 지금 나는 모든 것을 가졌다.




 
 
소이진 2012-02-03 19:07   댓글달기 | URL
후후, 제가 잠시 잠수를 타시는 동안 글을 올리셨다니. 그래도 첫 댓글을 달 수 있어서 기분 좋군요!
마지막 문단이 마음에 들어요. <아름다운 나날>이라는 책 제목과도, 귀여운 책 표지와도 같은 아름다운 문장이군요.
요새 책을 읽을 때마다 무수히 드는 생각이 "번역본은 작가지망생에겐 좋지 않을텐데.."하는 생각이에요. 그래서 외국 소설을 집어들때마다 잠깐 멈칫한다니까요. 그냥 마음편히 책을 읽고싶은데 말이지요 ㅠㅠ

아이리시스 2012-02-03 20:57   URL
쓰다가 중간에 접어논 리뷰들이기 때문에 따끈따끈하지 않지만ㅋㅋㅋ 요즘은 시간이 없어서 한 번에 짠-하고 못 올리고 매일 시간 날 때마다 쪼끔씩 써둬요. 안쓰고 읽기만 하면 좀 아쉽고. 번역가는 작가가 아니니까요. 아니, 번역가도 작가인가. 예전에는 그냥 남의 말 옮긴다고만 생각했는데 인세 지급되는 걸 보면 그들도 작가가 맞지요. 좋지 않을 수도 있겠어요. 소이진님도 그런 뜻에서 얘기한 거예요? 요즘 한글 이해가 좀 달려가지고ㅜㅜ

그래도 원서로 읽을 수 있는 책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가..( '') 뭐 제가 외국에서 살고 엄청난 배송비를 지불하며 본국의 책을 사들여야 하는 거라면 어쩔 수 없이 읽겠지만요. 한글로 된 걸 읽어도 제가 대학 때 손가락 짚어가면서 떠듬 거리며 읽던 [꿈의 해석] 같은 건 더 어렵잖아요! 그것보다는 소설을 원서로 읽는 게 나아요ㅋㅋㅋ

소이진님은 뭐든 시간 나는대로 많이 읽어두는 게 더 좋을 거예요!(누나 생각^^;;)

소이진 2012-02-04 00:01   URL
음 그런 비슷한 뜻으로 말한 것이에요. 번역본은 역시 문장이 매끄럽지 않을 수가 있겠지요. 워낙에 번역을 많이 하신 김난주, 양억관 부부들이나 짬을 많이 드신 분들은 거의 작가 수준으로 섬세하게 문장이나 단어를 다루겠지만 그마저도 역시 저는 한국말로 쓴 글과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 예로써 저는 헛헛하다, 라는 단어를 한 달전에 김애란의 소설을 읽으며 처음 접했지 뭡니까. 번역 소설은 사용단어가 한정되어 잇는 것 같아서 아쉽지요.

많이 미치도록 읽어두고 싶은데 게으른 몸이 따라주질 않네요 ㅠㅠㅠ 흑흑

아이리시스 2012-02-05 02:21   URL
소이진님 주말에 뭐해요?
아참, 저 큰아빠 한 분, 작은아빠 두 분 계시거든요. 집마다(우리집 포함) 사촌들이 둘씩 있어서 저희 할머니께 손자 넷, 손녀 넷이거든요. 제일 막내가 이번에 대학 들어가는데(그러니까 스무살!) 무려 걔보다 소이진님이 세 살 더 어리잖아요?! 귀엽다니까 소이진님은. 번역까지 신경쓸 줄 아는 진정한 문학소년 같아요. 이제 책 많이 못 보는 고등학생이 되는데 벌써 걱정이 된다니까요. 못 보면 보고 싶을텐데^^

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2-03 21:24   댓글달기 | URL
내 시절에도 '아름다운 나날'이 있었을까요?
누가 뭐래도 내가 그렇게 느끼면 그게 나만의 '아름다운 나날'일텐데
전 반짝반짝하던 시절이 기억이 안 나요...흠...회사 다닐 때였을까? 뭐든 열심히 하고 뭐든 즐거웠고, 뭐든 용기있게 했던 그 때였는데 말예요. 그래도 그때도 난 늘 고민하고 갈등하고 힘들어 했었어요.

오늘도 무지하게 추웠는데 뭘 하셨나요?
딸은 세뱃돈 받은걸 털어서 머리를 하고 왔어요. 그것도 친구하고 단 둘이서. 앞머리를 자르고 매직으로 파마 머리를 폈는데 둘이 똑같이 하고 나타나니 이건 중딩 클레오파트라도 아니고...ㅋㅋㅋ
얘네들은 지금이 아름다운 나날일까요? 궁금해 궁금해~

아이리시스 2012-02-03 22:07   URL
중딩 클레오파트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럴 거예요. 이 책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온종일 저 느낀 대로만 얘기하는데도 딱 하나 맘에 드는 게 사춘기 소녀가 느끼는 세상을 잘 담고 있어요.

아하하, 계속 중딩 클레오파트라가 연상되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현맘님은 지금도 몇 가지 일을 동시에 하시잖아요! 그리고 중고등학교 땐 왜 그렇게 친구가 갖고 싶고 질투도 많이 하고 싸우고 토라지고 삐지고 그랬을까요. 제가 친구들 전화도 잘 안 받고 연락도 잘 안하는 걸로 한 순위 해요. 거절도 제법 잘해요. 그런데 중요한 순간에는 또 잘 들어주나 봐요. 안할 만도 한데 자꾸 하는 걸 보면.. 아마 누군가를 붙잡고 늘어져야 내 삶이 챙겨질 것 같던 그때가 지나고 보면 제일 좋았던 것 같아요. 지금은 다 내 맘대로 하는데도 재미가 없어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