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폴란스키다. 알라딘 서재 글 마실이 여행이라도 되는 것마냥 쏘다니던 때가 어언 옛날 얘기. 언젠가부터 처음과는 달리 이웃 몇 빼고 불특정 다수의 서재 글들을 잘 안 읽게 되었다. 시간이 없다. 대신 한겨레21 사이트도 가고 씨네21 사이트도 가고 칼럼도 읽고 사설도 읽고 기사도 읽으면서 비문학 읽기 수준을 끌어올리고 있다. 비문학 순서배열에서 꼭 한 문제를 틀린다. 맘이 급해서 후다닥 내 마음에 드는 답을 찍는가 보다. 다시 읽어보면 전혀 틀릴 만한 게 아닌데 자꾸 그런 현상이 벌어져서 속상해서 읽기 연습을 해서 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결론에 닿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읽는 게 아니고 '요점 찾기'다.
한자는 하루에 틈나는 대로 밥 먹기 직전이나 직후에 눈으로 쓰윽 읽기만 해도 읽을 수 있는 수준이 된다는데 그것도 귀찮아 죽겠다. 한자는 정말 너무너무 어처구니 없는 글자다. 일본어를 배울 때도(나는 중급 회화반까지 이수) 올라가면 갈수록 한자 때문에 미치겠어서 아는 언니가 한자능력시험 2급에 합격할 만큼 했다기에 시험접수까지 했는데 시험은커녕 공부도 제대로 못해서 아예 안갔다. 줄기차게 토익도 치러 다닐 때였는데 남의 나라 언어로 대체 뭘한 건지( '') 놀랍게도 언니는 세상에 단 하나 뿐인 독종이었고 나는 그냥 보통 사람이었으니 당연한 결과. 내 생각에 나는 국어를 (감으로도) 잘 하는 편이고 책도 비교적 속독하는 편인데 어째서 다른 것도 아니고 순서배열이나 주제 찾기에서 틀리는지 대체 나는 왜! 매일 사설 한 편을 정독하는 습관을 들이면 나아진다고 해서 우리 집에 네 개나 오는 신문을 종종 펼치지만 별로 좋은 기사는 없다.
어제는 이 세상이 너무 무섭고 겁난다며 중학생 딸을 학교에서 낚아채 집에 데려와서 자물쇠를 20개나 달고 4년이나 감금한 학대 엄마가 1면에 실렸다. 내가 보기엔 학대라기 보다 망상증인데 어쨌든 그 기사의 주제는 아동 학대로 이것 말고도 몇 개의 사례가 더 녹아있었다. 누가 엄마에게 돌을 던지리. 이만 하면 나는 얼마나 맘 편한지. 망상증이 그 엄마만의 것이라고 우기지는 못하겠다.
어쨌든 로만 폴란스키는 계속 되고 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나는 시킨다고 하지도 않는다) 안되는 글빨로 대작을 쓰려고 한 게 문제, 시간이 많이 흘러 나도 시들해졌다. 영화는 좋았는데 좋다고 잘 써지는 게 아니잖아. 그리고 중간에 홀려서 오드리 햅번 영화 보기를 실천할 뻔. 이건 오래된 꿈인데 어째서 지금. 제동을 걸긴 해서 [로마의 휴일]만 또 한 번 본다. 나는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로마가 내가 본 로마보다 더더더 백만 배 좋아. 스페인 광장, 트레비 분수, 진실의 입, 젤라또까지 전부 다! 그 영화를 보고 있으면 희망과 미래와 꿈과 행복 모두가 내 앞으로 걸어오는 듯한 느낌이 든다. 로마는 썩 낭만적인 도시가 아닌데도 불구하고(파리에 비하면!) 나는 지구상에서 로마가 제일 좋고 로마가 제일 대단하고 로마가 제일 로맨틱하다고 여긴다. 로마는 내 모든 것.(응?)
<오드리 햅번 영화 보기>는 전부터 [가십걸]의 세레나와 블레어가 세상에 둘이 전부였을 때(그러니까 둘 사이에 "남자"라는 것이 인생에 끼여들지 않았을 때) 일요일마다 브런치([섹스 앤 더 시티]에서부터 따라다니는 그놈의 브런치!)를 먹으며 하는 일. 나도 세레나나 블레어 같은 친구랑 해봐야겠다고 다짐했는데([청바지 돌려입기]는 싫다고 하니) 새삼 같이 할 친구가 없어ㅜㅜ 싫다고 박박 우기던 친구는 거제에서 일하고 있다ㅜㅜ
사실 "로만 폴란스키"는 만만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도 있고 스탠리 큐브릭도 있고 라스 폰 트리에도 있는데, 짐 자무쉬도 있고 빔 벤더스도 있는데 로만 폴란스키 정도면 우월하지! 대중에게 각인된 작품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보편적 스토리와 감성을 갖추었다는 뜻도 되니까.
그런데 [비터문]을 볼 때 예상과 달라지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직감하고는 출처 모를 압박에 짓눌리고 있다. 세상에, 주객전도 되었다.
'영상분석'은 카메라 기법을 공부하는 신문방송학과 전공과목이다. 그 학기에 내려온 과제는 영화 100편(50편?)을 보고 감상문을 쓰는 거였다. 학기 마치고 제출해야 하는데(그래도 이게 광고 카피 제출보다는 쉬웠다) 여기서 감상문은, 흔히 말하는 감상이 아니라 오로지 '감독'의 눈으로 카메라를 통해 보고 분석한 보고서를 말하는 것. 지금처럼 DVD도 흔하지 않아서 정해진 목록에 있는 고전영화를 매일 비디오 대여점을 들락날락 거리며 10개씩 빌려와 보곤 했다. 안 보고 그 숙제를 할 재간이 없었다. 그 당시 영화를 볼 때는(무려 극장엘 가도) 배우,내용,감독,배경은 다 뒷전이고, 항상 카메라 안에서 어떤 프레임을 만들어 내는지만 봤었다. 3개월간 영화 50편이면 이틀에 한 편은 영화 보고 분석하고 정리해서 보고서를 만들어야 한단 얘기다. 그래도 그때는 재밌기만 했는데!
드디어 [차이나타운]이다.
3. 차이나타운 (Chinatown, 1974)
나라마다 존재하는 "낡고 퀴퀴한 냄새가 날 듯한 낮은 곳"의 이미지를 지닌 차이나타운 어느 곳에서 일어나는 휴머니즘 영화일거란 기대는 완벽하고 처절하게 무너져내렸다. 거기다 런던에서 들렀던 차이나타운의 이미지가 희미하게나마 남아있어 멋대로 그은 선이 있건만 그것들이 뭣도 아니게 되어버렸다. 두 시간 약간 넘는 러닝타임 중 절반을 지루해, 재미없어, 하면서 어떻게 끝까지 봐야할지 난감해 시간을 죽이다 마침내 세 번인가 네 번 끊어서 보는 기염을 토했다. 비로소 엔딩자막이 오르자 대견한 마음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 것도 기대한 것 없다 생각했는데 뒤늦게야 고요하고 강렬한 반전이 휘몰아쳤다. 아, 마지막 10분의 폭풍 감동을 위해 두 시간의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왔구나. 지루함에 몸이 뒤틀리던 순간이 있었는지 기억하기 어려웠다. 이야기는 후반부에서 폭발한다. 예상도 못했던 훌륭한 비밀이 들통나면서 초반의 손해본 감정을 모두 보상 받는다.
[차이나타운]은 느와르 분위기가 물씬한 탐정영화다. 뻔한 분류지만 초반의 지루함, 공간적 배경이 차이나타운인 것, 어둡고 퀴퀴하고 마초적인 분위기까지 단번에 설명할 수 있어 일석삼조다. 왜 그토록 지루했었는지 알 것도 같다. 주먹다짐 혹은 음모와 배신이 난무하는 남자들의 뒷골목 세계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적응 못한 채 질척거렸던 거라고 스스로 진단했다. 너나할 것 없이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어야 성립되는 시뻘건 복수가 꿈틀대는 화면이 싫어서 보기를 그만둘까 망설였다는 것도 알았다. 본격적 스릴러도, 공식에 걸맞는 탐정영화도 아니지만 [차이나타운]은 느와르,액션,스릴러,미스터리를 포용하는 드라마였다.
어느 부인이 사립탐정 기키스를 찾아와 남편이 외도하는 것 같다며 뒷조사를 부탁한다. 기키스는 수력발전소의 임원을 맡고 있는 멀레이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는데 놀랍게도 진짜 부인(에블린)이 찾아와 의뢰인이 가짜 부인이었음을 알린다. 멀레이에게 사귀는 여자가 있었다는 흥미로운 사건을 파헤치던 찰나, 멀레이가 시체로 발견된다. 익사 상태에서 발견되는 바람에 자살인지 살인인지 소문만 무성했는데 댐의 물을 방류하는 문제로 발전소에서 누군가와 트러블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반대측 의견을 가진 누군가가 살해한 거라 의심하기 시작한다. 멀레이와 에블린의 아버지 크로스가 예전에 동업자였다는 사실에 그를 찾아갔지만 멀레이의 숨겨진 여자를 찾아달라는 부탁만 듣는다. 그즈음 기키스는 어렵지 않게 발전소 동료에서 부인 에블린으로 살해용의자를 옮겨버린다. 탐정놀이는 서서히 무르익어가고 점점 진실에 다가서는 듯하지만 여전히 감감무소식이다.
단서는 수두룩하지만 어느 곳에도 단서 아닌 것이 없기에 단서다운 단서를 찾지 못하고 있는 기키스에게 미망인이 되어버린 에블린은 그저 여인일 뿐이다. 기키스는 에블린의 도발적 아름다움에 잠시 홀린다. 짧은 홀림. 진실은 거침이 없다. 사랑이라 느낄즈음 에블린을 따라간 어느 집에서 멀레이의 애인인 캐서린을 보고는 에블린을 다그치기 시작한다. 놀랍게도 캐서린은 에블린의 동생이다. 숨겨진 비밀의 크기가 워낙 커서 당사자인 에블린조차 숨기려 했던 이야기는 딸이자 동생인 캐서린을 아버지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차이나타운의 사립탐정 기키스는 비로소 차이나타운에서 시작한 탐정놀이를 마친 후 다시 차이나타운으로 돌아간다. 차이나타운은 비열하리만치 슬픈 곳. 별 뜻 없어보이던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차이나타운의 거대하고 다양한 담론, 그만큼 믿기 힘들고 질척거리는 삶. 웃음보다는 비극을 팔아야 살 수 있는 삶. 무겁게 들고 있어도 결국 내려놓게 되는 것. 에블린의 삶을 애도할 겨를 없이 되돌아가는 기키스의 발빠름에서 희열 아닌 슬픔이 느껴진다. 아버지의 욕심에 의해 남편을 잃었고, 딸을 지키려 애쓰다 목숨 마저 놓아버린 에블린.
차이나타운에서는 없는 일 빼고는 모두 있을 수 있다. 없는 일을 뺐는데 어떻게 모두냐고? 거기엔 모든 것이 배어 있다. 밑바닥 삶부터 희망 잃은 꿈까지, 없는 게 없다. 없는 게 없다는 것은 없는 것만 없지 있을 것은 모두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비열하고 질척하고 남루하더라도 그곳은 누군가 목숨 다해 살아가는 곳이다. 그래서 살아숨쉬는 곳이다. 노래가 떠올랐다. "난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중락) 언젠가 나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수 없죠 내 삶의 끝에서" 이 노래, 한 번도 진지하게 들린 적이 없었지만 비로소 날아오른다는 것이 말로만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차이나타운]이 단 한 번도 희망이나 웃음을 얘기한 적이 없기에 비극과 절망에 가슴 벅찼다. 쉽진 않지만 어렵지 않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오묘하게 안심시키는 힘조차 감독의 의도 아니 역량이었을까.
4. 테스 (Tess, 1979)





나는 어쨌거나 세계문학전집 = 민음사 ,
라고 아직도 생각하는 1인이라서 다양한 전집에 별로 관심이 없다.
로만 폴란스키에 대한 단상
미성년 그것도 열세살짜리 소녀와의 섹스스캔들(이라고 해도 강간, 이건 본인이 인정하고 도피생활했던 경력), 임신 8개월의 아내가 [악마의 씨]라는 영화에 의해 비방 당한다 생각했던 찰스 맨슨의 추종자들이 인종범죄를 꿈꾸며 저지른 일에 무참히 살해당한 일 같은 무성한 스캔들(또 있다, 로만 폴란스키는 참 많은 것을 겪은 사람)을 견디고도 영화감독으로서는 최고의 위치에 오른 이제 노장의 예술가다. 영화를 선별할 때 비교적 너무 오래된 영화는 보기 힘들 것 같아 뺐더니 초기작들이 많이 빠졌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혐오]나 [궁지] 같은 건 따로 챙겨봐야겠다고 결심. (몇백만번째 결심인지!)
나도 편견에 자유롭지 못한 별볼일 없는 사람이라서 작가나 감독, 배우가 보여지는 직업으로 살아갈 때 자신이 겪고 느낀 것을 부정하거나 꾸준히 감추기란 굉장히 힘들 것 같다고 생각한다. 부러운 직업이지만 그래서 감히 꿈꾸지 못한다. 나를 온전히 내보이는 것과 그러고도 숨겨야 하는 것과 남은 것을 신비로움으로 간직하는 것 또 보여주는 것이 삶을 짓누를 거라고 생각한다. 상이나 인정, 칭찬 그런 것은 인색하거나 내 영역을 벗어나 존재하는 직업군. 그래서 영화는 위대하나 개인적 부도덕함에 대한 비난을 피해갈 수는 없는 거라고 생각하며 미숙한 인간인 나도 종종 비방을 보탠다. 그래도, 그래도 영화 만들어줘서 정말 고마워요.(갑자기 높임)
토머스 하디의 [테스]는 정말로 꼬꼬마(유치원 때나 초등 저학년) 시절에 읽었다. [하이디]도 읽고 [마리 앙투와네트]도 읽던 바로 그 시절에.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도. 방문판매가 성행하던 시절, 누군가 좋은 책을 소개하러 오면 엄마는 동화,자연,과학,위인전 가리지 않고 꼬박꼬박 사줬다. 내가 조금씩 크면 그걸 팔아 새로 나온 전집을 또 사줬고 그래서 남은 게 고등학교 때부터 가지고 있던 지금의 70권짜리 한국문학,세계문학 전집이다. 여기 웬만한 건 다 있어서 대학 때 되게 편했다. 오래된 전집이 여전히 책장 몇 칸을 지키고 있는 건 따스하다.
아마 책이 좋은 지도 몰랐던 시절에, [소공녀] 동화책을 엄마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주던 시절에 난 소공녀 만큼이나 테스의 운명을 슬퍼하며 읽고 또 읽으면서도 이게 성인 소설이라고는 생각을 안했던 것 같다. 야한 장면이 나오면 그냥 좀 재밌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후에 다아시가 나오는 [오만과 편견]과 히스클리프가 나오는 [폭풍의 언덕]을 내처 읽으면서 [테스]도 그저그런 연장선상에 놓인 애정소설이라고 생각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이 그렇고 샬럿,에밀리 자매가 그렇고. 내 기준에서 애정소설은 문학성을 따지기가 싫은 것이다.(로렌스나 사드 같은 작가)




가끔은 아무 생각 안해도 되는 애니를 한 편씩 보는 중.
[테스]는 내게 여전히 [폭풍의 언덕] 보다는 못하고 [오만과 편견] 보다는 나을 것이다. [차이나타운]의 마초들은 싫지만 광기어리고 제멋대로인 히스클리프는 좋으니까. 하병무의 [남자의 향기]에는 [테스]를 함께 읽는 선생님과 제자의 사랑 이야기가 나온다. 초등학교 때 실화를 다뤘다는 [남자의 향기]의 폭풍인기가 대단했고, 그건 명백히 애정소설인데 초등학교 때 읽었다. [퇴마록]도 그보다 더 어릴 때 읽으면서 바들바들 떨었는데 그러고보면 우리 집에는 어릴 때부터 책이 참 많았다.
[테스]는 BBC 드라마 버전의 [더버빌가의 테스]가 있고, 로만 폴란스키의 [테스]가 있다. [테스]의 여주인공(나스타샤 킨스키)을 주연으로 발탁하는 조건으로 영화 찍는 내내 성노예로 부렸다는 로만 폴란스키에 대한 소문은 공공연했다. 여주인공이 엄청 이쁜데 나라도 애가 탔겠다. 연약하고 하늘하늘하고 후- 불면 푹- 쓰러질 듯한 보호본능을 부르는 몸매에 앙탈까지 부리는 성깔있는 여자가 어찌 탐나지 않을까.(로만 폴란스키든 극중 더버빌이든!) 내가 송윤아와 결혼한 이후의 설경구가 나오는 영화를 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로 로만 폴란스키가 싫을 수도 있겠다. 감독을 둘러싼 무수한 스캔들을 무시할 수도 없고, 작품과 연결시키지 않을 수도 없다. 하지만 영화에 대해 쓰기로 한 동안 모든 것을 깨끗이 잊었다.
테스 역의 여배우 나스타샤 킨스키는 진짜진짜진짜진짜 엄청 예뻤다.(내가 좋아하는 영화 [파리, 텍사스]에도 나온다) 예쁘다고 말하는 기준이 각자 다르다는 건 알지만 [테스]가 1979년 작이고, 이 여배우가 1961년 생이라면 당시 열아홉 살. 지금 화면으로도 이렇게 예쁘다면 이 미모는 가히 내 기준에서 오드리 햅번을 능가하는 외모다. 제대로 잘 늙었는지는 모르겠다. 기억이 안난다. 나스타샤 킨스키는 '테스' 역으로 세계적 스타덤에 오르게 되면서 골든 글로브 신인 여배우 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이후 그녀의 연기인생과 활동이 퍽 대단했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소문 때문일 수도 있고, 불운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테스는 몰락한 가문의 후손인 아버지의 뜻대로 가난한 집안형편에 도움이 되기 위해 먼 사촌뻘 되는 부자 더버빌 가의 하녀로 보내진다. 예쁘고 단정하고 날카롭고 앙탈까지 부리는 테스의 아름다움에 반한 주인 아들 알렉은 장미 한 송이로 유인하고 말에 태우고 달리기를 반복하다 질리자 품안에 들어오지 않는 그녀를 강제로 범하고 만다. 알고보면 가문을 돈주고 산(납속책,공명첩도 아니고!) 이 집안은 테스와 아무런 연관도 없다. 테스는 수동적이고 연약한 여성으로 그려지지만 이때만은 단호하다. 이대로 더이상 이 집에 있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에 돌아가려 하지만 쉬울 리 없다. 그녀는 돈을 벌어 집안에 보탬이 돼야 하니까. 그래서 고향의 목장에서 소 젖 짜는 일을 도우며 돈을 벌기로 한다. 동네 목사 아들 엔젤은 날마다 나무 위에 올라가 아름다운 악기를 분다. 온 마을의 공기를 감싸는 감미로운 음악에 모두가 안락하고 황홀하다. 어리지만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순결한 테스에게 호감을 가진 그가 청혼하자 테스는 받아들인다.
줄거리를 세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결혼 첫 날, 순결에 관한 문제로 테스와 엔젤은 다투고, 테스의 과거에 분노한 엔젤은 브라질로 떠나버린다. 여전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테스는 구애하는 알렉에게로 가서 부유한 삶을 바라지만 뒤늦게 이렇게 된 것 모두가 알렉 때문이라는 원망을 주체 못하고 그를 칼로 찌른다. 방해꾼을 물리치고 서로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깨달은 테스와 엔젤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았다, 로 끝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 아.. 순결 이데올로기! 이 닳고 닳은 남자 다르고 여자 다른 도덕성의 잣대에 대해 토론하자면 귀찮으니까 일단 여기서 마무리한다. 여성성과 남성성, 사회가 정한 성별에 대한 도덕성의 기준을 학습시키는 19세기 말 영국에서 탄생한 [테스]가 지금 우리가 가진 성별에 대한 이데올로기와 별 다를 바 없어서다. 순결을 도덕성과 착각해서는 안 되고, 순결이 곧 여자라는 등식도 성립될 수 없다.
혼자 사는 친구는 엄마가 일찍 들어가라, 왜 외박했냐고 하면 종종 되받아쳤다. 서른이 다 되어가는 딸이 외박 좀 한다고 세상 무너질 것도 없고 안 될 것도 없잖아. 맞는 말. 서른이 되어가는 여자가 밤을 어디에서 보낼 지는 엄마가 아니라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외박하는 게 무서운 게 아니고 외박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 더 무서운 거야, 엄마. 독립한 지 꽤 오래된 친구는 엄마 딸인 건 맞지만 내 시간은 내 것이라는 독립성 짙은 규칙들을 고수했고, 엄마와도 나누기 싫어했다. 서른 된 여자가 밤을 어디에서 보낼 지 선택하는 건 축복이지,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순결 이데올로기는 없다. 엔젤은 목사의 아들이고 신학을 오랫동안 공부한 것도 맞고 형제들 모두가 같은 길을 걷는 와중에 그만은 좀 다른 교리로 세상을 보려 한다. 그래도 조금은 깨어있는 사람일 것. 하지만 그는 망설이고 망설이다 터뜨린 테스의 과거를 용서하지 못한다. 순결을 잃은 것이 용서받아야 할 과거일까. 그런 시대가 있었던 것도 그런 시대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알지만 여자에게만 고수되는 원칙이 불공평하다. 아, 내가 만나는 상대가 순결했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품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여기서 말하는 순결의 의미는 보통의 순결과는 좀 더 다른 문제로.
예쁜 화면과 고즈넉한 분위기로 고전 내음을 물씬 풍기지만 예나 지금이나 [테스]는 불편하기만 하다. 그녀는 좀 더 사랑 받으면서 훨씬 더 행복할 권리가 있었다. 영화 [황무지]의 커플은 두 사람의 만남을 반대하는 여자의 아버지를 죽인 후 트렁크에 싣고서 자가용을 타고 빙빙 돈다. 총을 장전하고 나무에 집을 짓고 아무데서나 사랑을 나눈다. 그들은 때로 짐승 같다. 테스와 엔젤이 알렉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 다녔다면 이 영화 속 키트와 홀리 같았을 것 같다. 순순히 자신이 갈 길을 가는 테스의 마지막을 지켜줄 수 있는 빛나는 가치는 무엇일까. 오래도록 생각해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